낡은 냄비 속에서

8회차, 해일 님

B에게 by H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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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 써야 하는데

시가 안 써져요 선생님, 저, 시 다운 시라고는 한 줄도 못 쓰겠어요 어떤 문장도 마음에 들질 않아요 시는 어떻게 쓰는 거죠? 저는 글렀나 봐요 글이라곤 한 줄도 나오질 않으니 글러먹은 게 틀림 없죠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어쩌면 평생

못 해 먹겠어요

다 못 해 먹겠다고요

나는 시간도 돈도 쓰는 법을 모르는데

그래서 시간은 죽이고 돈은 새는데

글은 오죽하겠어요 글도 나한테 쓰이고 싶지 않을 걸요

나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잖아요, 좀 보라고요, 먼지 쌓인 이력서들을

풀이 없어 밥풀로 붙인 직사각형의 증명사진을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왜 엄마를 닮았냐고요

하얗고 둥근 저 이마선이 똑같지 않냐고요

나는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다고요

한 문장도 용인할 수가 없다고요

왜 삶이 자꾸 닮는 거냐고요

삶은 왜 삶이냐고요

나를 물 속에 넣고 푹 끓여서

삶은 삶인 거냐고요

눈물 속에 넣고 끓일 거냐고요

여름이라서 그러냐고요

절 삶아서 뭐가 우러나오냐고요

절망인가요?

절명 아니고?

눈물을 흘리자니 눈이 시려서

시를 쓰자니 이젠 손이 시려서

다 못 해 먹겠다고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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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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