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도
2023.09.05
머리가 카펫에 짓눌린다. 펠트 카펫의 까슬까슬한 감각이 뺨을 긁었고 아루잔은 간신히 고개를 비틀어 눈와 코가 바닥에 닿는 것을 피하려고 해보려고 한다. 신의 형상은 거대하고 손가락 한 하나만으로 사람의 머리를 땅에 박아둘 수 있었다. 제 두 팔로 신의 손가락을 밀어내거나, 땅을 짚고 일어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상대할 수 있는 범위의 압력이 아니다. 머리통을 으깨지 않는 정도의 압력으로 조절하고 있는 신께 도리어 감사해야 할까? 아루잔은 숨을 헐떡인다. 인간의 신체는 이리도 연약하고 한미하기 짝이 없다.
[내가 몸소 마련해 준 자리를 망쳤더군.]
노기가 실린 목소리가 같이 아루잔을 짓누른다. 그러나 아루잔은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신이 이리 분노를 내비치니 아루잔은 자신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신이 그들의 신도를 모았고, 그 자리에서 아루잔을 카간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신이 그러고 있기에 아루잔은 일부로 샤먼의 복식으로 나타나 북을 거세게 울리며 나타나 즉위식을 굿판으로 바꿔버렸다. 결과적으로 신도들의 신앙심이 깊어졌을 테니 신께는 좋아하셔야 마땅하시지 않으신가. 비록 신께서는 그리 생각하시는 것 같지 않지만.
[이것을 어찌해야 내 명을 순순히 받들까?]
다른 손가락이 아루잔을 꾹 누른다. 다리나 팔을. 아루잔은 이를 악문다. 여기서 조금 더 힘이 실리면 뼈가 부러질 테다. 아니, 힘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지금 당장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한 겹의 살가죽이 그 경계를 유지하지만 그것은 잔뜩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 신의 손가락이 이미 뼈에 맞닿은 감각이다. 아루잔은 허억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가 이를 악문다. 소리를 내질러서는 안 된다. 천막 밖에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신이 그의 샤먼에게 화풀이하고 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 신도들의 구심점은 궁극적으로는 신일테지만 우리 모두 인세의 존재이므로 인간으로서의 구심점으로는 아루잔을 필요로 한다. 텡그리도 아루잔도 그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텡그리는 아루잔이 신의 직접적인 명령에는 반할지언정 책임을 내다버릴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계약자의 인내심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정도까지 몰아붙이고 있으리라. 빌어먹을.
그러나 아루잔 또한 텡그리에 대해서 안다. 저 자는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신에게 아루잔은 반드시 올라타서 정복해내고 싶은 성질 사나운 명마와 같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고 죽여버리기에는 꽤 아까운 말. 그 말이 날뛴다면 주인을 인정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올라타서 순응하게 만들어야한다. 저 신께서 마음에 차는 다른 말을 찾았다면 진작에 자신은 내쳐졌을텐데, 아직도 자신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따로 찾지는 못한 모양이다.
또한 명마를 꺾겠다고 다리를 꺾어버리는 짓은 지독히도 미련한 행위이다. 그러면 그 말은 명마가 아니게 된다. 달릴 수 없는 말을 길들여서 뭣하겠는가? 그러니까, 신이 쓸 수 있는 수에는 한계가 있다. 신이 아루잔을 무릎 꿇리고자 온갖 지독한 짓을 저질러도, 아루잔이 망가지지는 않은 선에서 일을 벌일 것이다.
아루잔은 거기까지만 버텨내면 된다.
그런데 그게 언제까지이지?
몸을 바닥에 짓누르던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는 시작을 의미한다. 아루잔은 빠르게 몸을 웅크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신이 더 빨랐다. 본래 친구들 사이에서 벌칙으로 이마에 딱밤을 날릴 때 쓰이는 그 손짓이 아루잔을 강타했다. 아루잔은 튕겨나가 화로에 부딪혔다. 화로가 엎어지고 잿가루가 휘날린다. 지금이 낮이라 불을 피우지 않았기에 볼이 옮겨붙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아루잔은 바닥을 붙잡고 속을 게워내기라도 할 듯 한참을 쿨럭거렸다. 재가 호흡에 섞인 탓인지 방금 충격에 숨이 뒤틀린 탓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신은 아루잔이 바닥을 기도록 내버려두었다. 그의 계약자는 칼을 자신에게 휘두르지도, 밖으로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런 짓을 해보아도 헛수고임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허나 이 방법으로 말을 듣게 할 수는 없을 정도고 끈질기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신은 느릿하게 고민하다가 말했다.
[네게 재해가 다시 닥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쿨럭, 쿨럭 쿨럭....... 당신의 은혜로 아주 어릴 적부터 받아온 삶, 그것을 제가 이제 새삼스럽게 두려워하겠습니까?”
신은 침묵했다. 아루잔은 입가를 닦아낸다. 이 배짱을 신께서 마음에 들어하는 중인지 노기를 더 쌓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을 느낀다고 해도 대답이 바뀌지는 않는다.
사실인걸? 나는 너무 어릴 때부터 재해에 노출되었어. 그래서 쇠락과 고난이 모두의 삶에 당연히 깃든 줄 알았어. 너무 당연한 나머지 공포와 절망을 느껴야 하는 줄도 몰랐어. 당신 덕분이야 텡그리.
신은 생각 끝에 다시 말한다.
[그러면 네 가축을 전부 잃어야 쓰겠구나.]
아루잔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쥔다. 신은 아루잔을 정도 이상으로 건드릴 수 없다. 그러나 아루잔이 아닌 아루잔의 것들은? 텡그리, 저 유목민족의 신이 정말로 그러할까? 아니, 할 수 있다. 유목민족의 신이므로 그는 가축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알테다. 아루잔은 눈을 감는다. 아루잔을 믿고 따르는 가축들, 그리고 아루잔의 소중한 말. 그들의 면면이 눈에 스쳐간다. 이윽고 눈을 뜨고 아루잔은 매몰차게 말한다.
“그들이 없으면 나는 죽겠지요. 초원에서 가축 없이, 말없이 살아남을 방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알 수밖에 없다. 당신은 유목민족을 아니까. 이들은 아루잔의 것일뿐만이 아니라 아루잔의 일부임을 알 테니까. 당신은 자신을 망가뜨릴 수는 없으니까. 신은 다시 말한다.
[없지는 않지.]
아루잔은 즉답 답한다.
“유목민이기를 포기하면 그리 되겠지요.”
이 말이 또 신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신은 아루잔의 팔을 집어올렸다. 어깨가 비틀리자 헉 하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목구멍에 턱 걸려서 내뱉는 일은 없었다. 신은 아루잔을 휙 들어 올려 손에 쥐었다. 신의 손에 쥐어지자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신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죽은 새의 눈이 아루잔과 마주치고 푸른 술이 늘어져 세상이 청색으로 비산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신의 얼굴. 태초의, 고대의 하늘. 인간을 닮은 형상도, 인간의 성격도 주어지지 않았던 신의 모습. 눈으로 채 담을 수 없는 아득함.
그러나 그 신은 지금은 음성과 욕망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면 그 녀석은?]
단지 그 녀석이라고 했음에도 누구를 이르는지 알 수 있었다. 안슈. 안슈 바가바티. 샤먼과 계약자를, 신도로서 적으로서가 아닌 친우로서 아루잔을 찾아오는 유일한 자. 그는 유목민이 아니며 그가 없어져도 아루잔의 존속에는 지장이 없다. 그를 한쪽 위에 올리고 다른 쪽에는 아루잔 너 자신의 모든 가치관과 의지를 올렸을 때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생명이 걸린 모든 선택은 잔인하다. 극단적인 상황 속의 양자택일은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선택을 강요한다면, 신이라는 이유로 그럴 수 있다면.
아루잔은 웃었다.
“당신께서는 그를 건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하십니다.”
신화의 시대에 신은 당신 하나가 아니다. 유목민의 초원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아주 넓어서 착각할 수는 있지만 이 세계에 비하면 실로 비좁다. 저물어가는 신. 그렇기에 카간을 세워 부흥하고자 하는 신. 당신은 다른 신의 계약자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신에게 전쟁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텡그리시여. 당신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야마 신의 계약자입니다. 정말로 당신 뜻대로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이까.”
나를 계약자로 두었으니, 모를 수가 없겠지. 내가 죽는 모습을 상상해 봐. 다른 신에 의해 죽임당하는 상황을 떠올려봐.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 같아?
당신이 지금 이렇게 대해도 결과적으로 나를 아낀다면, 그 신이 그 애를 고통스럽게 만들더라도 그 애를 신경 쓴다면, 우리가 각 신의 계약자라면, 당신은 못 해. 우리는 한미하고 작은 존재이지만 언제가 당하고 있지만은 않지.
아루잔은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는 기어코 신의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모든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아루잔의 얼굴에 미소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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