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eeting Light

Duskwood 제이크 드림

장르연성 by 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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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10 이후 시점
    * OC 설정 대거 차용
    * 신혼사별 au
    * 퇴고 예정 X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특이한 타이밍이었을 뿐. 그러나 특이한 타이밍은 대개 이상한 대화의 흐름을 낳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끔 특이한 감정 흐름을 야기하면, 그 순간 발을 빼지 않고서야 웬만한 사람은 그대로 까무룩 취하고 만다.

나는 그런 식으로 그 여자에게 중독됐던 것 같다. 나를 모르면서 던지는 그녀의 문장들은, 빗나갈 줄 알았던 것이 오히려 날 모르기 때문에 군더더기 없이 내 안에 직격했다. 맞은 곳의 통증이 온몸으로 돌면 익숙하지 않은 호르몬의 분비가 촉진됐다. 그게 날 군더더기가 많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여자는 날 몰랐다. 나는 매번 얻어맞았고 매번 취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내가 그녀의 문장을 기다리며 한숨을 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녀가 적어도 나에게만은 특별하다고 규정했다. 그 한숨이야말로 나를 현실에 묶어 놓을 마지막 열쇠였다.

꽁꽁 숨었던, 그래서 내가 알 수 없던 그 여자는 술에 절어서야 날 찾아 나타났다. 그리고는 자기도 내 문장에 똑같이 얻어맞았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는 곳에 집을 구했다. 도피 생활을 청산하니 짐이 늘었는데 그걸 처분하거나 정돈할 방법을 몰라 마냥 쌓아 둔 채로 그 여자를 들였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고, 내 취향에 관해 몇 마디 물었다. 그래놓고 그 질의응답의 알맹이는 어디 갖다 버렸는지 순 자기 취향대로만 내 집을 채웠다. 그 여자는 날더러 그게 더 마음에 들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과연 그 말이 맞았다. 모든 물건이 퍼즐 풀리듯 제자리에 들어앉아 있는 걸 보고 나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네가 내 열쇠라고 했던 말은 영원히 유효하다.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여자는 피식 웃고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만가만 속삭였다. 네가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어. 여전히 나는 그 문장의 억양과 음정과 음색을 완벽히 기억한다. 내가 이미 사람인 것을 어떻게 해야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노력하느라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야 했다. 몇 번이고.

출근을 했다. 밀린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못 건네고 키보드와 마우스부터 손에 쥐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회사가 크게 휘청였었다고 했다. 그새 어색해진 내 자리에 앉아, 나는 컴퓨터에 전원을 넣으면서 간단하게 브리핑을 받았다. 내 컴퓨터에는 공격 받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이만하면 니모스도 시끄러웠어야 할 텐데 이상하리만치 프로그램이 조용했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열었다가, 나는 웬 검고 빨간 알람의 해일에 잠깐 대비 없이 휩쓸렸다. 그간은 도무지 어떤 알람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도 나도 타깃이 되지 않았던 탓일까. 생각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위 임원진들 간에 회의가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있었다. 나는 단순히 그 여자가 내게 남긴 이름 탓에 모든 회의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집착했다던 흰 가구며 벽지, 내 앞에 놓인 커피 잔, 회의실 귀퉁이에 놓인 주목 묘목이 모조리 내 시야 안에서 뒤섞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파랑과 빨강을 혼동하며 가만히 의자에 몸을 묻었을 뿐인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내 뇌와 세상 사이에 얄따란 막이 생겼다. 나는 퇴근 후 그 여자가 다니던 병원에 갔다. 일부러 찾아간 것은 아니었고, 단지 너바나의 노래 가사로 모조리 채운 그녀의 공책을 발견한 날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해 둔 것뿐이었다. 나는 그 여자와 같은 약을 다른 약 몇 개와 함께 처방받았다. 병명은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약 봉투를 들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나는 문득 그곳이 더는 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곳이라 함은 원래 그 여자가 혼자 살던 저택이었다. 내가 그녀의 성을 나눠 갖게 되면서 그 저택은 나의 명의로도 통하게 됐는데, 사실은 그러기 한참 전부터 나는 내 집도 그 집도 모두 나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언젠가 그 여자가 내 명칭이 불편하다고 투덜댔던 적이 있다. 내 집이라길래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온다고 하는 줄 알았지, 진짜 네 집으로 쏠랑 갈 줄은 몰랐단 말이야. 나는 아마 그 말에 웃었던 것 같았다. 그날 대화의 뒷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삐쳐 버린 그 여자가 다음날에 나를 맹렬히 노려봤던 것만이 떠올랐다. 아침 일찍 나는 내 집에서 내 집으로 귀가해 그녀의 아침을 챙겼고, 하지 않아도 될 집안일들을 몇 개 하면서 긁어부스럼을 내다가 괜히 달라붙어 한참 숨을 나눴다. 내가 그 여자에게 내 감정의 변화를 서술하면 그녀는 마치 나를 그만큼은 알지 못하던 시절처럼 귓바퀴를 붉혔다. 그것으로 사과가 일단락됐다. 생각해 보면 그 저택을 내 집이라고 부를 땐 많은 것들이 단지 숨을 나누는 것으로 쉽게 해결됐다. 내 열쇠는 그녀가 준 한숨이었다. 아마 그 덕이었을 것이다.

저택에 도착해 그 여자가 알려줬던 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그간은 매주 바꾸던 비밀번호가, 한 번 원래 것으로 돌아가고 나서는 바꿀 필요를 찾지 못해 몇 달째 그대로 두었다. 잼도 우유도 없이 푸석한 맨 빵을 물에 억지로 삼켰다. 그녀는 내가 굶는 꼴은 못 보겠다며 내게 아득바득 끼니 챙기는 습관을 들여 놓았다. 빵에선 종이 펄프 같은 맛이 났다. 그래서 그 여자의 편지 생각이 났다. 공증 받은 문서 뒤에 붙어 있던 것.

나는 네가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어. 늘어지게 낮잠도 자 보고, 안 가 봤던 길로 산책도 나가 보고. 터무니없이 달거나 매운 음식도 도전해 보면 좋겠다, 가끔 그런 것들이 속을 풀어주기도 하니까. 집을 꾸미는 데에도 좀 흥미를 붙일 수 있을지 몰라. 목재의 색이나 결의 모양, 그 위를 덮는 패브릭의 질감, 쿠션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좋고 매트리스는 얼마나 푹신해야 마음에 드는지, 어떤 음악과 향이 나는 곳에서 네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네가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깐깐하게 골라 보는 거야.

그녀의 낱말들은 물론 이 저택에 머무를 나를 두고 엄선되었다. 첫 문장은 내게 육성으로도 몇 번 얘기해 주는 걸 들었는데, 뒤에 딸려 온 것들은 편지의 형태로 내게 왔다. 성당에서 처음 편지를 손에 받아 쥐었을 땐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외울 정도로 읽어서, 글자가 하나하나 눈앞에 떠 다닐 지경이 되었다. 잉크 몇 방울짜리 그 여자는 내 한 몸에 딸린 집이 두 채인 걸 잊어버린 낌새였다. 마침 나는 할 일이 없어서 그녀의 말대로 따라 볼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잠은 병원에서 잘 만큼 잤다. 그러니까 다음 단계는 산책이었다.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을 걸을 자신은 없지만 탈 자신은 더욱 없었으므로 나는 출퇴근을 모두 도보로 해결했다. 찻길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자연히 내 산책 경로는 저택 내부로 한정되었다. 건물이 한두 명 거주할 공간치고는 너무 넓어서 나는 아직도 그 안을 다 알지 못했다.

3층 복도 가장 안쪽 방. 괴담처럼 그 여자가 거기만은 가지 마, 하고 몇 번 신신당부했던 방을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수가 틀리면 그 여자가 직접 와서 나를 말려야 했다. 그러나 당연히 그럴 일은 없으므로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복도가 생각보다 짧았다. 그녀가 있는 동안에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몹시 잘 따랐고, 3층 복도 안쪽이란 그때의 내게 발 들일 이유 없는 곳이었으므로 그곳이 지구 반대편만큼이나 멀게 느껴졌었다. 몇 발짝이면 다다를 곳인데.

나는 그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냥 다시 닫았다. 그 여자가 방 안에 채워 놓은 건 하나같이 썩 무거운 것들뿐이어서, 들어간다 해도 어차피 무엇 하나 내 것으로 삼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내일 출근하면 내 컴퓨터의 침입 기록들을 모조리 새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침습적인 방법이 아니고서야 저런 물건들이 저 안에 있을 리 없다. 그 여자는 내게 직접 취향을 묻고도 자기 취향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저렇게까지 내가 조금이라도 눈길이 이끌렸던 것들,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기기들을 준비할 사람이 아니었다.

문득 나는 이 모든 게 그 여자의 안배처럼 느껴졌다. 편지도, 그 흰 리무진과 검은 밴도, 이 방도 모조리 날 고립시키기 위한 준비물인 듯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 세상이 잠들 때까지 이곳에 묶어 놓을 만한 것들을 이렇게 많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문고리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문고리가 내 새로운 세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마냥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거기서 손을 떼는 데 성공했다. 발을 떼어내는 데엔 조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오래 열지 않았던 방의 쿰쿰한 냄새가 내 들숨에 오래 머물렀다.

해야 할 게 많았다. 단순히 그녀가 나로 하여금 하길 바랐던 일들이었으므로 나는 해야 했다. 그것이 그 여자의 사람답게 사는 방식이라면, 그 전철을 밟는 것으로 나는 사람다워질지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 끝에 그 여자를 다시 볼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느닷없이 무릎이 꺾였다. 예의 그 호르몬 반응이다. 나는 이것에 대처할 방법을 알았다. 우선 다른 생각의 청사진으로 도피할 수 있었고, 그게 불가하다면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당장 그 복도는 나와야 했다. 그러나 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돌아보니 또 그 방이었다. 방 안에 그 여자가 채워 넣은 것들이 너무 무거워서, 일종의 중력장이라도 생긴 듯 나를 잡아당겼다. 저 안으로 돌아가면 나는 꼼짝없이 질식사할 것이다. 언젠가 그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억이 사람을 망치는 때가 있다고.

사람은 기억 없이 살 수 없다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아마 수많은 사람을 현실에 묶어 놓을 마지막 열쇠가 어떤 추억의 형식으로 세상에 흐르는 듯하다. 나에게 그 여자가 주는 한숨이 그렇듯. 사람을 현실에 잡아 둘 만한 건덕지가 없다면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홀가분해진다. 그래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단순한 비일상이든, 이상향이든, 아니면 아예 이 세계가 아닌 언덕 너머이든. 그런데 그 여자에게 나는 그만한 열쇠가 되지 못한 모양이다.

그 여자가 열쇠를 두고 간 날 나는 내 열쇠를 잃어버렸다. 숨이 막혔다. 나는 복도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5,024자 08. 28. 24.

* 신혼사별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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