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팟의 먹거리

비의 거리

DANE by D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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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예요, 네로가 알려준 텃밭. 처음에는 허브만 길렀는데, 공간이 남아서 채소도 좀 심어뒀어요.”

“순 풀떼기만 갖다놨구만.”

“그치만 동쪽 나라는 수질이 좋아서 채소도 맛있댔어요. 보세요, 이 토마토!”

“그러냐.”

“브래들리도 그러고만 있지 말고 바구니 들어주세요. 아, 일부러 밭을 망치는 건 안 돼요……!”

“안 그래. 그 녀석 귀에 들어가면 큰일나니까.”

*

현자는 길쭉하게 자란 가지(비슷한 것)에 손을 뻗다가 문득 새어나온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애초에 책임감이 없어서 오래 유지할 수 없었을 거다, 저는 그저 현자 씨에게 떠넘기는 거니까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다며 한참을 주절거리던 목소리까지 선명히 떠오르는 바람에, 처음 그저 간지럽던 기분에서 시작된 웃음소리가 점점 걷잡을 수 없어진다.

아무리 외곽 땅이라도 이 동네에선 흔히 듣기 어려운 소란이다. 낮은 울타리 너머를 흘긋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현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그림자 하나로 그들을 전부 가리고 선 사람을 확인하고서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는 덩달아 삐딱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친절히 몸을 낮춰주지는 않았다. 다만 바구니를 가볍게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을 던진다. 다소 건방진 동작인데도 기분이 나쁘기보단 함께 장난스러운 기분이 든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설마 풀 뜯어먹을 생각만 해도 즐거워 미친 건 아닐 테고.”

“브래들리의 야채 혐오도 이쯤 되니 흥미롭네요……. 솔직히 좀 즐거운 건 맞지만, 그게 다는 아니고요.”

“그럼? 무슨 생각했는데?”

현자는 대답 대신 가지 줄기를 가만히 헤치고, 브래들리를 향해 살살 손짓했다. (지금은 현자라는 특수한 입장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나) 감히 손동작 하나로 도적단 머리를 이래라 저래라 불러대는 꼴을 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고 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순간 스쳐간 얼굴은 분명 있었다. 브래들리는 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허리만 휙 기울였다. 거친 동작에 현자가 살짝 놀라며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옆으로 흘러내린 그의 외투 자락을 가볍게 당기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처음에는 웬 막대기인가 했다. 현자는 좀 더 자세히 보라는 것처럼 가지 줄기들을 차례차례 헤쳐주었다. 가지런히 늘어선 모양과 곧게 선 줄기들을 보자마자 브래들리는 그 용도를 깨달았지만, 그래서 현자가 브래들리를 끌어내린 의도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현자는 딱 한 마디를 더한다. 네로가 한 거예요, 이거. 브래들리는 현자를 보았다. 현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실 저 농사를 별로 지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심는 것부터 가꾸고 수확하는 것까지 여기저기 물어봤었는데……. 그래도 놓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아하, 그 중 하나가 이거구만.”

“역시 쉽지 않네요. 생각보다 훨씬 힘들어요.”

“뭐, 그렇겠지. 나온 요리를 입에 집어넣는다고 그게 그 요리의 가치 전부는 아닌 것처럼, 말이지.”

초식은 싫다고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그게 그냥 땅 판다고 쑥쑥 나오는 것들도 아님을 아는 사람이었다. 풍족한 땅에서도 그럴진대 아무리 괭이질을 해도 부서질 줄 모르는 땅에서는 어떻겠는가. 현자는 어쩌면 그도 한때는 바닥을 향해 한참을 끝이 보이지 않는 타격을 가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법사를 인간에 빗대느라 생긴 오차를 다소 무시하더라도.

현자는 시선을 들어 텃밭을 둘러보았다. 첫 농사에서 이렇게 싱싱한 작물을, 이만큼이나 수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마법 같은 일이 있을까. 현자는 이것이 자신의 온전한 ‘첫 농사’는 아니었다는 걸 깨달아 버렸지만 조금도 얄밉지 않았다.

현자는 작업용 장갑 너머로도 느껴지는 가지의 매끈한 표면을 쓸어보다가, 꼭지에 가위를 갖다대고 힘껏 잘랐다. 똑, 소리와 함께 살짝 묵직한 채소가 바구니로 굴러들어갔다. 브래들리는 어느새 허리를 펴고서 아까까지 현자가 돌아본 텃밭을 새삼스런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 조금 먼 시선이기는 하다. 현자는 네로의 손-또는 마법이 닿았을 버팀목들과 구석구석 뒤집어진 흙, 고르게 뿌린 비료와 텃밭 구석 늘 깔끔하게 정리돼 있던 도구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똑, 똑, 소리와 함께 바구니를 채운 생각들을 세어보고서 영차, 팔에 힘을 주고 일어난다. 다음에는 토마토, 아니면 허브? 그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여전히 시선이 먼 브래들리 옆에 나란히 서자 튀어나온 것은 앞뒤 없는 한 마디였다.

“치사하네요.”

중얼거린 말에 이번엔 브래들리도 별 말 없이 킥 웃었다. 곧장 의미를 알아챈 것처럼. 누굴 두고 무슨 말을 했는지, 어쩌면 현자보다 먼저 알고 있었기에. 브래들리는 묵직해진 가지 바구니를 향해 손가락을 휘저었다. 선뜻 가벼워진 팔을 휘두르는 동안 바구니는 아까까지 브래들리가 앉아있던 그늘로 살며시 내려앉고, 대신 새롭게 빈 바구니가 현자의 품에 안겼다. 수확에 함께 참여하기는 커녕 손만 방아쇠 당기듯 까딱이며 한 번을 나란히 앉아주지 않는 그도 왜인지 얄밉지가 않다. 그에게 있어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곧게 편 허리, 숙이지 않는 머리, 내려다보는 시선이…….

그 사람도 그런 그가 좋았을까. 그렇지 않은 그를 상상하지 못했을까. 혹은 혼자 상상했다가 제풀에 상처받곤 했을까. …차라리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란 적이 있을까. 현자는 종종 그러듯 방향이 어긋난 질문을 삼키고, 토마토밭을 향해 허리를 숙인 채 잘 익은 것들을 신중히 골라냈다. 발갛게 물든 열매를 건드려보며 던져야 할 질문도 함께 골랐다.

“북쪽에서 말이에요, 브래들리. 도적단의 동료들과 함께 살았잖아요.”

“어, 그렇지.”

“그때 네로가…….”

“그거, 안 된다니까.”

“…브래들리의 파트너가, 식량을 담당했던 거죠.”

“식생활을 책임지는 위치였으니 당연히 식량 총괄도 그놈 손에 달려있었지. 왜?”

현자는 흘러간 말에서 ‘책임’을 살짝 곱씹었다가 삼켰다. 쭈그려 앉은 자리에서 흙냄새가 입가로 텁텁하게 피어올랐다. 비의 거리는 날이 선선한 편이지만, 비가 자주 오니 열매가 금세 무를지도 모른다. 현자는 손을 좀 더 부지런히 놀리자고 다짐하며 첫 토마토 꼭지를 비틀었다.

“그는 북쪽에서도 농사를 지었나요?”

브래들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 위로 무거운 구름이 지나가 그늘이 졌다. 구름의 색은 어두웠고 현자는 비가 오기 전에 토마토 만큼은 다 따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래들리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혹은 파트너를 진심으로 신뢰해서 그 분야에서는 손댈 생각이 없었기에 신경 쓴 적도 없는 것처럼, 오래도록 기억을 더듬었다. 한참 뒤에 낮은 목소리가 답했다.

“그놈은 가끔 그랬어. 당장 나와 함께 북쪽에 살고 있으면서, 북쪽이 아닌 곳의 이야기를 했지.”

“북쪽이 아닌 곳?”

“작물이 잘 자라는 땅. 도적은 할 수 없는 건실한 일. 평범한 손님이 드나드는 따분한 일상. 죽음을 모르는 나.”

“브래들리는 지금도 그렇게 굴잖아요.”

“반대지. 난 죽음을 알아. 죽음과 가까이 살면 누구나 알아. 하지만 그놈은 그걸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 죽음을 모르길 바랐어. 현자, 죽음을 모른다는 건 말이지, 죽음을 겪어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낙원에 간다는 거야.”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현자의 손 위로 문득 물방울이 맺혔다. 현자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비가 오고 있었다. 브래들리는 그 비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현자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외투가 바닥에 끌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휙 몸을 숙여 앉았다. 놀란 현자의 눈앞으로, 현자가 들고 있는 것과 꼭 닮은 정원가위가 떨어진다. 브래들리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더니, 그대로 토마토 꼭지에 갖다댔다. 현자는 뒤늦게 눈을 껌뻑거리다 물었다.

“도와주는 거예요?”

“망할 할배들이 시끄러우니까.”

“앗, 이것도 특별 사면에 포함되나요?”

“그래. 그러니 잘 봐두라고, 현자. 나 참, 귀찮게 익은 거 안 익은 거 구분도 해야 하고, 서서 할 일이 못 되는구만.”

그럼에도 브래들리의 손길은 현자보다 현저히 빨랐다. 현자는 잠시 멍하니 가까워진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치켜올라가는 눈썹과 날카롭게 쏘아보는 재촉에 허둥지둥 작업을 재개했다. 한동안 둘 사이에는 가볍게 줄기 끊는 소리와 빗소리만 울려퍼졌다. 귓가에 들리는 빗방울 소리가 생각보다 요란해서, 현자는 그제야 브래들리가 저들 위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에 젖은 잎을 몇 번씩 훑고 지나간 장갑만이 조금씩, 착실히 젖어들고 있었다.

둘이서 하니 수확은 금세 끝났다. 오이, 가지, 토마토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퇴장한 두 사람은 바짓단과 겉옷자락에 묻은 흙을 보며 웃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브래들리는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옷을 말끔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러기 전에 일부러 빗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얼룩은 고작 옅고 가느다란 빗줄기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브래들리도 그걸 알면서, 비 내리는 텃밭을 바라보는 것이다.

“비 때문에 텃밭이 망가지지는 않겠죠?”

“겨우 그런 걸로 망가질 거였으면 진작 없어졌겠지. 하지만 계속 길렀던 거잖아, 그 녀석은.”

현자와 브래들리는 빗소리에 묻히도록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대화했다. 그러고 보니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돌아다니면 관청에 신고당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리가 마법사의 낙원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속박하는 것이 그 무엇이건, 모든 갇힌 삶을 부정하는 브래들리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나 네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로 기대를 버리고 실망을 종용해 놓고서, 말없이 텃밭을 봐주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쉽게 의기양양하게 만드는 그는. 이 숨 막히는 거리를 편안하게 느끼며 영영 이름이 희미한 ‘점주’로 남고자 했던 그는.

‘갇혀있는 삶에서, 낙원을 본 걸까.’

브래들리가 주문을 외우자 길다란 총처럼 새카만 우산이 쑥 나타났다. 수확한 채소들은 자루와 가방에 적당히 나눠서 각자가 짊어졌다. 현자는 가방을 등에 지고 우산 안으로 훌쩍 들어갔다. 빗소리와 함께 몇 걸음 걷고서야, 브래들리가 비를 막아주는 마법이 아니라 우산 쓰기를 택했음을 눈치챘다. 브래들리도 비의 거리의 법률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지키기로 했다. 특별 사면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이번에는 현자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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