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일

[시즌2] 그 후의 일상 11

아무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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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일을 확정하지 않은 해외출장. 합병사의 실사가 포함된 일정이니 당연히 프로덕트 헤드인 타미가 동행해야지 않겠느냔 현의 제안은 서운했고, 겸사겸사 같이 가서 둘이 얘기 좀 해보라며 현의 등을 떠미는 타미에겐 얼떨결에 자존심을 세웠다. 그런 의미가 아닌줄을 알면서도, 내가 알아서 해. 쏴붙이는 듯한 대꾸에 타미는 눈썹을 올려보였다. ‘선배가 뭘 알아서 한단거야’ 듣지 않아도 들은듯한 그 맘 속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려 고갤 흔들어 내보냈으니, 이젠 빼도박도 못하게 혼자 올라야 할 출장길이 되고 말았다. 몇번이고 와서, 생일도 머잖았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같이 가지 그래요. 걱정 반, 잔소리를 반 섞어 자꾸만 토를 다는 통에 도무지 결정을 번복할 수가 없었으니 배타미 탓도 아주 없지는 않다. 아마도. 그냥 내버려뒀으면 대충 무슨 핑계를 어떻게든 좀 섞어 동행해볼 기회를 만들어 봤을지도 모르는데.

현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겉으로 봤을 땐.

가기 싫다, 오늘은 가야한다. 실랑이를 좀 하다가 마지못해 아침운동을 꾸역꾸역 다녀오고, 이제 별로 느낌도 없는데 그럴 때 단도리를 해야한다며 끌고가는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잡지를 팔랑이던 현과 함께 점심을 먹고. 어찌저찌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오면, 무난한 주제에 적당한 대화를 나누다 잠들기엔 지나치게 이른 저녁에 침대로 가거나 거실에 함께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까. 가경은 그런 걱정을 속으로만 붙들어 안은채 출장까지의 남은 기간 맘을 졸이는 중이었다. 이야기하자고 들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름대로 성실하게, 최대한 이성적인 언어와 정제된 표현으로 자신을 받아줄 현을 알고 있었다. 이럴때면 나약한 정신력과 부족한 자기확신을 방패 삼아 고개를 돌리고 혼돈으로 시선을 피하는 자신과는 달리.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가경은 현의 옷자락을 붙들어 볼 수가 없었다. 괜찮다, 그게 뭐든 다 괜찮을거란 근거도 없이 달래는 말은 자길 향해 있기도 하다는 점을, 대표실 문을 닫고 조용한 사무실에 홀로 앉을 때면 겉잡을 수 없는 불안이 손을 늦추곤 한다는 점을 현이 알았으면 좋겠는데 또 영원히 몰랐음 했다.

뭐 어쩌라는건지. 폼으로만 들고 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볼펜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데스크매트를 굴렀다.

- 써머

- ..어, 네?

- 바빠요 선배?

- 아니 들어와

으쓱 어깨를 올렸다가 등 뒤로 문을 닫는 타미가 추임새처럼, 준비는. 다했어요? 묻는 말을 넘겨들었다. 어깨를 뻐근하게 했던 긴장감이 일순간 맥이 탁 풀렸다. 그리고 엄습하는 죄책감 내지는 부끄러움. 타미를 공범이라 생각하는건 타미에게도 현에게도 무례하기 이를데 없는 행동일텐데도 한조각의 안온함이 주는 평화가 달게 느껴졌다.

- 진짜 혼자 가도 되겠어요?

- 지금 같은 때, 누구를 데려가기도 누구를 안 데려가기도 이상하잖아.

- 그야 그런데. 어휴 스칼렛 저거 틈을 좀 줘야 하는데

- 그런다고 될 일도 아니고 머...

말을 흐리는 가경의 본심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래도 떠넘겨버리고 싶은 맘이 쫌 치졸한듯 싶은 타미는 앉았던 자리를 몇번쯤 고쳐앉았다. 아군일 때 빛을 발하고, 적군일 땐 발광하는 스칼렛이 버티고 있는 한, 무혈진압은 물건너간 사안이니 누구 하나 피를 철철 흘려야 될 모양이었다. 그게 은유적인 표현이길 바라는거 정도가 고작인거지 지금.

- 선배

- 왜

- 한잔할래?

- 현이는

- 걘 뭐.. 선배가 알아서 하고. 나랑 사귀냐.

뭘 어떻게 알아서 해. 뻔히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있는거, 심지어 한두시간 이내로 퇴근하지 않겠느냐 대표실 문을 밀고 들어올걸 알면서 알아서 하라는 타미에게 가경은 어처구니가 없이 황망히 웃었다.

- 난 너 팔아먹을건데.

- 어 뭐 그래라. 들키면 난 모르는척 할거란 것만 알아둬.

- 어 잘도 통하겠다.


딱히 확인하겠단 사람도 없는데, 쓸데없이 치밀하게 각자의 차를 타고 타미의 집에서 만나기로 한 퇴근시간 즈음. 유니콘 사람을 좀 만난단 핑계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진 몰라도, 눈썹을 긁적이는 현에게 가경은 뭔가 다른 이유를 덧대고 싶은 맘을 꾸욱 눌러참았다. 별 일 없는거죠? 잠깐의 정적을 뚫고 묻는 질문에 죄책감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이상한 류의 고양감과 장난기가 스멀대고 피어올라 입가를 가만두는게 쉽진 않았다.

아 그냥 들키고 싶다. 아니 그럼 서운해하겠지. 아 그치만.

괜히 현의 얼굴만 보면 꼭 이렇게나 장난을 치고 싶어 안달이 나는지. 이런 와중에 양심도 없이 완전히 속여 넘겼다가 느닷없이 알려주고는 그 분해 어쩔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심술맞은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주보고 있는 얼굴에서 읽히는 복잡한 시선이나 어쩐지 걱정스러워 보이는 표정보다도 가경은 더 먼, 한참 이전의 과거부터를 그에게서 보고 있었다. 살짝 쳐져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눈썹 주변을 만지작대는 손 끝을 잡아 허리 근처로 내려주자, 자연스럽게 등을 어루는 느낌이 따스했다.

데리러 갈까요 선배..? 꽤나 망설이다 묻는 현의 다정함이 퍼뜩 난감해, 상념에서 벗어난 가경은 고갤 한 번 크게 휘저었다. 데리러 올거면 데리고 갔지.

- 아니야. 나 오늘 좀 늦을거야 현아. 먼저 자고 있어.

- 많이 늦으세요?

- 그냥 뭐..

얼버무리는 가경에게 알맞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등허리를 만지작대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고갤 주억이다, 너무 늦지 마시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말을 덧붙였으나 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것도 매한가지였다. 한웅큼의 모래를 꼭 쥐고, 자꾸만 흘러내리고야 마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듯 맥이 없었다. 곧 있으면 출장을 떠날 가경이 가지 말았음 좋겠는 맘이 회사일 때문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도 저의 마음도 알 수가 없이 눈 앞이 뿌옇게 흐려 뭣 하나 자신이 없고 자꾸 겁이 나려는걸 티내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 다녀올게. 몸을 돌리는 가경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

익숙한듯 낯선 공간에 앉아 부산스레 부엌과 테이블을 오가는 타미를 보고 있자니, 마지막으로 여기 앉았던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게 자기 집엘 못 들어오는 집주인 얘기였지 아마. 도무지 자기 맘을 숨기지를 못하는 바보같이 순하고 투명한 애를 두고 영 갈피를 못잡던 그때가 마치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일 마냥 아련했다. 고등학교 때의 현은 마치 어제의 일 같이 가까운데 우습게도.

- 같이 좀 웃지?

- 아아. 지난번 생각이 나서

- 뭐. 선배 삽질하던거?

- 어

- 지금은 어떤데

- 비슷해

- 진짜 왜들 그럴까. 둘이 은근 잘 싸우는거 알지?

- 안 싸웠어

- 차라리 한 번 싸우는건 어때

- 싸울일도 아니지만, 싸운다고 해결이 되나.. 뷰가 다른거지 뭐. 이해해. 이해는 하는데, 중간에서 만날 수가 없잖아.

- 설득은 해봤어요?

설득? 설득도 뭐 의견을 줘야 설득을 하든 말든 해보지. 피차 마찬가지지만. 언젠가는 깨어져야 하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균형을 이룬 아슬아슬한 상황을 타미에게 뭐라 설명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망설임에는 수도없이 많은 이유와 걱정이 복잡하게 껴들어 틈바구니가 없을 뿐더러, 머잖아 곧 지구 반대편에 있을 상황을 고려했을 때 영 깨고 싶지 않다는 맥락을 줄줄이 늘어놓기가 영 면이 안섰다.

결과적으로 성의없고 짤막한, 아니. 한마디로 끝난 대꾸가 머쓱해서 유리잔에 담긴 호박색 액체를 털어넣는 것으로 면피를 했다. 딱히 더 잔소리가 돌아오지 않는걸 보니 배타미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 근데 것보다 선배, 지금 회사가 당장 오늘 내일 하는건 알고 있어?

아닌가보다.

- 뭔소리야

- 사람들 한 번에 와르르 나갈 것 같은 분위기에요. 심지어 대표가 곧 자리를 비울 예정 아니야. 그니까 차현 좀 데리고 가라니까 진짜..

- 그게 내가 출장에 현일 데리고 가는거랑 뭔상관인데

- 최악의 경우엔 차현도 같이 나갈거 같으니까.

움찔. 손끝에 흔들려 떨어질 뻔한 잔이 테이블 끄트머리에 겨우 비틀대며 안착했다. 갑작스럽고 빠르게 튀어나온, 공포에 가까운 불안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쏜살같이 훑었다가 내쉬는 숨과 함께 대기중으로 퍼졌다. 해석이 되질 않았다. 그런건 그 어떤 옵션안에도 없는 일이었다. 반사적으로 입가로 올렸던 잔이 비어 입술이 탔다. 내뱉는 숨소리가 너무 컸다. 불안이 희석된 공기는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 최악의 경우라 했잖아요. 지금 차현 중심으로 뭉쳐 사람들이. 알잖아 선배. 걔는 나랑도 선배랑도 달라요.

- 어..어

- 사람을 좀 잡아끄는 그런게 있잖아

- 어

- 차현이 의도하는건 아니지만, 걔가 뭐라그러지. 암튼, 이런걸 그냥 두고보질 못하니까.

- 그렇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내내 맞장구를 쳤다. 대답이 고작 그 모양이라 찾아온 소강상태에 잔을 채우는 타미의 손목 쯤에나 겨우 시선을 맞췄다. 시야가 어지럽고 목덜미가 답답해 한쪽 팔을 테이블 위로 괴어 뒷목을 문질렀다. 선득하게 일어난 식은땀이 옮겨가니 오한이 들어 몸이 떨렸다. 단숨에 털어넣고 싶은 잔을 노려보면서 앳저녁에 소멸한 것 같은 자제력을 끌어당기려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불과 몇시간 전에 봤던 얼굴을 떠올려 보려는데 표정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바로 앞에서 봤으면서.

- 천천히 마셔

- 현이가 자꾸 너네 집으로 도망가서 자고 오길래 왜 그러나 했거든?

- ? 뭔소리야

- 니가 문제네.

- 뭐?

- 니가 집에가기 싫게 만드네 사람을.

비뚜름하게 걸린 비틀어진 웃음을 하고 테이블에 혼잣말을 뱉는 가경의 잔을 채웠다. 그 심란한 맘이야 다 짐작할 수 없을테지만, 모르는 채로 얻어맞진 말기를 바랬다. 좀 더 나아가 그렇게 되지 않게 선배가 뭐라도 좀 해봐달라, 여태도 사수에게 의지를 하고야 마는 어리광도 없진 않겠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겠지만, 그랬음 싶은 것들에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 해봐야 했다.

- 그럼 자고 가. 차현이 두고 간 옷 있어. 그거 입어.

피식 웃은 가경은 한쪽 팔에 턱을 괸 채로 다시 한 번 잔을 비웠다.

현과는 아무렇지도 않은게 아니었다.

확인 받은 불안은 쓰고 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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