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오웬] 사랑의 증명

카인 2024 생일 축하해!

like a miracle by saha
53
1
0

* 원작 설정의 자의적 해석

* 이후 퇴고나 소소한 수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사님 생일에 맞춰서 올리고 싶었다…







“기사님, 나 여기 가고싶어.”


여느 실력 좋은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세심하게 깎아낸 것 같은, 선이 고운 새침한 얼굴. 입만 다물고 있다면 인형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입을 여는 순간 과연 그 파괴력이 배가 되는 얼굴이기도 하지. 카인 나이트레이는 보고서를 적던 손을 멈추고 그 나긋한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지, 목소리만이라면 얼굴과 똑같이, 부드럽고 달콤해서 언뜻 홀려버릴 것 같은 광택을 띤 매끄러운 우윳빛이다. 언제나 중요한 건 그 안. 진주빛 막 아래의 내용물. 하지만 드물게도 오늘은 그렇게 공격적인 어조가 아니다. 어디, 그가 카인의 눈 앞에서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듯 팔랑팔랑 흔든 것은 화려하게 꾸며진 전단지였다. <서쪽 나라에서 30년간 한결같이 수행한 파티시에가 선보이는 달콤한 사랑의 증명>. 보기만 해도 달아서 오히려 입이 쓴 크림과 과일이 가득 올라간 과자들이 형형색색 부드러운 빛깔로 그려져있다. 

그와 디저트를 먹으러 가는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임무상 도움을 준 데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감사와 보답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기꺼워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달콤한 과자는, 그가 좋아한다고 공언하는 것들 중엔 온건한 부류에 속하므로, 이정도의 지출로 끝난다면 다행인 일이었지. 오웬은 까탈스러워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단 것이라면 크게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게를 고르는 것은 카인의 몫이었다. 물론 좋다거나, 맛있다거나, 그런 기쁜 이야기를 하는 기특한 짓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싫지도 않다는 얼굴로 과자를 비우고, 가끔은 녹을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더 먹을래, 라는 말을 하는 걸 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뭔가 보람과도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그렇게 한 번, 두 번, 기사님이 싫은 얼굴을 하는 게 좋으니까, 라는 이유로 억지로 불려나가거나 이 녀석을 혼자 거리에 풀어두는 것이 걱정이라 급하게 따라나가거나, 그런 일들을 반복하다보니 묘하게 당연한 일정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만, 한 번은 이번엔 네가 가고싶은 곳… 같은 소리를 했다가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히 정해야하는 거? 그정도도 혼자 못 찾아 온단 말이야? 장난해? 라는 불합리한 질책의 폭풍을 맞았더랬지. 

그러니까 그가 어딘가 특정한 가게에 가고싶다, 고 말한 적은 생각보다 드물다. 그렇다면 가능한 가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전단지 같은 걸 봐도 이 가게가 여지껏 갔던 다른 가게들과 뭐가 그렇게까지 다른지, 카인에게는 잘 알 수 없었으나. 문제는. 

“어? 잠깐, 오웬, 이거 어디서 가져온 거야.”

“어디든 상관 없잖아.” 

“아니, 상관은 있지.” 

카인은 고개를 작게 기울이며 턱을 쓰다듬었다. 가게가 있는 곳이 여기 써있는 주소지라면…

“꽤 먼데. 서쪽 나라 국경 쪽이네. 걸어서 간다고 치면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걸.” 

“그러니까. 무슨 상관이냐고. 걸어서 안 갈 건데.” 

“뭐, 그건 그렇지만.” 

빗자루를 써서 가도 꼬박 몇 시간은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끗 눈 앞의 가는 인영을 바라보지만 본인은 그런 것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한 눈치다. 전단지를 흔들며 작게 콧노래 비슷한 것까지 부르며 둥실둥실 떠 있다. 이건, 안 간다고 하기 어렵네. 

음, 뭐, 당장은 급한 일도 없고. 이 녀석이 기분 좋으면 마법관도 비교적 평화로울 테고. 말썽을 부리는 걸 보느니 단 걸 먹여서 기분 좋게 만드는 쪽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으니까. 가끔은 먼 곳을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카인은 결심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 쓰고있던 보고서를 덮는다. 

“좋아, 가자.” 

“야호. 기사님이 전~부 다 사는 거야.” 

“그래그래.” 

쌩하니 자신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려버리는 인영을 따라 급하게 지갑을 챙겨 일어나며 반쯤 포기한 어투로 대답했지만 이상하게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아서, 카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먼저 훌쩍 창문으로 뛰어내려버린 동행자를 보며, 앗, 오웬, 조심해야지! 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사님, 아직 멀었어?” 

“아마 이 근방인 것 같은데…”

“아직이야? 짜증나네.” 

“네가 가자고 했잖아… 아, 저기 보인다, 마을.” 

시야 한 구석에 들어온 거리를 가리키자 그 말에 또 휘릭,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거칠게 빗자루를 돌려 마을 쪽으로 곧장 향하는 오웬을 황급히 쫓으며, 카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정신없는 하루가 될 것 같다. 이 녀석과 있으면 늘 그렇기는 하지만.

무사히 도착한 것은 느낌이 좋은 작은 마을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착지하여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람들 사이에 섞인다. 이래 봬도 국경 근처에서는 제법 큰 거리인지 생각보다 오고가는 사람으로 북적인다. 비록 카인에게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지니까 알 수 있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여기저기서 들어본 적 있는 지명이었지.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적당히 주머니에 넣어뒀더니 그새 구겨진 전단지를 펼쳐서 구석에 작게 그려진 지도를 들여다본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지만 아무래도 눈이 이래서야.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요령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상대라면 더욱이. 오늘은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저기, 너.” 

“오웬!”

하여튼 이럴때에 한해서 행동이 빠르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누군가를 잡아 세운 듯한 오웬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급하게 그 쪽으로 향한다.

“죽고싶지 않으면 이 가게를…”

“농담! 이녀석 농담이 심해서 말야. 놀라게 해서 미안해.”

황급히 오웬을 한 팔로 막으며 그가 말을 걸었음직한 상대 사이로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넉살 좋은 웃음을 애써 띄우며 악수를 청하듯 다른쪽 손을 내민다. 이내 머뭇머뭇 잡아온 손과 함께 팟, 마법처럼 상대의 모습이 보인다. 어쩐지 좀 클로에와 닮은 느낌의, 나이는 시노 정도 되었으려나. 어두운 고수머리의 아직 소년에 가까운 앳된 얼굴이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고마워. 아, 난 카인이라고 해. 이 녀석은 오웬.”

“누가 멋대로 인사 따위…”

“미안, 놀랐지. 네 이름은?”

“이, 이안…”

“이안, 우리 중앙의 왕도에서 왔는데, 이 가게를 찾고 있어서 말야.”

오웬, 얼른 먹고 싶은 거 아니야? 잠시만 기다려봐. 자신을 막는 몸짓에 항의하듯 이쪽을 쏘아보는 오웬에게 작게 속삭이자 그는 털을 잔뜩 세운 작은 동물 같은 모양새로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지만 입을 다문다. 좋아. 

다시 구깃해진 전단지를 펴 내민다. 이 근처 같은데, 혹시 알아? 아, 여기 아래 지도도 있어. 주소지와 지도가 그려진 부분을 보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팟 든다. 

“아, 알아! 저 골목을 돌아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돼. 지금 우리는 여기쯤이거든.” 

“아하.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그런데 이 가게는…”

“응?”

카인은 경쾌하게 웃으며 그를 돌아본다. 소년은 우물쭈물 뭔가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양새로 조금 뺨을 붉힌 채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쩐지 수줍은 듯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다. 뭐지?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한 걸까. 

“으, 으응, 아무것도 아냐.” 

한참 입을 달싹이다 오웬이랑 눈이 마주친 후 겁먹은 얼굴로 화들짝 고개를 숙인 이안은, 그대로 작게 인사를 하곤 뛰어가 버렸다. 뭔가 하고싶었던 말이 있는 눈치라 신경쓰이긴 하지만, 이 이상 오웬을 기다리게 했다가는 또 무슨 말썽을 일으킬지도 모르겠고. 뒷모습에 크게 손을 저어 인사를 건네곤 다시 길찾기에 나섰다. 

“가자, 오웬.” 

“흥.” 

가게는 정말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보는 사람한테까지 강한 압력이 느껴질 정도로 건물 외장에도 꽃과 하트 장식이 가득 붙어있었으니까. 전단지도 그렇긴 했지만 확고한 취향이 느껴지는 가게다. 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 달 것 같군.

“어서오세요.” 

문을 열자 딸랑, 하고 경쾌한 종소리가 들린다. 이쪽을 향한 발소리와 접객멘트. 점원쪽을 향해 자연스럽게 웃어보이며 자리로 안내되는 것을 기다린다. 가게의 안쪽도 아기자기한 하트와 분홍색 소품들로 꾸며져있다. 으음,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뭐, 오웬이 디저트만 다 먹으면 바로 돌아갈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태평하게 가게를 둘러보는데 어쩐지 이상하게도 점원의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머뭇거리는 공기가 느껴진다. 만석인가? 그리고 들려온 답은 카인이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저, 손님, 외람되지만 저희 가게는… 연인들만 받고 있는데, 혹시 두 분은…”

“어?”

목소리만 들리지만 몹시 곤란한 기색이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상황은 카인에게도 좋지 않다. 곤란하다. 잠시 오웬 쪽으로 시선을 준다. 카운터 근처, 화려한 케이크가 줄지어 진열된 쇼케이스에 정신이 팔려 이쪽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당장은 다행이긴 한데. 어떡하지.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는지 손 안의 종이가 구겨진다. 

“그… 들고계신 전단지에도 적혀있어요. 연인들만의 사랑의 공간이라고.” 

“아…”

구깃구깃한 종이로 시선을 돌리자 아래쪽에 분명히 쓰여있다. 눈이 아플 정도의 핑크색으로 ‘연인들만의 공간’이라고… 아니, 대충 읽긴 했지만 ‘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보통 그렇게까지 하나? 카인은 이마를 긁적이며 전단지를 접었다. 

“저, 우리 중앙의 왕도 근처에서 오직 이 가게만 보고 왔거든. 어떻게 안 될까?”

“그건… 정말 감사하지만 그게, 저희 점주의 강한 희망이라서… 특별취급을 해드릴 수는…”

그러고보면 서쪽 나라 출신이라고 쓰여있었지. 과연 마법사들 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정열적이고 고집이 있다. 그리고 사랑을 아주 좋아하지.

카인은 순간적으로 몇 가지의 대처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소란스럽지 않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온건히 해결할 것, 이라는 조건을 추가한 후 떠오른 모든 방법 위에 선을 그었다. 안 되겠다. 딱히 방법이 없어. 

“저기, 언제까지 서있어야 하는 건데? 왜 안 들어가는데?” 

케이크 구경을 끝냈는지 오웬이 짜증섞인 눈초리로 이쪽을 본다. 흐응, 하고 차가운 시선을 건너편으로도 건넨다. 아마 점원이 서있는 자리겠지. 이럴 때의 오웬은 위험하다. 카인은 한쪽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잡으며 오웬을 달랠 방법을 생각한다. 점원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듯 자연스럽게 건너편을 가리며 돌아서서 오웬의 어깨를 잡는다. 

“오웬, 미안하지만 포기하자. 다른 가게를 찾아보는 건 어때?”

“뭐? 여기까지 와서 못 들어간다니 말도 안돼.”

“연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대.”

“하?!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야?”

오웬은 새하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카인을 잠깐 노려보다가 이내 그를 치우듯이 팔로 밀고-시도는 좋았으나 큰 효과는 없었음에도-점원 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카인은 그를 억지로라도 막는 것이 좋을지 순간 고민했다. 그러나 오웬은 그쪽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방긋 웃었다.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의 웃음이다. 카인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떤 본능적인 경고처럼. 아마도 그가 당장 이 가게를 불태워 버리겠다며 노발대발 하는 쪽이 더 위험한 사태일텐데, 그가 웃고 있다면 어느정도 타협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이성적인 판단과는 상관 없이 경고음이 울린다. 무언가 대처할 수 없는 사태가 덮쳐올 것만 같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저기, 어떻게 해야 ‘연인'인데?” 

“그, 그건… 예를 들면… 입맞춤을 하신다거나…?”

“헤에.” 

점원의 대답을 들은 오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다. 초승달처럼 불길하게 올라간 입가를 삐쭉 일그러뜨린다. 그러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카인을 바라본다. 카인도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오웬을 마주봤다. 그 입가에는 반사적인 웃음이 걸려있다. 눈앞의 상대가 웃으면 카인도 웃는다. 꼭 그런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몸은 딱딱하게 긴장되어있고, 분명하게 이쪽을 경계하고 있는 주제에. 그 얼굴을 보며 오웬은 신경질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웃음에 가까운 형태로 코웃음을 쳤다. 

“기사님, 이리 와 봐.” 

“응?”

오웬이 마치 개를 부르는 모양새로 손가락을 까딱인다. 카인은 그 행동이 썩 예의바르진 않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 이상의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선다. 둘은 키가 비슷하다. 가까운 거리에 서면 눈높이가 맞는다. 카인은 순간 그 단정한 얼굴에 눈길을 빼앗겼다. 키가 비슷하고, 눈높이가 맞지만, 제 성질대로 금세 사라지곤 하는 오웬을 이렇게 근거리에서 오래 바라보는 일은 드물었으므로. 카페의 창문으로 비치는 햇빛을 뒤로 받아 오웬의 윤곽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속눈썹에 꼭 빛의 구슬이 붙은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멍하니 서있었을 때. 

오웬이 손을 뻗어 카인의 넥타이를 당겼다.

카인을 탓할 수는 없다. 카인은 백전연마의 기사다. 상대방의 기색을 읽는 데에 능하며, 무의식중에 우선 상대방과 자신의 무력을 비교한다.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 전력차는 얼마나 나는지. 그러니까, 오웬은 대체적으로 카인에 비해 체술로는 몹시 떨어지며, 마법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적의가 없는 동작에 카인 안의 기사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그저 사람과의 스킨십을 좋아하는 스물두 살 카인 나이트레이일 뿐이므로.

그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카인이 미처 어떤 행동을 하리라는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오웬과의 거리가 훅 좁아진다. 눈 앞에 익숙한 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평생을 보아온 자신의 눈동자와,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어쩌면 영영 익숙해질 일은 없을지도 모르는, 진분홍색 꽃잎 같은 눈동자. 카인이 제대로 어떤 생각을 하기 전 그 눈동자는 가늘게 휘어지며 웃었다. 

입술 끝에 몹시도 생경한 감각이 닿았다. 카인 나이트레이가 오늘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든 사건 중 어느 것에도 들어맞지 않는, 어쩌면 평생 생각해본 적도 없는, 예상치 못한 상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 빛의 구슬이 붙은 속눈썹도, 반짝이던 머리카락도 순식간에 거리가 없어져서는 바로 코앞에 있다. 오웬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북쪽 마법사의, 얕고 달콤한 숨결이 자신의 얼굴에 부딪는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느낌이어서. 카인은 그것을 잡아야할지 혹은 강하게 밀어내야할지, 어쩌면 그런 것을 판단하고 싶었다.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잔뜩 꼬인 실뭉치가 굴러다니다가, 그것이 점점 커져서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리는 느낌이어서. 그것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유감스럽다고 생각했다!-그 모든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보드라운 감촉은 카인에게서 떨어졌다.  

“자, 우리 ‘연인'이야.

됐지? 얼른 안내해.” 

네, 네에…! 점원이 놀란 목소리로 자리를 안내하는 소리가 들렸고 오웬은 휙,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쪽으로 향했지만 카인은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그 자리에 얼마간 서 있었다. 

이윽고 카인이 오웬이 자리 잡은 테이블에 합류한 것은 그로부터 꽤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케이크와, 카인은 이름조차 잘 알 수 없는-그러나 오웬도 아마 모를 것이다. 언제나처럼 전부 다 하나씩 가져와, 따위로 주문했겠지-보기만해도 달콤해보이는 디저트들이 빼곡하게 놓여진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접시가 몇 개나 있다. 오웬은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렸는지 카인이 들어오든 말든 그 쪽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카인은 무언가 한 마디 하려는 듯 잠시 입을 달싹이다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린 후 털썩 오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모르겠다, 정말. 

기어이 여기까지 와서 목표로 하는 음식을 다 차지했다는 의기양양한 얼굴. 언제나 엉망진창인 식사예법이지만 하나 둘 접시를 비우는 모습은 어딘가 호쾌함까지 느껴진다. 아니 정말 누가 봐도 칭찬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 사흘 굶긴 줄 알지도 몰라.  

카인은 잠시 오웬을 바라본다. 늘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주제에 자기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서늘한 얼굴을 하지. 손을 대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위험한 폭탄인 주제에 그 어떤 온도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가끔 그 무기질적인 새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는 꼭 이 세계에 한 겹 막을 씌운 그 위에 존재하는 것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손을 뻗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아니, 바보같은 생각이다. 카인은 작게 고개를 흔든다. 어쩌면 이 녀석만큼 자신과 언제나 닿아있는 사람은 없는걸. 기묘한 상처로 모든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이 녀석만 보일 정도로. 

그러니까 이 혼란은 아마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한 당황스러움이고, 미처 막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이다. 이 녀석이 자신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은 하루이틀 일도 아닌 걸. 이제와서 이런 정도로 혼란스러울 것도 없다. 뭐니뭐니해도 눈알을 빼앗긴 전적이 있는 사이다. 거기에 비하면 입술을 빼앗긴 정도는 간지럽힘 정도지. 아니, 그래도 이쪽은 제자리에 있으니 빼앗겼다고 할 정도도 아닌가.   

카인이 제 입술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린 순간에도 오웬은 여전히 이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디저트를 먹어치운다. 잘 깎은 조각상 같은 흰 얼굴은 언뜻 우아하게 보이는데도 그 식사 흔적이란 참담하다는 표현을 해도 좋을 정도여서. 살짝 건드리면 금이 가는 얇은 머랭 쿠키를 거칠게 쥐고, 조심스레 잘라 먹어야 하는 페이스트리를 거침없이 포크로 찍는다. 흰 크림으로 덮여있는 케이크를 맨손으로 덥썩 잡는다. 입도 유독 조그마한 주제에, 그런 것이 어쨌냐는 듯 작은 입을 학대라도 하는 것마냥 벌려 가득 욱여넣는다. 그 바람에 입안의 새빨간 혀가 보여서, 붉은 혀에 뚜렷하게 새겨진 검은색의 문장은 이상하게도 선정적으로 느껴져서, 카인은 괜시리 황급하게 시선을 돌린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도 머릿속도 난장판이다. 그러나 결국엔 곁눈질로 다시 흰 인영을 눈으로 쫓는다. 그 입가에는 붉은 잼이 비죽, 마치 립스틱을 잘못 그린듯이 길쭉한 선을 그리며 묻어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주변에 전혀 신경을 안 쓸 수 있는 건데. 

카인은 한숨을 쉬며 장갑을 벗었다. 붉은 자욱을 뺨 바깥쪽에서부터 입술 쪽을 향해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덧그린다. 아직 촉촉한 잼은 저항없이 손가락에 묻어난다. 닦아내듯 살며시 쓸어내린다. 

“묻었어.” 

“?”

손 끝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 그건 아까 전에 느낀 부드러움과 비슷하면서도 몹시 달라서. 만약 아주 조금만 더 손가락을 뻗으면 직전에 시야에 들어와버린 그의 입 안, 새빨간 혀에 닿는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라서. 카인은 그러한 생각들을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어쩐지 자연스럽게 입으로 가져온 손 끝의 맛에 집중한다. 루쥬베리? 아니, 체리인가? 

오웬은 잠시 카인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입은 달콤한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오웬은 눈썹을 찌푸리고 잠시 우물거리다가 이내 다시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그 후론 둘 다 아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마법관에 도착하자마자 오웬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카인은 저도 모르게 작게 뻗은 손을 어색하게 거뒀다. 이러면, 꼭 잡으려고 한 것만 같잖아.  



“하아.”

“드물게 의기소침하네요, 카인”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하나 없다. 카인은 힘없이 바에 반 이상 팔을 걸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뭘로 드릴까요? 요염하게 웃는 아름다운 점주를 올려다보며 쓴웃음을 건넨다.

“오늘은 좀 센 걸로.” 

“어머, 별일이군요.” 

“당신이 만들어주면 아무리 센 술도 맛있을 것 같지만.” 

어라, 기쁜 말을 하시네요. 아, 그치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으로 부탁할게… 그럼요. 샤일록은 기특한 어린애를 보는 눈빛으로 쿡쿡 웃으며 익숙한 동작으로 술잔을 집는다. 몇 가지 술과 시럽-카인은 무엇이 무엇인지 잘 구분할 수 없었다-을 집어 우아하기까지한 동작으로 섞는다. 이윽고 예쁜 다홍색이 된 술을 작은 잔에 따라 내민다. 잔의 가장자리에는 새하얀 알갱이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붙어있다. 

“저도 술이요.”

“우왓, 미스라.”

“안 달고 안 매운 걸로.” 

어느새 불쑥 나타난 것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는 북쪽 마법사다. 인사도 없이 카인의 옆쪽 빈 자리에 털썩 앉은 갑작스러운 손님에게도 너그러운 점주는 먼저 인사를 건네며 빙긋 웃어보인다. 어서오세요. 

카인은 그쪽을 곁눈질하며 건네받은 술을 홀짝였다. 평소에 마시는 것에 비하면 확실하게 강한 술이라는 게 느껴진다. 입술에 닿는 조그마한 알갱이들이 포인트가 되어 강렬한 맛을 낸다. 미스라는 언제나처럼 주변에 관심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카인은 지금 미스라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미스라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아니, 이런 게 궁금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이 말을 꺼내고 있다. 

“미스라도 북쪽 마법사지.”

“당연한 소리를 하네요.” 

“저기, 조금 이상한 질문 해도 돼?”

“하아, 하세요.”

쉽게 떨어진 승낙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답지 않게 잠시 망설였다. 술에 섞인 시럽이 입술을 맞붙여버린 듯 떨어지지 않는다.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수면에 나온 물고기처럼 뻐끔이다가 겨우 그 단어를 뱉었다.

“키스, 한 적 있어?”

“키스.”

묘하게 나른하고 색기있는 미남이라는 평을 받곤하는 미스라이건만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몹시도 색기가 없어서. 그 되뇌임은 마치 그저께 점심식사에 대한 질문의 답인 것마냥 건조하게까지 느껴진다. 입이랑 입이 부딪히는 그거죠, 그는 그런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언제나 졸린듯이 반쯤 감긴 눈을 무심히 도르륵 굴린다.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참 후에 나온 대답은 꽤나 김빠지는 것이었다. 

“기억이 안 나는데요. 있지 않을까요.”

“그런건가-.”

카인은 반쯤 테이블에 기대어있던 자세를 조금 움직여서 거의 테이블에 얼굴을 쳐박은 상태가 되었다. 고주망태인 것도 아닌데 한심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그렇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나아갈 것도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묘한 조급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서. 카인은 벌떡, 기세 좋게 고개를 다시 들며 샤일록에게 물었다.

“저기, 샤일록도 오래 살았지…? 

그렇게 별 거 아니야?”

술집의 점주는 온갖 질문을 받기 마련이다. 사랑의 번뇌에서부터 인생의 원죄에 이르기까지. 점주의 사적인 사항을 묻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샤일록은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거의 전문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정도의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글이글, 진지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젊은이는 언제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지. 카인의 눈동자 안에서는 그런 것이 느껴진다. 자신과는 상관 없는 귀찮고 성가신 일조차 한 번 다시 돌아보게 될 정도의 인력. 샤일록 베넷은 그런 걸 싫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덤으로 상대방의 생의 길이를 지적한 어린 기사의 실례도 너그러이 묵인해주기로 했다. 나쁜 의도가 있어보이지는 않기도 하고. 

“후훗, 마법관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니 새롭네요. 

글쎄요. 그런 중요도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으음…”

“다른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고 카인은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중얼거린다. 어느새 내어진 술을 들이키며 미스라가 평이한 어조로 끼어든다.

“그런 거, 당신이 하고싶으면 하고, 하기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잖아요. 뭐가 어려운 거죠?”

“상대방이 싫어한다면?”

“내가 더 강하니까 복종시킨다.”

그런 게 아니란 말이지…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조언으로 듣기 어렵다. 끄응, 하고 잠시 고민하던 카인은 반대로 물었다. 

“그럼, 미스라보다 강한 사람이 키스를 하자고 하면 할 거야?”

“저보다 강한 사람은 없는데요. “

“음… 오즈라거나.” 

“오즈요? 키스? 제가요? 미쳤나요?”

“아니, 진짜로 오즈랑 하라는 게 아니라…”

아니, 그냥 잊어버려, 내가 예를 잘못 들었다… 카인이 다시 술잔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미스라가 툭 말을 뱉는다. 

“북쪽 마법사는 싫은 일은 하지 않으니까요. 

저도, 오즈도, 오웬도, 브래들리도. 

그러니까 만약 누구든 싫은 일을 하면 죽일 거예요. 뭐, 지면 이쪽이 죽겠지만.”

“키스도?”

“뭐라도.” 

그런가. 고마워. 카인은 진지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네. 뭐. 미스라는 멍한 얼굴로 목 뒤쪽을 쓰다듬는다. 카인은 잠깐 생각하더니 다른 질문을 꺼냈다. 

“미스라는 누군가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한 적 없어?”

“하아. 키스.” 

“응.” 

미스라는 잠시 허공을 응시한다. 키스, 입이랑 입을 맞대는 그거 말이죠. 

“뭐가 좋은가요?”

“응?”

“키스하면, 뭐가 좋은데요? 별로 맛도 없을 것 같은데요.” 

맛… 그건 그렇지만… 카인은 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미스라는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튼 하고 싶다면 하면 되잖아요.”  

키스키스 해댔더니 물고기가 먹고싶네요. 좀 잡으러 갈게요. 그런 말을 남기고 미스라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쑥 일어나더니 공간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폭풍같은 퇴장이었다.

“가버렸다…”

“후훗, 그의 말을 전부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저렇게까지 일직선이면 가끔은 어떤 미학까지 느껴지죠.” 

입을 가리며 샤일록이 작게 웃는다. 천 년을 넘게 산 마법사의 색기는 가끔 카인은 아직 모르는 영역의 향기를 풍긴다. 스물두 살이고, 충분히 어른이고, 알 건 다 아는 나이인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바라보는 어린 기사를 바라보며, 타인을 매료하는 데에 딱히 마법이 필요없을 때가 많은 서쪽의 마법사는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온전하게 동의할 수는 없네요.

그것이 사랑의 증명… 같은 건 아니지만, 가끔은 증명하기 위해 지나온 길 그 자체가 어떤 증명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 제일이죠. 저희는 마음에 솔직한 마법사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샤일록은 서비스랍니다, 하고 조그마한 초콜릿을 내주었다. 작고 동그란, 은색의 반짝거리는 구슬이 두어 개 올라가 장식되어있는 초콜릿. 카인은 순수하게 감사함을 표시하며 한 입에 초콜릿을 넣는다. 혀 끝에 매끄러운 초콜릿이 닿아서, 그것이 순식간에 녹아내려서, 달콤한데 씁쓸한, 우아한 단 맛이 입 안에 화악 퍼진다. 반짝이던 은빛의 작은 구슬이 와작, 하고 씹힌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 카인은 문득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름다운 것에 시선을 빼앗기듯이.

“…고마워, 참고할게!”

무언가를 결정한 듯 망설임 없는 눈동자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어린 기사는 웃고 있었다.


맑고 쾌청한 날씨.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는 태양. 마법관은 조금 들떠있었다. 뭐니뭐니해도 카인의 생일날이다. 아서는 공무를 조금 일찍 마치고 돌아오기로 했다. 히스와 시노는 같이 골랐다며 블랑쉐산 무구 손질 도구를 선물해주었다. 루틸과 미틸과 리케는 네로와 함께 만들었다는 아란치니를 바구니째 건네주었다. 오즈조차 생일을 축하하는 저녁식사에는 참가해준다고 한다.  

“오웬! 이런 데에 있었구나.” 

물론 들뜨지 않은 사람도 있다. 마법관 중정, 태양이 미처 비추지 못하는 그림자 진 건물 그늘 아래, 오웬은 나쁜짓을 하다 걸린 악동같이 질린 표정을 했다. 쳇, 숨기는 척도 하지 않고 날카롭게 혀를 찬다. 시선을 주지 않고 몸을 휙 돌린다. 그러자 팔을 붙잡혔다. 오웬은 왈칵 짜증을 내며 팔을 털어낸다. 카인도 강하게 저항하지 않고 팔을 놓았다. 바로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으니까.

“저기, 아기 기사님은 가서 아기 친구들과 놀면 되잖아.” 

“응, 다같이 저녁 때 식사하기로 했지만, 오웬, 너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었어.” 

오웬은 눈썹을 올리면서 미간을 좁힌다. 따분하다는 듯이 한숨을 쉰다.

“나는 기사님한테 할 말이 없는데.”

“나는 있어. 그리고… 이래봬도 오늘, 생일인데.”

“나랑 상관 없잖아. 그딴 날이 뭐라고, 이딴 세상에 태어났다는 하찮은 이유로 고개를 쳐들고 나한테 축하라도 받을 셈이야? 뻔뻔하게 손을 내밀어서 뭐라도 뜯어내고 싶다는 거?”

“그런 게…”

다시 한 번 몸을 돌리려는 오웬의 망토를 카인이 붙잡는다. 하아? 반동으로 삐끗 이상한 자세로 멈춰버릴 뻔 한 오웬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카인이 아, 미안, 하고 머쓱하게 손을 놓는다. 오웬은 한 번 더 짜증을 내려는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다음 태도를 바꾸듯이 빙긋이 웃는다. 새하얀 얼굴에 가면을 쓴 것 같은 그림같은 미소가 떠오른다. 카인은 저도 모르게 양 손을 올리고 한 발짝 물러섰다. 이럴 때가 더 무섭다니까. 

“그래, 기사님 생일이니까. 케이크를 먹어 ‘줄게’.

나한테 사 ‘줘도’ 좋아.

기쁘지?”

오웬은 빗자루도 없이 하늘에 둥둥 떠오르더니 놀리듯이 손가락으로 카인의 턱을 들어올린다. 빙글빙글 웃으며 말장난을 늘어놓는다. 카인은 잠시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작은 한숨 비슷한 것을 내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하지만 오웬, 내 부탁도 들어줘.” 

“하?” 

“…저번에 갔던 카페에서 했던 일, 또 해봐도 돼?”

“?”

오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인은 초조하게 뒤로 붙잡은 손을 아플 정도로 꾹 쥐었다. 말을 한 건 좋았지만, 만약 거절당하면, 아마도 좀 충격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 분위기에서 오케이를 하면, 그건 그것대로, 그때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 확인 사살 당하는 기분인 걸. 어쩔 수 없지만. 

“별로 상관 없는데.” 

후자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카인은 조금 분한 기분이 들었다. 허락을 받았는데도 묘한 패배감이 등줄기를 스친다. 이녀석 이걸 허락하는 의미를 알고는 있는건지, 애초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바심, 초조함, 골이난 어린애 같은 기분. 

이런 상태로 상대에게 입을 맞추는 건 조금 비겁한 일인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마음이 통한 것도 아니고, 서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뭐라 불러야할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제어할 길이 없어서. 이런 정돈되지 않은 것을 상대방에 부딪히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휘둘리고 있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카인은 오웬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 동작에 끌려오듯이 오웬이 천천히 땅에 발을 디딘다. 어쩐지, 평소의 심술궂은 웃음도 짜증도 띄우고 있지 않은, 잘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그 표정은 도무지 읽히지 않았지만, 오웬은 카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모양 좋은 인형같은 양 눈을 나비 날개마냥 깜빡거린다. 팔에 닿은 그 몸은 몹시도 가늘어서, 보고 있었을 때보다 실감나는 그 가냘픔에 덜컥 조마조마한 기분이 된다. 손에 깨지기 쉬운 조각상을 들고 있는 기분. 조심스레 그를 한 팔로 품에 안듯이 가둔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입을 맞췄다. 

이미 한 번 닿은 적 있는, 알고 있는 부드러운 입술. 꽃잎처럼 보드라운 감각에 머릿속이 들뜬다. 간지러운 숨결. 카인은 어쩐지 자연스레 감았던 눈을 떴다. 비록 눈을 떠도 감아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다만 아름다운 진홍색 눈동자는 그저 흔들림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카인은 울컥,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그런 기분.   

부탁하듯이 부드럽게 입술을 두드린다. 그러자 허무할 정도로 별 저항도 없이 입술이 열렸다. 그 사실에 묘하게 안도하며 혀를 넣어 부드럽게 치열을 훑는다. 이어서 그 안쪽도. 오웬의 안에 닿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스치자 이상하게 흥분과도 비슷한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이 혀 끝에 지난번 눈에 담았던 검은 문양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아, 어쩐지 몹시도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부모님에게 말할 수도,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나쁜 일.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입술을 떼고, 카인은 머쓱한 얼굴로 오웬을 바라봤다. 허락은 분명히 구했지만, 서로 분명하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난 다음 일어난 일이지만, 아무래도 쑥쓰럽다. 하지만 오웬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한다. ‘그’ 오웬이 할 거라곤 생각치도 못한 표정. 심술도 악의도 없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다. 꼭 순진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같이. 

“기사님, 뭐야. 개?”

“개?!”

카인 나이트레이에게 아무리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다해도 이게 키스 후 받을만한 감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여러 반응을 예상했다. 빈정거린다거나, 비난한다거나… 혹시 어쩌면 그 반대라거나. 하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개는 입을 핥는 걸 좋아하니까.” 

“……개라고 하면, 더 해도 돼?”

카인은 조금 부루퉁하게 입을 내민다. 아마 제 행동조차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숨이 닿는 거리를 허락한 채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건지, 몹시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유난히 경계심 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오웬에게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작은 움직임으로 코를 부빈다. 오웬은 작게 눈을 찡그린다. 거부하는 기색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건 좋다거나 싫다거나, 미처 그런 영역에까지 가지 못 한, 가끔 오웬의 주변에 몰려드는 작은 짐승들을 대하는 것 같은 무심한 움직임이어서. 카인은 괜시리 가슴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의 영점 이하의 차가운 얼굴을 한 번쯤은 무너뜨리고 싶다고.

“하하, 기사님, 진짜로 개 같아.”

“한 번 더, 해도 돼?”

“뭐?”

오웬은 눈썹을 삐죽인다. 거절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을 천칭에 걸어서 잰다. 어느쪽이 더 자신을 재미있게 만들어줄지, 어느쪽이 기사님을 더 곤란하게 할지. 

기사님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기사님의 별 거 아닌 부탁을 들어줘서 나쁠 건 없지. 나중에 몇 배로 갚게 하면 된다.

“뭐 그러던가… 으읍?”

카인이 돌진하듯 입술을 덮쳐서 오웬은 와락 짜증이 났다. 허락하긴 했지만 이렇게 급하게 하라는 뜻은 아니었어. 등을 퍽퍽 내리치지만 바위를 내리치는 것 만큼 소용이 없다. 바보같단 생각이 들어서 그만둔다. 카인이 팔을 끌어당겨 조금 더 세게 끌어안는 게 느껴진다. 그래봤자 부드러운 동작이라서, 이 녀석 나를 무슨 쥐면 부서지는 비스켓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지. 코웃음을 치고 싶었지만 카인이 너무 가깝다. 카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뜨겁고, 숨막힐 듯이 더운, 태양의 숨결. 순간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아찔하게 어지럽다. 개도 아니고, 입을 핥아서 어쩌자는 건지. 조금 간지러울 뿐인데. 하지만 어쩐지 이상하다. 저번에도, 아까도 그랬지만 입을 핥아질 수록 카인이 닿을 때마다 찌릿하게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 든다. 이상해. 카인의 혀가 조심스럽게 입 안쪽을 침범하면, 그 뜨거운 온도가 자신에게까지 옮겨오듯이, 나쁜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묘하게 사고가 흐트러진다. 달콤하다. 마시멜로와 커스터드 크림과 베리잼과 머랭쿠키가 한꺼번에 입 안에 들어온 느낌. 그럴리가 없는데, 카인의 혀 끝이, 부드러운 움직임이, 여태까지 먹은 어느 케이크보다도, 어느 생크림보다도 부드럽고 달다. 세상이 점점, 조금씩, 좁아져서 카인밖에 남지 않는다. 

“하앗… 읍. 으읏!”

오웬이 품 안에서 작게 이쪽을 밀어내는 것이 느껴진다. 저항인지 아닌지 잘 모를 정도로 작은 바둥거림도. 놓아줘야하는 걸 안다. 그런데 놓기 싫어. 어째서? 품 안의 몸짓이 어쩐지 멀게 느껴진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오직 달콤하고 향긋한 숨결과 혀끝에 느껴지는 입 안쪽의 점막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 늘 차가운 얼음인형같다고 생각한 녀석의 델 것 같이 뜨거운 부분. 꼭 거기에 뇌가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저 계속 이렇게 닿고 있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 때 문득 오웬의 혀가 움직였다. 카인의 움직임에 응하듯이 아주 작게. 카인은 오웬을 세게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고 주먹을 꽉 쥐었다. 다정하게, 부드럽게, 그렇게 대하고 싶으니까. 

못내 아쉬운 듯이, 서서히 입술이 떨어진다. 주르륵, 입가로 타액이 흘러내린다. 하아, 하아, 둘 다 거친 숨을 내쉬었다. 카인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안한 듯 오웬의 입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자 오웬이 그 팔을 퍽 쳐냈다. 

“기사님 바보야?! 숨을 못 쉰다고…” 

“미안.” 

“이제 다시는 안 해. 기사님은 아무래도 개보다 멍청한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듣자 카인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자 오웬은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내 카인이 핫, 하고 정신을 차리고 오웬의 두 손을 쥔다. 그 기세와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건지 오웬은 그 손을 내치지도 못한 채 카인을 바라본다.

“기분, 안 좋았어?”

“기분…?”

“싫었어?”

“싫…”

눈빛 공격이라도 하듯 울멍울멍한 강아지같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카인에게 당장이라도 한 마디 쏘아붙이려는 듯 오웬이 입을 열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웬은 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언어를 배우지 못한 어린애 같은. 

“모르겠어?”

“……”

“난… 좋았던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오웬도 좋다면 좋겠다.” 

“……”

오웬이 카인을 노려본다. 하지만 그 입에선 말이 나오지 않고, 두 손은 카인에게 잡힌 그대로다. 오웬은 작게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 입이 다시 작게 열릴 때까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카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하나도 급하지 않으니까.  

“……몰라.”

“그렇구나.”

“…도 좋아.” 

“응?”

“그러니까! 알게 될 때까지 …해봐도 좋다고.”

그 말 끝은 아주 작은 목소리여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카인에게는 분명하게 닿아서. 카인은 빙긋 웃으며 오웬을 끌어안았다. 가는 몸을,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그리고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럼, 한 번 더.”




*





“헤에, 오웬! 이 가게 갔구나! 좋았겠다! 나도 가보고 싶은 곳인데!

사실 서쪽나라 수도에 본점이 있거든. 로맨틱한 걸로도 과자로도 유명한 가게인데.

제자가 분점을 냈구나… 마법관에선 좀 멀지만, 못 갈 거리는 아니네.”  

“시끄러워…” 

“여기 이 과자도 먹었어? 이건 중앙의 나라 한정이라는데! 어땠어? 맛있었어?”

“……기억 안 나.” 

“응?”

“맛이, 기억 안 나.” 

“오웬… 뺨이 빨개…!”

클로에 콜린스는 보았다. 깊은 바닷속 산호처럼 붉은 뺨과 새벽녘 잎사귀에 떨어진 이슬방울처럼 살며시 떨리던 눈동자를. 그리고 그가 오웬이 함께 간 상대방을 알고 마법관 전체에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게 되는 건 아주 조금 나중의 이야기.


그 모든 것은 분명, 달콤한 사랑의 증명.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