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MÆN(1)

카인오웬

OMGMO by 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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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앞서

・해당 포스트는 2024년 11월 23일에 개최된 마법사의 약속 비공식 배포전 '온실의 마법은 반짝이는 비바체'에서 발간한 카인오웬 글 회지의 웹 재록본입니다. 

・분량이 길어 포스트를 두 번에 걸쳐 발행했습니다. 유료 포스트는 NOMÆN(2) 후반부로, 가격은 종이책과 동일합니다. 

・축전은 실물 회지/PDF 파일에만 삽입되어 있습니다.

・실물/웹 회지를 구매하신 분께서는 트위터 계정 DM, 이메일 등 제가 확인할 수 있는 곳에 '회지 실물/웹 재록본 구매 화면+자신의 닉네임이 적힌 포스트잇'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시면 해당 회지의 PDF 파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웹 재록본의 연출은 PC에 맞춰져 있습니다. 되도록 PC로 감상해주시길 바랍니다.


주의사항

・NCP라기에는 사심이 강하고 CP라기에는 건조한 분위기입니다.

・오웬이 회지 오리지널 캐릭터와 입맞춤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장면은 아니지만 이와 관련하여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께서는 관람을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상에 앞서, 다음 스토리의 정독을 추천드립니다. 

- 메인 스토리: 1부, 1.5부, 2부

- 스팟 서브 스토리:시간의 동굴-시간을 넘는 목소리(5), 꿈의 숲-스팟에 대한 이야기(1), 스팟의 추억(1), 스팟의 마법사

- 이벤트 스토리: 과자와 우스운 동화 


아래로 회지 내용이 이어집니다. 




 

악인을 무찌르고 약자를 구제하는 정의로운 사람을 동경했다.

손에는 검을 든 채로 말을 타며 달리는 기사가 되고 싶었다.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Prologue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누군가는 동화가 동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지만 동화의 목적은 아이의 기쁨에만 있지 않다. 동화는 어린 이들의 손에 망원경을 쥐여준다. 아름답고 보기 좋게 다듬어진 세상이 렌즈 안에 담기고, 세계의 가치는 확대된 광경으로 굳어진다. 이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 살아가기 위한 방향이 꿈꾸는 자들의 마음에 깃들어 노닌다. 루틸 플로레스는 그림책을 덮었다.

“자,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벌써 끝난 건가요?”

“후후. 내일은 오늘처럼 즐거운 이야기를 또 가져올게요.”

동화가 끝나자 리케는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약한 미련과 아쉬움이 묻어났다. 루틸은 그런 리케에게 네로가 만든 초코 오믈렛을 건네주었다.

“모든 작품에는 끝이 있지만 인물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거야. 리케, 마음에 들었던 인물이나 궁금한 인물이 있었니?”

“네. 저는 횃불을 든 나그네가 인상에 남았습니다. 저도 그처럼 어둠 속에서 헤매는 자들에게 불을 비춰주고 싶습니다.”

“리케는 하고 싶은 게 명확하구나.”

“신의 사도니까요.”

폭신폭신한 오믈렛을 양손으로 소중히 쥔 리케의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아이였다.

“교단에서 그리 가르침 받아왔습니다. 마법사로 태어났으므로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경애하며 자애로워야 한다고요. 저는 그 가르침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이 향하는 대로 따라가면 타락해버리고, 제겐 주어진 위치가 있는 만큼 고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악에 물든 자들을 다시 바로 잡는 것 또한 저의 몫입니다. 그러니까…….”

리케가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이번에는 루틸이 아닌 맞은 편의 이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오웬! 다른 이의 간식을 마구잡이로 먹는 건 그만두세요! 그건 네로가 저와 루틸을 위해 만들어준 거예요. 먹고 싶다면 저나 루틸에게 허락을 맡고 드셔야 합니다.”

한입거리의 오믈렛을 두 입에 걸쳐 먹은 탓에 크림이 입술에 묻은 오웬이 미소지었다. 그는 식탁에 팔을 걸친 채로 리케를 바라보았다.

“흐응. 사도님은 방금 자기 입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말한 주제에 내게는 오믈렛 하나 주지 않는구나.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도 네 인도가 필요한, 가여운 존재 중 하나인데.”

“그래서 지금 바로잡고 있는 거잖아요. 남의 것을 탐내는 건 결국 자신을 해치는 행동입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정정당당하게 얻어내세요. 오웬이 지금 제게 “리케, 오믈렛 먹어도 돼?”라며 허락을 구한다면, 기꺼이 베풀겠습니다.”

“흐음.”

리케는 근엄하게 오웬을 노려보았고, 오웬은 접시 위에 놓인 마지막 오믈렛을 바라보았다.

마주하는 시선 아래로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싫~어.”

오웬의 말끔한 미소로 끝났으나.

“내가 누군가의 허락 따위를 받을 리가 없잖아. 아하하. 바보 리케.”

“바보가 아니에요! 모처럼 베풀었더니, 으으…….”

“이런, 리케.”

가득 속상해진 리케를 루틸이 끌어안고 도닥였다. 그 다정한 손길을 따라 리케가 심호흡을 했다. 오믈렛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리케는 우는 대신 또박또박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오웬은 절제하는 법을 모르니까요. 맛있는 걸 보면 누구나 유혹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네로가 만든 음식이면 더더욱 그렇죠. 이해합니다. 그러니 용서합니다.”

“헤에.”

“하지만 지금 같은 오웬의 행동을 계속 용서한다면 그건 방종이 됩니다.”

“그러면?”

“그러므로 제가 오웬을 이끌겠습니다. 오웬은 앞으로 다른 사람의 음식을 먹고 싶을 때는 허락을 맡고 먹도록 하세요. 오웬은 간식이 있으면 지나치게 많이 먹으니, 하루 간식은 쿠키 10개 양으로 정하도록 해요.”

“하? 적어.”

“적당량이에요. 이것도 오웬이 먹는 양에 맞춰서 정한 거라고요. 목표는 차근차근 이룰 수 있는 것부터 설정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오웬도 할 수 있겠죠.”

의기양양한 리케의 표정에 오웬은 얼굴을 구겼다. 미간이 좁아지고 턱이 우글우글해진 얼굴에는 ‘절대 싫다’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타협은 물론 타인이 만든 규칙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오웬에게는 불쾌하게 다가왔다. 오만상으로 거절한 그는 손가락과 입술에 묻은 크림을 핥았다.

그 가느다란 손과 새하얀 피부에서는 밥보다 간식을 즐겨 먹는 식습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충치와 비만, 고혈압 따위의 일은 마법사인 그에게 있어 먼 나라의 일에 불과했다. 만성적 승리를 거듭하는 오웬의 식습관을 악화시킨 데에는 비단 네로의 요리 실력만 있진 않았다. 마법관에 머무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에게 유했고 이는 그들의 현자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여기 있었네요. 얼음의 거리에서 편지가 왔어요, 오웬!”

“얼음의 거리? 왜 쌍둥이가 아니라 나한테 오는 건데?”

현자는 마법 없이 오웬을 찾아다니느라 체력을 소비한 모양이었다. 뛰어다녔는지 볼이 발그레했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웬에게 다가갔다.

“오웬한테 온 편지거든요. 과자집에 있었던 아이들을 기억하시나요?”

“기억 안 나.”

퉁명스레 대답한 오웬이 만사가 지루한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현자는 그 변덕스러운 태도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 아이 중 한 명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그때 그 과자집만큼 달진 않아도, 그래도 오웬을 위해 열심히 디저트를 만들었다고 해요! 궁금하지 않나요?”

“내 알 바야? 정 데려오고 싶다면 그 과자집보다 달콤한 케이크를 내 앞에 대령해서 무릎을 꿇고 빌어보라고 그래. 오웬, 제발 먹어주세요, 하고. 그 녀석들 꼴사납게 비는 건 잘했잖아. 상상만으로도 우습네. 하하….”

분리현상이 일어난 생크림처럼, 생기 없는 웃음소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느새 그는 무표정한 낯을 하고 있었다.

“아니. 역시 됐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으니 관두라 그래.”

그 목소리는 온도 없이 무기질적이었다. 차라리 차갑길 바랄 정도로.

대답에 온점이 찍히면 오웬은 언제나처럼 사라진 뒤였다. 기분파인 그의 행동을 종잡기는 어렵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과자를 먹을 수 있으니 평소보다는 수월하게 의뢰를 받아주리라고 생각했던 현자는 멋쩍게 웃었다.

“오웬, 또 사라져버렸네요….”

들고 있는 편지가 바람길에 흔들렸다. 어린아이가 흑연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도 일렁거렸다. 보답하는 마음이 새겨진 종이에, 오웬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떠났다.

편지를 들여다보는 현자 옆에서 리케가 불만을 토로했다.

“정당하게 과자를 먹을 기회가 왔는데도 사라지는 건 어째서일까요. 오웬은 늘 호의와 악의를 뒤집어서 반응하네요.”

“그렇네요.”

잡지도 못하게 종적을 감추었다. 이리저리 흩어진 접시와 포크만이 그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현자는 연기가 흩어진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손님이 떠났다면 자리를 치워야 함이 옳다. 친애하는 단골이 다음에도 방문하길 바라면서.

함께 식탁 정리를 하며 루틸이 물었다.

“그런데 현자님, 그 편지는 현자의 마법사들에게 온 의뢰인 걸까요?”

“아, 이건 말이죠…….”

 

 

*

 

 

“오웬에 대한 답례 겸 약초 채집 의뢰?”

루틸과 리케, 현자 뿐만 아니라 네로, 카인, 시노까지 식당에 모여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편지를 중심으로 6명이 둥글게 앉았다.

“네. 두 분은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니 설명하자면. 예전에 마을에서 쫓겨났던 아이들이 오웬이 만든 과자집에서 머무른 적이 있었어요. 지금은 다행히 스노우 님과 화이트 님이 수호하시는 마을에 머무르고 있지만, 오웬의 과자집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무사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늦게나마 오웬에게 답례를 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네요.”

“과연.”

“다행히 잘 지내나 보네.”

당시 의뢰에 동행했던 시노와 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훈련을 하고 온 건지 둘 다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런 둘에게 시원한 레몬 에이드를 한 잔씩 건네주며 네로가 물었다.

“약초는?”

“아, 마을에 아픈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 마음앓이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몽충초(夢蟲草)가 필요하다고…….”

“몽총초? 머리가 안 좋아질 것 같은 이름이네.”

“몽총초가 아니라 몽충초.”

“더 안 좋게 들리는데.”

“이름 이야기는 그만해….

어쨌든. 몽충초랑 마음앓이병이라고 했던가? 몽충초는 모르지만 마음앓이병은 들어본 적 있어. 일주일가량 속앓이를 하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먹던 음식도 게워내고 마지막에는 피를 토하며 죽는 병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약한 전염성이 있는 병일 거야.”

“네에? 그럼 큰일이네요…!”

“하하. 그렇게 기겁할 필요까진 없어, 현자 씨. 전염병으로 일컫기에는 전염성이 약하거든. 아무에게나 병을 옮기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까지 앓게 한다…. 그래서 이름도 ‘마음앓이’병. 직관적이지. 전염된 사람은 보통 환자의 연인에 한정될걸.”

“그렇군요. 그래도 큰일이에요. 의뢰서 내용대로라면 마을의 환자 분은 마음앓이병을 얻은 지 일주일이 넘으셨을지도 몰라요!”

“무사하셔야 할 텐데….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몽충초를 구해야 한다는 거죠? 약초는 어느 정도 알지만 남쪽에서 몽충초라는 약초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현자님, 그건 어떤 식물인가요?”

“아, 네. 여길 다같이 봐주시겠어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현자가 종이를 펼치자 다섯 마법사의 머리가 뭉쳐졌다. 바람에 날려 구겨진 자국이 생긴 종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빛나는 버섯에 벌레의 다리와 나비 날개가 달린 그림은 거친 펜 선임에도 무척이나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마법사 한 명이 비위 상한 얼굴로 물러났다. 네 개의 머리는 요지부동으로 남아 그림을 관찰했다.

“어머. 버섯과 곤충이 합쳐져 있는 것 같네요.”

“처음 보는 생물이에요. 북쪽 나라에서 자라는 건가요?”

“이런 거라면 제법 눈에 띄겠는데.”

“뭐든 상관없어. 필요하다면 닥치는 대로 주워주지.”

“다들 담이 세네….”

“하하. 네. 보통은 이렇게 생겼다고 해요. 또, 편지에는 모호하게 적혀 있어서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동충하초처럼 생긴 이 생물은 꿈의 숲 근처에서 발견하기 쉽다고 하더라고요.”

꿈의 숲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두 빈 접시를 바라보았다.

“답례와 의뢰. 어느 쪽이든 오웬이 가야겠네.”

“네. 다행인 점은, 채집 난이도가 높지 않아보여요. 마을 분들이 몽충초를 채집하지 못하신 이유가 꿈의 숲의 독을 인간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 외에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계시는 한두 분께 오웬과의 동행을 제안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오웬이나 여러분께서 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다른 분들께 부탁드려야겠지만요.”

마법사는 마음으로 마법을 사용하므로 현자는 언제나 강요하지 않았다. 설득과 회유를 한다 해도 선택은 결국 그들의 영역이었다. 현자는 ‘현자의 마법사’라는 책임을 앞세우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감싸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기에 현자는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다소 시간이 걸리는 방식을 고수했다. 왜냐하면 진심과 절박함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그들의 마법사들은 무척이나 다정했으므로 타인의 마음을 두고 쉽게 지나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바로 지금처럼.

“아아, 그렇다면 내가 가도 될까?”

멋쩍게 볼을 긁는 현자를 향해 카인이 손을 들어보였다.

“그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그때 오웬 상태가 이상했었으니까, 옆에서 봐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그 ‘옆에서 봐줄 사람’, 기사 씨로 괜찮은 거야…?”

“더 있어도 문제 없겠지. 나도 동행하겠어.”

대답의 주인은 시노였다. 컵에 꽂혀있던 레몬을 씹으며 시노는 네로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내쫓았던 마법사는 기분 나쁜 녀석이었어. 그 녀석이 그때 멋대로 굴었던 이유도 이해는 가. 그런 점에서 나도 동행해주지. 그리고 답례를 왕창 얻을 거야.”

“시노, 셔우드 숲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의뢰 정원이 2/3에서 1/3로 돌아가버렸다. 현자는 천천히 남은 마법사들을 살폈다.

리케를 꿈의 숲의 독성에 노출시키기에는 걱정이 되었고, 루틸은 남쪽에서 수업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마음앓이병을 알고 있던 네로에게 부탁해볼까. 현자가 고민하던 찰나, 카인이 입을 열었다.

“위험한 의뢰가 아니라면 나랑 오웬, 둘이서만 가는 것도 괜찮다고 봐.”

가볍다 못해 상큼한 수준의 목소리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북쪽의 마법사를 꺼리는 네로가 쩔쩔맸다. 이봐, 기사 씨. 오웬이 단 걸 좋아하긴 해도 북쪽의 마법사란 말이지. 둘이서 괜찮겠어? 정말로? 정작 호들갑을 떨며 걱정하는 그도 공들여 만든 음식을 오웬이 맛있게 먹을 때 흐뭇함을 느끼는 마법사였다. 현자는 다시 짧은 생각에 잠겼다. 카인은 접촉이라는 매개가 없으면 타인의 모습을 인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험한 의뢰는 아니다.

무엇보다 최근의 그는 오웬과 가까워질 시간을 찾고 있었다. 크림이 잔뜩 올라간 크레페를 한입 가득 베어무는 리케와 오웬을 보며 커피를 마시던 카인이 중앙의 나라 지도를 펼치며 카페를 체크하고 있던 광경은 그 증거 중 하나였다.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카인은 가게에 즉흥적으로 방문하길 즐겼으니까. 평을 일일이 확인하며 카페에 X자와 O자를 번갈아서 표시하는 일은 보통 히스클리프나 파우스트처럼 신중한 동쪽의 마법사의 몫이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까다로운 사람이랑 같이 갈 수도 있어서. 카인은 변명처럼 덧붙였고 아키라는 그 까다로운 상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파는 음식을 좋아하고, 까다롭고, 카인이 더 친해지고 싶어 하는 상대.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은 마법관에서 한 명 정도였으니까.

현자는 카인에게 편지의 낱장들을 건넸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야. 만약 오웬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설득해볼게.”

편지를 받은 카인은 맹세하듯 주먹을 가슴에 댔다.

그는 믿음직한 사람이지만 오웬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인 만큼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잦았다.

그럼에도 가볍게 설득을 말하는 모습은 어쩐지 오웬의 질린 낯이 떠오르게 만들어서, 현자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I

Dream

 


북쪽의 나라는 어김없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눈과 함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오웬은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으로 붙잡고 있었고 카인은 뺨을 치는 머리카락에 체념하고 걸음을 옮겼다. 오즈의 안 좋은 기분처럼 흐린 날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악천후에 빠질 것처럼 보였다. 옆에 있는 오웬의 기분은 이미 수렁 속인 듯했다.

“아아, 최악. 내가 왜 기사님 따위와 같이 가야 하는 거야.”

“옆에 듣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아줄래?”

“그런 거 신경 써야 해?”

“신경 써줘.”

“귀찮네….”

네가 할 말이냐…. 카인은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나뭇가지에 앉아 새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오웬을 임무에 데려오는 일은 생각보다 원활하게 풀렸다. 과자집 안에서 마주친 아이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과자에는 흥미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꿈의 숲을 오랜만에 가보고 싶었던 건지. 오웬은 잠시간 생각에 잠기더니, 흔쾌히 임무를 수락했다. 혼자 가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옆에서 오웬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여겼으므로 카인은 자신이 동행하면 좋은 점을 늘어놓았다. 사실상 설득보다 부탁에 가까웠다.

그러자 오웬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장난스러운 꿍꿍이를 품었을 때마다 나오던 미소. 카인은 그 얼굴을 알았지만, 그가 당장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넘어갔다.

오웬은 자주 싱글거리는 만큼 투덜거렸다. 좋게 말하면 희노애락이 분명했고 나쁘게 말하면 성가셨다. 카인은 모자챙으로 그늘진 옆얼굴을 곁눈으로 살폈다. 입꼬리가 무상하게 굳어있었다. 놀랄 정도로 직설적인 낯이다. 첫 만남에서는 어떻게 미소를 잃지 않았던 걸까. 이제는 신기할 정도였다.

싸우는 순간의 얼굴은 흐릿했으나 패배하던 순간만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피로 물든 시야 속에서 그 홀로 순백이었으므로. 그의 웃음이 기억 틈에서 서서히 떠오른다. 순식간에 빼앗긴 시선. 교차하는 두 눈동자. 달밤 아래에서 빛나던 유일한 색채. 오웬은 카인의 눈을 자신의 안와에 끼우고 웃었다. 달빛보다 환하고 서늘한 미소였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현실이다. 말을 할 때마다 입 안으로 들어가는 머리카락이 거슬렸는지 평소 수다스러운 그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감 없는 불쾌감이 얼굴에 묻어있었다. 카인도 조용히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편지를 따라온 곳은 얼음의 거리 외곽에 있는 우물 옆이었다. 한 가구가 살기에는 큰 집이라 도리어 마을 창고에 가까워 보였다. 바람이 거세게 분 탓인지 나무 문이 눈으로 하얗게 덮인 상태였다. 카인은 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똑, 똑, 똑.

세 번의 노크를 울리자 내부에서 활발한 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두꺼워서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어린아이 둘셋은 있어보였다.

문은 금방 열렸다.

“무슨 일이신……. 앗, 저번에 저희를 구해주셨던 마법사 분들이시죠!”

경계 없는 확인과 이어지는 환영. 이건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아이들은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카인은 기쁘게 웃음을 머금었다.

“맞아. 반가워. 다시 한번 소개하자면, 나는 카인. 그리고 이쪽은…”

“오웬 님. 맞죠? 은인은 기억해요. 물론 그때의 과자집도요!”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울리자 집 안에서 동조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맞아요, 맞아요. 겹치는 소리는 둘이었다. 카인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만든 과자집은 아니지만 기억해주다니 기쁜걸. 이번에는 나도 널 기억하고 싶어. 이름을 묻는 걸 허락해주겠어?”

“우와, 이야기 속의 기사님 같으세요. 저는 헨젤이라고 해요.”

헨젤이라고 말한 소녀가 손을 덥석 붙잡자 뒤에 있던 둘도 따라왔다. 저는 멘첸이에요. 저는 루이시예요. 이름과 함께 드러나는 모습은 목소리보다도 앳된 얼굴이었다. 몸을 움츠리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아이들의 시야는 낮았다. 쉽게 자라지 못한 아이들. 북쪽의 삶이었다. 국가는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고 마을은 그들을 지킬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한 마을이라는 단어는 그저 공간을 포괄하는 단어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소속감을 가질 만한 중심조차 없었기에.

그들처럼 북쪽에서 자랐을 오웬은 먼 발치에 서 있었다. 좋은 청년 같은 얼굴에는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

“나한테 답례를 하고 싶다고.”

“맞아요! 사죄이기도 해요. 저희가 멋대로 과자집에 들어갔잖아요. 남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는데, 죄송했어요. 그리고 감사했어요!”

“알긴 아네.”

웃는 오웬은 웃지 않는 오웬보다 차갑다. 그는 변온동물처럼 자신을 바꾸었다. 북쪽의 마법사치고는 기이한 점이었다. 오즈나 미스라 같은 마법사들은—아서와 플로레스 형제가 연관되지 않은 이상—어떤 상황이 들이닥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상황도, 사람도. 자신과 상관없는 자연적 현상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오웬은 달랐다. 오웬은 언제나 사람을 보고 있었다.

지금도, 그는 헨젤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과자는? 어디 있어?”

“들어오시면 대접해드리려고요! 오늘은 날씨가 안 좋으니 잠시 쉬었다 가세요. 몸도 녹이고, 단 것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헤에. 당분은 집이 아니라 네 머릿속에 있는 모양인데.”

“네?”

“잠깐, 오웬.”

“다물어. 내가 말하고 있잖아.”

팔을 붙잡는 카인을 내치고 오웬이 헨젤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이면서. 아름다운 눈동자가 헨젤을 직시했다.

“있잖아, 헨젤. 지금 네 상황은 누군가에게 답례를 할 정도로 여유로워? 당장 이 집도 난로 주위를 빼면 바깥과 다를 바 없이 추운데, 몸을 녹이라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지. 구차한 자기위로에 불과해. 아, 너희가 있어서 따뜻해. 다행이야… 하고.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것뿐이라고. 그런데? 그래서 정말 나아진 게 있어? 그런 거, 다 착각이잖아. 고향에서도, 과자집에서도, 이 얼음의 거리에서도. 너희가 처한 상황은 변하지 않았어. 너희는 여전히 약하고, 타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소리 없이 걸어온 오웬이 헨젤의 뺨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가죽장갑이 살갗을 눌렀다. 부드럽지만 다정하진 않은 손길. 그 손길은 헨젤의 목으로 향했다. 가볍게 누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너희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럼에도 유달리 달콤한 목소리가 귀에 녹아서, 날카롭게 벼린 말들은 모두 살얼음처럼 달라붙는다. 순간의 서늘함은 곧바로 떨어진다. 손끝에 닿은 물만이 흘러내릴 따름이다. 그래서 헨젤은 상처받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은 예고 없이 내리는 폭설과 같다. 그건 북쪽의 일상이었다.

“알아요. 알고 있으니까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가진 것을 나누는 순간 모두 죽는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모두를 선택하는 순간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다. 적어도 누군가는 살아있어야 했다. 따라서 북쪽의 아이들은 먼저 우선순위를 배운다.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선택해야 하는 것, 그건 바로 자신이라고. 왜냐하면,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이 무용해지기에. 삶은 언제나 선생 노릇을 했다. 옳고 그름 없이 존재만 남긴다.

헨젤은 오웬의 손을 떼어내듯 잡았다.

“당장 오늘 동사해도 이상하지 않죠. 가지고 있는 식량은 오래 두면 썩어버리는 데다가 우연히 구한 열매들은 다른 음식보다 더 빨리 먹어야 해요. 불에 오래도록 졸이면 잼이 되고 얼음을 끓여 만든 물에 넣으면 차가 되지만 그것만으로 살 수는 없고요.

하지만요, 이런 생활 없이 살 수도 없어요. 저희는 과일의 단맛을 알아버렸고 따뜻함을 알아버렸어요. 각인된 걸 잊지 못하니까 좇는 거예요. 물론 바로 죽어도 괜찮다는 소리는 아니지만요. 그래도 오늘에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답례하지 못한 걸 후회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오웬 님. 이 집에 당신을 초대해도 될까요?”

그러자 오웬은 입을 삐죽였고.

“이미 손 잡고 있잖아.”

모두가 웃었다.

 

 

*

 

 

멋대로 굴었던 시간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머핀을 입에 욱여넣은 오웬이 남았다. 간식을 삼키고 난 뒤에는 달지 않다는 투정을 덧붙였지만 말과 손은 별개라는 듯 아이들이 준비한 간식은 차근차근 사라졌다.

“멍층쳐? 어히가 그어 어흐케 아아?”

“입에 있는 건 넘기고 말해. 헨젤, 몽충초에 대한 건 어떻게 알았어?”

있으니까 먹는다는 단순명쾌한 행동의 연속. 카인도 간식을 입에 넣었다. 적당히 단맛이 입맛에 맞았다.

“마법관에 보내는 편지니까 마을에 필요한 내용도 적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을 곳곳을 방문하면서 물어봤어요.”

“덕분에 마을을 도울 수 있게 됐네. 고마워. 그런데 마법사가 있으면 몽충초는 채집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 마을에 마법사가 한두 명 정도는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채집할 때 혹시 따로 주의할 점이라도 있는 걸까.”

“계시지만 다들 꺼리시길래…. 위험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당연하지. 몽충초를 주우려면 꿈의 숲 쪽으로 가야 하잖아.”

열매 줄기로 손장난을 치던 오웬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시선과 손은 여전히 열매 줄기를 향해 있는 채로 그가 말했다.

“몽충초는 꿈의 숲 외곽에서 많이 자라는 생물이야. 몽충초가 자라는 과정은 간단해. 시체에 마법 버섯이 포자를 뿌려. 버섯은 그 시체에 기생해서 자라. 분해될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들이니 성장 속도가 빠르지. 육안으로 보일 정도야. 뭐랑 섞으면 독과 마력이 적절한 작용을 해서 진통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어쨌든 시체가 있어야 자라는 게 몽충초야. 꿈의 숲에 있는 독은 그런 시체를 배양하기에 딱 적당한 환경이고. 대부분은 그게 꺼림칙하다고 손사래를 치지. 무엇보다, 꿈의 숲은 내 영역이거든.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들어올 리가.”

오웬이 열매 줄기를 접시에 던졌다. 리본 모양으로 묶인 줄기가 빈 접시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간식을 먹은 탓인지 오웬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말하다 보니 가고 싶어졌어. 오랜만에 가볼까나.”

“응?”

“안녕. 잘 따라와, 기사님.”

말을 던지고 순식간에 연기처럼 흩어진다. 미스라도 아니고 갑자기 사라지다니. 기다려, 오웬! 허공에 손을 뻗은 카인은 허망해졌다.

“아하하. 깜짝 놀랐네요. 마법사는 이런 것도 할 수 있군요.”

“미안. 보다시피 제멋대로라서. 그래도 그렇지,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말이야. 집에 들어올 때도 놀랐지?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사과할게.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생각보다 덜 어린아이 같은 분이셔서 재밌었어요.”

“덜? 어떻게 상상했었길래?”

“음…. 거창하게 생각한 건 아니고요, 과자집을 만든 마법사니까 동심 없이 성숙한 사람이면 어색할 것 같다? 그냥 그 정도로 생각했어요.”

의외의 대답에 카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가. 그런 건가…. 목소리를 내지 않고 혀 위에서 대답을 굴렸다. 다양한 가치와 편견이 망막을 흐리게 뒤덮은 어른들보다 아이들의 사고가 더 정확할 때도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몽충초는 어디로 가져가면 될까? 약제사가 있는 곳?”

“네. 자기 집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으니, 몽충초는 바로 자기한테 주면 된다고 약제사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약제사님 집 위치는, 어……. 죄송해요! 분명 다녀왔는데, 편지 쓰기 전에 이곳저곳을 다 방문해서 그런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정말 죄송해요.”

“그렇게까지 사과 안 해도 돼. 괜찮아. 마침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궁금했거든. 대화할 거리가 있어서 좋네.”

“카인 님은 정말 성격이 좋으시네요. 감사해요…….”

과자집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건지 북쪽 나라에서 사는 아이치고는 마법사를 두려워하지 않던 헨젤이 실수 한 번에 바로 주눅 들었다. 그들을 살게 하는 것도 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힘이었다. 카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뱉었다.

“혹시 내가 더 도와줄 게 있을까?”

“네?”

“나는 마법사지만 기사이기도 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돕고 싶고, 그럴 만한 능력도 충분히 있어. 필요한 게 있다면 기꺼이 손을 보태고 싶어.”

무릎을 꿇는 듯한 어조로 카인이 말을 건넸다. 헨젤은 그 말을 금방이라도 낚아챌 것처럼 망설이다가,

“아뇨. 지금으로 충분해요.”

뒤로 물러났다.

“예전에도, 지금도. 무수히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더 받으면 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따로 보답하지 않아도 돼. 나한테는 네 미소가 답례니까.”

“기쁜 말이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예요. 그러니까, 환경의 차이인 것 같아요.”

“환경의 차이?”

거절을 당할 것이라는 선택지를 열어본 적은 없었다. 세상은 선행과 호의로 굴러가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으니까. 자선으로 만들어진 구조는 분명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헨젤이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인 님께서는 마법사시지만 군림하거나 하지 않으시죠. 저 같은 어린아이도 동등한 한 사람으로 여겨주셔서 기뻤어요. 그렇지만, 뭐라고 할까요. 저한테는 어색해요. 익숙하지 않네요.

질책, 질책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난감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어서요. 선물을 받을 때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느껴져서 들뜨게 되지만 정작 그 선물을 보는 순간에는 곤란해지잖아요. 둘 곳도, 쓸 곳도 없어서 방치하게 되는 선물이요. 그래서 저는 마음만 받고 싶어요. 사실은 그 마음이 다른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이기도 하고요.”

얼음을 한 웅큼 쥐고 비비기만 하면 될 정도로 깨끗한 접시. 쓸쓸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집안.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오웬의 말이 맞았다. 집안은 냉랭한 공기로 가득했다. 그러나 헨젤은 장작과 불꽃을 마다했다. 그것이 온 마을을 불사르기라도 할 것처럼.

“기껏 생각해주셔서 말씀하신 건데 죄송해요….”

“아냐. 억지로 받는 것보다 낫지. 말해줘서 고마워.”

지켜야 할 규칙이 명확한 기사단과도, 서로 나누며 돕는 일이 일상인 중앙과도 다른 세계가 카인의 곁에서 떠돌았다. 이해하고 싶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간극은 여기에서 비롯된 거였을까.

카인은 어린아이 앞에서 상냥한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 낯을 헨젤이 찬찬히 뜯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 님께서는 오웬 님과 친해지고 싶으신 건가요?”

마음을 꿰뚫듯 목소리가 들이찬다. 카인이 허둥지둥하자 헨젤이 웃었다.

“이런 걸 맞추는 데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헨젤은 눈치가 엄청 빠르네.”

몰래 하던 일을 들킨 기분이다. 어쩐지 얼굴이 뜨거워져서, 카인은 애꿎은 앞머리를 매만졌다.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을까?”

“글쎄요. 저는 오웬 님을 많이 보지도, 알지도 못해서 확답은 어렵지만… 지나온 궤적을 살피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지나온 궤적.”

“네. 집이나, 가족, 자라온 환경 같은 거요.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그 이유는 경험에 있기 마련이니까요. 당장의 저도, 과자집을 보기 전의 저와 본 후의 제가 다른 거든요.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잼 만들기는 평생 시도도 안 했겠죠.”

“헨젤의 잼, 맛있었어.”

“이히히. 칭찬 감사해요.”

“나야말로, 초대해줘서 고마워.”

주인공이 사라진 티 파티는 다행스럽게도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함께 그릇을 모으고 의자를 집어넣은 뒤 일어났다. 함께 설거지를 하겠다고 말하는 카인을 향해 헨젤이 고개를 저었다. 오웬 님을 찾으셔야죠.

지체할 시간도 주지 않고 헨젤은 카인의 등을 밀었다.

“저, 카인 님을 응원할게요.”

상냥하고도 견고한 어조. 손잡이가 돌아가면 문이 열린다. 카인은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설원으로 나섰다.

나무 문을 닫고 맞이하는 바람은 혹독했다. 대화할 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외로워질 정도로.

북쪽은 살아 있는 생물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환경이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앞으로 뻗은 손끝마저 뒤덮었다. 추웠다. 사무치게 추웠다. 인간이었다면 방향감각마저 둔해졌을 것이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눈밭, 온통 눈밭. 아득할 정도로 눈부신 설원은 이물질을 허용하지 않았다. 새하얀 풍경은 이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착각이 들도록 만든다. 하지만 떠나온 마을이 있음을 알았다. 저 너머에도 타인은 있다. 보이지 않을 뿐.

갑작스레 웃음이 나왔다. 평소의 자신과 비슷한 상황 아닌가. 외로움이라니, 새삼스러웠다. 카인 나이트레이는 빗자루에 올라탔다. 씁쓸함이나 외로움 따위의 감정에 무뎌진 적은 없다. 마법사임을 밝히지 못하면 답답했고 자신의 일부를 빼앗기면 분했으며 사람이 곁에 없으면 체온이나 목소리가 그리웠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이를 잊기 쉬웠던 것에 불과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저 멀리 오웬이 있다. 눈보라에 가려져 찾기는 어렵겠지만 카인은 그 사실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오웬은 닿지 않아도 보인다. 그는 오웬의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오웬도 마찬가지일 테다.

“늦었네. 기사님.”

오웬은 언제나 사람을 보고 있었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면 눈이 마주쳤다. 같은 눈동자를 넘어선 시선. 카인에게는 언제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으나 오웬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무관심하게 카인을 훑더니 먼저 방향을 틀었다.

“저번처럼 홀리지 마.”

단조로운 목소리다. 문득 카인은 현자가 들려주었던 동화를 떠올렸다.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돌을 떨어트린, 어떤 남매의 이야기. 은색으로 빛나는 돌멩이는 그들이 돌아갈 방향을 알려주었다. 오웬이 내려놓은 말도 비슷했다. 그는 길가에 널린 흔한 단어로 선명하게 말했다.

…아니, 틀렸다. 카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대단치 않게 말하는 내용을 카인이 주웠다. 이 이야기는 겨우 그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오웬은 천 년의 시간을 무신경하게 흘리고 다녔다. 나이에 구속되지 않았으나 경험은 그의 모든 행동에서 묻어나왔다. 지나온 궤적이었다.

카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발목 높이에서 흔들리는 망토, 사락거리는 은색 머리칼, 머리통에 알맞게 푹 누른 모자, 나뭇가지와 새를 친근하게 만지는 손길… 그리고…

“…홀리지 말라니까.”

잊을만하면 귓가에 닿는 목소리.

음성의 형태를 가진 눈꽃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옅은 미성에는 웃음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곁눈이 간지럽다.

“어? 으응. 미안.”

“사과할 건 아니고. 실수를 반복하지 말란 소리야. 꿈의 숲은 저번에도 왔잖아.”

“그랬지.”

“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제대로 걸을게.”

한숨처럼 코웃음 친 오웬이 다시 앞장섰다. 카인은 그 뒤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너를 보고 있었어. 그 말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어째서였는지. 그는 대신 다른 말을 건넸다.

“몽충초는 어떻게 찾으면 돼?”

“나무 근처에 있어. 고개를 숙이면서 걸으면 보일 거야.”

“응.”

“손바닥 크기가 넘는 건 줍지 마. 환자에게도 독이고 네가 감당하지도 못할 거야. 손가락 크기 정도면 충분해. 마디나 손톱 정도여도 괜찮고.”

“크기가 천차만별인가 보네.”

“아무래도. 어떤 생물이 죽었느냐에 따라 다르니까.”

“그렇구나.”

“응.”

대화는 단조롭게 끝났다. 이야깃거리를 더 던져볼까 싶었지만 어떤 것도 오웬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 같아 카인은 묵묵히 나무 근처를 돌아다녔다.

눈을 빼앗는 풍경으로 가득한 숲은 찬연하게도 빛났다. 형형색색을 이루는 돌들이 흰 도화지 같은 길에 색을 덧댔고 우묵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는 거리의 사람들만큼이나 당당하게 서 있었다. 환상처럼 아름다운 공간이다. 도무지 이 세상의 공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숲은 수많은 생명의 목숨을 가져간 자리였다. 몸을 잠식당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동물들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반투명해진 몸이 은하수처럼 푸르게 빛났다. 이름에 꿈(夢)이 들어간 이유가 여실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 없이 변하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느라 뻐근해진 목을 풀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오웬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몽환적인 색채에 둘러싸여 평범한 이들이라면 말 섞지 못할 생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안정하면서도 침착하고, 기분이 나쁜 듯 즐거워했다. 풀어헤칠 수 없는 실들이 오랜 시간 얽히고설키다가 이윽고 꼬여버린 형상이었다.

어디에도 속할 마음이 없기 때문일까. 그는 쉽게 다가오고 쉽게 떠났다. 이 세상에 자신을 붙잡는 건 없다는 태도였다. 이천 년 넘게 살아온 오즈는 매사에 진지해서 서툴렀는데, 샤일록보다 적게 살았다던 이 녀석은 왜 만사를 가볍게 여기는 건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카인은 무의식적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또 다른 인기척에 새들이 날아갔다.

생명과 죽음도 먼 곳에서 바라보는 두 눈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야, 그 얼굴은. 기사님답지 않게.”

이유가 자신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카인은 구태여 알려주는 대신 다른 답을 했다.

“…시체에서 자라는 버섯이라니, 역시 조금은 징그러워서….”

“뭐야, 어린아이 투정? 기사님이라 해도 역시 아이는 아이인가 보네. 이런 걸로 무서워하다니.”

“무섭다고 말하진 않았어.”

“무서운 게 아니면 뭐야. 어느 쪽이든 거부감이 든다는 거잖아. 재밌네. 기사님, 여기 봐. 네가 싫어하는 몽충초야.”

카인은 얼굴에 들이밀어진 몽충초를 보고 진심으로 기겁했다. 눈앞에서 손바닥 크기의 벌레가 꿈틀대는 광경은 단 한 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카인이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자 오웬이 신나게 웃었다. 악취미였다.

“넌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야….”

“하하. 이미 죽은 벌레나 보고 겁먹은 기사님이 이상한 거야. 전(前) 기사단장도 허접하네. 아, 그렇지. 다음에 중앙의 기사단을 놀릴 때는 벌레떼를 가져갈까나.”

카인은 하늘을 가득 채운 벌레떼가 기사단을 덮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3초 뒤에 관뒀다. 끔찍했다. 아주 끔찍했다. 그런 기사단은 보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스 기사단장과 카인 기사단장에 이어 아토스 기사단장까지 3연속으로 흉한 일을 맞이한다면 그 자리는 이제 중앙의 기사단장 자리가 아니라 마가 낀 자리로 불러야 할 테다.

“기사님. 얼굴이 썩어가는데.”

“너 때문이잖아.”

“아하하.”

오웬이 몽충초를 쥔 손에서 일렁거리는 색채가 흐르고, 떨어진 진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인간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고, 마법사로서 살아가게 된 어떤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웬은 카인 나이트레이를 죽이지 않았다. 그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다고 믿었다. 카인 나이트레이는 의문을 품었다.

“죽은 건 움직이지 않잖아. 무서워할 이유가 어디 있어?”

무엇이 죽음보다 두렵단 말인가?

“기사님은 이상해.”

도대체 무엇이,

“네가 죽인 것도 아니면서.”

두려웠을까.

이상하게 숨이 무거웠다. 공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처럼 느껴졌다. 답답했다. 심장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살아있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초조해져서 앞에 놓인 것을 붙잡았다. 쿵쾅거리는 고동과 함께 속삭임이 고막 안쪽에서 돌고 돌았다. 하염없이 되새김이 이어진다. 차분해서 더 기이했던 목소리, 단조로운 어조.

네가 죽인 것도 아니면서.

어째서, 어째서 그 말이 도와달라는 소리로 들렸을까.

지금 당장 묻고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해 거센 호흡 사이로 마음이 터져 나온다.

 

어디로도 도망갈 필요 없어.

그러니 피하지 마.

가지 마.

삶을 모른 채 혼자 살아가지 마.

 

같이 있자…….

 

이 마음이 그에게 닿았을지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그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손에 쥔 검은 과거의 영광이자 현재를 밝히는 광명이었다. 충성하는 국가를 지키는 기사로서의 긍지였고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마법사로서의 명예였다. 그건 목숨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검을 치켜들자 앞날은 밝게 펼쳐졌다. 그 앞에 사랑이 있었다. 기억이 있었고 신념이 있었고 마음이 있었다. 모두 존재를 이루는 요소들이었다. 카인은 자신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았다. 하나같이 밝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으므로 그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다. 서투름과 미약함마저 감내할 수 있었다. 아쉬움은 훗날의 성장을 위한 자리였다. 비단결의 백마가 없는 대신 두 다리가 건재했고, 순은을 두르지 않아도 그는 기사였다. 그러므로 카인 나이트레이는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었다. 절벽이라 하여도 불구덩이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바라보는 이상에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떨어질 터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이 생에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목숨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가치를 찾아 계승하는 데에 있으리라. 고귀하고 고결한 것.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정의를 잇는 것.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 카인은 그를 믿었다. 사랑하는 이 세계에 보답하고 싶다. 그 마음만큼은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 아래에서 카인은 뒤를 돌았다. 그곳에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이 놓여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도 없었다. 다만, 그저.


황량한 설원, 그 자리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사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의식을 후벼팠다. 눈을 뜨니 낯선 벽이 보였다. 애초에 카인에게는 북쪽의 나라에 익숙한 장소가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카인은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충동의 반동으로 일어나니 코앞에 오웬이 있었다. 오웬이 살기를 내뿜었다.

“한가한 기사님. 놀러오기라도 했나 봐? 북쪽으로 휴가 나오다니 취향도 독특하지. 혹시 죽고 싶어?”

“죽고 싶지는 않아.”

“정신이 들었으면 손부터 풀어. 기사님 잠꼬대는 무식한 힘 자랑이야?”

“힘 자랑이라니 무슨… 헉.”

카인은 다급하게 오웬의 손목을 놓았다. 오웬이 혀를 차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불쾌함과 통증이 미간에 껴 있었다. 카인은 식은땀이 흘렀다.

“미안. 내가 어쩌다 오웬을 잡은 거야?”

“그야 정신을 못 차린 기사님이 꿈의 숲의 독에 또 당해서지!”

“아파!”

모자챙으로 맞는 매질은 예상보다 아팠으나 자신의 잘못을 알았기에 잠자코 맞았다.

익숙한 신경질을 받으며 카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중앙에 비하면 서늘하지만 북쪽치고는 따뜻한 온도가 코에 닿았다. 공기 중에는 쌉싸래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집은 평범한 목재 건축물이었고 한쪽 벽면에는 각양각색의 열매와 풀이 거꾸로 걸려 있었다. 대부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중앙과 북쪽은 그 기온 차이만큼 생태계도 다른 탓이었다.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창문도 없었다. 한쪽 벽면은 집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난로와 조리기구가 차지했고, 나머지 면들은 책장으로 꽉꽉 채운 공간. 짐작컨대 약제사의 집이었다.

묘한 위화감이 드는데.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카인은 뒷목을 주물렀다.

“독은 독이라 치고, 목은 왜 뻐근한 거지?”

“기사님이 멋대로 쓰러졌길래 그냥 끌고 왔거든.”

“쓰러진 사람은 좀 살살 다뤄줘.”

이제 보니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에, 옷에는 쓸린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바르게 정돈해두었던 옷차림이 무용하게 돌아갔다. 카인은 머리카락을 다시 묶으며 속삭였다.

“집 주인은?”

“물어볼 필요 있어? 기척 안 느껴지잖아. 여기 없어.”

오웬이 평범하게 말하고 카인이 속삭이는 희귀한 상황이었다. 카인도 머쓱하게 성량을 되돌렸다.

“불법 침입한 거야?”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제대로 약제사의 집을 찾아서 들어왔어. 주인이 없었을 뿐.”

“그게 불법 침입이야.”

카인은 이마를 짚었다. 일부러인지 진심인지. 그러나 곧이어 앞머리를 넘겼다. 이미 벌어진 일은 신경 쓰지 말자. 카인은 대신 몽충초의 존재를 확인했고, 다행스럽게도 몽충초는 침대 옆에 있었다.

푹신한 침대 이불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던 오웬이 입을 열었다. 작게 움직이는 입 안쪽에서 발음이 약하게 뭉개졌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 상황.”

“상황? 잘 모르겠는데. 뭔가 이상한 거라도 봤어?”

카인이 멀뚱멀뚱 바라보자 오웬이 불만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아니,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짐작이 안 가서 그래. 내가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없었어. 이상하다는 건 이 의뢰 자체를 말하는 거야.”

독촉하듯 오웬은 턱을 까닥거렸다.

묘한 약초 향이 머무르는 집은 몸의 긴장을 풀어주었으나 머리가 잘 돌아가도록 만들진 않았다. 만지고 있는 이불이 푹신푹신하다는 감촉만 다가왔다. 아, 이러니까 졸리네. 나른해진 카인은 침대에서 내려와 오웬 옆에 쭈그려 앉았다. 여전히 오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카인의 표정에 오웬이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어린 기사님은 모르는 눈치네. 뭐, 좋아. 설명해줄게.

인간이면 몽충초를 발견하기 전에 죽어버리니까 몽충초에 대한 건 잘 몰라. 마법사도 보통은 죽고 싶은 놈들만 꿈의 숲을 찾아오니까 몽충초의 생김새는 알아도 그걸 약초로 쓸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지. 이 마을도 그래. 인간도 마법사도 잘 모르던데. 마법사치곤 약한 애들만 두어 명이었어. 오래 살지도 않은 모양이었고. 그런데 약제사는 안다고 했지. 그건 어째서일까? 대답해봐.”

“갑자기? …그래도, 약제사는 마법사일 확률이 높겠네.”

“흥…. 대답은 할 줄 아네. 그래. 그중에서도 오래 산 마법사일 확률이 높겠지. 오래 산 마법사들은 대체로 강하니까. 나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꿈의 숲 정도는 갈 수 있을 거야. 애초에 나는 마법사보다 인간들한테 접근하는 편이니까.”

자신을 아는 마법사라면 시도했을 법도 하다는 투. 카인은 의아했다.

남들에게 관심이 없는 오즈도 그 명성은 동서남북중 전국에 떨친 마왕이었고, 미스라 역시 루틸과 미틸의 어머니와 알고 지낼 정도의 관계는 있었다. 마법사 전용 주점을 열고 있는 샤일록이나 학자로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무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오웬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마법사나 역사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물어도 언제나 괴담 같은 답만 돌아올 따름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마라, 이야기를 나누지 말아라, 만나는 순간 바로 도망쳐라…. 마치 보면 안 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언젠가의 카인도 그를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 사실은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도.

긴 세월을 살았다면 세계에 미친 영향이 있을 법도 한데,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가오는 친애도, 원한도 없었다. 죽여달라는 애정의 갈구도 오웬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입 안에 넣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것. 그 이상 이하로도 취급되지 않았다.

오웬이 무관심하게 말했다.

“북쪽에 오래 살면서 내 이름을 듣지 못한 마법사가 있을 리 없고, 나를 아는 북쪽의 마법사가 겨우 약초 채집 때문에 나를 부려 먹을 일도 없어. 그런 하찮은 짓을 한다면 내가 죽여버릴 게 분명하니까. 그런데 그 약제사는 나를 불렀어. 내게 답례를 주고 싶어서 나를 초청하는 편지에, 나나 다른 북쪽의 마법사들만 알 법한 몽충초를 덧붙이면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잘… 모르겠는데.”

오웬은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망토 자락이 펄럭였다. 벼려진 미소가 서늘했다.

“바보 같은 기사님. 이 마을에 마음앓이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없어.”

거센 바람이 문을 두드렸다. 형체 없는 힘이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매달린 약초가 하나씩 떨어졌다. 말라비틀어진 약초는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바스라졌다. 쾅쾅쾅. 억지스러운 바람 때문에 나무가 새된 소리를 내었다. 비명 같았다.

“있었던 적도 없어.”

벌컥. 문이 열렸다. 눈길이 향과 온도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숨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자는 없었다. 오웬은 천천히 일어나 몽충초 더미를 카인에게 던졌다.

“그 풀떼기들은 미끼야. 어린아이들 호의에 넘어가 덫에 걸린 불쌍한 기사님. 의뢰는 완수했으니 이제 돌아가지 그래.”

“오웬 너는 어쩌려고?”

“나? 당연한 거 아니야?”

일 년에 한 번 ‘거대한 재앙’이 다가오는 것처럼, 지극히 익숙한 나날을 말하는 어투. 그가 웃었다.

“겁 없는 마법사의 얼굴을 봐줘야지.”


오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마법사를 감싸고 있던 집이 무너졌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지붕은 내려앉는 대신 분해되듯 사라졌으며 집안의 가구와 소품들은 가루처럼 흩어졌다. 모두 날아가 싸락눈이 되었다. 침대까지 녹아 사라져버렸다. 눈의 군무였다. 카인은 급하게 일어났다. 그 가운데에서 카인은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막을 통해 보호받는 감각. 카인이 쓴 마법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한 명 정도다.

“안 가고 뭐 해? 빨리 가.”

백지처럼 하얀 배경에 파묻힌 채로 오웬이 재촉했다.

“너랑 나 외의 마력 기척은 안 느껴지는데?”

“그야 아직 안 왔으니까.”

“그럼 아직 안 가도 되는 거 아니야?”

“…기사님은 바보야? 아직 안 왔으니까 갈 수 있는 거지. 왔으면 도망도 못 쳐.”

“도망치지 않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질린다는 음색이 눈보라를 뚫고 귓가에 닿았다.

카인은 오웬이 하고자 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았다. 북쪽에서, 오랫동안 산, 강한 마법사가 이곳에 올 것이다. 그를 카인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카인도 알았다. 알았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미련해도, 어리석다 욕을 먹더라도. 오웬을 두고 떠날 수 없다. 그와 동행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자신의 선택을 박차고 나오는 선택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싸우겠지. 카인이 하이파이브를 하는 빈도로 북쪽의 마법사는 싸우고 다녔다. 밥 먹듯 싸우는 이유를 카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받아들이게 된 지는 어느 정도 되었다. 싸움은 그들의 긍지이자 유희였다. 동시에 그들이 강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 강함을 동경했다. 적어도 카인에게 있어 강함이란 지킬 수 있는 이가 많음을 의미했다. 당장 지금 오웬이 친 보호막처럼. 그의 인성은 영 좋지 않다고 여기지만 그의 판단이나 마법 실력만큼은 본받을 만한 부분이었다.

그 속내를 파헤치기라도 했는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상대는 보지도 못할 텐데, 의미 있어?”

하이얀 망토가 눈 앞을 가렸다. 닿지 않는 이상 싸우는 상대를 보기 어렵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중요한 건 오웬이 싸우는 방식을 보는 것이었으므로, 오웬만 보인다면 상관없었다. 카인은 오웬의 얼굴이 있을 만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건 묘한 흥분이 감도는 낯이었다. 웃음을 참듯 다물린 입과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간 입꼬리. 예리하게 휜 눈매와 찡그린 눈썹. 그리고 번들거리는 눈동자. 가느다란 동공에는 기대감이 박혀 있었다. 어린 짐승이 떠오른다. 오웬은 사냥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는 어떤 불가해였다. 그가 기다리는 건 승리나 증명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결과는 부차적인 부산물에 불과했다.

중요한 건 싸우는 행위 그 자체였다. 성공과 실패의 틈새에 낀 채로 오웬은 투쟁을 즐겼다.

대화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건 순간적인 낙담이었던가. 환경의 차이. 헨젤의 말이 공기로 와닿았다. 야생과 문명. 갈등과 평화. 무력과 대화. 온갖 선택의 위로 눈이 쌓였다. 이어지지 않은 소리가 그대로 덮였다. 오웬은 여전한 낯을 띄우고 있었고 망토 자락은 하염없이 휘날렸다. 카인의 머리카락은 단 한 올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 부동(不動)은 곧 오웬의 변화를 의미했으나 동시에 경계로 느껴졌다. 보호가 필요 없을 정도로 약함을 뛰어넘는다 한들 이 선까지 넘어서진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는 홀로서기를 무척이나 즐기니까.

각자의 세계와 세계가 부딪히는 것에 환희할지언정 침범하진 않는다. 원치도 않는다. 다만 세계의 틀을 견고하게 쌓아 올릴 따름이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 고독하기에 자유로운 이.

너는 그곳에서 몇 년을 살아왔나.

아득한 시간 너머에 오웬이 서 있었다.

이어서 기억이 펼쳐진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느껴진 체온, 쏟아졌던 밤하늘의 대화. 눈부신 햇빛을 받은 그는 잼으로 붉게 물든 손톱을 바라보고 있었고, 미소 지은 입가에는 크림이 묻어있었다. 등을 맞대지는 못했지만 곁을 내어주었던 순간이 있었다.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이윽고 다시 전환. 그는 붙잡히지 않았다.

오웬은 이제 카인을 뒤로 하고 서 있었다.

“그래. 좋아. 보고 싶으면 마음껏 봐. 죽어도 나는 모르니까.”

목소리에 묘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던 것도 같다. 늘 그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말하는 얼굴이 궁금했는데.

《쿠아레·모리토》.”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 트렁크가 열렸다. 크르릉, 위협적인 짐승 소리가 허공을 꿰뚫었다. 번견 케르베로스는 주인을 지키듯 나섰다. 사이가 안 좋다고는 하지만 사역할 수 있을 정도면 어느 정도의 유대는 있는 걸지도 모른다. 카인은 시큰거리는 복부를 쓰다듬었다.

세 갈래로 나뉜 머리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았다. 순응과 굴종은 달랐던가. 케로베로스가 다시 한번 짖었다. 하늘에 하울링이 울려퍼졌다. 핏빛을 띠고 있는 여섯 개의 눈동자가 한 지점을 응시했다.

이윽고, 허공에 아지랑이가 생긴다.

모든 개가 뛰쳐나간다. 이빨을 드러내고, 손톱을 들어 올린다. 눈보라를 뚫은 털이 예리하게 바짝 선다. 그것들은 경계한다. 동시에 흥분한다. 보이지 않는 적을 물어뜯을 순간을 기다린다.

이빨 사이로 흘러나온 침은 눈길에 닿기 전에 얼음이 되었다. 추락한 얼음 조각들이 쌓여 있는 눈을 파헤쳤다. 얼음은 그 속에 갇혔다. 눈이 다시 얼음을 덮었다. 순식간에 얼음을 묻은 무덤이 수십 개 세워졌다. 케로베로스가 무덤 위를 내달리며 허공을 찢었다. 바람이 크게 울었다. 갈라진 환각 사이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모든 꿈을 섞은 듯한 색의 연기와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몽환적인 색채.

“이토록 화려한 환영이라니.”

들린 것은 백야처럼 밝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고, 고요한 음성이었다.

 

마치, 달밤의 빛처럼.





II

Quare Morito


달도, 별도 눈과 구름에 가려진 하늘이었다. 오직 태양만이 빛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잠들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펼쳐진 광경은 설원의 환상처럼 엿보였다. 하얀 하늘에 하얀 땅, 그리고 하얀 마법사. 앞에서는 검은 개가 몸을 낮춘 채 연기 너머의 누군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선명한 색채 대비였다.

오웬은 카인에게 보이지 않는 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빛을 받는 옆모습에서, 노란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카인은 앞머리를 들어 올리며 연기에 둘러싸인 곳을 쳐다봤지만 재앙의 상처는 오늘도 성실하게 그의 시각을 막았다. 그러나 시각만으로도 상대를 판단할 수 없었는지, 오웬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뭐야?”

사람에게 할 만한 대사는 아니었다. 오웬은 케로베로스처럼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제가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건너편에서는 꿈결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묘하게 허스키하고 중성적인 음색은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제 이름은 엔데. 당신을 부른 까닭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랍니다.”

“대화? 지루한 소리를 하네.”

대답 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질적인 감정이 섞인 음이었다.

누군가가 오웬의 미소를 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오웬은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를 붕 뜨게 만들었던 열기가 식어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차라리 싸워서 이겨.”

그건 분명히 언젠가에 보았던 얼굴이었다. 달큰한 향기가 코를 찌르고, 아이들의 비명과 눈물도 숨겨주던, 어느 과자집에서 보았던 얼굴.

자신을 엔데라고 소개했던 이는 여전히 웃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군요.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않는군요.”

눈 밟히는 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진다. 으드득. 그 소리는 뼈를 짓이기는 소리를 닮아있었다. 얼음의 무덤을 밟으며 그는 다가왔다.

목적은 싸움이 아니었던 걸까. 걸음걸이에서는 어떤 열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주 조용하고 단단한, 수백 년 동안 세공된 이질감이 맡아질 뿐이다. 실로 기이한 감각이었다. 보이지 않는 그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가까워졌다.

“옆에 있는 마법사는 누군지 모르겠지만요. 처음 뵙는 분, 제게 이름을 알려주시겠어요?”

허공과 눈이 맞은 듯하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는 혀 밑에 칼을 숨기고 꿀을 머금고 있었다. 그건 오웬을 향한 적의였을까? 그 발원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는 카인도 여러 번 겪었다. 카인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다시 바람이 불자 구름이 겹겹이 쌓였다. 태양은 그 두께를 뚫지 못했다. 땅에 그림자가 졌다. 공기가 음산했다.

《쿠레·메미니》.”

오웬은 나직한 주문으로 쇠사슬을 불렀다. 사슬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허공에 떠오른 ∞자 쇠사슬을 보아하니 손목을 묶은 모양이었다.

“뭐 하는 거야.”

“당신의 이름은 알지만 저 분의 이름은 몰라서요. 정중하게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실례였을까요?”

“실례야.”

모자 아래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신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카인은 그 눈을 알았다. 기사단에서 대련할 때 자주 마주했던 눈동자다. 그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진 않았지만, 칼을 뽑지도 않았다. 대신 망토를 시야에서 걷어내고 손을 내밀었다.

“난 괜찮아. 나도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거든. 내 이름은 카인 나이트레이. 오웬과 같이 현자의 마법사로서 일하고 있어.”

“카인 나이트레이. 멋진 이름이군요.”

“고마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행히 손을 잡자마자 기절하는 등의 거창한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가벼운 악수였다. 그제야 엔데의 모습이 보였다.

드러난 이는 꿈을 빚어 만들어졌다고 설명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환상적인 마녀였다. 우아한 무늬가 인상적인 옷은 몸을 따뜻하게 보호하고 있었고, 연보라색의 머리카락은 끝으로 갈수록 짙푸른 색을 띠었다.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일렁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유성우처럼 밝은 흰색의 브릿지가 보였다. 앞에 놓인 눈매는 상냥했으나 반만 넘긴 앞머리 탓에 한쪽 눈동자에만 그늘이 져 있었다.

비대칭의 명암을 한 채 엔데는 카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법사치고는 두터운 손이었다. 손가락 끝이 붉었고 붕대로 엄지와 손목을 감싼 상태였다. 쌉싸래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약제사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카인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편지에는 거짓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웬이 난폭하게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기사단에서 대체 뭘 배운 거야. 중앙 놈들은 돌진밖에 몰라?”

“그건 아니지만. 사람을 그렇게 막 다루지 마.”

“여자라면 죄다 에스코트 해야 하는 줄 아는 녀석의 말은 들어봤자지. 이봐, 넌 마법사잖아. 왜 그렇게 불편한 차림인 거야. 애초에 나를 부른 이유는 뭐고.”

카인은 오웬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엔데는 인간처럼 입고 있었다. 털과 천을 겹겹이 두른 옷은 추위를 막아줄지언정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건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마법사가 있을 법한 옷이 아니었다.

엔데는 눈을 내리깔다가 수줍게 웃었다.

“아, 이건…… 전에는 제가 인간인 줄 알았거든요.”

“인간?”

오웬이 눈썹을 치켜떴다.

“네. 모두가 저와 같다고 생각했어요. 엄청 강대한 힘, 산을 부수고 땅을 갈라 호수를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만 마법사인 줄 알았고, 저는 그 정도의 마법은 쓰지 못했으니까요. 처음 가는 숲에서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빨리 달리는 짐승을 쉽게 사냥하는 건 제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마법사로 불리는 건 정말 이상한 느낌이네요. 마법에 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하고.”

“그야 마법사니까.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 왜 날 불렀어? 싸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긴장감이 느슨해진다. 나른하게 늘어진 은색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느리게 하품하는 모습은 햇빛을 받는 고양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여유로운 행동은 그가 맹수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카인은 칼자루에서 손을 미끄러트려 검집을 잡았다. 실례되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카인은 거리낌 없이 굴었다. 엔데는 이름을 물어볼 때부터 칼자루를 잡은 카인의 행동에 대하여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경계를 풀지 않을 이유로 작용했다. 카인은 계속 실례를 범하기로 했다. 엔데는 여전히 적의를 품고 있었다.

엔데가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방향이었다.

“오웬은 저를 모른다고 했죠.”

“…….”

“이걸 묻고 싶었어요. 당신은 어째서 당신의 죄를 잊었나요?”

차갑고 거친 음성이다. 웃음소리에 섞여 있던 이질감이 드러난다. 원망, 분노, 슬픔. 부정적인 감정이 눈덩이처럼 굴러간다.

일그러진 목소리를 따라 불온한 안개가 태양을 삼킨다. 졸음이 몰려왔다. 케로베로스가 잠들고, 환하게 내리는 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람이 일었다. 거센 폭풍 속에서 세 마법사가 서 있는 자리만이 고요했다. 만들어진 밤이었다.

《쿠레·메미니》.”

《무니모스》.”

두 마법사의 영창이 겹쳤다. 자색과 은색의 마력이 부딪혔다. 파쇄된 빛은 눈을 부시게 했다. 엔데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엔데는 끊어진 쇠사슬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고개는 여전히 외딴 곳을 향해 있었다. 꿈의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 오웬은 여전히 무감한 낯이었다.

“어째서 죽었어요?”

그는 울지 않았다. 그저 오웬에게 다가가 물을 뿐이었다.

발자국을 남기고 오웬의 앞에 선 엔데는 손을 앞으로 뻗어 오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카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행동을 닮아있었다.

옅은 경멸을 미소에 머금은 채 오웬이 말했다.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을 더듬거리는 손을 용케 치우지도 않고 오웬은 엔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은색의 눈동자는 마주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연민과 같은 숨결이 그의 귀에 닿았다.

“북쪽은 힘이 전부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주제에 잊은 거야?”

세상으로부터 세 마법사를 유리시킨 폭풍이 서서히 흩어졌다. 오웬은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았다.

북쪽의 낮과 밤은 시기를 탄다. 몇 개월 동안 태양이 가라앉지 않는 시기가 있노라면, 반년 동안 세상이 어둠에 잠기기도 한다. 공중에 흩뿌려진 얼음의 유해가 찬란하게 빛났다. 일곱 개의 색이 빛을 감쌌다. 애도하는 다이아몬드 더스트. 이 자리에는 셀 수 없는 죽음이 모여 있다.

“누구도 구하러 와주지 않아. 너를 구하는 건 너 자신밖에 없어. 자연을 탓해도, 타인을 탓해도, 불운을 탓해도. 결국 괴로운 건 너 하나뿐.

그러니까 꿈 깨. 여기 네가 찾는 건 없을 테니까. 《쿠레·메미니》.”

광활하게 펼쳐진 이 설원에는 기댈 나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웬은 쓰디쓴 은단을 삼킨 것처럼, 찡그린 미소를 지었다.

선명한 보라색의 빛이 환상을 부순다. 잠에서 깨어난 케로베로스는 트렁크 안으로 들어가고 허공을 장식하던 얼음 조각들은 가루처럼 바스라지며 가라앉는다. 다시 북풍이 분다. 눈은 혹한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을 분별하며 지나간다. 꿈을 닮은 마법사는 오웬을 붙잡고 무너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그의 숨은 꼭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들려오는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오웬, 아직 키스해본 적 없죠?”

“하? 갑자기 무슨 소릴,”

덥석.

제대로 된 대답이 이어지기도 전에 오웬의 입이 틀어막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짙은 풀 내음이 났다. 꿈의 숲에서 가져온 몽충초 더미가 어느새 짓이겨져 있었다. 무지개색의 체액이 고름처럼 질척거렸다. 갈라진 갑각 사이로 반투명한 내용물이 질질 새어 나왔다. 카인은 그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는 모두 터져 있었다.

손으로 코를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카인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거 아시나요? 꽃은 시들기 전의 향기가 제일 강하다고 해요.”

오웬을 향하던 분노는 오웬에게만 향해야 하는 것처럼, 엔데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다른 식물도 마찬가지랍니다. 짓이기면 짓이기는 대로 향이 강해져요. 그건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발버둥일까요? 적어도 저는 단언하지 못해요. 이건 단순히 저의 추측에 불과하니까요.”

고요한 말과 달리 그 입술과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피를 닦기 위해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으나 핏자국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크게 번졌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었다. 그가 서 있는 바닥에도 피가 흥건했다. 카인은 내려다보았다. 웅크린 오웬의 얼굴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카인이 급하게 검을 뽑았다.

“오웬! 엔데에게서 떨어져! 《글라디어스·프로세라》!”

《쿠와레·모리토》.”

오웬의 두 눈이 격정으로 번들거렸다.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는 채로 그는 트렁크를 열었다.

《무니모스》.”

엔데가 그 트렁크 내부에 마법을 쏟아부었다.

터져 나오는 마법이 엔데의 마법과 섞이자 섬광이 터졌다. 어둠을 불사르고, 이 땅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빛이었다. 눈동자에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실명할 것처럼 눈이 뜨거워졌다. 카인은 넘어지지 않게 발을 뒤로 디디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의 겹까지 뚫을 정도로 환한 빛이 지나간 뒤에서야 카인은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오웬! 괜찮은 거야? ……엔데, 대체 뭘 한 거야?”

짓이겨진 몽충초와 흩뿌려진 피, 그리고 공백.

눈을 감기 전과 여전한 풍경 속에서 오웬만 보이지 않았다.

엔데는 손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약간의 입맞춤, 그리고 마법을 썼어요.”

그는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카인은 그제야 확신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한다.

“…오웬은 강한 마법사인데, 어떻게.”

“아무리 강해도 약점은 있잖아요.”

카인은 그나마 다행이라 꼽을 수 있는 점을 찾았다. 첫째, 오웬이 사라지자 엔데의 적의도 사라졌다. 둘째, 엔데는 적어도 평화롭게 대화할 마음이 있어 보였다. 카인을 숨을 가다듬기 위해 깊게 호흡했다. 일단 이야기를 나눠볼까.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알 필요가 있었다.

카인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오웬은 어디로 간 거야?”

“글쎄요. 이동마법을 쓸 줄은 몰라요.”

“그래…. 그럼 당신에 대해 물을게. 당신은 몇 년 동안 살았어?”

“20년 정도일까요.”

“20년이라고?”

“의외인가요?”

의외인 정도가 아니다. 당장 마법관만 봐도 어린 마법사가 오래 산 마법사를 이기는 건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어린 마법사 중에서 가장 마력이 강한 아서도 파우스트를 쉽게 이기진 못할 것이다. 실력은 단순히 힘의 영역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 쌓은 지식과 요령이 그들의 실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며 자란 마법사가 오웬을 상대하다니.

정작 그 당사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피칠갑을 한 채로도 평온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는 카인은요?”

“나? 나는 22살이야.”

“나이 차가 별로 안 나는군요. 그러고 보니 마법사는 마력이 전부 다 성장하면 신체 성장이나 노화가 멈춘다고 들었어요. 카인도 멈췄나요?”

“아직. 좀 더 클 수 있어.”

“그렇군요. 그럼 오웬은 언제 멈췄으려나요.”

“그건 나도 궁금하긴 해.”

“겉모습이나 실제 나이와는 별개로, 무척 어린아이 같긴 하지만요.”

“강하면 남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생각하는 걸까.”

“강하면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질 것 같은데요. 내가 아끼는 것들이 나로 인해 망가질까 염려되어서요. 아, 그렇지 않아서 강한 걸지도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강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 엔데가 소리 없이 웃었다.

“당신은 상냥하군요. 이런 이야기 아시나요? 어떤 어린아이는 인간이든 마법사든 상관없이 신기한 것을 보거나 듣는다고 해요. 밤에 잠들기 전에 부모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어린아이들만이 그런 신비한 광경을 경험할 수 있기에, 주인공이 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왜 자라고 난 뒤에는 그러지 못할까요?”

성장통은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통증을 선사한다. 신경 쓰이지만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아픔. 그 고통은 금방 지나가는 고통으로 여겨진다. 그 사이 몸은 변화하고 마는데도.

전환된 대화 주제에 정지한 카인을 두고, 엔데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세계와 연결점이 생기면, 신비는 힘을 잃는다고.”

“연결점이라 하면?”

“비밀이 밝혀지는 거죠. 별이 떨어지는 계기를 알게 되고, 마법을 쓰지 않으면 날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낮에 태양이 뜨며 밤에 달이 뜨는 구조를 파악하게 되는 거예요. 비밀은 근원과 맞닿아있고… 그리고 그건, 존재 자체를 알도록 만들 거예요.”

전혀 모르겠네. 카인은 말을 삼켰다. 이것도 기질이 달라서인가? 떨어지는 별을 붙잡아 보고 싶단 생각은 해 봤으나 저 별이 왜 떨어지는지 질문한 적은 없었다. 당연하다 여겼던 일에 인과가 있다니. 그건 돌연변이처럼 태어나는 마법사에게도 적용되는 말일까.

빛은 잡을 수 없다. 그 사실을 몰랐던 유년기가 있었다. 새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운하에 담겼던 어느 여름날. 검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궤적을 그리며 떨어진 별들을 따라 달린 적이 있었다. 이름 모를 별을 쫓아가던 그는 기사가 아닌 한낱 어린아이였다.

강물을 떠도 건질 수 없었던 빛무리는 하늘을 비추었다. 마법을 쓰지 않는 마법사는 하늘을 보았다. 일렁거리는 달이 그의 눈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세계를 파괴할 재앙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 빛은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아름다운지, 별이 궁금했던 적은 없지만 달에 물음을 던진 적은 있었다. 마음이 요동치던 밤에 퐁당 빠트렸던 질문. 파동처럼 울리던 속삭임.

너는 어째서, 이 세계에 닿으려고 하는 거야.

“달이 가까워질 때 마력이 강해지는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엔데의 눈동자는 달을 닮았다.

“그건 아마, 달이 외로움을 나누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긋나는 시선을 가졌으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우리는 모두 달의 마음을 가졌어요. 곁에 있는 이에게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치죠. 하지만 그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이에요.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견고하고, 마음이 세상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그건 당신이 말했던 ‘연결점’이야?”

“비슷해요. 세상의 영향을 아주 받았다면 존재는 존재만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으로 마음을 만들었을 테니까요. 마음은 타인과 구분되는 절대적인 무엇이지만, 일부는 이어질 수 있잖아요.”

어려운 말이었다. 오즈한테 마법 수업을 받을 때와 비슷했다. 알 듯 말 듯 했지만 설령 알게 된다 한들 말로써 표현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았다.

엔데가 물었다.

“제 말을, 이해하시나요?”

카인 나이트레이는 엔데를 바라보았다. 엔데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화할 이가 없어도 외롭고, 대화하는 이가 있어도 외롭다. 탄식처럼 내뱉은 숨이 하얗게 새어 나왔다. 정녕 삶의 동반자는 고독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온 힘을 다해 부정하고 싶다. 반박하고 싶다.

“사실은 그것마저 실패일 거예요. 우린 모두 같지 않으니까요.”

주군과 마음을 나누었던 날이 등을 두드리고 지나간다. 주군과 손바닥과 자신의 손바닥이 만나고 서로의 손가락이 상대의 손을 감싸쥔다. 그 안에서 퍼지는 체온이 있었다. 주문과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마법이었다. 카인은 눈을 감았다. 심장의 소리가 들렸다.

“달라져 버렸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카인은 심장이 있는 자리 위에 주먹을 얹었다.

“이 세계는 다채로우니까, 함께할 수 있으리라 믿어. 그래서 내가 네게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니 대답해줘. 오웬에게 대체 뭘 한 거야?”

“…그가 궁금하세요?”

“물론.”

살아있지 않은 눈을 한 채로 엔데가 안면을 굳혔다.

“그럼, 그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궁금하세요?”

“듣고 싶기야 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들어주세요. 그로 인해 피해와 고통을 겪은 이들이 있고, 그가 악인이고 죄인이라면. 그를 향한 처벌은 어디로 갔나요?”

“엔데.”

팔을 움켜쥐는 손길에 카인은 숨을 들이마셨다. 웬만한 장정보다도 억센 악력이었다.

“당신은, 오웬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건가?”

“무척이나.”

마녀의 감정은 노골적이다. 모든 정동을 해부한 것처럼. 노골적으로 진열된 감정에서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원한이 화석으로 굳은 것만 같다. 그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파헤친 과거였다.

“시간이나 그가 앗아간 모든 것들을 되돌려달라는 소원은 빌지 않겠어요. 제가 겪은 것을 카인에게 하소연하는 짓도 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 그에게 묻고 싶을 뿐이니까요. 그저 과거를.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왜 그걸 잊어버렸는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카인은 자신을 붙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갖은 상처는 피부를 굳히고 단단하게 만들지만, 이건 그가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지나치게 견고한 흉터였다. 점점 거세지는 손길을 카인은 천천히 떼어놓았다.

“엔데. 정말 20년밖에 안 살았어?”

“…….”

앞머리로 인해 그늘진 안면 위에서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빛을 받는 것이 아닌, 빛을 내는 것만 같은 색이었다. 그가 속삭였다.

“달이 가까워졌거든요.”

거대한 재앙이 일으킨 이변.

시간을 뛰어넘어, 세계에 붙어있을 연(緣) 없이, 그는 홀로 서 있었다.

“…다시 소개할게. 나는 현자의 마법사, 카인 나이트레이. 1년에 한 번 오는 ‘거대한 재앙’을 무찌르기 위해, 그리고 ‘거대한 재앙’으로 인해 발생한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마법사야. 지금부터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카인은 한 발을 뒤로 물리고, 엔데를 향해 정중하게 목례했다.

오웬과 다르게 그는 풍경에 녹아 사라지지 않는다. 짙푸른 색채가 완연히 남아 자취를 그린다. 거대한 알베도 위, 선명한 빛 아래. 그는 그림자 없이 서 있다. 하늘에서 별이 아닌 밤의 조각이 떨어진 걸까. 그렇다면 그는 하늘이 다시 주워갈 이였다.

엔데도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멋진 일을 하시네요.”

“별말씀을. 그리고, 하나 더 들어주지 않겠어?”

“무엇인가요?”

“사실은 오웬도 나와 같은 현자의 마법사야. 그래서 그를 찾는 데에도 당신의 협력을 구하고 싶어. 당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편하지만은 않아. 하지만 그를 찾고, 그가 당신에게 준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부디 알 기회를 줘.”

“그가…….”

엔데는 신발 밑창에 묻은 몽충초 진액을 눈밭에 비볐다. 하얀 눈이 무지개색으로 물들었다.

“지금 그가 세계를 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용서하고 싶진 않아요. 그건 제가 그를 용서할 이유가 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당신에게 이양할게요. 저는 그저 그가 궁금했거든요. 이해하지 못한 건 마음에 남으니까요. 비록 오웬 자신조차 모를 테지만, 콜록.”

갑작스레 그가 기침을 했다. 비릿한 향이 쏟아졌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엔데를 보았다. 알고 있는 냄새였다. 그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었다.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마지막에는 피를 토하며 죽는 병. 카인은 그 병명을 안다.

“마음앓이병…….”

“맞아요. 되살아날 때 병도 같이 살아났더군요. 카인, 몽충초만으로는 마음앓이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걸 아시나요? 후후, 모르시겠죠. 그럼에도 제가 이걸 부탁드린 이유는…….”

그는 몽충초 더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더미를 파헤쳤다. 피가 묻은 한 손에 무지개색 진액을 담고 다른 손으로 피와 진액을 섞었다. 어떤 작용이라도 일어났는지 혼합물은 반투명한 분홍색으로 변모했다. 엔데는 그 질척한 결과물을 입에 담았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통증은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몽충초 진액을 피와 섞으면 진통제가 되거든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마음앓이병을 치료하지 못하죠….

마음앓이병은 발병자를 사랑하는 사람까지 아프게 하기 때문에 마음앓이병이라 불러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그들의 감정이 아니라 접촉이에요. 연인이 가장 많이 전염되는 이유는, 마음앓이병의 전염 경로가 체액이기 때문에.”

“체액? 잠깐. 엔데, 당신 설마…….”

“누구도 그를 감히 처벌하지 못했거나 그에게 복수하지 못했다면, 그 몫은 당사자인 제게 있을 테니까요. 남에게 맡기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

후련하게 웃어 보였다. 카인은 마주 웃지 못했다.

엔데는 담담하게 입가를 닦았다. 핏자국이 덧대어졌다.

“저는 아마 다시 죽게 될 거예요. 갑작스럽게 되살아났고, 여전히 마음앓이병을 앓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카인이 저를 배웅할 필요는 없어요.

다행이에요. 돌아가기 전에 오웬을 볼 수 있어서. 죽은 이들을 위한 고루한 축제보다 낫네요.”

“오웬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묻고 싶은 것도 있지만, 묻어버리고 싶은 것도 있거든요.”

“…….”

“반 진담, 반 농담이에요.”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줘.”

엔데가 가볍게 웃었다.

“그를 구하고 싶으신가요?”

“당연하지. 그 녀석은 내 동료야.”

“정말로요?”

그는 망설임 없이 카인의 앞머리를 파헤쳤다. 붉은 눈이 박힌 자리 부근을 손끝으로 쓸었다.

“이상해요. 그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을 텐데.”

그건 어쩐지, 숨이 막히는 이야기였다.

“아무도,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어째서 당신이 외롭다는 표정을 하시나요? 그건 본능에 충실한, 생물다운 자기보존이에요. 생존은 생명을 가진 모든 이들의 미덕이잖아요. 사랑은 면역체계의 파괴고요. 그런데….”

시각 없이 세상을 보는 눈. 엔데의 손길이 다정했다.

“그는 왜 자신을 나누었을까요.”

이 세계에는 밝혀지지 않은 미지가 너무나 많다. 세계가 돌아가는 구조와 마음의 원리조차 불분명하다. 그러나 카인은 세기의 지자(智者)도, 세상을 굽어살피는 성자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파헤치고 포용할 정도의 성정은 되지 않는다. 그는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자리에서, 마음이 닿는 이들과 함께할 뿐. 설령 그 이유에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엔데가 눈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카인. 그가 살길 바라나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럼 조언 하나 해드릴게요. 그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케이크를 먹을 때는 포크를 쓰라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케이크를 먹을 때 포크도 안 쓰는 녀석이 있으니 이 비유는 적절치 않은가. 애초에 죽어도 죽지 않는 마법사를 두고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용할지도 몰랐다.

카인이 곤란한 표정을 하자 엔데는 고개를 내렸다. 늘어진 머리카락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소리 없이 웃었던 것도 같다.

“마음앓이병이 전염되는 이유는 일상적인 애정 표현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답니다. 그건 바로 치료를 위함이에요. 환자 본인의 피와 몽충초 진액의 혼합, 거기에 더해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거든요.”

“한 가지 조건? 그게 뭔데?”

“마찬가지로 입 안에서 섞이는, 타인의 피예요.”

몽롱한 향 탓인지 그의 목소리까지 고막 안에서 웅웅거렸다. 시체에 기생하는 마법 포자. 그리고 환자의 피를 삼키는 치료제. 돌고 도는 순환의 고리 같았다.

“치료제가 무사히 만들어지면 함께 살 테고, 아니라면 함께 죽겠죠. 미리 만들어둘 수도 없는, 약제사로서는 아주 성가신 병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치료법을 운명의 동반자라고 불러요.

그 속삭임만은 선명하게 꽂혔다.

왈칵, 그가 피를 흘렸다. 코와 입, 눈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데도 그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평온하게 서 있었다. 연고 없이 지금의 세계에, 엔데는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했다. 원인은 있었으나 동기가 없는 부활이었기에 돌아가고자 하는 그에게는 미련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제 떠날 시간이군요.”

“잠깐만, 엔데…!”

“어째서 그런 얼굴이신가요. 애도는 필요 없어요. 카인도 카인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길 바랄게요.”

“당신은 어디로 가? 당신의 고향은, 꿈의 숲이야?”

“꿈의 숲? 처음 들어보는 장소인데요. 하지만…….”

두꺼운 옷이 붉게 젖어 들었다. 새된 목소리로 그가 웃었다.

“무척 마음에 드는 이름. 가보고 싶네요.”

그것이 마지막 미소였다.

굳은살로 가득하던 손, 유성우처럼 아름다웠던 머리카락, 달을 닮은 은색의 눈동자. 그가 지녔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바람이 흔적을 앗아간 자리에는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마나석이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그에게서는 아주 비리고 씁쓸한 향기가 났다.

카인은 그 차가운 돌을 오래도록,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자리의 눈이 녹아 다리가 축축했다. 정수리와 어깨에 눈이 쌓인 탓에 숨을 내쉴 때마다 조금씩 하얀 눈이 떨어졌다. 하나의 죽음에도 눈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모든 생물이 이 눈에 파묻히지 않도록 힘차게 살아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리 위에 누군가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찼다. 커다란 매가 토끼의 목을 물고 날아갔고, 흰 사슴이 눈밭을 내지르며 달렸다. 남긴 발자국이 한 시간만 지나도 사라지는 이 나라에서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반복되는 만큼 무뎌지기 마련이다. 긴 세월을 살아가는 마법사들은 삶을 망각의 연속이라 불렀다. 추위를 잊을 만큼 높은 도수의 술을 함께 들이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잊고 싶지 않았다. 어렸던 날도, 하늘에 내리는 유성우도, 지키지 못한 이들도. 카인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살아서 그들에게 꽃을 바치고 싶었다.술잔을 내려두고 꽃다발을 드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다.

인간은 죽으면 육신을 남기지만 마법사는 죽으면 영혼을 남긴다. 마음의 힘은 그 유해에 담긴다. 그러나 그 죽음의 주인을 증명할 길이 현저히 적으므로 그들의 무덤은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훼손되기 마련이다. 누구도 마법사의 유해로 그 삶을 유추할 수 없다. 편히 잠든 얼굴도,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는 골격도, 쓰다듬을 머리카락도 남지 않는다. 다만 아름답게 빛날 뿐이다.

말 대신 빗자루를 타고 등자에 발을 걸었다. 날아오른 빗자루는 바람을 가르고 숲을 넘었다. 카인은 엔데에 대한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고향, 가족,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의 생활과 첫 번째 죽음까지도. 그 무엇도. 그 대신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았다. 그는 기억하고 싶었다.

카인은 손에 쥔 마나석을 바라보았다. 엔데는 애도가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카인은 그를 만나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기어코 기억의 지도에 십자가가 그려진다. 이전 ‘거대한 재앙’의 공격으로 인해 손수 묻어주었던 자들의 위치 셋, 그리고 오늘 생길 북쪽의 무덤 하나.

이 마나석을 먹지 않은 게 훗날 어떤 방식으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보고를 위해 마법관으로 가져가고 싶지도, 자신이 삼키고 싶지도 않았다. 푸르게 빛나던 마녀는 본인이 그토록 증오하던 마법사를 살릴 방법을 알려주었다. 죽으면 그 어떤 책임과 죗값도 물을 수 없음에도 마지막에 그는 웃었다. 왼눈이 따끔거렸다. 카인은 하얀 뒷모습을 떠올렸다. 엔데가 사라지게 만든 마법사는 마음앓이병으로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어쩌면 엔데는 그에게 죽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증거 없는 유추가 이어진다. 죽은 이의 생각을 짐작하는 일은 수도 없이 해보았다. 자책과 의문의 사이에서 서 있을 때마다 그랬다. 그건 미제의 굴레였다. 그와 직접 대화하지 않은 이상 영원토록 알 수 없음을 이해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생각하게 되는 소실. 사라진 것들은 모두 마음에 구멍을 뚫는다. 또 다른 인연으로 커튼을 쳐도 바람이 부는 날이 있다.

시야 끝에 다채로운 색채가 걸렸다. 얼음처럼 맑은 가지와 눈처럼 밝은 잎사귀가 카인을 반겼다. 상념은 먼 길도 가깝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환상적인 공간. 꿈의 숲이었다.

카인은 꿈의 숲 안쪽으로 들어가 무성한 잎 사이로 빛이 떨어지는 땅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두 손으로 땅을 파헤쳤다. 최대한 깊게 판 뒤 마나석을 묻었다. 오웬이라면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그건 차라리 다행이라고, 카인은 생각했다. 무수히 많은 생명을 삼킨 주제에 그 무게를 짊어지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죄악일 것이다. 살아갈 책임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카인 나이트레이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그는 부모님의 결실이었으며 영광의 거리의 자랑이었고 중앙국에서 사랑받는 전 기사단장이자 세계를 지키는 현자의 마법사였다. 그는 자신을 사랑한 세상에 보답할 마음이 있었다. 덧붙여, 애도 역시. 증오와 원망 따위의 감정이 카인 나이트레이라는 개인에게도 향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역할은 자신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홀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오웬은 어떠한가. 카인은 오웬이 없는 곳에서 그를 되새겼다. 그는 자신에게 역할이 주어진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언제나 짓궂은 북쪽의 마법사라는 배역을 고집했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능숙하지 않았다.

그는 관객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다. 공포와 악의를 원했다. 그러나 토마토와 계란이 아닌 꽃다발이 날아오는 피날레에서 오웬은 미소를 잃었다. 무대에 난입한 관객을 마주친 배우처럼, 혼자가 익숙한 일인극의 배우처럼. 그는 배우가 아닌 이에게도 대본을 기대했다.

천진한 장난은 그를 어린아이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자라지 않은 건지 자라지 못한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오웬은 그랬다. 무엇도 분명하지 않고 모호했다. 혈연도, 고향도 알 수 없는 미상의 인물. 속박이 없기에 군데군데 빈 공백 사이에서 자유롭게 거닌다.

연결점인가. 꺾은 들꽃을 무덤에 바치며 카인은 엔데의 말을 되새겼다. 오웬은 동물과 대화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는 신비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오웬은 아직도 동물과 대화할 수 있었다. 세상의 방식으로 마음을 만들게 되면 신비는 힘을 잃는다. 동물들에게 친절한 그는 그 외의 것에게 배타적으로 굴었다. 카인은 고개를 들어 올려 수풀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다가가자 날아가던 새가 떠올랐다. 오웬은 먼 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카인은 왼쪽 눈가를 매만졌다. 엔데의 질문은 곧 카인의 질문이 되었다. 묻고 싶었다. 왜 너는 너 자신을 내게 나누었냐고. 그저 앗아가기만 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니냐고. 거짓말쟁이 기사의 눈이 왜 가지고 싶었고, 금색의 눈동자를 가진 다른 이들과 자신의 눈동자는 무엇이 달랐던 건지. 그 모든 질문의 대답을 오웬에게서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이제야 이 인연의 시작이 궁금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붙잡을 만한 발목조차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맹독처럼 아름다운 나무 행렬과 작은 주민들뿐. 오웬의 눈알도 요지부동이었다.

“음… 일단 진액부터 담을까!”

그 녀석은 강하니까. 카인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이미 마법관에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마음앓이병의 치료법은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방법을 시도하기 전에 이미 혼자 한번 죽고 되살아났을 경우도 있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카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시도했다. 만약의 보고를 위해 마법관에 돌아갈 마력 정도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카인은 품에서 아뮬렛을 꺼내, 병에 담긴 물을 무덤에 부었다.

“엔데, 부디 편히 돌아갔길 바라.”

애도에는 짧은 묵념이 잇따른다. 카인은 백 번의 기도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고 여겼지만, 전통적인 예의를 어기진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이어진 행위의 고결함을 알았다. 특히 리케와 전 현자의 마법사들 이야기를 했을 때의 반응이 인상에 남았다.

중앙의 변방으로 임무를 간 마법사들끼리 남쪽 향토 음식을 주제를 대화로 나누었던 결과로, 저녁에 롤리토데폴로가 나온 날이었다. 네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브래들리와 리케가 서서 이전 현자의 마법사였던 남쪽 할머니 레시피를 알려주던 모습에 웃음이 나왔었다.

롤리토데폴로는 무사히 완성됐고, 그것을 먹기 전에 다같이 기도를 올렸다. 리케가 말했다. 이 저녁은 단순히 우리를 위한 식사가 아니에요. 우리 이전에 있었던, 이 자리를 지켜주었던 모든 이를 생각하며 그들을 기리고 그들에게 감사를 올리는 식사 자리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다같이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리케는 아주 심지 굳은 모습으로 그리 말했었다. 카인 또한 이전 현자의 마법사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받았으므로 기꺼이 그 제안을 승낙했다.

종교를 가진 적이 없어 어색하기도 했으나, 먼저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았던 리케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는 직접 보지 못한 이를 위해서도 진심을 다해 기도하는 이였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그런 마음으로 카인도 기도를 했다. 기도를 올린 뒤 먹었던 롤리토데폴로는 브래들리가 가져온 와인과 잘 어울렸다. 즐거운 저녁이었다.

진심을 꺼내고, 바라는 행위. 카인은 기도가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얼굴을 꼭 보고 싶을 정도로.

떠올랐다. 그 녀석이 했던 것이었다. 익숙한 침대에서 붕대로 칭칭 감긴 채 들었던 클로에의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기억은커녕 의식조차 없었던 틈을 타, 그는 마음을 주고 떠났다.

이따금 그 사실이 아쉽게 다가왔다. 그는 자주 기분이 안 좋았고, 생각보다 더 무표정했으며, 악한처럼 웃고 다녔으니까.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카인도 질려버리기 일쑤였다.

카인은 일어나 꿈의 숲을 돌아다녔다. 연기처럼 돌아다니는 분홍색 토끼와 파란 뺨을 가진 작은 새가 수풀과 나뭇가지 이곳저곳에서 보였다. 이런 귀여운 생물도 돌아다닌단 말이지. 유령인가 싶을 정도로 색채가 옅은 동물들도 꿈의 숲의 독에 적응한 생물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했다. 한 방울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맹독 개구리의 크기는 손톱만 하다는 사실도 연달아 떠올랐다. 의외의 면모는 사실 진화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무르는 그런 식으로 말하며 발견의 즐거움을 주장하겠지만.

카인은 풀이 돋은 새의 사체 앞에서 멈춰 섰다. 반투명해진 새는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긴 비행을 하던 도중 날개를 쉴 자리를 찾다가 도달한 곳이 꿈의 숲이었던 모양이다.

“미안해. 실례할게.”

늘어진 새의 날개를 손끝으로 쓰다듬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키진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카인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새의 배를 갈라 체액을 병에 받았다. 끈적하고 투명한 액체가 담겼다.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보면 그것은 무지개색으로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만약을 위해 이파리도 한두 장 뜯어 넣었다. 쌉싸래한 향이 났다.

예상보다 임무가 늦어진 만큼 현자가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카인은 몽충초 진액을 받은 병을 단단히 밀봉한 뒤 단검과 함께 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발을 내딛는 순간.

“…아, 윽…”

불쑥 오웬의 눈알 안쪽에서 찌를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눈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눈동자에는 미동조차 없었음에도 당장 안와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감각이 들었다. 현기증이 났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눈을 통해 카인을 보호해준 적은 있어도 그의 위기 상황이 카인에게 전달된 적은 없었다. 오웬이 죽었을 때도 그의 눈은 반응하지 않았다. 의도 없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쪽은 언제나 카인의 눈이었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숨이 답답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불쾌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 느낌이었다. 마음이 혼란스럽게 요동쳤다. 원치 않는 것이 들어와 속을 헤집는 기분. 오웬과 눈이 교환된 직후에 며칠 동안 시야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이긴 했으나 오늘 같은 날은 없었다.

카인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불안함을 느껴도 결국은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차분해지자 통증도 가라앉았다. 카인은 눈을 압박하던 손을 내렸고,

“오웬?”

한쪽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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