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코비즈의 미니스토리

2023.07.07

명일방주 AU

한 전달자가 초원을 걸었다. 파릇하게 듬뿍 돋아난 풀밭이 그의 발을 받들어 안았다. 전달자는 이파리들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것 없이, 흔하디 흔한 종류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전달자의 눈은 퍽 부드럽고 상냥하다. 아무리 무수히 많은 것이라도 이 대지의 기반이었는데, 통으로 잃어버릴 뻔하고야 귀중했음을 깨달았다. 요 풀들이 죄다 노랗게 말라갔을 때는 정말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지 않은가.

 

이 초원에 사는 자가 아닌 전달자가 그러한데, 이 초원을 터전으로 잡은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전달자는 언덕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에 천막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세워져 있었다. 흰 천막이 모여 구름같이 보였다. 저 거대한 무리가 초원을 유랑하며 살아가는 자들, 유목민이다.

 

“숲에서 오신 분이시지요?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전달자가 마을에 다가가자, 어느 유목민 아이가 다리가 길쭉하고 날렵한 버든 비스트를 타고 천천히 걸어서 다가왔다. 이들은 이 짐승을 길들여 타고 다니며 넓은 황야을 다닌다. 전달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아이에게 말했다.

 

“사제님을 뵈러 왔어. 여기가 맞을까?”

“네, 제대로 오셨어요! 바로 이곳이에요. 자파로프 사제님께서 이곳에 계시며 저희를 이끌고 계세요.”

 

사제를 언급하는 아이의 얼굴에 자긍심이 묻어났다. 그러다가 경계하는 기색을 확 떠올렸다.

 

“그런데, 숲의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세요? 그곳의 신앙은 이곳과 다르다고 들었는데. 숲 사람이 초원의 사제님께 기도드리러 오실 리가 없을 텐데. 우리 사제님에게 무슨 일로 오셨어요?”

 

제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미숙하고 솔직한 아이였다. 나름대로 사제를 보호하려는 모습에서는 충성심까지 엿보였다.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전달자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나는 전달자란다. 그분에게 전할 소식이 있어서 왔어. 그분에게 전달자가 왔다고 전해주겠니?”

“앗? 예? 세상에! 저, 전달자요?”

 

아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달자는 아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수상한 외부인에서 귀빈으로 격상되었음을 눈치챘다. 아이는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더니 전달자가 왔음을 전해주겠다면서 먼저 마을로 달려갔다. 곧 마을에서 전달자를 맞이할 다른 사람이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며, 전달자는 아이의 태도를 머릿속에서 되새겨보았다. 사제에 대한 경애, 충성.

그 태도를 전달자는 제법 낯설게 느꼈다.

 

이윽고 어른들이 나와 전달자를 맞이했다. 그들은 아이에 비해 태도가 유려하고 사람 대하는 것이 능통했는데, 그들의 본질은 사실 처음의 아이와 비슷했다. 특히 사제에 대한 존경이 전달자에게 호의로 이어지는 지점이. 정중한 호의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나 전달자가 사제를 만나보아야 한다고 하자 그들은 방해하지 않고 어느 천막으로 안내했다.

 

사실 누가 안내해주지 않았어도 찾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거주지인 천막은 유르트라고 불렀는데 회색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 이름에 맞게 천막들은 대체로 희거나 회색이었는데 그 천막 홀로 도드라지게 검었기 때문이다. 또한 은은한 푸른기가 감돌아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만일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아 이 마을에서 특별한 인물이 살만한 곳을 골라보라고 하면 열 명 중에 열 사람이 이곳을 고를 것이다. 단순히 눈에 띈다거나 많은 염료가 들어갔을테니 사치스러워 보인다는 이유가 전부가 아니다. 목격하는 순간 인간은 본인의 눈을 의심하게 된다. 대지에 이런 재질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전달자는 여럿 보았기 때문에 얼빠진 채로 계속 바라보는 대신 쉽게 눈을 떼고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때는 정오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샤니라크(유르트의 천장 구멍)에서 빛이 곧게 떨어졌는데 이는 화로를 빗겨나 강렬하게 바닥에 부딪히고 위로 올라오며 천막 안을 밝혔다. 그 안에는 교차한 빗금무늬 문양이 아로새겨졌으며 천막 내부의 천에도 그들 특유의 문양이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 사제가 있었다.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천이 발을 드리운 것처럼 얼굴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양쪽에 달린 뿔이 그가 카프리니임을 일러주고 있었다. 간혹 머리 위에 올라온 깃털 때문에 그를 리베리로 착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파울비스트의 것이며 장식이다. 옷에 치렁치렁하게 달린 색색의 천과 같은 용도이다. 현란하게 휘날리며 시선을 잡아끌도록 만드는 장치. 마치 높게 올라선 깃발처럼 모두가 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제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숲 마을의 전달자님.”

 

전달자는 간단히 예를 갖추었다. 사제는 머리를 까닥였고, 머리 장식이 살짝 흔들렸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쉬시며 여독을 풀고 오셨어도 충분히 괜찮았을 텐데, 이리 바로 대면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먼저 전달을 끝마치고 쉬어야 제대로 편하게 쉴 수 있습니다.”

 

사제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는 길이 험난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멀기는 했습니다만, 괜찮았습니다. 오는 내내 별 탈 없이 평탄했습니다.”

“이곳의 일이 바쁘지 않으면 제가 직접 가서 보는 것의 도리가 아닐까 싶군요.”

“하하.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전달자가 있는 것 아닙니까?”

 

전달자는 유쾌하게 손을 내저었다. 방금의 언급은 겸양, 혹은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제는 다른 말 없이 고요하게 전달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긴 정적에 전달자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설마 진짜 오시겠다는 것은 아니지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듣는 것만 못 하는 법이지요. 그저 마을에서도 숲은 충분히 보일 텐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행차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내가 가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봅니까?”

 

사제는 가만히 가죽 주머니를 기울여 마실 것을 따라내었다. 그리고 전달자에게 내밀었으나 전달자는 그것을 받지도 못했다. 사제가 지금 농담을 하고 있을까? 왜 하필 이 시점에? 사제가 자신의 몫도 따라내어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가겠다는 말은 아니니 긴장 푸십시오.”

 

전달자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사제는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이 중요하듯이, 당신들의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들의 숲이 당신들에게 신성함을 압니다. 그러니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것을 오래전에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숲이 망가지는 비극이 있었으니 이는 여러분에게 더욱 민감해지는 사안이겠지요.”

 

전달자는 그제야 숨을 내쉬고 잔을 받아들였다. 잔 속에는 치든 비스트의 젖으로 만든 흰 음료가 찰랑거렸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지? 라고 묻지 않을 정도의 눈치가 전달자에게는 있었다. 사제는 가만히 잔을 감쌌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각자의 종교가 있지요. 그러나 서로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어도 그 숲은 인근의 모든 사람에게 중요합니다. 모두의 삶은 일정 영역 그 숲에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숲에서 나온 물이 이 초원의 풀을 키우고 숲의 열매를 먹고 자란 동물이 우리의 배를 채웁니다. 이런 삶은 먼 옛날,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어느 쪽의 종교로도 이를 제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숲의 마을의 전달자여. 숲을 통제할 권리를 가졌되 숲을 책임질 의무 또한 가진 이들이여. 당신이 숲에 가진 신성함을 존중하며 침범하지 않음을 약조하였으므로 사제의 이름으로 이를 지킵니다. 대신 그대들은 숲의 복구에 최선을 다하고 숲의 소식을 거짓 없이 알려준다는 약조를 지키기를 바랍니다.”

 

전달자는 동전 몇 잎을 건네받고 쪽지를 전해주는 소년 이상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 역할에는 때로는 외교관이 포함되기도 한다. 사제는 이유를 모르게 시작도 전에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으며 분위기가 솔직히 좋지만은 않았다. 전달자는 단어를 잘 고르며 숲의 상태를 전했다.

 

“숲의 가장자리의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합니다. 물론 아직 예전만큼 울창하지는 못하지요. 하지만 요 몇 년간 회복세에 들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잎사귀는 푸르스름하게 드리워졌고 노랗게 마른 부분이 3할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작년에 잎사귀를 틔워내지 못했던 중 상당수는 올해 잎사귀를 틔워냈습니다. 공터에는 저번 봄비를 맞은 이후로 새순이 돋아났으며 적막이 가득했던 숲에 다시 벌레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마을의 생활은 많이 나아졌겠군요.”

“그렇습니다. 당장 열매를 따는 것 정도는 가능해졌으니까요.”

“하지만 중앙은 해결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네. 그곳은 아직입니다. 기존의 나무들이 많이 죽었으며, 죽지 않은 나무는 병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싹은 돋아나질 못하고 저희가 가져가서 심은 묘목도 영 비실비실하더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어버리더군요. 상황이 이러하니 인근 숲에 병이 번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병? 설마…….”

 

사제가 심상치 않은 기색으로 반응했다. 전달자는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광석병은 아닙니다. 그저 식물들 사이에서 도는 병일 뿐입니다.”

 

다시 사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저 전달자를 바라보았다. 전달자는 이럴 때면 표정도 보이지 않는 이 사제가 불편해지곤 했다.

 

“정말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시기에 그리 단언합니까?”

“이곳의 사람들이 대대로 초원을 누볐듯 우리 사람들은 대대로 숲을 관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단순히 초목에 생기는 병일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숲에 대해 전문가라는 말을 하고 싶은가 보군요. 하지만 오리지늄에 대해서는 다르지요. 당신들 중 광석병에 대해 아는 이가 있습니까? 초목의 이상을 광석병의 증상과 분간해낼 수 있는 자가 있습니까?”

 

없다. 숲의 마을의 이들은 대부분 광석병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그들 중에 광석병에 능통한 이들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순순하게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숲이 오리지늄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는 비록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아주 신중히 언급되어야 하는 사안이다. 만일 그런 의문이 공공연해진다면 숲의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사제님, 부디 진정해주십시오. 억측이십니다. 식물이 광석병에 걸린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리지늄 반응이라고 합시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너무 심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리지늄은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으나 그 위험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숲에 오리지늄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위험하다면 이는 내가 마땅히 알아야 할 문제 아닙니까? 모두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인데도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사제님. 그곳에 오리지늄은 없습니다.”

“근거를 댈 수 있습니까?”

“그간 숲을 복원하기 위해 숲을 드나든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과로했거나 숲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아 몸이 쇠약해진 이들은 있으나 그 중 광석병에 걸린 이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쪽에는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사제는 잔을 내려놓으며 여상한 기색으로 말했다. 태도만 본다면 그는 음료의 맛에 대한 간단한 평 정도나 내놓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말에 담겨있는 뜻은 서늘했다.

 

“숲에서 그 일이 일어난 다음에 유목민 무리 중 광석병에 걸린 자가 있습니다. 현재 감염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더군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였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헌데, 숲에 생각이 미치더군요. 아시다시피 우리들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숲에서 흘러나온 물을 마십니다.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며 내가 이를 중대한 위협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약이다! 전달자는 차마 소리만 못 질렀지 비슷한 심경이었다. 저 유목민들은 일 년 중 고작 몇 달만 이곳에서 머무르고 다른 기간 동안 초원을 다닌다. 사르곤의 황야는 광활하여 어디에 오리지늄이 있을지 알 수 없다. 확률로 따지면 황야 어딘가에서 오리지늄을 접해 광석병에 걸렸을 확률이 숲에서 흘러나온 오리지늄을 흡입했을 가능성보다 높다. 게다가 숲의 사건은 벌써 몇 년 전이다. 그 몇 년 동안 무수한 일이 벌어졌을 텐데 어째서 원인을 숲으로만 단정짓는가?

 

저 사제가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사제의 발언이 기성사실로 받아들여지면 숲의 마을이 맞이하게 될 일은 막대하다. 숲이 망가진 일로 숲의 마을에 불만을 가지게 된 이들은 많았다. 사제가 저 발언을 공표하면 주변 부족이 숲의 마을을 어떻게 대하겠는가? 그러한 전망은 전달자는 내다볼 수 있었고, 사제 또한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 발언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전달자는 자신이 휘말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휘말리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전달자는 입 안을 깨물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사제님.”

 

사제는 천천히 가죽 주머니를 들어 올려 제 잔에 음료를 따랐다. 그리고 느린 동작으로 입가에 가져가서 음료를 머금었다. 전달자는 더 초조해졌다. 이유가 없다면 더 위험하다. 이유가 있다면 그 원인을 해결하면 된다. 다소 대가가 따를지라도 어쨌든 해결책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없다면 마을은 쇠락하는 결말 외에 무엇을 맞이하겠는가? 마침내 입가에서 잔을 떼어낸 사제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약조를 잘 준수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숲의 마을은 숲의 일을 숨김없이 알리라는 약조 말입니까? 저는 의무를 외면한 적 없습니다. 또한 지금도 무엇하나 숨기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저희의 신에게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노고는 잘 압니다. 당신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전달자를 보내어 숲의 근황을 전해주었지요.”

 

그러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제 이 약조를 깨고 싶기라도 한 거야? 라고 말하는 대신 전달자는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지켜야겠지요. 서로 각자의 신께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초원 부족도 분명 신에게 걸고 약조했다. 저 사제가 공개적으로 직접 나서서 맹세를 올리지 않았는가? 당신이 신에게 맹세했던 일을 저버리겠냐는 전달자의 은근한 경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나 듣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전부 밝혔습니다. 대체 무엇을…….”

“사건의 전말.”

 

사제가 단호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말했다.

 

“숲이 저문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날 한 소년이 왜 사라져야 했는지 나는 아직 모릅니다. 당신들은 내게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는 대신 언급을 피했지요. 그 상태로 수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날의 일에 대해 설명을 요구합니다.”

 

전달자는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사제에게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아루잔, 너는 아직도 그 애를…….”

 

사제는 머리 장식을 벗었다. 여러 갈래로 땋은 백색 머리카락이 쏟아져나왔고 맹렬한 금빛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하늘을 모시는 사제, 아루잔이 말했다.

 

“그래, 나는 잊지 않았어.”

 

 

 

 

 

전달지는 아루잔이 아직 사제가 아니었던 시절을 안다. 조용하지만 눈치 보는 법이 없던 아이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목민은 종종 숲의 가까이에 다가왔는데, 숲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풀밭이 제법 비옥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숲의 마을은 초원의 부족과 교류할 기회가 생겼고 유목민 아루잔은 숲의 마을의 어느 아이와 어울렸다. 전달자, 아니 그 시절에는 그저 놀기 좋아하는 청년이었던 그는 둘이 제법 친밀하게 지내는 광경을 직접 보았다.

 

온몸에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전달자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잊지 않았구나. 우리는 잊었는데.”

“그날의 일이 기억이 안 난다고 둘러댈 셈이야?”

 

전달자가 사제가 아닌 아루잔에게 말한다. 아루잔 또한 전달자가 아닌 그때의 청년에게 화답했다.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려는 의도는 없었어. 다만 우리는 그 아이에 대해 그 누구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거든.”

 

아루잔이 청년을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청년은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허탈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지. 아루잔이 사제가 아니고, 오히려 그 아이가 고귀한 사제 후보였을 시절이 있었지. 귄위 부리는 일 따위는 모르던 두 아이가 노닐던 때가 있었지. 청년이 감상에 빠져있자 아루잔은 성마르게 따져 물었다.

“‘그 녀석은 죽어서 떠났으니 찾지 마라.' 이것이 내가 들은 말의 전부야. 그곳이 죽은 사람을 대하는 건 죄다 그딴 식이야? 언급도 해서는 안 되고 물어서도 안 돼?”

“그 아이의 일은, 그러는 것이 좋기는 해.”

“그쪽 마을의 방식 따위는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안슈의 일을 알고 싶어.”

“가끔 약간 무례해지는 건 여전하구나.”

“필요하다면 더 무례해질 수도 있어. 그걸 원해?”

“아니…….”

“그럼 말해.”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루잔은 이내 인내심이 바닥났고 벌떡 일어나려는 찰나 청년이 말했다.

 

“아루잔.”

“왜.”

“나는 네가 두렵다.”

 

아루잔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이 말이 사건의 전말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아루잔은 연관성을 찾아보려다가 따져 묻는 쪽을 택했다.

 

“이게 안슈의 일과 관계있어?”

 

청년을 입맛이 씁쓸해졌다. 음료는 바닥에 내려놓고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고지식한 원로들은 오히려 상관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네가 아무리 명성이 높아도 결국은 다른 신의 사제이잖아. 우리의 신앙과는 관계없는 이교의 사람이지. 그래서 그들은 너를 그리 인정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전달자로 좀 돌아다녀서 그런지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게 되더라. 너는 많은 일을 했지. 숲이 그렇게 되고 생긴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었지. 그늘이 사라진 곳에 천막을 드리워주고 혼탁해진 물을 그 천으로 걸러서 다시 마실 수 있는 물로 만들어 주었지. 이 근방에 네 천이 걸려 있지 않은 우물이 얼마나 될까? 하다못해 우리 마을의 샘에도 그 천이 걸려 있어. 사실 그래서 우리는 네게 감사해야 할 입장이지. 숲이 망가지면서 생긴 문제를 네가 해결해 준 덕분에 인근 부족들이 숲의 마을에게 크게 분노하지 않았으니까.”

 

얼핏 듣기에는 두려움을 느낄만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루잔은 잠자코 들었다. 청년이 이 말을 하는 이유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너는 이 근방에서 너무 영향력이 커졌어. 이 근방의 어디를 가도 너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칭송이 자자해. 너도 알고 있을 테지? 당장 천막 밖의 유목민 무리는 엄청 늘어났잖아. 마치 구름과 같더구나. 예전에는 분명 분명 십수 명에 불과했는데. 그만큼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겠지.”

 

아루잔은 놀라지 않았다.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청년의 말을 들었다. 그 청년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루잔이 오래 전에 이미 받아들인 것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계속 말했다.

 

“너는 기수(旗手)와 같아. 전쟁터에서 깃발을 드는 사람, 알지? 깃발을 쥔 사람 아래로 모두가 모이고 깃발을 휘두르는 대로 병사들이 움직이지. 네가 그 천을 펄럭인다면 많은 이들이 네게 모여서 네 의지대로 행할 거야. 아루잔, 너는 원한다면 친목회를 열 수도,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 마을 하나 정도는 간단하게 함락시킬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숲의 마을 또한 마찬가지이고. 나는 그것을 알아. 그래서 네가 두려워.”

 

아루잔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무언가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너는, 안슈의 일에 너희를 침공하리라고 생각해?”

“물론 그렇게 극단적인 방향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 그러나 가능성에 불과하더라도 불안 요소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내 마을을 지켜야 해.”

“침묵으로 생기는 오해 또한 불안 요소가 될 수 있잖아.”

 

청년은 답하지 않았다.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오해가 생기는 것이 나을 정도의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아루잔은 파악했다. 그러자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아루잔은 안슈가 맞이했을 많은 가능성을 떠올렸었으나 알지 못함에서 오는 답답함과 막연한 불만이 자신에게 분노로 발화했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지난 일을 알게 되면 명복을 원 없이 빌어줄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그런데 지금, 누군가 아루잔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애는 필시 아주 참담한 일을 당했을 거야. 이것을 듣고 나면 너는 결코 어제와 같을 수 없을 거야. 알량하게 굴지 마. 너를 억제하지 마.

 

아루잔은 안슈를 떠올렸다. 안슈 바가바티, 나의 친구, 몸이 약하고 밤을 두려워하던 아이, 신앙심이 깊고 어른들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려고 하던 소년. 눈치를 많이 보지만 잘 웃기도 했던 그 애.

 

아루잔은 청년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사제야. 사람들을 이끌고 보호하며 그들의 신앙을 이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야. 나를 중심으로 무수한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내 사욕으로 다뤄서는 안 돼.”

 

아루잔은 말하면서도 이질감을 느꼈다. 이건 마치 헌신과 봉사가 미덕인 교리를 말하는 것 같잖아? 그의 종교는 그런 교리 따위 없는데도. 그의 종교에서 사제는 지극히 선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닌데도. 그의 신은 초원 사람이라면 마땅히 강인하며 칼과 활을 들 줄 알아야한다고 여길 텐데도.

 

“알아. 하지만 너희는 사이가 좋았어. 어느 아미르가 자신의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 그가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마을을 불사른 이야기를 듣고 자란 자들이라면 걱정할 수밖에 없잖니. 비록 그의 아들은 발목을 뱀에게 물렸을 뿐인데 말이지.”

 

아루잔은 자신의 말이 아무 의미 없었음을 깨달았다. 청년에게는 마을의 명운을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아루잔도 그에 대응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루잔이 가진 것 중, 딱 하나가 거래 수단으로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놓으면 아루잔은……. 아루잔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영롱한 노란 빛이 전달자를 직시했다. 아루잔이 선언했다.

 

“초원의 일족은 숲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들의 사제로서 초원 사람들을 엄려하는 마음에서 그날의 일을 듣기를 청합니다. 그러니 전달자여. 내가 그 무슨 비극을 알게 되더라도 절대로 보복하지 않음을 맹세하겠습니다. 저의 신앙과 사제의 직위를 걸고, 하늘의 신에게 직접 맹세합니다,”

 

아루잔이 사제가 되었기에 전달자와 대면할 수 있다. 사제이기에 이 전달자를 압박해 이야기를 여기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제가 되었기 때문에 방금의 발언을 어길 수 없다. 평소에 아루잔이 신앙을 벗었다 신었다 하는 신발 따위와 같이 여긴다고 하더라도, 사제의 직함은 그리할 수 없다.

 

누군가 속삭인다. 너는 복수와 진실 둘 다 얻을 수 있었어. 군사가 움직이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했을 거야. 네게는 능히 그럴 능력이 있었어. 아무도 안된다고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어리석게도 한쪽을 포기하는 거야? 정말 그게 그 애를 위한 일이겠니?

 

그러나 아루잔은 안슈를 기억한다.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애라면, 아마도, 확신할 수 없더라도, 그래도, 그 애는 숲을 소중히 여겼으니까. 마음이 약했으니까…….

 

 

 

 

몇 년 전, 숲이 망가졌을 때, 물이 혼탁해졌을 때, 그리고 아루잔이 인슈를 찾아보았다가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매몰찬 말만 듣고 돌아온 어느 날 아주 늙은 전대 사제가 와서 아루잔에게 코비즈를 건네주었다.

 

“이 코비즈는 강력한 주술 도구란다. 전설에 의하면 죽음마저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했지. 네가 사제가 되어 이것을 다루게 되면 너는 아주 많은 것을 해낼 수 있게 될 거란다.”

 

아루잔은 탐탁치 않은 태도로 사제를 보았다.

 

“그럼 사제님은 그간 전능하셨나요?”

 

아루잔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오히려 사제의 업무를 행하느라 모든 인생을 쏟은 것처럼 보였다. 늙은 사제는 끌끌 웃었다.

 

“아니. 사제란 나날이 의무와 금기를 배워야 하는 직책이지.”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요?”

“신께서 너를 택하셨단다. 네가 아닌 이를 고를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 녀석은 코비즈로부터 신의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겠지. 그럼 우리 부족은 가혹한 환경에서 어려워질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네게 강요하지 않을 생각이야. 나는 네 의사를 존중할 거란다.”

“이미 협박 비슷하게 말해놓고서는.”

“사제란 의무와 금기를 배워나가는 사람이지만 나에게도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때때로 존재하니까. 억지로 떠맡기는 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

 

아루잔은 고민하다가 손을 뻗었다.

 

“그래도 내가 지금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건 확실하지요? 그렇다면 할래요. 나는 내가 무력하게 느껴졌고, 내게는 아주 많은 것을 할 능력이 필요해요,”

“나는 네게 사제에게는 의무와 금기가 있음을 일러주었다. 너는 그것을 지키지 않을 생각이니? 코비즈의 힘만을 다룰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 코비즈를 건네줄 수 없어.”

“당신도 그 사이에서 당신의 의지를 내세울 방법을 찾았잖아요.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하하하, 맞다. 그래, 현명한 아이구나.”

 

늙은 사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루잔에게 코비즈를 건네주었다.

 

“아이야. 이것은 생각보다 무거울 거란다. 할 수 있겠니?”

“네.”

“네가 무게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되는구나.”

“내 친구는 했어요. 그러니까 나도 해낼 거에요.”

 

그리고 그날 이후, 하늘의 신을 모시는 사제가 나타나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은 온 초원과 그 주변까지 퍼졌다. 그리고 두 아이가 사라졌다. 한 명은 숲에서 죽음으로 사라진 다소 조용한 아이였고 한 명은 초원에서 사제의 복식 아래로 사라진 제멋대로인 아이였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