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현자]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마호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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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올려 창밖을 확인하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아, 완전히 푹 자버린 것 같은데. 정수리로 들이치는 겨울 햇살이 뜨끈했다. 온몸에 휘감긴 이불이 걸리적거리는 걸 잠시 내버려 두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뭐지? 별안간 찾아온 깨달음에 화들짝 놀란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낯선 천장이다.
그리고 낯선 방이다.
어라? 여긴…… 어디지? 아직 잠에 취한 것처럼 멍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녹색을 기조로 한 인테리어와 높은 책장, 그리고 선반과 책상 위에 줄지어 늘어선 술병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음…… 생각보다 낯선 곳은 아니었네.
그런데, 내가 왜 피가로의 방에 있는 거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고 있는데 방 한쪽 구석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로 깜짝 놀란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커튼이 없는 방은 한낮의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어 사각지대라곤 없었고, 이윽고 나는 웃음소리의 주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피가로…….”
“아하하. 현자님, 좋은 아침. 아니지. 좋은 오후라고 해야 맞을까?”
“오후겠네요……. 그보다 어떻게 된 건가요? 왜 제가 여기에……?”
“싫다아, 현자님. 벌써 잊어버린 거야? 어젯밤 일…….”
“네?!”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하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걸어오기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자니 침대 헤드에 등이 쿵 닿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일단 급한 대로 이불이라도 끌어당겨 눈만 빼꼼히 내놓고 뒤집어 썼다. 우스꽝스러운 꼴일 것이 분명한데도 피가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 코앞까지 다가와선 턱 하고 침대 헤드에 손을 올렸다. 꿈질거리며 반대편으로 움직였더니 다른 손마저 뻗어와 두 팔 사이에 나를 가둔다. 우수에 젖은 잿빛 눈동자를 내게 고정하고선 과장되게 그윽한 시선을 보내와, 뻔한 장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코끝이 간질거렸다.
“피가로. 잠시만요. 이러지 말고 대화를……”
“현자님……. 정말 기억 안 나? 어젯밤에 말야,”
“어, 어젯밤에?”
“내 방에 찾아왔잖아…… 재워 달라고.”
“………….”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까. 헛소리를 들었더니 냉수를 맞은 것마냥 삽시간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긴장 대신 의심으로 가득 찬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뻔뻔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제가 그랬단 말인가요?”
“여기 현자님 말고 누가 있을까?”
“제가 먼저 찾아온 게 아니잖아요. 복도를 걷고 있는데 피가로랑 마주쳐서…… 아.”
말하다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돌아왔다. 어젯밤, 마법사 숙사에서 벌어진 크리스마스 파티는 새벽이 깊어가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눈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가 이미 저녁이었으니 늦어진 건 당연했지만, 오랜만의 파티를 즐기려는 마법사들은 자정이 넘어가는 데도 잠을 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졸음에 먼저 자러 간 마법사들도 있었고, 나 또한 그들 사이에 섞여서 방에 들어온 참이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미스라가 내 침대에서 잠들어 버린 탓에 그만 잘 곳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색색 숨을 몰아쉬며 잠에 빠진 미스라의 눈 밑에 진 그늘을 보자니 안타까운 마음에 차마 깨울 수가 없었고…….
나는 마음 속으로 그가 푹 자길 기도하며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걸었다. 아직도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몇 남아 있는지 층계참으로부터는 이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어쩐다. 밖으로 나온 김에 저 파티 무리에 다시 들어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러기엔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던 졸음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자고 싶은데……. 빈 방이라도 써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라. 현자님? 아직 안 잤어?’
‘피가로.’
저만치서 키가 큰 실루엣을 마주해 긴장한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훅 마음이 놓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늦었는데. 착한 아이는 잘 시간이야. 산타클로스는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준다며.’
‘저도 자고 싶어요……. 그런데 미스라가 제 침대에서 잠들어 버려서요.’
‘미스라가?’
졸음 탓에 맥락이 없어진 내 말에도 피가로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한 듯 빙긋 웃었다.
‘그거 큰일이네. 침대를 뺏겨서 잘 곳을 찾고 있던 거야?’
‘네……. 빈 방을 써도 괜찮을지 생각 중이었어요.’
‘그럴 필요 없어.’
‘네?’
‘내 방으로 와, 현자님.’
……그래. 그렇게 된 거였다. 평소였다면 사양햐고도 남았을 제안이지만 점점 더 깊어만 오는 잠기운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지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고, 피가로는 눈에 띄게 반색하고선 나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대로 나를 침대에 눕히고선 이불까지 덮어주는 모든 동작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나는 반박할 구실조차 찾지 못하고 그만 피가로의 침대에 누운 꼴이 되어 버렸다. 커튼 없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달빛을 신경 쓴 것인지 마법으로 방의 조도까지 낮춘 그는 나를 돌아보고 웃으며 잘 자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막상 다른 사람의 방에 누워 있자니 마음 편히 잠들기가 영 쉽지 않았다. 그 방의 주인이 옆에 의자까지 끌고 와서 앉아 있으니 더더욱.
왜 사람이 자는 걸 옆에서 지켜보려는 걸까……. 어쩐지 민망해져 말똥해진 눈을 깜빡거리며 쳐다봤더니 무릎에 팔꿈치를 얹은 채 턱을 괴고 있던 피가로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왜 그래? 누우니까 잠이 안 와? 마법으로 잠들게 해 줄까?’
‘아, 아니요. 그건 사양할게요…….’
‘불편해 하지 마, 현자님. 여기서 자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 내 방도 자주 와 봤고.’
그야 그렇지만……. 이불 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나는 다시금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의사인 피가로는 환자들을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돌보는 일이 가끔 있었고, 나도 한두 번 그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환자로서 침대를 빌리는 것과 이건 좀…… 다르지 않나? 내가 자라는 잠은 안 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문득 피가로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거 위험하네.’
‘네? 뭐가 말인가요?’
‘현자님이 말이야. 자꾸 그렇게 쳐다보니까…….’
‘쳐다보니까? ……아니에요. 더 말하지 마세요.’
질색하며 얼른 등을 돌리고 누웠더니 어깨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고 끊임없이 이런 장난을 걸어온다. 내 반응이 재미있는 걸까…….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자니 천천히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짧은 침묵이 공간을 가르고, 이내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로 흘러들었다.
‘잘 자, 현자님.’
그 목소리에 마치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까무룩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아. 이제 전부 기억난 모양이네, 아쉬워라.”
내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피가로가 항복했다는 듯 두 손을 들며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벌어진 거리에 나는 겨우 한숨을 내쉬며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아…… 그렇지. 인사가 늦었지만…… 침대 빌려줘서 고마워요, 피가로.”
“뭘. 언제든지 필요하면 말해, 현자님.”
“아뇨. 가능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려놓으며 슬리퍼를 신고 일어나는데 문득 피가로는 어디서 잔 걸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잠옷 위에 걸치고 왔던 겉옷을 집어들다가 급히 돌아보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기, 피가로는 어디서 잤나요?”
피가로의 입에 걸려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이 열리기 전에 나는 먼저 말했다.
“못 잤군요. 제가 침대를 차지하는 바람에……. 미안해요, 피가로.”
“잠깐만, 현자님. 내가 변명할 시간이라도 좀 줘.”
“둘러댈 생각 마세요. 못 잔 거 맞잖아요.”
“현자님, 나는 못 잔 게 아니라 안 잔 거야.”
“그게 그거잖아요…….”
“둘 사이엔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들어볼래? 있지, 네 잠든 얼굴을 보는 게 재밌어서 그만 자는 걸 깜빡했지 뭐야.”
“…….”
웃음기 어린 말투 속에 나를 향한 배려가 담겨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물론, 반쯤은 진심으로 재밌어 했을 게 틀림없다는 것도 안다. 내 자는 얼굴이 그렇게 재밌나?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하지만 내가 미안해 할 것을 알기에 이런 여유를 부리는 그에게, 나는 두세 번 더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대신 답례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오후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늦은 점심을 먹고, 햇살이 잘 드는 홀의 창가에 리케와 나란히 앉아 도감을 들여다보는 미틸과 가벼운 공부를 하다가, 새 붓을 시험해 보고 싶다는 루틸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기로 하고 다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색색의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사해진 나무 아래서 미틸과 리케가 나를 사이에 두고 앉자 레녹스가 우리 셋에게 어제 선물받은 곰인형을 하나씩 안겨줬다.
“그 편이 더 포근한 그림이 될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레녹스.”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스레 껴안고 머리 부근에 고개를 기대자 폭신한 감촉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만치서 붓을 내밀며 한쪽 눈을 감고 구도를 재던 루틸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가로 선생님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맞아요. 어디 가신 걸까요?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시는데.”
“아……. 피가로는 지금 자고 있을 지도 몰라요.”
“네?! 아직도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그를 깨우러 가려는 기세의 미틸을 얼른 진정시켰다. 나 때문에 밤잠을 못 잤을 거라는 해명을 들은 미틸은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현자님을 위해서였으니까요.”
“뭐해? 다들 여기 모여서.”
“아. 안녕하세요, 카인, 네로. 클로에랑 라스티카도요.”
어느새 주변에 다가온 마법사들 몇이 대화에 참여했다. 그들 모두와 함께 어제 파티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자니 느긋하게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곧 한참이나 그림에 집중하고 있던 루틸이 ‘다 됐다!’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선 달려왔다. 짠, 하고 우리 쪽을 향해 돌려 내민 스케치북을 보며……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건…… 그러니까…….”
“그…… 나무가 아름답네! 잎이 무성한 걸 잘 살려서…….”
“지금은 겨울이야, 네로…….”
“이 길쭉한 실루엣들…… 우리인 거지? 응, 알아볼 수 있어!”
“붓터치가 과감하고 시원하네. 개성이 살아 있어. 곰인형도 하나 하나 독창적이고 귀여운걸.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서쪽 나라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쏙 들어할 만한 멋진 그림이야, 루틸.”
겨울 눈을 녹이는 단비같은 라스티카의 칭찬에 루틸의 얼굴 위로 봄꽃이 피듯 화사한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가 참으로 눈부시고 행복해 보여서, 나도 아무려면 어때 싶어졌다.
“모두들, 날이 쌀쌀한데 밖에 오래 계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아니야, 하나도 안 추웠는걸. 재밌었어!”
“슬슬 들어가서 저녁 준비를 해 볼까. 뭔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아. 저는 사과 파이요, 네로. 달콤했으면 좋겠어요!”
“사과 파이 좋지. 오믈렛도?”
“좋아요!”
다 함께 왁자하게 웃으며 숙사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다가 나는 흘긋 시선을 돌려 피가로의 방 창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1층인데도 굳이 커튼을 달지 않는 그의 방 안쪽은 여전히 불이 꺼진 채로 어두웠다. 혹시 아직도 자고 있는 걸까……. 언제쯤 그의 방문을 두드리면 좋을지를 가늠하며 나도 얼른 모두의 뒤를 쫓아갔다.
* * *
똑똑. 손마디로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그 너머로 말을 전했다.
“피가로? 깨어 있나요?”
“아─. 응, 잠깐만 기다려─.”
다행히도 아직까지 자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혹여나 그의 잠을 깨울까봐 시간을 늦추고 늦추다 보니 자정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늦게 찾아온 데에 후회는 없었다. 챙겨온 것을 다시 확인하며 기다리는데 달칵, 하고 문이 열리며 평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어서 와, 현자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손에 든 것을 들어올려 보여주었다. 손바닥 만한 유리병과 그 안에 든 것을 바라본 피가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이건 뭘까, 현자님?”
“피가로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나한테?”
잠시 놀란 얼굴을 한 그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손짓했다.
“일단 들어와. 설마 산타클로스처럼 선물만 주고 가버릴 건 아니지?”
“산타클로스는 애초에 들키지 않고 몰래 왔다 가지만요.”
마주 웃은 나는 그를 따라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이쪽으로 앉아, 하며 가리킨 의자에 얌전히 자리하자 피가로는 책장과 선반을 향해 돌아서선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금세 어딘가에 숨어 있던 술잔 두 개와 주전부리가 둥실거리며 날아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술이나 차 없이 글라스만 꺼내놓는 그를 보며 나는 물었다.
“술잔만 꺼내도 괜찮은 건가요?”
“아. 현자님은 차가 좋아? 섭한걸. 이런 좋은 날에도 나랑 한 잔 해주지 않는 걸까나.”
“아뇨, 그게 아니라……. 마실 게 없잖아요.”
척척 걸어와 내 맞은편에 앉은 피가로가 하하 웃으며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유리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게 있잖아.”
“어?”
나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모았다.
“이게 뭔지 아세요, 피가로?”
“응,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어. 토끼 바텐더가 만들어 주는 사탕 칵테일이지?”
“와아…….”
관록이라는 건 역시 대단하구나. 새삼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피가로의 앞으로 유리병을 밀어 놓았다. 색색의 둥근 사탕이 담긴 유리병이 조명 아래서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아쉽지만 저는 레시피까진 몰라요. 알아도 마법을 쓸 수 없으니 소용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걱정 마, 현자님. 내가 알고 있으니까.”
“레시피를요?”
씩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그가 유리병을 열어 보라색 사탕을 하나 꺼내 내 앞에 놓인 잔에 넣었다. 또르르, 맑은 소리가 울리고, 자신의 잔에는 연한 녹색 사탕을 넣고선 유리병을 닫는다. 두 잔을 끌어당겨 나란히 놓은 피가로는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폿시데오>.”
퐁. 사탕 두 개가 나란히 쪼개지며 안에서 같은 빛깔의 액체가 퐁퐁 샘솟았다. 사탕의 부피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쏟아낸 뒤 남은 테두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액체 위를 둥실 떠다니다가 이내 스르르 녹아 형체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광경에 조금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휘둥그런 눈으로 거품을 쏘아올리는 칵테일을 바라보고 있자니 피가로가 작게 웃으며 내게 잔을 건넸다. 자수정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칵테일이 넘실거리는 잔을 받아들고, 피가로의 손에 들린 라임색 칵테일 잔과 가볍게 부딪쳤다.
“늦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건배.”
“건배.”
살짝 입술을 대고 머금은 칵테일은 미스라가 권해줬던 것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똑같은 보라색 사탕이라서 같은 맛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건 블루베리에 더 가까운 달콤함과 새콤함이 있었다. 아주 약하지만 희미한 알코올의 기운도 느껴졌다.
“맛있어요! 눈 시장에서 먹었던 보라색 사탕이랑은 다른 맛이라서 신기하네요.”
“눈 시장에서도 보라색 사탕을 먹었었어?”
“네, 뭘 고를까 고민할 새도 없이 미스라가 골라 준 거지만요.”
“저런. 미스라는 어지간히도 기다리기가 싫었던 모양이네.”
그랬나 봐요, 긍정의 의미로 작게 웃자 피가로가 가볍게 눈매를 모았다.
“혹시 다른 맛이 먹고 싶었어? 고를 기회를 못 줬네, 미안해. 그래도 그게 알코올 함량이 제일 낮았던 걸로 기억하거든.”
“아, 괜찮아요. 이것도 정말 맛있는걸요. 그리고, 제가 피가로한테 선물한 거니까 이제 피가로 거잖아요. 마음대로 해도 돼요.”
“흐음.”
빙긋 웃으며 손에 든 잔을 굴린 피가로가 페리도트 빛깔로 반짝거리는 칵테일을 몇 모금 넘겼다.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져 그 안으로 액체가 흘러들어가고, 그와 함께 가볍게 오르내리는 목젖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머쓱해진 나는 얼떨결에 입을 열어 물었다.
“그건…… 무슨 맛이에요?”
입에서 잔을 떼고 나와 눈을 맞춘 그가 웃으며 내 쪽으로 잔을 기울여 내밀었다.
“마셔볼래?”
“네? 아, 네…….”
피가로는 잔을 직접 건네는 대신 내 입가에 조금 전 자신이 입을 댔던 반대편을 가까이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리 길지 않아 답은 나왔다. 신세진 것도 있으니, 오늘 밤 정도는 피가로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하고선 얇은 유리잔 테두리에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 입을 조금 벌리고 흘긋 눈만 들어 올려다 보니 시선이 마주친 피가로는 어쩐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천히 잔이 기울어지며 차가운 액체가 한 모금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혀끝으로 확 퍼지는 홧홧한 알코올의 기운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입을 가린 나는 머금은 칵테일을 꿀꺽 넘겼다.
“와. 독하네요…….”
“하하. 그래도 맛은 괜찮지?”
“네……. 라임처럼 새큼하고, 살짝 쌉싸름하면서 민트 향도 나고.”
도수가 높아 한 모금 마신 것만으로도 뺨이 조금 달아오르는 듯했다. 손등으로 볼을 문지르고 있자니 피가로가 느긋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현자님 세계의 문화는 신기한 게 많네. 그 중에서도 크리스마스는 정말 좋은 문화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중한 사람들과 선물을 나누는 날이니까요. 평소에는 말할 수 없던 감사 인사를 전할 수도 있고.”
“산타클로스라는 익명의 이름을 빌리기도 하고 말이지?”
“아…… 네, 맞아요.”
어? 생각보다 예리한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법사들은 모두 내가 사는 세계에 산타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던데.
“현자님이 사는 세계에는 마법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런 마법 같은 일을 해내는 존재라면 분명 설화나 전설일 거라고 생각했지.”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어린아이들은 산타가 정말 있다고 믿으니까,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부모님이 산타 분장을 하고 선물을 주기도 하고요. 저도 어릴 땐 줄곧 받았었는데.”
“아하하. 어린 현자님이라니 분명히 귀여웠겠는걸. 나라도 산타클로스의 이름을 빌려서 선물을 주고 싶었을 거야.”
“그런가요?”
“그래.”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 피가로가 문득 비밀 이야기를 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말야, 어젯밤에 현자님 말고도 복도를 몰래 돌아다니는 마법사들이 있었거든.”
“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니. 아마도…… 다들 각자의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해주기 위한 산타클로스가 되었던 거 아닐까나.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서 선물을 발견한 착한 아이들이 있었을 거야.”
“아…….”
오늘 아서나 파우스트가 했던 말을 상기한 나는 뿌듯한 심정으로 웃었다. 선물이란 분명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드는 마법이니까…… 모두가 그 마법에 푹 빠졌다면, 정말이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흐뭇한 미소를 바라보던 피가로가 물었다.
“현자님, 크리스마스에 관한 다른 문화는 없어? 그 정도로 큰 명절이라면 무언가 다양한 풍습이 있을 것 같은데 말야.”
“아, 물론 더 있어요. 종교적인 기념일이기도 해서 그쪽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도 있고요.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딸기 케이크랑 프라이드 치킨을 먹기도 해요.”
“프라이드 치킨? 브래들리가 좋아하겠는걸. 과연, 생일도 가깝고 말야.”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연일 프라이드 치킨 파티라며 브래들리가 굉장히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생생했다. 어젯밤에 많이 과음한 모양인지 오늘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또? 다른 것도 있어?”
“음, 화려한 조명을 달거나, 포인세티아처럼 붉은 꽃으로 리스를 만들기도 한다는 얘긴 했었죠……. 어제 모두와 함께 만들어서 장식했으니까요. 아. 겨우살이 장식을 걸기도 하는데, 그 아래에서 키스를 하는 문화도 있어요.”
“헤에. 신기하네.”
“정확히는 그 장식 아래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키스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그런 문화였던 것 같아요. 제가 살던 곳과는 다른 나라의 전통이지만요. 어.”
문득 눈에 들어온 풍경에 나는 테이블을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피가로도 가벼운 감탄성을 냈다.
“눈이 와요…….”
“정말이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어두운 하늘로부터 쏟아져내리는 하얀 눈송이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겨울임에도 아직 푸른 상록수의 가는 잎 위로 흰 눈이 소복이 쌓이고, 마른 잔디와 분수, 그리고 창틀 위에도 겹겹이 하얀 마법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내 곁으로 온 피가로가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방 안의 훈기 덕분에 추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눈과 함께 삽시간에 조용해진 사위 속에서 나는 피가로와 함께 한참이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화이트 크리스마스?”
“네,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요.”
낭만적인 울림이 있는 단어를 입속으로 되뇌며 나는 매년 이맘때쯤 곧잘 곱씹던 질문을 상기했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까요? 그런 질문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피가로가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창틀을 두드려 소리를 냈다.
“현자님, 이만 자러 갈까. 시간이 꽤 늦었어.”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응. 아쉬워? 같이 잘까?”
“아니요.”
단칼에 대답하며 돌아서니 피가로가 너무하네, 라며 눈썹을 내려뜨리는 척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세를 졌어도 그런 헛소리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의자에 걸어 두었던 겉옷을 다시 걸쳐 입고 문가로 향하자 피가로가 앞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 너머로 한 발짝 나서며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 시간을 내줘서 고맙습니다, 피가로.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나야말로 선물 고마워, 현자님. 방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에요, 바로 위층인 걸요.”
하지만 피가로는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기어코 문을 닫고 나를 따라 나오는 그와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늘 얕은 어둠에 잠겨 있던 복도는 어젯밤 모두와 함께 장식한 색색의 일루미네이션과 장식들로 반짝거렸다.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이 붉은 카펫으로 푹신한 바닥을 비췄다.
층계참에 도달해 계단을 올라 마침내 내 방의 문이 보이는 곳까지 와서 몸을 돌렸다.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건네려는 찰나였다.
“현자님.”
피가로가 가볍게 내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큰 키 탓에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에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났더니 벽에 등이 닿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간격을 좁혔다. 그제야 나는 피가로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버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내 몸에는 손가락 하나조차 대지 않고 손쉽게 나를 벽으로 몰아세운 그는 내가 놀라거나 어이없어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내 어깨 옆 벽에 한 손을 짚은 피가로가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등지고 선 창문으로부터 흘러드는 빛이 내 위로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현자님, 여기.”
“……네?”
“겨우살이야.”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몸이 흠칫 떨렸다.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자, 과연 내 머리 위에는 붉고 흰 열매로 이루어진 겨우살이 장식이 있었다.
“아까 네가 했던 얘기……, 기억해?”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자 살짝 흩날린 푸른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입을 열어 대답하면 숨결마저 섞일 듯한 거리에 나는 제대로 호흡하는 법을 잊고 숨을 들이켰다.
가까워…… 너무, 가깝다.
“……어떤…… 얘기요?”
“현자님.”
모르는 척 할 거야? 속삭이는 말에는 평소와 같은 장난기도 웃음기도 묻어 나오지 않았지만, 그 어조는 분명히 부드럽고 상냥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슬하고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틈새에 머무는 열기에 옷자락을 꾹 말아쥐었다. 살며시 접힌 눈매와 호선을 그린 입꼬리에 서린 옅은 미소. 한때 폭풍의 잿빛을 담았던 눈동자는 지금 헤이즐넛 빛으로 물들며 오롯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바닥을 긁듯 낮아진 목소리가 전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겨우살이 장식 아래에 선 이에게는, 키스를 해도 좋다는 전통.
피가로의 어깨 너머로 눈이 오고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 탓이었을 것이다. 말아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대신, 눈을 질끈 감아버린 것은.
“………….”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찰나가 영원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만 같았다. 아, 어째서 눈을 감아 버린 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오로지 코끝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의 감촉과 뺨에 와닿는 숨결만이 순간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가파르게 널뛰었다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영겁 같은 찰나가 지나갈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조금 전과 똑같이 여전히 시야 안에 가득 들어찬 피가로의 얼굴에 어린 감정은…… 내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피가로?”
나는 낯선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놀란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내게서 떨어졌다. 눈부신 달빛을 등져 그늘진 얼굴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는 어둠에 잠겨 잘 보이지 않았다. 손을 뻗어 저만치 멀어지려는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지만 텅 빈 허공만이 잡혔다. 흡사 비틀거리듯 두어 걸음 더 물러난 그는 정말 낯설게도, 어쩔 줄 몰라하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몹시도 애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 현자님.”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천천히, 나는 뻗었던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 흩날리는 흰 가운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카펫을 적시고 있는 듯했다. 손바닥을 내려다 보고, 고개를 들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던 눈송이는 어느새 옅어져 있었다.
피가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째서 그렇게 도망치듯 가버렸는지, 나로서는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독했고 홀로 외로움에 허덕였는지는 알고 있다. 종종 건네는 장난 같은 말과 손짓이 사실 그의 진심과는 전혀 맞닿아 있지 않다는 것도.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그의 진심의 편린을 보고 만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 작디 작은 파편이,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소중히 품에 넣고 오래도록 주의 깊게 살피며 간직하겠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보낼 다음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올까요?
내년에는, 크리스마스가 오기보다 먼저, 당신에게 이런 물음을 건넬 수 있을까요. 피가로.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 올해의 크리스마스 이튿날 밤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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