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그 후의 일상 10
내부 분열
어느시점 쯤에 개입을 해야할까, 혹은 아주 하지를 말아야 하는걸까. 평소에 비해 조용한 라운지 한구석, 슬슬 여름으로 접으들기 시작하는 계절상 매번 블라인드가 내려가 있던 통창 근처엘 자리잡은 타미는 꾸물꾸물 어두워지는 창밖의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전반적으로 침체된 분위기는 쉽사리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공식화를 미루자는 타미와, 임직원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현의 완전히 상반댄 의견 사이에서 가경은 이번에도 어느 한 쪽의 의견을 온전히 수용할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서 말이 새어나오기 전에 미리 공유는 하되, 사실상 중요한 알맹이가 빠진 타운홀 미팅. 회사의 경쟁령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옵션들 중 강한 기술력이나, 다양한 영업 파이프라인을 갖춘 업체와의 협력도 고려하고 있다, 가경의 그런 두루뭉술한 멘트가 있고 그 뒤로는 딱히 관련 질문이 이어지질 않았다. 뭘 알아야 질문을 하지. 다만 도화선이 되었을진 모르겠다고 타미는 생각했다. 작은 회사니까. 임원 미팅에선 암만 틀어막아도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은, 한다리만 건너면 모든 직원에게 닿을만한 규모의 회사 아닌가.
사실 그런 면에서 타미도 가경도 어쩌면 지나치게 나이브했을지도 몰랐다. 이쪽도 뭘 알아야 계획도 세우고, 대응할만한 시나리오도 만들고 하지. 대기업에서 벌어지는 의사결정 구조와, 그렇게 이뤄진 결정사항들과 관련된 불만이 퍼져나가는 양상과는 당연히 다르겠지. 그건 알았는데 그 아는 것과, 그게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피부로 체감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였다. 아님 그 여파를 직접 겪을 법하지 않은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던게 현실감을 떨어뜨렸거나.
작은 균열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프로덕트 본부의 분위기에서, 본부 미팅시간 소소하게 나누던 잡담이 줄어들 때, 같이 밥먹자 커피사달라하던 제안이, 회식 언제 하냐 대놓고 조르던 슬랙 스레드를 찾아보기 힘들어질 때. 그런 균열이 어쩌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으나 그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에 대한 대책이랄 수 있는 것을 세워줄 수 있을 법한 이는, 그 모든 균열에 중심에 서있었다. 차현. 스칼렛.. 타미는 공책 위로 누가 볼새라 아주 조그맣게 적어본 이름 중간에 현의 이름을 써보곤 옆에 물음표를 그렸다. 당장 빠져나갔을 때 회사가 크게 타격을 입을 법한 이들. 대체할 사람을 구하려면 고생 깨나 해야할 것도 문제지만, 결국엔 대체할 수 없을 이름들.
회사의 임직원들 직책과 연차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넓은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쪽은 현보단 타미에 더 가까웠다. 커리어 상의 고민스러운 점이든, 아님 병목현상에 대한 토로든, 그런것들을 상의할 때 처음으로 떠올릴 사람. 그만큼 캘린더에 1:1도 많고, 점심이든 저녁이든 시간되시느냐 청하는 사람들도 많은 점은 아주 자연스러웠고, 그것만을 위한 시간을 굳이 빼둘 정도로 타미는 노련한 상사였다. 매니저라는게 그런거니까. 업무와는 관계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어쩌면 사람이 하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할 법한 일임에도 어디에도 따로 역할이 부여되어 있지 않는 지점이니까. 그런거 챙기라고 감투 씌워놓고 돈 더 주는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점, 굳이 누가 그러라지 않아도 중간 조율사의 역할을 도맡거나 해결사로 나서는 점, 그게 현에 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고 내심 자만하기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 모든 네트워킹의 키워드가 내내 ‘일’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애초에 일하려고 모였잖아. 머릿속 어딘가에서 울리는 변명의 주파수를 잠시 다른데로 돌려보려 통창 밖을 응시했다. 한참 아래 개미같이 빨빨대던 사람들 위로 색이 다른 우산들이 펼쳐져 있어 차도 옆 좁은 인도가 답답해 보였다.
차현에 대한 믿음의 뿌리는 두 갈래였으나, 그 중 한쪽은 지금과는 달리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복잡할 것 없이 또렷했을 때의 얘기고, 다른 쪽은…… 다른쪽은 흔들리면 곧 파국인데. 교차로 빽빽한 차량의 물결이 굵어지는 빗줄기 탓에 진출입이 눈에 띄게 느려져 뿌연 후미등을 깜빡이며 멈춰서 울리는 경적소리가 멀리 들렸다. 수면 위를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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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평소 ‘스칼렛은요- 꼿꼿해요’ 장난스런 평을 받곤 하던 자세와는 달리, 앞으로 잔뜩 몸을 구부린채 두 손으로 이마를 기댄채 생각에 잠긴 현은 깊게 들이쉰 숨을 가두었다. 괜한 짓을 부추겼던걸까. 자기의 청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공감하기도 어려웠을 가경이 조심스럽게 전한 작은 정보의 조각이 만든 파장은 해일이 되어 회사를 덥쳤다. 현이 지적한대로, 바로에서 흘러나온 정보의 소스는 잔인하고 파격적인만큼, 매력적이고 구미가 당길 수 밖에 없었다. 이걸 대비해야 된다고 말했던건 본인인데, 울렁이는 흐름 속에 휘청이는 것도 본인이었다. 한심하게도.
- 스칼렛은..상황이 다르니까, 비난하려는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해해주세요.
- 상황이 다릅니까?
- 스칼렛의 충성심은 조직보다, 아니. 말이 잘못나왔어요. 조직도 조직이지만 개인에게도 있으시잖아요. 저희랑도 타미랑도 당연히 다를 수 있죠. 그런데도 최대한 노력하시는것도 알아요.
복기해 보는 대화의 모든 내용이 다 복잡한 속을 후벼팠다.
브라이언과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질 넌지시 묻는질문은 애둘러 대답을 회피했으나, 그 뒤에도 딱히 우회상장에 대한 현의 생각과 입장을 더는 묻지 않는 것은 가경답지 않았다. 하다못해 제이의 일만 해도, 현이 무슨 생각하는지 어떤 일이 있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음에도 못해도 세네번은 넌지시 얘기할 기회와 경고를 주었던 것을 반추했을 때, 이건 적극적 회피에 더 가까워 보였다. 자기 스스로도 아직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이 지들끼리 새끼를 쳐서 온통 넘실대는 와중에, 궁금하지 않을리 없으니까.
KU의 견제를 회피하려는 치사스러운 이유로 ‘바로’가 렙유와 손을 잡는단 것만 해도 충분히 기분이 나빴으나, 여전한 의문. 사실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어물쩍 상장을 하려드는게, 진짜로 KU를 의식한 가경의 결정인건 아닐까 하는 점이 정말이지.. 엿같았다. 타미는 그조차도 이건 자존심관 무관하게 비지니스적으로 나쁠 것 없는 판단이라 했지만 글쎄. 현에겐 이건 자존심을 떠나 생각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까.
사거리 가운데서 구둣발로 있는대로 짓밟혀 쓰레기통에 사박 오일쯤 처박힌것 같은 그 자존심을 왜 떠날 수 없느냐. 그것도 현에겐 주요한 쟁점이 아닐 수 없었다. 말마따라, 상황이 다르니까. 자기의 충성심? 은 가경을 향한다는 그 평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스칼렛’의 코어 어딘가를 쥐고 흔들었다. 공사를 구분하겠다, 그 말은 얼마나 편리하고 무감정한가. 어디까지가 공이고 어디까지가 사인건지. 애초에 가경이 세운 스타트업에서 임원진 자리에 앉앗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 아닐까. 자신의 목적은 가경 옆에서, 가경에게 힘이 되어주고, 가경이 바라보는 목표를 달성하게끔 하는데 있었다. 그건 지금도 유효해야만 할텐데.
그게 유효하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조직장인 스칼렛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릴 이해해달라. 같은 편에 서서 싸워달라. 조심스럽게 청하는 말들이, 지금의 구조에서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스칼렛뿐이지 않느냔 탄식이 왜 그렇게 온 마음을 뒤흔들어 어느것 하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하는걸까. 쥴스를 떠나보내고 난 뒤부터 곰곰히 마음 한 켠을 차지했던 고민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이제는 자기의 방 안에 멀뚱히 서 있는 코끼리가 되어 있었다. 렙유의 그로쓰 본부, 본부장 스칼렛. 세일즈와 마케팅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을 책임지는, 조직원의 안녕과 성장을 돕고 협업과 팀웍을 만들어가는 조직장.
오래 참은 숨을 뱉으며, 머리가 핑 돌도록 모자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셔 폐부를 채웠다. 배타미가 너무나 필요한 순간에, 고작 문 하나 나서면 될 거리가 천릿길 같아 침을 삼켰다. 브라이언도, 타미도, 그리고.. 가경도. 본부에 있는 30여명의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자기를 찾아오는 와중에 익숙치 않은 외로움에 앉은 곳이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꺼지는듯 몸이 무거웠다.
이런거였을까. 자기가 항상 옆에 있으니 절대로 혼자라 생각치 말라 다짐을 했던 그날 밤도 가경은 이런 맘이었을까.
갑작스런 외로움과 치밀어 오르는 묵은 감정들은 안 그래도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휘저었다. 오른쪽 어깨를 꾸욱 누르며 아릿하게 퍼져나간 통증을 핑계로 눈을 감고 좁아든 미간을 팔목에 가만 기대었다. 갈림길이었다. 여태껏 내내 쉼없이 달려올 수 있던건 길이 곧았기 때문이었을까. 유도를 그만두고 책을 펴들고 앉아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공식을 외우며 보낸 날도, 첫 대형 프로젝트라고 신나서 온 맘을 다 바쳤다가 건강까지 잃고 허덕였던 시간도, 20여년의 짝사랑을 마치고 고백하던 일도, 자기 손으로 키워낸 회사를 떠나 이곳까지도.
그 면면이 선택했다 생각한 순간 모두 가경이 있었다. 함께 하고 싶고, 웃게 하고 싶고, 종국엔 갖고 싶은 모든 것과 모든 곳에. 그럼 지금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게 가경을 위하는 일인지 아닌지도, 공적인 일인지 사적인 일인지도, 아무것도 자신이 없었다.
갈림길이었다. 골인 지점이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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