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네로] Drowning(slowed)

like a miracle by s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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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로야 생일 축하한다 제발 행복하자

오랜 기간 동안 술은 사람의 좋은 친구였다. ‘좋다’라는 의미를 해석하는 방향은 사람마다 평이 갈린다고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이라는 부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네로 터너는 그 어느 쪽에도 큰 이견이 없다. 술은 여러 음식에도 좋은 짝꿍이며, 식당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단가가 높게 측정되니까 마셔준다면 장사에 대단히 도움이 되지. 고마운 일이야.

하지만 정작 그 자신과 술의 사귐에 대해서는, 네로는 묘하게 한 걸음 뺀 자세를 취하게 된다. 술을 싫어하진 않는다. 어느 쪽이냐면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술을 마셨을 때의 묘하게 풀어진 분위기나 평소엔 결코 하지 않을 소리를 해버리게 되는 점, 이상할 정도의 열기, 고양감. 그런 것은 꽤 좋아한다. 세상이 점점 좁아져서 미래도 과거도 없이 그 순간만이 남아버리는 점도 좋아하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점도. 그러니까 술의 싫은 점은 그런 게 아니라 그다음. 전부 끝난 다음 날. 실언을 해버렸다는 후회나 추태를 보여버린 것에 대한 자괴감. 간혹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쥐어 잡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만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부분, 같은 거다.

그런 것을 생각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닐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 터너는 술을 마신다. 그리고 분명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리석은 동물처럼. 거기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얕은 둑처럼.

그날 브래들리 베인은 마법관에 늦게 귀가했다.

북쪽 나라에서 임무가 있었다. 브래들리는 투덜거리면서도 제시간에 나타났으나-쌍둥이는 이 점을 더 높이 사야 한다! 형기를 좀 더 팍팍 줄이란 말이다-미스라는 한 삼십 분은 지난 후, 스노우가 한쪽 귀를 잡고 끌고 왔고 오웬에 이르러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먼저 가서 마물을 잡고 있자니 어느새인가 잔뜩 골이 난 유령 같은 모양새로 나타나 있었지. 마물은, 물론 북쪽의 것인 만큼 성가시고 손이 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북쪽 마법사 다섯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놈은 아니었다. 그렇게 끝나나 했더니, 언제나처럼 사소한 말다툼이 번져서 미스라와 오웬이 곧장 싸움을 시작한 게 문제였다. 남 일처럼 보고 있자니 쌍둥이가 브래들리 쨩, 브래들리 쨩, 정리해야 하지 않겠나? 하고 양쪽에서 팔을 당겨온다. 마물 소탕보다 더 귀찮아서 쯧, 혀를 찼다. 전부 다 죽여버리고 튀고 싶은 기분이지만 정면으로 일 대 사는 아무래도 힘에 부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브래들리 베인은 인내심 강한 남자다. 사냥감을 사냥할 때에는 올바른 상황과 타이밍이 있는 거니까.

피곤했다.

몸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황을 대강 무마하고 돌아온 건 좋았지만, 역시 시원치가 않다. 그는 북쪽 마법사다. 아무리 조직 경험이 있고 교섭과 조정이 어느 정도 익숙하다 해도 그것이 자기 주도하에 놓인 상황이 아니라면 끝맛이 불쾌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입이 말라 견딜 수가 없다. 술이 당긴다.

제 방문을 적당히 거친 손짓으로 쾅 여닫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다. 브래들리는 익숙지 않은 동시에 몹시도 익숙한 기색을 느끼고 문득 동작을 멈췄다. 익숙지 않다는 것은 브래들리가 지금, 이 시점에 제 방에서 발견할 것이라곤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익숙한, 잘 알고 있는, 결코 착각할 수 없는, 싫을 정도로 눈에 익은.

소파 위에 의외의 손님이 있었다.

누워있다, 아니 어느 쪽이냐 하면 쓰러져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부드러운 물색의 머리카락이 옅은 바다 표면 같이 흩어져있다. 주로 반쯤 묶여있는 일이 많은 머리카락이 풀려있어서, 그것이 검은 소파에 대비되어 꼭 반짝이는 물결처럼도 보인다. 얼굴을 바닥으로 향해 누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푸른 잠옷 자락 사이로 흰 피부가 보이는 것이 묘하게 색정적으로 느껴진다. 본인이 들으면 기겁할 것 같아 피식 웃는다.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자기 쪽이다. 잘 알고 있는 몸이지만, 재회한 후에 닿은 적은 손에 꼽으니까. 이렇게 제 발로 자신의 구역에 들어와 앉아 있는 걸 보니 우스울 정도로 몸이 달아서. 브래들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냉정한 판단 요구와 그것조차 전부 삼켜버릴 것 같은 뜨거운 감정의 파도가 동시에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 영역에 이물질처럼 누워있는 푸른 인영은 미동조차 없다. 잠깐.

이 자식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건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몸은 언뜻 죽은 듯이 보인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알면서도 화들짝 놀라 무심코 얼굴께를 확인한다. 손가락 끝에 와 닿는 얕은 숨결을 느낀 후에야 안심이 된다. 어쩐지 살짝 발그레한, 무방비하게 잠들어있는 흰 얼굴은 그런 움직임에도 깰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 브래들리는 가져다 댄 손가락을 뻗어 그 부드러운 피부를 살며시 쓸었다. 술 냄새. 그래, 그러고 보면 그랬지, 술을 마시면 신기할 정도로 죽은 듯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자는 녀석이었어. 평소엔 이쪽이 조금만 움직여도 벌떡 일어나는 주제에.

안도, 에 가까운 감각이 지나가니 코끝에 비웃음이 걸린다. 웃기지도 않는구만.

브래들리 베인은 인내심 있는 남자다. 판단은 충분한 계산 끝에, 행동은 거기에 수반되는 결과를 고려하여. 그러니까, 그를 이 정도로 조바심 나게, 때론 멍청할 정도의 행동을 하게 만드는 존재는 많지 않다.

네로를 생각하면 늘 그렇다.

자신의 페이스가 흐트러진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판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각이 있는 만큼 아직 낫다곤 생각하지만. 가끔 그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브래들리는 작게 혀를 찼다. 태평하게 잠들어있는 눈앞의 이 녀석을 아무튼 치워야겠다. 잡아먹을 수 없는 사냥감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도 미뤄두면서.

어이, 네로.

작게 이름을 부르며 그를 깨우려 했을 때였다. 어깨를 살짝 흔들기 위해 손을 뻗었을 뿐이다. 그의 가슴께에서 덥석 손이 잡혔다. 뭐야, 깼냐? 하고 여상히 손을 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브래들리는 잠시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감겨있는 눈가 끝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히는 걸 보았다. 순식간에 파도가 발치까지 밀려오듯이. 브래들리는 그 속도에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그 푸른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어 물결처럼 떨리는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수면에 파동을 남기듯이 흔들리는 가는 속삭임이.

“…미안, 미안해요…”

그것은 무엇에 대한 고해인지.

브래들리 베인은 흔치 않은 무력감을 느낀다. 머뭇머뭇 달래듯이 둥근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몇백 년 전 이 녀석을 처음 주웠을 때를 떠올린다. 작았던 몸이 이만치 커다래졌는데도 매달려오는 손은 그 묘한 절박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물에 잠긴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이 간절히 붙잡아오는 손을 마주 잡는다. 거기에서 건져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함께 익사하듯이.

잠시 그렇게, 한 손으론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다른 쪽 손으론 누가 보면 웃을 정도로 어색한 손짓으로 그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파도가 조금 잦아진 것처럼 숨결이 안정된 것이 느껴진다. 잠꼬대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사과도 멎었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브래들리 베인은 항상 해결법을 찾는다. 하지만 이럴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자고 있다는 게 차라리 나았다. 발갛게 물든 눈가와 두 뺨이 애처롭다.

손을 빼려다가, 아직도 힘이 들어가 있는 그것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눈앞의 존재가 새삼스레 얄궂게 느껴져서 브래들리는 그의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 숨을 쉬지 못하자 가느다란 눈썹이 찡그려진다. 그 얼굴이 바보 같아서 쿡쿡 웃었다. 이윽고 눈이 뜨인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흔들리는 밀 같은 부드러운 황금빛 눈동자.

“…?! 브래드? 미쳤, 어?”

코를 비틀던 손을 놓고 눈을 마주치면서 씨익 웃어 보인다. 눈앞의 상대가 상황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듯 얼빠진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쩐지 흡족하다. 그 눈에 그저 자신만이 담긴 것도 마음에 든다. 그러면 돼.

“술 마셨냐.”

“……”

“나한텐 많이 마시지 말라느니 어쩌느니 잔소리하는 주제에.”

“당신은 너무 많이 마시잖아…”

어쩌면 혼잣말 같은 그 중얼거림을 뒤로 한 채 브래들리는 피식 웃으면서 익숙한 손길로 벽장 위의 술병을 공중에 띄운다. 둥둥 뜬 술병이 이내 손안에 들어온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뚜껑을 따곤 병째 들이켠다.

네로는 질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잘 아는 표정. 싫지 않아.

“어, 몸에도 안 좋은 거 몽땅 마셔서 세상에서 없애버릴란다.”

“또 헛소리… 읍.”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입술이 겹쳐졌다. 네로는 저항하듯 바둥거렸지만 그다지 유의미한 동작이었다고 평하긴 어렵다. 입속에서 섞이는 타액과 함께 독한 술맛이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눈이 찡그려진다. 삼키는 순간 머리가 찡하니 어지럽다. 세상이 빙글, 돌아간다. 빙글빙글, 돌아가고 좁아져서 브래들리 베인과 닿고 있는 부분만이 남겨진다. 뜨거운 혀끝과 언제부터인지도 알 수 없게 꾸욱 잡고 있는 따뜻한 손만이. 무심코 그 손끝을 더듬는다. 몇백 번,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많이 더듬었던 그의 손을, 손가락 끝에 걸리는 반지들을, 그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을. 그 감각만이 꼭 네로 터너를 세상과 연결하듯이. 까무룩 떨어지듯 가라앉는 세계 속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이.

세상의 끝에서 붙잡은 빛 같은 입맞춤이 끝났다. 네로는 현기증이 일어 입을 가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브래들리는 마냥 경쾌하게 웃었다.

“맘껏 붙잡든가. 난 안 가라앉는다.”

“……뭔 소린지……”

그러니까, 네로 터너에게 있어 브래들리 베인은 술과 같다. ‘좋다’라는 의미를 해석하는 방향은 갈리지만 ‘오랜 기간 동안’이라는 부분은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그 열기에 중독되어 버리는. 천천히 스며들어 이미 잠식되어 버린 나쁜 독 같은. 다만 매달리게 되어버리는.

그리하여 아마도 이대로 당신에게 취해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네로는 휩쓸려가는 몸을 어디에 묶어놓을 방도도 없이, 조금 생각했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붙잡은 그 손의 절박함을 그저 외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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