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5

사잇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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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지만. 안그래도 침묵에는 좀 약한 편인 브라이언은 멀뚱멀뚱 자길 보면서 물음표를 띄워보이는 옛 동료들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두 분은 어디까지 알고 있느냔 질문에 대고, 저희 서류에 싸인만 안했지 NDA(비밀유지계약) 체결한거 아니었던가요. 싱긋 웃으며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송대표가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려운 얘길 다 이쪽에다가 떠넘기고,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속으로 혀를 차봐야 호르륵 소릴 내며 뜨거운 커피를 머금은 가경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괜히 왔어.

- 뭡니까 브라이언. 브라이언이 면목 없을 일이라는게.

- 면목이? 없으...세요?

자기 몫의 라떼 뚜껑을 열어 느긋하게 한모금을 머금었다가, 거품이 살짝 묻은채로 저를 쳐다보는 타미의 시선조차도 지금은 조금 버거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사실상 가장 눈치를 봐야할 사람은 벌써부터 눈꼬리가 2시 방향인데.

- 그, 바로가 계열사를 하나 정리하는게 있는데. 사실 발표는 조금 미루려던걸 오늘 기사가 떴을겁니다

- 네. 봤습니다. 간편결제 관련이었죠? 초기 사용자는 돈으로 만들어내긴 했지만….. 사실상 적자인 사업 아니었나요?

- 예..뭐. 그렇긴한데. 이런 결제 관련업은 아시다시피 어느정도 가맹점도 늘리고, 가입자 수 만들기 전에는 다-

- 밑빠진 독에 물 부어야 가능한 사업이죠. 그래서 바로 정도 되는 대기업 아님 손대기 어렵기도 하구요.

- 암만 바로라도 뭐 물이 무한대로 솟아납니까. 애초에 타겟부터 시장핏까지 제대로 검증을 안하고 들어가니까, 애먼데 돈쓰고 개고생하고, 성과는 성과대로 발리고,

- 아니 내가 했냐? 왜 나한테 따져. 그리고, 암만 시장조사 철저하게 했다고 치더라도, 초기 적자는 예상이 가능한 범위란 얘기잖아요 스칼렛.

- 초기 적자? 타미. 사업을 3년을 넘게 했는데 초기-

..

엄한데로 불똥이 튀는 바람에, 애초에 꺼내려던 이야기는 시작도 못해본 브라이언은 콧바람을 쉬면서 익숙하단 얼굴로 무릎을 쓰다듬으며 무념무상, 빈동공을 껌뻑였다. ..여전하네요. 네 뭐 보시다시피. 한마디씩 주고 받는 두 명의 대표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사업성을 놓고 대난투에 가까운 논쟁을 벌이는 두 사람이 알아서 지치길 좀 기대해보면서.

- 저기. 어 두 분? 네 두 분이 이 사업에 이토록 관심이 지대하시다니 제가 좀 맘이 놓이네요

- ?

- 브라이언이 왜요.

관심을 모으는덴 성공했으나, 전투력이 상승한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이쪽을 향하는건 심장에 조금 무리가 오는 바람에 슬슬 웃으며 세웠던 상체를 소파에 좀 기대어보았다. 길고 원만하게 이야길 하느냐, 짧고 직설적으로 치고 들어가느냐..

- 우리가 살거거든. 그 계열사.

- 뭐? / - 네??

고를 것도 없이 치고들어온 송대표의 나직한,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가 브라이언의 다음 멘트를 삼켜버렸다. 와글대던 둘의 목소리도 뚝 끊긴 후 올라간 집중도가 심상찮은데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템포를 주는 노련함이, 마찬가지로 이 둘과 함께 대의를 논하곤 했던 브라이언의 심장을 뛰게 했다. 어쩌면 부정맥일지도.

- 네-에. 그리고 바로는 매각한 계열사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투자를 통한 자금원조를 지속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워 매각하는 계열사를 굳이..?

- 타미 말씀대로 바로에서 꾸준히 초기자금을 태워왔고, 당장에 수익을 기대하긴 어려워도 여지는 충분한 사업이니까요. 특히, 렙유같이 탄탄한 현지 고객층을 확보한 회사와 손을 잡는다면요-

- ..? 그건 그렇다치더라도. 자금을 우리한테 태워주는것도 아닌데, 렙유가 뭐하러-

선배. 혹시 지금 상장하려고, 이거를..이걸 지금. 아.

브라이언에게 하려던 질문을 마저 다 끝마치기도 전에 앞뒤사정과, 숨은 맥락까지 읽어버린 타미가 말꼬리를 끊어먹고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잠겨들었다. 팔짱낀 왼손에 기댄 오른손이 입술 부근을 만지작대며, 표정이 없어진 그 머릿속이 잘 정비된 기계처럼 영민하게 중간중간 끊겨있는 정보의 돌다리를 메꾸는 중이었다.

-

우회상장.
스타트업 씬에서 아주 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되게 희안할 것도 없는 일이라는걸 알고는 있지만, 그게 여기가 될줄은. 막연히, 하지만 그 엔드포인트는 꽤나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는 타미 머릿속 청사진 중에 이런 시나리오는 부재했다. 굳이라면 굳이고,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인데, 상장을 한다면 나스닥이 아닌 코스피에. 그것도 꽤나 화려한 기업공개(IPO)와 공모주 투자를 병행한 일종의 파티가 되리라 생각했지 이렇게 조용히 돌아서 얹는 방식을 먼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실익으로 따져보면 어떨것이냐. 그게 현재 타미가 침묵 속에 정반합을 도출하는 주요주제가 되는 중이었다.

- 그렇지만 바로는 그럼 굳이 왜 돌아서 가죠? 렙유가 우회상장을 노린단걸 이미 알고 진행하는 계약이라면, 그게 지금 도의를 넘어서 경제법상 문제가 없느냐는 차처하더라도, 렙유쪽에 지분을 태우는게 맞지 않나요.

한참을 조용히 각자에 생각에 잠겨, 혹은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깔렸던 정적을 깬 타미는, 부딪치니까. KU랑. 갈라진 현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에 움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억눌린 목소리 톤만으로도 충분히 심기가 불편함을 짐작하고도 남았는데, 심기가 불편할 일이 천지빼까리라 어디가 젤 빡치는 지점인지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누구한테, 일지도.

- 렙유가 송가경 회사란걸 알사람은 다 아는데, 여기에 바로가 대놓고 투자를 하기는 부담스럽겠죠. 아무리 포탈업계 1, 2위를 두고 다퉈도 한국에서 KU한테 밉보인채로 사업하는거, 그건 리스크가 넘 크다. 그거 아닙니까 브라이언?

- 네 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 그러니 바로는 분사한 계열사에게 자금을 원조하는 우방으로 남아, 매각하고서도 챙겨주는 형님노릇 하면서 좋은 기업이미지까지 챙겨가고. 렙유에선 그 계열사를 이용해 상장해, 바로의 수평적이고 자유로워서 간혹은 너-어무 느긋한 그 조직문화에 채찍질하는 악덕 유니콘이 되어달라?

그 유니콘이, 포탈회사 유니콘이 아닌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거슬려 고개를 들었던 가경은 브라이언에게 쏴붙이고 있는 현이 실상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이런 일, 공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현에게만 따로 귀띔을 할 수는 없는데다가 꽤나 흑백이 불분명한 일, 이라면 브라이언이 직접 말하게끔 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타미와의 통화로 얻은 힌트이기도, 자신과 타미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오랫동안 고민해온 결과이기도 했달까. 타미 말마따라, 자기가 타미에게 한때는 꽤나 그럴듯한 사수였다면, 브라이언은 현에게 더 좋은 선배이자 상사였을테니까. 업무적으로는 자기보단 브라이언과 훨씬 색이 비슷한 현에겐, 브라이언의 언어가 좀 더 부드럽고 그럴듯하게 다가올 것이라 여겼다. 어쩌면 그것도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었을까.

- 글쎼요. 바로에서는 성공시키지 못한 사업을, 렙유에서는, 작지만 강한 회사의 저력으로 성공시켰다- 그런 신화를 만들어내는 쪽도 고려는 해봤습니다만. 스칼렛이 말씀하시는, 손안대고 코푸는 낙전이익도. 고려하지 않은건 아닙니다. 스칼렛도 아시겠지만 저는 바로 대표니까요.

- 그렇지만 그 성공으로 오는 수익은, 바로의 계열사 지분으로 나눠먹겠다?

- 예에. 반대로 실패하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니 그것만큼은 제가 송대표께 잘보여야 되는 점이겠죠.

물흐르듯 정리하는 말과 함께 큰 고비는 넘겼단 생각인지, 난감했던 표정이 살짝 풀어져 이제야 빨대를 입에 무는 브라이언에게 가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보죠. 딱히 더 할 말은 없었으나 딱딱해진 분위기도, 하려는 말을 눌러참고 있는듯한 스칼렛 모습에서도 아무래도 더 앉아있어봐야 좋은 모습 보기 어렵겠다 싶은 모양새에 브라이언은 얼음이 녹아 닝닝해진 음료를 쭉 들이키며 몸을 세웠다. 세 분 나눌 말씀이 많으실텐데, 풀어두었던 양복 단추를 잠그며 일어난 추임새가 어색하게 탁자 위를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갑작스러운 폭격에 멍해진 두 사람의 굉장히 성의없는 인사는 이쪽도 대충 얼버무린 뒤, 배웅 겸 나온 가경과 엘레베이터 앞에 선 브라이언은 읽기 어려운 표정의 얼굴을 힐끗 훔쳐보며 말을 골랐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 네

-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 걱정이야 하죠. 민대표님도 걱정. 많으실텐데?

살풋 웃으면서 열린 문을 두고 버튼을 눌러주고 있는 가경이 가볍게 고갤 숙였다.

- 그럼, 더 구체화될 시점에 다시.

- 네에.. 못해도 연말은 되어야 결말이 날거 같네요

꾹 눌러 얇아진 입술로 고갤 끄덕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비로소 혼자가 된 작은 박스 안이 홍주의 한숨으로 가득 메워졌다. 미움 받으려나. 가경과 타미로 묶인 페어에겐 실익상의 아주 미묘한 소수점 하나와 조건과 조항의 모든 글자 수 만큼의 공격을 받으리란 것을 예상할 수 있었고, 그건 외려 머리 아프지만 헤쳐나갈만한, 그리고 나가야할 만한 문제다. 그렇지만 스칼렛, 차현과의 관계에선 자신이 없었다. 실망시켰겠지 싶은 생각에 맘 한켠이 묵직한걸 보니, 이 거래에서 ‘바로’, 회사에는 자신이 이뤄야만 할 성과를 거둔대도, 개인적인 성취를 느낄 수 있을까에 대해 속이 좀 쓰렸다.


대표실로 돌아가는 가경이야 뭐 당연히.

회사가 상장을 한다면 얻을 수 있을 이득은 명확하겠지만, 심리적으로는 친정에 가까운 ‘바로’를 이용해 먹는 방식이 현에게 기꺼울 수는 없겠지. 그렇긴 하더라도, 그 부분 때문에 현이 반대를 해온다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좀 서운할 것 같았다. 우리가 ‘바로’와 ‘유니콘’에서 경쟁하는 관계일 때에도 느껴본적 없었는데. 물론 우리 일 얘기는 하지 말자고 선을 그었던 스스로가 방어막을 쳐두었던 것도 없잖아 있겠지만.

그리고 현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할지도 솔직한 말로 자신이 없었다.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의 언어로는 타미를 설득하는 것에는 어느정도 방법과 방식이 통할지 몰라도 현은 아니니까.

고작 열걸음도 남겨두지 않은 복도 위에 선 가경은 새삼 눈을 들어 사무실을 한바퀴 훑어내렸다. 웅성이고 시끌대는 익숙한 공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새로운 사무실에, 이젠 익숙해진 풍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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