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야쿠

윈터루드

중부자

DANE by D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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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른 아침의 어슴푸레한 빛이 침실 커튼 사이를 미끄러지듯 들어와 눈가에 내려앉는다. 아서는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다가, 눈부심을 떨쳐내듯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서늘한 공기가 조그만 코끝을 스친다. 아이는 가볍게 떨며 동그마니 웅크렸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잽싸게 몸을 굴려 침대 밑으로 뛰어내렸다. 가벼운 몸이 부드러운 카펫 위로 거의 소리도 내지 않고 착지했다.

잠자리 옆에는 어제 벗어둔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아서는 맨발로 카펫을 지나 창가 아래 돌바닥을 밟았다. 커튼 밑으로 기어 들어가 창문에 뺨을 붙인다. 하얗게 김이 서린 창에는 냉기가 흘렀다. 방금 전까지 두툼한 이불에 감싸여 있던 아서는 그보다 훨씬 따뜻했다. 창을 짚은 손과 뺨 모양을 따라 맺힌 이슬이 여린 피부를 적셨다.

부연 창을 잠옷 소매로 문질러 닦고 밖을 주의 깊게 살핀다. 백은의 설원은 변함없이 거기 있지만 새로 내리는 눈송이는 없었다. 대신 온전히 드러난 겨울 아침 해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걸려 있다. 키 큰 나무는 가지마다 눈을 덩이덩이 매달았는데, 미처 다 녹기도 전에 가차없이 날려버리곤 하던 바람도 오늘은 잠잠한 듯하다. 아서는 눈 쌓인 나무가 좋았다. 기둥을 힘껏 밀면 머리 위로 온통 눈을 뒤집어 쓰는 놀이를 할 수 있었다. “완벽해.” 중얼거리면 흘러나온 숨이 유리에 허옇게 들러붙었다 천천히 뭉그러졌다. 아서는 그 위에 작게 그림을 그렸다. 손가락을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속삭인다. 혀를 깨물지 않도록, 단어를 정성 들여 발음한다. “오늘은, 오즈 님이랑, 밖에서 노는 날입니다.” 한 번도 틀리지 않은 문장을 곱씹으며, 아서는 다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만족스레 미소 지은 아서는 몸을 돌려 살금살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한 동작으로 침대에 숨어 들어갔다. 제 것보다 두 배는 높아 보이는 침대는 내려오긴 쉬워도 올라갈 때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먼저 발판에 발을 딛는데, 이때 매트리스를 감싼 천을 당겨 발판을 만든다. 그리고 몸이 뒤로 기우뚱 넘어가기 전에 원래 아서가 누워 있던 자리로 양팔을 뻗어 꽉 지탱하면 된다. 아서는 그렇게 잠깐 버둥거린 끝에 성공적으로 침대에 몸을 도로 눕혔다. 이불 속으로 파고든 아서는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잠든 오즈에게 부딪힐 때까지.

 그러나 아서보다 먼저 다가온 손이 있었다. 충돌 직전에 아서의 어깨를 붙든 오즈는 눈앞의 상황-그러니까 아이가 아침부터 침대를 가로질러 맹렬히 굴러온 이유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시선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도 섞여 있어서, 아서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이제 막 깬 척 눈을 비비고서, 방금 일어났다기엔 지나치게 명랑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즈 님?” 하지만 오즈는 대답 대신 아서를 끌어당겼다. 크고 다정한 손이 아직 차가운 아서의 손과 뺨을 차례로 만져본다. 아서는 순순히 손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오즈에게 매달릴 셈이었으나 작은 발은 겨우 오즈의 팔 언저리에 닿는 데 그쳤다. 오즈가 걸친 부드러운 잠옷 가운이 발가락 끝을 간지럽혀, 아서는 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때까지 조금 축축하고 차가운 뺨을 녹이던 손이 즉각 아서의 발을 붙잡으러 왔다. 마찬가지로 차갑게 식은 발을 조심스레 주무르며, 오즈는 순간 한숨을 쉬었다. 아서는 간지럽다는 듯 몸을 비틀며 웃었다. 아침잠은 이미 다 달아났다.

 “…신발을 신으라고 했을 텐데.” 오즈는 그렇게 말하며 아서를 번쩍 안아들고,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아서는 익숙하게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오즈는 슬리퍼를 신고, 반대편에 있을 아이용 슬리퍼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침대 위를 건너 둥실둥실 날아온 하늘색 슬리퍼가 오즈 앞으로 탈싹,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위로 아이를 내려놓는다. 잠깐 공중에서 다리를 흔들던 아서는 슬리퍼에 알맞게 발을 끼워넣었다. 몸을 놓아주는 순간 휘청이는가 싶더니 금세 중심을 잡고 선다. 겨우 그것만으로 아이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즈를 올려다보았다. 오즈는 그 얼굴을 천천히 지나쳐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에 엄한 소리로 당부했다.

“아서, 슬리퍼를 신고 뛰지 마라. 전에도 너는 아침부터 복도를 달리다가 넘어졌지.”

“괜찮아요, 오즈 님!” 아서가 황급히 대답했다. 부끄러운 기억은 잊어달라는 듯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러니까, 아침을 먹고 나서 토끼를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오즈는 아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바로 이해하진 못했다. 예컨대 그날의 외출을 몹시 기대했기 때문인가? 그렇다 해도 고작 토끼 한 마리가, 복도를 힘차게 달리다가 넘어져 무릎에 시퍼렇게 멍이 들기에 적당한 이유는 못 될 것 같지만……. 아무튼 오즈는, 어떻게든 믿음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 파란 눈동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그리고 다시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려던 순간, 어느새 오즈 옆으로 다가온 아서가 물었다.

“그런데 오즈 님, 오늘 아침은 뭔가요?”

“팬케이크다.” 오즈는 문을 열며 대답했다. “어제 피가로가 가져온 재료가…….” 그러나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큰 소리로 외쳤다.

“팬케이크!” 그리고 아서는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어찌나 날쌘지 반응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문은 반밖에 열리지 않았지만, 겨우 오즈 무릎까지 오는 작은 아이가 통과하기엔 충분했다. 가볍게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소리가 난다. “오즈 님, 얼른 가요! 얼른!” 불안할 정도로 들뜬 목소리에, 오즈는 문을 마저 열고 서둘러 복도로 나섰다. 아서, 하고 이름을 불러 멈추려 해도 이미 늦었다.

 

“잠깐, 아서……!”

 

뒤늦은 외침이 진작 비어버린 복도를 애처로이 울렸다. 저만치서 아이가 뛰어가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즈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란 정말이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어리석기 그지없는 존재인 듯했다.

2.

다행히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부엌까지 도달했다. 기대에 찬 눈빛을 발견하자마자 오즈는 아서를 덥석 들어올렸다. 말을 듣지 않은 벌을 줄 셈으로, 이번에는 엉덩이를 받치는 대신 옆구리에 단단히 낀 채 걷는다. 그렇게 세면대로 연행되면서도 아서는 까르르 웃으며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물을 받는 동안 아서는 피가로 선생님이 가져왔던, 남쪽에서만 자라는 딸기를 생각했다. 색이 무척 선명하고 새콤한 냄새가 났었다. 바구니 가득한 딸기가 전부 루주베리보다 큼지막했고, 군청색 레몬보다 달아 보였다.

 

“오즈 님, 아서가 손을 깨끗이 씻으면 접시에 딸기를 올리게 해주실래요?”

“좋을 대로 해라.”

 

발판을 딛고 서서 시원한 물로 손을 씻고 입을 헹구고 세수까지 하고 난 뒤 고개를 들자 오즈는 이미 거기 없었다. 아서는 수건에 얼굴을 열심히 문질렀다. 부엌에 다시 가 보니 오즈는 어느새 옷까지 갈아입은 채 서서 반죽을 휘젓고 있었다. 어쩌면 아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씻은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최대한 깨끗한 손으로 딸기를 올리고 싶어서 평소보다 공을 들이긴 했다. 오즈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아서는 오즈 옆에 서서 양 손을 펼쳐보였다. 오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딱히 눈치를 챈 기색은 없었다. 그래도 아서는 스스로 만족했다.

 

오즈는 팬케이크를 태우지 않고 뒤집는 타이밍을 최근 알아챘다. (원리는 모른다.) 아직 완벽한 형태로 부풀리는 요령은 익히지 못했다. 납작한 팬케이크를 접시에 차곡차곡 쌓는 동안 아서는 썰어놓은 딸기를 집어먹었다. 팬케이크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은 오즈는 아서의 입가를 문질러 닦아 주었다. 냅킨에 딸기즙이 묻어 발갛게 물이 든다. 아서는 말했다. “이제 딸기를 올려도 되나요?” 입을 닦는 중이라 발음이 한참 뭉개졌지만, 놀랍게도 이번에 오즈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래.” 짧게 대답하자 아서가 딸기 그릇에 손을 뻗었다. 오즈는 아서가 그릇을 엎거나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곁에서 지켜보았다.

 

마지막에는 생크림과 꿀을 얹었다. “아서,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어라.” 흥분해서 의자를 딛고 펄쩍거리던 아서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턱을 괸 채 크림이 동그랗게 놓이는 모양을 구경했다.

 

“오즈 님, 꿀로 그림 그려주실 수 있나요?”

“…토끼?”

“음, 음.” 제법 긴 고민 끝에 아이가 선택한다.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꽃으로!”

 

꽃? 오즈의 미간이 약간 패였다. 지금까지 아서는 토끼 모양 외의 것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오즈는 아주 단순한 형태만 묘사해도 아서가 ‘토끼’라고 인식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편이 더 귀엽게 보인다는 것도. 그러나 꽃은 또 전혀 다른 문제였다. 즉 어떤 꽃을 어디까지 묘사하면 되는가……? 잠깐 고민한 오즈는 숟가락으로 꿀을 떴다. 일단 꽃잎 몇 장을 그려놓으면 얼추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암술과 수술과 꽃받침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즈는 제가 또 ‘토끼’ 때와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힐긋 아이를 살피자, 아서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꿀이 흥건한 표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긴장이 흐른다. 좋으면 좋다고 언제나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였다. 기대에 어긋났음이 틀림없었다.

오즈는 제 몫의 팬케이크를 눈여겨 보았다. 아직 아무 토핑도 올리지 않길 잘했는지도 모르겠다. 기회는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나 팬케이크 접시를 빤히 들여다보던 아서는 침착하게 물었다. 

“이런 모양의 꽃이 있을까요?” 흘러내린 꿀이 의도했던 모양보다 훨씬 일그러진 형태를 그려냈다. 오즈는 그 처참한 작품을 애써 못 본 체 하며 자리에 앉았다.

“글쎄.”

“그럼, 오즈 님.” 아서는 어쩐지 즐거운 목소리였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아서가 자리에서 들썩이고 있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생겼을 때의 자세다. 불길한 징조였다. “오즈 님!”

 

“오늘은 이 꽃을 찾으러 가요!”

“…이걸?”

“네! 오늘 밖에 나가기로 했잖아요……. 기억하시죠?” 아서가 불안하게 물었다. 물론 오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서가 어제 통 잠들지 못해 재우는 데 오랜 시간이 들었다는 것도.

“원래는, 오늘은, 오즈 님을 닮은 커다랗고 멋진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치만, 꽃을 찾는 모험도 무척 재밌을 것 같아요. 오즈 님, 모험을 해도 되나요?”

“…위험한 곳은 안 된다.”

“꽃이 안전한 곳에 있으면 괜찮을 거예요.” 

허락을 받은 아서는 벌써 보물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작은 머릿속에서는 아마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팬케이크 반죽처럼 빙글빙글 바쁘게 뒤섞이고 있을 터였다. 똑똑한 아이는 곧바로 첫 번째 할 일을 떠올렸다.

“모양을 외우지 않으면 찾을 수 없겠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오즈 님.” 아서는 의자에서 훌쩍 내려왔다. 오즈는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아서.” 아서는 힘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방으로 달음박질할 준비를 한다. “아서가 종이를 가져올게요!”

 

빈 식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오즈는 망연히 생각했다. 그는 아서가 바란다면 얼마든지 종이든 펜이든 식탁 위로 수북이 쌓이도록 꺼낼 수도 있었고, 공중에 똑같은 모양을 재현할 수도 있었다. 하다못해 꽃을 찾는 일조차 마법의 힘을 이용하면 몇 배로 쉬워질 터였다. 굳이 먼 길을 돌아가고, 굳이 번거로운 수단을 택하며, 굳이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해내려고 하는 아이 앞에서 방대한 마력은 종종 일절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기껏해야 아이를 기다리는 팬케이크가 식지 않게 유지하고, 종이와 펜을 들고 달려오는 아이를 가볍게 공중으로 띄워올려 의자로 살며시 옮길 뿐이다.

 

아이는 달리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을 굴렀다. 높은 웃음소리와 함께 몸을 웅크렸다 편다. 오즈는 아서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혔다. “따라 그릴 거예요.” 아서는 조금 구겨진 종이를 식탁 위로 바지런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연필을 손에 쥐고 신중히 선을 그려나간다. 심각한 표정이 팬케이크 접시와 종이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동안 오즈는 아이의 보송한 은빛 머리가 점점 부풀듯 헝클어지는 모양을 구경했다. 어쩌면 아까 허공에서 굴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고 보니 오늘 아서는 머리를 빗었던가? 아서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양 손에 흑연을 잔뜩 묻혀가며. 그걸 지적하는 게 좋을까? 아까 깨끗이 씻은 손을 자랑한 것 같은데, 다시-아니, 전보다 훨씬 더러워진 걸 알면 아서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한번 의식하고 나자 오즈의 신경은 온통 아서의 머리와 손에 쏠렸다. ‘포크를 쥐기 전에 다시 손을 씻으라고 해야겠군.’ 식사 전에 손을 씻도록 늘 주의했으니, 아서도 이해해 줄 것이다. ‘끝나면 다시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기고…….’ 그때 아서가 연필을 힘차게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식탁에 약간 흑연 가루가 떨어졌지만, 아서는 눈치 채지 못했다.

 

“오즈 님! 어떤가요?” 오즈는 아서가 내민 그림을 순순히 받아들었다. 흑연 때문에 여백에 온통 시커먼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힘을 너무 많이 준 탓에 살짝 건드릴 때마다 짙고 굵은 선을 따라 연필 가루가 훌훌 날렸다. 팬케이크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오즈는 고개를 돌려 그림 위로 입김을 훅 불었다. 그리고 아서를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잘 그렸구나.” 

마치 겨울 아침 커튼을 확 걷은 것처럼, 아서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그 순간 아서는 그 그림을 보물처럼 여기게 된다. 얼른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 자랑스럽게 벌리는 양 손을 응시하며 오즈는 덧붙였다. “하지만 손을 다시 씻어야겠다. 그림을 돌려주는 건 그 다음이다.”

그림을 가볍게 둘둘 만 오즈는, 어느새 마법처럼 등장한 리본을 한 바퀴 둘러 두루마리를 비밀스럽게 묶었다. 돌려받고 싶으면 딸기를 집을 때처럼 깨끗한 손이어야 한다는 말은 차라리 협박에 가까우나 오즈는 이런 방식밖에 알지 못했다. 다행히, 아서는 제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보다, 순식간에 훨씬 더 멋진. 그래, 마치 ‘보물지도’처럼 변신한 그림에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럼 저 손 씻고 올게요, 오즈 님! 기다려 주세요!”

 

똑같은 일이 벌써 세 번째였다. 오즈는 이번에야말로 아서를 제때 불러 세웠다. “아서.” 아이는 막 달려가려던 발을 순순히 멈췄다. 오즈는 그림을 든 손을 보란 듯이, 다소 버릇없는 동작으로 흔들었다.

“뛰지 마라.” 

아서는 비실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며 살금살금 문턱을 넘어갔다.

3.

날씨는 턱없이 맑았지만 북쪽의 공기는 언제나 얼어 있었다. 따라서 오즈는, 아이가 얼마나 감기에 걸리기 쉬우며 얼마나 추위와 더위와 굶주림과 졸음에 약한지, 또한 아이란 그것을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임을 깨달은 후부터, 아서의 차림을 될 수 있는 한 두텁게 유지했다.

 

그러나 아서는 그의 생각에 별로 동의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증거로, 아서는 오즈가 공들여 칭칭 감아준 목도리를 조금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펼치면 아서보다 두 배는 길게 늘어질 목도리는 어찌나 많이 감았는지 목을 두툼히 감싸고서도 아서의 얼굴을 반이나 가렸다. “답답해요, 오즈 님.” 아서는 숨이 막히는 소리로 칭얼거렸다. “아서는 눈사람이 아니에요.” 오즈는 그런 아서의 입에 조그만 설탕 알갱이를 밀어넣었다. 그리고 아서가 입을 다문 채 설탕을 굴리는 동안 목도리를 마저 감고, 모자를 씌우고, 장갑에 작은 손을 끼워넣었다.

 

어느새 설탕을 다 먹은 아서가 종종걸음으로 오즈를 따라갔다. 여전히 목도리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오즈 님, 적어도 목도리만이라도 벗으면 안 될까요?”

“너는 쉽게 열을 낸다.” 오즈도 여전히 엄하게 말했다. 목도리는 커녕 목이 긴 양말 한 짝에조차 한 치의 양보도 없으리라는 것은 단호하게 내딛는 구둣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약 아서가-쌍둥이님이 말씀하시기를 ‘씹지 않고 통째로 꿀꺽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게’-조르면, 오즈는 결국 들어줄지도 모르지만, 아서는 그렇게까지 해서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침울하게 걷는 아서를 흘긋 쳐다본 오즈는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성문을 앞두고 아이보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후, 몸을 살짝 비튼다. 고대하던 외출을 별것도 아닌 일로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즈는 손을 내밀었다. 조용히 말한다.

 

“손을.”

 

아서의 왼손이 이미 예의 ‘보물지도’로 꽉 차 있었으므로, 오즈는 아서가 잡기 쉽도록-왼손을 뻗었다. 방금 전까지 풀 죽어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힘차게 달려온 아서는 오즈의 손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오른팔을 경쾌하게 흔드는 아이를 지탱하며, 오즈는 성문 앞에 섰다. 이전에는 아서를 안은 채 발코니부터 날아서 이동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천진하고 무서운 사건이 동경 어린 눈망울과 함께 일어나고부터는 가능한 한 제 발로 걷기로 했다. ‘아이를 하나 죽이는 데는 눈 깜빡일 시간조차 필요치 않지만,’ 오즈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는 이제부터 발산할 마력으로 순식간에 데워졌다. 혀끝을 익숙하게 맴도는 발음을 떠올린다. ‘아이를 하나 살리는 데는, 너무 많은 품이 드는 동시에, 너무 많은 것이 무용해진다.’ 그건 정말 곤란하고 성가신 일이었지만, 오즈는 어째선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 자의식도 없이.

무거운 문은 짧은 단어를 읊조리는 것만으로 소리도 없이 열렸다. 아서는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문 너머 풍경을 기다렸다. 마침내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순간, 한 줄기 차고 강한 바람이 불어든다. 한 발 앞서 나간 오즈가 돌풍을 막아준 덕에 아서는 겨우 머리 끝만 흩날리고 그쳤다. 대신 오즈의 긴 머리칼이 승전국의 깃발처럼 길고 아름답게 펄럭이는 모습을, 아서는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아아, 멋진 오즈 님!’

 

아서는 순간적으로 벅찬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오즈의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걸음을 멈춘 오즈는 몸을 딱 붙이고 웃는 아이를 어쩔 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한 걸음 내딛자 아서는 꺅 소리를 질렀는데, 그 역시 무섭다기보다는 환희에 찬 탄성에 가까웠다. 심지어 아서는 아예 팔다리를 전부 써서 오즈에게 매달렸다. 예측할 수 없다.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한참 이해 못할 생물 보듯 다리를 내려보던 오즈는 결국 아이를 떼어놓기로 했다. 그렇지만 대체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가? ‘설마 벌써 지쳤나?’ 아서는 손을 씻으면서도 콧노래를 불렀고 오즈가 옷을 입히기 전까지는 계속 소파에서 뛰었다. 하지만 늘 그 정도는 움직였을 텐데. ‘돌아가고 싶은 거라면 말로 해라.’ 웃기지도 않았다. 그가 짜내는 말이란 죄다 끔찍하리만치 서툰 문장이었다. 아서는 아직 십 년도 살지 않았지만 적어도 ‘표현’에 있어서는 이천 년을 넘게 산 그보다 더 뛰어났다.

 

고민 끝에 오즈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입을 잘 놀리던 자의 언어를 빌리기로 했다. 몹시 복잡한 기분이 들어, 오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섞었다.

 

“…이대로 가다간 해가 질 즈음에나 도착하겠구나.”

 

능숙한 농담에는 언제나 약간의 비아냥과 쓴 맛이 있었는데,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이 서툰 탓에 오즈의 말은 정말로, 정말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다시, 이번에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얌전히 오즈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에게 손을 내민다. 오즈는 그 손을 잡았다. 눈 밟는 소리가 각기 다른 박자로 더해지는 동안, 오즈는 역시 아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교할 대상이 없었으므로-심지어 그 자신의 어린 시절조차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아서’와 ‘아이’는 언제나 같은 말이었다.

4.

결과적으로 아서는 옳았다. 그러니까 목도리에 한해서는 말이다. 오즈는 아서의 목에서 목도리를 풀어준 대신, 훨씬 짧고 부드러운 면 손수건을 감아주었다. 어쨌든 눈과 공기는 여전히 찼기 때문에 땀이 갑자기 마르면 열이 오를 것도 명백했다. 아서는 그 정도는 눈감아 주겠다는 듯 얌전히 있었다. 오즈가 주머니에서 꺼낸 짙은 색 손수건은 너무 어른스러워서 썩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눈이 덩어리째 쌓여 있던 나무에서는 이제 물이 뚝뚝 떨어졌고, 햇빛을 받자 싱그럽고도 오묘한 빛을 냈다. 적설량이 적었던 곳은 심지어 흙바닥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아서는 신발코로 땅을 쿡쿡 찔러 구멍을 팠다. 젖은 흙은 의외로 단단했지만 그래도 얼마간 반복하자 푹신해졌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다 꽃을 심으면 어떨까요?” 아서는 벌써 그 모습을 상상한 것 같았다. 손에 들고 있던 보물지도를 조심히 펼친 아서는 마치 이름난 건축가라도 된 것처럼 꽃이 들어갈 자리와 주변의 풍경을 공들여 살폈다. 상상 속에서 꽃은 오즈의 눈처럼 붉은색이고 줄기가 길었으며 잎이 무척 튼튼했다. 게다가-당연하게도-아름다웠다.

한편, 오즈는 하늘을 살피고 있었다. 아서를 위해 맑은 날을 마련한 것은 분명 좋은 선택이었다. 눈이 녹은 덕에 북쪽에 분명 존재하지만 감춰져 있던 것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서는 그것들을 모두 보고 듣고 건드리고-때로는 입에 집어넣어 오즈를 놀라게 하고-그리고, 새로 만난 것들에게 늘 그렇듯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서야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파란 하늘과 물기 어린 설원과 따뜻한 햇살이 반드시 필요했다. 찬란히 숨쉬는 생명을 대변하는 것들.

 

그러나 동시에, 오즈는 군데군데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눈을 밟을 때마다 약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파괴는 손쉽고, 회복은 더디며, ‘선’을 가늠하는 일은 언제나 고도의 신경을 요했다. 올라간 기온이 오래도록 얼어 있던 설산과 빙하, 호수를 갑작스럽고 집요하게 녹인다.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금이 가고 떨어진다. 아주 먼, 먼 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허물어지는 터전과 먹구름처럼 우르릉 소리를 내며 부피를 키워가는, 눈으로 된 파도 소리도……. 오즈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아서가 오즈를 부르고 있었다.

“오즈 님!” 아서의 옷에는 진흙과 덤불 이파리가 붙어 있었다. 오즈는 무릎을 숙이고 잎을 털어주었다. 흙을 털어내는 것은 포기했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아이는 젖은 눈바닥을 기어다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서는 한 손에 그림, 한 손에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가지 끝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열매가 달려 있었다. 덤불 사이로 떨어진 덕인지 열매는 약간 찌그러졌을 뿐 거의 성했다. 그리고 아서는 코트 단추가 하나 없어졌다. 벌어진 코트 자락 너머로 살짝 얼룩진 스웨터가 보였다. 한동안 오즈는 아서의 코트를 여며주려 해 보았지만, 이미 떨어진 단추를 무작정 박아넣는다고 코트가 제대로 잠길 리 없었다.

 

“오즈 님, 이 열매는 왜 흰색일까요?”

“…….”

“먹을 수 있을까요?”

“함부로 입에 넣으면 안 된다.” 그때까지도 코트 단추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오즈가 얼른 주의했다.

“그러지 않을게요. 대신 성에 가져가고 싶어요.” 아서는 열매가 달린 가지를 살짝 흔들었다. 열매의 겉부분은 수정처럼 투명했고 빛이 열매 껍질을 푸르스름하게 통과해가는 모습을 선명히 관찰할 수 있었다. 아서는 그 수정 열매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표정이었다. “도감에서 이름을 찾아볼래요!” 오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열매를 따서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아서의 코트는 열매를 넣기엔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아서는 나뭇가지를 용사의 보검처럼 용맹하게 휘두르며 걷기로 했다. 단추는 결국 잠글 수 없었다.

모험은 계속되었고 오즈의 주머니는 점점 더 빵빵해졌다. 아서는 열매 말고도 돌멩이와 꽃과 도토리와 새의 깃털을 모조리 수집하고 싶어했다. 그 모두에는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름이 알고 싶다거나, 모양이 특이하다거나, 색깔이 예쁘다거나……. 오즈의 눈에는 그것들이 그 자체로만 보였지만, 아서에게는 가치를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건 아마 살아온 세월의 차이와는 관계 없을 것이다. ‘아서는 2천년이 지나도 변함없을 테니까.’ 오즈는 자기가 방금 떠올린 생각에 놀랐다. 오즈는 아서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쳤다. ‘그 전에 저것은 돌이 될 테지만.’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왔는데도 별로 명쾌하지 않았다. 오즈는 이것과 관련된 생각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고작 이런 것에 마음이 흔들리면 그가 지금 보호하고 있는 은빛 열매가 찌그러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아서는 슬퍼할 것이고, 오즈는 생경한 죄책감을 안은 채 방황할 것이다. 그런 정신 사나운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다시 우르릉,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제법 가까운 데서 들렸다. 아서도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소리일까요?” 아서는 당장에라도 그쪽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아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자주, 많이 던졌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오즈가 명확한 답을 아는 문제였다. 오즈는 아서가 쥐고 있는 두루마리에 무심히 시선을 던졌다.

“아서.” 아서가 고개를 들었다. “원하던 꽃은 찾았나.”

“아니요…….” 그러나 오즈는 그림을 새로 펼치는 대신, 아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는 아서를 보았다. 만약 그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다른 눈빛을 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서는 끝을 아는 아이였다.

“그렇군.” 오즈는 몸을 숙여 아서의 코트를 다시 한 번 여몄다. 아서는 눈치 빠르게 오즈의 목에 팔을 둘렀다. 오즈는 아이가 품에 제대로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단숨에 안아올렸다. 아이에게서는 짓이긴 풀냄새,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언제나 부드러운 우유와 크림 비슷한 냄새가 났다. 오즈는 그 귓가에 대고 일렀다. 무척 비밀스러운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아서, 좋은 기회다. 마법을 가르쳐 주마.”

“지금?” 아서는 당연히 반가워했다. 빠르게 달랑거리던 부츠가 오즈의 옆구리 언저리를 찼다. 오즈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기색으로, 아이의 무게를 가뿐하게 한쪽 팔로 옮겼다. 다른 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봉이 들려 있다. 아서가 물었다. “어떤 마법이에요, 오즈 님?”

“간단하다.” 오즈는 주머니에서 열매를 꺼냈다. 아서가 발견한 수정 열매였다. 오즈는 그것을 아서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즈의 손에서 고작 장난감 공 만하게 보이던 열매는 아서가 쥐자 큼직한 복숭아 만해졌다. 표면은 반질반질했고 살짝 미끄러웠다. 장갑을 벗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동안 오즈가 이어서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그 열매를 지키는 거다.”

“어떻게?”

“수호 마법을 걸도록 해라. 시범을 보여주지.”

그렇게 말하고 오즈는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붉은 구슬이 박힌 핸들의 궤적을 따라 어렴풋한 빛이 번졌다. 아서는 저도 모르게 눈부신 장막 사이로 손을 뻗었다. 빛은 주변을 맴돌다가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아서는 그것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오즈를 쳐다본다. 오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 차례다’ 라고 말하는 듯 진중한 동작이었다. 아서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열매를 양손으로 쥐었다. 오즈가 아서를 품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겨 제게 머리를 기대게 했다. “준비 됐나?” 아서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

“놓치지 마라.”

다음 순간, 아서는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오즈와 아서는 창공 한복판을 부유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데 오즈가 가차없이 지시했다. “아서, 마법을 걸어라.” 아서는 눈을 번쩍 뜨고 손 안의 감각에 집중했다. 작은 입을 달싹이며 정령들의 호기심 어린 기척을 끌어모으려 애쓴다. 공존을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아서의 마법은 정중한 부탁, 상냥한 제안이다. 짧은 명령으로 그치지 않고 설득에 시간을 들이기에 주문은 오즈보다 훨씬 길었다. 또한 언제나 자기소개를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넨다. 이토록 어리고 순진무구하고 사랑스러운 마법사에게 이끌리지 않고 배길 리 없었다. 아서는 주문을 외웠다.

오즈는 어느새 빗자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서가 집중하는 동안 그는 외투자락으로 아서를 감싸 아래를 보지 못하게 했다. 열매에 무섭도록 집중한 아서는 방금 제가 서 있던 자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올곧기도 하지. 그 성정이 때로는 너를 지키고, 때로는 너를 해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나약한 지금은, 내가 지켜주마. 오즈는 여기까지 밀려오는 동안 무럭무럭 커진 사태눈과 우저적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나무,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무력한 생명들을 발밑으로 멀거니 바라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처절한 발버둥의 끄트머리만을 비죽이 남긴 채 모두 새하얗게 사라질 때쯤 머리를 돌려 목적지를 정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모처럼의 외출에 서둘러 성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역시 목도리를 해야 했다.’ 오즈는 아이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오즈 님, 어디로 가나요?” 어느새 아서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열매를 품에 안고 있었다. 

“저 다 했어요! 봐 주세요, 오즈 님. 이제 돌아가는 건가요?” 오즈는 열매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아서의 결계는 재생력이 좋지는 않았지만 단단했고 끈질겼다. 오즈는 아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서가 해맑게 웃었다.

“그래, 잘 했구나.”

“정말요? 신난다! 어디 갈 거예요?”

“호수. 곧 도착한다.”

“호수에는 뭐가 있어요?”

“얼음이 녹으면 알 수 있겠지.”

오즈는 가라앉은 것과 가라앉힌 것을 떠올렸다. 오래 묵은 것과 발버둥치는 것도. 어느 쪽이든 풀려나면 성가시기에 상태를 보고 도로 얼릴 생각이었다. 아서는 얼마 전 도감에서 본 물고기의 이름을 몇 개 대었다. 확인해 보자고 거듭하는 다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5.

‘생각만큼 녹지 않았군.’

쟁반 같은 호수는 여전히 두꺼운 얼음 밑에 가라앉은 채였다. 오즈는 먼저 아서를 안은 채 빗자루에서 내리고, 다음으로 아서를 호숫가에 내려놓았다. 열매는 도로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호수 가장자리를 불규칙하게 갈라놓은 금이 눈에 띄었지만 균열이 깊지는 않았다. 호수에 다가간 아서는 쭈그려 앉아 표면에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두껍고 불투명한 얼음 탓에 안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이번에는 호수 위로 살며시 발을 얹어 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발이 약간 미끄러져 다리가 벌어졌다. 아서는 다른 발도 올렸다. 신중하게 한 걸음 내딛자 아주 작게 ‘빠자작’ 소리가 났는데, 벽난로에서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 또는 고드름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아서는 이제 신이 나서 호수 위를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오즈 님은 안 들어오세요?”

“……내가 올라가면 무너질 거다.”

“괜찮아요! 보세요, 오즈 님. 아서가 이렇게,” 아서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부츠가 호수에 힘껏 부딪힐 때마다 자그마한 얼음 부스러기가 튀었고, 장작 쪼개지는 소리는 훨씬 크게 났다. “이렇게 뛰어도 멀쩡한 걸요!” 그러나 오즈는 눈을 크게 뜬 채 굳은 얼굴로 아서가 깔깔 웃는 모습을 볼 뿐이었다. 아서는 오즈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정한 얼굴을 하고서 얼른 덧붙인다.

“음, 아니면, 제가 손을 잡아드릴까요?”

“…너는.” 오즈가 숨이 턱 막힌 소리로 말했다. 봉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휘둘러 다시는 호수가 깨지지 않도록 영영 얼려버리고 아서를 건져내고 싶었지만……. 울렁이던 오즈의 속에서 터져나온 말은 그보다 훨씬 짧았다. 밤이 드리우듯 무거운 목소리로, 아침을 찾을 때의 발음을.

“아서…….”

아서는 폐 안 쪽이 간지러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오즈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좋았다. 단번에 다정한 소리로 ‘아-서’ 하는 것도 좋았지만, 아서가 ‘가끔’ 개구쟁이처럼 굴 때마다 탄식하듯이 ‘아아’ 하고 부르고 나서 꺼질 듯한 ‘서’로 끝맺는 게 좋았다.

아서는 호수 위를 빙글빙글 미끄러지며 돌았다. 그리고 오즈를 따라 이름을 외워 보았다. “아-서, 아서.” 노래하듯이 읊조리고는 거기다 오즈의 이름도 더한다. “다정하고, 강하고, 상냥한, 오-즈-님…….” 평소와 달리 단숨에 부르지 않고 오래오래 늘였다. 어느샌가 오즈도 호수 위에 있었다. 그는 춤추는 아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소리도 없이 왔을까? 아서는 문득 얼음 쟁반 한복판에 선 두 사람을 보고 놀랐다. 오즈가 말했다.

“이제 돌아가지. 얼굴이 붉다.”

“아서는 괜찮아요.”

“열이 나서 아프면 힘들어지는 건 너다.” 오즈는 아서의 붉은 뺨을 가만히 문질렀다. 열을 띠긴 했지만 말마따나 무리해서는 아닌 듯 싶었다. 그때 아서가 오즈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제 뺨과 오즈의 뺨을 맞대고 비볐다.

“오즈 님도 조금 빨갛게 됐어요.”

“…내가?” 오즈는 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어쩌면, 해가 너무 뜨거웠을지도 몰라요.” 아서는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하얀 눈길이 찬란한 햇빛을 그대로 반사해서 무척 눈이 부셨다. 오즈와 아서는 나란히 하늘을 올려보았다. 실타래 같은 구름이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갔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여름에는 호수가 다 녹을까요?”

“북쪽은 여름이 되어도 기온이 낮다. 큰 차이는 없겠지.”

“그럼 물고기도 살지 않는 걸까…….” 아서는 발밑의 호수를 내려다보며 공중에서 다리를 흔들었다. 뼈가 비쳐보이는 투명한 물고기도, 날개가 달린 연어도? 아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오즈 님, 여름에도 호수에 와요.” 무척 당연한 말투였다. 오즈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빗자루를 성으로 향했다.

6.

성에 돌아오자 편지가 한 통 놓여 있었다. 아서는 봉투를 집어들고 발신인을 또박또박 읽었다. 그리고 아서의 젖은 코트와 부츠를 정리하는 오즈에게 달려가 건넸다.

“오즈 님! 피가로 님이 편지를 남기고 가셨어요.”

“피가로가?” 오즈는 봉투를 아주 짧게 흘겨보고, “나중에 읽겠다.” 하며 난롯가를 대충 손가락질했다. 아서는 봉투가 그을리지 않도록 탁자를 끌어당기고, 천을 깔아 정중히 올려놓았다.

저녁 식사로는 묽은 크림 스튜가 나왔다. 스튜를 배부르게 먹고 나서 아서는 난롯가에 갖다놓은 오즈의 의자에 앉았다.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발을 말린다. 다리를 흔들면 소파 아랫부분에 부딪혀 튕겨나와 더 높이 올라갔다. 아서는 한동안 다리를 파닥거리며 놀았다. 소파에서 스프링이 튕기는 퉁퉁 소리가 났다.

그러다 뒤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오자, 아서는 재빨리 소파 등받이에 딱 붙었다. 이대로 몸을 웅크리면 정면에서 봤을 때 몸집이 작은 아서가 완전히 가려졌다. 물론 그것은 소파보다 낮은 아서의 시점에서였다. 아서는 오즈의 걸음에 맞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오즈 님!”

오즈는 제 소파에서 갑자기 머리를 내민 아이를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가 동그란 은빛 머리를 진작 훤히 보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해야 할지, 타이밍 맞게 놀람 비슷한 반응이라도 해야 할지 고민한 것이다. 어느 쪽이건 오즈는 이미 늦었다. 아서는 어느새 충분히 만족하고 자리에 똑바로 앉아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즈는 먼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도감과 이야기책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오늘 아서가 찾아낸 보물들은 허공에 뜬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서를 들어올린 뒤 소파에 앉고, 아서는 자신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아서는 알아서 편한 자리를 잡고 오즈에게 몸을 기댔다. 손을 까딱이자 따뜻한 머그컵과 찻잔도 딸려왔다. 아서는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리며 그 멋진 마법들을 구경했다.

아서는 도감을 보며 공부하는 게 우선이라고 선언했다. “그게 먼저예요.” 거역할 수 없게 만드는 단호한 어투였다. “꽃이 시들면 더 찾기 힘들어질 테니까.” 오즈는 이미 꽃과 열매가 상하지 않는 마법을 걸어두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서는 늘 오즈가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아서가 모르는 것은 대체로 오즈도 모르는 것일 때가 많았다. 때로는 오즈가 아서보다도 모를 때가 있었다. 예컨대 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열매는 상한다는 사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다친다는 사실. …어린 아이는 장난이 많고,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 세계의 법칙을 어기며 살아온 마법사를 질서와 궤도 위로 끌어당기는 천진한 목소리…….

오즈는 아서가 불러주는 대로 도감의 페이지를 펼치고, 잘 읽을 수 있도록 받쳐 주었다. 아서가 글자와 그림, 그리고 꽃을 유심히 살피다가,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알렸다.

“이거예요.” 아서는 꽃을 그림 옆에 대 보았다. “잎이 똑같이 생겼어요. 색은 다른 것 같지만……. 아, 아니에요.” 글자를 바쁘게 읽어내리던 아이가 고쳐 말했다. “북쪽에서는 빨간색이 핀다고 해요. 기온에 따라 색이 달라져서.”

“그렇군.” 오즈는 아서가 쥐고 있는 꽃을 흘끔 보았다. 그것은 빨간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주색에 가까웠다. “다른 곳에서는 무슨 색이지?”

“날이 따뜻할수록 파랗게 되다가 시들어버려요.” 동쪽, 서쪽, 중앙의 북쪽지역을 동그랗게 가리키고 덧붙인다. “그리고, 시들기 전에는 따뜻한 빛이 난대요.” 아서가 고개를 들었다.

“꽃병에 꽂아서 창가에 올려놓을까요?”

“…좋을대로 해라.” 아마 방 어딘가를 뒤져보면 쓰지 않는 병이 하나쯤은 있겠지. 그걸 ‘꽃병’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야무진 아이가 판단해 줄 테다. 물론 그 전에 마법을 푸는 걸 잊으면 곤란해질 것이다. 아서는 이어서 열매를 집어들었다. 그들이 돌아오고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열매는 아직 막 딴 것처럼 싱싱하고 차가웠다.

아서는 만물에는 반드시 주어진 이름이 있다고 믿는 아이였다. 누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에, 그리하여 그를 찾고 불러줄 누군가가 있기에. 만나는 모든 것의 이름을 궁금해했다. 오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증거였다.

“오즈 님이? 왜요?”

“사람은 좋아하는 것의 수만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

“두려움은 미지에서 오고, 말에는 힘이 있다. 형체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은 두려워할 대상을 볼 수 있게 되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거리를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거리를?”

“멀리하려면 말을 아끼고, 가까이하려면 반복해서 부르면 된다. 이건 극히 최소한의 예시에 불과하지만…….” 오즈는 잠시 난로의 불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이든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은 마음을 반영한다. 가볍게 반복하면 처음 부여한 형체가 점점 익숙해져서, 의미에 담긴 무게가 사라지고 만다.”

“잘 모르겠어요.” 아서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즈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종종 그렇게 됐다. “그럼……. 오즈 님의 이름이란 건?”

“두렵고 꺼려지는 대상에 붙인다. 그렇게 하면 세상 모든 공포는 내 것이 되고, 그 이름을 반복해 부르면 삶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로 줄어들지. 영리한 수다.”

“그렇지 않아요!” 아서가 파랗게 질려서 외쳤다. 마치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동작이었지만, 아마 그는 진심일 것이다. 아서는 오즈에게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안겨서는, 슬픈 목소리를 냈다.

“아서는 오즈 님이 두렵지도 꺼려지지도 않아요. 그런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오즈 님이 정말 좋아요. 이 마음은 앞으로도 쭉, 변하지 않을 거예요…….”

오즈는 눈을 감았다. 순간 현기증이 일 정도로,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바로 아까 무거운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한 참인데. 아서는 정말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어 골치가 아팠다. 동시에, 두려울 정도로 사랑스럽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오즈의 언어는 이 생소한 감정을 그렇게, 분명히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저 불안하게 술렁이는 데 그쳤다. “약속을 하지 마라, 아서. 너는 마법사다.” 오즈는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오즈 님.” 꼬박꼬박 부르는 이름만큼 아서가 가까워진다. 오즈는 다시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아서는 머그컵을 입에 가져다대고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오즈 님의 설탕 맛이 나요.” 그런 이유로.

7.

오즈.

피가로입니다. 성에 들렀더니 자리를 비웠길래 편지만 남기고 갈게.

뭐, 편지라고 해도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야. 애초에 아서 얼굴이나 한 번 보러 온 거였어. 딸기는 먹어 봤어? 그거 귀한 거다, 남쪽에서도 특상품이래. 어때, 고맙지? 다음에 만나면 인사하도록 해.

아서는 아직 잘 지내는 모양이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더라. 오늘은 외출? 오는 길에 보니 날이 엄청 좋던데, 네가 한 짓이지. 북쪽도 고생이네. 아무리 악의가 없어도 말이야.

잊지 마. 너는 고작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동쪽으로 흘러가야 했던 구름을 붙들어버릴 수도 있고, 편지 봉투를 찢듯이 지면에 깊고 거친 균열을 낼 수 있지. 세상은 네게 복종하게 되어 있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잊지 마.

그래봤자 이 편지도 태워버릴 셈이지. 매정하긴! 아서에게 안부 전해줘. 상냥하고 멋진 피가로 선생님이 조만간 엄청난 선물과 함께 놀러올 거라고 해. 그리고 아마 쌍둥이님도 찾아갈 거야. 아하하, 네가 싫어하는 표정이 눈에 훤한데. 알면 반성해. 아서가 와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봐줄 수 있는 선이란 게 있지.

그럼 다음에 보자. 네 무시무시한 결계는 원래대로 돌려놓고 갈 테니 걱정 말고. 그렇지, 다음엔 나한테도 네 특제 팬케이크를 대접해주는 건 어때?

애정을 담아,

너의 친구 피가로.

오즈는 봉투를 반으로 찢고, 이어서 편지도 세 번에 걸쳐 잘게 찢어버렸다. 깜짝 놀란 아서가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한낱 종이조각으로 바뀌어버린 편지를 보고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가로 선생님이죠? 뭐라고 하셨어요?” 오즈는 솔직히 별로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전달받은 말과 눈앞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오즈는 고민 끝에 솔직하게 답했다.

“조만간 놀러올 모양이다. 네게 줄 선물이 있다더군.”

아서의 표정이 바로 밝아지자 그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오즈의 기분과는 별개로, 이건 맞는 답이었던 듯하다. 아서는 벌써부터 한껏 흥분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정말? 어떤 선물이래요? 오즈 님? 피가로 님 언제 오신대요?”

“…모르겠다. 적혀 있지 않았어.” 오즈는 잊기 전에 덧붙였다. “그리고, 아마, 쌍둥이도 올 거다.”

“더 좋아요!”

오즈는 아서가 의자에서 풀쩍 뛰어내리고는, 한참 난로 앞을 서성이며 손님들에게 대접할 찻잔과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자신이 모아놓은 물건 중 가장 귀한 것을 선물하겠다고 선언하는 모습을 약간 씁쓸한 미소를 띤 채 지켜보았다. 그리고 찢은 편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 손가락을 들었다. “잠깐!” 아서가 오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가 해볼래요, 오즈 님!”

“…뭘?”

“제가 벽난로에 종이를 태워볼래요.” 아서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공중에 날리는 종잇조각을 긁어모았다. 하는 모양을 보면 또 마법이 아니라 손으로 하나씩 태우는 놀이를 하고 싶은 듯했다. 오즈는 언제나처럼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곧 불은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스쳐, 얼른 덧붙였다. “손을 델 수도 있어. 부지깽이를 줄 테니 나와 함께 하도록 해라.”

두 사람은 난로 앞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편지 조각을 하나씩 태웠다. 서명이 적힌 부분을 꼼지락거리며 편 아서가 문득 중얼거렸다.

“피가로 님이 슬퍼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 오즈는 코웃음쳤다. “그 남자는 겨우 이런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내가 곧바로 태울 거라고도 예상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서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적당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는지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종이와 잉크가 타는 매캐한 냄새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만 퍼졌다.

아서는 오즈의 손에 감싸인 채 부지깽이를 멀리 잡고 불 속을 쿡쿡 들쑤셨다. 크기가 작은 조각은 진작 재가 되어 까맣게 탄 나무껍질 사이로 섞이고 있었다. 아서는 잿더미를 뒤적이며 언젠가 피가로가 한 말을 떠올렸다.

“한 번 재가 되어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대요. 줍고 싶어도 주울 수 없고,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잊어버릴 거라고 했어요.”

“누가?”

“피가로 님이.”

오즈는 묵묵히 타는 불을 바라보았다. 변함없이 참 실없는 말을 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리 형체도 남지 않을 만큼 처참하게 변한들, 바라기만 하면 얼마든지 감쪽같이,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신비로운 힘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경외의 시선을 받는 마법사였다. 피가로는 아서에게 떠난 것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그리하여 남겨질 자의 고독도.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이 뒤섞인 무수한 잔해를 평생 뒤적이며, 종래에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잔해가 있다는 것만 알게 되리라는 걸.

하지만 아서는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주변을 사랑하고 지나칠 정도로 마음을 쓰는 아이였다. 벌써부터 짐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에 오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어야겠군.’ 오즈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아서에게는, 복구 마법을 가르쳐 주는 게 좋을까.’

아서는 여전히 피가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오즈 님, 피가로 님의 편지는 이 중 어디에 있을까요?”

“…….”

“아서는, 벌써 잊어버린 걸까요……. 그렇다면, 무척 슬플 것 같은데.”

더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무언가를 세상에서 없애기로 했다면-설령 아무리 우습고 헛되더라도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오즈는, 태운 것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즈는 남은 편지 조각을 그러모아 불 속에 던졌다. “앗!” 소리치는 아서를 들어올리고, 등을 쓸며 속삭인다.

“불장난은 여기까지. 아서, 잘 시간이다.”

아서는 그제야 알아챈 것처럼 크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오즈에게 안긴 채 방으로 들어갔다.

8.

아서의 방에는 책상과 의자, 책장과 옷장, 그리고 아이가 혼자 쓰기엔 넓은 침대가 있었다. 슬리퍼를 벗기고 베개 위로 아서를 눕힌 오즈는, 종종 그랬듯이 그 옆에 모로 누웠다. 아서가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아서는 오즈를 향해 몸을 굴리고 웃었다. 방금 전까지 졸음이 드리웠던 게 거짓말처럼 파란 눈이 빛났다. “오즈 님, 오즈 님.” 아서가 노래하듯 말했다.

“자장가 불러주세요. 잠이 안 와요.”

“…….”

“제발요, 한번만요. ‘해가 반짝 뜨는 날이면’으로 시작하는 노래로요.”

오즈의 미간이 복잡하게 구겨졌는데, 물론 익숙치 않은 것도 있겠지만-가사가 분명히 기억나지 않아서였다. “오-즈-니임.” 아서는 이제 오즈의 팔에 얼굴을 비비며 채근하고 있었다.

“알았다.” 오즈는 한숨을 쉬고, 아서의 옆에 좀 더 붙어 누웠다. 이불을 아서의 목 끝까지 덮어준 뒤, 그 위로 손을 올려 느린 박자로 배를 두드렸다. 아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장가를 기다렸다. 개구진 표정에는 결코 한 번에 잠들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오즈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그 장난스러운 코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나 곧장 간지러운 웃음이 우렁차게 터져나오는 바람에 후회했다.

오즈는 북쪽에 어떤 자장가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늘 아서가 알려준 자장가를 불렀다. 그러니 처음 아서가 불러준 노래의 가사가 정확한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서는 가사를 바꿔 부르는 걸 더 좋아했다. ‘오즈 님과 아서가 사이좋게 놀아요…….’ 오즈의 이름이 들어가면 운이 맞지 않아 부르기 곤란해지는데도 어떻게든 집어넣으려 애썼다. 하지만 오즈는 항상 아서가 제일 처음 알려준 가사로 불렀다. 해가 반짝 뜨는 날이면, 토끼와 까마귀가 사이좋게 놀아요, 조각배를 타고서, 4박자로 춤을 추면서…….

아서를 안고 천천히 발돋움하듯 몸을 흔들며 나직이 자장가를 부르면, 아서는 금세 색색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오즈는 마지막 구절을 거의 읊조리듯 불렀다.

“잠든 아이에게 별이 축복을 내려요, 축복을…….”

창 너머에는 2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선명한 오로라가 주름진 베일 모양을 하고 펼쳐져 있었다. 아득한 빛이 아서를 깨우지 않도록, 오즈는 그 위로 커튼을 쳤다. 한동안 장막처럼 드리운 밤을 응시하던 오즈는, 돌이라기엔 너무 부드러운 아이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매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상하리만치 반복되는 나날은 분명 헛된 것인데도, 동시에 무척 분주해서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한순간의 변덕이 오즈에게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 주었다. 매일이 오늘과 같았다. 같으면서 달랐다. 1년을 1시간처럼 흘려보내던 그는 이제 하루를 제대로 하루로 세었다. 정확히는, 그가 주워온 것이 돌이 아니라 아이가 되었을 적부터, 또한 아이가 ‘아서’가 되었을 적부터. 오즈는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다 재어보고 일러주던 자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몸을 맡길 뿐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시간은 많으니, 조바심 낼 필요는 없지만……. 오즈는 아서가 눈을 감기 전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내일은 꽃병을 찾아봐요.’ 혹은 ‘내일은 피가로 님께 보여드릴 그림을 그릴래요.’ 같은 것. 아이는 늘 당연하다는 듯이 내일을 말했다. 그리고 오즈는 그 순진한 믿음을 제법, 지켜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이가 손 닿는 곳에 있는 한 돌로 만드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다. 이왕 삼켜서 제 힘으로 삼을 거라면 마력이 강한 편이 좋다. 그리고 이 아이는, 이 호기심 많고 천진하고 아직 다 보지 못한 세상까지 온 몸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 아이는, 아직, 십 년도 채 다 살지 않았다. 스스로 답지 않은 일을 한다는 자각은 아주 옅었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적어도 그럴듯한 이유들을 덧붙이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고 잠이 올 정도로는, 존재했다. 오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든 아서의 숨소리가 방 안을 평화롭게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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