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별의 궤도

5180자


전별의 궤도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최종 수감지의 상태가 제법 양호했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벽과 지붕이 있었고, 물이 새지도 않았고 쥐가 나오지도 않았으며 하루 두 끼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구멍 나지 않은 모포가 지급되었다. 무엇보다도 곰팡이 핀 빵이나 썩은 고기로 끓인 수프 따위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안카 아잔켈은 구석에 웅크려 눈을 감았다. 이곳은 이감되어 오기 전에 거쳤던 곳들에 비하면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만큼 안락했고, 고요했다. 그러므로 임시 구호소 한쪽을 뜯어 만든 구류장이나 찬 바람이나 비가 그대로 새는 축사에서의 생활을 잊으려고 애쓰기도 전에 피곤한 육신에 수마가 선객 되어 찾아들었다.

꿈 속에서는 재판을 받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검사와 변호인석은 비어있고, 거대한 방청석에 심판인들이 빼곡하게 피고석의 자신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기형적인 법정이었다. 판결은 변함없이 유죄. 집행되는 형의 종류만 조금씩 달라졌다. 무기징역, 벌금형, 추방형, 때로는 사형. 군사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안카 아잔켈의 심신이 해안 절벽의 푸른 바위처럼 조금씩, 그러나 착실하게 깎여 나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일을 시작한 이후로 줄곧 그랬는지도 모른다. 속에서부터 삭고 녹아서 건드리면 파스스하고 부서지고 말, 잘못 보관된 금속 공예품처럼 안카 아잔켈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지쳐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어느 한순간 허물어지듯 끊어진 것은 약 반 개월 전 공화국의 외딴 국경 도시, 고요한 목장의 울타리를 넘어 푸른 초지의 이름 모를 들꽃 이파리를 짓밟고 들어온 군홧발들이 엄준한 기세로 국경을 포위하던 어느 날이었다. 농부의 아내로 위장해 국경을 넘으려던 안카 아잔켈의 낡은 짐가방 밑면에서 기어이 군이 유실했던 기밀 서류가 발견되던 순간에 그녀는 겸허한 심정으로 눈을 감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격발음은 울리지 않았지만, 정체가 드러난 이상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사살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뒷머리에 와닿는 차가운 총구의 감각은 아직도 꿈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곤 했다.

안카 아잔켈은 연방의 첩자였다.

그로츠와프의 작전지에서 신분 노출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마지막까지 버티던 안카가 믿고 있던 것은 오로지 본국이 마련해 줄 거라던 탈출 루트뿐이었다. 반년 동안 공들여 구축한 위장 신분의 보장성과 (‘카를레타 밀러’라는 이름은 자신과 썩 들어맞는 이름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 이름으로 쌓아 올린 교우 관계, 신뢰 자원 따위는 결코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은 것이 아니었고,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대령의 비서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에는 그간 들였던 공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종류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든 첩보 활동이 그렇듯이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카를레타 밀러의 상사이자 그로츠와프 사령부의 총책임자인 아르놀드 대령 역시 바보가 아니었기에 끝내는 그의 주변에 첩자가 숨어들어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해내기 위한 보안국의 감시와 의심은 점점 더 첨예해졌다.

안카 아잔켈은 연방에 충분히 충성했다고 생각했으나 연방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연방 본국은 안카 아잔켈의 목숨과 안카 아잔켈이 이루어 낸 성과를 저울질하다가 후자를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로 결정했고, 안카가 용의선상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작전의 강행을 지시했다. 결국 좁혀진 수사망이 가엾고 무고한 사무관을 두 명이나 때려잡고 난 다음, 안카가 가까스로 목표하던 서류를 빼돌려 본국의 연락책에게 넘긴 직후에, 칼끝은 기어이 안카 아잔켈에게로 향했다.

사령부 소속 헌병들이 그녀의 허름한 아파트를 기습적으로 덮치던 날 밤에는 공교롭게도 폭우가 쏟아졌다. 집 안은 텅 비어있었고, 열린 창문을 통해 비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쳤다. 카페트 한 장 깔려 있지 않은 마룻바닥 역시 볼품없이 젖어 있었다. 조금 수줍고 내성적이지만 잘 웃고, 일 처리가 빠르고, 손끝이 야무진 시골 출신 재단사의 딸 카를레타 밀러는 그렇게 그로츠와프를 떠났다.

기민한 대처가 무색하게 안카는 곧 봉쇄된 국경을 넘지 못한 채 체포당했고, 그의 연락책은 총살당했다. 반 년간의 노력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직후에 서부 전선의 격동으로 책임자들이 모조리 전방으로 차출당했고…….

처분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반 개월이 흘렀다. 몇 번이고 수감지를 옮겨 다니던 안카는 결국 공화국의 수도 데른스크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데른스크로 호송되어 오는 스파이의 결말은 둘 중 하나다. 죽거나, 배신하거나.

 

 

구석에 웅크린 채로 반쯤 졸고 있던 안카가 완전한 잠으로 빠져들기 전에, 철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잔켈 양?”

갑작스레 들려온 사람 목소리에 안카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다가 책상다리를 걷어차고 말았다. 책상 위에 놓인 물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아…….”

그 모습을 보았는지 문밖에서 곤란한 기색이 났다. 곧 문밖에 서있던 남자가 열쇠로 감방 문을 열고 들어와서 몸을 굽혔다.

“미안해요. 내가 놀라게 했나 보네요. 나는 그냥 혹시 어디 아픈가 해서.”

키가 크고 눈매가 순한 남자였다. 혈색은 좋았으나 전반적인 색소가 옅었다. 전형적인 공화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이질적인 생김새. 그는 젖은 바닥을 보더니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품 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어 바닥에 흐른 물을 닦았다. 안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바닥에 흐른 물을 닦는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가 자신에게 얼마나 생경하게 다가오는지를 깨닫고 기이한 기분이 되고 만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버린 동화 속 소녀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안카는 천천히 굽힌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잔켈 양의 연방 송환 과정 일체를 담당하게 된 훤효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아잔켈 양.”

“……송환?”

“예. 아잔켈 양은 연방에 억류되어있는 공화국 육군 소령과의 맞교환 조건으로 연방으로 돌아가게 되실 겁니다.”

 

 

*

 

 

훤효가 찾아온 이후로 안카에 대한 처우는 급격하게 개선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일급 범죄자에서 억류 중인 적국 인사 정도로 위상이 변화한 모양이었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도 훤효의 살뜰함이 그녀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에 큰 몫을 했다. 군에 어울리지 않는 세심함과 다정함을 갖춘 그는 안카가 지내는 방이 춥지는 않은지, 식사는 제때 주어지는지, 부당한 일을 겪고 있지는 않은지를 꼼꼼히 살폈고 그 외에 안카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그의 무사 송환을 위해 성실히 일했다.

훤효의 노력 때문인지, 이곳이 전선으로 따지면 최후방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인지, 송환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는 안카가 훤효와 함께 사령부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처분을 각오하고 있던 지난 반 개월의 긴장에 비하면 꿈과도 같은 생활이었기에 되려 현실감이 희미했다.

“너도 군인 아니야?”

안카가 잘 삶아진 당근과 브로콜리를 차례로 포크에 꿰면서 물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탁자 위에 무른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훤효의 태도와 말투가 좀처럼 군인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렇긴 한데, 내근직이에요. 군인보다는 보험사 직원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안 어울려.”

“하하, 다들 그렇게 말해요. 전역하면 다른 일을 하려고요.”

“무슨 일?”

“글쎄요, 여행을 좀 다닐까 하는데 어때요?”

“좋겠다. 나도 같이 가고 싶어.”

무심코 그렇게 말한 후 안카는 당황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훤효는 다소 난감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웃고 있었다.

“언젠가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그리고 화제는 곧 전쟁 전에 유명했던 관광지와 유적지, 한 번쯤 가 보고 싶었던 명승지와 경치 좋은 산과 들, 신비로운 호수와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바다에 관한 것으로 옮겨갔다. 연방의 유명한 설산과 얼음 호수, 공화국의 보리밭과 해안 절벽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그들의 틈새에 깊게 패인 금과 보이지 않는 골이 있었다. 때로 국경은 철조망이나 장벽이 아닌 형태로도 현현하기에.

 

 

그리고 마침내 안카 아잔켈의 송환일이 다가왔을 때, 두 사람은 공화국과 연방의 국경 근처까지 가는 유일한 열차가 정차하는 데른스크 기차역의 6번 승강장에서 작별을 준비했다. 어느새 초겨울에 접어든 날씨는 쌀쌀했고, 아침에 내린 눈은 얇게 쌓인 채 녹지 않고 얼어붙어 발밑을 미끄럽게 했다. 행여나 미끄러질세라, 기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훤효는 안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얇은 가죽 장갑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손을 놓아야 할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곧 관리국 사람들의 동행 아래 기차에 오른 안카가 힘주어 유리창을 걷어 올렸다. 승강장에 선 채로 창가의 안카를 올려다 보면서 훤효가 웃었다.

“잘 가요, 안카. 다시 보는 일은……. 없는 편이 좋겠죠?”

“응. ……지금까지 고마웠어.”

“제가 해드린 것도 별로 없는걸요. 사실은 조금 더…….”

말 끄트머리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청보리 이삭처럼 부드럽게 수그러들었다. 안카는 무슨 말을 하려 했느냐고 구태여 묻지 않았고, 훤효도 덧붙이지 않았다. 곧 역무원이 종을 울렸고, 출발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귓가에 먹먹하게 메아리 쳤다.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입맞춤을 나눈다. 손수건과 깃발이 나부끼고, 노랫소리와 속삭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을 비추는 수정과 거울이 된다. 그 눈부심에 눈이 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은 이를테면.

당신의 우는 얼굴이라던가.

기차가 동쪽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안카의 옆자리에 앉은 관리국 직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바로 앉히고 열린 창문을 닫아 내렸다. 직전, 아주 짧은 틈 사이로 안카가 무언가를 속삭인 것 같기도 했는데 기적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기차가 당신을 태우고 동쪽으로 달려 나간다. 동쪽으로 달려 나간다. 강을 건너고 계곡을 지나 다시는 보지 못할 곳으로 당신을 데리고 가버린다. 전별의 궤도를 따라서.

훤효는 자신도 모르게 승강장을 박차고 달렸다.

“안카!”

 

모든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하고 있고, 별들의 교차조차도 필연적인 결별을 내정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그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과 젖은 이마에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