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DANE by D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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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뺨에 나뭇잎이 내려와 닿는 감각에 눈을 뜬다. 눈꺼풀을 파고드는 햇빛에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실버는 어렴풋한 시야와 바람결에 따라붙는 풀내음으로 제가 있는 곳을 파악한다.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그늘을 조금 비껴나 따뜻해진 잔디밭.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안뜰이다. 잠에 취해 멍한 머리로도 어찌어찌 결론을 내렸다.

또 어느새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몸을 일으키는데 손에 익숙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딱 맞는 굵기로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경봉이 마지막 기억을 쉽게 끌어낸다. 방과 후 안뜰에서 훈련을 했던… 것 같다. 어느 시점에서 잠들었는지까지는 역시 떠오르지 않고. 자는 내내 힘주어 쥐고 있었는지 손끝이 살짝 저려왔다. 실버는 가볍게 손을 쥐락펴락하며 경봉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몇 가지 자기 점검을 마치는 동안 어느 정도 잠이 가셔, 좀 더 구체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한 5시쯤 됐을까. 그래도 해가 다 지기 전에는 깨어났구나. 낙관적으로 위안 삼으려는 것은 아니고 그저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하자면 오히려 스스로를 질책하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더라면 누군가 그를 찾으러 왔을 것이다. 아버지… 릴리아 선배일 때도 있지만 대개 그 역할은 세벡이 맡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만날 때마다 시끄럽게 굴며 실버에게 잘난 듯 훈계를 늘어놓는 아이였다. 머리 모양부터 태도, 언동까지 실버에 관해서라면 마음에 차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양 구는데, 그럼에도 우악스레나마 꼬박꼬박 실버를 끌어내주는 건 역시 고맙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말레우스 님께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한 거겠지. 함께 릴리아 선배에게 훈련을 받고 자랐으니 그 부분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그랬다. 거만한 태도와 깔보는 시각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어 있을 뿐이지, 원체 솔직하고 올곧아서 스스로의 마음에 거짓을 말하지는 못한다. 지켜보고, 경험하고, 받아들인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외치는 ‘나약한 인간’뿐 아니라, 요정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적어도 요정 사이에 자란 인간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도 생각보다 우리와 닮았어. 세벡, 네가 강한 이유는 네 몸에 요정의 피가 흘러서 그런 것만은 아니야. 네가 강한 아이인 거야.

그런 점은 본받고 싶다. 물론, 시도때도 없이 건방지게 굴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태도는 고칠 필요가 있겠지만. 몇 번 주의를 줘 봤지만 유독 실버에게 이를 세우고 아득바득 대항하는 탓에 좀체 진전이 없었다.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서로 북돋기도 하고 때로 맞서기도 하며 성장을 이룰 수 있겠지만, 또 그렇게 사이좋게 굴어보자고 하면 세벡은 번듯한 미간을 잔뜩 좁히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리감은 싫다는 건지. 저도 좋아서 제안하는 게 아닌데. 동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에게도 친남매가 있으니. 아버지, 반항적인 사제는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실버에게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한참 남은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릴리아 선배와 말레우스 님의 시간이 아주아주 길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버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잠드는 시간 탓에 남보다 짧은 하루다. 실버는 자리에 두고 가는 게 없는지 가볍게 훑은 뒤, 걸음을 일정하게 옮겼다. 해가 지기 전에 기숙사로 돌아가 남은 훈련을 마무리하고, 시간이 비면 릴리아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게임에 어울릴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우직하게 하는 것만도 빠듯하지만 그럴수록 후회없이 충실히 보내야만 했다. 그것이 실버가 자신의 시간에,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걷고 기다려주는 자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선이었다.

2.

“잠드는 저주에 걸린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고?”

“아무래도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그건 그렇지.”

“아버지, 저주를 해제하는 방법은 분명 진실한 사랑이 담긴 입맞춤…이었던가요.”

“그래. 낭만적이구먼~”

“그럼 만약 아무도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혹은 공주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깨어난다면……”

“…….”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깨어난 공주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해버리고, 자기가 기억하는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심지어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혼자 깨어나 버린다면 말입니다.”

“후후, 실버. 뭘 걱정하는 게냐. 아무도 널 깨워주지 않을까 걱정인고?”

“그건…….”

“괜찮다. 네게는 널 매번 찾아와 호통치며 깨워줄 아이도 있고, 잠든 네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친구도 있지 않느냐.”

“…….”

“그리고 공주는 말이다, 사실 백 년이 지나 깨어나도 그를 기억해 줄 자가 있단다.”

“그렇습니까?”

“저주를 건 요정 말이지!”

“아…….”

“너도 알잖느냐. 요정은 오래 살아. 설령 공주가 세상에 잊혀지더라도 그만은 절대 잊지 않을 게야. 그는 널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도 있고, 지켜볼 수도 있고…… 너무 오래 자서 제풀에 깨어난 너를 데리러 올 수도 있지.”

“그러니 안심하고 잠들어도 좋다, 실버. 설령 진실한 사랑이 없어도 우리는 네 곁에 남아있을 게야.”

“네가 비로소 눈을 뜰 때까지.”

3.

“일어나라, 실버!”

귀를 때리는 호통에 눈을 뜬다. 눈꺼풀을 힘겨이 들어올려 제가 있는 곳이니 주변 상황이니를 파악할 시간따위는 주어지지도 않고, 실버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일어났다. 어렴풋한 시야로 간신히 상대를 파악하는데, 사실 굳이 눈으로 확인할 것도 없이 저를 이렇게 부르며 이렇게 다루는 자는 이 학교에 한 사람밖에 없다. 실버는 천천히 눈을 꿈뻑여 잠을 떨쳐내려 애썼다. 노력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뭉개진 소리가 입새로 흘러나온다.

“세벡…… 목소리가 커.”

“내 목소리가 크긴 뭐가 크다는 거냐!!!”

“…….”

어물거리지 말고 얼른 일어나기나 해라! 네가 이렇게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자면 말레우스 님뿐 아니라 디아솜니아 전체의 이미지에 영향이 간단 말이다! 말투는 차치하고서라도 지당한 말이므로, 실버는 순순히 그를 따르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굳은 몸을 풀기 위해 허리를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고, 옷에 붙은 잔디나 흙먼지 따위를 가볍게 털어 마무리한다. 됐다, 하고 고개를 돌리자 세벡이 기가 차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답은 의아할 틈도 없이 돌아왔다.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세벡은, 즉시 성큼성큼 다가와 손가락을 척 들어 실버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실버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무게에 깔려 조금 구겨진 교복 자락 같은 것이다.

“설마 그런 꼴로 말레우스 님 앞에 나설 생각은 아니겠지?”

“…그랬다만.”

“한심하긴! 호위로서의 자세가 안 되었단 말이다, 네놈은!”

…말레우스 님은 그리 신경 쓰지 않으실 텐데. 실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세벡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어떻게 읽었는지, 즉각 세벡도 지지 않고 부릅뜬 눈으로 맞받아쳤다. 네가 유독 유난스러운 거다. 아니, 네가 너무 안이한 거다. 함께한 시간에 비해 지독히 맞물리지 않는 성격. 그럼에도 함께하고 마는 것. 이 기묘하고도 당연한 관계는 의외로 드물지 않았다. 실버는 학교에 오고 여러 아이들을 마주하고서야 알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상냥하고 따스하지만은 않으며, 모두가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견디고 살아간다. 다만 조금 더 나은 길을 찾아 나아갈 뿐이다. 슬픈 일이지만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어둠을 향해, 넓어져가는 세상.

눈을 감은 동안 펼쳐진 어둠을 실버는 대개 기억하지 못한다.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눈을 뜨면 비집고 들어오는 낮의 햇살과 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를 깨우는 익숙한 얼굴들. 그, 어렴풋이 밝은 어둠을 마주할 적마다 실버는 제가 혼자가 아님을 느꼈다. 이왕이면 따뜻하고 밝고 평화로운 것이 좋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어둠에 감싸이는 순간을 결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렁찬 소리로 깨우는 소리와 느닷없이 거꾸로 나타나는 아버지, 그리고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그분을. 

뭘 꾸물대는 거냐, 어서 돌아가자! 어느새 저쪽으로 척척 걸어 반듯하게 선 세벡을 바라본 실버는, 마지막으로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고 서둘러 따라붙었다. 세벡의 말을 크게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너무 자고 일어난 티가 나는 건 제가 생각해도 조금 한심해 보일 듯 싶다. 부지런히 따라가야지. 적어도 깨어있는 동안, 그가 좇아야 할 길과 시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개를 들면 세벡은 불쾌한 기색으로도 용케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함부로 칭찬하면 잘난 체하지 말라며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테지만, 역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기억 속 오두막에서는 늘 숲의 냄새가 났다. 느지막이 눈을 뜨고 약간 삐걱이는 창문을 열면 불어드는 향그러운 바람. 이슬과 나무의 진액과 이따금 피어오르는 호숫가의 안개를 끌어안고 찾아와 방안을 휘감는 서늘한 공기. 들러붙는 습기에 조금씩 배어나오는 오두막을 이루는 나뭇결의 향기. 그 모든 것을 몸 속 가득 채울 듯 들이마시면 머릿속이 맑아졌다. 선명해진 의식 아래서 그제야 저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실버. 단언컨대 저를 둘러싼 세상 가운데 가장 차가운 색.

“아버지. 왜 제 이름을 '실버'라고 지으셨습니까?”

“그야 머리색 때문이지. 세수할 적 거울을 보려무나. 딱 어울리지 않는고?”

그러면 실버는 가만히 제 머리칼을 문지르며 생각한다. 태어날 적부터 가진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변덕에 따라 머리 색을 바꾸곤 하는 아버지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어떤 색을 좋아하시나요? 의도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웃음을 터트린다. 작은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대답한다.

“당연히 은색(silver)이 아니겠느냐. 나의 귀여운 아이야.”

그런 걸 말한 게 아니지만 잠자코 있는 것은 아버지의 손길이 가져다 주는 충만함 때문이다. 가슴 속을 맴돌던 숲의 공기가 따스한 온기로 채워져간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끄덕끄덕 중얼거리고 대답하면 다시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해가 풀리지 않아도 괜찮다. 이 애정 어린 믿음만 있다면. 언제까지나.

숲에 사는 아이는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굵은 나무 뿌리를 훌쩍 넘어갈 수 있다.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물냄새를 맡으며 흐름에 몸을 맡기고 헤엄칠 수도 있다. 숲속에 사는 동물들은 누구도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 작은 토끼와 새와 다람쥐부터 커다란 곰과 사슴까지 아이 곁을 무심하게 그러나 관심 어린 동작으로 지나가고 다가온다. 나무 아래 졸다가도 부드러운 털이 손가에 닿으면 실버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공존하고 공생한다. 한때 누군가가 절실히 바랐을 궁극의 평화. 가장 구석지고 외따로 떨어진 공간에서야 이루어진다는 게 통탄스러울 뿐.

그런 의미는 모르는 실버는 단단하고도 따뜻하게 맥박치는 곰의 몸에 기대어 희박하게 드는 햇살 아래 잠든다. 누군가 찾으러 올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숲에 사는 아이는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 모든 곳이 길이고 집이고 잠자리이므로…… 그리고 마침내 한 아이를 온전히 보호하고 품을 수 있는 공간이므로. 생명은 이유 없이 남을 해치지 않는다. 아직 숲을 떠나지 못한 실버는 이유를 갖지 않는다. 대가도 이유도 없는 마음만이 이곳에 충만하다. 애초에 생명이란 모두 이유 없이 태어나지 않았던가.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그러니 주어진 것에 충실하도록 하자. 실버를 이루는 것은 그런 것이다. 꿈과 현실을 부지런히 혼곤하게 오가는 동안 실버는 저를 둘러싼 자연을 아무런 저항 없이 흘려보낸다. 숲 전체에 걸쳐 태동하는 생명력은 나무와 땅을 지나 그 위에 눈 감고 앉은 실버를 거쳐 다시 다른 풀을 향해 맹렬히 달려나간다. 생명은 결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실버 역시 그러하다. 결국 실버를 이루는 것은 실버 그 자체뿐. 그러나 그가 자라고 들이쉰 숲은 언제까지나 실버를 기억할 것이다. 실버가 그렇듯이. 따뜻하게 데워진 학교 안뜰의 잔디에서, 혹은 오래된 사과나무 결에서, 혹은 식물원의 습하게 피어오르는 풀이슬 냄새에서. 숲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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