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9

너 눈 커서 다 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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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뿐 아니라 건넛동네, 그 건넛동네까지. 여느 체육관에 견주어보아도 규모에선 밀리지 않을 만큼 넓은 축에 속하는 ‘대우주짓수’ 한켠. 좀 사이코 결벽증 기질이 있는 편이라, 운동시간 사이사이 오픈짐마다 찍찍이며 소독제가 든 분무기와 밀대를 밀고 다니는 김관장 매의 눈도 피해간 좁은 구석탱이. 평소라면 존재하는지 인지도 못했을 그 공간과 공간 사이, 어둑하고 습기찬 곳에 등을 붙인 현은 휴대폰의 전면카메라를 켜놓은채 눈 밑을 꼼꼼하게 살폈다. 격기 운동중 얇게 벼려진 칼처럼 곤두선 집중력이라는건, 그만큼 날카롭지만 올라설 곳이 비좁게 그어놓은 선 같은 것이라, 오늘의 사고가 집중력이 깨질 만큼 다른 생각이 자꾸만 밀고 들어와서인지. 혹은 그 다른 생각을 잠깐이라도 좀 재쳐두고 싶은 맘에 상대방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몰두를 했어서 였는지가 애매했다.

- 신경쓰여? 메디폼 좀 잘라다줄까?

- 됐어요. 좀 긁힌건데 뭐.

- 그러게 살살 좀 하지. 거 기집애 얼굴에 스크래치가-

- ㅎ 관장님?

- 아 미안. 미안해에- 미안미안. 아리따운 숙녀분. 됐지? 야 그만 노려봐라 얼굴에 구멍나겠다.

- 안됐구요. 관장님이고 사범들이고 간에 고따구 말투 안 뜯어고치면. 여성회원들 싹 다 데리고 나가버릴라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리고. 그 오늘 저랑 한, 저기가 나중에 물어보면 괜찮다고 티도 안난다고 그래줘요. 괜히 신경쓰이게 하기 싫어

- 넌 무슨 말을 그렇게 매정하게 하니. 오늘따라 유난..이 아니고, 심기가 좀 불편해보이십니다 차현 회원님. 한잔 할래?

- 됐어. 갑니다-

주저앉아 그대로 식어버린 몸뚱이를 일으키자 풀썩- 젖은 도복이 한줌 남았던 온기를 뱉으며 들썩였다. 벽에 기댄 사이 차갑게 식은 티셔츠가 등짝에 휘감기는게 그렇게 찝찝할 수가 없어 제자리에서 통통 몇차례 쯤 몸을 튕기며 가볍게 남은 긴장을 풀어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옆에 기대서서, 손을 꺾어보이는 김관장의 ‘한잔’ 제스처를 밀어낸 현은 무겁고 피로해진 다리로 매트를 쓸어내듯 탈의실을 향했다.

-

[바로의 사내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착취를 외주 주겠단 말입니까 브라이언? 그럼 그게 사내문화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일이 됩니까?]

[적어도 제가 지켜야 할 사람들과 그 범위 안에선 그렇지 않을까요. 내가 환경보호 하자고 아마존 벌목을 막을 순 없는 일이니까요. 네.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만족하자.. 제 역량이 이 정돈걸 뭐. 어쩔 수 없죠]

[논점 흐리지 마세요. 스타트업에서 하듯이 인력 쥐어짜고 일정 채찍질해야만 가능할 사업이라, 바로 손 더럽히기 싫은걸 지금 환경보호에 비유 하십니까? 비겁하십니다 브라이언]

[네. 그것도 사실이구요]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저는 바로의 대표고 바로의 이익과 구성원의 행복을 다른 가치보다 우선합니다. 무감정하게 덧붙이는 브라이언에게 현은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다만 속상한 맘이 자꾸만 풍선처럼 뱃속에서 부풀어 올라 속이 울렁일 따름이었다. 반백에서 점점 백군이 득세중인 현재의 브라이언에게서 시선을 돌린 현은 과거, 꽤 멀리로 돌아가 새치가 돋아나던 시절의 그를 회상했다. 주변은 커녕 자기 자신을 챙길 여력도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프로덕트가 과연 얼마나 좋은 서비스가 될 수 있을까를 얘기하던 그를, 멀리 보고 함께 가자고 말하던 리더를. 다른 곳에 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동료이자 업계의 선배였던 브라이언이 이제는 등을 움켜쥘 수 없을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멀리 보자고 했던 그의 시야는 더이상 자기와 같은 방향을 공유하지 않는 듯 했다. 그게 그렇게 쓸쓸하고 섭섭해, 무슨 말을 덧붙일 맘이 들지 않아 말을 아낀 자리는 덮혀진 몸이 식듯 빠르게 식은채 파해버렸다. 그러면 마치 이쪽만 기대했던 것 같잖아.

가경이 말한 우회상장의 목적이 정말 그 해명 그대로 해외시장에서 좀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이자, 렙유가 덩치 큰 커머스 업체와의 협력 관계에서 갑질을 당하지 않을 목적에만 있을까. 행여 그 말을 100% 신뢰한다 하더라도, 그걸 굳이 밀어주려고 하는 바로의 속내를 파악할 요량이었다. 그래야 복잡하고 수선스럽게 돌아가는 회사 내부사정과, 아직까지는 물 밑에서만 일렁이는 불온한 움직임 속에서 자기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앞뒤로 간격 재가며 잽을 날리고, 속마음을 떠보고, 함정을 파서 기다리는건, 도무지 성미에 맞질 않았으니 더 진척되기 전에 터넣고 이야길 해보자 그런 단순명확하고 간결한 목표를 가지고. 그렇지만 반대로 브라이언이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더럽고 치사한 일을 돈 써서 외주줄 기회를 굳이 놓칠 필요 있느냐 인정할거라고도 생각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따져묻는 마음 속엔 내심 그런건 아니라고 해명해주길 기대했던걸까.

그러니, 브라이언을 보러 간다는 사실은 물론 아마 그 이유도 가경이 내심 짐작하고 있을 마당에 이런 속시끄러운 모양새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다 알아챌거 같으니까. ‘너 눈 커서 다 티나‘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마법처럼 자기 맘을 다 읽어버리는 가경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드른 체육관에서 걱정거리만 하나 더 얹어놓은 꼬라지가 된 현은 무거운 숨을 뱉으며 시동을 걸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 근처에서 들리는 반가운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가경은, 언제쯤 들어-까지 입력하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두며 서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이 왔니- 한 세트처럼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인사가, ‘선배 저 손 좀 씻구요오-!!’ 다다닥 바쁜 몸놀림 소리에 묻히자, 저도 모르게 비식 새어나온 웃음이 적막했던 집안의 분위기를 띄웠다.

많이 마시고 왔으려나. 애교 부려줬음 좋겠다.

술 좋아하는 민대표랑 저녁을 먹는다니, 아무래도 한잔 했겠거니 싶은데 그 페이스를 맞춰주었다 쳤을 때 시간만 두고 보면 만취에 가까웠어야 할 이가 생각보다 목소리도 행동도 빠릿한 듯 했다. 밖에서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고 단속을 해댄거 치고는 사실 쫌 아쉽지 뭔가. 인사불성으로 취했을 때 끝도없이 나오는 애교가 진짜 귀엽긴 한데.

- 선배 저녁 뭐 드셨어요?

- 배타미랑 회사 앞에

- 냉면집?

- 응 어떻게 알았어?

- 배타미가 점심 때부터 내내 평양냉면 먹자고 꼬셔서요. 걸레 빤 물. 으으

- ..그 정돈 아니었어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선 현과 잡담을 주고 받느라, 그 문간에 기대서서 물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데시벨을 좀 키워 대꾸하던 가경은 풀어진 긴 생머리가 어쩐지 젖은듯 해 고개를 갸웃했다. 씻었어? 어 네 잠시만요. 위로 들려있던 수전 손잡이를 손끝으로 툭 누르자, 갑자기 뚝 끊긴 소음 덕에, ‘아니 씻구 왔냐구’ 하는 물음이 의도와는 달리 따지는듯 크게 울리는 바람에 슬쩍 몸을 웅크렸다. 손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살짝 놀란듯이 이쪽으로 몸통을 돌린 현에게 멋적어, 아니 물소리 때문에. 설명하려던 가경은, 그대로 욕실의 타일 위를 디뎠다.

- 너..? 이거 민대표가..? 싸웠, 아니 무슨 일 있었어? 가서 왜-

- 앟 아이 선배. 제가 무슨 깡패에요? 그 양반 때릴데가 어딨다고. 잠깐 체육관 좀 드른다는게, 살짝 긁힌거에요. 오랜만에 스파링 좀 한다는게. 그새 몸이 굳었나봐요

턱에 다급히 올라왔던 손길이, 뺨 위로 올라와 종국엔 이리저리 돌려지고 있는걸 하는대로 얌전히 붙들린채 허리를 좀 숙여준 현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빤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너무 가까워 젖은 손가락을 꼼질댔다. 선배 저기, 옷 젖을거 같은데..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핑계 삼아 은근슬쩍 몸을 빼보려다 생채기 아래를 조심히 쓰다듬는 엄지손가락이 다감해 슬몃 눈을 감은채 그 손에 뺨을 기댔다.

- 선배 손 시원해서 기분 좋아요

- 넌 여기 뜨끈뜨끈해.. 이게뭐야 속상하게. 약 발랐어?

- ..

- 너 내가 뭐라그랬어. 딴건 다 괜찮아도-

- 아이 선배!! 이거는 그냥 운동하다가! 악의도 고의도 아닌! 어? 그런 실수져어. 생활기스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야댄다 이거는 진짜. 세수하다가도 방심하면,

- 애초에 세수하는데 방심을 왜 하는건데

- ..말이 그렇단 얘긴데

잔뜩 눈을 흘기며, 나와 약바르게. 부아가 난 것 같은 가경이 손목을 잡아 이끄는데로 졸졸졸 끌려가는게 괜히 좀 간질하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 맘이 몽글댔다. 힣... 작게 웃으며 잡힌 손을 꼼질대자, 뭘 잘했다구 웃고있어. 타박하는 말투에 속속들이 맺힌 애정같은 것들. 이제는 마음 졸이는 일 없이 익숙하게 누리게 된 이런 일상이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 자꾸만 저녁녘의 그것과는 또 다르게 뱃속이 마구마구 울렁였다.

선배. 팔목을 당기며 앞서 걷는 가경을 가볍게 끌어 어깨를 안아들자, 순간 기우뚱 했다 중심을 잡은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푸스스 웃으며 뒤에서 안아든 현의 팔을 부드럽게 토도독- 건반을 치듯 두드리는 자연스러운 화답조차 울렁인 속을 진정시키질 못해 침을 삼켰다.

- 왜에? 애교로 넘어갈 생각마 너어?

- 선배 있잖아요

- 응

- ..미안해요

꽤 긴 침묵의 무게감을 켜켜히 느끼며, 감은 팔에 더 꾸욱 힘을 준 현은 뒤늦게 돌아온 ‘뭐를?’ 하는 질문에 대답할 말을 조심스레 뒤적였다. 낮아진 톤이나, 경직된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완전하게 해소해줄 수는 없대도 최소한 지금의 진심은 고스란히 전해질 말을.

- 그냥요. 다. 선배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근데.

- 현아

안고있는 팔을 풀어내 마주보는 자세로 몸을 돌린 가경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틀림없이 또 다 알아챌테니까. 그러고 싶지 않은데 도무지 내달리는 오만가지 생각들로 복잡한 머릿속이 질주를 멈추질 않았다. 그만해 차현. 그냥 가만히 있어 이 바보야.

- 괜찮아.

- …

- 알겠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마.

- 그치만 만약에-

밑에서 위쪽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시선을 쫓으려는 가경의 눈빛이, 걱정과 불안으로 흔들리는 와중에도 얘기해보라는 듯 입술을 말아 물고 다정하게 닿았을 때, 고조된 감정은 분출될 곳을 찾아 헤매이다 마침내는 터지고야 말았다. 황급히 손바닥으로 눈 밑을 확 훔쳐내려는건, 허벅지께를 가볍게 두드린 가경에게 도로 손목이 붙들리는 통에 다 망했지만. 서늘한 손길이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눈밑의 상처부위를 닦아내는걸 당황과 쪽팔림에 허둥이느라 고개를 빼내려던 현은, 가만히. 나즈막한 명령조에 순순히 동작을 멈추는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 괜찮아. 그냥 이대로 있어. 약가지고 올게

세번째 듣는 같은 말은 대답 대신 그냥 고갤 끄덕였다. 괜찮을까? 정말 괜찮을걸까 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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