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2] 그 후의 일상 12
이상한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진동음에 부리나케 화면을 켰다가 [22일에 제가 한국으로 가는데 그때 괜찮으시면-]으로 시작하는 공항에 마중을 나오라는, 하필이면 이 빌어먹게 시기적절한 스팸 문자를 마주했을 땐 손에 들린 글라스잔을 벽때기에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현이답지 않았다. 적어도 벌써 몇시에 올건지, 정말 데릴러가지 않아도 좋을지, 내일 모레 출국인데 컨디션 조절을 해야지 않는지, 그런 연락이 와도 몇 번은 왔어야 알맞고, 종국엔 막무가내로 오겠다며 고집을 부렸어도 벌써 부렸어야 했다. 몇 번쯤 핸드폰 화면 속으로 들어갈 듯 공격적인 몸짓을 하고난 가경은 그때마다 함께 입을 다물고 안색을 살피는 타미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덜컥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휴대폰을 뒤집는 가경에게 타미는 거푸 잔을 채웠다.
- 싸운거 아닌거 여전히 맞는거지? 송가경 여긴 DMZ야. 난 차현이 이 집에서 자고가겠다고 했을 때도 매번 마찬가지였지만, 두사람 문제엔 굳이 어느쪽 편도 들 생각 없어요.
- 그런거 아니야
- 그럼 됐고. 둘이 근데 되에게 다르다? 다른데, 이런거는 좀 비슷해. 차현도 매번 와가지고는 지 핸드폰을 그렇게 들여다보더라고. 선배처럼?
옅은 장난기가 베어든 질타가 진심이 아닌 것을 알아서 맥없이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위로도 꼭 지같이 하는 배타미의 그 애매하게 넓고 미적지근하게 따듯한 마음씀씀이가 웃겨서.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숨겨봤자 빤히 다 알아챌 사이란 말과 같아 그게 맘이 놓이고 또 허전했다.
현은 타미에게서 어떤 위로를 찾았던걸까. 평소 같았으면 오디오 비는 꼴을 못 두고 보는 배타미는 언젠가처럼 가만히 눈을 마주치면 옅게 웃을 뿐 말을 아꼈다. 어쩔도리 없이 주량이 저보다는 훨씬 못 미친단 핑계로, 본심을, 걱정을, 소심하고 약은 나약한 마음과 두려움들을, 가경은 들어올린 술잔이 무거워 하나씩 내려놓았다. 너는 회사 망하면 바텐더 하라고, 적성인거 같다고, 그런 시시껄렁하고 바보같은 한담이 진짜고 나머진 다 흘려버릴 이야기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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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 댓바람부터 쓸데없이 왜 이렇게 부지런을 떨어대느냔 타미가, 차현이 알면 자기한테 난리를 칠거라고 하다못해 이거라도 마시고 나가라며 내민 미적지근한 꿀물이 외려 속을 뒤집어버렸다. 멀쩡했는데. 됐다니까 말을 안들어처먹기로는 걔나 얘나 진배가 없다. 기대고 앉은 가죽시트에서 올라오는 옅은 향조차 울렁여, 답지 않게 창문을 내리고 흐트러지는 앞머리를 몇 번을 쓸어올리다 선그라스를 꺼내썼다. 그렇게 막히지도, 그렇다고 또 원활하지도 않은 도로 위에 비슷한 형상의 사람들이 겹치는 주말 오전. 그 느긋하고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껍질 만큼은 똑닮은 모양새로 가경은 물파스를 바른듯 화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집으로 가는길이 너무 가까웠다. 왜 전화 안했느냐고 따질 수 있는 처지는 아니면서도 못내 그 질문이 여전히 목구멍을 간질였고, 그럴듯하게 늘어놓을 변명거리를 지어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어디에서 뭐하는지 안 궁금한가? 밤에 집엘 안 들어가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닌지 걱정도 안돼? 괜히 집어던져 놨던 백이 보조석 바닥에 자빠져있어, 허릴 굽히는 것조차 짜증이 치밀었다.
차현은 왜 다 괜찮을까. 아니, 분명히 괜찮지 않으면서 왜 그럼 그렇다 티를 내지 않을까. 내가 괜찮다고 해서? 그런 말을 하면 안됐던걸까.
어지러웠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기승을 부리는 더위와 쨍한 햇살이 눈두덩이를 때렸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깽판을 놓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든 안들어가고 개겨보고 싶은 맘이 명치 부근에서 대난투를 벌이는 통에 메스껍고 신물이 올랐다.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왜 다시 돌아온거니. 아. 아닌가. 내탓인가. 그치만 내가 도망쳐도 넌 쫓아와 줬어야지. ‘차현도 같이 나갈지 모르니까’ 현실에 존재하는 악몽은 어젯밤 들이붓고 채 휘발되지 않고 남은 알콜처럼 끈적하게 뒷목을 적셨다.
아 들어가기 싫다. 이게 다 전화 한통이 없던 너 때문이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가벼웠다.
어차피 집에 가봐야 혼자일텐데 운동이나 하고 갈까 싶었다가, 막상 만사가 귀찮았다. 일주일의 피로가, 업무보다도 그 외의 일들로 켜켜히 쌓인 수많은 고민거리 탓에 한 주가 어째 좀 버거웠는가 싶었다. 그리고 또, 어쩌면 데릴러 오겠느냐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까. 늦을테니 먼저 자라고 한 사람이 그럴리 없을거라는 것을 내심은 짐작했으나, 그 핑계도 덧붙였더니 아직은 얼룩덜룩하게 어두운 집구석이 휑했다.
다녀올게. 현은 가볍게 등을 두드리고 떠난 가경의 행선지를 머릿속으로 짐작해보았다. 냉장고를 열고 기계적으로 찬을 꺼내 대충 햇반 하나 덥혀 오는 동선 안에서 세수한다고 젖은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내면서도 곰곰히. 어디가서 누굴 만날 것이다 노상 보고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 아니 맞나. 이쪽에선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굳이 이야길 하지 않는 것도 생소했다. 그렇담 아무래도 그거겠지. 그럼 브라이언인가. 젓가락을 가질러 간다고 부엌을 왕복했으면서 덜렁 물컵만 들고 식탁 앞에 앉아버린 김에, 손목에 감았던 머리끈을 입에 물고 뒷머리를 그러모아 동글동글 틀어올렸다. 지난번 브라이언과의 회동은 애둘러 말해도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던 터라, 무슨 대화가 오고갈지를 자연스럽게 예상하며 질주하는 머릿속이 번잡스러웠다.
매번 자기 생각을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듯이 빤히 알아채는 가경이 나름의 배려를 했다고 생각했다. 공감할 수 없는,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 자기가 마음 쓰여할까 싶어 그냥 굳이 말하지 않고 갔겠거니 하고. 여행용 캐리어 꺼내놓는 김에 창고 정리도 좀 하고, 출장지에서 입을 정장과 그보단 조금 덜 포멀한 옷가지를 골라 걸어두고, 잠자리에 예민한 가경을 위해 안대를 비롯한 소소한 짐을 미리 챙겨두면서도. 아마 그렇다고 믿고 싶었던 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부러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뒷주머니에 꼽아둔 휴대폰을 한 번씩 체크할 때마다 조금씩 어긋나는 기대감을 조정하기가 고집스레 싫었다.
고통스레 생산적인 시간을 어거지로 밀어내고 마침내 필요 이상으로 반듯하게 정돈된 거실, 바깥 쪽 창가에 비치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했다. 소파에 깊숙히 기대 초침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가경의 빈자리가 주는 기묘한 공허감과 어딘가 잘못된것 같은 감각을 곱씹었다. 별생각이 다 들다 못해서 오진우까지 갔다가 소스라쳐 되돌아오는 길은 좀 비참하고 창피스러워 없었던 일인척 벌떡 일어나 테라스를 한바퀴 돌았다.
‘사랑해요🖤‘ 유리로 된 빈 재떨이 바닥에 곧 지워질듯한 글씨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문질렀다가, 네임펜을 가질러 들어가는 길 가경이 코팅까지 해서 액자에 넣어둔 ’현이랑 평생 행복하게 살기‘ 날아가는 글씨 앞에서 조금 서성였다. 하트에 색을 도로 뽀득뽀득 칠하면서 열대야에 걸맞는 습습하고 찐한 여름의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온 집 안에 가경의 흔적이 가득한데 그 본인이 없어서 도무지 그 하나뿐인 분실물 생각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Lost & Found’ 분실물 박스가 있고, 거기에 가경이 오도카니 서있는 상상을 해봤다가 맥없는 웃음이 터졌다. 온 우주가 다 그 박스 안에 있대도 가경은 왠지 거기 있길 거부할 것 같았다. 알아서 간다고 나와서 길을 잃어도, 잃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달까.
복잡한 사람이니까 선배는.
자기가 갈피를 못잡고 고민중이라면, 가경은 모르긴 해도 더할것이라 생각해 굳이 그 속을 비집고 들어가 헤집고 싶지는 않았다. 설명하지 않은 불명의 일정이나 2시가 넘어가도록 연락도 없이 늦는 이유 같은 것에서 예전의 가경을, 그 사라졌던 때를 연결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옅은 불안감 속에서 애써 스스로를 달래보려는 노력이 번번히 헛물을 켰다.
가경에 대한 생각을 파고들지 않으려, 가경을 찬찬히 떠올리는 밤과 새벽은 그만큼의 모순으로 빽빽하게 가득차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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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나 가을, 하다못해 겨울까지도 조금 청승을 떨어볼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미쳐버린 여름 날씨에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주차한 차 안에 영원토록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현의 거취에 대한 이야길, 심지어 타미가 넌지시 넣어준 정보라 티도 낼 수 없는 얘길 지금 갑자기 원자폭탄 투하하듯 집어던질 생각은 없지만 그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코 앞에 닥쳐있는 문제가 50m 앞에 있다. 함께 있던 사람이 타미였단 점에서 더 마음이 풀어져서 좀 제멋대로 군 것도 있겠지만, 암튼간에 뒷수습 따위 알게 뭐냔 기분이었으니까. 어제는. 근데 오늘은, 당장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사람이 본인인게 별로 마뜩치는 않았다. 화났을거 같은데.. 싸우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사과하고 싶은 기분도 아닌 막무가내의 이 거지같은 심기로는 다음 스테이지 해피엔딩은 글러먹은거 같았다. 하.
- 다녀왔어..
의식한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발소리도 목소리도 작아져 빠르게 거실 주변을 스캔했다. 없나..?
- 오셨어요?
타박타박- 하는 슬리퍼 소리와 함께 주방쪽에서 품이 넓은 반팔 위로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현이 빼꼼히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 가볍게 인사를 건냈다. 으응. 다음 말이 뭐가 될지를 추측하느라고 긴장해서 하는둥 마는둥 나간 대답소리가 들렸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선배 식사는요?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말투로, 데시벨만 하나쯤 높여 묻는 현의 질문이 너무 평이해서 오히려 긴장돼 굳은 몸을 느리게 움직였다.
- 속이 별로 안좋아서
주방 앞 복도, 어깨에 가방을 걸친채로 현의 등에 대고 똑같이 목소릴 조금 높여보자, 손을 앞치마에 슥슥 문질러 닦은 현이 큰 걸음으로 이쪽을 향했다. 왜 그러고 있어요 선배. 많이 마셨어요? 다정하게 살짝 상체를 숙여 안색을 살폈다가, 자연스럽게 팔을 문지르며 손을 가져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는걸 가만 입술 안쪽을 씹어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죠? 체한건 아닌거 같은데. 찬물을 쓰고 있었는지, 기분 좋게 서늘한 손바닥이 이마를 짚었다가, 손등이 뺨과 목을 문지르며 지나갔다.
- 아침에 단걸 먹었더니, 좀 안 맞았나봐
- 으응 그랬구나. 좀 누우실래요?
등을 위아래로 크게 쓰다듬으며 침실쪽으로 안내하는걸 또 얌전히 졸졸 이끄는대로 가면서도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머릿속에선 긍정과 부정의 시나리오가 빠르게 쓰였다가 지워졌다. 화난거 같진 않은데,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것 같지도 않고. 갈아입을 옷을 가질러 갔다가 금새 돌아와 내미는걸 고분히 받아다 옆에 내려두었다.
- 안 물어봐?
- 안물어보면 말 안해줄거였어요?
- 어? 아..아니.
- 그럼 옷 갈아입구 누워요. 저도 낮잠이나 잘래.
뭐지. 뭘까. 각오를 너무 다졌나.
부스럭대며 접혀있던 얇은 여름이불을 펼치고, 에어컨 온도와 세기를 조절하며 옆에 와 헤드에 등을 기댄 현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준비해준 옷을 집어들었다.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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