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8

먹구름이 드리워진 이 좁은 회의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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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다문채로 꼬고 있는 다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현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타미를, 가경은 옆눈으로 살피며 업무수첩에 무의미한 줄을 몇 개 더 그었다. 생각보다? 예상외로? 아니. 어떤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도 그다지 잘 어울리진 않을터였다. 일하는 현의 ‘스칼렛’ 본업 모먼트 같은 것을 자기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입사 초반, 하필 사내에서 제일 주목받는.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체계도 규모도 한참은 부족한데 비해 비전과 포부만큼은 대기업에 견줄만한 ‘바로’의 사원급이 하기엔 분명 갈릴데로 갈리고 인정 받긴 어려울 프로젝트를 맡았던 현. 그게 가경에겐 일하는 현에 대한 첫인상이자 거의 마지막 업데이트나 마찬가지였다.


현이 첫 대형 프로젝트를 맡게 됐던 날, 그 날은 꼭 오늘같이 봄볕이 노곤해서 저- 먼쪽에서부터 방긋방긋 웃으며 뛰어오는 현은 벌써부터 반팔차림으로 밤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 선배-

- 현아. 왜 뛰어와. 천천히 오지. 안춥니?

- 윗옷 회사에! 저 이따가 다시 들어가봐야 되가지구

- 다시? 얘기하지…. 바쁜데 괜히 불러냈나보다.

- 에이~ 아무리 바빠도 늘! 선배랑 밥먹을 시간은 있죠. 저 오늘 선배랑 저녁 먹는다구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런 소리 마세요

그때 당시 가경은 홍조까지 띄워가며 모션이 커진 현을 두고, 사회초년생이라 아무래도 맛있는거 먹으러 가는게 신이 났는가보다. 뭐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나 눈치가 없는지. 그치만 또 못해도 2-3인분은 뚝딱 해치워 가면서 역시 유니콘은 대기업이라 복지가 너무 좋다 감탄하는 차사원이었으니, 그런 착각이 오해라고 만은 못할 일이었다. 그게 법인카드로 결제할 식대라 철썩 같이 믿고 히죽이며 디저트 메뉴를 들여다보는 현 쪽도 심각하게 눈치가 없는건 매한가지기도 했고. 이쪽도 오늘 저녁을 기대하던 통에 퇴근은 앳저녁에 했는데 그럴리가.

함께 밥을 먹으면서 왜 그렇게 바빠졌는지를 설명하는 두 눈에 온통 대롱대롱 맺혀있는 그 흥분과 열기에 대해서는, 한편으론 걱정을 했으면서도 가경은 대체로 동조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과 패기, 그건 당시의 가경이 한창 빠져있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 이후에 따라 붙어야만할 성취와 도약을 위한 모멘텀을 경험하지 못할까봐, 당시에나 할 법한 그런 걱정들을 속으로만 머뭇대며 현을 축하해주던 시기가 있었다.

- 그럼 한동안은 바빠서 못보겠네 우리 현이. 이왕 하는거 멋지게 잘해봐. 틀림없이 잘할거야.

- 저 진짜 완전 기대하고 있어요. 포탈에서 페이지뷰를 견인하던 전통적인 공식들은 앞으로 완전히 깨질거에요 선배. 차갑고 무감정한 인터넷 세상에서 개인과 개인을 묶어주는 네트워크로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요? 두고보세요. 제가 베타 테스터로 등록시켜 드릴게요!

경쟁사 직원, 그것도 일찌감치 리더풀에 들어 이래저래 회사에 중차대한 일에 의견 꽤나 내고있는 자길 앞에 두고 곤란할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현이 좋았다. 그래서 뭣도 모르고 정말 잘되기를 맘속으로 빌었다. 저렇게나 기대와 열정에 가득차 어쩔줄 모르고 설레여하는 애가, 것보라고 선배.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고, 자랑스럽게 잘난체를 해주길 바랬다. 우리 둘 다 그때는 어찌나 나이브 했었던지.

-

가경이 입사 후 바빠지고서 부터는 조금씩 뜸해지긴 했지만, 정기적이던 연락이 차츰 줄어들다가 몇 번쯤 생각보다 간격이 길어진 메시지가 새벽녘에야 답이 오는걸 반복했다. 같은 업계에 있다보니 그쪽에서 준비하는 아이템이 뭔지도 얼핏, 그리고 그거 한다고 지금 거기가, 어디 어디를 누르고 새로운 포탈의 등대가 되었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귀동냥도 조금. 자긴 체력 빼면 시체지 않느냐 웃던 현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보며 괜찮겠지 싶다가도, 새벽 2시가 넘어 ‘내일 비온대요 선배. 우산 꼭 챙겨요’ 하는 평이한 답장에서 피로의 기미를 찾아보려는 삿된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조금 더 빨리 연락을 했었더라면 좋았을까. 가경은 내심 자기가 언제 연락을 했든, 혹은 하지 않았든 고집세고 책임감 있는 현을 말릴 도리는 없었을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치만,

- 현아 너 목소리가 왜 그래

- ..아 크흠- 아- 아-, 그냥 오늘 말을 별로, 안해서 그래요.

- 너. 울었니?

- ..

- 현아

- 현아, 너 어디야

영 대꾸가 없는 핸드폰이 끊기지 않았다는건, 감이 멀게 들리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누르는 흐느낌 같은 소리 때문이었다. 가경은 지금도 그땔 생각하면 마음이 좋질 않았다. 화려하게 오픈을 하더니 베타 테스트 기간부터 이미 사용자가 폭증해 서버를 다운시킬 만큼의 저력있는 서비스가 가경을 왠종일 바쁘게 만들어 발뒤꿈치를 못붙이게끔 했었단 사실도 별 위안이 되질 않았다. 그럼 그만큼 그 서비스 담당자가 얼마나 바빴을지,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 짐작을 못했다기엔 너무 많은걸 알고 있어서 더욱 더.

말을 똑바로 못할 정도로 흐느끼고 있으면서도 아닌척 괜찮다는걸, 몇 번이나 다그쳐 겨우겨우 어디있는지를 알아내고서도 바로 가보지를 못했던 것도 후회스러웠다. 이제 막 직함이 바뀐 명함을 아직 채 자리에 수령도 못한, 송과장. 위와 아래를 두루 살펴야 하는 허리와 같은 그 직급에서도, ‘서비스 전략본부 전략기획팀’ 소속. 지금 바쁘다 못해 쓰러져 병원이라는 경쟁사 직원 얼굴 보러 가기엔, 거기에 대한 전략을 세워 보고해야될 사람이 본인이었으니까.

급한 일 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백업 해줄테니 가보라는 똑부러지고 일머리 좋은 부사수의 배려로 겨우 몸을 뺀 늦은 저녁. 가경은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두르면서도 사실 현이 아직 거기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심란할 터였으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딱히 방향이 없는 기원이나마 꽤 간절했던지, 이름을 댔을 땐 갸웃하던 야간진료 창구 직원은, 키 크고 머리가 긴데 얼굴은 하얗구요. 하는 횡설수설 맘만 급한 설명을 듣고도 현의 베드를 찾아주었다.

너 이게 뭐야.. 저도 모르게 잠든 얼굴에 대고 듣지 못할 질문을 하는 가경에게 설명이 필요해보였는지 짧은 브리핑을 해주는 내용이 가관이었다.

[ 과로랑 수면부족이 겹치셨어요. 요새 몇일 건너 계속 수액을 맞으러 오셔가지고. 충분히 휴식 취하셔야 된다고 했는데, 듣질 않으세요~ 오늘은 또 오셔가지고 계속 노트북으로, 그 참 안된다니깐, 암튼 그러다가 주사 놓은 팔 다 땡땡 부어가지고 수면성분 조금 넣어드렸어요. 워낙 건강체질이라 그나마 버티고 있지, 지금 좀 위험한 상태라 ]

도대체 얼마나 자주 왔길래, 친분을 여과없이 드러내면서 ‘으이구 진짜 말 안듣는 환자!’ 속삭인 선생님이 나가고난 뒤, 가경은 그 베드 옆, 지나치게 익숙해서 견디기 힘든 구도의 현을 억지로 꾸욱 손톱 끝의 연한살을 짓누르며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눈은 푹 꺼져 다크서클이 내려온, 길지도 않은 사이에 반쪽이 되가지고는 깊게 잠든 얼굴이 낯설었다. 도대체 회사 그깟게 뭐라고. 서비스 런칭 그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정말 이 바보같은게.

이마쯤에 얹은 손으로 뜨끈하게 덮혀진 열이 옮아붙었다. 아..현아. 베드에 뺨을 대고 기대앉아 깊은 숨을 몇 번 들이쉬어도, 평소 현에게서 나던 폭신하고 안정된 향이 아닌 무감하고 차가운 소독약 냄새같은 것만이 떠도는게 가경을 견딜 수 없게 했다. 속썩인다 정말.

- 선배?

엎드려 있어 드러난 목덜미 위로 뜨겁고 보드라운게 가볍게 스쳤다. 잔뜩 잠겨 힘없는 목소리 속에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스쳐 가경의 눈시울을 자극했다. 숨을 뱉고 고개를 들기 전에 갈무리한 감정을 애써 누르며, 어색하게나마 웃는 표정을 지어보이는게 그때는 최선이었었지.

- 체력 빼면 시체라며

- 지금은..음. 그냥 시체..ㅎ

이게 까불어, 꺼칠해진 볼을 가볍게 누르자 푸쉭- 바람빠지는 소릴내며 웃는 얼굴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눈을 부비는 손 끝을 흔들었다.

- 현아..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얼굴이 이게뭐야.

- 그러게요..

- 현이 니가 이렇게 쓰러질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겠어

- ..그러..니까..요.

울음을 누르는 띄엄띄엄한 대꾸가 아니어도, 손바닥으로 가린 눈밑이 벌써 축축했다. 솔직한 말로는 화가났고, 너 혼자 일하느냐 따지고 싶었고, 그딴거 다 집어치우라고, 유니콘으로. 내 밑으로 오라고. 그까짓 기회 수도없이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싶어 입 안을 씹었다. 선배. 더듬더듬 저의 손을 찾아 손목을 붙든 현 때문에 덜컥, 숨을 마시고 멈추었던 가경은 자기 머리 위로 올려놓는 손길에 얌전히 붙들린채 힘을 빼보았다. 무슨..?

- 고생..했다. 해주세요.

- ..현아 고생많았어

- 열심히 했다고... 잘햇다..고..그때처럼. 선배.

그때가 어느땐지 모를리 없었다. 쨘. 성적표를 펼쳐들고 3층 자습실까지 찾아왔던 너는 햇살처럼 웃고 있었는데, 왜 울어 울기는. 얹혀진채 갈곳을 잃었던 손으로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동안, 시트를 이마 끝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뽑아버릴 기세로 힘주어 누르고 있는 현의 울음이 자꾸만 목 끝에 걸려 목소리가 갈라졌다.

- 잘했어. 현아 정말 멋있다. 그동안 힘들었지? 진짜. 너무 잘했어. 응? 그러니까 그만 울어. 먹을거라도 좀 사다줄까? 현아. 현아..듣고 있니? 고생 많았어. 그니까 그만 울자.

고갤 흔들면서 새우마냥 몸을 구부려 이쪽을 향한 하얀색 시트 위를, 가경은 도닥도닥 문질러대며 눈을 세차게 깜빡였다. 울지마. 제발.

-

본인은 다 울고나서 후련해졌는지, 멋적게 헤헤 웃으며 조금 피곤했나봐요.. 말 끝을 흐리는 현에게 가경은 같이 웃어보일 밖에 도리가 없었다. 자기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다들 너무 바빠서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든가, 그렇게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하니 모든 사람이 저만 찾는 바람에 이제는 그 모든 히스토리를 자기밖에 모르니 어쩌겠느냐. 그런 얘기들엔 굳이 반박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격이 없다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뭣보다 피곤해 꺼진 두 눈을 여전히 반짝이며 그래도 제새끼 제가 챙겨야죠. 하는 다부진, 하지만 얇아져 앙상해진 어깨에 대고 무슨 말을 해얄지 모르겠어서기도 했다. 도울 수도, 꺾을 수도 없는 의지 앞에서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 속으론 민대표에게 저주를 퍼붓는대도 겉으론 그저 너무 무리하진 말라는 무의미한 응원이나 하는게 당시 가경의 뼈아픈 위치였다.


그러니 그 책임감도, 외적인 강함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강한 의지도, 꽤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뿐. 그 담부턴 자꾸만 걱정스러워 하는 가경에게 일 얘기는 대충 얼버무리는 현과, 계속 보려면 우리 일 얘긴 안하는게 좋지 않겠냔 가경의 니즈가 맞아떨어져 팔로업이 더뎠다. 당차고 날카로우면서도, 재기발랄한 그 방식은 현에게서가 아니라, 이를 가는 타미에게서 전해 들었으나. 그 내면의 선함이 함께하는 동료로 향하는 마음 같은건 모쪼록 잘 몰랐다고 봐얄듯 했다.

- 물론 공개된 자리에서 공유를 한다면, 계약이 이뤄지기 전에 외부로 소스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거 십분 이해합니다. 그치만 반대 시나리오는요. ‘바로’는 이걸 어디까지 공유할까요? 임원까지? 법무팀까지? 아님. 새로 만들게될 ‘신규사업 TF’ 까지? 이게 돌아서 우리 회사 사람들 귀에 들어오는건 얼마나 걸릴까요?

- 무슨 말인진 이해했습니다. 이해하는데.

- 이 합병. 다른 것보다 직원들 스톡옵션에 대한거. 써머 그게 제일 쟁점이 될거에요

- 스톡..

- 문 닫을 정도의 기업가치를 갖고 있는 회사를 통해 우회상장 하면 발행헸던 스톡의 평가가치는 박살이 나니까요

- 그게 문제가 되나. 어디까지나, 스톡옵션이라는건 회사의 미래 가능성을 함께 만들자는 약속의 의미 아닌가.

- 네. ‘함께’ 요

힘주어 강조하는 현의 눈빛은 그때처럼 여전히 반짝이고 여전히 엄격했다. 이젠 그 어떠한 일이든 함께할 자격도 생겼고 더 해줄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게 생긴 이 시점에서, 그러나 망설일 수 밖에 없는 가경의 입장이 난처했다.

- 타미는요. 그쪽에서 TF를 만들면, 대응하는 쪽은 프로덕트가 될텐데.

- 그렇겠죠

- 구성원에게 미리 공유하지 않으면 리스크가 있을거 같니

- 있겠지. 근데 그 리스크, 나는 언제든 결국엔 터질 리스크라고 봐. 최대한 미룰 수 있음 미루는게 맞지 않나.

- 미룰수록 더 커지겠죠

- 그렇다고 시작도 전에 줄줄이 퇴사하면 좀 나은가? 지금 발행한 스톡 미리 행사할 수 있는 인원이 몇이지. 초창기 멤버들 대부분, 슬슬 30% 행사할 수 있는 시점이 다 돼가요. 그 사람들 거의가 다 프로덕트야

- 그럼 그 사람들이 수익내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미리 막는게 맞아? 그럴지도 모른단 사실을 알고 있는데? 타미 이게 맞아요? 타미가 직원이었어도, 동의할 수 있냐구요

- 아니. 근데 난 지금 직원이 아니잖아. 회사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임원이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에요 스칼렛.

길게 봤을 때, 함께 일하는 임직원의 만족도를 고려하지 않은 회사가 오래 갈 수 있겠느냔 현의 반박과 스타트업에서 그 모든걸 다 갖추고 갈 수는 없는 일이란 타미의 주장 사이에서 가경은 망설였다.

이 모든 일의 목표. 그 끝. 가경에게 그 마지막 지점은 타미와도 심지어는 현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가경의 입장에선 필수불가결해 보이는 희생이 현을 실망시킬게 두려운 맘이 어두운 망설임을 먹구름 처럼 드리웠다. 그 마지막 지점이 타미에겐 이기적인 결정일 것이란 점도 마음이 불편해 둘 모두에게서 반발짝 떨어진 저의 위치가 조금쯤은 외롭기도 했다.

어디까지를 말할 수 있을까.

그걸 너에게 난. 이해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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