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오웬] 키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 special thanks to 감마 님, 담수 님ღ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카인 나이트레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화급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다. 익숙한 검, 자신의 무기가 언제나의 자리에 있다는 걸 느끼고 조금 안도했다. 아무래도 평소의 외출복 차림인 것 같다. 어제는 언제나처럼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들었는데, 옷을 갈아입은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 흰 천장. 흰 바닥. 가구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방의 끝과 끝을 모르겠다. 넓은 공간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느낌이다. 바다, 같다고나 할까? 저 건너편 끝을 뭐라고 해야 할까? 방평선?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보고, 놀라서 저도 모르게 뛰었다. 바닥에 누군가 쓰러져있다. 일단 몸이 먼저 움직이고, 그다음에 생각이 따라온다. 사람의 인영. 즉, 내가 닿지 않아도 보이는 사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오웬!”
흰 인영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외출복 차림이었다. 흰 방에 흰 코트라니, 마치 보호색 같다. 카인은 급히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이상 성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보고 맥박이나 상태를 확인하려고 하던 찰나.
“쿠울…”
“……”
자는…… 건가?
색색, 아이가 잠들었을 때와 같은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린다. 평소처럼 새하얀 얼굴은 온통 흰 방에서 보니 이 방 안의 빛을 반사라도 하는 듯 평소보다 더 하얘 보이는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와 다를 정도로 어딘가 아파보이지도 않는다. 카인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살짝 흔든다. 오웬, 일어나 봐. 오웬.
“으응…”
작은 짐승의 아기가 그르렁거리는 것 같은, 말소리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오웬이 몸을 뒤척인다. 그러더니 부스스 가늘게 눈을 뜨는가 싶더니 화들짝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일으킨다. 카인은 조금 뒤로 물러섰다. 오웬은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듯 잡고서는 상황을 가늠하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이내 주문을 외웠다. <쿠레・메미니>
“오웬! 너, 그렇게 갑자기…”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마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았을 땐 그렇다. 바로 사라져 버리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네. 카인은 조심스럽게 다시 한 걸음 오웬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웬은 눈을 크게 뜬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의아하다, 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이 녀석, 뭐지?
“오웬?”
“……”
“오웬, 일단 일어나서,”
“기사님, 뭔가 했어?”
자신은 아마 오웬보다 몸이 좋을 것이다. 체력도, 악력도. 하지만 사람이 갑자기 온몸을 부딪쳐오면 속수무책인 부분이 있다는 것도 감안해주어야 한다. 이 녀석한테서 설마하니 육탄전으로 도전받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도 함께. 그러니까, 오웬이 주저 없이 몸을 날려서 카인을 넘어 쓰러뜨렸다는 뜻이다. 오웬은 카인을 마치 커다란 베개라도 되는 양 배 위에 올라가 깔고 앉고서 카인의 멱살을 쥐었다. 험악한 분위기. 하지만 카인은 억울했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양손을 위로 든다.
“저기,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
오웬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이쪽 말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듯이 카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본다. 그 눈의 한쪽은 태어났을 때부터 보아온 색이다. 그게 남의 얼굴에서 보이는 건 영 적응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예전보단 많이 익숙해졌어. 그의 얼굴에서 자신의 눈동자는 꼭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때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을 띤다. 검은 동공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그 눈을 마주 쳐다본다. 색이 다른 양 눈에 자신의 모습이 작게 비친다. 아마 내 눈에도 지금 이 녀석이 비치고 있겠지.
“정말이야.”
“……”
오웬은 거칠게, 꼭 손을 던지듯이 카인의 멱살을 놓았다. 그의 손길은 거칠어 봤자, 줄곧 흙구덩이에서 굴러온 어린 기사에겐 간지럽힘 정도였지만, 행동의 기분은 전해진다. 카인은 한숨 쉬며 옷을 정돈했다. 이게 무슨 수난이냐. 오웬은 칫, 하고 혀를 차며 카인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 옷자락이 흔들린다. 카인은 잠시 그 모습을 살피다가 이내 자신도 가볍게 일어나서 손과 몸을 털어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안 없어지네. 금방 모습을 숨길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의아해하며, 하지만 역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까, 오웬이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방을 탐색해 보기로 한다. 흰색 공간. 흰색을 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흰색뿐이면 막막한 기분이 되는구나.
“엇”
좀 걷다 보니 뭔가에 부딪혔다.
잘 보니 아마도 책상이다. 보호색이다. 방과 완전히 같은 색이라 알아채지 못했다. 카인은 쭈그려 앉아 책상을 더듬어본다. 아, 뭔가 서랍 같은 게 있어. 조심스럽게 연다. 평소 같으면 좀 더 주의하겠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니까. 그렇다면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아,”
서랍 안에는 한 장의 흰 종이가 들어있다. 그리고 거기에 쓰여있는 내용은 카인의 이해의 범주를 뛰어넘은 것이라서, 카인은 잠시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저 녀석에게 곧이곧대로 전해도 되나? 하지만 전하지 않아도 곤란한 내용이기는 하다. 끄응, 카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오웬을 불렀다. 오웬, 잠깐 와 봐.
카인의 말에 오웬은 얼굴을 구기며-기사님, 나한테 명령할 셈?-불만을 말하지만 그래도 순순히 근처까지 온다. 카인은 잡고 있던 종이를 살짝 흔들었다. 이거 봐. 그게 뭔데. 오웬은 눈을 가늘게 뜨며 종이를 눈빛으로 베어낼 듯이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
“키스… 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오웬의 표정이 냉점 이하로 내려가듯 싸늘해진다. 아니아니, 내가 쓴 게 아니니까, 나를 노려봐도 소용없거든.
“그리고 여기선 마법을 못 쓰는 것 같은데, 알고 있었어?”
“……”
아,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자신은 역시 아직도 위기 상황에 마법에 기대기보다는 검을 먼저 찾지만, 오웬은 다르겠지. 저 녀석, 사라지지 않아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만 그런 거였나.
“이거 진짤까?”
오웬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진다. 진짜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얼굴, 그렇지만 만약 마법을 시도했을 때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이걸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저 글을 읽자마자 자신도 집중해 보았지만, 그러고 보면 정령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 혼자만의 상태 이상일 수도 있었겠지만, 오웬도 그렇다면 아마 이 글대로 여기서는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타당하다.
오웬은 말없이 잠시 서 있었다. 카인은 머뭇거리며 그 얼굴을 살피려 했다. 그때 오웬이 먼저 움직였다. 자신의 손에서 종이를 뺏더니 주욱 찢는다. 당황해서 막을 시간조차 없었다. 오웬은 그 종이를 몇 조각으로 더 찢더니 휙 바닥에 버린다.
“보나마나 뻔하지. 마감에 쫓기는 작가가 뻔하고 엉망인 소재로 얼기설기 무언가를 짜내서 겨우겨우 한심하고 멍청한 글을 쓰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난 거지. 상상력의 빈곤함에 질려서 말도 안 나와. 하지만 오즈나 미스라는 그 정도도 머리를 못 굴릴 테고, 브래들리는 이런 빙빙 돌리는 짓은 안 할 테니, 쌍둥이 언저리려나.
나가면 죽여버리겠어.”
숨도 쉬지 않고 줄줄 내뱉는 말을 얼이 빠져서 듣고 있었더니 오웬은 흥, 하고 고개를 휙 돌린다. 이거, 여기서 나가게 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곤란하다. 자신도 여기서 이렇게 계속 갇혀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오웬, 일단 대화하자.”
“……”
“나는 여기서 나가고 싶어. 오웬은?”
“나가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그런 것조차 물어보지 않으면 몰라? 바보야?”
불쾌한 듯한 독설이 쏟아진다. 이 녀석의 말 정도는 별로 아무렇지 않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그럼…… 키스해 봐도 돼?”
“하아?”
질렸다는 듯한 눈빛을 받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익숙해질 만한 일도, 그러고 싶은 일도 아니고.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 하니까. 걸어도 끝이 안 보이고, 마법조차 못 쓰는 막막한 상황이니 해볼 수 있는 건 다 시도해 보고 싶다. 그러려면 우선 이 녀석을 설득해야 해.
“그치만 실제로 마법은 못 쓰고.”
“……”
“뭐라도 해 봐야 한다면…”
“……기사님, 최악. 그러고도 기사야?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남의 기분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거? 기사님같이 신경줄 두껍게 아무하고나 살을 맞대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기사님이랑 손가락 하나 닿고 싶지 않다면? 그래도 맘대로 날 건들 거야? 그 정도로 쓰레기였어?”
“아니, 그러니까, 제대로 네 허락을 받아서…”
“허락 안 해.”
새초롬히 고개를 돌린다. 조그마한 입을 꾸욱 다물고,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지. 이럴 땐 밀어 봐도 별 소용없다. 이 녀석이랑 하루 이틀 같이 보낸 게 아니니까 이제 대충 알아. 그럼 이럴 때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밀어서 소용없을 땐 당겨야한다.
“…응, 알았어. 그럼 어쩔 수 없지. 평생 여기서 사는 거네?”
“……”
“아아, 큰일이네. 어제 네로가 오늘은 디저트로 크림이 잔뜩 올라간 팬케이크가 나온댔는데.”
모양 고운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이쪽은 여전히 안 보고 있지만 곤란한 표정이다. 그렇겠지. 오웬도 여기서 나가고 싶을 테니까. 마법을 전혀 못 쓴다면 결국엔 시도해볼 수 밖에 없을 거야.
그때 오웬이 갑작스럽게 움직였다. 카인의 명치를 가격하듯 거칠게 거의 온몸을 써서 카인을 민다. 아까와 비슷하게 밀어 넘어뜨리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번에는 막았다. 오웬을 보고 있었으니까. 막으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기도 하다. 이 녀석, 완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걸.
“너는 진짜… 대체 왜 이렇게까지 몸이 먼저 나오는 건데.”
“시끄러. 기사님은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해볼 생각이 들었어?”
“닥치라니까.”
몸통 박치기에 가까운 공격을 막느라고 반쯤 오웬을 끌어안듯 잡고 있던 카인은 마침 근거리에 있는 오웬의 얼굴을 바라본다. 새하얗고 모양 좋은 콧대, 조그마한 입, 줄곧 찡그려져 있는 가는 눈썹이 살짝 시야 아래쪽으로 내려다보인다. 새삼스럽지만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어쩐지 곱고 예쁜 걸 보았을 때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부는 기분을 조금 알겠다. 그러지는 않았지만.
“잠깐 눈 감고 있으면 안 아프게 금방 끝낼게.”
“하? 진짜 미친 거 아냐?”
“네게 실례인 건 알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면…”
오웬이 진저리를 치며 카인을 패대기치기라도 할 듯 거칠게 밀어내며 그 품에서 빠져나온다. 밀쳐진 카인은 강제로 무언가를 할 의지는 전혀 없다는 듯 양손을 펼쳐 들어 보인다. 자신은 키스 정도, 해도 상관 없지만 오웬이 그렇게까지 싫다면 미안한 일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가능하면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다.
불쾌하다는 듯 몸을 탈탈 털며 몸을 바로 세운 오웬은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색한 포즈로 자기 말을 기다리고 있는 카인을 바라본다. 이쪽을 마냥 보고 있는 기사님의 모습 꼭 기다려, 를 당한 강아지 같아. 오웬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그 모습을 보며 코끝으로 웃었다.
“좋아.”
“정말?”
“말을 끝까지 들어. 정말이지, 개보다 못하다니까.
…기사님이 추하게 내 구두를 핥으면서 제발 부탁한다고 내게 울며 매달린다면 생각해 보지.”
“구두를 핥거나 울면서 매달리진 않겠지만, 부탁은 할게!”
카인이 경쾌하게 웃으며 오웬에게 손을 내민다. 오웬은 짜증 난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 손을 가볍게 쳐냈다. 그럼에도 카인의 미소는 금 하나 가지 않았지만.
“그럼, 눈을 감고…”
“미쳤어? 북쪽 마법사는 남 앞에서 눈 안 감아.”
“아… 음… 그럼 이대로…?”
카인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오웬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둘의 거리가 확 좁아진다. 하지만 카인은 제가 먼저 다가가 놓고 이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를 탓할 수는 없다. 카인 나이트레이는, 물론, 다른 사람과의 스킨십에 남들의 배로 익숙하고 타인과의 거리감이 좁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22년간 연애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연애, 라는 달콤쌉싸름하되 자기 자신을 단 한 사람에게 성심성의 할애해야 하는 일을 실행하기에 카인 나이트레이의 인생은 이미 너무 많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백을 받은 적은 적지 않지만 그것이 어떤 관계로 이어진 적은 없다.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적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에게 친애의 입맞춤을 받은 것 이외에, 다른 누군가와 키스, 라는 퍼스널 스페이스가 제로가 되는 스킨십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그 상대가 오웬이라니.
그것이 별달리 싫은 것은 아니다. 오웬은 요즘 들어선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좀 더 알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스킨십을 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자연스럽게 등을 치거나, 손을 잡아 악수를 하거나, 오웬은 그런 걸 허락하는 편이 아니니까. 물론 허락을 받지 않고도 시행하는 것이 카인 나이트레이라는 남자지만, 뭔가를 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연기처럼 사라져서야, 아무래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카인 나이트레이는 조금 곤란했다. 실제로 해본 적이 없으니, 그가 키스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지식은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밖에 없다.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눈을 감고, 천천히, 사랑을 확인하듯 입을 맞춘다, 라는. 그것을 손가락 끝이 닿은 것조차 손에 꼽을 정도인 오웬에게 해야한다. 아무래도 허들이 높다.
나라도 눈을 감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오웬의 얼굴 께로 제 얼굴을 가져다 대려 할 때였다.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이 스칠 정도의 거리. 오웬이 퍽 카인의 가슴 쪽을 쳤다. 거의 밀려나지도 않았지만 놀라서 고개를 든다. 오웬은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한 손으로 제 입술을 가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기사님, 변태.”
“에? 아, 아니, 아직 아무것도.”
“바보, 멍청이, 이상성욕자, 파렴치한, 해삼, 말미잘”
“하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카인은 곤란한 듯 한 발 물러서며 한숨을 쉬었다. 뭔가 잘못했을까, 아니 그렇지만, 키스를 하려면 다가가는 수밖에 없잖아.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
오웬은 잠시 말이 없다가 휙 몸을 돌려 이쪽으로 왔다. 아, 평소의 표정이다. 거기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은 조금 이상하다. 오웬은 다가와선 말도 없이 제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 힘은 느껴졌지만 그다지 강하지 않아서, 그저 의아하게 바라봤더니 오웬이 짜증을 냈다. 기사님, 눈치도 없어? 앉아. 뭘 잘못한 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순순히 앉는다. 오웬은 그제야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카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럭저럭 만족한 눈치다. 뭐, 일단 이 녀석이랑 협동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기분을 맞춰주는 게 좋겠지.
“기사님, 눈 감아. 움직이지 마. 이왕이면 잠깐 죽어주면 좋겠는데.”
“응?”
카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오웬은 바보를 보는 표정으로 부러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짜증이 가득한 눈빛이다.
“그러니까, 내가, …할 테니까, 기사님은 눈이나 감고 가만히 있으라고.”
“어…?”
“감아!”
그 외침에 화들짝 눈을 감는다. 아무튼 저 녀석이 할 의지가 있다니 다행인 일이고, 지금은 저 녀석 마법도 못 쓰는 것 같고. 별일이야 없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이 머리에 둥둥 떠 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건 카인 나이트레이의 특기가 아니다. 뭐라도 할 일을 찾아 하지 않으면 도리어 안절부절 못 하게 된다. 이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키스라는 게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였나? 어?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이 방에 위험해 보이는 건 없었지만, 누군가가 침입하기라도 했다면? 오웬은 괜찮은 건가? 내가 계속 이렇게 눈을 감고 있어도 정말 괜찮을까? 마법을 못 쓰니까 안심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마법을 못 쓰니까 위험하다는 뜻도 된다. 낯선 환경인 만큼,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잖아.
꼬리에 꼬리를 잇는 생각에 카인은 덜컥 불안해졌다. 아주 잠깐, 바깥 상황을 확인하는 것 정도는 큰 문제 없겠지. 애초에 키스할 때 왜 눈을 감는 건지, 카인은 그 이유를 모른다. 중요한 마법 의식 같은 것도 아니고, 괜찮을 거야. 그렇게 가늘게 눈을 뜬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가느다란 은사가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닿을 정도로 제 시야 위쪽에 쏟아져 있다. 그리고 거기에 감싸인 새하얀 얼굴. 그 표정에 눈을 빼앗긴다. 오웬은 확실하게 곤란해하고 있었다. 남을 괴롭히지 못해서도, 누군가가 미워 견딜 수 없어서도 아니고, 그저 순수하게 어쩔 줄 모르는 표정. 어째서인지 조금 상기된 붉은 뺨이 흰 피부와 대조되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조그마한 입술이 꾸욱, 다물어져선 아랫입술을 살짝 씹은 것처럼 구겨져 있다. 언제나의 짜증이나 심술과는 다르게, 팔 자를 그리고 있는 가는 눈썹이 애처롭다. 때로 저 자신의 약함을 내보이는 것 같아 마주하는 것도 괴로웠던 두 눈동자는 어쩐지 평소보다 촉촉해 보여서, 카인은 문득, 그 눈동자에 제가 담겼으면 하고 바랐다. 저도 모르게 팔을 올렸다.
“?!”
동작은 한 순간이었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대고 몸을 조금 들어 그 끝에 입맞췄다. 가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이윽고 오웬의 두 눈이 크게 뜨이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카인이 비친다. 분홍빛 꽃잎을 가득 녹여 잼으로 만든 것 같은 진홍빛 눈. 그것은 제법 만족스러운 정경이었다. 그 순간 마법이 풀리듯 주변 공간이 그 맨 가장자리부터 녹아내리듯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익숙한 풍경이다. 마법관의 중정이다.
“아, 돌아왔다.”
멍하니 중얼거리며 시야를 위로 하니 오웬도 얼빠진 얼굴이다. 그것이 뭔가 귀여워서 쿡쿡 웃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오웬이 새빨개진 얼굴로 버럭 화를 낸다.
“기사님, 제정신이야? 가만있으란 말조차 못 알아듣는 머저리였어? 진짜 짐승보다 못하네. 기다려 조차 못 한다니 최악이야.”
그 매도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달려온다. 아키라다. 그 뒤에 방글방글 웃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스노우와 화이트의 모습도 보인다. 오웬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쪽을 힐끗 보더니 쳇, 하는 소리와 함께 주문을 외워 모습을 감춘다. 무사히 마법도 돌아온 모양이다. 하지만 어쩐지 의아할 정도로 그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 아쉬워서, 카인은 잠깐 입맛을 다셨다.
“카인!!! 진짜 미안해요. 스노우랑 화이트한테 농담 삼아 말한 건데, 이미 발동한 마법을 중간에 없앨 수 없다고 해서.”
당황해서 횡설수설 길어지는 말을 다정하게 끊는다. 아키라를 돌아보며 대답을 건넨다. 으응, 아니, 별일 없었으니까 괜찮아.
“별일… 없었나요?”
조심스레 이쪽을 향하는 눈에 무어라 답하는 게 정답이었을까? 눈썹을 찡그려 웃으며 응, 금방 나왔고,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카인! 무사했구먼~! 쌍둥이 선생님이 반가운 듯 양팔을 크게 저으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아하하. 덕분에. 그쪽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미소를 보낸다. 잘 해냈는지 확신까진 할 수 없었지만.
그날 밤은 왠지 조금 이상했다. 군인은 대체로 어디에서든 잘 수 있어야 한다. 카인은 베개에 머리를 대면 금세 잠드는 게 특기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잠을 뒤척인 적이 없다. 그러나 어쩐지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도 번뜩 다시 뜬다. 퀭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양을 셌다. 양이 한 마리, 양이 두 마리, 양이 세 마리… 자주 보던 레녹스의 조그마한 양들이 머릿속의 울타리를 한 마리씩 넘어간다. 메에에,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양이 열세 마리, 열네 마리, 열다섯 마리…
‘큰일 났네…’
눈을 감으면 계속해서 떠오르는 붉은 뺨과 진홍빛 눈동자의 기억은, 카인 나이트레이, 스물두 살, 잠 못 이루는 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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