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는 편지

(뒤나미스—바라고 소망하는 마음만이 힘이 되는 공간, 그 어딘가. 군데군데 불탄 편지가 바닥에 놓인 채다.)


(편지는 정갈한 필기체로 쓰여 있다. 그의 글씨를 본 적 있는 자라면 익숙할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레비에게,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나는 이미 제국을 떠난 뒤겠지.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네게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내 실책이야. 우리 아버지의 병과, 내가 얻고자 하는 자유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몹시 편찮으시다.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 때문에 앓고 계시지. 나는 그런 아버지의 병세를 악화시키는 것이 이 가정, 더 나아가 이 나라라 판단하고 특단의 조치를 내린 거야.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많이 놀랐겠지. 물론, 지금까지 괜찮은 행세를 한 점에 대해서는 다시금 사과하고 싶다. 하지만 너를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어. 너는 내가 아껴 마지않는 나의 아우, 피붙이, 혈육이잖아. 그 싸늘한 저택 안에서 서로만이 서로를 이해하던 나날을 기억하니? 어머니의 독재가 응접실을 넘어 우리 침실을 지배할 즈음, 나의 사소한 고충은 잠시 숨겨 두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 뿐이야. 너만큼은 더없이 자유롭게 자라나기를 바랐거든.


그리고 너는 나의 마음에 훌륭히 부응했어.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눈을 빛내는 너를 보며 내가 얼마나 대견함을 느꼈는지 너는 모를 테다. 아버지 또한 너를 자랑스러워하셨고, 심지어는 어머니의 성에도 차지 않았니. 네가 해낸 거야. 충분히 보람을 느껴도 돼.


다만 염려되는 것이 있다면 어머니와 너의 관계구나. 어머니는 제 손에 넣은 것을 쉬이 보내지 않는 분이시니 네게 집착의 화살이 돌아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레비, 잊지 마. 바다의 선원과 제국의 독수리 아래에서 태어난 너는 그 누구보다 강인하다. 고달픈 나날이 될 테지만 평소처럼 행동하는 것을 잊지 마.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나날은 우리의 어머니를 다시금 무디게 만들 테니까, 잊으면 안 돼.


그러니 레비, 부디 너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우리 걱정은 하지 말렴.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길은 분명 험난하겠지. 하지만 그만한 대가에 상응하는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야. 아버지도 나도 제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어머니와는, 더더욱.


그러나 만에 하나, 혹여라도 너 또한 푸르게 얼어붙은 땅을 떠나고 싶거든 외눈박이를 통해 연락하렴. 우리 집에 간혹 드나들던 부랑자를 기억하지? 그가 내게 비공정에 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줬어. 그라면 믿을 수 있으니, 너를 제국에서 빼내올 수도 있을 거야.


어느덧 동이 트는구나. 시간이 촉박하니 이만 편지는 줄이겠다. 다시 한번 네게 사랑을 담아,


(이 뒤는 불에 타 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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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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