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6

너와 소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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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름없이 느즈막히 퇴근해, 현의 정성이 가득 담긴 저녁을 함께 먹고, 각각 설거지며 식탁을 치우고 씻고 나와 각자 할 일을 하는 일상적 풍경은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그 안에서 잘게잘게 느껴지는, 신발 속 모래알 같은 어색함의 균열 같은 것이 가경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이게 저 혼자만 느끼는 어색함일까, 아님 실존하는 문제가 까슬하게 튀어나와 아무리 잘 정리해보아도 뜯어내기 전엔 입을 때마다 등 뒤를 신경쓰이게 하는 라벨 같은걸까. 서재에서 마-악 태블릿을 들고 나와 소파 앞 러그 위에 엎드린 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망설이며 한동안을 목적없이 머물렀다.


- 선배 지금있는 자원으로 인수는 가능하다 해도, 이렇게 되면 투자는 다 나가리 아니야? 저번 주총에서 이런 얘기 없었잖아요. 이사회 승인은 따로 진행한거 없죠?

- 아직은. 차차 설득할 재료들을 준비해서 구체화될 시점에. 이사회 승인은 지금 지분상 너랑 현이 동의하면 과반이니-

써머.

돌아온 가경의 시선은, 그때도 망설이며 타미 쪽을 향해있었다. 현을 바라볼 맘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호칭부터 뒷목을 찌르르하게 훑고 지나가는 어떤 종류의 예감에 덜컥 겁을 먹은것은, 차라리 타미에게 들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대답없이 맞은편 소파에서 한껏 시간을 끌며 다리를 겹쳐 올리고 자세를 고쳐앉는 그 새에 조금쯤은 갈무리가 되었길 바라는 가경의 맘이 초조했다.

- 지금 이 계열사 인수건은 ‘바로’를 등에 업고 KU를 피해서, 해외시장에 상장을 하려는게 목적인가요.

- …

- 국내에서 부딪치기 전에, 해외에서 충분히 몸집을 불리고 시장성과 경쟁력을 갖추고 돌아오자. 그 전략과는 배치되는 것 같아서요.

뭐라 끼어들 태세였던 타미가 한발 물러나, 하려던 말을 목 뒤로 삼키고 가경쪽의 대답을 기다린 것은 현이 가경의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기색이 명확하기도 했지만, 논쟁이든 추임이든 그 어떠한 말도 일절 받아들 생각이 없어보이는 태도 때문이 좀 더 컸다. 문제의 현상과 솔루션을 우선 파고드는 자신과는 달리 그 문제의 본질에 대한 대답을 들어야만, 그리고 거기에 동의해야만 움직이는 차현에게 답을 줄 수 있는건 어쨌거나 송가경 뿐이기도 하고. 입술 끝을 가볍게 물었다가 가만히 차현쪽을 응시하는 무표정한 가경의 표정에서는 글쎄. 타미는 얼핏 당혹을 읽어낸 것 같았다.

- 아니. 그런식의 편법으로.. 아 그보다 KU에 대한건 고려사항에 없었다. 쪽에 가까운 것 같네.

- 편법이 꼭 나쁠 것도 아니지 않아? 해외에서 몸집을 불리자, 상장하는 것도 결국은 방향성은 같잖아.

- 도망치는게 준비하는거랑 방향이 어떻게 같습니까 타미.

- 뭐, 기분에 대한 얘기라면 모를까. 비지니스에 장단만 놓고 보자면, 더 빠를 수도 있단 얘기지.

- 아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정말 맹세컨대 단 한순간도 그런 방향, KU가 있는 국내에선 사업하기 까다로우니 해외로 도망가잔 식의 생각이라곤 1초도 해본적 없던 가경은, 그래. 솔직히 말해 억울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쥴스가 퇴사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스타트업이라는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상황에선 리스크로 동작할 것이라던 그 말은, 이런 것까질 포함하는걸까. 애초에 굳이 더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심지어는 현마저도 당장에 일을 그만둔대도 두 사람 먹고 살 정도는 넉넉한 마당에 굳이 스타트업이란 생소한 길을 택한 이유를 현이 전혀 몰라주는듯한 것도 야속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다 스스로의 욕심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먹구름처럼 몸 안에 들어있는 관절이며 뼛속 깊은 곳까지 비를 뿌리고 나니 어쩐지 축 늘어진 솜처럼 더 변명의 말을 늘어놓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 연유로 앞뒤의 맥락은 다 모르는척, 그런건 아니야. 짤막한 대답을 현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제와 슬그머니 그 눈치를 보면서 지금 이 어색함이 현실일까 상상일까를 두고 고민하는 가경은 그 속마음이 궁금한만큼, 사실은 듣고 싶지 않은 본심과 싸우고 있었다.

- 선배 약 드셨어요?

- 어…어?

- 손목이요. 저녁약 드셨어요?

- 아니 아직.

움찔 일어날 태세를 하자, 앉아계세요. 살짝 웃어보이곤 거실바닥에서 떨어져 휘적이며 걷는 뒷모습에선 그 어떤 단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까의 사무실에서, 그럼 알겠노라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부터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 더는 가타부타 저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금방 물컵을 들고 돌아온 현은 받아들 요량으로 손을 내민 가경의 손바닥을 펼쳐, 들고 온 약을 올려두고는 옆에 나란히 앉아 무릎을 맞댔다. 무릎 위로 건내준 뜨듯한 물로 약을 넘기자, 자연스럽게 도로 받아다 바닥에 내려둔 현의 손길이 보호대 안을 가볍게 문질렀다.

- 답답하시죠? 자기 전엔 벗고 계실래요? 테이핑 해드릴게요.

- 괜찮은데-

- 해드릴게요.

으응. 평소 같았음 자기전까지 뭐 얼마나 된다고 테이핑을 하냐, 그냥 벗고 있음 안되냐 한번쯤 투덜거려 봤을걸 여전히 이 슈뢰딩거의 어색함에 긴가민가 하느라 순순히 알겠노라 팔목을 맡긴 가경은 현의 능숙한 손길을 잠자코 기다렸다. 자기쪽으로 아예 몸을 돌리고 가부좌를 튼 무릎 위에 손목을 올려둔채, 테이프를 크기별로 알맞게 자르는 현. 물끄러미 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뒷부분의 종이를 제거하려다 말고 고갤 들어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는 얼굴이 다감했다. 괜찮아요 아픈거 아니에요. 속삭이듯 작게 달래는 목소리는 아무래도 다른쪽의 오해를 사게 만든것 같아, 가경은 고갤 끄덕였다.

팔목을 조심히 들어올려 다리로 받쳐두고, 세상 정성스럽게 마무리를 한 현은 마지막 끄트머리 부분이 들뜨지 않도록 살며시 누른 손목 위로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입가가 부드럽게 올라가 테이프 위로도 보드랍게 닿았던 입술이 그대로 팔목을 타고 올라 당기며 몇 번쯤 더 닿아오자, 자연스럽게 현의 옆구리쯤을 안듯이 붙든 가경은 남은 왼쪽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소파 뒤로 기대고, 팔을 앞으로 뻗어 기다리고 있는 가경의 말없는 요청을 현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한 번을 놓치지 않고 매번 그래왔듯 금방 몸을 일으켜 가경의 위쪽으로 자셀 바꿨다.

가경의 팔이 허리를 감은 안정적인 무게감이나, 올려다보며 살짝 풀어진 표정 같은것들. 명치 아래쯤이 찌르르 꼬이는 기분좋은 열감이 퍼지자, 충동적으로 가경의 쇄골쯤에 머릴 기대고 깊게 숨을 마신 현은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이 평소에 비해 뭔가 좀 맥이 없음을 느꼈다. 이 자세에 이쯤이었음, 벌써 그 손이 엉덩일 만지작대든, 얇은 홈웨어 안으로 들어오든, 심지어는 현에겐 장난기도 많고 짓궂은 편인 가경이 벌어진 밑을 대놓고 공략했어야 됐을텐데.

- 선배

- 응

- 오늘 병원도 다녀오고, 미팅도 많고 좀 피곤하죠.

- 아니 괜찮아

흐음. 꿇어앉듯이 자셀 낮춰 살짝 가경의 허벅지 위로 무게를 싣고 코앞에서 빤히 눈을 마주치자, 댓번에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리는걸 현은 어깨를 당겨 안았다. 안괜찮은데. 괜찮은데. 아닌데. 맞는데. 무의미한 공방에도 목소리가 힘이 없는걸보니 아닌게 아닌것도, 피곤한 것도 맞는데 별로 말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 선배, 알죠? 저한테는 우는 소리 해도 되는거. 아까 우리 얘기한거.

- ..안아줘.

이미 안겨 있으면서 안아달란 요청이 이상할 법도 한데, 아무런 내색없이 어깨를 둘렀던 팔에 꽉 힘을 주고 더 가깝게 껴안아 매미처럼 달라붙은 현의 등을 쓰다듬었다. 따듯하고 무겁고, 갈비뼈는 좀 부러질거 같고. 양옆으로 가볍게 흔들흔들 움직이며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틀어 목덜미에 뺨을 부비는 어리광과 달램이 반반쯤 섞여있는 이 포옹이 몸속의 불안농도를 조금씩 조금씩 옅게 희석했다.

소금물 문제같아. A 비커 안엔 30% 농도의 소금물 100ml가 B비커 안엔 맑은 물 200ml가 있을때, 이 둘을 섞으면 몇 퍼센트의 소금물이 될까요.

소금물에는 아무리 물을 타도 농도가 연해질 뿐 여전히 소금물이란 사실을, 국민학교 때 배웠던 것 같은데. 나의 소금물은 도대체 몇 리터고, 현의 맑은 물은 어디까지 희석할 수 있는걸까. 뜨끈뜨끈한 몸이 위에서 느릿하게 좌우로 흔들리면서 심박이 쿵쿵 가슴을 타고 전달될 때마다, 조금씩 옅어지는 농도감이 그만큼의 졸음으로 떠올라 수면위를 덮었다.

- 현아

- 네에

- 현

- 넴

- 현아..

작고 가물가물해지는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반복해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금씩의 변주를 주면서 넵, 넹, 네엥, 여기요, 웅, 하잇- 이런저런 대꾸를 해주던 현은 마침내 등허리에서 마주잡고 있던 손이 툭 풀리 때쯤 뻐근한 무릎을 살며시 펴보았다. 약기운이 돌았는지, 잘시간에 비해선 꽤나 이른 밤에 벌써 깊은 숨을 내쉬고 있는 가경이 갑작스러운 한기에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옆에 놓인 무릎담요를 어깨 위까지 끌어 덮었다. 그러는 내내 불편하게 굽히고 있느라 굳은 무릎을 펴는 동시에 피가 돌면서, 찌릿찌릿 종아리며 발 끝에 감각이 돌아오는걸 낑낑대면서 살며시 일어나 바닥에 좀 앉았다가.


꽤 한참 가경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던 현은 슬슬 이쯤되면 움직여도 깨지 않겠다 싶을 때쯤 침대로 안아다 옮겨놓았다. 무의식중에 자기 티셔츠를 붙든 가경의 손목에 다시 보호대도 해놓고 이불도 덮어주고. 아니라곤 해도 아파서 울기까지 했을 정도면 몸도 꽤나 피곤했을테고, 브라이언과의 미팅으로 쌓인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한몫을 했겠지. 그 망할놈의 KU가 망령처럼 가경의 뒷꽁무니에 붙어 흔드는게 아니라는 확언은 들었지만,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무수하게 많을듯한 스트레스 상황이 현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 모든 상황에서 ‘스칼렛’인 자기자신과, ‘차현’인 스스로를 어떻게 분리시켜야 가경에게도, 그리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신과 가경과의 관계가 회사에 있어 리스크다 라는건, 자기가 그만큼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했거나 하다못해 그래보였다는 것일테고, 그 사이에서 딱 맞는 균형점을 찾는 일은 어쨌거나 자기 자신의 몫이라 현은 생각했다. 당초 시작부터, 자신있다고 큰소리쳤던건 본인이니까. 공사에 구분은 걱정마셔라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 막상은 닥친 일에 정신이 없어서, 이 관계에 대한 행복감에 젖어 사실 그 어떤 적극적인 노력도 하지 않은건 사실이니까.

서재의 노트북을 켜놓고, 매각된 계열사의 공시자료와 사업의 내용을 훑어보고 그동안은 가경에게 맡기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렙유의 자산규모와 배당된 스톡옵션의 현황 등을 차례차례 머리에 입력중인 현의 밤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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