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의 잠들지 못하는 밤
10120자
1949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그곳은 양식있는 신사들과 품위를 아는 숙녀들이라면 발걸음조차 들이지 않을 골목이었다. 어쩌다 흠뻑 고인 어둠 사이에 우연한 시선이 닿는대도 고개를 돌리고 보지 못한 척하는 것이 예의이고 미덕으로 여겨질 만한 곳. 6번 가와 7번 가 사이에 있으나 그 사이의 어떤 소수도 배정받지 못한 곳이자 그 누구도 등을 밝히거나 깨진 병 조각들을 치우려 들지 않아서 딛는 걸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구두 밑창으로 파고드는 유리 조각에 살갗을 베이기 십상인 그곳에,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걸음걸이로 윌로우 몬테규가 어스름을 밟고 나타났다.
잘 재단된 더블 브레스트 스타일의 정장에 흠결 없이 들어맞는 쿼터 브로그의 옥스퍼드화, 왼쪽 손목에서 반짝이는 손목시계와 말끔히 빗어넘긴 잿빛 머리칼까지. ‘잘 관리되었다’는 수사가 부족함 없이 어울리는 그는 허름한 골목길 따위가 아니라 반짝거리는 극장과 휘황찬란한 댄스홀 등이 즐비한 64번가의 번화가에 서 있는 편이 더욱 어울렸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투쟁이라 미간과 그림자로부터 그 피로하고도 남루한 삶의 궤적이 배어 나오곤 했는데 윌로우 몬테규는 그런 사람들의 정확한 반대항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윤택함과 유복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수백 가지 단어가 필요한 법이지만, 또 어떤 사람은 걷는 것 만으로도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을 모두 그 두 가지 분류법으로 나눈다면 윌로우 몬태규는 분명 후자에 속하리라.
그가 가볍게 오물과 쓰레기들을 피해 선술집 문 앞에 멈춰섰다. 모진 세월을 버텨 왔는지 페인트가 거의 다 지워져 이름을 쓴 철자의 흔적이 희미하게만 남아있는 간판이 골목 한켠에서 사람들이 문을 세게 닫을 때마다 곧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세차게 덜컹거렸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가게에서 나온 다음, 덜 닫힌 문을 요령 좋게 잡아챈 윌로우 몬태규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어두웠지만 사람으로 북적였고, 놀랍게도 그 누구도 윌로우의 ‘잘 차려입은’ 행색을 이상하게 보는 눈치는 아니었다. 개중 몇은 그에게 친근하게 눈인사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건네어져 오는 인사들에 차례대로 화답하고, 아는 얼굴들 몇몇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넨 윌로우는 가게 안을 더 두리번거리지 않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걸어 바 테이블에 앉았다. 이윽고 금세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후로는 굳이 나열할 것 없는 한량들의 흰소리와 농담 따먹기의 연속이었다. 헛헛한 안부 인사와 날씨 이야기. 몇 번가의 어느 골목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는 살벌한 소식과 번화가의 댄스홀에서 그럭저럭 유명한 여가수가 새로운 레파토리로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 남의 시시껄렁한 연애 이야기, 경마와 카드 게임, 술과 담배, 춤과 노래.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섞여 난잡하게 어우러지고, 곧 흥미를 잃거나 술에 취한 이들이 하나둘 씩 떠나감에 따라 가게 안이 식은 야채 스튜 그릇처럼 잠잠해졌을 즈음에,
바텐더가 그를 한번 곁눈질하더니 묻지도 않고 잔에 레몬을 띄운 위스키 한 잔을 따라 앞에 놓았다. 윌로우는 미소 짓고선, 곧바로 잔을 비운 다음에 물었다.
“역시 레몬이 정답이죠?”
어느새 가게 안에 남아있는 사람은 손에 꼽도록 적어진 후였다. 바텐더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얼음보다야 낫지.”
“꿀은?”
“레몬보다야 낫지.”
“진저 에일이라던가.”
“꿀보다야 낫지.”
“그걸로 한 잔 주세요.”
알 수 없는 문답이 한 차례 지나가고, 표정 없는 얼굴의 바텐더는 윌로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잔에 같은 술을 한번 더 채워 내놓았다. 그것 역시 단번에 비우고 나서 윌로우는 잔 옆에 술 한 잔 값으로는 과분한 액수의 지폐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로우가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바텐더를 바라보자, 바텐더는 지폐를 세더니 영수증처럼 보이는 종이 한 장을 지폐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고마워요, 잭.”
홀가분한 태도로 영수증을 챙겨 가게를 나서는 그의 뒷편, 누군가 구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듯한 기척이 들렸다. 그것을 눈치챘으면서도 아는 척 하지 않고 윌로우는 문을 닫았다. 나서는 낯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리오!”
흙먼지와 너덜거리는 전단지 따위가 볼품없이 뒹구는 밤거리를 걷던 윌로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기대했던 검은 머리칼이 건조한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면서 ‘리오’라고 불린 이는 상대가 잰 걸음으로 달려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달려오고 있는 것은 깡마른 팔다리에 높은 구두, 조금 화난 듯한 눈썹에 진하고 뚜렷한 눈매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어스름 지는 초저녁에 3번가의 대학가를 걷고 있었다면 그녀를 지나치는 행인들 중 열에서 아홉은 뒤를 돌아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윌로우는 상대가 제 앞에 서기를 기다렸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손을 내밀었다.
“헤라.”
입에 설지 않은 호명. 곧 달려온 여자가 익숙하다는 듯이 내밀어진 손을 잡고 구두 뒤축을 고쳐 신었다. 윌로우의 눈길이 발뒤꿈치에 머무르다 떨어진다.
“그 구두 또 신었네. 매번 피를 보면서도.”
“이것만큼 날 돋보이게 해주는 건 없으니까. 그보다 리오.”
신을 고쳐신는 것을 마치고 바로 선 ‘헤라’의 눈꼬리가 신고 있는 구두굽만큼이나 뾰족하게 올라갔다.
“나 있는 걸 알았으면서 내내 아는 척을 한 번 안하니?”
“들켰어? 하지만 내가 정말로 몰랐을 수도 있는 거고.”
“네가 그 정도도 모를 리 없지.”
“하하.”
대답 대신 눙치는 듯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윌로우를 한번 흘겨보고서, 헤라라고 불린 아론 빌헬름 바튼은 상대의 팔짱을 꼈다.
“그래서, 이제는 어디로 가는데?”
“글쎄. 헤라, 네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지.”
“꿀 발린 말로 날 기쁘게 해주는 건 여전하고.”
“널 위한 거잖아. 무엇이든 어디든. 그러니 함께 해줄거지?”
“기꺼이.”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처럼, 윌로우 몬테규가 능숙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펼친 손 위에 손을 마주 얹고서, 아론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가실까요, 아가씨?’ 장난스러운 첨언은 굳이 트집 할 것도 못 되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1945년, 코번트리.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유럽 전선에 파병되어 있던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본토로 돌아오기 시작했을 때쯤 벨 그린에도 희소식이 찾아 들었다. 칼과 닻이 교차된 형태의 인이 찍혀 있는 편지 봉투를 본 순간부터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전전긍긍하며 가슴 졸이던 아론의 숙모는 제71 비행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바튼 가의 차남 모리스 바튼이 곧 소집 해제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내용의 문장을 반복해서 다섯 번이나 읽은 후에야 자신의 아들이 살아있고 곧 집으로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으므로 거의 실신하기 직전의 숙모 대신 편지 칼로 뜯어둔 봉투 안에 사촌의 송환 소식을 알리는 얇은 종이를 조용히 접어 넣은 것은 하녀장이었다.
숙모는 지난 몇 년에 비하면 한층 밝아진 낯으로 이제 정말 전쟁이 끝난 것이 실감 난다며 웃었고, 주위를 둘러싼 친인척들 역시 그 말에 동조하면서 즐겁게 떠들었지만, 라디오에서 캐스터가 침중한 목소리로 일선에서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색하는 것을 포기했고, 그래서 몇백 개인지 몇천 개인지의 모를 무덤에는 빈 관이 묻힐 예정이라는 문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그들 중 많은 수가 떠나갈 적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잉글랜드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모든 장병의 귀환을 영광스럽게 반길 것입니다….’ 빈 관만큼이나 실속 없는 문장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숙모가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확인한 아론은 라디오의 전원을 껐다. 그녀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한 번도 시작된 적 없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무언가에 가까웠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늘 곁에 있는 것이었고 만져지지 않으나 느껴지는 종류의. 마치 먼지나 햇볕, 소나무나 버터 쿠키처럼 시작될 수도 없고 끝날 수도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그럼에도 살아 돌아온 이들의 귀환은 모두를 기쁘게 했다. 벨 그린은 근 몇 년을 통틀어 가늠한 중에 가장 소란스러워졌다. 돌아온 이든, 돌아오지 못한 이든, 수많은 현관을 눈물로 적시기에 충분했고 누군가의 귀환을 축하하는 만찬과 누군가의 장례식은 어렵지 않게 교차되었다. 그런 시대였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게 평등한.
아무튼간에 바튼 자작의 차남이 벨 그린의 저택으로 돌아왔던 날은 때 마침 시기 좋게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함박눈이 근사하게 내리던 날 눈 쌓인 진입로를 따라 달려 들어온 푸른색 벤틀리가 저택의 현관 앞에서 멈춰설 때에 아론 빌헬름 바튼은 창가에서 블라우스 목깃의 리본을 묶고 소매의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떠날 때보다 머리가 훨씬 짧아지고 살이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촌이 차에서 내렸고, 곧이어 웃음이 매력적인 잿빛 머리의 젊은이가 사촌을 따라 내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곧 저택에서 사람들이 나와 부산스럽게 그들을 맞이하고, 짐을 들어주고, 외투를 건네어 받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론은, 마침 고개를 들던 이름 모를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윌로우 몬테규는 제 71 비행연대의 보급과 편지의 반출 따위를 담당하는 내무부서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이었다고 했다. 유쾌하고 친근한 성격의 그는 연대원들이 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조달할 때에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성심성의껏 도와줄 만큼의 온정이 있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빠르게 발송되어야 하는 편지들의 우선순위를 요령 좋게 조정할 수 있을 만한 잔눈치가 있었다.
71 연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신세를 졌고,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아론의 사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적기의 활주로 공습으로 인해 포탄 파편을 맞고 다리를 다쳤을 때 그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벨 그린의 저택으로 전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 바로 윌로우 몬테규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론의 숙모는 윌로우에게 가장 좋은 손님방을 내어 주라고 엄숙한 태도로 지시했다.) 당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던 아론의 사촌은 윌로우의 본가가 공습과 화재로 불타버렸고, 가족들은 윈더미어로 피난을 간 바람에 당장 이번 겨울에 런던 근교에서 마땅히 지낼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렇다면 벨 그린으로 오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윌로우는 몇 번 망설이다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가문의 이름을 단 그에게 모두가 매료되었다. 겨울이 반절도 가기 전에 그는 바튼 가 사람들의 대부분을 친구로 만들었고, 눈이 녹을 즈음에 바튼 가 사람들과 윌로우는 다음 추수 감사절을 함께 보내자거나, 언젠가 브라이튼 비치에 있는 별장에 초대하겠다는 약속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 아론은 어린 조카들이 들고 다니던 봉제 인형의 뜯어진 솔기가 어느새 말끔하게 수선되어있는 것을 보았고, 유행에 민감한 작은 숙모의 머리 모양이 맵시 있게 바뀐 것을 보았다. 벨 그린의 겨울 손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눈썰미와 재치를 지니고 있었다. 신경에 거슬리는 말은 하지 않았고, 듣고 싶은 말이나 내심 기대했던 반응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억지스럽게 비위를 맞추려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아니요, 소신이나 주관을 내세워야 할 때에는 맺고 끊는 것이 확실했다.
그는 마치 마법사 같았다. 소원을 빌면 들어주는.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그리하여 결국에 처음에는 윌로우 몬테규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아론도 그가 유쾌하고 대체로 호의적이며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짧으면서도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윌로우가 벨 그린을 떠날 적에 두 사람은 재회를 약속하지 않은 채 헤어졌는데, 어쩐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단정한 악수, 가벼운 포옹, 짧은 입맞춤. 그것을 마지막으로 45년의 겨울이 끝났다.
그리고 몇 년 후, 카사블랑카. 두 사람은 기약도 맹세도 없이 64번가의 어느 댄스홀에서 재회했다. 윌로우는 새삼스러운 안부 인사를 건네거나 서툴게 당황하는 대신 손을 내밀고 여전한 낯으로 웃으면서 물었고, (‘향수 바꿨어?’) 아론 역시 매끄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내민 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는 너는 머리 길었네.’)
카사블랑카의 밤과 새벽은 길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왜 카사블랑카에 있는지 묻지 않았지만(카사블랑카에 오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 해가 뜰 때까지 잔을 여러 번 비웠고 가게를 다섯 번 넘게 옮겼으며 64번가의 댄스홀에서 만나 1번가에 있는 카페에서 헤어졌다. 다채롭게 변하던 호칭은 곧 장난스러움과 애정을 담은 애칭으로 굳어졌고, 손을 잡거나 서로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카사블랑카의 밤과 새벽은 길었다. 많은 것들이 그곳에서 시작되어 그곳에서 끝난다.
*
늦은 아침. 아론이 떠난 후 윌로우는 시간을 확인한 다음 어제 입었던 자켓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지폐와 지폐 사이에 끼워져있는 얇은 영수증에는 평범하게 품목과 가격이 기재되어 있었지만 윌로우는 마치 무언가를 계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웃음기 없는 낯으로 그것을 유심하게 들여다보았다. 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쯤 그는 탁자에서 라이터를 집어 영수증을 태운 다음 벽난로의 잿더미 사이로 던져버렸다. 곧 외투를 주워 입는 듯한 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가 났고, 집은 텅 비었다.
아파트에서 나온 윌로우는 옛 대사관 건물을 지나 관공서와 은행 따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제1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유흥가의 화려함도 낙후된 골목길의 후줄그레함도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거리와 윌로우 몬테규는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리는, 그야말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늘과 빗금을 밟으면서, 그는 길을 한 번 헤매지도 않고 다소 낡은 태가 나는 사설 전신국 문을 밀고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곧 거리가 여상한 소음으로 채워졌을 때쯤, 윌로우 몬테규는 3층 8호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는 도착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진대도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로미오. 늦었네. 어젯밤에 올 줄 알았는데.”
“뜻밖의 손님을 만났거든요.”
“벨 그린의 아가씨?”
카운터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삐그덕 소리가 나는 바퀴 의자를 휙 돌리면서 물었다. 윌로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고서 품 안에 넣어 두었던 두터운 봉투 하나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봉투를 받고 내용물을 확인한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를 내어 주었다. 틈새로 코웃음이 샜다.
“뜻밖은 무슨, 전부 알고 갔으면서.”
“쉿, 마가렛. 비밀로 해주세요.”
“아가씨가 불쌍해. 어쩌다 너 같은 바람둥이에게 걸려서는.”
윌로우는 애매하게 웃었다.
“상부의 지시였으니까요. 어느 쪽이 불쌍하다 할 수 없죠. 저도 죄책감이라는 걸 느낄 줄 아는 걸요.”
“그래서 그 아가씨는 어쩌다가 카사블랑카에까지 온 거래?”
“글쎄요…….”
열쇠를 받아든 코드네임 ‘로미오’, 미합중국 중앙정보국 작전부 비밀작전과 소속 정보원 윌로우 몬테규는 드물게 말끝을 흐리며 고리 끝에 달린 가죽 술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그의 연락책, ‘마가렛’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조심해,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줄리엣’이라고 해도 눈과 귀마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알고 있어요.”
“사랑에 빠지지 않게 주의하고.”
“별 걱정을 다 해주시네요.”
“셰익스피어의 교훈이야.”
“갈게요.”
“몸 조심하렴.”
곧 문이 닫혔다.
아무리 영미가 상호간에 우방국이라고는 해도 첩보의 논리는 세간의 규칙과는 다르게 놓이는 법이라서, 작전 활동은 철의 장막 이동과 이서를 가리지 않고 시행되었다. 작전부 사람들끼리는 우스갯소리로 뉴욕에 파견되어 있는 랭글리 사람과 런던에 파견되어 있는 서커스 사람을 맞교환하면 정확히 같은 수가 오갈 것이라는 말을 주고 받았고, 동유럽의 적지에서 서로를 만나도 완전한 협력을 기대하지는 말라는 가르침은 신입 요원들에게도 예외 없이 하달되는 기본 강령이었다.
따라서 윌로우가 영국 상류층에 인맥을 대어두기 위해 바튼 가의 차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인 차원에서는 비공식적이고 국가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사사로운 행위에 그칠 것이나, 그것은 분명히 ‘명령된 것’이었고, 서류 상으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윌로우 몬테규는 분명히 국가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였다. 바튼 가의 차남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편지를 전해준 것에 대한 보답 이상으로 ‘로미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카사블랑카에 파견된 것은 미합중국의 대외 기밀을 절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선제 입수해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영국 정보부의 노련한 비밀 요원 ‘살로메’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살로메가 카사블랑카에 와 있고, 자유 진영의 세 기둥이라고 불리는 라미레즈 외무부 차관 암살을 저지할 계획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미국 정보부는 가장 실력이 좋고 기민한 정예 요원들을 파견해 그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했고, 그렇게 파견된 요원 중 하나가 로미오. 윌로우 몬테규였던 것이다.
살로메는 미국 정보부에서 부르는 이칭으로, 일곱 베일을 벗어 춤추는 헤로디아의 딸처럼 그 정체가 천변만화하고 불가사의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스페인 계 이민자 출신이라는 소문이 가장 지배적이었고,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이라는 설과 투항한 독일군, 혹은 스코틀랜드의 목동 출신이라는 설이 차선으로 대립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살로메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 모든 것이 그저 가설로 그쳤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 심지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곱 겹의 베일이 그를 보호했다. 그리고 그가 춤을 추며 베일을 모두 벗어 던진 후의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므로 윌로우 몬테규가 카사블랑카에서 바튼 가의 아가씨를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을 것이고, 우연이어야 했고, 우연이었을 것이다. 이중 바닥으로 되어 있는 서랍 아래에 넣어 두었던 암호문이 없어지고 지내던 아파트가 불길에 휩싸이기 전 까지는 윌로우 몬테규도 그렇게 믿었다.
*
“우연일 리가 없잖아.”
저 멀리서 울려퍼지는 화재 경보와 사이렌 소리를 뒤로 하고서 ‘살로메’가 웃는 낯으로 머리에 두르고 있던 실크 스카프를 풀어내렸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 밤의 폭포처럼 아름답게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그의 연락책은 가볍게 혀를 찼다.
“로미오가 불쌍하네. 어쩌다 자네 같은 거짓말쟁이에게 걸려서는.”
“불쌍한 건 나지, 올리버. 팔자 좋은 한량인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알고 보니 자유 진영의 촉망받는 작전부 요원이었다니, 이런 슬픈 이야기가 또 있겠어?”
“셰익스피어의 전례가 있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이라도 하게.”
싱거운 핀잔에 웃음이 샜다. 아론은 솜씨 좋게 눈화장을 고치면서 겉옷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입고 가발을 썼다. 곧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된 ‘아론 빌헬름 바튼’은 낮은 굽의 단화를 골라 신으면서 까진 뒷꿈치를 한번 만지작 거렸다. 그의 입술이 닿은 자리였다. 약간의 망설임이 영웅의 발목을 잡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손끝에서 어른거렸다.
그러나 수많은 밤과 낮을 함께 하는 동안에도, 카사블랑카의 모든 골목과 벨 그린의 모든 전나무 사이를 손 잡고 거니는 동안에도,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속임과 기만은 더하고 뺄 것 없이 공평했다. 관계의 저울이란 기울어지는 순간 종말을 맞는 것이고, 동등하지 못한 애착은 기울어진 배처럼 언젠가 반드시 쇠몰을 겪게 되는 법이다. 아론은 윌로우 몬테규 역시 불만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가 앗긴 만큼 앗기 위해 자신을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기이한 계산이자 일그러진 논리에 기댄 신뢰였고 형태를 달리 한 유대였으며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애정이었다. 아론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만족은 사감이다. 스파이에게 가장 위험한.
상념에 빠져 있던 아론에게 ‘올리버’가 일침처럼 충고했다.
“아무튼 조심하게, 아무리 사랑에 빠진 ‘로미오’라고 해도 눈과 귀마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알고 있어.”
“사랑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고.”
“별 걱정을 다 해주시네.”
“셰익스피어의 교훈이야.”
“갈게.”
“돌아올 적에는 세례 요한의 목을 가져다 줄 테지?”
“기꺼이.”
곧 그녀가 웃는 낯으로 문을 닫고 나섰다.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카사블랑카의 밤과 새벽은 길고, 많은 것들이 그곳에서 시작되어 그곳에서 끝난다. 사랑과 우정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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