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약속

[피가현자]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

마호야쿠

✧ 피가로 친애스토리, 1주년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현자의 이름은 디폴트인 ‘마사키 아키라’로 칭합니다

✧ 현자의 과거 날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겨울 바캉스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아키라의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가 깜빡거렸다. 먼저 말을 꺼낸 아서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카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다들 현자의 마법사가 된 지도 꽤 됐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바빴고 고생도 많이 했잖아? 게다가 얼마 전에는 엄청난 일이 있기도 했고.”

“엄청난 일…….”

카인의 말에 아키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짧은 회상에 잠겼다. 확실히, 그랬었지. 희고 아름답던 그랑벨 성이 하루아침에 뾰족한 가시의 성으로 돌변해버린 것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얼떨결에 이 세계에서 현자가 된 뒤로 여러 지역에서 의뢰를 받아 각 나라의 마법사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긴 했지만, 그처럼 큰 일은 정말이지 처음 있는 것이었다.

“위기일발이었죠. 카인, 몸은 이제 정말 괜찮은 거예요?”

“당연하지, 아키라. 난 원래도 튼튼한 편이야.”

원래 있던 세계와는 달리 이곳은 마법이 있으니 상처를 씻은 듯이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으로 입은 상처를 마법으로 수복해도 정말 멀끔히 낫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봤는지, 카인이 웃음을 터뜨리며 아키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가로가 직접 봐준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아무튼, 정말 괜찮아. 시노도 이제 완전히 멀쩡해져서 날아다니던걸.”

“내가 뭘 어쨌다고?”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시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뒤따라온 히스클리프도 안을 기웃거리더니 아키라 일행을 발견하고선 밝은 미소를 지었다.

“현자님, 모두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안녕하세요, 시노, 히스클리프.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그보다 방금 하던 얘기는 뭐였지? 내가 뭐?”

가까이 다가온 시노를 향해 카인이 어깨를 으쓱이곤 가벼운 펀치를 날렸다. 그것을 재빠른 동작으로 잡아채며 몸을 반 바퀴 돌린 시노가 카인과 눈을 마주치고선 손을 탁 풀며 밀어냈다.

“뭐지, 카인. 아침 수련이 하고 싶은 건가? 나는 언제든 환영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수련은 나도 좋다만.”

“오비디우스 사건으로 입은 부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너와 카인이 가장 크게 다쳤었으니 말이지.”

아서의 대답에 아아, 하는 얼굴로 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짓 상처쯤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몸을 풀려는 시노를 보고 옆에 서 있던 히스클리프의 얼굴이 확연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를 본 아키라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무튼 다들 건강해졌다니 다행이에요. 그래서요, 아서?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주세요.”

“아, 네. 그러니까, 다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가 쌓였을 것 같아서요. 다 같이 휴가라도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겨울 바캉스 얘기가 나온 거군요.”

예의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서를 보며 아키라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자신도 비슷한 것을 떠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다만 휴가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이 아서라는 사실이 의외라면 의외였다. 아서라면 현자의 마법사들 전부가 강력한 마법사 하나의 함정과 계략에 빠져 옴짝달싹 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더욱 수련에 정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줄 알았는데.

“현자님? 왜 그런 얼굴을 하시나요? 혹시 싫으신 거면 말씀해주세요.”

“아, 아니에요, 아서. 저는 정말 좋아요. 꼭 필요한 휴식이라고도 생각하고요. 그런데 이런 휴가 제안을 아서가 했다는 게 조금 놀라워서요.”

아키라의 말에 아서가 어쩐지 뿌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제가 먼저 생각한 건 아닙니다. 다만…… 적당한 휴식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제 컨디션을 발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조언을 들어서요.”

“누구한테요?”

“오즈 님께요.”

“오즈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게 더 의외인데.”

“물론 그렇게 직접 말씀하신 건 아니야. 그냥…… 한참 수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찾아오셔서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시더군.”

오즈가 아서를 데려간 곳은 오로라가 잘 보이는 북쪽 나라의 어느 산중턱이라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낮에 아른거리는 오로라를 보았다고 아서는 말했다.

“원래 오로라는 낮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오즈 님과 함께 살 때도 그다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곳은 무슨 연유인지 낮 시간에도 제법 어둑했고, 덕분에 진귀한 것을 봤죠.”

“멋졌겠어요.”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을 만큼 멋졌습니다.”

아서의 얼굴에 떠오른 맑은 미소에 아키라의 입가에도 저절로 웃음이 따라왔다. 그래 보여도 오즈는 역시 아서를 몹시 아끼고 있다. 그리고, 아서야말로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겨울 바캉스라. 어디로 가는 건가요? 겨울이라 추울 테니까 따뜻한 곳으로 가나요?”

“그건 아직 못 정했어. 어디가 좋을 것 같아?”

“음…….”

다들 눈을 굴리며 겨울 휴양지를 고민하는 사이 늦잠을 잔 마법사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김에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자 싶어 한 명씩 붙잡고 이야기를 꺼내놓자 다들 꽤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리고 바캉스 장소에 대한 고민은 의외로 금방 해결되었다.

“온천에 가는 것이네, 현자여.”

“겨울엔 역시 온천이라네.”

“온천이요? 여기에도 온천이 있나요?”

익숙한 단어를 듣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한 단계 올라간 아키라를 보며 스노우와 화이트가 손을 맞잡고 웃었다.

“물론 있는 게야. 그렇게 반가워하는 걸 보니 현자도 온천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아, 네. 원래 살던 세계에서는 온천이 많은 나라에 살았거든요.”

“호호호. 그럼 두 세계의 온천이 어떻게 다른지 이번 기회에 경험해보는 것도 좋겠구먼.”

“좋아요!”

* * *

그렇게 현자의 마법사들의 겨울 바캉스 장소는 온천으로 정해졌다. 다만 마법사들의 자유로운 성향을 고려해서 참가 여부는 자율에 맡겨두었는데, 막상 출발하는 날 모아놓고 보니 전원이 참석한 상태였다.

“놀랍네요, 이건…….”

“저도 사실 놀라고 있답니다. 마법사 숙사의 마법사들 전원이 와줄 줄이야.”

클로에가 준비해 준 따뜻한 방한복의 옷자락을 여미며 샤일록이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북쪽 나라로 바캉스를 가자는 걸 북쪽 마법사들이 순순히 따라주다니.”

“아…… 스노우랑 화이트가 말한 게 설마 북쪽 나라 끝에 있는 건줄은 몰랐어요.”

“누가 알았겠나요. 가뜩이나 추운 겨울에 바캉스를 가는데 세상에서 가장 추울 것 같은 곳으로 가자니.”

아키라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을 본 샤일록이 파이프를 머금었던 입술을 부드럽게 떼며 눈을 접어 웃었다.

“현자님을 탓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저는 서쪽 마법사니까요. 껌뻑 죽을 만큼 신기한 일도 아슬아슬하게 위험한 일도 좋아하죠. 이번 바캉스 장소는 두 가지 모두에 부합할 것 같거든요. 듣기로는 비록 가는 길은 험난하지만, 그 부근은 온천의 따뜻한 기운 덕분인지 북쪽 나라답지 않게 상당히 온화하다죠.”

“저도 놀랐어요. 그런 곳이 있었다니.”

“이상 기후만큼 신기하고 위험한 일도 없어요. 물론 그 주변은 따뜻해서 괜찮다고 해도, 북쪽 나라는 보통 위험한 곳이 아니니까……. 알고 있었어도 다른 마법사 분들의 도움이 없으면 쉽게 가기 어려운 곳이겠죠. 아무래도.”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인간은 감히 살아남기를 바라기도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대기와 척박한 땅, 난폭한 원시 정령에 위험한 마법사들까지. 멋진 온천을 구경하겠다고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물론 마법사들 중에는 그런 것을 즐기는 이들도 많겠지만-그리고, 서쪽 마법사인 샤일록도 분명 그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확실히 북쪽 출신의 동행자가 있다면 편한 여행길이 될 터였다.

때문에 아키라도 내심 북쪽 마법사들이 이번 휴가에 함께 해주길 바라던 참이었다. 아서의 설득으로 오즈가 함께 가고, 장소를 제안한 스노우와 화이트도 함께 갈 테지만, 셋 모두 밤 시간에는 마법을 쓰기 어려우니만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북쪽 나라에 대해 잘 아는 다른 마법사가 있어줬으면 했던 것이다. 여차하면 이동 마법을 사용 가능한 미스라만이라도 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하아…….”

뒷목을 긁적거리며 졸린 눈으로 연신 하품을 해대는 미스라를 보며 아키라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휴가 계획을 전달하러 미스라의 방에 찾아갔더니 비어 있길래 어딜 갔나 했더니, 그는 루틸의 방에 있었다. 그날도 숙면에 좋다는 허브티를 질리지도 않고 들이켜고 있는 미스라와 루틸에게 이야기를 꺼내자, 예상한 대로 루틸은 꽤나 좋아했고 미스라는 단번에 귀찮다는 얼굴을 했다.

‘가뜩이나 추운 겨울에 북쪽 제일 끝까지 굳이 왜 가죠? 저는 안 갑니다.’

‘미스라.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오랜만에 다 같이 여행 다녀오면 좋잖아요?’

‘전혀요. 오히려 싫은데요.’

‘아니에요, 미스라 씨. 다시 생각해 보세요. 온천은 원래 피로회복에 좋은 명소잖아요? 그곳에 몸을 담그면 미스라 씨의 불면증도 조금은 해결될지 몰라요.’

‘……흠?’

‘그렇죠? 가능성이 있다면 뭐라도 해 봐야죠.’

……역시나 루틸은 미스라를 다루는 데 선수였다(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런 식으로 코가 꿰여서 끌려 온 북쪽 마법사들-브래들리와 오웬-을 보며 아키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어떻게든 다 모였으니까 됐어.

“뭘 보고 있는 거야, 현자님?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나도 알려줘!”

“무르. 아니요, 그냥…… 그렇게 큰 일을 겪고 났더니,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놀러갈 수 있다는 게 감회가 새로워서요.”

“현자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다시 모두와 여행을 갈 수 있다니 정말 좋아!”

구김살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클로에 옆에서 라스티카도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흔치 않은 일이야. 이렇게나 많은 마법사들이 다 같이 모여 함께 여행을 가다니.”

“그렇네요. 꼭 마법사 숙사의 모두가 아니어도 이런 대규모 일행은 보기 드물죠.”

“그런가요?”

“마법사들은 모두 다르니까요. 관심사도, 취미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그런 모두가 여기에 함께 모여 있을 수 있는 건, 전부 현자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스티카의 진심 어린 칭찬에 아키라의 뺨이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작은 것 하나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라스티카지만, 조금 전 고맙다는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도 더 진중하고 깊었다.

“맞아요, 현자님! 정말이에요. 현자님 덕분에 저희도 다 무사할 수 있었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현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으면 그날 저희도 큰일이 났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미틸과 리케가 따라서 감사 인사를 건네자, 주변에 서 있던 이들 모두가 한 마디씩 감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얼른 손을 내저었지만 인사는 쉬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해가 지겠군. 얼른 출발하지.”

결국 보다 못한 오즈의 한 마디가 있고서야 한바탕 감사의 물결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다들 옷 잘 껴입었지? 아무리 따뜻하다고는 하지만 북쪽은 북쪽이야. 여차했다간 큰일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피가로의 말에 모두가 제 옷매무새를 정돈했고, 곧이어 오즈의 마법으로 북쪽 나라의 숨겨진 온천까지 단번에 도달했다.

“으…….”

마법사 숙사 안에 감돌던 훈기에서 갑자기 해방되어 서늘한 겨울 공기에 노출되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공으로 하얀 입김을 흩날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추워! 엄청 추워! 진짜 추워!”

“무르, 빙판에서 뛰어다니면 넘어질 지도 몰라요.”

“여기가 온천 부근인가?”

“설마 온천만 덜렁 있는 건 아니겠지. 이 추위에 몸 누이고 잘 곳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이 정도는 추운 축에도 못 드는데 호들갑들이구만.”

오로지 북쪽 출신 마법사들만 이 정도면 따뜻하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하 웃으며 아키라는 코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건물과 그 너머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눈에 담았다. 그 범위가 제법 큰 것을 보니 스노우와 화이트의 말대로 모두가 들어가도 괜찮을 만큼 넓은 온천 지대인가 싶었다.

“오오, 다행히도 아직 그대로 있구먼.”

“혹시나 없어졌을까봐 조금 걱정했다네.”

“마지막으로 왔던 게 70년 전이니 말일세.”

“그때도 재밌었지.”

아니, 저기요……. 없어졌었으면 이대로 다시 마법사 숙사로 돌아가야 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스노우와 화이트가 반색하며 건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먼저 들어가 손짓하는 둘을 따라 모두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어? 안은 따뜻하네요? 마법인가?”

“정말. 그리고…… 꽤나 구색은 갖춰져 있잖아.”

다들 신기하다는 듯 내부를 휘 둘러보았다. 아키라 또한 생각 외로 본격적인 내부에 눈을 깜빡이며 놀라는 중이었다. 바깥과 달리 안은 제법 온기가 감돌았고, 잠을 잘 수 있도록 마련된 객실도 여럿 있었다.

“나름 숨겨진 명소니까요. 마법사들이 종종 찾아오곤 합니다. 물론 북쪽을 가로지를 만큼 힘이 있는 마법사들에게나 가능한 얘기지만요.”

“어느 사람 좋은 마법사가 그런 놈들을 위해서 이런 건물을 지어 놓은 거지. 적어도 북쪽 마법사는 아닐 게 틀림 없어.”

“뭐, 아무래도 좋아요.”

심드렁하게 대꾸한 미스라가 고개를 뚝뚝 꺾더니 그래서, 온천엔 언제 들어갑니까? 지금 바로 들어가도 됩니까? 라며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어……. 들어가고 싶으신 분은 바로 들어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온천이 꽤 여러 개라고 들었거든요. 나눠져서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아키라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스라는 빠르게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무래도 정말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빛깔이 다른 양쪽 눈을 가늘게 뜨며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현자님. 온천에 몸을 담그면 정말로 잠이 오는 효과가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네? 뭐…… 아무래도 따뜻하니까요. 노곤해지기는 하겠죠.”

“흐응. 온몸을 녹이는 독에 당한 시체처럼 흐물흐물 늘어지게 된단 말이지.”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겠네.”

눈을 빛내며 오웬이 곧바로 미스라의 뒤를 따라 나갔다. 설마? 싶어서 말리려는 찰나 카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저 녀석…… 아무래도 수상한데. 내가 따라가볼게.”

그리 말하고 세 번째로 사라진 카인을 황망히 바라보자 네로가 픽 웃으며 아키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걱정 마, 현자 씨. 여기까지 와서 무슨 일이라도 치겠어.”

“네로.”

“여차하면 다른 마법사들도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일단 즐겨. 현자 씨도 피로가 쌓였을 거 아냐.”

“……고마워요, 네로. 그래야겠어요.”

“뭘. 그럼 나는 온천에 들어가기 전에 간식거리라도 만들어 둘까. 주방이 저쪽이던가…….”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네로를 보며 아키라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네로? 여기 와본 적 있어요?”

“…….”

거짓말처럼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세운 네로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이런 구조면 대충 어디가 주방이겠거니 하고……”

“여, 네로. 여기 오랜만이지 않냐?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언제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려고 한…… 으악. 왜 이래?!”

“입 좀 다물어 봐!”

불쑥 나타나 어깨에 팔을 두르는 브래들리의 입을 가볍게 틀어막은 네로가 투닥거리며 주방(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향해 사라졌다. 그것을 지켜보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주변에 가득했던 인원이 많이 줄어 있었다. 아키라는 벽에 기대어 서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쪽 마법사들-정확히는 히스클리프와 파우스트-을 바라보았다.

“두 분은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계세요?”

“아. 현자님. 그게…….”

애매한 얼굴로 대답을 하려던 히스클리프가 때마침 객실에 짐을 놓고 나오는 클로에를 보곤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클로에. 혹시 부탁했던 거 가지고 왔어?”

“아! 그럼. 물론이야.”

밝게 웃은 클로에가 주문을 외우자 건물 안에 있던 모두의 손 위로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나타났다. 아키라도 얼른 그것을 받아들곤 들어올려서 살폈다. 가볍고 얇으면서 적당히 활동적인 홑겹 옷이었다.

“클로에? 이건 무슨 옷인가요?”

“응, 그거. 동쪽 마법사들이 맨몸으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온천에 들어가는 건 싫다고 해서. 여기에는 작은 온천이 많다고는 했지만, 스물 두 명이나 되는 인원이 각자 따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많은지는 잘 모르겠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 온천은 대부분 옷을 벗고 들어가는 곳이었고, 남녀 혼탕인 경우에나 옷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곤 했으니까. 하지만 온천을 가자는 말에도 모두가 복장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표현하지 않기에, 마법사들은 특별히 성별에 관한 개념이 없어서 괜찮은가 싶었는데……. 낯을 가리는 성향이 짙은 동쪽 마법사들은 역시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 가벼운 옷이라면 입고 온천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 준비해 봤어. 다른 마법사들이나 현자님도 필요할까 싶어서 전부 준비했는데…… 어때?”

“정말 고마워요, 클로에. 없으면 저도 곤란할 뻔했어요.”

클로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주변에 모여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모두 감사를 표하는 가운데 히스클리프와 파우스트의 감사가 특히 강렬했다. 두 사람은 옷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온천에 먼저 몸을 담그러 간 때 함께 하기는 꺼려졌는지 잠시 주변 구경을 하고 오겠다고 나섰다.

“히스. 함께 가지.”

“시노? 먼저 들어가도 되는데.”

“하? 내가 너 없이 혼자서 온천에 들어갈 리가 없잖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파우스트 님. 날씨가 춥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레녹스. ……멀리 가진 않을 거다.”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아닙니다. 제가 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다들 사이가 좋네……. 도담도담 이야기를 나누며 건물을 나서는 마법사들을 바라보고 아키라는 조금 뿌듯한 기분으로 미소지었다. 휴식 겸 친목 도모라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 같네. 마지막으로 루틸과 미틸, 리케까지 나간 뒤에야 아키라는 제 손에 들린 옷을 보고 짧은 고민에 잠겼다. 온천부터 들어갈까? 아니면 주변 구경부터……. 마음을 양팔저울 위에 올리고 기울여가며 빈 객실에 가벼운 짐을 내려놓고 나오는데 홀 안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피가로? 아직 안 갔나요?”

팔짱을 낀 채 투명하게 뚫린 창 너머에 시선을 주고 있던 피가로가 아키라의 목소리에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부드럽게 끌려 올라가는 입매가 그려내는 미소를 보며 아키라는 희미한 의문을 품었다. 이상하다. 이런 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피가로가 아닌데. 딱히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이렇게 다 같이 모일 일이 있으면 누구와든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는 것이 피가로였다. 먼저 함께 하자고 나서지 않아도 그를 찾는 이들이 많기도 했고.

“현자님이야말로. 왜 아직 여기에 있어?”

“뭐부터 할지 고민 중이었어요. 오랜만에 오는 온천이니까 다 같이 떠들썩하게 있는 게 좋을지, 아니면 혼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을지요.”

“어려운 고민인걸. 고민 해결사 피가로 선생님도 해결해 주기 어렵겠어.”

능청스레 답하는 피가로를 바라보며 아키라는 품고 있던 의문을 가볍게 꺼냈다.

“피가로는요? 뭐부터 할 건가요?”

“나는…….”

드물게도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않은 그는 다시 한 번 창 밖으로 시선을 줬다. 흐렸다가 짧게 맑아지기를 반복하는 변덕스러운 북쪽의 하늘로부터 옅은 빛살이 들이쳤다. 그 빛을 받아 선연히 드러나는 옆얼굴이 평소보다 조금은 서늘해 보였다. 피가로는, 루틸과 미틸이 없는 곳에서는 종종 이런 얼굴을 하곤 했다. 남쪽 나라의 선량한 의사 선생님이 아닌, 2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북쪽의 대마법사가 지을 법한 표정을. 아키라는 어딘가 멀게 느껴지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한낱 인간의 시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너머의 어딘가를 더듬는 듯해, 지켜보는 이의 호흡까지도 절로 고요해졌다.

얼마나 그 모습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을까. 나는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올까 해, 얕게 열린 입술 사이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는 것을 아키라는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현자님, 그동안 고생 많았지? 수고했어. 모처럼의 휴식이니까 마음 내키는 것부터 하나씩 해가면서 즐거운 시간 보내.”

다시금 남쪽 나라의 상냥한 피가로 선생님의 얼굴을 한 그가 빙긋 웃으며 아키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말을 마치고선, 평소와 달리 특별한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열며 나서려는 피가로의 소맷자락을 아키라가 덥썩 붙잡았다.

“현자님? 왜 그래?”

“저기, 피가로. 그…….”

무의식적으로 붙잡기는 했으나 막상 할 말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깜빡거리며 제 옷자락을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는 피가로에게 아키라는 두서 없이 말을 꺼내놓았다.

“멀리…… 가는 거예요?”

“음. 조금 멀지도 모르겠네.”

“혼자서 가나요?”

“응, 혼자. 왜, 현자님? 혹시 걱정돼?”

놀리듯 장난스러워진 목소리에 아키라는 오히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갔다가…… 다시 돌아올 거죠?”

모양 좋게 다물린 채 호선을 그리던 입술이 야트막하게 벌어졌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해 보이는 그에게 아키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혼자서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피가로는 대단한 마법사니까요. 그냥…….”

어디론가 훌쩍 가버릴 것 같아서, 그게 걱정돼요. 그런 말을 차마 꺼내놓지는 못했다. 피가로는 본인의 입으로 직접 어느 한 곳에 매여 있기를 싫어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무언가에 발이 묶이는 것을 꺼려하는 마법사들은 많았다. 마법사 숙사의 모두가 그렇게 같은 곳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실 놀라운 일인 셈이니.

그래서 아키라는, 자신에게 과연 피가로 같은 마법사들이 불쑥 이곳을 떠나려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는지 고민했다. 자유로운 그들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부탁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부탁하고 싶었고, 실제로 부탁하고 있었다. 모두 하나가 되어, 이 세계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피가로는 마치 아키라의 복잡한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어느새 풀어진 미소를 짓곤 문고리에 얹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몸을 반쯤 돌려 아키라와 시선을 마주한 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현자님한테 또 그런 말을 듣네. 지난 번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그랬었죠.”

“그때 내 대답도 기억해? 현자님?”

그날과 똑같이 고개를 낮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키라의 뺨이 가볍게 달아올랐다. 안 갈게, 네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에는. 그런 대답을 했었지. 조금 전 창 너머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멀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고집을 부린 것 같아 민망함으로 뺨이 홧홧해졌다. 선명한 기억을 되감아 넣으며 시선으로 바닥을 헤집던 아키라가 천천히 대답했다.

“……피가로의 말을 믿지 못한 게 아니에요.”

“하하. 알아.”

소리내어 웃은 피가로가 다시 몸을 똑바로 세우고선 손가락으로 제 소맷자락을 가리켰다.

“그럼, 성실한 현자님은 피가로 선생님의 옷을 언제쯤 놔 줄 생각이려나? 혹시 계속 붙잡고 있을 생각일까?”

“아.”

황급히 손을 풀어내자 다시금 웃은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어제의 날씨를 이야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같이 가도 돼. 현자님이 궁금하다면.”

“……정말요?”

“응. 사실 별로 대단한 델 가는 건 아니거든.”

“그럼…… 좋아요.”

방긋 웃은 피가로는 아키라를 향해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밖은 추울 거야, 그리 말하며 왼 주문의 효과는 확실해서 열어젖힌 문으로부터 들이치는 공기도 이전만큼 차갑지 않았다.

“고마워요, 피가로.”

“내가 제안한 거잖아, 현자님. 당연한 거지. 그리고, 가다가 현자님을 얼어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저희 얼어죽을 만한 곳에 가나요?”

“음…….”

긍정인 것만 같은 감탄사에 정말로 함께 가도 되는 것인지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저편에서 오즈와 아서가 나타났다.

“현자님! 어디 가시나요?”

“아, 아서. 잠깐 피가로랑 같이……”

“현자님은 나랑 데이트하러 갈 거야, 아서.”

“네? 데이트요?”

“……현자는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다만.”

오즈가 혀를 차더니 피가로와 아키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닫는 것을 보며 아키라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지만 아서의 당부 인사가 더 빨랐다.

“현자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피가로 님이 함께 계시니까 큰 일은 없겠지만요.”

“고마워요, 아서. 아서도 푹 쉬는 시간 되길 바라요.”

“……현자.”

계속해서 망설이던 것 같던 오즈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하고 되묻자 오즈는 미묘한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소중히 해라.”

“……네?”

“오즈. 설마하니 내가 현자님을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그게 아니라…….”

“자, 현자님. 내 뒤에 타. 상냥한 피가로 선생님 믿지?”

피가로는 어느새 빗자루를 들고 서서는 아키라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얼마나 멀리 가려고 빗자루까지 꺼낸 걸까? 그보다 피가로라면 마법으로 이동하는 게 더 빠를 텐데. 하지만 아키라는 모든 의문을 접어두고 망설임 없이 피가로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믿어요, 피가로.”

“하하. 이제야 믿어주는 거야?”

“원래도 믿었어요.”

피가로는 아키라를 안전하게 제 뒤에 태우고선 오즈와 아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키라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사이 두 사람을 태우고 가볍게 떠오른 빗자루가 쇄액 소리를 내며 높은 상공을 가로질렀다. 발밑으로 이곳저곳에 펼쳐진 온천들과 그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마법사들의 정수리가 보였다. 고도가 높아지자 이내 그들의 모습도 점처럼 자그마해졌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피가로?”

“도착할 때까지 비밀이야. 마법으로 이동할 수 없는 곳이라서 어쩔 수 없이 빗자루에 태웠는데. 춥진 않아, 현자님?”

“괜찮아요. 덕분에요.”

어디에 가길래 마법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걸까. 북쪽에서 나고 자라 오래도록 살았던 그의 말이니 이유가 있을 테지만. 물론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피가로와 함께 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나 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의지할 수 있는 마법사였으니까.

온천 근처를 벗어나자 공기가 한층 더 서늘해진 것이 느껴졌다. 빗자루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뺨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공기가 차가웠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고, 뺨을 매만져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는지 피가로가 고개를 뒤로 돌려 말을 걸어왔다.

“아까보다 추워졌지? 조금만 참아줘. 그렇게 멀진 않거든.”

“네, 알겠어요.”

은은하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리는 피가로를 보며 아키라는 문득 궁금해졌다.

“피가로는 춥지 않아요?”

“나 말이야?”

되묻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 있어 아키라는 곧바로 대답을 예상했다. 북쪽에서 태어난 대마법사인 나한테 혹시 춥냐고 물은 거야? 그렇게 말하려나. 하지만 의외로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글쎄…… 뺨이나 귀가 시리지는 않아.”

“…….”

이렇게나 불분명한 대답이라니. 오늘의 피가로는 역시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하지만 굳이 덧붙여 물어보지는 않았다. 어쩐지 도착하면 알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피가로의 말대로 목적지는 그다지 멀진 않았다.

이십여 분 동안 이어진 비행 끝에 고도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아키라는 발밑을 조심스레 내려다봤다. 검고 푸른 바닷물 사이로 옅은 잔디가 야트막하게 깔린 곶이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땅과 가까워지자 절벽 아래로 널따란 모래사장이 펼쳐진 것이 보였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하강한 빗자루에서 내려 발을 디딘 곳은, 위에서 바라볼 때보다 훨씬 깊고 푸른 물이 끝없이 넘실대는 바닷가였다. 아키라를 안전히 땅에 내려놓은 것을 확인한 피가로는 사박거리는 모래사장을 밟고선 찰박이는 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긴…….”

아키라는 할 말을 잃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 와서 놀랍고 신비한 것들과 수없이 많이 마주쳐 왔지만, 지금 제가 발을 디디고 선 공간은 다른 의미로 특별했다. 바다 자체는 아키라에게도 익숙했다. 하지만 까마득히 넓고 아득히 멀리까지 펼쳐진 이 해변에는 제가 익히 아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파제도 다리도 없는 날것의 바다는 고요한 공기 속에 파도를 울리며 그저 압도적인 광활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친숙하면서도 몹시 낯선 광경에 아키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선 채로 거센 바닷바람과 마주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여기에 오는 건.”

나직한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흘러들었다. 아키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는 아키라로서는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감상의 편린들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피가로가 고향을 뒤덮은 눈사태에서 홀로 살아남고서 잠시 머물렀다는 그 바닷가였다. 피가로의 마나 에리어이기도 한 장소.

“……얼마만에 오는 건가요?”

“글쎄. 이번엔 꽤 오래 됐지.”

싸늘한 바람에 나부끼는 푸른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피가로는 웃었다. 잿빛 눈동자는 다시금 하염없이 바다를 향했고, 아키라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한 걸음으로 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 탓에 해가 드러나지 않아 사위는 썩 밝지 못했다. 밀려왔다가 멀어지는 파도에 닿을락말락 아슬한 거리를 직선으로 걸으며 아키라는, 피가로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렴풋이 짐작해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제법 멀리 온 것 같았다. 점점이 이어지던 제 발자국이 바닷물을 먹고 스러져갔다. 뒤로 돌아 고개를 들자 탁 트인 모래사장 저 멀리에 여전히 피가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 손가락 한 마디 만큼 작게 보였지만, 그는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혹시 길이라도 잃었으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눈녹듯이 사라졌다. 피가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그를 믿는다는 건 진심이었다.

“피가로.”

괜시리 입을 열어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고개를 돌린 피가로와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치 저를 부른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피가로는 큰 키로 성큼성큼 아키라에게 걸어왔다. 거리가 제법 멀어 가까이 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고, 아키라는 그를 향해 마주 걷는 대신 그가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늘 적당히 굴고 대충대충 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할 땐 하는 마법사답게 피가로의 걸음걸이는 곧고 일정했다. 곧 아키라의 앞에 도달한 피가로는 여느 때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현자님, 언제 이렇게 멀리까지 왔어. 춥지 않아?”

“아…… 그러고 보니까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하네요.”

“얘기했잖아. 추운 바닷가에 살았었다고.”

밀물이 아슬하게 닿지 않는 모래 위에 어렵잖게 모닥불을 피워낸 피가로는 근처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자님도 앉을래? 별로 편하지는 않겠지만. 아키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그와 가까운 곳에 걸터앉았다. 모닥불의 온기 덕분에 추위가 한결 가셨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나무로부터 불티가 튀어오르는 양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자니 피가로가 말을 걸어왔다.

“현자님도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했지?”

“아, 네. 종종 갔어요. 아무래도 여름엔 훌륭한 피서지니까요.”

“겨울에는? 가본 적 있어?”

“글쎄요…… 있었던가.”

가물가물 기억을 되살려 보니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하하 웃은 피가로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선 가볍게 팔을 걸쳐놓은 채 말을 이었다.

“수영할 수 있는 바다였다고 했지. 현자님의 세계는 꽤 살기 좋은 곳 같아.”

“그런가요?”

“응. 나는 일부밖에 모르지만, 네가 했던 말들을 들어보면 그래.”

무엇보다,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게 어떤 기분인지 나는 잘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피가로는 마치 파도를 오래 맞아 잘 깎여나간 둥근 자갈처럼 매끈하게 웃었다. 그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를 물끄러미 보다가 아키라는 말했다.

“피가로는 여기서 어떻게 살았나요?”

“별로 특별할 건 없었어. 사람이든 마법사든 살아남는 방법은 비슷하지.”

으레 그랬듯 자연스레 말을 이어가려던 피가로가 문득 멈추고선 아키라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이 얘기도 현자의 서에 적을 거야? 그럼 예전 인터뷰의 연속이 되는 걸까?”

“……아뇨. 적지 않아요. 기록하고, 다음 현자님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서 묻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

“개인적인 호기심이에요. 피가로. 현자의 서에 적어넣을 수도 없을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요.”

피가로의 잿빛 눈동자에 불꽃이 번져 갈빛으로 아른거렸다. 아키라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곧게 마주보았다. 한참이나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피가로는 마치 백기를 들듯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현자님한테는 못 당하겠네.”

“그럼 얘기해 주실 건가요?”

“글쎄? 어떻게 할까나.”

“…….”

역시 피가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간을 좁히자 피가로가 고개를 기울이며 거꾸로 되물어왔다.

“오늘은 말고. 피가로 선생님의 오늘의 할 일은 현자님의 이야기 듣기야.”

“네? 제 얘기요?”

“그래. 비록 여기는 내 방도 아니고 술도 없고 달이 뜬 밤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하기엔 무리 없을 것 같지?”

“그렇게 말해도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뭐든지 좋아. 착실하게 현자의 서를 채워나간 우리 현자님은 이제 현자의 마법사들에 대해 많은 걸 알겠지만, 우리는 현자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

“좋아하는 음식이나 버릇 같은 건 알지 않나요? 제법 오래 함께 지냈으니까요.”

“물론 알지. 그리고 현자님이 얼마나 성실하고 상냥하고 올곧고 강한 사람인지도 알아.”

예고 없이 떨어진 칭찬에 아키라는 살짝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정말 대단한 건 여러분들인걸요.”

“글쎄. 대단한가? 강한 마법사가 꼭 대단한 건 아니야, 현자님. 나만 봐도 알잖아.”

“……피가로가 왜요?”

“강한 것과 대단한 건 다르니까. 으음, 그래도 나 정도면 핸섬하고 상냥하니까 꽤 대단한 축에는 들려나?”

“아, 네…….”

아무렇지 않게 또 저런 소리를 하네. 하지만 그런 모습이 평소의 피가로다워서 아키라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기념으로, 그가 바라는 대로 제 얘기를 조금 꺼내보기로 했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는…… 회사에 다녔어요.”

“회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을 하는 곳을 부르는 말이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전 현자님도 저랑 비슷한 처지셨던 것 같아요.”

“비슷한 처지라니. 재밌는 곳은 아닌가 보네.”

“아무래도 일을 하는 데 재미있지는 않죠…….”

하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곳은 아니었구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키라는 눈을 돌려 모닥불과, 그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회사에 다니기 전에는…… 피아노를 오래 배웠어요.”

“피아노? 정말?”

“네. 피아니스트가 되기엔 부족했지만요.”

“대단하네, 현자님. 나는 그런 덴 별로 재주가 없어서.”

“……피가로도 잘 못하는 게 있네요?”

“아아, 현자님. 나는 별볼일 없는 남쪽의 의사 선생님이란 말이야.”

“…….”

사실은 ‘피가로가 웬일로 그렇게 겸손한 말을 하나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조금 공손히 물었더니 또 바로 이런 대답이었다. 아키라의 표정을 눈치 챈 피가로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고는 주문을 외웠다.

“<폿시데오>.”

발치에 찰랑거리던 바닷물 위로 희게 빛나는 선이 한 줄씩 그려졌다. 너댓 뼘 정도의 길이로 퍼져가던 선은 이제 확연히 피아노 건반의 모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놀란 눈을 깜빡거리는 아키라를 흘긋 보고 웃은 피가로는 몸을 일으키더니 그 앞에 자리하고 앉았다. 일렁이는 바닷물에 신발과 바지 끝자락이 조금 젖어들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파도의 움직임과는 관계 없이 허공에 띄워진 빛나는 건반 위에 긴 손가락을 가져간 그는 아키라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간단하고 쉬운 곡을 연주했다. 짧은 연주가 끝나고 아키라는 박수를 쳤다.

“와아. 잘 치는데요.”

“질리도록 오래 살았으니까 말야. 마법으로 치면 더 잘 할 수 있지만…… 예술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부딪쳐야만 제대로 할 수 있는 일. 피가로에게 예술이란 그런 것일까,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피가로가 손짓했다.

“이제 현자님 차례야.”

“네?”

“말을 꺼낸 건 현자님이잖아? 책임져줘야지. 나한테도 한 곡 들려줄래?”

“안 친 지 오래 됐는데…….”

“괜찮아. 손 가는 대로 부탁해.”

망설이면서도 아키라는 피가로가 자리를 내어준 건반 앞에 앉았다. 무엇을 쳐야 좋을까, 그런 고민이 들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가볍게 건반 위에 올려진 두 손이 이내 경쾌하고 빠른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늘상 치던 피아노의 건반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지만, 오랜만이라 긴장한 것이 무색할 만큼 연주는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음을 울리며 빛나는 건반으로부터 손을 떼어놓은 아키라는 숨을 내쉬며 피가로를 돌아보았다. 마치 감상하듯 눈을 감고 있던 그의 눈꺼풀이 들어올려지고,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오랜만이라 제대로 못 친 것 같아요.”

“아니야. 훌륭한 연주였어, 현자님.”

이 곡은 제목이 뭐야? 이어진 물음에 아키라는 잠시 눈을 굴렸다.

“원래는 피아노 곡이 아니에요.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곡을 피아노로 편곡한 건데, 음…… 제목은…….”

어쩐지 말하려니 민망해져 뜸을 들이자 피가로의 눈매가 장난스레 가늘어졌다.

“뭐길래 말을 못 해, 현자님? 더 궁금하잖아.”

“아니. 그게…… 그냥 바로 떠오른 곡이라 쳤거든요. 그러니까……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유명한 오페라의 서곡인데…….”

아키라의 대답에 피가로는 꽤나 놀란 듯 드물게도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길게도 이어지는 웃음 소리에 귓가가 슬쩍 뜨거워졌다.

“그만 웃으세요, 피가로. 바로 생각난 곡이었단 말이에요.”

“아하하. 아, 정말……. 그래, 바로 생각날 만도 하네. 그런 제목이라면 나도 영영 못 잊겠는걸.”

“……네, 뭐어…….”

“유명한 곡이라고 했지? 왜 유명한 거야?”

“아, 작곡가가 대단한 천재예요. 저희 세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불세출의 천재거든요. 젊은 나이에 요절하기도 했고…….”

“이름이 뭔데?”

“모차르트요.”

헤에, 그런 이름이구나. 아키라는 여전히 웃고 있는 그로부터 시선을 돌려 조금 전 쳤던 마법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건반의 선을 그리던 빛살은 어느새 점점 옅어져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현자님은 좋아해? 그 모차르트라는 작곡가.”

바닷바람을 타고 흩날려가는 건반의 잔해에 나직한 목소리가 얽혀들었다. 아키라는 눈을 들어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빛의 길을 드리우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다른 사람이 제게 모차르트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글쎄,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좋아한다고 답해 본 적은 없었던 듯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언젠가의 미래에, 어느 날의 누군가가 제게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았다.

“좋아하게 됐어요. 오늘부터.”

햇살을 반사하는 아키라의 옆얼굴에 걸린 미소를 피가로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피가로.”

“왜, 현자님?”

“사실 아까 그거, 포핸즈 편곡이에요. 피아노 한 대에 두 사람이 같이 앉아서 치는 곡.”

“그랬어? 그걸 혼자 친 거야?”

“네. 혹시 반쯤은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나요?”

“그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

“그럼 다행이에요.”

“다음엔 같이 칠까?”

“네?”

“현자님이 나한테 가르쳐 주면 되잖아.”

“……생각해 볼게요.”

“생각만 해 보는 거야? 피가로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기회가 흔치 않을걸, 현자님.”

“네, 뭐. 그래도…… 같이 치는 건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요.

젖어들었던 바짓자락과 신발이 겨울 바람에 얼어붙었다가 느릿하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흐렸던 것이 거짓말처럼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태양의 반대편으로 점점이 그림자가 맺혔다. 그것이 서로의 키보다 길어질 때까지, 두 사람의 그림자는 백사장 위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W. A. Mozart Le nozze di Figaro, K. 492 Overture(4 h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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