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yk

Sneedronningen

브래네로

Astra Space by 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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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까지의 메인 스토리 스포일러 有 + 기존 스토리에 날조 끼워넣기

*저주 마법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날조)을 포함하므로 주의해주세요.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의 설정을 일부 변형, 참조했습니다.

퇴고 X

추후 수정될 수 O

"지극히 정상이야. 저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군."

파우스트가 거울을 집어 들며 단언했다. 가벼운 손짓에 주변을 감돌던 마력의 농도가 옅어져 간다. …그래? 네로는 영 찝찝하단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앞섶을 여몄다. 파우스트는 미간을 살짝 좁히곤 못마땅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설마. 선생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네로는 언제나처럼 평탄한 미소를 그리며 감사 인사를 덧붙이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동작에는 망설임도 여유도 없다. 파우스트가 필요 이상으로 파고들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당연하게 대화의 흐름을 쥔다. 그럼 저녁 준비하러 돌아갈 테니까, 시간 되면 내려와. 파우스트는 대답 대신 그의 뒷모습을 잠자코 응시했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로는 긴 복도를 따라가는 동안 단 한 번도 파우스트를 돌아보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한탄이라기보다는 걱정을 떠안은 상냥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긴 한 건가? 이걸로 몇 번째인지……. 네로는 언뜻 유해 보이다가도 어느 지점부터는 결코 굽히지 않는 완고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알겠다고 잘도 말하는 주제에 조금도 납득한 반응이 아니지 않은가.

네로 터너의 머릿속에는 예로부터 깊숙이 자리 잡은 믿음이 있는 듯했다. 네로가 고급진 와인과 주전부리를 한가득 들고서는 파우스트의 방문을 두드렸던 언젠가. 서로의 잔이 절반 정도 비었을 무렵 네로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내 심장, 아니, 어쩌면 머릿속 어딘가에 저주가 새겨져 있다는 모양이야. 사실일까? 파우스트는 되물었다. 누가 그렇게 말하던? 네로는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린 누군가가.

파우스트의 시선이 네로를 수차례 훑곤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언뜻 보기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파우스트가 중얼대기도 전에 네로가 나섰다. 선생, 저주 쪽으로는 전문가지? 정밀 검사 같은 게 있다면 부탁해도 될까. 느닷없이 내밀어진 술과 안주의 용도가 알 만했다. …이렇게까지 공들이지 않아도 승낙할 거였어. 학생의 부탁이니까.

그 이후로 네로는 종종 파우스트의 방을 찾았고, 그때마다 파우스트는 마력의 짜임새를 찬찬히 읽어내는 작업을 거쳤다. 섬세하게 마력이 흐르는 기로를 거슬러 올라가며 상태를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불온한 주술이 걸려 있다면 그 과정에서 분명 작게라도 위화감이 느껴질 터. 그러나 몇 번에 걸친 탐색 끝에도 파우스트는 켕기는 점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낼 수 없었다.

저주 같은 건 실제로 없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저주와 주술 분야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권위자였으니. 그 눈을 속일 수 있는 정교한 저주 마법 같은 건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네로는 도저히 납득하지를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사정, 그 어느 것도 털어놓지 않은 채. 정말이지 제멋대로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수밖에 없나…. 파우스트는 책상에 놓인 기구들을 부러 정리하지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 또 쓰게 될 테니까. 

*

네로는 종종 마법관의 부엌에 앉아 상념에 잠기곤 했다. 내일 아침의 재료를 손질하는 등의 잡일들은 그에게 있어 숨을 쉬는 행위와 같으므로,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풍경을 그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좋았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네로는 뭐든 간에 적당한 게 좋았다.

감자의 껍질을 무심한 손길로 도려내면서, 느릿하게 기억을 되짚는다. 밤바람에 흩어지는 마나석과 물색의 우산, 괴수의 벌어진 입 틈으로 점차 모습을 감추어가는 꼭두각시 인형…. 곱씹을 수록,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는 감각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네로는 스스로를 탓하는 게 익숙한 만큼 죄악감에 쉽게 지배당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네로가 줄곧 떠올려오던 기이한 통증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네로는 바구니에서 새로운 감자를 집어 들곤, 그다음을 떠올렸다.

…나를 쏴!

좋아, 죽이고 와! 《아드노포텐슴》….

…조절을 잘못한 건지, 칼날이 감자 표면에 박혀버렸다. 아까워라… 평소의 배로 두껍게 잘려 나가는 껍질을 바라보며 네로는 생각했다. 분명 여기지, 위화감이 들었던 건.

네로는 언제부턴가 브래들리와 함께하는 순간마다 이상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정작 신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그와 일상을 보내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심장이 쿵쾅대며 비릿한 뒷맛을 남기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브래들리와의 재회 이후로는 단 한 순간도 변함이 없었다. 하하 웃으며 브래들리의 팔을 쳐내다가도, 조용히 술잔을 늘어놓은 채 중얼거리다가도… 문득 뻐근하고 묵직한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이 현상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끈덕지게 네로를 괴롭혀 왔으나, 극히 최근의 일 중 예외가 있었던 것이다.

브래들리의 강화 마법을 정통으로 받아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감응력과 상성도 따져야 할 뿐더러, 효율을 극대화하려면 상대에게 온전히 신뢰를 내어준다는 정신 또한 필요하다. 순간적으로 공포나 불신을 가진 탓에 강화 마법이 뒤틀리거나 역으로 수용자에게 상처를 남기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심장은 언제 꿰뚫렸냐는 듯 힘차게 맥동했고, 등을 떠밀린 것처럼 물 흐르듯 주문을 욀 수 있었다. 마치 브래들리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차 있던 그 시절처럼.

그러니까 아주 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마취라도 당한 것처럼 아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는데 뒷일을 생각할 여유 따위 있었을 리가. 이제 와 반추하는 이유 또한 뒤늦게 따라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언제까지나 통증의 원인도 모른 채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외면하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감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잊을래도 잊을 수가 없는데,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파우스트마저도 찾아낼 수가 없는 무언가 특수한 종류의 은밀하고 섬세한 마법이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과연 그런 기이한 마법이 실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파우스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를 제하곤 이어지는 통증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하릴없이 텅 빈 짐작만을 늘어놓고 있자니 문득 주방 뒤쪽으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네로는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얼굴들이 차례로 비친다.

"네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아아, 현자 씨. 브래들리… 군도."

듣자 하니 아키라는 북쪽의 마법사들과 임무를 다녀온 탓에 이제야 마법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임무라 해봤자 당일에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인원이 인원이겠다…. 결코 일이 만만하게 흘러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훈련복은 흙먼지로 엉망이었고, 꼬박 하루를 시달린 탓에 아키라든 브래들리든 꼴이 말이 아니었다. 피로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브래들리가 요란한 하품을 보였다.

"다른 분들은 먼저 쉬러 올라가셨어요. 아무래도 다들 지친 모양이어서…."

"무슨 난리 통이었길래 그 녀석들이 전부 뻗은 거람…."

"언제나처럼의 쌈박질이지, 뭐."

질리지도 않는다며 브래들리가 장난스레 툭 던졌다. 아하하…. 아키라는 도저히 장난으로 넘길 수 없는 듯했지만, 유연하게 대화를 받아넘겼다. 그래도 다들 크게 다치기 전에 마무리가 되어서 다행이죠. 얼마 전만 해도 큰 싸움이 있었는데 또 상처가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큰 싸움이라면 역시 일전의 그랑벨 성 건이겠지. 어떻게든 일단락된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제각각 자신만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카인은 죽음의 문턱에 걽터 앉았고, 시노와 아이들 또한 말 그대로 조금이라도 운이 나빴더라면 곧장 돌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뿐인가, 눈앞의 아키라도, 브래들리도…….

애써 시선을 둘 곳을 찾으며 말을 다듬고 있자니 어느새 들뜬 듯 어깨에 팔을 감아오는 그가 있었다.

“브래들리…….”

"일전에는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었지."

"아! 네로, 정말 멋졌어요. 그렇게나 능숙하게 싸울 수 있다니."

아키라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입을 가린 채 감탄을 늘어놓았다. 괜히 싱글벙글 들뜬 낯짝의 브래들리는 덤이다. 네로는 금세 놀림당하는 듯한 기분이 되고 만다. 아아! 그래선 안 됐는데, 아니,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고……. 찰나 동안에 수많은 후회와 위안이 바삐 오가다 간질거리는 어깨의 감각에 이윽고 멈추었다. 친숙하게, 그리고 익숙하게 자신에게 기대오는 브래들리는 마치 오랜 형제를 대하듯 편안한 모습이다.

…이거 놔, 네로가 어깨에 걸린 팔을 쳐내자 몇 발짝 물러난 브래들리는 순순히 양 손바닥을 들어 올려 보였다. 마치 사나운 짐승을 달래는 것처럼 섬세하고 기민한 몸짓으로. 이래 봬도 브래들리는 네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거침없이 다가서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이런 식으로 거리를 재며 네로의 기분을 살피곤 하는 조심스러운 짐작이 오갔다. 아무나 눈치챌 수 없는 은밀한 소통이었다.

"이 녀석, 화내면 무서우니까. 그만한 저력이 있다는 뜻이지."

"그러게요. 다들 감탄했을 거예요, 그렇게 큰 마물을 순식간에!"

"하하! 그렇다는데, 네로."

"……무슨, 순전히 내 공인 것도 아닌데."

과하게 치켜세워주는 거야.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네로는 다시금 자신을 낮춘다. 물론 조금은 쩔쩔 매는 기색을 띄우면서도 아키라와 브래들리는 개의치 않는다. 이미 본심을 훤히 내보이고 있다는 것을 네로만 모르고 있는 모양새였다.

"뭐 그렇지. 그건 그렇고…."

브래들리의 시선이 네로를 주욱 훑더니, 가슴께에 고정되었다. 네로는 무의식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브래들리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튀어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다. 네로에게 있어 가장 피하고 싶은 화제를 덥석덥석 도마에 올려두는 브래들리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 몸의 마법을 정통으로 받아내다니 배짱 한 번 좋네. 소감은 어때, 동쪽의 요리사.”

…아아, 그런 설정이었지. 네로는 남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아키라의 앞에서 뭐라고 둘러대는 게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떻지도 않아, 그냥…."

아리지 않다는 게 이상해, 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겠지…. 몇 번이고 꿰뚫렸던 심장이 이어 나가는 박동이 기이했다. 네로는 저도 모르는 새 눈꺼풀 너머로 시선을 감췄다.

"뭔가 새롭네. 강화 마법이라는 거."

"당연하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몸이 직접 걸어준 건데."

어색하게나마 입을 떼면 잘 알고 있다는 듯 능숙하게 받아쳐 주는 브래들리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따금, 네로는 브래들리가 얄미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럼 네로는 다른 마법사의 강화 마법도 받아본 적이 있는 건가요?"

"응?"

"아, 죄송해요… 새롭다는 건 전에 경험해본 적이 있단 걸까, 싶어서."

 아키라는 가끔가다 이렇게 정곡을 찌른다니까. 한편으로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준비하고 있는 스스로가 야속했다.

"……아니. 그냥 말만 들어봤을 뿐이야. 그, 뜬소문이라던가."

"뭐. 이 몸의 강화 마법은 정평이 나 있으니까 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말야."

"그런… 건가요?"

그런 거야. 네로는 의식적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네로가 선을 긋고 싶어 할 때에 습관적으로 보이는 표정임을 잘 아는 아키라는 눈치를 살피면서도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럼 마저 이야기하세요."

애써 눈치를 살피던 아키라가 주방의 문턱을 나서자, 브래들리가 기다렸다는 듯 곧장 옆구리를 찔러왔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데."

"뭐가?"

"강화 말이야. 어때. 마지막으로 해본 지 백 년도 넘었는데, 기가 막혔지?"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스러운 듯이 말하는 브래들리였다. 감옥에 갇힌 이후로 최고위 강화마법은 한 번도 쓰지 않은 건가. 그렇겠지, 받아줄 상대가 없으니까. 

"참나… 끈질기네. 일부러지?"

귀찮은 척 브래들리가 감아오는 팔을 툭 쳐낸다. 배신자의 기분 같은 거, 이제 신경 꺼줬으면 좋겠는데. 브래들리가 아닌 척 자신의 안색을 민첩하게 훑어대는 것이 불편하다. 그런 시선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자신 또한 그렇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거리를 재는 두 사람, 그중에서도 먼저 발을 딛는 것은 언제나 브래들리다.

"그보다 이 몸은 감동했다고. 설마 네놈이 먼저 쏘라고 할 줄이야."

"야, 곧바로 우쭐해지지 말라고. 그건 상황이 급했으니까…."

"하! 말은 잘해."

브래들리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겉으로 아무리 매도해봤자 본심이 아니란 걸 간파할 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네로는 다시금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왜 이러는 거지…. 찌르듯이 아프다가도 금세 멎어버리곤 하는 것이, 일관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꼭 누군가의 태도처럼.

"…그나저나. 용케도 나를 쏴줄 생각을 했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네요."

"아니, 방금…."

네 비위는 나중에 맞춰 줄 테니까 지금은 얌전히 돌아가! 네로는 가차 없이 브래들리를 복도 쪽으로 들이밀고선, 2층으로 향하는 아키라를 향해 소리쳤다. 현자 씨, 바쁘지 않다면 꼬맹이들 좀 불러줄래. 간식이라도 만들어줄까 싶어서 말야.

바쁘게 주절거리면서도 브래들리의 등을 꾹꾹 떠밀며 복도로 내보내 버리는 네로였다. 뻣뻣하게 힘을 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버티던 브래들리도 한숨을 뱉으며 투덜투덜 계단을 올라갈 무렵, 아키라가 금세 잠옷 차림의 리케와 미틸을 데려왔다. 심야를 앞두고 있는데도 한껏 들뜬 채로 오늘의 디저트를 알아맞히려 하는 아이들을 보니 아무런 생각 없이도 웃을 수 있었다.

네로, 저는 노곤노곤해지는 음료가 좋아요. 저는 달콤한 과자가 좋아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 넉살 좋게 답하곤 조리대 앞에 달라붙듯이 선 네로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잊자…. 우연이거나 일시적인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네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외면은 네로에게 있어 최고의 즉효약이었으므로.

*

파우스트의 정의에 따르자면, 저주란 상대를 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마력을 통해 구현된 것이라고 한다. 한 번 적중한 저주 계통의 주술은 대상의 마력 체계를 비집고 들어가 기존의 구조를 잡아 뜯어버린다. 그렇게 생겨난 빈틈에 얼기설기 얽혀 쉽사리 떼어낼 수 없게끔 뿌리를 내린다. 그렇게 신체와 일체화한 잔존 마력은 저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평생토록 대상을 옭아맨다. 술자의 의지가 굳건함에 따라 속박은 배로 강해지며, 해제하는 것은 고도의 숙련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파우스트의 설명은 정론 그 자체였다. 내로라하는 저서들을 펼쳐보아도 그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눈치챈 네로는 기세 좋게 책들을 훑어냈다. 파우스트는 꾸준히 진찰에 어울려주면서도, 혹시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켕기는 부분은 직접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권했다. 본인의 기준 상 고평가되는 서적들의 목록을 함께 전해주면서.

아마 네로가 먼저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굳이 더 파고들지 않으면서도 도움을 줄 방법을 그 나름대로 강구했던 것이리라. 그 배려 덕에, 마법관의 먼지 앉은 서적들에서 저주에 관한 페이지들을 뒤적이는 짓은 어느새 네로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성실함을 좋아하는 파우스트가 이 모습을 보면 기특해하지 않을까, 하고 무심코 웃음을 흘리는 네로였다. 

도저히 끝이 없을 것 같던 목록도 한둘씩 훑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권의 차례에 다다랐다. 이쯤 되면 중복되는 서술은 금세 넘겨버리고 핵심적인 부분에 곧장 접근할 수 있는 경지였다. 파우스트의 앞에서야 물론 내세울 것도 없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의 네로는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저주 마법은 조심스러운 입맞춤과도 같다. 정교함과 치밀함,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농후한 감정.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이런 살벌한 술식을 밥 먹듯 쓰는 건가? 무서운데…….'

실없는 생각이나 하며 문장을 좇던 시선이 제동이 걸린 듯 느려지더니, 이윽고 멈추었다.

그 과정은 대상이 자신의 몸에 마력이 스미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진행된다. 불쾌감을 느낄 즈음에는 이미 저주는 단단히 뿌리를 내린 상태일 것이요, 시전자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저주의 가장 아이러니하고도 잔혹한 점은 모든 과정이 무의식적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시전자의 확고한 선언이 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이 향한다면. 정령이 특정 수준의 일관성을 갖출 정도로 방향성을 제시해줄 '의지'가 있다면 저주는 실행된다. 그 의지를 행동으로 표명한다면 더욱이….

네로는 선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빠져들기라도 할 것처럼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 의지. 행동. 네로의 뇌리에 어떤 가능성이 스치고 말았다. 이제는 형태만 남아 귓가에 웅웅대는 그 말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그래… 그 마법사 짓이지! 네 심장에 박아넣은 거라고, 거울 조각을! 냉랭한 저주를! 저주를…….

"네로, 뭐 해."

"…깜짝아!"

어느새 시노가 옆에 꼭 붙어 책의 내용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웬일로 도서관에 온 거지, 하는 의문은 제쳐두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네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나려 들었다.

"뭐라고 쓰여있는 거야? 저주…?"

더듬더듬 깨알 같은 글씨를 읽어 내려가던 시노는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다. 시선을 돌린 채 쏘아붙이듯 한마디를 던진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공부나 하는 거야. 그 시간에 파이를 하나라도 더 구워."

"당장 어제도 구워줬잖아…."

"상관 없어. 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레몬파이가 먹고 싶어."

그러다 살찌겠다…. 한편으론 한창 성장기니까 상관없나 싶기도 하다. 괜히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잔뜩 헝클어대니 시노가 짜증을 내며 물러섰다. 애 취급 하지 마! 그대로 가버리는가 싶었더니, 다시 돌아서서는 근처의 서가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시노에게 물었다. 도서관엔 왜? …숙제 안 한 거 들켜서 오늘 해야 돼. …그런 거구나. 그런 네로야말로 왜? 나도 숙제 같은 거 하러….

그렇게 시답잖은 문답을 주고받자면, 문득 떠오른다. 언제까지고 히스와 함께할 수 있으리라 믿냐고 물었던 날의 기억이. 시선을 책에서 떼지 않은 채, 네로는 툭 던지듯 물었다.

"시노."

"왜."

"혹시 말인데…. 히스랑 같이 있을 때,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어?"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히스가 왜."

히스를 언급하자 단숨에 신경을 한껏 곤두세우는 시노였다. 경계하는 듯한, 탐색하는 듯한… 시노의 낯에서 불안을 지우느라 한참을 어르고 달래야만 했다. 아니, 히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네 기분 얘기야. 어딘가 욱신거리거나 괜히 마음이 쓰라리다던가, 그런 부류의…. 횡설수설하던 새에 어느새 평소대로의 당당한 얼굴로 돌아온 시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리고 히스를 위해서라면 그런 아픔 같은 건 기꺼이 불사할 수 있어." 

"…정말로? 확신해?"

심장이 아릿한 기분. 느낀 적 없어? 집요할 정도로 묻는 것이 의아하다는 듯 한참을 기억을 짚어보던 시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없어."

요즘의 네로는 이상해. 미심쩍다는 듯 시노가 작게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도서관을 나서는 시노의 등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네로는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결국 읽던 책을 덮은 후에도 네로는 그 내용을 계속해서 곱씹곤 했다. 물론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을 되짚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되돌려 두었다. 대신 새로운 책을 바꿔 빼 들고선 복도를 향했다. 쓴 뒷맛을 그대로 삼킨 채, 무언가 확인 받을 게 있는 사람처럼, 성급한 걸음걸이로 작은 양장본을 그러쥔 네로가 그 책을 열게 되는 건, 뜻밖에도 꽤나 이후의 일이 되었다.

*

피가 이어졌는지도 모를 형제 여럿. 굶주린 그들을 내던지고서 네로는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짓눌리는 심장의 무게와 달리 박동은 거셌고, 발걸음은 빠르게 내딛어졌다. 헐떡이며 삼키는 숨이 따가웠지만 네로는 멈출 줄을 몰랐다. 내리막길을 따라 점점 붙어가는 가속도에 몸뚱아리가 휘청였지만 땅을 박차는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자유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집구석과 변변찮은 아버지, 머리채를 잡히던 날들과는 이제 안녕이다. 드디어 그들과의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있다. 네로는 따가움도 잊고선 큰 숨을 들이켰다. 뱃속 깊이까지 시려워 몸이 떨렸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망쳐낸 쾌감은 선명했지만 마냥 통쾌할 수는 없었다. 배를 곯을까 두려워하며 매서운 눈밭을 배회하는 나날 만큼은 영영 떨쳐내지 못할 테니까. 그럼에도 네로는 그런 앞날들을 뒤로하며 달리고 달렸다. 구름의 틈으로 새어 나오는 햇빛이 눈앞을 슬금슬금 뒤덮기 전까지.

눈 앞이 점점 흐려지더니, 마침내 시야가 뒤집혔다. 가쁜 숨이 잦아들지 않을 정도로 심장은 시끄럽게 울려댔지만,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없었다. 주변이 온통 새하얬던 탓도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눈밭은 언제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암만 어려도 마법사다 이건가, 인간의 틈에서 난롯불을 쬐는 것보다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법사는 죽으면 돌이 된다던데 과연 정말일까. 굳이 이 눈을 헤쳐 나가야 할까. 어차피 계속 괴로워할 텐데. 이대로 눈 속에 묻힌 보석으로 남는 것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이건 또 뭐야?"

누군가의 발이 네로의 몸을 쿡쿡 찔러댔다. 네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광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네로는 그가 강한 마법사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기척 주위로 정령들이 점차 모여드는 것을 짧은 견식으로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자신이 겨우 붙들어 매고 있는 마력조차 빼앗아 가버릴 듯한, 그런 인력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말할 힘도 없나? 얼빠진 낯짝하곤."

이거 곧 죽겠구만. 침을 뱉듯 신경질적인 일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잔기침이 뒤섞인 목소리를 겨우 끄집어냈다.

"…역시나…."

잠시간의 정적에 이어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꿇어앉은 그에게 멱살을 잡힌 것도 같은데, 감각이 무딘 탓에 아무것도 명확히 느낄 수 없었다. 따끔하게 내려꽂히는 시선에 담긴 것이 살의인지 꾸짖음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죽는다니까, 너. 제대로 알고 있긴 해?"

"……."

말 그대로의 의미 아닌가? 죽는다는 건 곧 생이 끝난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나? 깊이 생각할 이유조차 알기 어려워 멀뚱히 허공을 응시하는 게 고작이었다. 남자가 비죽이며 짓궂게 말했다.

"네놈이 그렇게 굴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두기 싫단 말이지."

"자, 잠깐…."

남자가 차림새를 빠르게 훑더니 대뜸 거친 손길로 네로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고꾸라지듯 바닥에 고개를 처박을 뻔한 것을 남자가 팔로 지탱해주었다.

"상처 같은 건 없고. 단순히 기력이 쇠약해진 건가?"

이리저리 바삐 오가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 좁은 거리에서조차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도망 다니는 눈동자가 남자의 심사를 이리저리 쪼아댔지만, 네로는 물론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뭐 됐어. 이 나이대의 마법사가 혼자 나뒹굴고 있는 건 절대 흔치 않지…. 뭔 빌어먹을 사연인지는 알 바 아니지만."

남자가 쓸만한 놈일지도 모르겠다며 작게 중얼거렸다. 눈보라의 소리로 이미 꽉 들어찬 네로의 귀에는 닿지 않을 정도로. 다만 그가 자신을 어떻게 구워 먹을지 삶아 먹을지,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죽이셔도 돼요."

"하?"

"돌아갈 곳도 없고, 저를 찾는 이도 없어요. 적어도 뒤탈은 없을 걸요…."

"의지 없는 녀석이네!"

남자가 거칠게 혀를 차곤 윽박지르다시피 목을 긁었다. 왜 이런 말을 뱉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그런 표정이다. 언뜻 곤란한 듯이 보이기도 했지만 어째서일까.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펑펑 쏟아지는 눈이 네로를 점점 뒤덮어갔다. 그건 맞은 편의 남자도 마찬가지라지만, 눈에 띄는 검정 머리칼 탓일까. 결코 덧칠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반항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런 반면 자신은 금세라도 파묻혀버릴 것만 같았다. 덴 듯 벌겋게 달아오른 손 끝은 이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점차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 없이, 네로는 거의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만 편해지고 싶어…….

그 한 마디는 독백과도 닮아있었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으면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해졌으면 했다. 그러나 모순된 말속에 기대는 담겨있지 않았다. 되려 모순되어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짧은 삶 속에서 네로가 내민 손을 잡아주는 이는 없었으니까. 반복된 배척은 학습된 무욕을 낳았지만 네로는 아직 어렸기에 다시금 바라고 말았다. 스스로가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도 모른 채로.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염원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었다.

물론 상대는 눈앞의 남자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가라앉아 있었다. 대신 그 곳에 자리한 건 얼음과도 같은 냉정과 어쩌면… 흥미였다. 하, 헛웃음을 흘린 그가 옷깃을 붙잡은 손을 느릿하게 놓았다.

"……."

"돌아갈 곳이 없다, 라……."

남자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네로도 덩달아 서늘한 공기를 삼켰다. 볼 안이 따끔거리기 시작할 무렵 그가 결심했다는 듯 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지껄이는 녀석들 대부분은 돌아갈 곳이 필요해 안달이지. 그리고 마침 남는 자리가 생겼는데 말이야."

그가 뱉은 뜨거운 숨이 닿자 그제야 현실감이 돌기 시작한 건지, 한 번 초점을 잃었던 시야가 다시금 제 몫을 하고자 했다. 타는 듯한 모양새의 흉터와 진홍빛 눈 한 쌍이 도망칠 수도 없게끔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뜨거웠다. 맨발로 눈을 밟는 것처럼 따가우면서도 먹먹한, 그런 낯선 감각이었다. 네로는 자신의 심장이 어느새 빠르게 박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긴장과 공포와는 분명히 다른 선연한 벅참의 감각이었다. 왜지? 애써 시선을 피했다 다시 맞추니, 어느새 그의 손에는 그의 몸집 만큼이나 묵직한 장총이 안겨 있었다.

"네놈에게는 어물쩡한 치유 마법보다도 이게 잘 들 거다."

그가 총구를 들이밀었다. 네로의 심장을 향해서 올곧게, 그리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겨누어진 쇳덩이는 천천히 몸뚱아리를 짓눌러왔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선명했다.

"왜, 겁나냐?"

"…….".

네로가 힘없이 도리질했다. 하,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뱉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별난 놈이군."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네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보통 북쪽 마법사라면 이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미 돌이 되어 바닥을 굴러다닐 운명이었을 터인데, 행운인지 불행인지 이 별난 마법사는 굳이 마력을 내다 버리는 선지를 택했다. 저 호쾌한 웃음이 담은 것이 자비인지 변덕인지조차 알 수 없게끔 그는 단호하게 장전음을 울렸다.

아아, 이건 투자일지도 몰라. 지금 볼품없는 돌을 얻느니 마력 체계가 자리 잡았을 때 죽이는 게 그에게도 훨씬 득이겠지. 그건 자신에게도 그리 나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몇 날 며칠 더 굴러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터이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좋을 대로 휘둘리는 것이 어쩐지 매력적으로 느껴졌기에….

그가 나를 필요로 해주었으면 좋겠어. 부정할 수 없는 욕심이었다.

"되도록 굳어있진 말고. 뭐, 죽더라도 원망하진 마라. 그렇게 두지 않을 심산이긴 하지만."

네놈하기 나름이라는 듯 남자가 턱짓했다. 내 하기 나름…. 제멋대로 굴 테면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지 굳이 자신에게 여지를 남겨주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네로는 그에게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그에게 고삐를 건네주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 훗날에 후회하게 될 거란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음에도.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아주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건 과연 축복일까, 저주일까…….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네로는 그대로 눈을 감았고, 마력을 실은 탄환은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다. 그렇게 네로는 원망스런 생애를 이어 나가고 말았다.

*

망각은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자기방어 체제라고 하던가. 실로 그렇다고, 네로는 통감했다.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겨우 도망쳐낸 지도 십여년 째, 그들의 얼굴조차 선명히 그려내지 못할 무렵, 네로는 자신의 형제와 재회하고 말았다.

얼음의 숲 근처에서만 자생하는 희귀한 풀을 찾아서 브래들리와 단 둘이 탐색을 나간 날이었다. 그날은 분명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음의 숲에서도 북쪽 끝단에서야 겨우 찾아낼 수 있었기에 험난한 길에 오르는 건 자연스레 보스와 그 오른팔이 되었다. 오른팔이라 해도 나란히 줄 세울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만 어찌 되었든 브래들리로부터 가장 큰 신뢰를 얻고 있음은 자명했으므로. 네로는 내키지 않는 일들에도 족족 따라나서며 브래들리를 좇았다.

북쪽에서 맹목적인 복종이란 텅 빈 개념이다. 요구하는 것이 있으려면 무언가 상응하는 가치를 갖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힘의 차이가 극명한 상하관계에서조차 그렇다. 북쪽의 득실을 건 거래는 곧 일시적인 신뢰를 부여한다. 그마저도 온전할 수는 없다. 배신의 가능성을 어느 순간이든 배제할 수 없는 이상.

그러나 네로는 달랐다. 그에게는 요구 자체가 보상이었기에, 그가 가장 생 의지를 갖게 되는 순간은 브래들리가 자신을 다시금 찾아줄 때였다. 잘 듣는 마비제처럼 사고 체계를 헤집어서, 자신의 성장과 가치를 전부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네로는 스스로가 절벽 끝으로 내몰렸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숲의 구석진 곳을 이리저리 훑다 겨우 목표한 것을 발견한 네로는 횡재의 콧노래를 부르며 채집을 시작했다. 이걸로 또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이 정도 양이면 한동안은 걱정도 없을 테고. 한껏 늘어놓아진 낙관적인 생각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 마디에 금세 깨져버렸다.

낯선 기척에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니, 그곳에는 손가락질을 하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나이 든 인간이 한 명 있었다. 바람에 흩어지는 물색 머리,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 드는 목소리…. 더 재볼 것도 없었다.

네로는 그가 자신이 두고 온 형제 중 한 명임을 직감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폭삭 삭은 얼굴이 낯설기만 했다. 형제임을 기억해낸 것이 기적일 정도로 그 어떠한 기억도 떠올려낼 수 없었다. 베피? 아니다, 안나? 툭툭 튀어나오는 이름들을 톺아보아도 무엇 하나 짚이는 것이 없었다. 이렇다 할 추억이 없을 뿐더러 그 변변찮은 집구석에서의 매일부터가 최악의 경험이었으니 당연하다. 괴로운 기억 같은 걸 떠안고 있는 쪽이 배는 손해다.

그런 만큼 재회는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상대는 칼을 갈아왔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네로가 무어라 할 말을 골라내는 동안 상대의 얼굴은 산산조각이 난 얼음처럼 일그러져갔고, 내면의 해묵은 원망을 끄집어내며 점점 모습을 바꾸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움찔거리기만 하던 입이 마침내 열리더니, 갈라진 목소리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네가, 네가 우릴 떠났어. 무언가에 홀려선! 그래… 그 마법사 짓이지! 네 심장에 박아넣은 거라고, 거울 조각을! 냉랭한 저주를!

네로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 한마디는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잠시라도 잊을 수 없게끔, 따끔하게, 통렬하게.

거울 조각이 심장에 박힌 소년… 그건 분명 한때 유행했던 동화책의 이야기다.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던 소년의 심장에 어느 날 거울 조각이 박히고 만다. 소년은 그렇게 마음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다, 눈의 마녀의 손에 주워진다.

소년의 건조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던 마녀는 그의 심장에 박동을 불어넣는 깊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한 번, 두 번. 입맞춤을 받은 소년은 눈밭 밖의 세계를 잊게 되었고, 소중한 것들 또한 기억 속에서 지워내 버리고 말았다. 가족을 배신하고서 마녀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소년이라…. 그러니까, 자신이 브래들리에게 좋을 대로 휘둘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물론 네로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거야말로 저주의 말이 아닌가? 

브래들리가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다니?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가족들이야말로 네로에게는 저주처럼 다가왔다.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이란 이름의 저주. 대상이 죽음을 맞기 전까지 영원히 들러붙어 빼낼 수 없는, 작고도 날카로운 거울 조각…. 네로는 내심 발끈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목구멍 아래에서 쏘아붙이고픈 말들이 들끓었지만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로는 그대로 뒤돌아 달렸다. 죄책감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부정당한 것만 같아 치욕스럽고 분했다. 그저 당당하게 한 마디 날려주면 될 것을, 그럴 수가 없어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는 허둥지둥 도망치는 네로의 뒤통수를 향해 저주와도 같은 악담을 퍼부어댔다. 같은 결말을 맞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자신들을 배신한 죗값을 기필코 치르게 되리라고. 네로의 모습이 눈보라에 완전히 묻힐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이야기의 끝은 어땠더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유행이 지난 동화책의 내용 따윈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 찝찝한 마음을 떠안은 채, 네로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설원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저 멀리 손짓하는 브래들리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겨우 그 형상이 잡힐락 말락 한 거리에 도달할 즘, 브래들리가 반기듯 어깨를 툭툭 치며 다가왔다.

"구해오라고 한 건?"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섶 여기저기를 더듬어 보았지만 어디에도 주머니가 없었다. 네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디서 떨어뜨린 거지? 

"아? 얼빵하긴. 왜 넋이 나가 있는 거야?"

" 윽… 미안, 보스…."

"미안해할 시간에 차라리 뭐하다 빈손으로 온 건지나 말하라고."

…말을 해야 하나? 생각과는 별개로 변명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냥… 오는 길에 떨어뜨린 것 같아. 바로 찾아올 테니까 잠깐만 시간을 줘."

물론 촉이 좋은 브래들리는 어색함을 곧장 눈치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캐묻지는 않는다. 눈감아줘도 될 만한 일로 판단한 거겠지. 브래들리가 다녀오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네로는 황급하게 피하듯 다시금 숲을 향했다.

솔직하게 옛 가족을 만났다고 하면 될 것을 어째서 거짓말씩이나 하고 도망친 것인가. 무의식적인 기제에 가까웠지만 나름의 짐작 가는 이유는 있었다. 

도적단에 발을 들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언젠가, 브래들리가 돌연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가족은 아직 살아있냐? 옆의 아이가 고개를 젓자, 브래들리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답했다. 그래, 그 편이 나아. 어째 그 순간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손끝이 간질거렸다. 어쨌거나, 이유도 모를 불확실한 요소로 브래들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기껏 쌓아온 신뢰에 거짓말을 덧바르면서도 네로는 뻔뻔할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신뢰받지 못하는 것 정도는 미움받는 것에 비하면 물론 양반이었다. 여하튼 네로는 보상에 목말라 있었다.

장소야 물론 기억하고 있겠다, 다시 그 곳을 찾아가는 것이 행방도 모를 주머니를 찾는 것보다야 빨랐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면 주머니의 기척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떨리는 숨을 뒤로하고 애써 도착한 그 곳에는 발자국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름조차 모르는 혈육의 흔적일랑 찾을 수 없었다. 환영을 봤나 싶을 정도로.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어둔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네로에게 있어 속박의 굴레 그 이상이었다. 장성한 북쪽의 마법사가 나약하고 노쇠한 인간 한 명 상대로 겁을 먹다니, 고작 속박만으로는 가당치도 않다. 일종의 트라우마라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반면, 그로부터 자신을 격리해주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끔 해준 브래들리는 생명의 은인을 넘어선 존재였다. 어차피 똘마니로 살아가게 될 운명이라면 헌상할 가치가 있는 이에게 바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약초는 아까 뜯어낸 자리로부터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에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허탈하다는 듯 웃음을 흘린 네로는 쭈그려 앉아 풀들을 거칠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막 돼먹은 손길에 비해 풀들을 쟁이는 속도는 느릿했다. 분명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들어찼기 때문이리라.

브래들리가 기다릴 텐데, 어째서인지 몸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 움직여주질 않는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바삐 뛰는 심장과 따로 노는 몸뚱아리가 어색했다. 그런 어긋난 균형감 속에서도 네로는 모른 체 안정을 찾아 조급하게 달렸다. 그리고, 그런 네로가 자신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조금 후의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합류 지점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고요 뿐이었다. 브래들리는 그곳에 없었다. …발자국을 보자면, 근방을 잠깐 둘러보러 간 것도 같은데. 길이 엇갈리는 것이 두려워 굳이 그 뒤를 밟진 않았다. 걱정과 불안과 기약 없는 공허함을 떠안고선, 거센 눈발을 피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느릿하게 걸어오는 브래들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질질 끌리는 걸음걸이에 깜짝 놀란 네로가 다급하게 브래들리의 몸을 낚아챘다. 무방비하게 늘어진 무게를 받아낸 양손에는 채 마르지도 않은 피가 묻어나왔다.

탐색 중 희귀한 마법 생물과 홀로 교전을 벌였단 걸 변명이랍시고 한다. 어느 쪽의 것인지도 모를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전리품을 자랑해 보이는 브래들리의 언뜻 소탈한 웃음이 문득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구름 틈새로 비치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가루가 야속했다.

뭐가 이래. 네로의 입가로 갈 곳 잃은 웃음이 샜다. 이 순간 브래들리는 그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는데, 어쭙잖은 동정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자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심장의 아릿한 통증을 의식하게 된 건.

네로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삼키고 말았다. 무엇이 그렇게나 슬펐는지도, 자신이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외면한 채로.

분명, 그날 처음으로 통증을 느끼게 된 것은 우연 따위가 아니다.

*

사위가 바람 소리로 들어차 소란스러웠다. 북쪽의 공기가 매섭게 폐를 메우곤 열기를 빼앗아 간다. 그런 와중에도, 어쩐지 네로는 제 발로 고향에 돌아온 양 편안한 낯짝이다. 도저히 생사를 넘나들었다곤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 반해 브래들리는 필사적이었다. 평소의 여유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행동거지에 거친 숨소리, 바삐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탐색하는 눈빛까지. 네로는 흐릿한 시야로나마 브래들리를 눈에 담았다. 또 구해진 모양이었다. 브래들리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 해도 마른기침만이 터져 나올 뿐, 말라붙은 목구멍은 음절 하나조차 제대로 뱉지 못했다. 브래들리는 그런 네로의 기색을 살피면서도 걸음을 재촉했다. 눈보라가 거세지고 있었다. 찰나의 잔류도 치명적인 상황임을 양쪽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네로에게는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네로의 정신은, 조금 전의 기억에 머무르고 있었다. 물론 당시 네로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에, 기억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의 귓가에 웅웅 맴도는 감각으로나마 짐작할 뿐이었지만.

…….

네 목숨은 내 거야! 네로……!

네로는 이 상황에 분명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첫 만남도 분명, 이랬던 것 같은데…….'

하하. 그때처럼 이대로 한 발 쏴준다면, 이번에야말로 미련 없이 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런 도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있어 네로가 어찌 되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형하겠다니 좋을 대로 지껄이곤 있지만 네로에게 있어서는 그 말이 달갑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현재, 총구는 자신에게 닿지 않았다….

"……브래드…."

"가만있어. 상처 벌어진다."

브래들리의 손으로부터 천천히 흘러들어와 네로의 전신을 어루만지는 마력이 그의 기척을 짙게 실어 날랐다.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실로 있어야 할 곳에 드디어 돌아온 듯한 감각. 그러나 그것은 안락함과는 결단코 달랐다.

다시금 통증이 일었고, 심장이 불이라도 붙은 듯 쓰라렸다. 아픔은 곧 번져 전신을 마비시키곤 끝내 화끈거리는 감각만을 남겨두었다. 브래들리가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 마디 씩 쏘아붙일 때마다 절로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브래들리의 입으로 기어코 자신을 소망을 뱉게 만든 것이 스스로도 가혹하다 여겼지만 죄책감 따윈 끌어안은 채 묻어버렸다. 이제는 한계다.

더는 한계이기에 더더욱, 그에게 제시받은, 확언받은 결말이 달가울 수밖에. 도달지점이 정해진 삶이라는 건 거대한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네로는 그렇게 믿었다. 그게 제아무리 뿌리 깊게 자리한 파멸일지언정.

더는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브래들리를 배신한 자신은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 자격이 없다. 설령 브래들리가 전부 용서해준다 하여도. 전부 없던 셈 쳐준다 하여도 말이다. 용서라는 건 네로에게 있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어물쩡한 결말이었다. 그야, 불어난 브래들리의 흉터들은 되돌릴 여지조차 없이 선명히 자리하고 있다. 그의 형기도, 추락한 명성도. 완전히 와해한 도적단도 돌아오지 않는다. 전부 없던 셈으로 치고 죄를 잊은 채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하 웃어넘기는 짓 따위, 네로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브래들리를 차지하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그의 일부로 남고 싶었다. 브래들리가 자신의 최후를 책임지리라 확신하고 싶었다. 그렇게 오래 바라왔건만, 이런 자신의 기분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럼에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듯 구는  브래들리였다. 스스로 내다 버린 목숨을 끈질기게 다시 안겨주는 그를 잔혹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정작 본인의 목숨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주제에. 100년을 웃도는 세월, 오랜 고립 끝에 재회했음에도 브래들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하다고까지 생각이 들었다.

…이걸로 몇 번째인지 셈하는 것은 그만둔 지 오래였다. 다시금 연장선이다. 하지만, 네로에게는 어쩐지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이 존재했다. 이다음은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정말로.

네로가 쿡쿡대며 희미하게 웃었다. 얼핏 들어선 기침과 진배없었으나 브래들리의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브래들리의 얼굴이 여느 때보다도 일그러져 있음을, 네로의 흐릿한 시야로는 잡아챌 수가 없었지만…. 네로는 그의 속도 모른 채 그저 안도했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

방 안은 고요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브래들리는 이래서야 잔을 비운 보람도 값어치도 없다 싶어 성난 듯한 한숨을 뱉었다.

네로는 운을 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보통 찾아온 쪽이 먼저 용건을 말하는 게 도리잖아. 적어도 목적이 실없는 반주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마법관에 온 이래로, 네로가 아무런 이유 없이 먼저 반주를 청하는 법은 없었으니까. 맞은 편에 앉은 이 대신 술잔을 벗 삼아 제목도 모를 책을 깔짝이고 있을 뿐, 좀처럼 말을 꺼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의 이야기라면 저번에 마무리했을 텐데. 물론, 그 일방적이고 엇갈리는 대화를 '마무리'라고 칭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네로는 물러나지 않았고, 브래들리가 수렁에서 질질 끌어내 겨우 붙잡아둔 것에 불과했다. 잘 알고 있는 듯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종내에는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억지로 시선을 돌리고 있을 뿐….

흐름이 고요하니 여기서 굳이 말을 꺼내는 건 우행이다. 브래들리는 거친 손길로 잔을 집어 들고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소파에서 바람 소리가 훅 나도 꿈쩍 않는 네로를 보고만 있자니, 브래들리도 절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도저히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브래들리는 어떻게 해야 네로를 잠시라도 붙들 수 있을지 매 순간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건 수 백 년 간 이어져 온 나름의 습관이다. …물론 수 백 년의 세월에도 나오지 않은 답이 이제서야 튀어나올 리 없지만. 

당장 지금에도 브래들리는 처형의 합리적인 연기를 꾀하고 있었다. 피가로와 쌍둥이를 돌로 만든 다음에는? 더는 미룰 수도 없게 된다. 다른 구실을 꾀한다 해도, 그때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네로를 구슬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마도… 네로는 못 배겨 자신에게 매달리듯 간청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할래. 어서. 날 먹어줘.

브래들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본질적인 소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애원하는 네로의 표정은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아…. 그때로군. 죽지 않았으면 한댔나, 어쨌나. 울음을 삼키며 간절하게 바라는 이치고는 앞날을 향한 의지가 없기에 네로가 비는 소원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의미를 두고 있는 거지?

까놓고 말해, 브래들리는 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줄 순 있을 것이라는 오만으로부터 나온 확신이 있었다. 누군가를 포용해 감화시키는 데에는 물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걸 먼저 박차고 나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네로 쪽이었다. 보물도, 지위도, 권력도, 가족도, 파트너도, 보스도,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버릴 수 있는 이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게 있기나 할까. 텅 빈 껍데기처럼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내릴 듯한 형상이었다. 

브래들리는 네로와 나란히 앞을 바라보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도 네로가 앞을 보며 나아가는 것을 보는 게 좋았던 것 같다. 브래들리는 몇 발짝 앞서 손짓하며 걸어보기도 하고, 네로를 붙잡고 이끌어보기도 했다. 등을 떠밀어본 적도 있고, 윽박을 내지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이 무색하게도 네로는 언제나 끝을 바라보고 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바닥만을 보며 걷는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그런 네로를 떠올리자면, 지끈거림이 머릿속을 감돌곤 했다. 떠오르는 수는 전부 써 보았는데도 또 다시 원점이다. 마치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낯선 소양감이 브래들리의 손끝을 맴돌 무렵, 탁 하는 소리에 브래들리는 고개를 돌렸다. 네로가 읽던 책을 덮은 것이다. 

"기억해? 이 동화책."

네로가 들고 있던 책을 대뜸 건네왔다. 그걸 군말 없이 받아 든 브래들리는 잠자코 음각으로 새겨진 제목을 훑는다.

"모르겠는데."

정말? 꽤 유행했던 건데. …철 지난 동화까지 일일이 기억할 여유는 없어서. 브래들리는 관심 없다는 듯 책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네로는 한숨을 푹 내쉬곤 시선을 돌렸다.

"…그럼 됐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네로가 브래들리에게서 책을 낚아챘다. 간다. 네로가 미련 없이 문으로 향했다. 뭐? 끝이야, 이게? 한참씩이나 뜸을 들이고선. 한마디로 끝이라고? 브래들리는 답지 않게도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네로!"

상황을 자각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방을 나서려는 네로의 팔을 붙잡은 뒤였다. 젠장, 구질구질하게 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브래들리는 네로의 거절에 순순히 물러나 주곤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멋대로 굴면서 마음껏 사람을 휘두르곤 이렇게 쌩 가버린다니, 자존심이 운다. 어떻게든 네로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브래들리는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찾는다. 네로를 잡아둘 수 있는 미끼와 소재들을 뒤적거리면서.

손목을 붙들린 네로가 문고리를 잡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기왕 온 거, 한잔 더 하고 가."

"알았어."

난잡하게 불어가는 브래들리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돌아온 대답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작게 끄덕여 보이는 고개도 덤으로 따라붙는다.

냉랭한 듯, 다정한 듯. 무심한 듯, 망색하는 듯…. 그 일이 있은 후, 네로는 어딘가 초연해진 구석이 있었다. 평소라면 분명 내쳐질 게 뻔한 상황이어도 네로는 군말 없이 어울려주었다. 다만, 그렇게 해서 얻어낸 시간들은 말을 꺼낸 보람도 없을 정도로 영양가 없이 지나갔다.

벽을 보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애써 민감한 화제를 꺼내 두어도, 네로의 시선은 도마에 있지 않았다. 눈을 돌리지도 않은 채 은근슬쩍 그걸 전부 치워버린다. 입에 채 대보지도 못한 화제들은 곤두박질 쳐 배수구를 점점 더럽히고 만다. 묵묵히 그걸 바라보는 브래들리가 난잡한 표정을 띄우자면, 네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한다. 쿠키라도 먹을래? …그런 식으로 불편한 기류만이 흐르고 있었다.

'궁상 맞은 생각에 어울려줄 요량은 없지만, 이래서야…….'

네로가 당장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몰라도, 이쪽은 그걸 이용하면 그만인 일이다. 날 것의 감정, 정제되지 않은 사고를 꺼내려면 수단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어떻게든 해야 돼. 물론, 해내고 말고…. 브래들리는 진열장에 들어찬 술들 중에서도 가장 값진 축에 드는 브랜디를 꺼내 들었다.

*

반주는 어스름한 빛무리가 지평선 너머로부터 기어오를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니, 반주라는 표현조차도 아까울 정도로 날 것의 술자리였다. 단순히 술을 위장에 쏟아 부어 못다 한 말들과 함께 모조리 집어삼킬 뿐인, 그런 속이 썩어들어가는 행위를 그저 반복했다. 진창 어질러진 탁자 위에는 비워진 병들이 비좁게 늘어서 있었고, 소파에 늘어진 두 사람은 만취 상태였다. 브래들리는 반쯤 걸터누운 채 곯아떨어졌고, 네로만이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새벽 공기를 느릿하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평소라면 주량이 더 셀 것이 분명한 브래들리가 먼저 잠들어버린 경위는 단순했다. 네로가 은근슬쩍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브래들리가 위스키를 들이붓는 틈을 타 조용히 주문을 읊조렸던 것이다.

아도노디스 옴니스. 가볍게 실은 마력에도 브래들리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저항하려는 일말의 의지도 없는 것처럼. 어쩌면 일부러 받아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

정제되지 않은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도 규칙적인 숨소리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미동도 않은 채 곤히 잠든 브래들리를 보고 있자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아니, 시간을 멈추고 싶었던 것에 가까웠다. 영원토록 이렇게 안온한 시간에 머무를 수만 있었다면 심장의 통증 같은 건 느낄 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만큼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이제는 안다. 네로는 종종 생각했다. 영원한 공존이라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북쪽의 쌍둥이도, 두려울 게 없는 세계 최강의 마법사도, 모두 인연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을 잃은 채, 오로지 타인을 위한 형태로 끊임없이 헌신한다 하여도 언젠가는 같은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네로는 속으로나마 중얼거렸다. 브래들리가 쏜 총알은 정말로 거울 조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네가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내 심장은 통증을 호소했고, 네 모습이 희미해지면 그제야 사무치는 쓸쓸함을 느끼곤 했으니…. 영문 모를 허탈감과 함께, 그제야 모든 앞뒤가 들어맞는 듯한 착각까지 일었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네로는 소파 한 구석에 놓인 양장본을 향해 팔을 뻗었다. 책을 낚아챈 자세 그대로 무게에 짓눌리듯 옆으로 쓰러진 네로는 그대로 책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눈의 마녀의 첫 번째 입맞춤은 추위를 잊게 해주었고, 그 두 번째는 고독과 슬픔을 지워냈다. 그리고, 두 번째 입맞춤의 자국이 희미해질 즈음, 세 번째…….

네로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과연.

'죽음과도 같은 영원한 안식….'

그렇다면 전부 납득이 간다. 동화 속의 소년은 오랜 친구에게 구원받아 세 번째 입맞춤을 받기 전, 기적적으로 마녀의 성을 빠져나온다. 네로는 저주의 말을 떠올렸다. 같은 결말을 맞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어차피 이제 와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바란 적조차 없었다. 오히려 달가운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자신 내면의 본질적인 소망이라는 걸, 그것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네로는 조심스레 책을 덮곤, 소파의 안쪽을 항해 돌아누웠다. 덮을 천 하나 없이, 꾹 몸을 웅크린 채 브래들리를 곁눈질로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곤히 잠든 채 미동도 않는 모습이었다. 한 공간에 나란히 흐트러져 밤을 지새우는 현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들어맞게끔 정해진 운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망집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도, 자신만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아도, 전부 브래들리의 존재로 귀결되고 만다. 손을 말아쥔 채, 네로는 결론을 지었다.

'확신했어. 정말로 저주받은 거구나. 당신에게.'

그렇게 언제나 품어왔지만, 단 한 번도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응어리를 겨우 꺼낸다. 날붙이를 건네듯 조심스럽게. 날 끝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서. 애정을 담아….

당신이 좋았어.

네로는 끝내 저항하지 않길 택했다.


글에서 잘 전달하기가 어려워서 말미에 살짝 덧붙이자면? 네로가 생각하는 저주는 물론 실존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 뿐... 네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다 보니 이런 부분이 잘 드러나질 않네요... 그렇지만... 이건 이미 자기암시라는 이름의 저주나 다름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법은 마음으로 쓰는 거니까? ㅠ

작은 설정이나 사소한 아다리가 안 맞더라도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냥 오타쿠 날조일 뿐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도움 주신 A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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