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하나됨

내가 그 오래된 벽돌 학교에 있었을 때 가르침받은 말이 하나 있다.


‘한 번의 반짝임으로는 목표를 잃고, 두 번의 반짝임으로는 은신처를 잃고, 세 번의 반짝임으로는 목숨을 잃는다.’


저격수의 반사광에 대한 이야기다. 조준경을 사용하는 우리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그러니까 필연적인 살인의 예고. 제아무리 눈덩이를 문 채 숨을 가리고 이파리를 덮어 몸을 숨겨도 태양과 달이 뜬 한 피할 수 없는 것이 반사되어 빛나는 흔적이었으므로.


훌륭한 저격수는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교묘하게 이용해 제 이득으로 되돌릴 뿐.


기실 내가 천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아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으나—그 정도로 만족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도 넓다는 사실을 나는 일찍이 깨달았기에. 그러므로 내가 ‘훌륭한 저격수’의 기준에 부합했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나는 쉼없이 반짝였고 살아남았다.


끝끝내 나의 이름이 그 빛의 파편으로 변모할 때까지.








전장의 겨울은 가혹하다. 나의 고향만큼은 아니었으나, 평원 지대 특유의 살을 에는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내심 겉옷을 한 장 더 가져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길어지는 전쟁은 많은 것을 동반했다. 더욱 예민해진 동료들의 신경과 쉼없이 향하는 의심 가득한 시선 따위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것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낡아빠진 담요와 결리는 어깨로, 내가 다시금 저격총을 든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났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다시금 바람이 분다. 저격수의 은신처가 낮게 울었고 나는 몸을 떨었다. 적합한 목표를 찾기 위해 조준경은 총신 위에 안착한 채였다. 설령 이로 인해 내 위치가 발각된다 해도 문제는 없었다. 다른 저격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닌 이상 최우선으로 하달받은 명령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선으로 봉우리와 능선을 하나씩 훑었다. 몇은 이미 수색이 끝난 뒤였다. 몇은 이미 처리된 뒤였고, 몇은 아직 위험이 남아 있었지만 작금의 상황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다음, 그리고 그 다음. 가능성으로 남은 적과 아군을 가늠하며 수색을 끝마치던 무렵 시선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은신처였다. 다소 조악했지만 오히려 그 불완전함이 그것을 눈에 띄지 않게 했다. 지지대는 단단했고, 저격수가 무기를 내밀 공간과 긴장을 풀 공간도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내가 단 한번도 발걸음하지 않은 지역이었으므로 저것이 아군일 가능성은 없었다.


위험 요소를 발견한 저격수가 취할 수 있는 행동에는 둘이 있다. 상부에 보고하거나, 자체적으로 처리하거나.


나는 후자를 골랐다.


은신처에는 아직 엉덩이를 붙인 저격수가 없는 성싶었으나 만일 그가 무기를 들어올린다면 먼저 발견한 이쪽의 승리였다. 어렸을 때 눈 덮인 설원에서 사냥을 나갔을 때처럼, 나는 지독한 피로를 느끼면서도 숨죽여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모포가 들춰졌고 저격수라기에는 덩치 큰 자가 몸을 구겨 자세를 잡았다. 나는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족히 어깨까지는 길러 묶은 검은 머리카락, 설원을 나다니기에는 지나치게 어둔 피부. 우뚝한 콧날과 복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입. 그리고 밤색 눈. 아, 그 따스한 밤색 눈.


나는 어째서 그 누구보다 익숙한 얼굴이, 태어난 이후 나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보다도 더 자주 마주했던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네가 그 편지를 받았더라면 이곳에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내려지는 결론은 하나였다. 너는 내가 왜 너를 떠났는지를 모르는 채다. 나의 지리멸렬한 사과와 감사와 사랑의 이야기는 네게 닿지 않았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편지와 사랑과 우리의 부재가 너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몸이 굳었다. 잇몸이 저렸고,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다. 그러는 사이 그는 설탕을 좇는 개미처럼 공간을 더듬어 나의 위치를 탐색하고 있었다. 뜻밖의 인물이 불러온 반가움은 어느새 구토감으로 변모한다. 알고 있었다.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총구가 내게 다가온다는 잔인한 현실만이,


내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 자리를 빌어 묻겠다.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나의 분신, 나의 혈육을 향해 기꺼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겠는가? 숨이 가슴에서부터 막히는 감각을 아는가. 애써 묻어 놓았던 울분과 분노와 비탄이 다시금 터져 나오기는커녕, 뱃속 깊은 어딘가로 가라앉아 버린 기분을 아는가.


안대도 모른대도 상관 없다. 당신은 내가 아니니까.


조준경 너머의 그가 시선을 좁힌다. 다시금 이쪽에서 반사해 쏘아보낸 빛을 포착했는지 어느덧 총구는 나와의 완벽한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천 개의 고드름을 삼킨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내가 그를 발견하였듯 그 또한 나의 위치를 앎이 확실한데, 온몸이 마비되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방아쇠에 손을 올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어쩌면 찰나였을지도 모른다. 문득 나는 귀가 무척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알에는 소리가 없다.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이 녹기 시작한 것은 그 뒤였다. 엄청난 작열감, 핑 도는 머리,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고통. 왼쪽 뺨이 점차 축축한 무언가로 젖어갔다. 입 안으로 흘러들어온 액체는 짜고 비렸다.


훌륭한 사수로 자랐구나. 비록 네 스승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이마를 향한 총구를 치우지 않은 채, 눈까지 흐르려는 피를 닦아 문지르며.


나는 나보다 조그맣던 머리통을, 이어 나를 끌어안던 따스한 손을 떠올렸다. 사소한 실수로 어머니와 아버지께 내리 혼난 뒤 펑펑 쏟던 그 눈물을. 얼굴을 닦고 안아 달래줄 때면 들리던, 사실은 누나가 최고로 좋다고 속삭이는 아이의 고백 또한.


어머니께 처음 총을 선물받았을 때 높아지던 아이의 목소리와 반짝이던 그 눈빛. 드디어 누나를 따라잡을 수 있겠다며 외치던 탄성. 결국은 내게 사격을 배우면서도 기운을 잃지 않던 장난스러운 농담과, 성과를 자랑하며 자부심에 차 쌜룩거리던 뺨과 어느새 나보다 커졌던 키와 짧게 흔들리던 고수머리와 희미하게 나던 흑색 화약의 향과…….




웃음을…….




무구하던 그 웃음을 떠올렸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부드러웠다. 본디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몸은 자연스레 움직였다. 어쩌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도 몰랐다. 한기에 얼어붙은 손이 멋대로 움직였을 수도, 죽음의 공포에 마비된 머리가 최후의 발악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어떤 것이 나를 움직였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반동 때문에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하고, 조준경에 다시금 눈을 대자 나를 마주한 것은 쓰러진 저격총이었다. 흐려진 눈을 두어번 깜빡여 초점을 맞추었다. 곧이어 붉게 물든 저격수의 은신처가, 기묘할 정도로 천천히 무너지는 인영이 보였다. 긴 검은 머리칼이 그가 쓰러지는 궤적을 반 박자 늦게 뒤따랐다.


그 뒤로는 잘 모르겠다. 그저 문득, 쓰러질 때의 모습을 보건대 그가 머리를 길렀다는 사소한 사실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다리가 굳어 거의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제법 오래 기다렸던 것 같다. 어쩌면 그가 다시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바랐는지 바라지 않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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