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조/카인오웬]

2024 단문모음

like a miracle by s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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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트위터 등에만 업로드했던 글을 정리해 모았습니다. 약간의 수정이 있는 경우도 없는 경우도…

* 2024년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글리프에 올리는 글은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 같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2024. 7. 16 너는 별

트친분의 아름다운 인연조 그림을 보고 작성했던 단문.

현대 학생 au. (망상)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바람이 서늘한 밤이다.

“오웬, 너도 들어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귀를 스친다. 오히려 웃음 그 자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오웬은 날 선 시선으로 그 제안을 말없이 거절한다. 그런, 뭐가 섞여 있을지 알 수도 없는, 더러울 것이 분명한 물에 내가 들어갈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천하의 바보 멍청이야.

어두운 밤하늘에 달이 유독 커다랗게 떠 있다. 그 곁에 수많은 별들이 깨진 설탕 과자 조각마냥 하늘에 흩어져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아니, 이미 쏟아져 내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바다는 이렇게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걸까?

카인 나이트레이는 이상하다. 분명히 거절했는데, 그런 것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혼자서라도 바보같이 목소리를 높이고 크게 웃는다. 주저 없이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 웃음소리에 정신이 흐트러지는 기분이 든다. 언제나.

그러니까, 이상하다. 분명히 낮에 지나다니며 보았을 때엔 불쾌할 정도로 더러운 물이었다. 손가락 하나 대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도.

“오웬!”

네 목소리와 함께 보는 바닷가는, 네가 풍덩 뛰어들어 그 곁을 휘감는 듯이 거품을 일으키는 물보라는, 달콤해 보일만치 반짝이며 빛나서. 네 웃음소리가 톡톡 튀는 것만큼 물 표면에도 별빛이 반사되어 튀어 오르는 것만 같아서.

아마도 너는 별.

이렇게 곁에 있어도 눈에 보여도 반짝여도. 닿을 즈음에는 이미 몇천 년이 지난, 같은 시간선에 존재하지 않는 빛.

머뭇거리는 순간 팔을 잡힌다. 씨익 웃는 미소에 덫에 걸린 것처럼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어느 쪽일까? 네가 나를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걸지, 너를 본 나는 저항하기를 그만두게 되는 건지. 어느 쪽이든 그런 제어할 수 없는 요소 따위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 따위를 허용할 수 있을 리 없는데.

“오웬, 정말 안 들어올 거야?”

“발 젖잖아.”

“신발 벗으면 되잖아!”

“바지도 젖어.”

“걷으면 되지!”

아하하, 카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제가 제시한 문제 따위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러더니 정말 아무렇지 않은 동작으로, 미처 피할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여 이쪽의 바지를 걷어 올리려 한다. 그 동작에 기겁하고 한두 발짝 물러선다. 내가 직접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한 순간 이미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갔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깨닫는다. 이미 발을 뺄 수 없게 된 시점에서야.

“앗, 봐, 파도 온다!”

“파도 처음 봐? 기사님, 진짜 멍청한 개 같아.”

“어, 오웬, 바지, 바지!”

“…! 하아, 정말.”

낮게 걷어 올린 탓에 결국 밑단이 젖어버린 긴 바지를 다시금 접어 올리고, 당연한 듯이 건네진 네 손을 어정쩡하게 잡고는 두어 걸음 더 바다 쪽으로 들어간다. 이미 바지 밑단은 물론 상의까지 군데군데 젖은 네가 빙그레 웃는다. 어때? 물, 시원하지, 발바닥이 간질간질해. 그렇게 말하는, 어쩐지 조금 눈썹을 찌푸리고 물가를 보고 웃는 네 목소리가 더 간지러워서.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 손을 부러 쳐내듯이 밀어낸다. 찰싹, 축축하고 젖은 소리가 난다. 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고개를 잠시 갸우뚱, 기울였다. 이쪽을 살피는 기색. 하지만 그 시간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에잇!

“아, 진짜! 기사님, 미쳤어?!”

“하하, 오웬도 반격해 봐!”

첨벙, 카인이 발을 일부러 크게 더뎌 물보라를 튀긴다. 푸른 어둠 속에서 빛을 반사하는 작은 파편 같은 투명한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며 반짝인다. 눈부실 정도로. 그 반짝임이 와닿는다. 물방울이 닿아서 퍼지듯이. 옷을 몸을 전부 적시듯이. 그 빛이 스며들듯이.

너는 별. 손을 뻗어도 닿지 않으리라 생각한 빛.

그럼에도 그 반짝임을 봤으니까. 그 반짝임과 만났으니까.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 오는 그 빛을, 어쩌면 조금은 믿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2024. 9. 3 학교가는 길

이것도 트친분의 아름다운 인연조 그림을 보고 작성했던 단문.

포학 기반 학생 au. (망상2)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카인 나이트레이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카인 나이트레이는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큰 목소리로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고 콰당, 큰 소리가 나며 닫힌 현관문을 뒤로한다. 언제나와 같은 익숙한 골목길을 경쾌하게 걷는다. 담벼락 위로 작은 화분이 주르륵 놓여 있는 초록 지붕 집과 산들바람에 돌아가곤 하는 바람개비와 작은 세발자전거가 현관 앞에 놓여있는 2층 주택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돌면 이런저런 전단지가 붙여졌다 떼어지고는 하는 붉은 담벼락과 전신주가 눈에 들어온다. 그 담벼락을 따라 조금 걷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은 후 그 옆쪽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큰길이다. 큰길을 조금 따라 걸으면 학교가 나온다. 그것이 카인 나이트레이의 정해진 등굣길이다.

아, 방송 시간에 늦겠어.

최근 방송부에게 부탁받아서 짧은 코너를 맡고 있다. 등교 시간에 흐르는 교내 방송으로, 정해진 시간 안에서 잡담을 하기도, 가끔은 기타를 연결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신청곡이 들어온 것도 있어서, 오늘은 노래를 부를 예정. 카인은 스마트폰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걸 봤다.

뭐지?

카인은 눈을 깜빡였다. 순간 떠오른 건 순수한 의문이었다. 저건 뭐지? 언제나의 익숙한 풍경에 끼어든 이상한 존재. 꼭 거실에 걸려있는 풍경화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물이 나타난 것처럼. 저도 모르게 눈을 부빌 정도로 의아한 것.

익숙해서 안 보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익은 담벼락 건너 붉은 지붕 집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소년… 청년? 저와 비슷한 나이로도 보인다. 꼭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다. 언뜻 불길한 상상이 들 법한 실루엣이지만 그 분위기는 묘하게 풀어져 있어서. 아마도 그 무릎 위에 느긋하게 거의 눕듯이 앉아 있는 작은 고양이가 그 불길함을 누그러뜨리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잘 보니 남자는 무언가를 먹고 있다. 꼭 아이스크림, 아마도 바 아이스크림? 같은 것. 조그마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반짝이는 은발이 햇빛을 반사해서 빛난다. 그림자 진 얼굴은 그 이목구비가 세세히 보이지 않음에도 멈칫 숨을 들이켤 만큼 단정해서, 아마 이전에 본 적이 있었다면 잊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는 이쪽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눈을 내리깐 채 콧노래를 부르듯이 일정한 리듬으로 꼰 다리를 작게 흔들며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놀라서인지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렇게 찬찬히 보니 복장도 눈에 익다. 아마 얼마 전 통합된 불량교의 교복 같다. 그렇다면 같은 학교다. 저와 비슷한 나이라 추측한 자신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아니, 이런 일방적인 것도 만남이라고 친다면, 의 이야기지만.

그리고 그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학교 안 가나?

그날은 그것뿐이었다.

온도가 없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이 고양이를 만질 때 아주 조금 누그러지던 것이 인상에 남아, 그날은 학교에서도 가끔 그 표정을 떠올렸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카인은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같은 길을 지나 같은 골목에서 꺾는다. 그럼 언제나처럼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카인의 걸음이 조금 느려진다. 그는 어제 보았던 이질적인 존재를 떠올린다. 이미 알고 있는 그림에 나타났던 전혀 모르는 침입자를.

그 풍경을 눈에 담는 것을 잠시 주저한 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주 조금의 기대, 아니면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떤 부정. 카인은 눈앞의 익숙한 담벼락을 바라보다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든다. 미루어서 해결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없다.

카인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내렸다. 무엇에 실망한 것인지, 애초에 이것은 실망인지, 저도 저를 잘 모르겠다. 학교에나 가자. 방송이 기다리고 있다. 카인은 내렸던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카인이 학교로 향하며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이제 익숙한 풍경은 다시 그저 풍경으로 돌아왔다. 온화한 태양과 낮게 느껴질 정도로 은은하게 펼쳐져 있는 푸른 하늘이 평온하게 주변을 감싸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에야말로 낯선 것은 그 존재를 뽐내는 법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야말로.

카인은 문득 동작을 멈췄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 시선 끝에서 발견한 것이다. 익숙한 풍경 안의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붉은 지붕 위에 그가 있었다. 반쯤 눕듯 그 지붕에 기대선 크레이프 같은 느낌의, 크림이 가득 올라간 디저트를 먹는다. 따분한 것처럼 가끔 다리를 흔든다. 꼭 어린애 같은 동작이다. 코끝엔 새하얀 크림이 묻어있다. 카인은 어쩐지 큰 소리로 웃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림 속에 들어온 낯선 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올 것 같은 입을 애써 손으로 막고, 그저 그를 숨죽여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는 어떤 때에는 이틀에 한 번, 그러다 사흘에 한 번, 혹은 간격을 띄우지 않고 매일, 간혹 일주일의 텀으로, 그 풍경에 등장했다. 가끔 그의 곁에는 길고양이나 참새 같은 작은 동물들이 무리지어 있었고 매번 달콤한 음식이 있었다. 길에 사는 경계심 강한 동물들이 그런 달콤한 음식만으로 다가오던가? 적어도 카인 나이트레이에게 그런 경험은 없었지만. 그 자신이 두르고 있는 묘하게 낮은 온도와는 정반대로, 동물과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신기하게도 평화롭게 보였다.

카인은 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늦지 않게 등교하곤 했다. 몇 번 사진을 찍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그만두었다.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반칙이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형태로 남기는 순간 오히려 거짓말 같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지만 그 방문자가 있는 풍경은 어쩌면 카인 나이트레이에게도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기에, 그의 존재는 더 이상 이질적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그림에는 원래부터 그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이 마주친 것은 한순간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을 터였다. 카인은 이제 놀랍지 않은 풍경 속의 침입자를 익숙한 듯 올려다본다. 오늘은 슈크림이다. 커다란 슈를 이미 반쯤 베어 물어 튀어나온 크림이 입가를 장식하고 있다. 풋. 웃음이 작게 삐져나온다. 오늘 점심엔 나도 먹을까, 슈크림.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림 속의 인물과 눈을 마주치는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카인 나이트레이는 그런 상상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카인은 묘한 충격을 받았다. 그 시야에 자신이 담겼다는 사실에. 이상할 정도로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자기 자신에게.

카인은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상대방의 눈도 커다래졌다. 꼭 고양이의 동공이 변화하듯이, 꽤 거리가 있음에도 그러한 인상을 받을 정도로 선명하게. 그리고 카인은 깨달았다. 그 두 눈의 색이 자신의 그것과 꼭 같은 색이라는 것. 여름꽃의 꿀과 가을 장미의 꽃잎 같은 색이라는 것을.

카인은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멍청하게, 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아마 입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을 거다. 움직인 것은 상대 쪽이 먼저였다. 동그랗게 뜨였던 눈이 예리하게 갈린 칼처럼 날카로워지고, 새하얀 얼굴에 경계와 불신의 빛이 떠오른다. 그걸 저지하기 위해, 무어라도 말을 걸기 위해 목에서 소리가 난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상대방은 어떻게 한 건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재빠른 동작으로 순식간에 지붕 위에서 내려온 후 바람처럼 모습을 감추었으니까.

그리하여, 카인 나이트레이는 완전히 눈을 빼앗긴 것이다.

익숙한 풍경 안의 아름다운 침입자에게.


2024. 11. 6 설원에서

트위터에서 나온 화제를 생각하다가 쓰게 된 단문.

깊은 관계(?)로 진전됐지만 서로의 생활을 보내며 가끔씩만 만나는 카오, 라는 설정이네요.

보통은 관계가 진전되면 계속 같이 있을 것이다/눈은 기사님이 바꿀 힘이 생겨도 굳이 다시 바꾸지 않는다, 파인데 쓰는 김에 둘 다 반대로 써보았습니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저주가 걸린 어린애들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오웬을 찾아간 카인, 이라는 배경 설정이 있었네요. 글에서 쓰지 못해서 완전히 사족이 되었지만…


너무 걱정마.

비로드처럼 매끄러운 적발을 아무렇지 않게 한쪽으로 넘기며 그는 씨익 웃었다. 너무나도 살가와서 그만 무언가 많은 것을 착각해 버릴 것만 같은 웃음이었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꿀 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말을 삼키며 그저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더 세게 쥐었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모든 상황이. 그 불안함에 끊임없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얼핏 잔잔해 보이는 강물처럼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것을 반쯤 흘려보내듯 넘겼다. 나의 요동치던 심장조차 가라앉을 정도로 고요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 여유로움과 강함은 본인이 다루는 것만큼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모두가 깨닫고 있었다.

결국 목적지였던 북쪽 나라 국경 근처의 숲, 야트막한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져있는 공터에 도착한 것은 새벽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나무 건너편은 설원이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마른 땅 어느 부근부터 선을 긋듯이 흰 눈이 쌓여있었다. 꼭 정말로 다른, 별세계의 나라인 것처럼 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은 설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밟아보고 싶은 마음을 여태껏 쌓인 피로가 눌렀다. 우리 모두 지쳐있었다. 반쯤 눈이 감기는 것을 겨우 잡아둔 것은 아마도 그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많은 눈을 처음 보았다.

우리를 이끌어온 붉은 머리의 남자는 웃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도착했다. 그 말에 우리는 대부분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힘들었어? 이런, 중간에 휴식을 더 넣을 걸 그랬나. 이 강행군과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어조였다. 잠깐 쉬어. 그 말이 고마워서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가뿐했다. 마치 혼자서 날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경쾌한 스텝으로 흰 눈이 쌓인 곳까지 걸어간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던 우리들은 그 모습을 거의 드러누운 채 보았다. 꼭 눈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들마냥. 어찌 보면 참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런 장면을 그렇게 좋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란 아마 한 세기 건너 그 이상의 시간이 흘러도 많지 않을 것이므로.

휘익.

남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종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넓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아마도 야트막한 나무들 그 건너편 넓게 펼쳐진, 끝없이 눈이 내린 설원 너머까지도.

그리고 그다음 순간, 우리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스는 옆에서 내 손을 꼭 잡았고 애니는 반쯤 나를 끌어안았다. 남자 주변에 갑자기 흰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남자를 중심으로 그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반짝이는 눈송이가 그를 감싸고 소용돌이쳤다. 닿으면 얼어붙을 것 같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결정들. 나는 그가 얼어서 동상이 되면 여기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할 시점인지 굳은 머리로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얼어붙지 않았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눈보라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사이로 흰 구두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꼭 마법처럼. 눈송이 사이에서 틈을 가르고 나오듯 흰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익숙하게 그를 받아내어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어느 얼음조차 녹일 것 같은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웬.

그것은 그의 이름일까?

나는 그만 숨을 들이켠 채 숨을 멈췄다. 그건 눈보라 사이로 보인 흰 남자의 얼굴이 몹시도 아름다와서 꼭 눈으로 잘 빚어낸 조각 같았기에. 만지면 얼어붙을 것 같은 눈 조각 사이 진홍색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두 눈동자만이 선연하다. 이 세상의 존재 같지 않은 이형의 아름다움. 숨을 내쉬면 조각은 그 작은 온기로도 스러져 녹아내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쪽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론 저 둘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눈을 돌릴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본의 아니게 밀회를 지켜보게 되어버린 제삼자처럼 보면 안 될 것을 보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러나 어쩐지 눈이 떨어지지 않아서. 흰 눈의 반짝임에 시선을 빼앗긴 것 마냥.

적발의 남자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흰 남자를 보며 웃었다. 설원 한 가운데서 보기에는 이질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여름꽃 같은 선명한 노란빛의 양 눈에서 그대로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흰 남자는 반쯤 떠 있는 상태로 그를 내려다본다. 매끄럽지만 온도를 재기 힘든 시선이다. 적발의 남자는 그런 그에게 코를 부비며 다시금 웃음을 보낸다. 그것에 마지못해 이끌리듯 결국 흰 남자도 인상을 찡그리면서 비웃음에 가까운, 하지만 분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에게 겨우 묘하게 온도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기사님은 늘 변함이 없네. 개 같고. 뜨거워. 응, 칭찬 고마워.

이딴 거 이제 기사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잖아. 나까지 부를 필요 있어?

으응, 그렇긴 하지만. 간만에 네 얼굴도 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하… 진짜 손이 많이 가는 개네.

그렇게 말할 것까진 없잖아.

부루퉁하게 그에게 대꾸하는 남자의 얼굴은 여태까지의 여유 있는 그것과는 완전히 달라서, 그가 꼭 어린 소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흰 남자의 표정은, 그 온도가 없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쩐지 몹시 즐거워 보여서. 만족스러움, 기쁨, 충만함, 아,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의 아주 조그마한 움직임을 보았을 때의, 눈을 떼지 못하는 시선.

그런 것을 어쩌면 사랑스러움, 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024. 12. 20 루나피에나

트친분의 생일을 축하하며 작성한 글입니다!

평소에 써보지 못한 다양한 마법사들(비록 글에서는 마법사 아니지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즐거웠네요!

어느 세계선에서도 같은 사람을 만나 같은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 「알테레고의 규칙」 기반 / 카인오웬, 레노파우 함유


루나피에나 패밀리의 아침은 제각각이다.

제일 일찍 시작되는 것은 리케의 아침이다. 여섯 시 정각, 알람 소리 같은 게 없어도 반짝 눈을 뜬다. 아침 기도를 한 다음 세수를 하고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리케는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과 인사하는 순간이 좋다. 밝아지는 시야와 코끝에 와닿는 새로운 공기, 오늘도 무사히 세계와 마주한다는 기쁨. 한시라도 빨리 그 순간을 맞이하고 싶기에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싶다. 그런 행복을 모두와도 공유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몹시도 이치에 맞는 일 같아서 매일 아침 7시에 패밀리의 아침 조회를 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했지만, 샤일록의 우아한 미소로 단숨에 거절당한 게 아직도 조금 억울하다. 언젠가 더 훌륭한 사람이, 조직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면 어쩌면 그때엔…

다음으로 시작되는 것은 레녹스와 파우스트의 아침이다. 둘의 아침은 대체로 겹쳐있다. 어느 쪽이 먼저 일어나는지 상세히 기록한 적은 없지만 대체로는 레녹스 쪽이 조금 더 일찍 일어난다. 둘의 아침 식사는 약속한 적도 없는데 보통 8시 전후에 함께.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리고, 다른 한쪽이 가벼운 식사를 준비한다. 파우스트는, 레녹스가 아침 운동을 다녀온 소리에 깨는 것에 묘한 안도감과 고양감을 느끼곤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아직 전부 부상하지 못한 표층 아래의 의식이 파우스트 님,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건네지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미소를 받아 온전히 세계로 돌아오는 기분. 그게 좋아서, 조금씩 기상이 늦어지곤 한다는 게 최근에 생긴 파우스트의 고민이다.

클로에의 아침은 시간대를 특정하기에는 꽤나 편차가 있다. 보통은 9시 전후에 일어난다. …보통은. 하지만 전날 무언가에 몰두하느라 늦게 잠들면, 그다음 날에는… 클로에는 반짝이고 귀여운 것들이 좋다. 최근에 빠진 건 예쁜 마작패 모으기.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늘어놓고 감상하며 하나씩 닦아주다 보면 금세 시간이 사라진다. 이건 얼마 전에 뒷골목 시장에서 발견한 자개로 된 패. 엄청나게 고민하다 사버렸다. 꽤 비쌌지… 그치만 후회 없는 소비였어. 앗, 이건 저번에 판테라의 카지노에서 만난 신사에게서 받은 악세사리… 다음에 하고 가도 될까? 너무 염치없어 보일까?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한참 늦게 잠들어서, 며칠 전에는 그만 해가 중천을 훨씬 지난 다음 일어나버렸다. 일출보다 일몰 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는 것은 비밀이다. 울상을 지으며 샤일록, 늦잠 자버렸어~! 하고 조직의 아지트를 향했지만, 맞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지트의 아름다운 관리자는 그보다 한참 늦게서야 느긋하게 나타났다. 작게 하품을 하며.

그렇다, 샤일록이 아지트를 여는 것은 그의 아침이 시작된 후, 그가 마음이 내킬 때. 누구도 그에게 그 어떤 강요도 할 수 없다. 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친우인지 악우인지, 하여간 연기처럼 종잡을 수 없는 그 사내도 그렇게 말하곤 했지. 때로 얄미운 그의 친구이자 조직의 보스의 얼굴을 떠올리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일단 반대하고 싶은 심술궂은 기분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해 자기자신의 의견을 꺾는 것도 멋없는 일이겠지. 그러므로 그의 말처럼 언제가 아침인지, 그런 것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정한 틀일 뿐. 의미가 있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규율. 오직 진정으로 마음이 내키는 것이 중요할 뿐. 물론 샤일록은 대체로 너그러운 사람이며 대체로 자기 일을 좋아하므로, 적당한 시간에 찾아간다면 아지트는 열려있다.

그리고,

“오웬.”

빛을 반사하는 언월도의 날만큼 눈부시고 반짝이는 은발. 그 결 고운 가는 머리카락이 푸른 빛이 도는 안경 위로 가볍게 흔들린다. 세상 모든 것에 한 겹 막을 사이에 두고 있는 듯 나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제 앞의 인영을 인식한다. 그리고 눈앞의 흐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본 그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다. 막 건너의 세계와 이어지듯이. 이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후후, 뭐야, 나한테 할 말 있어?”

“아니, 할 말이 있는 건 너겠지. 일단 그 손 놔주지 그래.”

오웬은 뚝, 미소를 없앤 차가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아니, 그렇게 봐도 해줄 말이 없거든. 매끄러운 적발의 남자—-카인은 곤란한 듯 눈썹을 가볍게 찡그린다.

여기는 복숭아 만주로 유명한 골목 모퉁이 가게 앞. 근처에 오기만 해도 달콤한 복숭아 향이 코끝에 맴돈다.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되는 향기지. 하지만 그 앞의 광경은 그렇게 평온한 것만은 아니어서.

큰 소리에 이끌려 달려온 곳. 눈앞에는 은발의 아름다운 청년이 있었다. 가느다란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언월도. 알고 있는 인물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제 조직의 심부름꾼을 한 손으로 가볍게 제압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만주를 제 입으로 옮기고 있다. 그 가느다란 팔로 어떻게 자기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팔뚝의 소유자를 가볍게 누를 수 있는지, 보고 있는 자신도 의아할 정도로 초현실적인 광경이지만. 몸의 반은 벽에 거의 박혀있는 언월도에, 다른 반쪽은 오웬의 팔에 막혀 구겨져있다고 표현해도 좋을 남자는 이 와중에도 만주 가게의 봉투를 소중히 안고 있다. 이미 개봉되어 반 정도는 빼앗긴 것도 같네. 아무래도 이쪽의 심부름꾼이 산 만주를 오웬이 먹고 있다, 라고 카인은 판단했다. 그러고 보면 아까 여기 만주를 먹고 싶다며 화이트 님이 칭얼거리셨지.

“자자, 여긴 나한테 맡기고 얼른 가 봐. 화이트 님이 기다려.”

“저기, 누구한테 허락받고–”

오웬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제 언월도를 든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인은 언월도 아래쪽을 제 검으로 받아넘긴다. 그 사이에 심부름꾼을 내보낸다. 챙, 챙, 오웬의 격노 같은 공격을 부드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치며 얼른, 가봐, 하고 인사까지 한다. 몸을 숙여 기어나간 심부름꾼은 거의 우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재빨리 뛰어서 사라졌다. 카인을 상대하느라 차마 그것을 막지 못한 오웬은 칫, 하고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언월도에 제 무게를 더하듯 몸을 실어 무겁게 내리친다. 막아냈지만, 카인조차 몸이 뒤로 밀릴 정도의 일격이다.

“내 간식을 빼앗은 죄는 무거워.”

“네 간식이 아니잖아, 그리고 이미 먹은 거 아니야?”

“흥, 그 정도로 될 거 같아?”

“좋아, 그럼 더 사서… 는, 어라.”

그제서야 카인은 눈치챈다. 가게가 닫혀있다. 원래 이렇게 일찍 닫는 가게였던가? 굳게 닫힌 어두운 문을 들여다보자 그제야 문 안쪽에 붙어있는 <本日分終了>의 글씨가 보인다. 이런, 몇 개사서 이 녀석에게도 나눠주면 좀 얌전해지려나 싶었건만.

“닫았어. 더 먹고 싶었는데…”

뒷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깝다. 바람에 스치면 지워질 것 같은 목소리.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내려다보는 어딘가 조금 쓸쓸한 눈빛. 카인은 순간 자신이 무언가를 실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옳은 일을 했어. 자신을 다잡으며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자 다음 순간 언월도의 차가운 날이 목 끝에 스쳤다.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하며 검으로 언월도를 막아낸다. 그 너머에서 오웬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눈으로 이쪽을 노려본다. 역시 마음이 시원치 않다.

“저기, 오웬.”

“......”

“복숭아 만주 말고 다른 건 어때.”

“......”

색이 들어간 안경 너머 눈동자가 작게 흔들린다. 그건 놀랍게도 카인과 같은 색이다. 꽃잎을 졸인 것 같은 짙은 분홍빛과 벌꿀을 녹인 것 같은 진한 노란 색. 이 녀석과 눈을 마주치면 어쩐지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계속 보고 있게 돼. 아마도, 늘 거울에서 보던 눈동자를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것은 좀처럼 없는 경험이니까. 이 녀석도 내 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질 즈음, 오웬이 작게 입을 뗀다.

“단 거. 맛없으면 가만 안 둬.”

오웬의 아침은 늦다. 시간을 정하는 것은 싫다. 어긋났을 때 불쾌하니까. 그러니까 언제나 내키는 대로 일어나고 내키는 대로 잠이 든다. 몇 시인지, 그런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도 뭐라 할 수 없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오늘도 그렇게 했을 터인데,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첫째로, 눈뜨자마자 먹고 싶었던 복숭아 만주를 원하는 만큼 먹지 못했다. 둘째로, 원래대로라면 가게에 갈 때 끌고 오려고 했던 클로에가 “도무지 뺄 수 없는 급한 용건”(그딴 게 어딨어?)이 있다며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셋째로, 이 녀석을 만났지.

“오웬, 너 그거 열 개째인데.”

걱정인지 뭔지 좀 질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입으로 열 개째 월병을 가져간다.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껍질 아래 달콤하고 끈적한 앙금이 입안 가득 퍼진다. 복숭아 만주보다는 덜하지만, 나쁘진 않아.

옆의 남자는 세 개를 먹고 두 손을 들었다. 흐흥, 고작 그 정도야? 그럼 네 것도 내놔, 하고 빼앗아 온 것이 두 개. 추가로 시킨 게 세 개. 전부 무거울 정도의 단 앙금이 들어있는 간식용 월병이다. 보통은 한두 개 먹는 게 고작이라고… 하고 카인은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 그렇게 먹다간 배탈 나.”

작게 한숨을 쉬며 자연스럽게 입가를 닦아주는 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이 늦었다. 오웬은 뒤늦게 곁에 둔 언월도를 꽉 쥐었지만 상대의 얼굴을 보고 이내 손에서 힘이 풀린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곁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 미소를 보내온다. 아아, 경계하는 이쪽이 바보 같아질 정도로 얼빠진 얼굴.

부드럽게 흔들리는 적발 아래 다정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

그 눈동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오웬은 기억한다.

많은 것을, 대체로 모든 것을 전부 잊으며 살아왔고, 그것에 어떤 후회도 미련도 없지만 그에 대한 기억만은 때때로 몸서리쳐질 만큼 선명하므로.

그때 카인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하지만 발견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 정도로 빛나는 존재는 이 거리에 달리 없다. 새카만 어둠 속 스스로 발광하는 항성. 눈을 감아도 눈꺼풀 뒤에 새겨지듯 붙어버린 빛.

그 시절,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던, 극악무도하기로 소문난 조직에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 그는 목소리를 높여 무도한 방식에 저항했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일어나 맞서 싸웠다.

자유롭지만 어지럽고, 도리라는 단어는 땅에 떨어져 있는, 자기 목숨 하나 챙기기 힘든 이 거리에서 주저 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행동. 그건 머리를 강타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는 기대해 본 적 없고, 어쩌면 그것은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처음 본 순간 눈을 빼앗기고,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빛에 오웬은 몇 번이고 카인이 있는 곳으로 향하곤 했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자각이 있었음에도, 다시 한번 보지 않으면 이 기분이 뭔지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먼발치에서 그를 발견하고, 그 색을 확인하고, 묘하게 안도한다. 그런 날들이었다.

그 눈동자는 어떤 어둠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별과 같은 색.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봐도 나쁘진 않아.

그와 만날 생각 따위 없었고, 자신의 눈이 같은 색이 된 건 더더욱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오웬은 자신의 눈동자가 카인의 것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같은 색이건만, 뭔가 달라.

그의 눈을 구경하는 게 제 눈을 보는 것보다 몇 배는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오웬은 월병을 한 입 더 베어 문다. 달콤해. 쿡쿡 작게 웃으며 카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그는 어쩐지 아까보다 더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싫진 않지만. 이거, 하나 더 사달라고 해야지.

“하나 더.”

“배탈 난대도… 그리고, 생각해 보니 오늘…”

“?”

아니, 나도 지나가다 들은 얘기라서,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음, 요지는, 배를 좀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건데… 아니, 애초에 너 월병을 열 개나 먹었는데 아직도 들어간단 말이야? 이렇게 가느다란 몸 대체 어디에… 카인이 손을 뻗어 오웬의 마른 어깨를 붙잡는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거기에 오웬의 언월도가 반사적으로 움직이기 30초 전.

“아, 오웬!”

알고 있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 미안… 내가 방해했어? 핫, 하고 제 입을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붉은 머리 청년은 루나피에나의 클로에. 놀란 토끼같이 이쪽을 보는 시선에 묘한 긴장이 단번에 풀어진다. 방해는 무슨. 오웬은 카인을 뿌리치고 휙 그의 곁으로 간다. 손안의 존재가 순식간에 사라져 얼떨떨해진 카인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인다. 카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오웬은 태연하게 클로에 옆에 서서 남은 작은 월병 조각을 입에 쏙 집어넣는다. 우물우물. 꿀꺽.

“아앗, 오웬, 월병 먹었어?”

“먹었어.”

“몇 개나?!”

“열 개.”

“열 개? 아아, 그럼 아직 배 덜 부르겠구나.”

“응. 더 사달라고 하려고.”

그게 그렇게 돼? 둘의 대화에 어디에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카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종달새들의 지저귐처럼 이어지는 대화에 끼어들 틈도 없이.

“그것도 좋지만… 짠, 이거 봐.”

클로에가 자랑스럽게 들어 올린 것은 익숙한 로고가 새겨진 커다란 종이봉투다. 분홍색 잉크로 그려진 큼지막한 복숭아 그림.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쓰여있는 가게명.

“…! 복숭아 만주.”

“응! 복숭아 만주. 오웬, 좋아하지?”

“어떻게?”

“어떻게?! 오늘을 위해서 미리 예약했어.”

클로에는 즐겁게 웃는다. 비밀 이야기를 겨우 털어놓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다. 그 목소리는 투명한 풍선 안에서 분홍빛 파티클이 튀어 오르듯 경쾌하다.

“오늘 저녁에 숙소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려고! 리케랑 파우스트랑… 루틸이라고, 저번에 판테라 카지노에서 만나서 친해진 친구가 있는데 그 애도 와주기로 했고… 아! 당연히 샤일록한테 허락은 받았어. 샤일록도 와서 특제 칵테일을 만들어주겠대. 기대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은 새의 노래 같은 말소리. 그것을 오웬은 묵묵히 듣고 있다. 카인은 그 옆모습이 제법 즐거워 보인다는 걸 눈치채고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오웬도 와주면 좋겠는데.”

“안 가.”

“으으응, 그러지 말고. 복숭아 만주도 있는데?”

“만주만 내놔.”

“으응, 그치만…”

클로에의 말소리가 흐물흐물하게 늘어진다. 시무룩하게 오웬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에는 거절할 수 없는 애교가 담겨있다. 오웬은 뭐라 말을 꺼내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이번만이야.”

“야호! 신난다!”

작은 두 종달새가 노래를 주고받는 것을 바라보던 카인은 자기가 어느새인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잠시 제 턱을 매만졌다. 크흠, 괜히 헛기침도 하고.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아, 미안, 카인! 초대하고 싶지만… 숙소에 들이는 건 샤일록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서.”

“으응, 오붓하게 노는데 방해할 수 없지. 다음 기회를 기다릴게.”

“응! 다음엔 더 크게… 다 같이 바에서 파티하자!”

그렇게 말하며 크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마친 클로에는 날쌘 움직임으로 근처의 벽을 훌쩍 넘었다. 오웬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그 뒤를 따라가다가 이쪽을 한 번 돌아본다. 카인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보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월병 가게를 가리킨다. ‘더 줘’. 조그마한 입이 움직여,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내 생긋, 눈을 가늘게 뜨고 얼음이 녹아내리듯 웃은 그 얼굴은, 월병 안의 앙금을 전부 합쳐 녹인 것보다도 달콤했다.

그리하여 꽃잎의 폭풍우가 지나간 현장에서, 카인은 이상하게 주체하기 어려운 제 얼굴 근육을 애써 한 손으로 가리며, 멀어지는 달콤한 향기에게 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

“샤일록! 오웬 데려왔어!”

“어라, 어쩐 일로 안 늦게 잘 왔군요.”

“불만이야?”

“후후, 그럴 리가요.”

“오웬, 이쪽으로 와서 머핀 놓는 걸 도와주세요.”

“귀찮네, 정말…”

“잘 놓으면 네 몫엔 생크림을 원하는 만큼 올려주지.”

“…그럼 둘까.”

“나는 만주 꺼낼게! 앗, 루틸! 어서 와!”

“클로에! 여러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이크랑 술을 좀 가져왔는데, 도움이 될까요?”

“와아!”

그렇게해서, 루나피에나의 아침은 각자의 방식으로 흘러갔지만, 밤은 함께 깊어가는 것이었다.

꽃향기에 둘러싸인 작은 새들의 밤 노래가 울려 퍼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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