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빛
레바님 리퀘스트, 마법사의 약속 - 클로에 콜린스
2024. 1. 19. 11:02 p.m. / 3404자
리퀘스트 상세: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신경쓰지 않는" 주인이 있는 엄청나게 크고 물건이 많은 옷감, 염색실, 단추 등 재봉에 필요한 물건을 파는 가게에 가서 즐겁게 구경하는 내용을 써주세용.
※해당 장르 파지 않습니다. 지인 리퀘스트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주 가끔, 마법사들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지금처럼요.
"여기가... 어디지?"
잠깐 시간이 비어서 가볍게 산책을 나왔을 뿐인데, 어느새 주위가 익숙한 듯 낯선 풍경으로 바뀌어 있어요. 클로에가 난감해하며 주위를 둘러봐도, 낯익은 거리는커녕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네요. 길을 잃은 걸까요? 분명히 마법관 근처를 걷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우와."
서른 걸음쯤 앞에, 나무 조각과 리본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퇴창이 보이네요. 창턱에 쌓인 눈, 그 뒤에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는 빙하를 연상시키는 색감의 원단. 창문 안쪽은 누군가가 직접 만들었는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는 크기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요. 슬쩍 만 봐도 아, 이 천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다 함께 보려고 진열해 두었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그런 진열장이네요. 저도 모르게 퇴창에 다가가 안을 구경하던 클로에는 퇴창 옆의 문을 바라보았어요. 수예점이 맞는지, 뜨개질로 만든 '영업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네요. 한 번 들어가 볼까, 말까. 문과 퇴창을 번갈아 보던 클로에는 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문손잡이를 잡아당겼어요.
건물 안은 꽤 어두웠어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이고서야 안이 제대로 보였지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며 맑은 종소리가 울렸어요. 그 소리를 들은 건지, 계산대 안쪽에서 누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네요. 클로에는 그 틈에 얼른 가게 안을 둘러보았어요. 가게 안은 오랫동안 있었던 장소 특유의 약간 정체된 느낌이 맴돌아요. 가구도 자연스럽게 닳은 흔적들이 가득했고요. 이런 곳이 있었던가? 생각을 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네요.
생각에 잠긴 사이, 계산대에는 새하얀 머리의 어르신이 나와 자리에 걸터앉았어요. 날카로운 인상이라 클로에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지요. 하지만 그는 클로에를 한 번 흘긋 보기만 할 뿐, 의자에 앉아 들고 나온 뜨개질 거리로 시선을 돌렸어요.
“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봐도 고개만 까딱할 뿐, 클로에를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손에서 정교한 다이아몬드 무늬가 만들어질 뿐이에요. 머뭇거리던 클로에는 다이아몬드 무늬 한 줄이 더 만들어진 뒤에야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벽 한 면을 다 채운 진열장 가득 실패들이 색을 맞춰 나란히 세워져 있어요. 낮고 긴 탁자에는 재봉 도구들을 넣어두기 좋아 보이는 작은 상자나 아기자기한 서랍장이 올려져 있고, 그 앞에는 쥐기 좋아 보이는 가위, 공들여 만든 게 분명한 바늘꽂이, 다양한 재료로 만든 자 같은 것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네요. 이런 멋진 가게가 있었다니, 좀 더 일찍 알게 되었다면 좋았을걸! 천천히 탁자 위에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며 걷던 클로에는 한 탁자 앞에서 멈춰 섰어요. 이렇게 정교하게 수놓은 골무는 처음 봐요. 저 쪽에서 뜨개질하는 가게 주인이 직접 만든 걸까요? 골무 말고 다른 작품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물건들이 상하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창문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가게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둑어둑해요. 하지만 클로에는 이 가게 안이 온통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아, 이쪽은 단추들을 모아둔 구역인가 봐요. 자그마한 서랍들이 전부 열려 있고, 그 안에 온갖 단추들이 들어있어요. 나무로 만든 것 같은 단추도 있고, 금속이나 동물의 뿔로 만든 단추도 있네요. 화려한 단추, 단순한 단추, 반짝이는 단추를 차례대로 구경하며 몇 개를 마음속으로 골라두던 클로에는 단추에 비친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죠.
무심결에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치게 만드는 광경이에요. 가게 천장 가득 온갖 원단이 걸려있어요! 시선을 옮기는 대로 진열된 원단의 색이 유려하게 변하네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눈앞이 온통 붉은색으로,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초록색으로 물들어요. 뒤로 돌면 옅은 색으로, 앞을 다시 돌아보면 짙은 색으로 변하고요. 시선을 멀리 옮기면, 저쪽에는 화려하게 무늬를 넣어 짠 원단만 모아둔 모양이에요. 만져봐도 괜찮은지, 여기저기에 낮은 발판이 놓여 있어요.
“여기서 하루 종일 원단만 구경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
얼른 발판에 올라가 마음에 든 원단을 만져보던 클로에는 무심코 그런 말을 중얼거렸어요. 하지만, 정말로요. 원단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물건들까지 있으니, 꼼꼼히 구경하려면 일주일도 부족할 것 같은걸요. 발판을 내려와 걷다 보면, 어라? 저건 얼마 전 구경만 간신히 했던 원단 같은데요, 홀린 듯이 그쪽으로 걸어갈 때였어요. 가슴께에 뭔가 폭신한 것이 닿았지요.
“어?”
시선을 내려보니…. 다이아몬드 무늬? 뻗어온 손이 뜨개질감을 쥐고 있네요. 가게 주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보고 있어요.
“장식장이 단단해서 부딪히면 다치니 조심하는 게 좋아.”
눈짓하는 대로 앞을 바라보니 알록달록한 초크가 진열된 장식장이 코 앞에 있어요.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요. 코끝이 닿기 직전이에요.
“가, 감사합니다….”
아무 말 없이 뜨개질감을 든 손이 멀어져 가요. 계산대로 돌아가는 가게 주인을 머쓱하게 바라보던 클로에는 뺨을 슬쩍 긁은 뒤, 이번에는 똑바로 앞을 살피면서 원단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와, 상상한 대로의 촉감이에요! 이 원단은 꼭 사야겠어요. 그리고 또 뭘 사갈까요? 아까 그 가위랑 골무가 손에 딱 맞았는데. 금을 입힌 바늘 세트도 단단하고 좋아 보였죠. 아, 붉은 꽃 자수가 들어간 리본도 멋졌어요. 저쪽에 걸려있던 원단이랑 매치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아까 골라둔 녹색 보석이 장식된 단추는 라스티카에게 잘 어울릴 거예요. 저쪽의 무늬가 우아한 원단은 분명히 히스에게 잘 어울릴 거고요. 그리고 현자님 것도 사야죠! 이번에는 색감이 화려한 옷을 만들어드려도 좋을 것 같아요. 어떤 게 어울리려나?
마음에 들었던 걸 전부, 그러니까 지갑이 괜찮다고 하는 한도 내에서요! 그 안에서 고르니 양손으로 안아 들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부피가 커져 버렸어요. 비틀거리며 계산대로 걸어가자, 뜨개질감을 내려놓은 가게 주인이 혀를 차더니 가방을 잔뜩 꺼내주네요.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네요. 고개만 까딱한 가게 주인이 물건들을 꼼꼼하게 포장해 가방 안에 담아주었어요. 클로에도 열심히 거들었지요. 꾹꾹 눌러 담았는데도 가방이 네 개나 필요해서, 가게 문을 지날 때는 옆으로 뒤뚱뒤뚱 걸어야 했어요.
열심히 걷던 클로에는 어느새 행인들이 많은 거리로 나왔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렇게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뒤를 돌아봐도 그 가게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에는 손을 내려다봤어요. 여전히, 짐 가방이 양손 가득 들려있었죠.
“…모두에게 해 줄 이야기가 생겼네!”
활짝 웃은 클로에는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마법관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또 눈이 내리기 전에 돌아가야겠어요.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부지런히 걷는 클로에의 짐 가방 안에서 물건들이 반짝반짝 빛을 뿜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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