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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ÆN(2)

카인오웬

OMGMO by 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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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Knight

현자, 마사키 아키라는 사크리피키움을 끌어안은 채로 엘리베이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이들이 도착하지 않은 탓이었다.

“현자님.”

“…….”

“현자님.”

“…….”

“이보세요, 현자님.”

“…헉! 네, 네! 부르셨나요?”

“아까부터 부르고 있었는데요.”

현자의 양어깨를 붙잡은 미스라가 무기력한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가고 싶은 건가요?”

“아, 아뇨. 카인과 오웬이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하는 중이었어요.”

“걱정할 필요 있나요. 오웬 그 사람 안 죽는데.”

“그렇지만 카인은 한번 죽으면 끝이니까요….”

“그런가요.”

감흥 없다는 듯 미스라는 현자가 끌어안고 있는 사크리피키움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사크리피키움도 앙증맞게 단추 달린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싸움을 시작한 사크리피키움과 미스라의 불똥 튀는 거리에 현자가 슬쩍 끼어들었다. 사크짱은 눈을 감지 않으니까 누가 봐도 미스라가 불리한데, 미스라는 늘 ‘저도 잠은 안 자는데요.’ 하면서 승부를 걸어왔다.

둘 다 자신을 지켜주고자 한다는 점이 무척이나 고맙고 기특했지만 현자는 이런 신경전에는 아직 적응을 못 했다. 애초에, 같은 목적을 가졌으면서 왜 다툰단 말인가. 미스라는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처럼 사크리피키움에 대한 경계를 지우지 않았다.

현자의 어깨에 두 팔을 쭉 뻗고 미스라가 늘어졌다.

“미스라, 잠깐. 무거워요.”

“이 정도는 감당하세요. 현자님 주제에 나약하네요.”

“마법으로 몸무게 줄여주세요….”

“그나저나 그 두 사람이 왜 걱정인 건가요. 둘이 같이 나가는 일은 흔하잖아요. 오웬 그 사람, 제가 차 마시자고 할 때는 계속 다른 일 있다고 하더니. …아. 생각하니 열 받네요. 오웬이 돌아오면, 죽이겠습니다.”

“아뇨아뇨아뇨아뇨. 그만둬주세요. 부디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차라면 제가 같이 마실 테니까….”

“그럴까요. 현자님도 입이 있으니까.”

“그런 기준으로 충분한가요?”

“안될 건 없죠.”

현자가 눈을 굴렸다. 미스라에게 굴하지 않는 마이페이스라면….

“라스티카나 루틸에게도 물어볼까요? 라스티카도 티 파티를 좋아하고, 루틸도 향이 좋은 차를 많이 가지고 있던데요.”

“서쪽의 마법사는 정신 사나워서 싫어요. 주전자에서 차가 아니라 천이 나오게 한단 말이에요. 루틸도 같이 마시기 싫어요. 그 사람은 잔소리가 많으니까. 아, 그래도. 좋은 향이 나니 괜찮으려나….”

투덜거리던 미스라가 조용해졌다. 생각에 잠겼다가 말도 생각도 귀찮아져서 늘어진 모양이었다. 미스라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현자의 몫이었지만, 다행히 앉아있는 상태에서 밀착했기 때문에 자세가 좀 구부정해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현자 아키라는 적당한 압박감 속에서 카인과 오웬을 기다렸다.

“…….”

“…….”

기다림을 따라 침묵이 이어졌고, 현자는 불안했으며,

“현자님.”

“네. 미스라.”

“얌전히 있어요.”

미스라는 그런 현자의 몸을 아예 뭉개버렸다.

“미스라! 미스라! 탭, 탭! 탭이에요, 탭! 무거워요!”

“하아…. 그럼 거슬리게 하지 말던가요….”

미스라가 바닥에 손을 대고 살짝 몸을 일으켰다. 현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굴러 빠져나왔다. 21명의 마법사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적당한 임기응변과 사력을 빙자한 진심,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민첩함이었다.

마사키 아키라, 오늘도 살아남았구나. 현자가 뿌듯함을 느낀 채로 바닥에 누워 있자 미스라는 그 위에 앉아 현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요, 미스라?”

“아뇨. 방금까지는 무릎까지 떨고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었던 주제에 지금은 상당히 태평하구나… 싶어서요.”

“윽….”

기분파인 미스라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굴욕적이다. 현자는 떫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지나친 걱정에 빠져서 다른 마법사들을 신경 쓰지 못하면 안 되니까요. 카인도, 오웬도 모두 믿음직한 사람들이고. 현자인 제가 그들을 너무 걱정하는 것도 실례일 거예요.”

“그럼 보러 갈까요.”

“네?”

“당신, 신경 쓰이는 게 있으면 맨땅에서도 넘어지잖아요. 하루 종일 멍하니 있을 바에야 한번 확인하고 오는 편이 낫죠.”

“미스라…!”

“그 대신 저건 쌍둥이에게 돌려보내…”

그러자 철커덩,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현자는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북쪽에서 돌아온 엘리베이터였다.

“하아. 와버렸네요.”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한 사람분의 인영. 오웬은 변덕스러우니 만큼 임무를 마치고 이탈해도 이상하지 않다. 현자는 도착한 한 사람을 카인으로 추측했고 그 추측은 깔끔하게 맞아떨어졌다. 반가움에 현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마주한 카인의 표정이 무언가 이상했다.

“현자님…….”

창백한 안색으로, 그는 눈가를 짚고 서 있었다. 셔츠가 식은땀으로 푹 젖은 채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현자는 다급하게 숙소로 들어가 피가로의 방문을 두드렸다. 난폭하게 노크하는 손등에 무언가가 채였다. [부재 중]이라고 적힌 문패였다.

“그런…. 앗! 오늘 피가로 왕진간다고 했었죠.”

카인보다 낯빛이 하얗게 변한 현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미스라에게 강제로 부축받은 카인이 손사래를 쳤다.

“난 괜찮아, 현자님. 물만 어디서 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부엌으로 가죠! 미스라, 아르시무!”

“아니, 그렇게까진…….”

“네. 《아르시무》.”

탑승객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는 미스라 서비스였다. 순식간에 식당에 도착한 카인은 군말없이 식당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들이밀어진 편의성을 굳이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는 찬장에 있는 병도 하나 꺼낸 뒤 물을 담았다. 수제 아뮬렛이었다.

훨씬 나아진 기운으로 카인이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현자님. 미스라도. 이제야 살 것 같네.”

“후후. 이 정도쯤이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현자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걱정과 불안으로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둘만 보낸 임무에서, 한 사람만 돌아왔으니.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분명 자책할 터였으나 현자에게는 알 의무가 있었다.

“길게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중요한 것만 말하자면. 임무를 하던 중에 오웬이 사라졌어. 내 왼쪽 눈도 앞이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오웬이요…?”

“그래. 그 녀석 강한데도.”

카인이 주먹을 쥐었다.

“우리를 믿고 맡겨준 일인데 면목 없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해. 그리고 미스라, 혹시 도와줄 수 있을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제가 필요하다니 어쩔 수 없네요.”

“고마워. 나 혼자로는 역시 힘들어서. 현자님, 바로 오웬을 찾으러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카인이 풀어진 낯으로 묻자, 현자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까지의 카인은 무척 심각한 표정이었으나까. 그가 안심하면 마음이 놓였다.

“네. 더 데려갈 사람은 없나요? 오즈라던가, 스노우와 화이트라던가.”

“사람을 잘 찾는 마법사면 좋을 것 같은데, 서쪽의 마법사들은 오늘 다른 곳으로 갔었지. 일단은 이렇게 가자.”

“네. 그리고 저도 동행할게요. 오웬은 어디에서 사라진 건가요?”

“어디라고 해야 할까…. 얼음의 거리 북동쪽 방향에 있는 설원이라고 하면 알려나? 북쪽 지리는 완벽하게 숙지한 게 아니라서 말이야.”

“아아. 대충 어딘지 알겠어요. 그건 저한테 맡겨주세요. 《아르시무》.”

언제나처럼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미스라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에는 광활한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한기가 몰아쳤다. 현자는 감당하지 못할 추위였다.

덜덜 떠는 현자를 곁눈질로 보더니, 미스라가 마법을 사용했다.

“아…! 고마워요, 미스라.”

따뜻해진 몸을 느끼며 현자는 시선을 설원에서 카인에게로 옮겼다. 그의 붉은 속눈썹 아래에서, 붉은 눈동자가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에서 오웬을 찾으면 되는 거죠.”

“맞아. 단박에 왔네. 미스라, 대단한걸.”

“그럼요. 오웬도 바로 찾을 수 있어요.”

카인의 감탄에 기고만장해진 미스라가 설원의 눈을 죄다 녹여버리려 들었다. 현자가 기겁하며 막았다. 순식간에 생태계를 바꿔버릴 수도 있는 힘에 두 사람은 식은땀을 흘렸다.

변화는 살아가는 모든 생물이 겪는 현상이라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도리어 생물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마련이다. 오웬 한 명을 찾기 위해 이 자리의 주민들을 죽일 생각도 없었고, 경이로운 자연을 파괴할 마음도 없었다. 카인은 다시 도착한 설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땅거미가 져 있었고 녹아내린 태양빛이 설원을 뒤덮었다. 영롱한 황혼, 경이로운 자연이었다.

예술 따위에 조예가 깊지 않은 카인도 입을 벌렸다. 주관마저 초월하는 강렬한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다. 풍경 자체가 살아 숨을 내쉬고 신비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이는 정령이 빚어낸 예술이었다.

이런 경치를 일상적으로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감성이 무뎌질 것이다. 그를 증명하듯 미스라는 무감하게 서 있었다.

“저기에서…….”

떠오르는 팔, 그는 기다란 검지손가락만 펼쳐 어딘가를 가리켰다.

“오웬의 기척이 느껴져요.”

 

 

미스라가 가리킨 곳은 엔데를 처음 마주쳤던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오웬은 없었다. 미스라는 발로 눈을 파헤쳤다. 축축해진 신발코에 분홍색 눈이 묻었다.

“그 사람 뒷정리도 안 하고 간 건가요? 하아……. 《아르시무》.”

귀찮아하며 미스라가 마법을 쓰자 분홍색 눈이 하얗게 돌아왔다.

“미스라가 오웬 대신 정리를 해주는 날도 있군요.”

“무슨 의미인가요?”

“아뇨. 대견하다는 이야기였어요.”

“하아, 네. 마법사의 피 같은 게 돌아다녀봤자 좋을 건 없어서요.”

찾고 있던 오웬이 없어서인지 미스라가 머리를 긁었다.

그 옆에서 카인은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 손끝으로 눈을 비볐다. 티끌 없는 순백이었다. 돌이켜보면 오웬이 죽은 자리는 늘 깨끗했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인간 같아도 결국 마법사니까요.”

“인간? 오웬에게 한 말 맞아?”

카인이 반사적으로 묻자 미스라가 시선을 내렸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낯이다. 선명한 녹색이 카인을 향했다.

“아니, 뭐랄까. 오웬은 죽어도 마나석이 되지 않잖아요. 피를 잔뜩 흘려도 익숙한 얼굴로 남아 있어서, 죽은 사람이 보고 싶을 때는 그 사람을 찾아가게 돼요. 마법관에는 죽은 사람들이 안 오니까요.”

죽음의 호수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던 미스라다운 말이다. 카인은 미스라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동료들끼리 죽이는 짓은 그만둬….”

옆에 있는 현자도 난감한 얼굴을 했다. 카인은 한숨을 내뱉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최소한의 윤리 의식조차 없는 건가. 그래도 루틸이 하는 말은 귀찮아하면서도 듣던데. 어쩌면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카인은 손바닥 위에서 녹아내린 눈을 땅으로 흘려보냈다. 물처럼 생각도 흘러갔다. 그 녀석도 그럴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그는 사람의 원리를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뻔뻔한 거짓말이야 특기인 걸 알지만, 그의 말을 들었더니 서쪽의 나라의 밀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일부러 낮은 성적을 받는 문제아일까. 그는 정답을 알면서도 오답을 골랐다. 마치 어른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카인은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살폈다. 오웬이 사라진 곳은 바로 여기다. 엔데가 트렁크 안쪽에 들이부었던 마법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오웬이 피를 흘리고 있었고, 그 이유는 엔데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체액을… 카인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가죽장갑 때문에 목소리가 우글거리며 나왔다.

“미스라.”

“뭐죠.”

“마음앓이병이란 거 혹시, 감염되면 감염 증상도 비슷한 강도로 전달되는 거야?”

“그거 오랜만에 듣네요. 모르겠는데요.”

“뭐라도 떠오르는 게 없을까?”

“걸려본 적 없어서요.”

질병을 앓는 당사자만 병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예방이라는 단어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면증 환자인 미스라가 하품을 했다.

“졸리네요. 이만 돌아가죠.”

“잠깐, 아직 오웬을…….”

“카인,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또 나오는 건 어떤가요?”

현자도 카인의 팔을 붙잡았다. 손길에 그가 뒤를 돌아보니, 현자의 얼굴에 푸른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소리소문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밤이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그 미소에는 걱정이 고여 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마음을 소모한다. 아직 아침이 아닌데도 현자는 잠을 설친 사람처럼 피로에 푹 젖어 있었다.

카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럴까.”

“네.”

돌아가면 오웬이 식당에 앉아있을지도 몰라요. 현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음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거짓 없이 기원만을 담은, 다정한 가정(假定). 세상의 말이 모두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그럼 바로 열겠습니다.”

훈훈한 감상에 젖은 두 사람은 뒤로 하고 미스라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우와악! 미스라, 제 방 말고 마법관 로비로 부탁드려요!”

“왜죠. 전 졸린데요.”

“조금 있다가 손 잡아드릴 테니 지금은……!”

《아르시무》.”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한 붉은 곰을 막을 건 없었다. 187cm 장신의 팔이 카인과 현자의 목을 감싸고 강제 이동을 속행했다.

도착지는 침대. 미스라의 난폭한 행동을 침대 시트가 어느 정도 받아준 덕택에 떨어지는 충격은 덜 했다. 하지만 이 침대의 주인이 현자라는 건 여전히 문제였다. 카인은 미스라의 팔에서 벗어나 재빨리 일어났다.

“실례했어….”

“아뇨. 감사해요….”

급속도로 초췌해진 현자의 얼굴에서 익숙함이 보였다.

기사단에도 기상천외한 녀석들은 많았지만 멋대로 공간이동을 하거나 손을 잡아줘야만 잠들 수 있는 녀석은 없었다. 애초에 공통의 규칙 아래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기사들이다. 변덕스러운 마법사들과는 달랐다.

“현자님, 자장가도 불러주세요.”

그러므로 자기 방인 것처럼 현자의 침대에 드러누워 안대까지 야무지게 쓴 미스라의 모습은 카인에게 있어 이해가 가지 않는 영역이었다.

미스라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현자가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요. 이런 상태라면 카인을 방까지 데려다주는 건 무리겠네요.”

“괜찮아. 그건 기사인 내 몫이지. 오늘 하루 수고했어. 푹 쉬어.”

“카인도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그는 방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보였던 현자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편안해 보였다. 자신에게는 도무지 무리인 행동에 카인은 존경을 표한다. 그는 대체로 둔감했으나 잠들어 있는 중에 누군가 방에 들어오면 바로 깰 정도로 예민한 부분도 있었다. 그 탓에 재앙의 상처를 알아보는 실험에도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카인은 이를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수면으로 인해 아서나 현자를 지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카인으로서는 두 번째 공동생활이다. 공동생활이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유형이 많은 마법관 생활은 익숙할 때보다 새로울 때가 더 많았다.

물론 현자의 마법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 지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능력을 모두가 적재적소에서 발휘한다. 그건 무척이나 멋진 일이었으므로.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만큼 염려가 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북쪽의 마법사들이 카인을 고민 속으로 빠트렸다. 그들이 오래도록 품어온 삶의 방식은 그의 풋내나는 말로는 변하지 않았다. 그에 낙담한 적은 없지만, 카인은 조금 분했다. 그들은 카인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했으니까. 얕보기도 하고 귀여워하기도 했다. 성장 과정 동안 그가 동생 취급을 받았던 순간은 적었기 때문에 카인에게도 그것은 아주 싫은 대접은 아니었으나, 기왕이면 동등하게 대해주길 바랐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카인도 며칠 전 리케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카인, 어린아이 취급은 그만두세요.

‘그래도 리케랑 나는 경우가 다르지. 일단 나는 성인이잖아.’

카인은 현자의 방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겉옷만 대강 벗어두고 가죽 소파에 드러누웠다. 머릿속 리케가 그 게으름을 지적해도 카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카인은 쿠션을 배 위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어른인데도 귀여움 받는 건 피가로도 마찬가지지. 과음을 하는 날이면 언제나 미틸에게 혼나곤 했던가. 그 피가로가 이천 살 넘게 먹은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카인은 갑자기 술이 당겼다. 10년 안팎의 나이 차로 취급받았다는 사실을 피가로가 알았다면 술을 샀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내일 저녁까지 왕진이 예약되어 있었다.

술도 먹을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스물두 살 카인 나이트레이는 몸을 일으켰다. 술이 당겼다. 당겼지만, 이런 기분으로 술을 먹었다간 바로 취해버릴 것 같았다. 그건 좋지 않았다. 그는 맨정신으로 오웬을 찾고 싶었다.

결국 자신과의 타협을 거친 카인은 마법관 앞 정원으로 내려갔다.

싱그러운 밤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혀 레인스틱 같은 소리를 냈다. 솨아아. 흔들리는 잎들은 달빛을 받아 은색을 띠었다. 카인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정원의 분수대 앞에는 작은 인영이 둘 앉아있었다.

“…오호. 이 시간에 나오다니, 드문 일이구만.”

“드문 일이야.”

“스노우 님, 화이트 님.”

야밤의 데이트를 방해한 분위기에 카인이 뒤로 한 발 물러나자 쌍둥이가 웃었다.

“호호호. 착한 아이로구나, 그냥 와도 괜찮단다.”

“그래. 이리로 오려무나. 적적한 밤을 그냥 보내게 할 순 없지.”

“고마워. 그럼 사양않고.”

카인은 잔디에서 돌바닥 위로 발을 옮겼다. 부츠 밑창과 바닥이 부딪혀 선명한 소리를 내었다. 마법관은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나 야밤의 발소리는 이상하게도 부도덕한 일처럼 느껴졌다.

쌍둥이는 서로 똑같은 얼굴로 웃으며 카인이 앉을 자리를 만들더니, 카인이 앉자마자 둘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어쩐 일인고?”

“그러고 보니 오웬이 사라졌다지.”

“어떻게 그걸 알아?”

“후후. 궁금한가?”

“호호. 궁금한가?”

“다 아는 수가 있지!”

카인의 양옆에서 스노우와 화이트가 동시에 말했다. 비밀이라는 양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얹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얼굴이 귀여웠다. 가장 어린 모습의 최연장자들을 보며 카인은 마법사의 모습과 수명의 간극을 떠올렸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직 인간 수명조차 넘지 않은 카인은 콧잔등을 긁었다.

“당신들이 말한 대로야. 오웬이 없어졌어. 그래서 내일도 오웬을 찾으러 가려고.”

“내일도.”

“오웬을.”

바톤터치를 하듯 한 어절씩 끊어 말한 쌍둥이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 것이로군.”

“그래, 그래. 짐작 가는 곳은 있는가?”

“아직은 없지만 찾을 예정이야.”

“성실한 아이구나. 오웬도 그대를 좀 닮으면 좋을 텐데.”

“기특한 아이구나. 내일은 필시 찾을 수 있을 게야.”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이들이 카인을 어린아이 취급하며 쓰다듬었다. 카인은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예언이 특기인 쌍둥이의 입에서 나오는 확언은 그것이 빈말이더라도 어쩔 도리 없이 듣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그건 카인도 마찬가지였다.

카인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분수대 의자에 무릎을 얹은 탓에 쌍둥이의 시야는 카인의 눈높이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 카인은 고개를 들어 올려 그 네 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색. 카인의 눈에는,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색이었다.

“스노우 님이랑 화이트 님은 오웬을 잘 알지?”

“호호. 오웬을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오웬이 궁금해졌는가?”

“후후. 그대보다는 길게 알고 지냈지. 마음껏 물어봐도 좋다네.”

“아니, 별 건 아니고… 오웬과 대화하는 방법이 궁금해서 말을 꺼냈어. 다루는 방법보다는 대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야. 예전에 비해서는 수월하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말이 빙빙 도는 느낌이거든.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어렵게 느껴진 적은 이제까지 없었는데 오웬 앞에서는 이상하게 말이 잘 전달되지 않아. 마찬가지로 나도 오웬의 말을 단박에 이해 못 해서 몇 번이고 되묻고. 그래서 결국 서로를 모른 채로 끝나버려. 그런 대화의 반복이야. 어떻게 해야 좋을까.”

“호오.”

큰 눈망울이 카인을 응시했다. 응망하는 시간이 길면 아무 잘못 없는 사람도 제 과거를 되짚어보기 마련이다. 카인은 제 앞머리를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필요 없는 말을 너무 길게 늘어놓았나. 머쓱해진 탓에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달빛이 눈치 없이 밝게 빛났다.

“이런 고민도 하고, 귀엽구만.”

“젊음이구만.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이런 이야기를 무척 즐긴다네.”

그런데. 오웬이란 말이지. 스노우와 화이트가 시선을 교환했다. 카인에게 해줄 대답을 고르는 눈이었다.

말없이 눈맞춤만으로 생각을 전하는 광경을 카인은 인상 깊게 바라보았다. 설령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뜻을 전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건 상대의 시간을, 삶을, 가치에 대한 이해를 요구했으므로.

쌍둥이의 말이 메트로놈처럼 똑딱거렸다.

“그대는 어째서 언어를 배웠는가?”

“오즈는 우리가 가르쳐주었기에 배웠다네.”

“배우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들었지. 후후후.”

“가르친 건 우리인데, 다른 아이의 말투를 따라하고 말이야.”

“오즈는 귀여운 아이였단다.”

“귀여운 아이였지.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대의 사연이지만.”

“그래. 그대는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

“말은 그저 방법에 불과할 뿐.”

“전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그대의 마음을 들여볼 필요가 있다.”

“그대는 말을 배우는 이유를 아는가?”

“소통할 대상이, 말을 하고 들어줄 상대가 있어야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는 게야.”

“어쩌면 중요한 것은 듣는 방식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중요한 것은 말하는 방식일지도 모르지.”

“막연한 호소는 도리어 맹독이라네.”

“그대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사실이야. 대화를 넘어서는 것.

어떤가. 노인네들의 조언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는가?”

“호호. 사실은 우리도 대화하는 법을 몰라 큰 실수를 일으켰다는 게야.”

“화이트. 그 말은…….”

“호호호. 그래도 우리에게 도움을 청해주어 고맙구나.”

“이만 자러 가려무나. 내일도 오웬을 찾아다닌다면 휴식이 필요할 테지.”

카인의 질문이 쌍둥이에게 어떤 기폭제가 되었는지 공기가 가라앉았다. 스노우가 연신 화이트를 바라보았다. 화이트는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고 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카인은 생각했고, 쌍둥이의 등쌀에 못 이겨 방으로 돌아갔다.

고요한 밤, 침실에서 달빛만이 선명했다.

단 하루 만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하고 다시 헤어지게 만든 재앙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달이 내리쬐는 길을 따라 먼지가 부유했다. 느리게 떠다니는 먼지는 꼭 달에 홀린 것처럼 보였다.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달을 따라갔을까. 강렬한 아름다움은 생명을 앗아간다. 설원도, 달도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눈을 빼앗고 숨을 멈추게 만든다. 예상치 못한 미소처럼.

카인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살아있는 상태가 어색했다. 입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지, 코로 내쉬어야 하는지, 폐에 공기가 들어가고 있는지, 목구멍을 통해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모든 행위가 의식에 들어왔다.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가 거추장스러웠다. 당연하다 여겼던 모든 일은 당연하지 않았다. 결국 집중이 필요한 건 신체가 아닌 마음에 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에서 어떤 장면이 어룽거린다. 볕뉘 아래에서의 미소. 친구 같던 얼굴. 햇빛과 함께 따뜻한 색을 품던 머리카락. 살아있는 듯한 고동이 귓가에 닿았던 순간이었다.

오웬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등장인물 같았다. 대화를 할 수록 깊어지는 골은 이해할 수 없는 간극에서 비롯되었다. 그에 대해 카인은 나름의 해답을 내렸다. 오웬을 알게 된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결과는 만신창이. 처참한 실패였다.

카인은 얇아진 지갑을 들고 한숨을 내뱉었다.

무수히 많은 인기척 사이에서 오웬만 보이는 광경은 매번 생경하게 다가온다. 당장 자신과 부딪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에도 유유히 돌아다니는 뒷모습은 그를 세상과 동떨어진 이로 보이게 했다. 다채로운 색채의 거리에서 오웬은 순백으로 서 있었다.

“오웬.”

“뭐야.”

“혼자 뭐 해?”

“별로.”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말을 걸면 오웬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무심하게 반응했다. 자신이 발견되는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거나 익숙치 않은 듯했다. 카인은 카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의아하기는 했다. 이렇게 북적거리는 길거리에서 오웬을 마주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따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카인은 오웬의 옆을 놓치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카인이 질문을 던졌다.

“뭔가 찾는 게 있어?”

“귀부인의 키스.”

“귀부인의 키스? …아아. 그 유명한 디저트 말인가. 너, 음식 이름 제대로 기억할 줄 아는구나.”

“뭐야, 그 짜증 나는 반응은. 마음에 들었던 것 정도는 기억해. 음식 이름을 모르니까 묘사로 말한 것뿐.”

“그런가. 그래도 네 음식 설명은 듣기 거북하단 말이지.”

“어쩔 수 없잖아. 그 방식이 제일 익숙하니까.”

“익숙…. 그럼, 동물은 어때? 생크림 케이크를 동물에 빗대보면?”

“동물로?”

역시 반응한다. 아닌 척 하지만 오웬은 동물을 좋아했다.

공격성 없는 얼굴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복실복실한 양털을 씻어서 말린 느낌이려나. 토끼 뱃살 같기도 하고.”

“토끼 뱃살이라니?”

“잡초가 지천에 널린 풀밭에서 자란 새끼 토끼들은 뱃살이 말랑말랑해.”

“말랑말랑.”

그건 한 번쯤 만져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카인은 턱을 매만지며 이유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듬었다. 이런 오웬과 대화하는 건 즐겁다. 불필요한 논쟁이나 시간 낭비 대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귀중했다. 달콤한 걸 먹고 있는 오웬은 평소보다 얌전하나 그만큼 말수도 적었기에 이런 순간을 잡지 못하면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골리는 걸 좋아하는 오웬도 오웬이지만 조용한 오웬도 오웬답다고 여기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종잡기 어려운 기분파여도 행동만큼은 솔직한 게 보였다. 카인은 그 단정한 얼굴을 살폈다. 투명한 피부와 서늘한 눈동자, 그늘에서 돌아다니는 시선. 그는 가게를 구경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걸 감추는 어린아이같이 오웬은 작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걸었다.

거리는 카인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그가 마법관에서 머무르는 동안 리모델링을 거친 가게가 몇 군데 보여도, 대부분은 아는 풍경이었다. 더 알고 싶은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카인은 거리를 보는 대신 오웬을 보았다.

오웬의 걸음이 일순 멈추는 순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있는 건 골동품점이었다. 고풍스러운 덩굴무늬가 음각으로 새겨진 나무 기둥이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가게는 내부가 보이도록 큰 창문을 달아두었고 안쪽에는 다양한 물품들이 들어서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창문 바로 안쪽에 놓인 오르골이었다. 두꺼운 유리로 만들어진 건지 오르골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오르골의 장식만큼은 너머에서도 생생하게 보였다.

유리 안쪽에서 찬란한 갑옷을 입은 기사가 돌아갔다. 기사는 손에 은색 검을 들고 백마를 타고 있었다. 누군가의 꿈을 담은 것처럼. 장식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만듦새였다.

오래된 오르골에서 주인의 정성이 느껴졌다. 오르골의 노래와 함께 움직이는 기사는 변색된 부분은커녕 먼지 한 톨 없었다. 갑옷은 유리를 투과한 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이런 기사가 선봉에 선다면 분명 눈에 띌 것이다. 카인은 투구 아래의 얼굴을 향해, 보이지 않는 부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기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키는 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기사라 할 수 있다. 이 오르골을 만든 장인은 기사에 대한 로망이 컸던 모양이다. 기사는 빛나기만 하는 자리가 아닌데도 이토록 찬란한 걸 보면. 카인의 눈동자가 애틋한 빛을 품었다. 그도 그러한 로망을 가지고 기사가 되었다. 기사님, 그리 불러줄 이를 찾기 위해서. 카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웬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눈으로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수마에 잠길 것처럼 속눈썹을 내리깔고, 어딘지 모르게 애절한 눈동자로. 그건 차마 이름 붙이지 못할 감정이었다.

인파가 느리게 움직였고 하늘을 향해 지저귀는 새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저편으로 사라졌다. 색색의 벽돌이 길게 늘어진 길에 가로등이 촘촘히 세워져 있었다. 교집합을 이루는 빛들이 환했다.

공간에 젖어 들어가는 감각. 호흡조차 조심스러웠다. 손끝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깨질 듯한 장면에 그는 숨을 삼켰다. 누군가 시간을 길게 붙잡았던 걸까. 오웬은 눈 감는 동작조차 아끼고 카인은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살랑거리는 머리칼만이 분초의 흐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마저도 찰나다. 고작 1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오웬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걸음을 돌렸다.

그 뒷모습이 유독 눈에 걸려서, 카인이 오웬을 급히 불러세웠다.

“저기 말이야, 오웬.”

“왜.”

“여기 들어가보지 않을래?”

손으로 가리킨 곳은 가게의 문이었다. 그는 웃어 보였다.

“가게에 장식된 오르골, 어떤 노래가 나올지도 궁금해서.”

“내가 기사님 때문에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시간 낭비까지냐. 그래도 재밌어 보이지 않아?”

“…뭐, 조금은.”

눈을 가늘게 뜬 오웬이 앞머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장 카인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데려가기 한번 번거로운 녀석이었다. 카인은 오웬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문을 열었다. 짤랑, 하는 종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모두에게 배급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히스클리프는 말했다. 정교한 작업에 더해 그만한 재료를 구하는 데에도 큰 인력이 필요하다고.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과 시간을 거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계는 호화품이 될 수밖에 없다. 해체된 부속물을 제자리에 끼우며 히스클리프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종탑이 필요해. 종 하나는 마을에 사는 모두에게 시간을 알려줄 수 있으니까. 카인은 그 쓴웃음의 의미를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시간은 일종의 규칙이었으며 시계는 그에 따른 교과서였다. 해가 뜨고 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루를 분절한다. 시간을 크게 24등분으로 나누고, 그것을 또다시 60등분으로 나눈다. 하나의 규칙을 모두가 엄수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같은 시각을 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는 시계를 읽는 방법 또한 습득할 필요가 있다. 견고한 구조에는 배제되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었다. 히스클리프는 바로 그 사실을 염려하고 있었다.

카인이 내부로 완전히 들어서자 풍광이 변했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골동품점 내부는 온통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가 열고 들어온 문은 사라진 채였고 사방에서는 공허한 냄새가 났다. 따스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던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손에 붙잡히는 것도,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완전히 암흑이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에 카인은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적이 최근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도 그 녀석의 수작인가. 질 나쁜 장난을 즐기는 그가 카인을 놀리는 거라면 이런 상황도 썩 놀랍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러나 무언가가 걸렸다. 급하게 삼킨 사탕이 목에 걸린 것처럼, 목구멍에서 녹지 않은 것이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무얼 잊은 거야. 무얼 찾는 거야. 갈피를 잃은 향방. 길은 없었다. 목적지는 사라졌다. 카인은 계속해서 걸었다. 바닥조차 느껴지지 않아 과연 제대로 걷고 있는지 불분명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유도 모른 채 절실했다. 닿고 싶었다. 이 어둠을 가르고 손을 잡고 싶었다. 두고 와버린 이가 있었다.

누구였지?

알 수 없는 그 이름. 분명 수십 번도 넘게 불렀는데.

목이 막혔다. 어쩌면 어둠이 목소리를 삼켰는지도 모른다. 뻗은 손마저 집어삼키는 그림자가 앞에 있었다. 사방에서 그를 감싸고 있었다. 방향은 무의미하다. 나아간다 한들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인은 붙잡고 싶은 이가 있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가 듣고, 그에 화답하길 바라는 행위다. 돌이켜보면 그는 카인이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코 상냥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알았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다면,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다면, 어디로도 갈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카인은 남아있는 기억을 되짚는다. 그가 떠오른다. 불쾌한 미소와 속삭이는 목소리. 벌린 입 안쪽에는 현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피처럼 붉은 눈은 음흉하게 휘어져 있었다. 그린 듯한 악인이었다.

이어서, 그 눈동자에 물기가 돈다. 비교적 순해진 눈초리가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매달리는 경우가 많아서인가, 키는 분명 비슷할 터임에도 비교적 자신보다 작게 느껴졌다.

그는 겁이 많았고 자주 놀랐다. 언제나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여유 부리던 이와 다르게 어깨를 자주 움츠렸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카인은 그를 기억했다. 떠올린다. 꽃잎을 묻어주던 손. 티 없는 순진무구함. 친구 같던 얼굴로 그가 말했다.

어두운 곳은 싫다고 했다.

혼자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기억한다. 분명히 대답했다. 그토록 간절했던 바람에, 자신은.

“…나는, 혼자 두지 않겠다고 했어…….”

 

두근,

 

그 말에 화답하듯, 먼 곳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심장이 없는데, 이 고동은 오웬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카인은 속도를 높여 달렸다. 저 멀리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트렁크였다.

덕지덕지 붙은 테이프와 반질반질한 가죽 손잡이는 아주 친숙한 형상이었다. 질리도록 봤다. 오웬의 트렁크였다. 공중에 떠 있는 트렁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트렁크 내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이 있는 곳을 알려줄게, 기사님.”

 

가벼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그 목소리는 종용하듯 귀에 박힌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오웬의 마도구에 손을 대다니, 평소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가볍게 걸쇠를 풀었다. 맥동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겹쳐지는 심장의 고동. 어쩌면 두 사람의 것이었을까.

두꺼운 가죽 표면에서는 오웬의 마력이 느껴졌다. 트렁크가 열렸다. 보이지 않던 붉은 눈의 시야가 점멸했다.

시각을 침범하고 차원을 뚫는 광경. 그 속에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유해와 함께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허억.”

 

카인은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손에는 오웬의 트렁크가 들려 있었다. 기묘하고도 익숙한 마력이 맴돌았다. 공간 간섭이었을까. 어떤 원리로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 자체를 매개로 써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오웬과 카인은 눈동자가 이어져 있는 관계였다. 오웬의 눈이 오웬의 기척을 찾아낼 때가 종종 있었다. 자신을 남기지 않는 그의 성정을 보면 의아한 지점이었으나 카인은 평이하게 납득했다. 오웬을 둘러싼 것들은 하나같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헤매는 자신을 안내해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기꺼운 일이다.

나비의 꿈과 같이 시야를 넘나드는 순간이 있다. 누구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기실 마음이란 소유자 본인조차 파헤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감정은 혼란스럽게 대류한다. 해석은 맡겨진 몫이었다.

어디부터가 꿈이었지?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몽롱한 감각의 틈을 타고 흐려진다. 거리. 기사. 목소리. 사방으로 흩어진 꿈의 파편. 모두 주워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인은 손에 든 트렁크를 붙잡았다. 유일한 실체였다.

트렁크에는 붙어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 긁어낸 흔적이 보였다. 흠집으로 수두룩했다. 카인은 그것과 자신의 방문을 겹쳐보았다. 붕대로 감싸인 배를 붙잡고 일어나자마자 봤던 상처들. 그 상처를, 카인은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방에 홀로 두었던 이는 한 명밖에 없었다.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 사실은 폐를 얼어붙게 한다. 당장 문 손잡이를 붙잡아 돌리면 열릴 방에서, 그가 갇히도록 만들어버렸다. 기다리게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기다림에, 과연 몇 개의 손가락을 접어야만 도달할 수 있을까?

차마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웅크려 있었을 그. 카인은 급하게 겉옷을 걸쳤다.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뛰쳐나오다시피 나온 카인은 현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 번에 두 명의 마법사가 사라지면 그는 굉장히 혼란스러워할 것이었으므로.

“흐아암, 네에. 아키라입니다……. …카인?”

하품을 하며 나오던 현자는 카인을 보자마자 눈을 둥글게 떴다.

“미안. 자는 중에 실례하게 됐네.”

“카인이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아, 일단 들어오시겠어요? 미스라는 잠꼬대로 마법을 써버려서 어디론가로 가버렸어요.”

“그거 가능한 일이었구나….”

카인은 손을 내저었다.

“잠깐 전달할 내용이 있어서 온 거야. 나까지 안 보이게 되면 아침에 일어난 현자님이 놀랄 테니까.”

“카인도 사라지나요? 안 돼요! 가지 마세요!”

“아하하. 걱정하지 마. 현자님이 걱정할 일은 하지 않으니까.”

카인은 씨익 웃으며 오웬의 트렁크를 들어 올려 보였다.

“오웬이 자신을 찾아오라고 트렁크를 줬어. 이번에는 멋지게 다녀올게. 현자님은 여기에 있어. 다른 마법사들도 봐줘야 하잖아. 현자님까지 찾을 수 없어지면 우리들은 무척이나 당황할 거야. 그러니 여기 있어줘.”

믿음직한 미소에 미소에 현자는 화답하지 않았다. 카인은 당황했다. 마법관으로 돌아올 때처럼 마주 웃어주리라 생각했는데.

현자는 카인의 두 손을 잡고 끌어모았다.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이에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떨어진 고개 아래로 수많은 기쁨이 눈물의 형태로 빚어져 나왔다. 카인은 안절부절못하며 현자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현자님….”

“카인, 저는 이 세계에 와서 깨달은 게 있어요. 여러분과 친구가 되고,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은… 아주 귀중한 저만의 것이에요.”

현자는 고개를 들어 올려 카인을 마주했다.

“‘현자의 마법사’는 여러분이 지금 현자인 저의 마법사라는 의미이자 동시에 제가 여러분의 현자라는 의미예요. 저는 여러분을 알게 됐어요. 그렇기에 지금 제 마음이, 여러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저는 이 마음을 어길 수 없어요. 이건 약속과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금방이라도 습격해올 것 같은 재앙을 등지고 아키라가, 마법사들의 현자가 말했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요, 카인. 다치지 말아요.”

인간은 약속을 어겨도 마력을 잃지 않는데 현자는 약속을 하는 마법사처럼 서 있다. 팔에 새겨진 문양이 욱신거렸다. 현자의 마법사로 선택받은 날의 감각이 떠올랐다. 아키라는 지금 나를 선택했어. 카인은 이 순간, 자신의 자리를 실감한다.

나는 기사단장직을 박탈당했어.

하지만 현자의 마법사로서 지금 여기에 있어.

주어진 책임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그러기 위하여 나는 이곳에 왔어.”

찬란한 갑옷도, 은색의 검도, 백마도 없는 한 명의 기사.

카인 나이트레이는 창문을 뚫고 들어온 달빛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우스로 드래그 하여 관람해주시길 바랍니다.)

-

Unknown

열매를 버렸어!

버린 게 아니야. 지키고 있는 거야.

나는 어디에 있어?

언젠가 돌아올 거야.

죽음은 죄야?

어쩌면.

생명은 죄야?

모두가 그렇지.

두고 갈 거야?

여기에 있을게…….

버리지 마.

…….

가지 마.

…….

나를 두고 떠나지 마!

 

 

지옥이 보였어. 어둡고 축축한 곳. 죄를 가진 자가 도착하는 장소. 죽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사후세계.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고, 살아 있는 자의 고동이 들렸어. 붉은 과실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였어. 그걸 삼두견이 지키고 있었어. 그 세 머리의 짐승은 잠든 주인의 뺨을 핥아주었는데, 주인의 눈가 아래로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지. 그가 왜 울었는지는 잘 몰라. 마음 같은 것도 몰라. 알고 있는 건 단 하나. 나는 죽지 않았다는 것.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틈새. 나는 어디에도 없었어. 혼자였어.

왜 죽지 않은 걸까. 애초에 죽음이란 게 뭘까. 의식이 없다면 그건 죽은 걸까. 심장이 없다면?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하면, 그건 죽은 거야? 그렇다면 육체와 정신의 죽음은 구분될까. 둘을 나누어 애도해야 할까. 나눌 수 있다면, 하나만 망가질 수도 있겠지. 영혼이 부서진다면 어떻게 되려나. 고칠 수도 없게 되려나. 있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살아야만 죽을 수 있다면, 생명은 뭘까. 호흡을 하고 있다면 그건 살아있는 거야? 그러면 생장은? 생식은? 너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어?

그래. 무엇도 명확하지 않았어. 끊임없이 물어봤지만 답은 되돌아오지 않았어. 그러다가 알았어. 생과 사는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여러 조건을 충족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걸. 죽음은 생명에 종속되어 있고, 생명이 선행하지 않는 이상 어느 것도 죽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런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법칙과 분류의 동행자는 예외와 한계. 생물조차 수억만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어. 척도는 무용하고 모든 것은 편린에 불과하지. 결국 핵심은 믿음체계에 있는 거야. 무엇을 이 세계로 여기는지,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지. 그건 자신의 몫이니까.

난 세계를 거부했어.

규정만큼 고루한 일은 없어. 나한테 중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자유야. 그러니 생사를 구분할 필요도, 특정적인 무언가가 될 필요도 없었어. 내 존재에 다른 이름은 붙을 필요 없어. 나는 그저 나로 있으면 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넌 언제나 그랬지. 이 딱딱한 세계에 속하고 싶어서 안달하다 못해 나까지 끌고 가려 해. 하지만 말이야. 세계는 네가 말하는 것처럼 아름답지 않아. 모르겠어? 아아, 가여워라. 너는 이 세계에게 속아버린 거야.

탄생의 수만큼 별이 있다는 걸 믿어? 태초부터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는 이야기, 모두에게 제각각의 별이 존재하므로 별을 읽음으로써 하나의 기로를 알 수 있다는 말을. 그건 말이야, 결국 무엇도 선택과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는 소리야.

우리를 두고 은하의 궤적이 움직여. 너의 별도 결국 너를 두고 떠날 거야. 그러니 타인의 마음이나 말, 의도 같은 건 애초부터 신경 쓸 영역이 아닌 거야. 중요한 건 현상이니까. …운명은 불쾌해. 별은 부수는 편이 좋겠네.

그럼에도 세계에는 마음에 매달리는 것으로 가득하지. 무수한 찬양과 경탄을 쏟아내고, 호의에 환호하면서. 전부 무가치한 일이야. 이 세계는 새까만 칠흑으로 물들어 있고 순백은 환상에 불과해. 늑대는 양의 털을 뒤집어쓰고 있어. 아름다운 척 포장하지만 사실은 역겹고 천박한 것이 이 세상의 본질이야. 어리석고 약하며 선한 것들은 보답받지 못해. 모두가 자신의 믿음에 배반당하는 거야.

 

그러니 비웃어줄게. 아직도 지킬 게 남아있다고 믿는 너를 위해.

그래. 그대로 손을 뻗어.

따뜻한 무언가가 만져지지?

 

 

이게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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