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4

그럼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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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인가. 쾅쾅- 망치로 뼈를 내리치는듯한 둔탁하고 무거운 통증이 아픈 손목을 타고 올라 목 뒤를 후려치고, 이를 악무느라 온통 굳어진 머리뼈 안을 미친듯이 휘저었다. 저기 잠시...! 도무지 견딜수가 없는 고통이라, 정말 견디고 견디다 못해, 외마디 비명같은 하지만 데시벨은 고작 기계음에 덮힐만큼 조그맣게 한마딜 내질러본 가경은 살짝 기계를 떼어주는 치료사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버벅였다. 애도 아니고 나이 마흔 먹고, 치료중에 아프니 이제 그만하라기엔 민망한 체면이 한 번, 문 밖에 버티고 앉았을 현이 그러도록 그냥 두지 않으리란 짐작이 또 한 번 말을 막아 시야만 흔들린채로 침을 삼켰다. 

- 많이 아프시죠. 되게 잘 참으시네요. 처음엔 소리지르는 분들도 많으시거든요. 

- ....조금

- 이게 상태가 많이 안 좋을수록 많이 아프세요. 오늘 충격파 끝나구 주사 맞고 약 드시면서, 염증이 가라앉으면 담번에는 이만큼 아프진 않으실거에요. 

- 다음번이요? 

- 네 적어도 3주 정도는 받으셔야 되니까? 

살면서 처음 겪어본, 이렇게 아플바엔 그냥 평소 좀 뻐근한채로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단 확신이 들 정도의 이 고통을 3주를? 이쯤이면 현이 시키는 그 수많은 종류의 온갖 근육운동들의 고통쯤은 명함도 못 내밀어볼게 분명했다. 싫은데, 너무 싫은데. 하기 싫다 말도 못하고 다시금 할게요? 미안한듯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우웅- 기곌 가까이 붙이는 젊은 물리치료사가 다 미울 지경이었다. 

-

- ...? 선배. 선배 울었어요? 

- 안 울었어 

옆에서 긴 보풀제거기처럼 생긴 머신의 기다란 줄을 정리하고 있던 치료사가, 엄지와 검지를 가깝게 붙여보였다. 조금..? 입모양으로만 전해주는 진실이 아니더라도, 눈가가 살짝 붉어져 긴 속눈썹이 군데군데 젖어있는 모습만 보더라도 가경의 대답은 별 신빙성이 많이 없었다. 좀 기다리셔야 하니, 천천히 나오셔라 배려아닌 배려를 해주며 마저 정릴하는 동안, 가경의 시야를 막듯이 베드로 붙은 현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베드에 걸터앉은 채로 아픈쪽 손목을 안듯이 문지르며 고갤 숙인 가경은, 평소의 낮은 체온에도 불구하고 어깨 부근부터 머리카락이 닿는 목 뒤쪽이 뜨듯한게 어지간히 진을 뺀 모양이었다. 굳이 시선을 맞추려 들지 않고 안듯이 어깰 끌어안고 뻣뻣해진 뒷목을 위아래로 길게 주무르며 말이 없던 현은, 치료사가 문을 닫고 나가고서야 다시금 가경의 얼굴을 살폈다. 

- 많이 아팠어요? 

- ...

- 처음엔 쪼오금 아프긴 한데, 진짜 아팠나보다 우리 선배

- ...괜찮을거라며. 

뾰루퉁한 말투에 웃음이 나올뻔한걸 이를 사려문 현은, 가경이 걸터앉은 베드로 올라가 벽에 등을 기댔다. 얄팍한 어깨를 돌리면서 동동 떠있던 다리를 오른쪽 무릎팍 위로 잡아 올리자, 자연스레 안겨든 자세로 현에게 툭 고갤 기댄 가경이, 너. 이거 엄청 아프잖아.. 맨날 거짓말이나 하구. 휴지를 쥐고 있던 왼손으로 어깰 밀었다. 토라진 그 목소리에 뱃가죽이 막 떨리는걸 억누른 현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휘청이는 몸을 좀 더 당겨 안았다. 

- 제에가 또 언제 맨날 거짓말을 했어요- 정말 큰일날 소릴 하시네

- 몰라 나 팔 아파

약간의 짜증과 투정이 뒤섞인 불평불만이 이어지는걸, 푸흡- 허리가 꺾인 현은 품 안에서 됐어 내려줘. 퉁퉁거리는 가경을 고쳐 안으며 시선을 맞췄다. 선배. 여전 웃음기가 섞였지만, 꽤나 진지해진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가 아무래도 한바탕 쏟아질지 모를 잔소리를 예상한 가경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 운동 많이 해도 이럴 수 있다고 했거든.

- 네 해당사항 없으시구요. 선배? 저 봐바요

- 왜에...원래 사무직한테 흔하다고 그랬단 말이야. 

- ㅎㅎ 선배. 혹시 제가 선배를 선배라고 불러서 저한텐 되게 강하고 멋있는 모습만 보여야 된다고 생각하시는거 아니죠..?

- ....뭐?

- 아프면 좀 울 수도 있죠. 속상해서 울 수도 있구. 제 앞에서 우는거 창피해요?

쟤 진짜 뭐래, 싶은 소릴 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진지한 표정에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단 결연함이 엿보이는게 가경을 허탈하게 웃게 만들었다. ...나 지금 너한테 애기처럼 안겨있는데 현아. 애정과 걱정이 뒤섞인 눈빛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느라 덥혀진 귓바퀴를 숨겨본다고 머리카락을 좀 뒤적이던 손을 들어 현의 눈을 가렸다.

- 그렇게 안해두 선배 엄청 멋있는거 알죠? 변함없이 이쁘구. 그리고 또- 

-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구- 그런거 아니야. 

어휴 정말. 노상 직설적이고 솔직한 현은 짐작도 못할만큼의 이 마음을, 이 진심을, 다 들켜버릴게 매번 겁이 나는걸 어떻게 해야할지. 간지럽고 왠지모르게 안타깝고 그리고 그보다도 더 저릿하고 아프게 한쪽으로만 온통 쏠린 맘이 저 말간 눈 앞에선 자꾸만 다 드러날까 싶은게, 고작 탄식 하나로 압축되었다. 만족한듯 빙그레 웃으며 다정한 호를 그려 얇아진 입술선이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며, 꽈악 힘주어 껴안은 팔이 엉덩일 토닥였다.

그래, 그럼 됐어. 

자기한테 하는 말이라기엔 끝이 짤막하고 혼잣말이라기엔 맥락이 이어지는 읊조림이 아니더라도, 애기 안고 어르는듯한 그 둥기둥기가 웃기고 새로운데 동시에 맘이 놓였다. 평소 역할의 완전히 반대가 된게 어색했다가도, 오히려 이쪽이 원래는 꼭 맞고 여태까진 자기가 흉내를 내온 느낌이랄까. 


단단히 삐쳐서 너랑 말 안해 모드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혼자만 빠르게 걸어가버리는 가경의 뒤에서, 현은 충분히 좁힐 수 있는 거리를 일부러 살짝 남겨둔채 뒤를 쫓았다. 주사는 그냥 안 맞으면 안되겠느냔 청을 단박에 거절한 점이라거나, 다음 물리치료를 최대한 미루려고 캘린더 앱을 꺼내들고 바쁨을 어필하는걸 고작 모레 점심시간으로 당겨 잡아버린 점. 그 큰 두방이 아니더라도, 염증이 낫고나면 재발을 막기 위해 진행할 손목 강화 루틴을 따로 요청한다던가 손목 보호대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잠깐 반깁스를 좀 해두는게 어떻겠느냔 제안 같은 것들이 아무래도 속을 긁을데로 긁은 모양이었다. 

아닌가. 그냥 낼 모레 체외충격파를 또 받아야 된다는게 충격인가. 슬금슬금 옆쪽으로 다가가 은근슬쩍 눈치를 보면서 팔짱을 껴보려던 현은, 손은 그대로 주머니에 찔러넣은채 슥 몸통을 반댓방향으로 돌리면서 종종걸음 치는 가경을 보곤 삐졌음을 확신했다. 그러면서도 병원에서 안내해준, 한 블럭 더 가서 1층이라던 그 약국 앞에선 발걸음이 느려진걸보니 정말 화가났다기 보단 얼른 와서 풀어줘라 쪽에 더 가까운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못이기는척 끌려와주는 가경의 등을 가볍게 밀어 약국 안으로 들어가, 대신 들고온 처방전을 접수하고 복약지도를 받는 동안에도 현의 신경은 내내 가경 쪽에만 쏠려 있었다. 

- 선배-

- ...

- 선배 텐텐 사줄까요? 

- 뭔데 그게

- 어린이 성장 발육엔 텐텐...모르세요? 

어느쪽으로 이해한건지, 이게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하는 얼굴로 빤히 노려보는 가경의 표정으로 보아 어느쪽이든 대차게 오해를 산게 분명했다. 삐진 선배도, 물리치료 아프다고 징징대는 선배도 귀엽지만 그 세이프존을 넘어갔을 땐 귀여워야되는 쪽이 반드시 이쪽임을 모를리 없는 현은 그거 아니다 두 손을 붕방였다. 

- 아니아니! 이거 어릴때 진짜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안사줬던 어린이들이, 이젠 어른이가 되서 사먹는거에요!! 

계산과 동시에 얼른 알맹이를 까서 가경의 입에 쏙 넣어주고, 자긴 두개를 한꺼번에 까넣은 현은 미간이 구겨지는 가경의 기색에 당황했다. 이 맛....이거 모르세요? 우물대며, 추억의 맛인데....덧붙여 봐야 추억은 고사하고 씹지도 않은채 올라오는 향만으로도 질색을 한 가경에겐, 점수 좀 따볼랬던 나름의 제스처가 다 망했음이 여실했다. 

- 가는 길에 우리 아까 못마셨던 커피 사가지구 갈까요..?

- 어

그러니 항복해야지 뭐. 

-

약국에서 받은 손목보호대 해준다고 가져가서 놔주지 않은 손을 모르는척 맞잡은 채 다시 회사로 오는길. 그냥 좀 퉁퉁거려보고 싶었다 뿐, 다 받아주면서 살살 애교를 피워주는 현에게 가경은 저도 모르게 금방 빙그레 웃고야 말았다. 그 틈샐 놓치지 않고 헤헤 웃으면서 허릴 감싸안아 몸을 붙이며 툭 머리를 가볍게 기대는 현의 볼을 쓰다듬으면, 그걸로 다 풀려버리는 그런 소소한 일.

덕분에 약속대로 사무실 1층 카페에 도착했을 쯤엔, 가경에게 온 정신이 다 쏠려있던 현도 어느정도 평소의 시야를 회복한 참이었다. 카운터 근처를 배회하는 낯익은 뒷통수를 금방 구분해낼 정도로. 

- 브라이언? 

- 어- 안그래도 뭐였죠? 카푸치노였나? 스칼렛 추천메뉴

- 제가 언제 여기 카페 메뉴를 추천을 했어요. 여긴 무슨 일이세요? 저희 보러 오신거에요? 

- 아니 뭐 겸사겸사. 기사 뜨기 전에 송대표님한테 미리 언질을 드린다는걸 못챙긴게 면목이 없어서 사과도 드릴겸. 그래서 잠시 들렸습니다. 그냥 캐주얼하게요-

입술을 시옷자로 올려보이며 눈썹을 살짝 들어올린 가경이, '괜찮다' 보다는 '뭐 그럴 수 있죠' 정도의 제스처를 취해보이는 것도, '화이트 초코라떼요' 별 놀란 기색도 없이 대꾸를 해주는 것도, 현은 어리둥절 눈알을 굴렸다. 브라이언이 왜 면목이 없지. 

무슨 기사일까, 에 대한건 외려 몸에 밴 습관처럼 아침에 출근하자 마자 죽 훑어봤던 IT 주요기사 한자락이 자동으로 떠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렙유랑은 아무상관 없는 '바로' 계열사 기사에 브라이언이 면목 없을 일이 뭐야. 

- 그럼 그걸로- 네네 화이트 초코- 아이스요. 

- 두개요. 따듯한 아메리카노도 같이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옆에 팔짱을 끼고 서있길래 기다리나 싶어 얼른 주문을 넣었더니만, 고개만 빼서 추가 주문을 한 스칼렛은 카드 내밀 기색도 없었다. 허허 웃으며 카드를 내미는데 옛 생각이 데자뷰처럼 스쳐지나 쓴웃음이 퍼졌다. 사원 때도, 대리 때도, 팀장을 달고, 본부장이 되고서도, 매번 결제는 대표님이 하셔야죠. 그러라고 대표하는데. 하던 스칼렛의 다부지고 장난기 어린, 도전적이고 호승심 넘치던, 그치만 늘 든든한 우군이 되주던 모습들. 

언젠지 기억도 안날만큼 옛날처럼 아득했다가도 또 어제같은 그 모습들은, 앞으로는 아무래도 다신 오지 않을 것 같아 입안이 썼다. 이러니 자꾸만 이쪽 업계 사람들이 라떼 타령을 하는게 아닌가. 열정. 낭만. 크. 

- 브라이언 뭐하세요. 진동벨 들고 이리오시죠? 걸리적거리지 마시고. 올라가서 얘기 하실거죠? 타미 뭐마시고 싶은지 좀 물어볼게요- 

앞부분과 뒷부분의 선명한 온도차가 시렵다 못해, 따스하게 회상해보려던 지난 추억이 박살난 브라이언은 시키는데로 진동벨을 들고 가경의 옆으로 멋적게 자릴 옮겼다. 

이 날씨에 아이스는 아직 좀 추운가...뜨듯한거 시킬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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