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2

갈 사람은 가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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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는 습관적으로, 아니 습관이라기엔 얼마되지 않았지만 넓직한 책상 오른편 꽤나 한가득 자릴 잡고 앉은 퐁실퐁실 하얀 무민 인형의 귀때기를 손 끝으로 조물댔다. 보들부들 몰랑몰랑. 

원래대로였음 조직장 보고 후, CEO 면담 및 HR 협의의 프로세스를 탔어야 할 팀장급 퇴사가 두 사람의 공백으로 인해 조직장 보고는 타미가, 현을 건너뛰고 가경과 퇴사면담으로 진행된게 괜히 일을 좀 불편케 했다. 업무의 양이나 노력적 측면에서보단 심적이고 양심의 가책 부문 쪽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고 줄스라서, 다른 이유가 아니라 저놈의 염장커플 관계가 퇴사의 이유라서. 절차를 일부러 뒤틀었다거나, 주요한 정보를 의도를 가지고 빠뜨린게 아니지만 결과만 두고보자면 현을 쏙 빼놓고 둘이 쑥덕쑥덕 일을 정리해놓고 뒷통수를 맞게한 꼴이 된거 아닐까.

- 저거 안 그래도 여기저기 잔정 많은데....

이전에도, 이번에도, 퇴사에 직접적 원인이 본인인데서 부담을 느끼진 않을지. 다른데선 자기몫 따박따박 잘만 챙기다가도, 가경과의 관계에선 을이 되길 자처하는 현이 괜스레 자기 탓을 하는건 또 아닐지. 뭐 그런 고민을 더해 나온 한숨이 삐쭉 노려보는 무민인형 오른쪽 귀를 타고 넘어, 저-어기 지금 차현과 줄스가 퇴사일정 조율을 위한 미팅중인 회의실로 닿기 전 흩어졌다. 미리 맥락 좀 채워줄걸 그랬나. 


- 야 차현 밥 먹을래? 

- 나 줄스랑 점심 같이 하기로 했는데? 타미도 올래요? 

노트북과 업무수첩을 한 손으로 덜렁덜렁 들고 나와, 탕비실 냉장고 앞을 지키고 선 현의 시선은 여전히 바나나우유와 초코꿀딴지 사이를 오갔다. 멀쩡한척 하는거야 멀쩡한거야. 별 타격 없어보이는 태도가 차현답지 않아 묘했다. 가경에 대한 자기의 맘은 변치 않을거라 장담을 하면서도 내심은 좀 속상해하거나, 자기가 공과 사도 구분 못할 정도로 못미더운 리더 같으냐 하소연이라도 한 타령 하고 싶어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랑 밥을 먹으러 가겠다네. 

- 갈거냐구

- 생각중이잖아. 메뉴 뭔데

체- 와 픽- 사이의 미묘한 바람 빠지는 코웃음을 친 현의 손이 그 둘 모두를 그러잡아 문을 닫았을 때, 타미는 돌아가는 상황이 예상과 다르단 점에서 안도와 의문을 동시에 느끼며, 뭐냐고. 턱을 올려보였다. 쥴스 먹고 싶다는거 먹을거야 마지막이니까. 내밀어진 뚱바를 받아들고 빨대에 비닐을 뜯어 구멍을 내는 일련의 잡스러운 일이 잠시 둘 사이의 정적을 만들었다. 바 테이블에 둘 다 등을 기대고-타미는 어깨쯤이지만-차갑고 달달한 음료를 마시는 동안은 몇 번쯤 시선으로만 말이 좀 오갔다. 

- 야 배타미. 근데 너는 애가 꼭 먼저 알고 있었음서 말을 안하더라? 

- 일부러 안했냐? 지가 지구 반대편으로 놀러가서 칠렐레 팔렐레..

- 어- 그치~ 그게 또 너-어무 복잡한 이유라 통신보안상 휴대폰을 거치면 폭발하지- 

- 아니 맘편하게 놀고 오라고, 맘 써준것도 모르고

- 야. 너 이거 쥴스가 한참 전에도 얘기했다며. A사랑 일정 조율한다고 사업계획 뜯어고칠 때. 그때 이미 너한테 한 번 상의했다고. 다 들었거든? 

- .....

- 햐..이걸 진짜. 너. 내가 만약에 제이콥이 너랑 안 맞아서 퇴사하고 싶다고 나한테 상의를 했어. 근데 내가 너한테 꼭꼭 숨기다가, 퇴사 결정한 날 알게되면. 넌 좋겠어?

어억.. 어제 달린 술이 아직 위에서 십이지장 이후로 진퇴를 거듭하는고로, 좀 내려볼만한 뜨끈한 국물 찾아 탕비실 문을 들어서던 제이콥은 한 발을 내딪자마자 마주치는 타미 눈빛을 필사적으로 모른체했다. 탁자에서 반쯤 몸을 돌려 타미쪽을 향한, 제이콥에겐 등을 진 스칼렛 목소리는 아직 분노1단계에 못 미치는것 같긴 하지만. 

뒷걸음질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문워크로 미끌어지느라 툭 등이 뒤에 걸렸을 때 제이콥은 머잖아 두 사람 사이에 뭔일이 벌어질지 만큼이나 자명한, 지금 이 자리에서 제일 보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은 제발 아니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상의 한적 없구요 스칼렛. 제발 이상한 예시 좀 들지 말아주세요...!! 

- 특이하게 나오네요 제이콥

- 아...써머 지금은 안 들어가시는 편이..

- ㅇㅑ!!!! 


자긴 뭐 먼저 알아봤자 2-3일 일찍 알고 있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괜스레 공범이 된 기분이라 어쩐지 타미의 편에서 함께 변명을 해주던 가경은 눈을 부라리는 현에게 찔끔해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니 평소에는 내가 자기보다 무슨 열 댓살은 많은 것처럼 굴면서, 저렇게 무섭게 노려보는게 어딨어. 저기 둘 다 잠깐 내 말 좀 들어볼래...? 끼어들어봤자, 고작 두 사람인데 그 중 어느 하나 듣는 척 하는 이 없이 공허한 말소리만 외롭게 사그라드는 통에 군중 속의 고독만 절절했다. 

- 점심시간 다 됐거든...?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왁왁대는 내용에, 이제는 원래의 본문은 하나 없이 각주만 가지고 서로 말꼬릴 얼마나 붙드는지. 어차피 지구가 내일 멸망하는데 니가 알면 뭐 좀 낫냐는, 도무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는 타미의 대거리에 대고 그럼 그것도 비밀로 할래 넌? 나 죽고 묘비명에 새기려고?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현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겨우 자리만 옮겨 가경의 사무실에서 2절도 3절도 아닌 5조 5억절 중이었다. 

- 현아. 쥴스랑 점심 먹으러 간다며....안가? 

- 갈거에요 

- 가. 좀. 얼른.

응? 어깨 위를 쓰다듬으면서, 더 늦게 나가면 자리잡기 힘들어. 맛있는거 먹구 와. 개인카드를 꺼내 내미는 가경의 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려보는 눈빛은 여전히 배타미 쪽을 향했다. 

- 너 그래서 같이 먹을거냐고

- 아 안먹어!! 

- 이게 왜 씅질이야!!! 

- 제발 그냥 가.....

소고기 먹어도 돼죠? 아직 썽이 묻어나는 무뚝뚝한 현의 질문에 고갤 끄덕이며 등을 밀어 내보낸 가경은 사무실 문을 닫고 돌아와 소파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이게 이렇게 싸울 일이야? 아니 저 싸가지 없는게! 확 언성을 높였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가경의 시선을 의식한 타미는 고갤 돌리고 이마를 괴며 자셀 고쳐앉았다. 아 뭐. 나만 그랬냐. 구겨지듯이 몸을 비틀어 앉아 꼬은 다리가 동동이는 박자를 봐선 민망한가보다. 

- 어떤거 같아? 

- 방금 못보셨습니까 대표님. 아주 기운이 펄펄 나시네요. 

- ㅎ....니가 한 말 생각해봤는데, 

- 나머진 밥 먹으면서 얘기해. 나도 밥사줘 송가경

- 카드 없어, 현이 줬어.

- 법카 있잖아 개수작 부리지마. 

지는 없냐구요. 

-

차현이 소고길 먹을거면, 자기도 그에 비하는거 정돈 먹어줘야 이 빡친 맘이 좀 풀리겠다는 타미가 고른 레스토랑은 현과도 몇 번 온적이 있는 이탈리안이었다. 점심에 이런델 오는 한갓지고 돈도 많은 직장인이라는건 대체로 유니콘 같은 존재라, 띄엄띄엄한 테이블에서도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한낮의 홀자리. 너 뭐 와인이라도 한 잔 할래? 물어보는 가경이 진담을 농담같이 하는지, 농담에 덫을 놓고 떠보는지 어리둥절한 타미는 일단 메뉴판에 코를 박았다. 0이 많이 붙어있는걸로 시켜야지 이왕이면. 

밥 먹으면서 소화잘되는 이야기나 좀 해보라며, 여행 얘길 보채는 타미에게 가경은 자기몫의 와인을 느긋하게 넘기며 운을 띄웠다. 눈이 많았어. 오로라도 보고. 사우나는 엄청 뜨거웠는데, 나와서는 얼음이 언 호수를 들어가야 되는거 있지. 길을 잃어서 온통 하얀 구릉에서 현과 나 둘 뿐이었는데 적막하더라. 드문드문 나오는 웃긴 에피소드를 하나도 안웃기게 썰을 푸는 노잼 선배는 재미 대가리가 하나도 없었으나, 전반적으로 어느 밤의 송팀장 마냥 웃는 얼굴은 좀 봐줄만 했다. 

- 나만 빼고 둘이 맛있는거 먹지 마

- 딴사람이랑 밥 먹는다고 나간게 누군데

- 나 없이 재밌지 마

- ....뭐래 이 초딩아

마지막 코스로 나온 디저트 디쉬를 먹는둥 마는둥 잡담을 하는 도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뜬금없이 테이크아웃 잔 하나 덜렁 들고 나타난 현의 등장이 둘의 말을 끊었다. 어? 살짝 놀라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며, 잘 먹고왔어? 자세를 고쳐앉는 가경관 달리, 올 줄 알았다는 듯 굳이 돌아보지도 않고 옆자리에 올려둔 코트를 치워주는 타민 시큰둥했다. 선배 이게 모에요. 저 없는데 왜 이렇게 즐거워요. 들이밀어진 휴대폰에 초점을 맞추느라 살짝 고개를 뺀 가경은, 언제 찍혔는지 모르겠는 저의 얼굴과 타미를 번갈아 응시했다. 

- 불렀어?

- 안 불렀어

- 아 선배! 불렀냐니. 저 진짜 서운할라고 그래요? 

- 아니 반가워서... 반가워서 그러지. 맛있게 먹구왔어? 재밌었어? 

허둥지둥인 송가경 그러든가 말든가, 찐한 브라우니 위에 장식된 산딸기를 입에넣어 굴리다가 딱 알맞게 식은 고소한 라떼를 머금은 타미는 어깰 으쓱였다. 맛있네. 비싼값을 하네. 아직은 선선한 낮기온에 고작 셔츠에 가디건 차림으로 걸어와 놓고도 손부채질을 하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그거 맛있어? 묻는 차현의 수사적 질문은 못들은척하면서. 

하나를 더 시켜주겠다는, 돈이 많아서 그런가 너그러운 여자친구 제안에도 불구하고 하이에나같이 마지막 조각을 호시탐탐 노리는 차현과의 방어전에서 타미가 장렬히 패배한 뒤에서야 조용해진 식탁 위. 자연스럽게 쥴스의 퇴사와 그 비하인드 스토리로 집중된 주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아주 싱겁게 끝났다고 타미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현이라고 한 회사에서 10년이 넘도록 쭉 사원부터 본부장까지 일하며 사람 들고나는 것에 유난할리 없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외국계 대기업인 유니콘에서 쭉 일하다 경쟁사로 넘어간 타미나 가경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경험이 있는게 맞겠지. 그리고 업무 카테고리에 '인력관리'가 주요한 과제중 하나가 되고나서 부턴, 자기 탓을 하고 나가지 않았어도 그 모든 이탈에 자기 탓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타미라고 모르지 않았다. 다 지나온 세월이고 겪어본 일 아닌가. 가경 때문에 자기도 어쩐지 스칼렛을 과보호 하는 경향이 옮아 왔었는가 싶어, 지난 걱정을 훌훌 털어버릴 만큼. 

- 그치만,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제가 좀 더 중심을 잡아야 되는 것 같긴해요 

- 그래 작작 티내고~ 

추임새를 넣는 타미를 째릿 한 번 노려봤다가, 쪼르륵 소릴 내며 남은 음료를 들이킨 현은 쥴스와 식사하며 두서없이 머릿속에 남겼던 메모들을 정리했다. 뭐 타미 말도 궁극적으로는 틀린말이 아니긴 하지. 상사, 혹은 동료직원으로의 자기 자신과, 가경의 연인이자 부하직원인 자기 자신 사이의 발란스를 잡는 일은 새로운 미션이지만 완전히 새롭진 않았다. 이미 제이와의 일로 한 번은 그 경계를 부러뜨렸으나, 뷰가 달라졌을 뿐. 

어디에나 있는 사내 정치의 한 갈래라고 봐 나는. 정리하듯 빈 접시 위로 냅킨과 커트러리를 올려두는 타미도 대수로울 것 없단 목소릴 냈다 

- 유니콘 임원 아저씨들도 뭐 섹스만 안했지. 같이 골프치고 담배피고 술마시고, 사우나 가서 자는건 뭐 다른가. 새로운 사람, 새로운 줄 생기면 갈아타고. 사람 사는거 다 똑같지

- 웩 역겨워

- 어 그러세요? 그 유니콘 대표이사가 누구였지? 

- ....

시비 털려다가, 뒷목이 붙들린 꼴이 된 현이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도 유독 말이 없는 쪽은 가경인게 유일하게 맘에 좀 걸리는 점이었다고, 타미는 생각했다. 제일 재밌게 놀려먹었을 사람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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