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짝꿍조] 무너짐은 아직 멀고
무너짐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던 어느 날의 이야기
* 도적단 시절의 브래들리와 네로가 보고 싶어서 기어코 날조
* 글은 모토아이보조(전짝꿍조) 논CP로 쓰여졌으나, CP로 드셔도 상관없습니다. CP탈부착 자유(네브/브네/네브네)
* 해당 내용은 2부 메인스토리 <14장 마법사의 돌 - 6화 예상조차 하지 않은 이름>에 나온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2부에 등장하는 인물(ㅇㅇㅈ)이 나옵니다. 혹 2부를 보시지 않았고 스포일러 당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읽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카드 스토리나 이벤트 스토리 중 아직 읽지 않은 것이 있어, 해석이나 설정을 풀어감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글 내 시기는 잡아서 보스 이삼백 쯤의 일 아닐까-로. 그러니까 어쨌거나 네로가 부담감 등등에 질식하기 이전의 이야기. 지금의 절반이면 그래도 마법사 사이에선 어린 축이겠지 싶고...(천 단위로 세는 마법사와 마녀를 본다)
* 저는 네로가 은근하게 입이 험한 게 좋아요() 그 취향을...잔뜩...반영...함...
* 도적단 모브 하나를 멋대로 투입했지만, 비중은 크지 않음
* 원작에서 풀리지 않은 또는 보지 못한 설정은 전부 개인이 멋대로 써둔 팬피셜입니다
점과 점처럼 인가며 구역이 뜨문뜨문 퍼져있는 북쪽 나라는 소문이 퍼지기 어려운 편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그건 대체로 목숨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마왕 오즈가 다스리는 영역이 어디서 어디까지라던가, 그에 비견하는 미스라가 어디에 머무는가, 혹은 그래도 인간에게 친절한 쌍둥이 마법사가 변덕을 부려 잠시간 정착한 장소가 어디라던가. 죽을 위기를 피하거나, 목숨을 부지할 정보가 대부분인 그것에는 언제부터인가 이질적인 이야기 하나가 섞였다.
죽음의 도적단.
결코 모여 지내지 않는다는 북쪽 마법사 여럿이서 함께 하는 집단(심지어 거기엔 인간도 몇 섞여 있다고도 했다. 진위는 모른다)에 관한 소문을 최초로 들었던 자는 그게 얼마나 가겠느냐고 코웃음 쳤고, 그들이 어엿하게 튼튼한 무리로 정착했을 즈음엔 놀라는 이가 반절, 저 집단에 의탁할 수 있지 않을까 목숨을 계산해보는 이가 반절이 되었다.
무리 지어 다닌다는 점에서 죽음의 도적단은 북쪽에선 이미 충분히 특이한 편이었는데, 독특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힘이야말로 진리인 이 북녘땅에서, 누구보다도 북쪽 마법사다운 그들의 우두머리는 수족을 뽑을 때 개개인의 강함을 기준에 놓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일원이 되고 싶다며 찾아갔다가 입구에서 내쫓긴 마법사가 투덜거린 이야기였으므로 믿을 만한 소문이었다. 애초에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은신처로 삼은 것이 아닌 한 죽음의 도적단이 머무는 곳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고, 앞선 소문―강함을 척도로 해서 단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때문에라도 도적단 아지트에는 종종 입단을 희망하는 자들이 쳐들어오곤 했다. 입단 희망이라곤 하지만 힘이 곧 법이고 진리라는 북쪽 마법사들답게 거친 방식으로 들이닥치는 경우가 많았고 극소수로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붙들려고 저자세로 기어드는 놈도 있었다.
이번은 평소처럼 전자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기 실력에 자만하는 애송이 이거나. 아지트로 누군가 접근하는 건 알았지만(북쪽 마법사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니), 보스가 굳이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상주한 인원만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 사실 자체가 도적단 면면에겐 강화 마법을 받은 듯한 고양감을 일으킨다. 저 정도라면 너희 힘으로 할 수 있잖냐. 그 사람은 자리에 있지도 않은데 그런 말을 들은 성싶다. 너덧 명이 각자 주문을 외워 마도구를 꺼내 들며 입구 쪽 경비 당번과 나란히 섰다. 육탄전에도 자신이 있는 놈들끼리라 어깨를 푸는 모습도 보인다.
그야 몸이 찌뿌둥한 참인 것도 사실이었다. 겨우 며칠 전에 크게 한탕하고서 어제오늘은 내내도록 별일이 없었으니까(연회 때 남은 재료가 있어 식단이 유독 풍성한 건 별일이긴 한데). 물론, 북쪽 사람답지 않게 신경줄이 섬세한 저희 부두목(이렇게 부르면 기함한다)은 이제야 좀 평화로워졌다며 혀를 찼었지만, 저희네는 날뛰는 게 훨씬 성에 맞았다.
이제 입단 희망자일 방문자가 맨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한참 전부터 마력으로 시력을 돋았던 막내놈 하나가 마법을 거두는 걸 느끼면서, 모여 있는 면면 중엔 제일 고참인 에반스가 크게 소리쳤다.
“어이, 거기 방문자 놈! 거기서 멈춰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와?!”
상대를 멈추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다. 입단 희망자인 척 덤벼드는 놈도 있었으니까. 일단은 멀리서 관찰하기. 여기 와서 배운, 머리도 쓰는 싸움법 제1조였다. 게다가 이렇게 윽박지르듯이 하면 상대의 반응을 볼 수 있다. 거기서부터 상대의 성정을 읽는 거다. 성마른지, 신중한지 어떤지를. 대개 열에 여덟은 눈을 부라리고, 개중 하나는 몸이 땅에 파고들게 할 정도로 납죽 엎드리는데, 이쪽은 아예 색다른 반응이었다. 우뚝 멈춰선 후 눈만 멀뚱거리는 거다.
그 사이 에반스는 잽싸게 상대를 관찰한다. 덩치는 꽤 크다. 키로만 따지면 보스와도 맞먹을 듯하다. 아니지, 더 클지도 모르겠다. 마법사라는 생각을 버리면 어디 탄광 같은 데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인가 싶을 느낌도 있었다. 그러면 저쪽에서 육탄전으로 끌고 갈 가능성도 염두 해야 할 것이다. 마법사여도 몸 쓰는 걸 잊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를 들었더랬다. 보스라면 단번에 상대가 어느 쪽으로 싸우는 걸 더 즐기는지 등의 요소를 파악해 벌써 진형이나 작전을 지시하고 있을 테지만, 이들 중 제일 연차가 쌓였어도 간신히 중간일 저에겐 이 속도가 최선이다.
‘저 덩치와 둔한 반응으로 봐선, 역시 육체 강화 마법이 특기일지도.’
눈짓으로 주변에다 공격이 들어오면 원거리 공격으로 다리를 묶는 걸 주력으로 하자고 알리면서 에반스는 부러 한 걸음 더 나섰다. 그 사이 방문자는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가, 죽음의 도적단?”
목소리가 버석하게 갈라지는 건, 오래도록 남들과 대화하지 않은 증거다. 북쪽에선 흔했다. 여기까진 불온한 기색이 없다. 에반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대로 소리가 나지 않았던 모양인지 한참을 큼큼거리던 방문자는 저희 면면을 둘러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여기 있게 해.”
“입단 희망자냐. 쳇, 싸울 수 있는 놈이면 더 좋았는데. 것보다 네가 우리 형제가 될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 두목이야.”
“<아니멈 벡사트>”
괜히 맥이 빠져 투덜거리는 순간 뒤에 서 있던 다른 녀석들이 반응할 틈도 없이 살기가 훅 치솟고, 둔해 보이던 방문자에게서 쏜살같이 마력이 솟구쳤다. 겉보기와는 달리 뱀처럼 빠르게 쏘아진 공격이었다. 이건 못 피한다고 직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으나, 곧 익숙한 마력이 그만큼 친숙한 주문과 함께 곁에 섰다는 걸 깨닫곤 반색했다.
“<아도노디스 옴니스>. …하아, 평화로운 건 이틀이 안 가냐.”
“네로 씨!”
“완전 딱 맞게 와주셨어요, 네로 씨!”
“역시 보스의 오른팔!”
“너희, 뭘 거창하게 말하는 거야. 나는 그냥 오래 있었을 뿐이라고. 것보다, 넌 뭐냐. 우리 애들한테 손대면 나도 가만히는 못 있는데.”
보스의 오른팔이고 명실상부한 파트너인 네로 터너. 백 단위로 보스의 곁에 서 온 그는 쓸데없는 싸움을 싫어하는 거지 결단코 약한 게 아니었다. 그가 왔으면 뭐든 끝났다고, 다 괜찮다고 벌써부터 마음을 놓는 부하 놈들을 타박해야 했지만 에반스 역시 안심한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눈까지 빛내는 한 놈도 있는데, 생각해보니 쟤는 주방 담당이라 네로의 직속이기도 했다. 그러니 저 반응이겠지.
평소처럼 맥없이 말을 받으며 느른하게 걸어 나오던 그가 아지트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서서히 기세를 올렸다. 두엇이 마른침을 삼키며 속닥댔다. 네로 씨, 지금 빡쳤나? 보스 불러야 해? 솔직히 뚜껑 열리면 무서운 건 보스보다도 네로 씨야. 저희끼리야 편하게 네로 씨, 네로 씨하고 부른다지만 저 사람은 밖에선 종종 ‘피의 요리사’라고 불린다. 커틀러리를 마도구로 해서 마력을 매개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걸로 아예 남을 조각조각 해체해버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 별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거다. 흔히 보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뚜껑 열리게 빡쳤다 하면 그는 보스에게서 최대한도로 강화 마법을 받고서 마구 날뛴다. 에반스는 그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고, 그 뒤로는 네로에게 정말 깍듯이 굴었다. 당사자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도살장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다 나와도 그 정도는 아닐 급으로 피칠갑을 했던 네로 터너를 본 이상 무리였다. 정말로. 그런 그가 심기 불편한 상태로 서 있으니, 아래 부하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지금이라도 아지트 안쪽으로 물려야 하나 고민이 됐다.
“에반스.”
“넵, 네로 씨.”
“뭘 쫄아. 가서 브래드 불러와. 그리고 너흰 그냥 들어가고, 주방 애들이나 돕고 있어.”
그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네로가 자연스럽게 저를 포함한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걸로 진짜 안심이다. 에반스는 아래 녀석들을 챙겨 아지트 내로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네로는 커틀러리로 쳐냈던 마력의 감각을 곱씹었다. 뱀이 또아리를 틀었다가 쏘아내는 듯한 저놈의 마력은 방출 속도가 확실히 빠르다. 대신 컨트롤이 엉망이라 저 무지막지한 힘은 근거리에서만 유지될 거다. 그러면 저나 브래드처럼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마법사에게는 별 게 아니다. 그러니 에반스가 저 녀석을 입구 멀찍이 떨어뜨려 둔 건 옳은 선택이었다. 너는 관찰을 확신으로 갖기까지가 오래 걸려. 자기 눈으로 본 걸, 지금까지 살아남은 경험에서 온 네놈의 직감을 믿으라고. 브래드가 에반스에게 했던 충고가 그거였다. 종종 에반스의 침입자 판별이 늦어 아지트 안에서 쌈박질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럴 일은 없어질 듯했다. 여러 생각을 한꺼번에 굴리면서도 네로는 눈앞에 선 침입자인지 뭔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브래드를 불러오라곤 했지만, 브래드가 온다고 해서 입단 여부가 바뀌진 않을 거다. 제가 보기에도 저 녀석은 걔가 고를 놈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묘하게 유리처럼 맨들거리는 안광이 소름 돋았다. 저건 질시와 부러움과 열등감이 뒤섞여 식욕처럼 화한 무언가다. 대체 저따위의 무엇에서 그딴 미친 게 촉발되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신경 끄자.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저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너구나. 브래들리의 오른팔.”
“하아…. 야, 너 내 질문에 답은 안 하냐. 이름.”
“아이작.”
말을 걸렸으니 무시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곱게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예고도 없이 브래드의 수족을 공격한 놈에게 문답무용으로 제재하지 않은 까닭이 있다면 딱 하나다. 도적단 내 원칙인, 입단을 원하는 녀석이 있으면 보스가 그 녀석을 봐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것만 아녔어도 애진작에 치우고 저녁 준비하러 갔을 거다.
‘브래드 이 자식, 왜 이렇게 느려. 내가 마법 쓴 거 알았으면 알아서 후딱 튀어나와야지.’
여하튼 제가 말을 곱지는 않게 돌려주자 저쪽에서도 울컥하는 낌새가 느껴진다. 정령들이 저와 저놈 사이에서 조금은 갈팡질팡하는 것도. 역시 나오기를 잘했다. 주방에 있다가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마법사 하나의 마력이 아주 잔챙이는 아니어서 밑재료 준비를 딴 놈들에게 맡기고 온 거였는데. 네로는 곧 입안으로만 궁시렁댔다. 하여간 브래드 녀석은 수족을 부리는 게 거칠다. 아까의 병아리들은 보스의 부재가 자기네가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라고 여겼을 텐데(아주 틀린 건 아니다), 그 녀석은 살아서 도망칠 수 있는 선까지도 종종 그렇게 방목하곤 했다. 적과 자신의 차이를 가늠하는 건 다 경험에서 온다면서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이 선하다. 망할 자식. 네로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그 녀석 나름대로 부하가 한 사람 몫을 그럭저럭할 수 있게, 그러니까 자기 영혼의 긍지를 지탱할 수 있는 선까지 이것저것 다 겪게 해 성심성의껏 키워내는 건데, 그런 걸 모두가 견딜 수 있지 못하다는 걸 언제쯤이어야 깨달을지 모르겠다. 괜히 이것저것 욕만 주워섬기는데,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로는 날카롭게 갈린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내쐈다.
“늦어. 멍청아.”
“뭐야, 아직 안 치웠어? 에반스 녀석 얼굴 보니까 파랗게 질려서 왔더만. 그래서 네가 벌써 판 정리한 줄 알았지-.”
기다리고 있던 브래드가 왔다. 실실 웃는 낯인 까닭은 에반스가 전해준 경위를 듣고, 부하의 성장을 확인한 탓일 테다. 그러면 이 자식이 제 방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 이만큼 시간이 걸린 이유가 설명됐다. 그럴 여유를 부린 까닭도 제가 입구를 틀어막았기 때문이라는 게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믿어주는 거, 좋지, 정말 좋은데! 이 자식은 하여간 정말 사람을 험하게 부려! 온 힘을 다해 널 믿는다는 제스쳐는 분명 뿌듯하지만, 너무 거칠어서 문제다. 가끔은 무겁기도 하고.
“네가 퍽이나 착각하겠다. 내가 마법 쓴 게 한 번뿐인데-됐고, 저기, 쟤. 일단은 입단 희망자일걸. 난 이제 빠진다.”
“오우. 야, 네로, 오늘 저녁 뭐냐?”
“사슴 뒷다리 소테.”
“좋았어!”
네로는 이제 저희 머리가 왔으니 다 됐다는 투로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마도구는 감춘 지 오래다. 어차피 저와 녀석이 대치하고 있는 모양새를 본 시점에서 상황 파악은 끝냈을 거다. 저도 단박에 읽는 것을 브래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저 녀석은 브래드 급은 죽어도 못 된다. 당할 리가 없다. 그러면 저는 안심하고 돌아가도 됐다.
아이작은 그 모양새를, 북쪽에선 곧잘 보곤 하는 탁한 하늘색에 닮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를 집요하게 바라본다. 그가, 네로가 나타나기 무섭게 환하게 밝아진 잔챙이들의 표정. 안심, 안도, 환영. 따스하고 포근하고 자랑스러운 것들이 저자를 향한다. 뱃속에 차뜩하니 불길이 인다. 저게 내 것이면 좋겠어. 뺏고 싶어. 그렇지만 여기 우두머리를 만나긴 해야 해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역시 어렵지만, 피가로 님이 가르친 좋은 것 중에서는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좋은 덕목이랬다. 지금 잘 기다리는 저는 칭찬 받을 만할까.
기다리고 있으니, 드디어 이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무리를 이끄는 북쪽 마법사가 나타났다. 무리를 이끌지만 그 누구보다 북쪽 마법사다운 자. 소문은 그랬다. 따라서 아이작은 그가 아는 가장 멋진 북쪽 마법사 피가로 님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똑똑한 그 얼굴을. 누군가에게 섣불리 온전한 마음을 건네지는 않는 그런 자를.
아니었다. 이곳의 보스라는 자는 쾌활한 얼굴을 하고서 저기 혼자 입구를 지키고 막아선 자에게 친근하게 어깨동무하고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다른 사람을 믿고 자랑스러워하며 기뻐한다. 그 좋은 것들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다시금 뱃속에서 불길이 인다. 저기에 가서, 다 먹어 치우면, 되지 않을까. 제일 먼저 저 네로라는 녀석부터.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노려보다가, 드디어 브래들리와 눈이 맞았다. 아이작은 곧 어리둥절해한다. 아까까진 유쾌한 빛으로 반짝이며 온도를 품었던 루벨라이트는 몰아치는 북풍처럼 온감 따위는 없고 오히려 저를 굴러다니는 돌멩이 보듯이 했다. 명백히 위에 선 자가 내려보는, 품평이 끝난 시선이다. 반사적으로 저쪽에게 거부당했다고 알았다. 아이작은 곧 으르렁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죽음의 도적단 수령은 무감하게 말을 뱉었다.
“입단을 희망한다, 라. 네 녀석은 그런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여기 있게 해.”
“사양이다.”
“왜?”
“척 보면 알지. 네놈은 자기밖에 몰라. 그런 놈은 필요 없어.”
“나는 강해. 아까 약한 문지기들을 다 돌로 만들 수 있을 만큼.”
“하,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 부하 녀석 중 태반은 쓸모가 없겠군. 그렇지만 네놈 하나보다 내 부하 놈들이 수십 배의 가치가 있지.”
부리는 수족을 이야기하는 얼굴은 자신만만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강함이 미덕이고 가치다. 그것이 북쪽 마법사. 그런데 아까 그 얄팍한 놈들이 자기보다 가치가 있다니.
“약한 게 더 쓸모 있다는 건가?”
그렇게 묻자, 이번엔 저쪽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야. 여긴 북쪽이다, 멍청아. 네놈도 북쪽 놈이면 알 텐데.”
“아까와는 말이 달라.”
“실제로 다른 이야기니까. 대체 뭐야, 너 입단 희망자가 아니고 나랑 토론하러 온 거냐? 그런 건 서쪽 놈들하고 해.”
툭툭 쏘아붙이는 형식이긴 해도 그럭저럭 대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 오가기는 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아이작의 인내심은 거기까지 길지 않았고 저를 계속 낮잡는 시선도 싫었다. 다른 사람에게 존경받고 있겠지. 그 부러운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겠지. 아이작은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피가로님께서 저더러 북쪽치고는 온화하다고 했지만, 저는 결국 북쪽이다. 대화보다는 무력이 좀 더 쉽고 편하다. 관철하는 데에는 그만한 게 없다. 마도구에 마력을 그러모으자 저쪽도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장총을 쥐었다.
“<아니멈 벡사트>.”
“<아도노 포텐숨>. 이거 봐라. 넌 집단생활엔 안 어울려. 뭘 견디질 못하네. 뭐, 그럭저럭 몇 마디 대화는 할 수 있는 걸 보면 북쪽 놈치곤 유한 편이지만, 그래도 북쪽이라고. 네로 녀석하곤 달라.”
“무슨 말이야.”
마력과 마력이 몇 번씩 부딪히면서 브래들리는 저를 가지고 놀듯이 했다. 아지트에는 절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자기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밖으로 몰아댄다. 떠들 여유가 있냐고 짜증 나는 것이 반, 뭐라고 하나 궁금한 것이 반이라 반문하자 저쪽은 자랑스러운 것을 내보이는 얼굴이 되었다.
“걔야말로 북쪽답지 않아. 공적도, 명예도 관심이 없어. 우리가 보통 자랑으로 내세우는 걸 추구하는 놈이 아냐. 오히려 너무 욕심이 없단 말이지. 신경줄이 섬세해서인지 자신감도 없는 타입이고.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우리 도적단 같은 단체 생활을 해나가기 좋은 녀석이야. 의지할 만한 현명한 파트너야말로 가장 값지다고. 내가 골라서 모아둔 건 그런 녀석들 뿐이다. 함께할 만한 놈들 말야.”
그 약한 놈들이 받는 기대와 믿음 같은 것을 저는 가지지 못한다는 게 공연히 짜증이 나서, 아이작은 그 짜증을 떨쳐내려는 양 소리를 지르면서 덤벼들었다. 몇 대 맞는 것쯤은 감수할 작정인 기세다.
―전부 예상대로군. 브래들리는 입가를 슬쩍 말아 올려 웃었다. 뭐, 전부 사실적시이긴 했지만, 상대를 도발하려는 목적으로 더더욱 으스댔으니까. 혹시 모르니 테스트할 겸 긁어봤는데 처음 직감대로 꽝인 놈이다. 제아무리 열등감이 있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다루며 살 것인지, 그걸 증명하지 못한 시점에서 저놈은 네로는커녕 에반스 녀석에게도 못 미친다. 죽음의 도적단에 들어올 조건은 오로지 하나. 이 브래들리 베인의 수족으로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다. 무리 사냥에서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호흡을 맞출 수 있는지 여부고, 무엇보다 저의 특기 마법은 강화. 스스로 힘을 배가시키는 것보다 다수의 손발 맞는 놈들을 강화시켜 단체로 활동하는 쪽이 훨씬 강력하다. 혼자 살아가고 혼자 죽는 북쪽 마법사라는 명제 이전에, 순수하게 힘을 추구하는 북쪽 마법사로서 내린 결론이었다. 겉보기론 북쪽답지 않은 싸움법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이것은 틀림없이 북쪽의 방식이라고 자신한다.
셋, 둘, 하나. 아이작이 아지트 주위에 둘러둔 무형의 선을 넘는 순간, 덫을 발동했다. 쌓인 눈 아래, 마력으로 짜둔 화살이 솟구쳐 방문자에서 침입자로 바뀐 녀석의 허벅다리를 꿰뚫었다. 이것으로 저쪽의 육체적인 기동성을 꺾고 혹 마법으로 회복하거나 이동을 수월하게 하려고 하더라도 유용자원을 좀 더 소비해야 하는 패널티를 갖는다. 비명을 채 지르지 않고 비틀거리며 후퇴하는 아이작을 향해 가늠쇠 너머로 조준을 풀지 않은 채로, 브래들리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 서비스다. 싸움은 힘만이 아니라고.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남의 영역에 들어왔으면 덫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라고. 아니면 자기 영역으로 끌고 오던가―보복하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그땐 정식으로 쳐부숴 주지!”
마력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졌다. 도망치는 척 뒤통수를 칠 깜냥이 있는 놈은 아니었으므로, 브래들리는 그제서야 장총을 내렸다. 아도노 포텐숨. 사용했던 마력 화살 덫을 다시 설치한 그는 설원 위에 점점이 남은 핏자국을 가만히 노려다 본다. 피 냄새를 맡고 산짐승이라도 오면 식량으로 쓰게 잡아두라고 오늘 불침번에게 일러둬야 할 성싶다. 식량 사정을 파악하는 건 네로지만 고기가 늘어난다고 해서 불평은 안 할 거다. 숨을 들이마신다. 마법으로 체온을 너무 빼앗기지 않게 보호한다곤 하지만, 찰나 폐부를 얼리는 북녘의 찬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 청량한 차가움 사이로 약간의 삐걱거림이 도드라진다. 곧바로 아지트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였다.
‘기분이 좋다, 라.’
부하 한 놈이 충고를 잘 받아먹고 성장한 것은 보스인 브래들리에게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 맞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러니 네로가 뭘 쪼개고 있느냐고 따졌던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직후에 알아차린, 방문자가 네로를 보던 그 눈빛. 그것은 브래들리 베인 개인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다. 그 녀석은 틀림없이 자신의 파트너 네로 터너를 마나석으로 만들어 먹어치우고 싶어 했다. 감히, 이 브래들리 베인 님 앞에서 이 몸의 것을 탐내다니. 그리하여 보스로서 응당 그래야 할 행동과 사적인 분풀이가 합쳐져 마음이 수런거린 것이다.
대체로 하나로 딱 겹쳐 있는 자아상에 실은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은 것은 오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걸 양립시킬 존재가 생기는 바람에 선명하게 인지하게 된 셈이지만.
‘정작 본인에겐 그런 자각이 없긴 한데, 뭐 됐나.’
우두머리가 성미에 안 맞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개인이 지워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주 사소한 티끌 같은 부진이라도 쌓이면 티 나기 마련인데, 이젠 그걸 보완해줄 파트너가 있지 않은가. 그 녀석이 등 뒤를 맡아준다면 저는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기분의 문제가 아니고 확고한 명제로서 그렇다.
잠시 눈을 감고 심상을 갈아 끼운다. 소리도 공허도 같이 울려서 담기는 푸른 동굴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마나 에어리어를 묵상하면 거스러미가 조금 일어났던 마음결이 천천히 가라앉아 고요해진다.
오감과 시야를 완전히 제삼자로서 부감할 수 있다고 여겨질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뜬 눈에는 그 어떤 부정한 것의 편린조차 없다. 브래들리는 한층 밝아진 기분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 아지트 입구까지 은은하게 나는 사슴 소테의 맛있는 냄새 같은 것. 네로가 주방을 진두지휘하게 된 이래 식사 시간은 그 어느 때라도 기대되는 순간이 됐다. 특히 그게 고기 메뉴일 때는 더 하다. 같은 고기를 쓰더라도 양념과 조리법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나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저 녀석이 성심성의껏 저를 먹이려 들어서 그럴 텐데, 뭐라고 했더라. 너처럼 맛있게 먹으면 만드는 보람이 있다고 했던가. 도적단의 이인자씩이나 되는 주제에 만족하는 순간이 그런 것이라는 게, 정말 북쪽 마법사답지를 않다. 그런 주제에 고집은 자기도 북쪽 태생이라는 듯 부리니, 참 재밌지 않은가.
브래들리는 이제 망설임 없이 아지트로 걸음을 옮긴다. 등 뒤에 남겨진 설원은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무너짐 따위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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