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생일 연성

공주님을 위한 촌극

1학년 올캐릭터 드림

* 감독생 생일 기념 연성.

* 연애 드림, 우정 드림, 오리지널 재학생 반반무 많이 상태 주의. 

“아이렌, 혹시 받고 싶은 생일 선물 같은 건 없나?”

 

3월의 마지막 날 오후.

도서관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아이렌은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묻는 잭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단도직입적이네.”

“음, 역시 직접 묻는 건 좀 그런가?”

“아니, 나쁘다는 의미로 한 말은 아냐. 넌 직접 묻기보단 알아서 챙겨줄 것 같은 스타일이니까. 의외라는 생각이 든 것뿐이지.”

“……그런가?”

 

아이렌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잭은 멋쩍어하며 목 뒤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온전히 제 의지로 선물 선호도를 알아보러 온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대답을 들어야 했던 잭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아이렌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없어?”

“바로 떠오르는 건 없는데.”

“하긴, 네가 물욕이 있는 사람은 아니긴 하지.”

 

잭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헛웃음 지었다.

그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아이렌은 언제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의 물건만 필요로 했다. 간절하게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도 없고, 먹을 것에도 까다롭지 않았지. 출세하고 싶다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도 없고, 굳이 있는 거라곤 지식욕 정도뿐이었으니. 갖고 싶은 물건이 당장 떠오르지 않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 잭의 질문을 곱씹던 아이렌은 문득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곧 생일이구나.”

“잠깐, 뭘 남의 일처럼 말하는 거야?”

“그렇지만 말이지, 자신의 탄생이라는 건 실감이 잘 안 나잖아?”

“……무슨 소리야, 그건 또.”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잭은 황당해했지만, 아이렌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한 얼굴로 제 생각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왜, 사람은 보통 3살 이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고들 하잖아. 유아 기억상실증이라고 하던가? 여러 이유로 뇌가 기억을 못 한다고 하는데……. 어쨌든, 보통 자신의 탄생과 태어난 이후 며칠간의 기억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저 또한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은 없는 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렌은 흡족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탄생을 직접 보는 게 아니더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뭐든 시작점이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까 나와 교류하고 있는 상대가 몇 년 전, 언제 태어났는지 들으면 축하해 줄 수 있잖아. ‘그렇구나, 넌 그때부터 존재했구나’ 하고. 애초에 타인의 일은 내가 인식하면 그만이니까.”

“……대충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군. 그래서?”

“하지만 자신의 탄생은 본인이 한 경험인데도, 기억속에 없는 거잖아. 타인의 일도 아니고 제게 일어난 일인데 기억하지 못하고, 그게 하필 존재의 생성에 관한 일이라니. 묘하지 않아?”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한번 ‘그런가?’라고 생각하자니 저 자신의 존재가 갑자기 기묘하게 느껴지는 잭이었다. 마치 평소엔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 한 번 의식하면 들숨과 날숨이 모두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괜히 제 팔을 문질러 자신의 실존을 확인한 그는 제 나름대로 아이렌의 복잡한 생각을 단순히 정리해 보았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존재하는 이상, 네가 태어난 건 사실 아닌가?”

“오. 아주 좋은 지적이야. 유물론적 발상이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감정을 가지는 건 힘든 일이잖아?”

 

제 의견과 반대되는 말이라고 기분 상하지 않을까 했는데, 저 반응을 보니 오히려 제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잭은 두 눈을 빛내는 아이렌을 보고 안도했지만, 안타깝게도 정말로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뭐. 이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고. 축하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내가 태어나 존재하는 거에 이렇게나 신경을 써주려고 하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건데.”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뭘 줘도 고맙다는 이야기인가.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대답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아이렌은 가만히 바라보던 잭은 저도 모르게 한숨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16살 같지 않아.”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내가 태어나 살던 세계와 여기의 시간관념이 다르다면, 여기 기준으론 내가 16살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철학이야, 과학이야?”

“과학. 자세한 건 오르토에게 상대성 이론에 대해 알려달라고 해봐.”

 

안타깝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제가 궁금한 건 과학지식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선물일 뿐이니까.

잭은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살짝 쥐고, 마지막 확인 겸 물었다.

 

“어쨌든, 따로 원하는 건 없다는 거지?”

“응. 네가 뭘 줘도 기쁠 거야. 진심이야.”

“알았어.”

 

아, 다들 이 대답을 들으면 얼마나 실망할까.

몰래 켜둔 녹음 어플을 끈 잭은 도망치듯이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빈 교실로 향했다.

 


 

“와, 진짜 쓸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네.”

 

조금의 배려도 없는 저 감상평은, 잭과 아이렌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을 들은 에이스의 첫마디였다.

제 스마트폰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은 동급생들을 본 잭은 불쾌함을 꾹 참는 표정으로 에이스를 노려보았다.

 

“남에게 어려운 일을 시켜놓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맞나?”

“아니, 아니! 잭. 네 탓 하는 거 아냐. 아이렌이 정말 쓸모있는 말은 안 했다는 거지.”

 

저건 변명일까, 아니면 진담일까. 잭은 수상하다는 듯 에이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뱉은 듀스는 곤란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조용해진 스마트폰만 노려볼 뿐이었다.

 

“역시 그냥 우리끼리 생각해보는 게 나았나.”

 

‘곧 아이렌의 생일이니, 누구 한 명이 대표로 가서 가지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자.’ 이 의견을 낸 건 다름 아닌 멜로드였다.

누구도 선물 종류가 겹치지 않게 하면서도 상대 취향에 맞는 선물을 주자는 취지에서 이런 계획을 내놓았던 그였지만, 설마 아이렌이 이렇게까지 소용없는 답만 내놓을 줄 누가 알았겠나.

얼떨결에 같은 반 무리에 끌려 현장에 온 세벡은 제 옆에 붙어있는 멜로드를 흘겨보았다.

 

“하여간, 저 녀석 아이디어는 쓸만한 적이 별로 없군.”

“뭐야.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진 없잖아, 세벡?”

“흥, 사실이지 않나!”

 

아, 이래서야 대책 회의를 하려고 모여놓고 잡담이나 하다가 흩어지는 자리가 될 것 같은데.

잭은 언제나처럼 아웅다웅하는 D반의 두 사람의 보며 한숨 쉬었지만, 오르토는 이런 소란스러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지 개인적인 호기심을 드러냈다.

 

“저기, 잭 하울 씨. 상대성 이론 몰라?”

“자세히는 모르는데 궁금하진 않으니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돼.”

“그래?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닌데!”

 

과연 그럴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아이렌이 그 자리에서 직접 설명해 주지 굳이 만능 휴머노이드인 오르토에게 물어보라고 하진 않았을 텐데.

잭이 매우 타당한 의문을 마음속으로만 삼킬 때. 여전히 녹음된 이야기를 곱씹고 있던 로랑이 예상치 못한 부분을 예리하게 찔러왔다.

 

“그런데 아이렌, 자기 생일인데 하나도 안 기뻐 보이네.”

 

목소리만으로 모든 걸 평가할 수는 없다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렌과 자주 대화를 해 본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기분에 따라 목소리가 어떻게 변하나 조금이나마 알고 있으니, 이런 의견을 단순히 비약이라 여길 순 없었지.

그러나 로랑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에펠은 조심스럽게 반박했다.

 

“그렇다기 보단, 그냥 평소처럼 차분하게 대답한 거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뭐랄까, 아이렌은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삶에 열정적이란 인상을 주진 않으니까? 더 그렇게 보인다고 할까.”

 

로랑의 말은 참으로 거침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확실히 야심가와 욕심쟁이들이 많은 이 학교에서, 최대한 무던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렌은 열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 결정적인 순간에는 제 나름대로 고집을 보이기도 한다지만, 중요한 것은 평소의 태도 아닌가.

 

“흐음. 이왕 생일이니까,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선물을 주고 싶은데.”

 

그때. 친구를 생각하는 사이스가 던진 그 진심이 무언가 영감을 준 걸까.

세벡의 언어 공격에 조용해졌던 멜로드가 씩 웃더니,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밀스럽게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는 모르겠지만, 즐거워서 웃게 할 방법이라면 있을 거 같은데.”

 

대체 얼마나 좋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마치 국가 기밀이라도 말하는 듯한 태도이지 않나.

여전히 그가 허풍을 떤다 생각하는 세벡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핀잔했다.

 

“이번엔 또 무슨 시답잖은 아이디어냐, 터빈.”

“아냐. 이번엔 진짜 좋은 아이디어야. 물질적인 건 아니고, 퍼포먼스 적인 거랄까. 언젠가 아이렌이 흥미로워 했던 거 같으니, 잘 먹힐 거 같은데.”

 

이번에는 정말 자신이 있는 건지, 세벡의 말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그는 어느새 조용해진 동급생을 쓱 둘러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건 혼자 하긴 힘드니까, 함께 챙겨주는 셈 치고 같이 할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더 챙겨주고 싶은 사람은 물질적인 걸 별도로 챙겨주면 그만이니, 일단 들어볼 사람? 아이디어를 들어보는 건 공짜고, 동지가 없으면 나 혼자 하면 그만이니 부담 없이 들어도 돼.”

 

저 자신감 넘치는 태도 덕분일까. 아니면 옥타비넬의 명성에 걸맞은 화술 덕분일까.

어느새 그의 말에 혹한 에이스와 듀스는 가장 먼저 멜로드에게 관심을 보였다.

 

“뭔데? 말해봐.”

“음. 일단 들어나 볼까.”

 

그리고 잭이나 에펠 또한 목소리를 내어 말하지 않을 뿐, 관심 있다는 듯 멜로드를 가만히 바라본다.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걸 확인한 그는 좀 더 가까이 오라는 듯 동급생들의 등짝을 팔로 감싸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우선…….”

 


 

“으으, 피곤해.”

 

4월 8일, 월요일 아침.

어젯밤 늦게 귀가하자마자 바로 잠들었던 아이렌은 뻐근한 팔로 기지개 켜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는 정말 즐겁긴 했지만, 루크 선배는 내 체력을 너무 과신하신 게 아닐까 싶은데.’

 

아침 일찍 학교를 나서 낮 공연을 본 후, 점심 식사 후 공연장 근처 전시회를 구경하고 밤 공연까지 보고 돌아온다. 글로만 써도 피로해지는 일정이지만, 그 모든 걸 좋다고 따라다닌 건 루크가 너무나도 제 취향에 딱 맞는 일정을 준비해 주었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행복했어……. 역시 사람은 예술이 있어야 해.’

 

월요일은 공연이 없으니 어제 다녀온 거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미리 챙기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만약 이 빡빡한 일정을 평일에 챙기게 된다? 그랬다간 다음 날 자신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리라.

몸의 뻐근함과 별개로 마음만은 풍족한 아이렌은 그제야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일찍 잠들어서 그런 건지, 평소 기상 시간보다 30분은 일찍 눈을 뜬 그였다.

‘이대로라면 느긋하게 준비해서 등교하면 되겠다.’ 그리 판단하고 침대를 나온 아이렌이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

 

똑똑.

 

타이밍 좋게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응?”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리도 없고, 만약 찾아온다고 해도 현관에서 문을 두드려야지 제 방문을 두드리는 건 이상하지 않나. 그림이나 고스트라면 얌전히 문을 두드리고 허락을 구하지 않을 텐데.

어색한 상황에 긴장한 아이렌이 입을 다문 사이,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공주님, 일어나셨습니까?”

 

이 목소리는, 분명 에이스의 목소리다. 언제나 듣는 목소리니까 착각할 리가 없다.

하지만 말투와 호칭은……. 심각하게 낯선데.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정말 에이스일까?

어리둥절한 상황에 바로 대꾸하지 못하던 아이렌은 눈만 끔뻑이다가, 한발 늦게 대꾸했다.

 

“……누구세요?”

“접니다, 공주님.”

 

그러니까, ‘접니다’가 누구냐고.

무엇보다 이 학교에 공주님이 어디 있냐는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공주님같이 예쁜 학생들이야 있다지만, 적어도 이 고물 기숙사엔 없는데.

아이렌은 그렇게 대꾸하려다가, 곧 이어지는 물음에 목젖까지 올라왔던 말을 삼켜버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공주님?”

“아, 뭐. 응.”

 

이렇게 된 이상,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 눈으로 봐야겠다.

공포는 실체를 모르는 것에서부터 온다는 걸 아는 아이렌은 그냥 제 눈으로 상대를 확인하기로 하고, 문과 거리를 두고 섰다.

달칵. 조심스럽게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에이스 본인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집사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지.

 

“좋은 아침입니다, 공주님. 일찍 일어나셨군요? 잘 못 주무신 건 아니지요?”

 

한숨도 못 잤어요, 댄버스 부인.

……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최대한 반듯한 자세로 인사하는 에이스를 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고만 아이렌은 눈동자만 굴려 그의 모습을 살폈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시지요.”

“……저기, 에이스.”

“예, 공주님.”

“이건 대체 무슨 콘셉트야?”

 

아무 설명도 없이 이런 상황극이라니. 솔직히 당황스럽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이상으로……. 웃음이 나온다는 것도 문제였지. 에이스의 집사 차림은 꽤 끝내줬지만, 그거랑 별개로 어제까지만 해도 가벼운 말투로 장난스럽게 굴던 녀석이 정색하고 존댓말을 하는 게 어색하고 닭살 돋아서 웃긴 걸 어쩌냐는 말이다.

당장이라도 소리 내서 웃고 싶은 걸 참는 아이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에이스는, 뻔뻔하게 눈웃음 지으며 ‘집사답게’ 답했다.

 

“옷시중은 슈라우드 군이 도와줄 겁니다. 저는 아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떠나는 에이스의 모습에선 조급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진짜 집사인 듯 구는 상대의 모습에 황당함이 두 배가 된 아이렌은 그제야 심각한 얼굴로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거 웃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진지하게 군 건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냅다 웃어버리면 실례일까봐 참은 건데, 사실은 웃었어야 하는 거였나.

아이렌의 고뇌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안타깝게도 상황극은 끝나지 않았다. 에이스가 말한 대로, 오르토가 미지근한 물이 든 대야를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주님! 가만히 계시면, 제가 다 도와드릴 테니 편하게 계세요!”

 

당연하지만, 오르토 또한 평소 교복 차림의 기어는 어디에 둔 건지. 집사 옷을 닮은 몸체로 교체한 상태였다.

마치 아이를 돌보듯 미지근한 물에 수건을 적셔 제 얼굴 닦아주는 오르토를 구경하던 아이렌은 이 상황극에 맞춰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동급생으로서 질문했다.

 

“그 기어는 이데아 선배께서 만들어주신 거야?”

“이 수트라면 왕실 재단사가 만든 거랍니다!”

“……아, 그래.”

 

오타쿠의 동생 아니랄까봐, 어째 에이스보다 더 설정에 충실한 거 같다.

동의한 적 없는 상황극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정색하고 따지고 들지는 않는 아이렌은 마법으로 옷까지 갈아입은 후, 곧바로 오르토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거, 그림이랑 고스트들에겐 미리 말하고 한 거겠지?’

 

옷까지 준비해 입고 상황극을 할 정도라면, 에이스랑 오르토만 기숙사로 들어왔을 리 없다. 그렇다면 분명 그림이나 고스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들어와 모든 걸 준비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식당으로 가자, 듀스와 에펠이 각이 잡힌 인사로 자신을 맞이해 주었다.

 

“공주님! 어서 오세요! 생일을 맞이해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걸로 아침을 준비했답니다!”

“케이크도 미리 준비해 두었으니, 나중에 하교 후 꼭 드세요.”

 

평소 연기라면 어색해할 두 사람마저 싱글벙글 웃으며 이런 말을 내뱉고 있다니. 어쩌면 자신은 지금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이 와중, 두 사람의 집사복 차림도 참으로 잘 어울려서 헛웃음이 나온다. 아이렌은 히죽거리는 장난꾸러기들을 반쯤 뜬 눈으로 보다가 식탁 앞에 앉았다.

 

“고마워. 그럼, 감사히 받을게.”

 

이렇게 된 이상 어디까지 하려나 궁금해서라도 맞춰줄 수밖에 없어지지 않나. 영화연구부 소속으로서 연기를 직접 하진 않아도 보고 들은 게 있는 아이렌은, 어느새 뻔뻔하게 ‘공주님’역에 어울려주고 있었다.

 

‘내가 어제 연극을 두 편이나 봤다고 해서 진짜 연극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게다가 제가 어제 본 작품들은 죄다 누가 죽고 바닥을 기고 인생이 파멸하는 내용이었지, 이렇게 로맨스 판타지 같은 상황은 없었단 말이다.

머릿속으로는 이래저래 딴죽을 걸면서도 준비한 아침밥을 깨작거리는 아이렌은, 한발 늦게 식당으로 들어오는 에이스의 말에 입 안의 팬케이크를 뱉어버릴 뻔했다.

 

“공주님. 등교 준비도 다 마쳐두었답니다. 식사하시고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교실까지는 제가 직접 태워드릴 테니, 서두르시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

 

아니. 설마 가방까지 챙겨주는 건가.

게다가 뭘 어떻게 태워준다는 거야. 설마 빗자루라도 태워주겠다는 건가.

정말이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설정에 충실한 언행에 박수가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연기 중 웃는 것은 NG이지 않던가. 배우로서 상황에 몰입하고 있는 아이렌은 웃음을 참느라 몸이 떨리는 와중에도 결국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저기…….”

 

그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지켜본 건지, 어느새 나타난 잭은 미리 챙겨둔 짐을 아이렌에게 내밀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집사복을 입은 잭을 본 아이렌은 책과 필기구를 받아 챙기며 인사했다.

 

“아, 잭도 있었구나. 좋은 아침.”

“…….”

 

그 인사는 더없이 평범하고 형식적이었지만, 잭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얼른 답하지 못하고 점점 얼굴이 빨개지던 잭은 조금씩 쳐지는 귀를 어찌하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공주님.”

 

마치 책을 읽는 듯 어색한 대사. 부끄러워하는 게 티가 나는 떨리는 음성. 그리고 새빨개진 얼굴까지.

뻔뻔하게 역할을 연기하는 다른 동급생과는 명백하게 다른 그 반응은, 결국 잘 참고 있던 아이렌을 웃게 했다.

 

“푸흡.”

 

아차 싶어 입을 가려보았지만, 한 번 터진 웃음보는 수습이 되질 않는다.

3초 정도는 어떻게든 웃지 않으려 해 보았지만 결국 생체반응에 져버린 아이렌은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시원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아하하! 하하하! 뭐야, 정말! 할 거면 다른 애들처럼 당당하게 해야지. 잭 혼자 몰입을 못 하고 있잖아!”

 

저 혼자만 어색해하는 점을 지적받자, 얼굴에만 몰려있던 붉은 기운이 목과 귀까지 번져간다.

이를 꽉 깨문 채 바닥만 보던 잭은 아침 식사 준비 후 커피를 내리고 있을 멜로드가 있는 부엌을 도끼눈으로 노려보았다.

 

“멜로드 녀석, 역시 가만두지 않겠어.”

“뭐야, 네가 몰입 못 해놓고 그 녀석 탓하지 말라고~ 너도 결국 승낙해서 집사 놀이 한 거잖아.”

“…….”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에이스의 지적에 반박할 수 없는 잭은 결국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전히 폭소를 멈추지 못하는 아이렌은 다시 의자에 앉은 후, 너무 웃어서 떨리는 몸을 어떻게든 진정시켰다.

 

“아, 미치겠네. 정말. 너무 웃어서 이러다가 죽을 거 같아.”

 

그런데 이 와중에도 상황극은 계속하고 싶은 걸까.

잭에게 짓궂은 말을 하느라 평소처럼 행동하던 에이스는 아이렌의 혼잣말을 듣더니, 갑자기 정색하며 손을 잡고 간청했다.

 

“공주님! 생일날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국가의 경사가 국가의 비극이 되어버린다고요! 달력을 새로 만들어야 하니 참아주세요!”

“풉……!”

 

다시 요란하게 떨리는 어깨를 보아, 아무래도 그의 개그는 아이렌의 취향에 딱 맞은 듯하다.

이러다가 실신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웃는 아이렌을 보던 잭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최대한 긍정적인 결론을 내었다.

 

“일단, 즐거워 보이니 성공인가.”

“대성공이지, 저 정도면. 얼굴 새빨개질 정도로 웃고 있잖아, 지금?”

 

듀스의 말이 옳다. 이건 그냥 성공이 아니라, 대성공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웃음의 시작이 자신의 어리숙함이라는 걸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오버블롯할 것 같은 건 어찌하면 좋을까.

착잡함에 표정을 펼 수 없는 잭과 달리, 듀스는 아이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코 밑을 손으로 훔쳤다.

 

“오늘이 아이렌의 생일 중 제일 즐거운 날로 기억되면 좋겠네. 이런 건 너무 큰 욕심이려나?”

 

처음 멜로드가 ‘얼마 전 아이렌이 집사 카페 영상을 보고 가보고 싶어 하더라’라는 말을 했을 땐 이딴 게 먹힐까 고민했고, ‘아가씨는 시시하니 공주님으로 하자’라는 말까지 했을 땐 드디어 미친 게 아닐까 했는데. 이게 먹히다니. 참으로 다행일 따름이다.

아이렌의 진심이 담긴 웃음에 눈을 떼지 못하는 듀스와 달리, 차분하게 내장된 시스템으로 오늘의 주인공을 살핀 오르토는 모두가 흡족해할 사실을 전해주었다.

 

“바이탈 사인 체크로 판단하는 건데, 적어도 제일 웃겼던 날로 기억될 거 같아.”

“그것도 나쁘지 않지. 슬픈 것보단 웃긴 게 나으니까.”

“응, 그건 그래!”

 

일일 집사들이 한창 흐뭇해하고 있을 때. 겨우 웃음을 멈춘 아이렌은 제 바로 옆에 있는 에이스의 손을 꼭 쥐고 숨을 골랐다.

 

“하……. 나는 7살 이후론 공주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지만, 역시 이런 잘생긴 집사님들이 있는 건 좋네.”

“그래? 나, 잘 어울려?”

“그럼요, 트라폴라 집사님. 너무 멋있어서 이대로 채용하고 싶네요.”

“정말? 월급 얼마나 줄 거야? 왕실 집사니까 비싸게 고용해 줄 거지?”

 

분명 월급 이야기는 농담이겠지만, 고용해 달라는 이야기는 진심일지도 모른다.

아이렌과 마주 잡은 손을 의식하느라 자꾸만 시선이 움직이는 에이스를 본 에펠은, 냉큼 그사이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흐트러뜨려 놓았다.

 

“에이스, 찬물 끼얹고 싶진 않은데 말이야. 이 이벤트 조사하다가 안 건데, 왕실 시종은 명예직이라 월급 없다더라.”

“뭐? 진짜?”

 

아무리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할지라도, 역시 무급 노동을 반기는 이는 없다.

농담이라지만 아무 보수도 없이 일하긴 싫은 에이스가 멈칫한 사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듀스와 에펠은 냅다 아이렌의 양쪽 어깨에 한 명씩 붙어 자신을 어필했다.

 

“아이렌 공주님, 저는 공주님 옆에 있을 수 있으면 월급은 없어도 됩니다!”

“저도, 시종보다는 기사직이 탐나지만…… 어느 쪽도 월급은 안 주셔도 되어요!”

“윽. 잠깐. 듀스, 에펠. 너희도 생각보다 뻔뻔하다?!”

 

너무나도 편해진 분위기 속. 이제는 다들 집사옷만 입었을 뿐, 완전히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1학년생으로 돌아와 있다.

어느새 아이렌을 두고 취업 경쟁을 벌이는 세 사람을 보던 오르토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다들 처음엔 어색해했는데, 이젠 완전히 즐기고 있네.”

“……하여간, 저 녀석들은…….”

 

그래도 모두가 즐거우니, 결과적으로 봤을 땐 잘 된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머리에 가득 차올랐던 열기가 많이 식은 잭은 아이처럼 깔깔 웃는 아이렌의 모습에 마음이 풀어져, 삐죽 내밀었던 입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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