𝑳𝒖𝒏𝒂𝒕𝒊𝒒𝒖𝒆

폭풍으로 호수에 갇힌 지 벌써 몇 달이 흘렀다. 에드먼드는 호수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 누구도 없는 곳에 혼자 남겨졌단 사실이 비참해 비가 온 날이면 호수 밖으로 기어나가 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물 밖에만 나가면 무거워지는 몸과 빠르게 가빠오는 호흡으로는 호수 주변을 벗어날 수 없었고 물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땅에 난 것들로부터 아가미를 다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아야 했다. 완전히 갇히고 만 것이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비가 쏟아진다거나 또다시 폭풍이 몰려와 에드먼드를 데려간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 끝이 멜레우스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운이 나쁘다면 물이라곤 없는 육지 한가운데에 떨어질지도 몰랐다. 에드먼드를 포함한 인어들 대부분은 나갈 일 없는 물 밖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라면 거의 무지했고 그것은 하늘에서부터의 일에도 적용되었다. 인간들이 호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듯이.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인어와 인간은 서로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인간이 섣부르게 물가에 다가갔다가는 인어에게 잡혀 뼈도 못 추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고 인어는 인간을 사냥하거나 섭식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였다. 인간들은 어린 인간들이 물가에 가는 일이 없도록 그것의 모습이 아주 기괴하고 흉측하다느니, 노래로 인간을 홀려 물속으로 끌어들인다느니 하는 유언비어를 퍼트려댔다. 인어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우스울 뿐이었다. 인어를 본 인간의 대부분은, 그를 가지겠단 욕망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물속에 뛰어들었으므로.

자연의 질서가 뒤바뀐 것은 인간들이 전쟁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인간은 더 효과적으로 다른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느라 물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그것으로 인어에게 반격하기까지 했다. 먹이를 잃은 인어들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호수 안으로 눈을 돌렸다. 인간들은 더 이상 인어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어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것의 가치에 대해 떠들어댔고 인간을 사랑한 인어의 가여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인어들 사이에서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된 인어들은 더 이상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인어가 자취를 감추자 인간은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이라 생각했다. 피부로 숨을 쉬지 않게 된 인어는 인간이 서로를 죽이다 결국은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인어와 인간은 여전히 공존하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전설로 남은 채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갔다.

호수 안을 누비는 고기들은 에드먼드에게는 익숙한 것들이었고 멜레우스에 있던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그 수였다. 멜레우스에서는 ‘남은’ 고기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때가 되면 형제들과 함께 몇 마리 고기를 사냥해 먹고서 집으로 돌아갔고 며칠 뒤에 배가 고파지면 다시 형제들과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곧, 전처럼 살다가는 조만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작은 호수는 에드먼드 하나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듯했다. 일부러 배를 곯는 날이 늘었음에도 호수는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겨울이 되며 호수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에드먼드의 몸은 점점 둔해졌다. 며칠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잠을 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워낙 광대한 크기 탓에 호수 전체가 어는 일이 없었던 멜레우스에 있을 때는, 그런 상태는 고작해야 며칠을 이어졌고 그마저도 수면 가까이를 드나드는 에드먼드만 가끔 겪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먼드가 고립된 호수는 멜레우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얕아 수면 위로 가지 않아도 체액이 굳는 듯한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들어 버렸다가 제 지느러미 움직임에 놀라 깨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에드먼드가 걱정하는 것은 잠든 새 비열한 기생충이 아가미에 숨어든다거나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커다란 고기에게 팔을 뜯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호수 안에는 에드먼드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에드먼드가 진실로 걱정한 것은, 자신이 다시 눈을 뜨는 것이었다. 눈을 뜨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저 무료한 시간만을 보내야 했으니까. 호수의 표면에 물결이 일기 전까지도 에드먼드는 그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고서 죽음을 기다렸다.

바라지 않던 봄이 오고서야 에드먼드는 억지로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수면에 올라가면 따스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고 땅에서는 조그만 풀꽃들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에드먼드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보랏빛 꽃도 하늘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고독함에 물속에 있음에도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아, 차라리 물 밖으로 나가 저 햇살에 말라비틀어질 용기라도 있다면! 그러나 호수에서 눈을 떴을 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다시는, 다시는 말라가는 아가미와 억세게 피부를 할퀴어대는 육지의 풀과 연약한 피부를 꿰뚫을 듯 날카로운 암석 같은 것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그저 겁쟁이처럼 물속에서 일렁이는 수초에게 말을 걸고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 잠들 뿐이었다.

어떤 시간에 저택을 보아도 그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은 일절 볼 수 없었고 인간의 말소리나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일도 없었다. 에드먼드는 저택 외벽을 덮은 이끼가 자라는 것을 바라보며 멜레우스에서 지겹도록 듣던 형제의 말을 떠올렸다. 물 밖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걸. 아! 형은 언제나 나보다 현명했는데, 어째서 나는 어리석게도 인간에 관한 것만은 무시하고 있었던지. 에드먼드는 이제 저택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눈앞에 놓인 것을 걱정하기로 했다. 겨우내 비어 있던 배를 이제사 채우려는 듯 밀려오는 허기를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입에 무엇인가 넣어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무슨 생각을 하려고 해도 온통 날 선 감각 탓에 물속을 헤엄치는 온갖 것들에 주의를 뺏기고 말았다. 호수를 헤엄치는 것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고 그중 대부분이 제법 큰 크기를 가진 것들이었다. 조그만 고기밖에 남지 않았으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더욱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종종 이성을 잃었다가 피라미 같은 것의 뼈를 입에서 빼낼 때는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한심했다. 어느 정도의 참을성이 있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호수 바닥에는 살점 하나 남지 않은 하얀 생선 뼈와 형체를 잃어가는 내장이 쌓여만 갔다.

여름이 가까워지며 호수는 생기를 잃었다. 그 속에 수초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런 날이 올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여름이 채 다 오기도 전이라는 것이 당혹스러웠을 뿐이다. 생명이 사라진 호수는 따스한 초여름의 하늘 아래서 서서히 부패했다. 먹을 이 사라진 녹색 조류가 수면을 뒤덮어 대낮에도 호수 안은 어두웠고 흐르지 않는 물에서는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호수를 늪처럼 만들어버린 그것을 제거해 보려 물 밖으로 건져내기도 해 봤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가미 하나하나에 눅눅한 조류가 끼어버린 듯 호흡이 답답해졌고 물 밖으로 나와 피부로 숨을 쉬는 시간은 길어졌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서는 그마저도 오래 할 수 없었고 밤이 되어야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에드먼드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허기였다. 그전까지는, 어쩌다 운 좋게 호수로 날아든 새나 물을 마시러 온 들짐승을 재빠르게 낚아채기만 하면 풋내가 좀 나기는 해도 만족스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어버린 호수가 천천히 썩어 들어가고 있는 지금에서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땅의 짐승조차 호수를 찾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호수 속에서 굶어 죽는 것과 저 희미한 햇살에 질식하는 것 중 무엇이 덜 고통스러울지를 저울질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은 멜레우스와 이어지기라도 한 듯 끝없이 비가 내렸으나 눈을 뜨자 수면 위로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세찬 비에 싸늘히 죽고 말았던 며칠 전의 어린 사슴은 이제 몇 입도 남아있지 않았다. 곧 죽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니 에드먼드는 그저 배고픔을 참을 수 있을 때 다시금 폭풍이 불어오기를 바라며 호수 바닥에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은 유독 밖이 소란스러웠지만 에드먼드는 호수 바닥을 벗어나지 않았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아야 폭풍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었으므로. 그런데 밤이 되자 물 밖에서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나 짐승의 것이 아닌, 지극히 규칙적이고 아름다운 소리가.

에드먼드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몸을 일으켜 수면으로 다가갔다. 육지에서 그런 소리를 낼 만한 것은 인간뿐이니까. 저택 쪽으로 눈을 돌리자 어둑한 유리창 중 단 하나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잔잔하고 단조로운 선율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아, 그때의 감상이란! 그를 마주한 순간 에드먼드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은 지금껏 본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수면 위로 헤엄쳐 온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 사람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에드먼드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이건 분명 사랑일 거라고. 그러나 머지않아 희미한 빛은 사라졌고 그 사람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에드먼드에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저택 안의 여자를 관찰하는 것. 낮에는 태양의 열기 때문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고 무엇보다 그 사람을 잘 볼 수 없었다. 해가 진 다음에야 그는 처음 봤던 날과 같은 자리에 앉았다. 어두운 저택에서 단 하나 밝은 창 안에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 왕자님과도 같았고 우수에 찬 눈빛과 거침없이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손에서는 강단과 신념이 느껴졌다. 에드먼드는 그 이야기의 결말을 떠올리지 않으려 더욱 저택 안의 여자에 집착했다. 그 사람에게 닿고 싶어 몸이 타는 것만 같았다. 몸에 걸친 하얀 옷감이 부드러워 보였다. 이따금씩 머리를 쓸어 넘기거나 입으로 숨을 내쉬는 그를 볼 때면 에드먼드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 하곤 했다. 인간에게는 어떤 아가미가 있는지가 궁금했고 그를 볼 때면 심장이 강하게 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숨을 한번이라도 나의 것과 나란히 놓을 수 있다면! 그를 보고 있을 때면 이상하게도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그가 호수 쪽을 봐주길 바라며 괜히 꼬리로 물장구를 치곤 했다.

그러나 에드먼드의 애정이 무색하게도 저택 안의 아름다운 인간은 에드먼드에게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며칠을 그렇게 보냈는데도. 먹을 것도 다 떨어졌으니 이제는 정말 굶어 죽을 것이었다. 저곳에, 이 호수의 깊이보다도 짧은 거리에, 그토록 만나고 싶던 인간이 있음에도. 에드먼드는 절망스러운 마음을 애써 달래고서 수면 위로 향했다. 햇살이 강하지 않아 그저 미지근한 일광욕이라도 하기 위해.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가 습한 게 꼭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며칠 전처럼 거센 비가 와 준다면, 그래서 들짐승 몇 마리가 호수에 더 빠져 준다면—

등 뒤에서 낙엽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에드먼드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영영 자신에게 가까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람이 서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눈길도 주지 않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서야 다가와 주다니. 그러나 에드먼드는 유영할 듯이 기뻤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모습에 숨이 가빠오는 듯했고 위가 강하게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에는 인간을 사냥해 먹기도 했었다. 예상도 못 한 일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그가 입을 열어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안녕.”

✽✽✽

서머셋의 연구는 동료 학자들까지 외면하거나 부정했을 정도로 다소 과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머셋은 그것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줄곧 신성한 아피아리우스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의 사랑이 우리를 보살펴주고 이 땅에 발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결국 모든 것은 그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서머셋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기억나지도 않을 때부터였으니 거의 평생이라 해도 맞을 것이었다. 가끔 어머니와 함께 만나던 노엘이 그 천진한 얼굴로 아피아리우스의 자비로움에 대해 말할 때면 서머셋은 지루함을 참을 수가 없었고 둘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교회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서머셋이 믿지 않는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이었다. 사니아와 읽던 동화책, 아피아리우스의 서, 그리고 셀레스틴. 이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그것을 원동력 삼아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한눈에 반한다던가, 그 사람만 보면 심장이 뛰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다던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던가… 적어도 서머셋이 사는 내내 가족이—사니아가—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유의 감정을 느낀 적이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머셋이 남자를 볼 때 느끼는 것이란 정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그렇기에 자연히 그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던 것이다.

식물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사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고 이는 동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오직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반대로 인간에게만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물과 인간은 모두 욕정한다. 정욕은 우리의 자궁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가정을 이끌고 부양하는 여성의 필요에 남성이 순응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그런데 인간만이 감정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으므로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감정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사랑이란 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욕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는가? 나는 남성에게서 소위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내가 남성을 볼 때 느끼는 것은 순수한 욕망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낭만적 허구를 좇는 것은…

그러나 서머셋이 간과한 것은, 자신도 한낱 아피아리우스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밤낮으로 찾다 책상 위에서 잠이 들어도 서머셋의 성이 위스테리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영혼은 실재하며 인간은 다른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고귀하다는 사고방식 아래서 자랐으며 자신을 가장 아껴주던 사람마저도 그러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근육이 전기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혀내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서 급부상한 서머셋도, 그토록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이 고작 전기 신호 같은 하찮은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머셋의 책에서 감정이 만들어지고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과정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었으나 그는 이상하리만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집착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그는 스스로의 이론마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것에 몰두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켜야만 그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오르토스로 온 뒤 서머셋은 낮에는 에이서를 도와 별장을 청소하거나 낡은 곳을 보수했고 밤이 되어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촛불과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동료의 이론을 검토하거나 자료를 찾아보았고 차마 자신의 위치와 현실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때에는 오르골의 태엽을 감았다. 언니의 오르골에서는 성가대가 부를 것만 같은 선율이 흘러나왔지만 마음에 들었다.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없는 음악은 어쩐지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졌으므로. 창문을 열어 호수에까지 오르골 소리가 닿게 하면 그 너머에서 사니아가 자신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마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기를 며칠, 아침 식사를 하던 서머셋의 곁으로 에이서가 다가와 말했다.

“공자님, 호수에는 가 보셨습니까?”

“…아직.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지도 꽤 지났는데 한 번도 가 보질 않았구나.”

“며칠 전부터 물소리가 요란하던데, 아주 커다란 물고기라도 사나 봅니다. 마침 등꽃도 만발했으니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다녀오시는 것이 어떨지요.”

“그러지.”

“날이 흐리니 비가 오기 전에는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 에이서.”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마지막으로 호수를 찾은 지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밤에는 그저 검게 보여 알 수 없었는데, 흐릿한 햇살 아래 비친 호수의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수면이 탁한 것이 상태는 별장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장마 탓이라 하기에도 이미 끝난 지 한 주는 더 지나버렸으니. 에이서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낚시라도 하라는 이야기였겠지만, 글쎄. 호수라기보다는 늪에 가까워 보이는 그곳에서 물고기가 잡힐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저렇게 더러운 물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가 그만큼 클 수 있을까. 그런데, 에이서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던 서머셋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호숫가의 둥근 바위 위에 올라앉은 그것은 길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채 별장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인간과 비슷한 상체에 오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는 꼬리를 가진,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린 시절 사니아가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거 아니, 서머셋? 이 별장 호수 안에 인어가 살고 있대…

그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소리를 들은 듯 그것도 서머셋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기 있는 살결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고 비늘로 덮인 꼬리와 반투명한 지느러미는 희미한 햇살 아래서도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였다. 편평한 맨가슴을 여자처럼 드러내고 있는 그것을 본 서머셋의 심장이 더욱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서머셋이 지금껏 남자를 보았을 때 느껴온 것이란, 그저 본능에서부터 나오는 정욕뿐이었으므로. 그러나 지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것과 마주한 서머셋의 가슴 속에서 이는 감정은 그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겪어 본 적이라곤 없는 설렘과 동시에 밀려오는 강한 호기심. 그 기저에는 그것의 가녀린 몸을 가르고 낱낱이 해부해 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가주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욕망과 대주교와 셀레스틴을 처단하려는 야욕이 있었으나 서머셋은 알지 못했다. 단지 그 강렬한 감정에 휘말려 그것에게로 다가갔을 뿐이었다.

안녕.

서머셋은 그것이 사람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사람에게 하듯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입만 벙긋거리며 옅은 숨만 내뱉고 있는 그것의 모습에 잠시 동안 들떠 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서머셋은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아무리 인간을 닮았다 해도 역시 말은 할 수 없겠지, 언어도 알지 못할 텐데 어떻게—

“안녕.”

자신을 향하던 얼굴이 그 소리와 함께 미소 지었다. 서머셋은 쥐고 있던 펜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