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그 후의 일상 1
잘될 때나 혹은 안될 때나
- 네 이해합니다.
앞으로 적당히 기울여 경청하고 있음을 어필하던 상체를 세운 가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식적으로 입꼬릴 올려보였다.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맘을 담고 싶었으나 잘 전달이 됐을지는 솔직히 확신 할 수 없었다.
자의로 계획을 세워서 -뒷공작을 꾸미려는 계획이 아닌- 것도 순수하게 놀기 위한 계획을 세워서, 이토록 길게 일자릴 비웠다가 돌아온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행복과 들뜸의 부산물이 여태 머릿속 어딜 동동 떠다녔다.
그러게 현이 이동하는 것도, 시차적응을 하는 것도, 다 체력을 소모한 일일테니 하루쯤은 그냥 누워서 푹 쉬랄 때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 써머?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걸로....?
- 네? 아아. 네, 퇴사일정은 스칼렛이랑 조율해주세요.
떨떠름해 보이는 쥴스의 난처함과 당황을 나서서 풀어주기엔, 한참은 부족한 성의 내지는 관심이 자꾸만 자릴 벗어나고 싶은 피로한 발길을 보챘다.
- 쥴스. 제가 이해한다는건 쥴스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는 말이지 공감한다는건 아닙니다. 매니지먼트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하신다면 퇴사를 결정하실 수 있죠. 존중합니다. 다만 저는 그 리스크에 동의하지 않아요.
- 글쎄요....? 세상에 영원한게 있을까요.
부스스 웃으며 피로한 눈빛을 아래로 툭 떨구고 고개를 가만히 저어보인 가경은 잠시간 침묵했던 몸을 일으켰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집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쥴스 고맙습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목례와 함께 악수를 청했던 손을 내려 계산서를 집어들었다. 새로운 도전을 축하해준다거나, 레퍼런스 체크를 위한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다거나 하는 의례적인 일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가, 곧 흩어졌다. 휴가지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어렵고 불편한 자릴 만들어준 성의가 괘씸해서라도, 그 정도 애프터케어는 떠넘겨야 발뻗고 쉴 것 같아서.
- 나야
- 어 잘 끝났어? 어떻게, 설득은 좀 해봤고?
- 설득은 무슨.
- 으-응? 파트장한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이래 선배.
- 설득할 생각이었으면, 퇴사면담을 날 시키지 말았어야지 배타미.
쿡쿡 나즈막히 깔리는 웃음소리 옆으로 바스락- 종이 넘기는 소리에 더해 볼펜 굴러가는 보들보들 리드미컬한 소음이, 하던 일에 손을 놓질 못하고 잠깐 짬을 내서 전활받고 있는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 그래서, 소감은요?
- 배타미 자꾸 떠보지마. 넌 같이 일해봐서 알거 아니야. 우리가 만나는 사이라고 해서, 현이 맹목적으로 나한테 동의할 사람 아닌거. 너 알잖아.
- 어. 알지.
생각보다 즉각적인 대꾸에 그 다음 하려던 말이 목적을 잃고 기대앉은 통창에 부딪쳐 바닥에 털푸덕 나자빠져 맥을 놓았다. 뭐야. 업무지구 특성상 저녁시간이 다 되가는 카페는 한갓지고, 만연한 봄기운에 길거리 사이사이 핀 꽃송이도 맥없이 길바닥을 흩날렸다.
- 근데 선배는 아닐 수도 있겠더라고
- 뭐가 아니야
- 선배는 둘이 만나는 사이라. 그 만나는 사람이 차현이니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잖아. 아니야?
짜증날 정도로 허를 찔린탓에, 아니 정곡을 찔린 쪽에 좀 더 가까운 말이 가경의 대답을 늦췄다. 스슥 하던 필기음이 더는 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은 정적을 뚫고, 얼핏 가볍고 통통 튀던 목소리가 무감정하고 조용하게 수화기를 타고 넘었다.
- 그게 나쁘다는거 아니야. 그냥 선배도 준비할 시간 필요할거 같아서. 송가경, 어쩌면? 아니 당연한건가. 일하는 선배는 차현보다 내가 더 잘 알아요. 브라이언이랑 무슨 얘기가 오고갔는지는 몰라도, 선배가 나한텐 멋진 사수였고 파트너였던거처럼 차현한텐 브라이언이 그럴 수도 있어.
- 멋있었니
- ....아니, 야
- 너한테 멋있었으면, 현이한테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픽 코웃음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방을 챙겨든 가경도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그냥 몇걸음이라도 더 현 쪽을 향해 걷고 싶어진 탓에 얇은 코트를 팔에 두른채로 거릴 향해 나선 발걸음이 종종댔다. 진짜 못당하겠네 선배는. 다시금 가벼워진 타미의 목소리가 이 주제를 일단락 짓고 부턴, 또각또각 길 위를 걷는 구둣소리 속에 시답잖은 잡담이 오갔다.
- 나갈때 나가더라도 잡음 없게 정리나 잘해. HR이랑 얘기해서-
- 네에- 그런 잔소린 그쪽 파트장인 차현한테 하시구요. 선배 근데 너 나를 어-엄청 좋아하긴 하는구나. 알고 있었지만. 거의 차현급으로 좋아하는줄은 또 새롭네.
- 넌 지금 어디다 뭘 비교하니
- 그렇잖아. 나한테 멋져보이면 차현한테도 멋져보일거라니. 선배, 그렇게 생각하는건 선배 밖에 없을거다. 내가 갈대면 걔는 대나무야. 걔 나한테 내 신념 자.체.가 싫다고 한 애거든? 뭘 좀 알고 얘기를 하세요~
- 글쎄. 둘이 아주 죽이 잘맞는거 같은데.
부러 긁는 소릴 하면 하는 족족 발끈해 아닌 이유 101가지를 나불대고 있는, 그 지치지 않는 투쟁정신 마저도 똑 닮은 타미의 말을 흘려들으며 집 근처 꽃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 끊어. 나 거의 다 와가.
- 어 내일은 해야지.
- 아니 직접 얘기하라고 했어.
- 괜찮아. 안 괜찮아도 뭐, 숨길 일 아니잖아.
- 어 좀 끊어라 배타미.
성질머리 하고는. 와락 끊겨버린, 뜨끈해진 휴대폰을 대충 밀어넣는 가경의 시선이 바쁘게 샵을 살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 앞에서 슬쩍 버거운 꽃다발의 목이 꺾일까 조심조심 신발장에 내려둔 가경은, 훈기에 섞인 음식냄새에 웃으며 신발을 정리해 중문을 들어섰다. 피곤할테니 대충 있는거 먹자더니만. 선배엥- 금방 주방 쪽에서 톡 튀어나온 현이 이쪽을 향해 번쩍 팔을 들어보였다가, 휘둥그레진 눈을 하곤 보폭을 넓혀 순식간에 거릴 좁혔다. 길에 꽃이 많이 펴서- 바스락대는 포장지를 내민 가경은, 꽃다발이 아닌 저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개고 못마땅하게 삐죽대는 현의 기색 탓에 '니 생각이 나서' 준비했던 말을 삼켰다. 왜에...나 뭐 잘못했어?
- 아직 추운데! 이봐요 선배 손 얼었잖아요!
- 아니야..밖에 따듯해.
- 아이잇 선배 피곤하면 면역력 떨어져서 금방 감기 걸리면서. 이리와요 빨리.
한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쥐고 가경을 품 안에 넣은 현이 목덜미를 껴안고 등을 위아래로 마구 쓰다듬는 통에, 거의 겹쳐진채 휘청이던 가경은 자연스레 현의 허릴 감아 몸을 기댔다.
- 쁠리 거러서 안 츠어써
- 무슨- 머리카락도 차갑잖아요. 아니 코트는 왜 안 입고 들고왔어요. 차 안가지고 갔어요 선배? 아이참 데릴러갈걸. 전화하지!
- 즌하 바드면서- 와서
- 다 하구 나오면 되지-잇! 급한 일 있었어요? 누군데요. 배타미? 아 진짜 하루만 더 쉬겠다는데 이 조막만한게 진짜-
푸핫- 정말이지 누구랑 똑같이 잠시도 말할 틈을 안주고 몰아치는 현의 품 속에서 결국 웃음이 터져 큭큭대자, 어리둥절 멀뚱히 저를 쳐다보며 왜요. 묻는듯한 눈빛에 가경은 숨이 넘어갔다. 아 왜요오- 어깨를 기대듯이 붙든 손 너머로 들린 꽃다발에서 싱그러운 풀향과 달콤한 작약의 향이 하얀 얼굴에 가득찬 의아함과 당황한듯 머금은 웃음기에 뒤섞였다. 집 안 가득 흐드러진 봄기운에 온 마음이 다 어질였다.
-
왜 웃었는지에 대한 경위를 설명할래봐야 도무지 공감을 못 받을거 같아 대충 얼버무리려는 가경과, 암튼간에 그래도 알고싶다고 입술을 삐죽대는 현. 두 사람의 별 쓸모없는 공방은, 길에 핀 벚꽃을 보니 니 생각이 나서 사왔단, 준비했던 회심의 대사를 끈질기게 다시금 소환한 가경으로 인해 대충 마무리됐다. 손쉽게 돌려낸 관심은 딱 예상했던 만큼 좋아하는,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쑥스러워하는 리액션으로 이어져 가경을 뿌듯하게 했다.
눈썹 끝이 붉어져, 고마워요 선배. 웅얼댄 현이 꽃다발에 코를 뭍고 베시시 웃을 땐 버리기만 귀찮게 부피 크고 별 실용성 없다 생각했던 선물의 가치가 아주 달리 보였다. 더 자주 사줄걸. 저렇게 좋아하는데.
-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인데, 회사도 아니구 밖에서?
- 아아. 퇴사면담. 현아 CS팀 팀장 자리 다시 뽑아야겠더라. JD 준비... 일 얘기 하지말까?
- 쥴스 퇴사해요?
- 응 내일 가서 일정 조율해얄거 같아
그렇구나. 끄덕끄덕 별 반응없이 고갤 끄덕이는걸 물끄러미 표정을 살폈다. 무의식적으로 뒷주머니에 꼽아둔 휴대폰으로 간 손길을 보아하니, 이래저래 궁금한 것도 확인하고픈 것도 있는 것 같았지만 그대로 식탁 위에 뒤로돌려 내려두는걸 보곤 더 말을 얹지 않았다.
- 배타미의 폭정을 못 견뎠나~
- 머?
씩 웃어보이곤, 아니 고작 1주일, 그 틈엘! 장난스레 조잘대는, 본심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태도를 두고 가경은 망설였다. 왜냐고 물어보면 그대로 대답해줄 참이었다. 타미에게도 그랬지만 딱히 숨길일도 아니고. 다만 스치듯 지나가는 눈빛에 담긴 걱정, 내지는 염려가 저를 향한 것인지 아님 쥴스를 향한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굳이 먼저 말을 꺼내는게 어떻게 들릴지가 조금 저어됐다.
별로 아무렇지 않은데. 쥴스에게도, 타미에게도 말했듯이 자기가 걱정하는건 현이 아닌데. 자기가 먼저 그 말을 꺼내도 그렇게 곧이 곧대로 들릴까.
- 배타미 스트레스 받았겠다
- 그러게
- 선물, 사오길 잘한거 같애요 그쵸?
- 어.....음
딱히 그 선물을 좋아할까 싶긴한데.
뜨듯미지근한 가경의 애매모호한 반응에 굴하지 않고 사온 인형의 표정 중 하날 따라한 현이 움켜쥔 숫가락을 천장방향으로 들고 이익! 장난스레 포즈를 취해보였다. 콧잔등을 잔뜩 구기고 인상을 써보이는 잔망에, 가경이 픽 터져버리며 흩어진 분위기는 다시 앞전의 주제로 돌리긴 어려울듯 했다.
뭐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게 나을지도 모르지.
도로 손을 모으며 으음- 음미하는 두번째 표정을 보며 실없이 웃은 가경도 지금은 그저 흘려보내기로, 내일이면 또 정신없이 흘러갈 하루하루를 조금쯤은 미뤄두기로. 그쯤은 여유를 부려도 될 안온한 저녁을 현에게 맡기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ㅅ 'ㅋㅋ
장편이 되어버린 + 잔잔한 일상물이 된 그후일을 쓰다보니 이제 어느정도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닼ㅋㅋ
왜냐면 진짜 밥먹고 일하고 놀았음! 을 반복해서 쓰기엔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조..ㅎ
그렇지만 여태까지 데리고 오면서 캐릭터에 정도 많이 들었고, 사실상 이 스타텁을 상장시키는걸 결말로 하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있어서 새로운 스토리라인으로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기로 했어요 (근데 머 딱히 되게 다를건 없을듯) - 솔직히 ㅇㅔ피소드 자릿수가 3자리 되는거 좀 많이 부담스러운 것도 있음;;
앞서의 부분이 드라마 이후에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해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면, 뒷부분은 그럼에도 서로 정말 다른 부분들을 해소할 수 있을지에 집중할거 같습니다.
연애초엔 다 핑크빛이고, 걍 저 사람이 내 사람이기만 하다면 뭐든지 다 괜찮을 것 같지만 사람 사는게 그렇지가 않잖아요..?ㅋㅋㅋㅋㅋ 뭐 그런 이야기.
아무래도 인간으로는 이제야 막 자아를 찾은 송가경의 좌충우돌 삽질과, 인격적으론 훨 성숙하지만 송에겐 맹목적이기 때문에 고뇌하고 고민하는 차현의 얘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소재는 언제나 환-영!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ㅁ ' 즐거운 연말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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