𝑳𝒖𝒏𝒂𝒕𝒊𝒒𝒖𝒆

아피아리우스의 은총을 받은 땅 알베아리움. 그 위에 살아가는 어린 꽃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 아피아리우스를 찬양하며 그의 빛나는 성실함과 끈기, 노력을 본받기 위해 힘썼다. 섬세하고 우아한 날개와 몸을 찬미하고 사람들을 이끄는 통찰력과 지도력에 감탄했다. 그것은 젊은 시절의 셀레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셀레스틴은 신실하고 우수한 기사들을 여럿 배출하며 심지어는 최초의 남기사까지 나온 적이 있었던 위스테리아 가문의 뛰어난 인재로서 기사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기사로 발탁되었다.

선대 때부터 오로지 기사 활동만으로 후작위까지 하사받은 위스테리아의 사람이었으니 실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특히 셀레스틴은 올곧은 성품과 독실한 신앙심 덕에 성기사가 된 후로 줄곧 대주교나 추기경과의 만남을 가졌으며 그 덕인지는 몰라도 얼마 안 가 성기사단장의 자리를 꿰찼다. 셀레스틴의 위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단자들의 국가 케페네우스와의 끊임없던 전투에서 알베아리움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웨스파의 목을 베었고 그 기세를 몰아 기사단을 진두지휘하며 기나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케페네우스의 시민을 죽이는 일도 더러 있었으나 그들도 결국 이단에 지나지 않았다.

훌륭한 성기사로서 마침내 셀레스틴은 공작위를 하사받았고 위스테리아의 이름을 또 한번 알베아리움에 알리며 그 명성을 반증하기라도 하듯 케페네우스와 무력 충돌이 생겼다 하면 충성스러운 성기사단을 이끌고 가 신의 뜻에 따라 이단자들을 처리했다. 셀레스틴은 전투가 끝나면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아피아리우스에게 감사하며 기도를 올렸고 그의 신앙심은 그의 아래에서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성기사들에게 모범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셀레스틴은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성기사단 내에는 가문의 후계자를 위해 휴직을 신청하는 기사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남자나 아기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간만의 일이었다. 국경 지대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셀레스틴은 성기사단 중 몇몇과 함께 상황을 진압하러 나섰으나 도착한 곳에는 작은 소란과는 거리가 먼, 기사단 전체를 이끌고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셀레스틴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자만했다. 케페네우스의 병사들은 이단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하나같이 셀레스틴의 검 앞에서는 무력한 시체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나마 유능했던 웨스파를 잃은 것에 대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아피아리우스의 사자들에게 덤벼왔다. 자신이 받았던 것이 케페네우스 쪽에서 보낸 거짓 전갈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함께 갔던 성기사들을 모두 잃고 셀레스틴 자신 또한 큰 부상을 입은 후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후계자를 두지 않은 상태였고 유일하게 딸이 한 명 있던 자는 일찍 세상을 뜬 아내를 대신해 자신이 어린 아이를 돌보다 그날 오래간만에 출근한 것이었다. 그 유능한 성기사들이, 앞으로의 장래를 촉망받던 많은 가문들이 셀레스틴 자신의 한 번의 실수와 잘못된 판단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심지어는 스스로까지—자신이 노력해서 쌓아온 모든 권력과 명성을 얼굴도 모르는 친척에게 넘겨주는 식으로—잃을 뻔했다. 간악한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버려서. 자신이 지금까지 만든 전부를 잃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까지 생각이 미친 셀레스틴은 몸을 회복하자마자 잠시 성기사 일을 내려놓고 자신이 지금껏 읽지도 않고서 쌓아두고 있었던 구혼 편지들과 선물을 전부 들여다본 끝에 겨우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아내 그 남자와 수도의 교회에서 혼인식을 올렸으며 다음 해에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그 후 셀레스틴은 자신에게 일어난 어떠한 변화를 감지했다. 가끔, 아주 가끔 국경 지대에서 빈곤한 케페네우스인을 처리하고 돌아온 밤이면 셀레스틴은 잠에 들기가 어려웠다. 그자들을 볼 때면 집에서 아리따운 드레스를 입고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가 떠올라 괜히 마음이 아렸다. 그들도 어엿한 딸의 다정한 아버지일 텐데, 어째서 운 나쁘게도 악마를 숭배하여 자신의 칼에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적군을 동정하는 것은 기사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임에도 가정이 생기니 마음이 약해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셀레스틴은 가족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단자를 척결해야 한다고. 아,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어리석고 불쌍한 영혼이라도 마지막에는 아피아리우스의 뜻에 따라 죽었으니 그만한 축복도 없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든 다음 날이 밝으면 셀레스틴은 자신 때문에 가정을 잃고 교회에 맡겨진 어린 꽃에게 향했다. 셀레스틴은 그 아이에게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노엘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셀레스틴에게 있어 사니아만큼의 기쁨을 주었고 그 자체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강한 동기였다.

첫째 사니아는 위스테리아답지 않게 몸이 무척이나 약했다. 셀레스틴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사니아가 아피아리우스의 서로 글자를 배웠으며 그것을 완전히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셀레스틴의 자랑거리였다. 사니아는 엄연한 공작가의 자제니 몸이 약하더라도 이 신실함을 바탕으로 신관이나 주교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사니아의 부족한 검술 능력이나 연약한 몸이 달갑지 않았다. 셀레스틴은 딸을 출산한 공작가의 가주로서는—그리고 성기사로서는—드물게 두 번째 아이를 갖기로 했다.

둘째 서머셋은 셀레스틴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듯 매우 건강했고 검술에도 굉장한 소질이 있었다. 셀레스틴과의 사냥을 즐겼으며 또래 중에서는 그와 검술로 대련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서머셋은 독서 또한 즐겨 다방면으로 교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나이 차이가 꽤 있는 사니아와도 잘 지내 셀레스틴으로 하여금 흡족한 미소를 짓게 했다. 가끔 옷소매를 더럽히고 쥐나 풀벌레를 잡아 와 사니아를 놀라게 하곤 했으나 큰 그릇이 될 여자애라면 모름지기 그 정도의 장난기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사니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셀레스틴은 그즈음 서머셋을 차기 가주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사건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참 서머셋이 정원에서 나오지 않던 것을 의아하게 여긴 공작부인이 그를 찾아 정원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 셀레스틴도 함께 서머셋을 찾아 그의 방으로 가던 참이었다. 그러나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인 것은 서머셋도 사니아도 아닌, 배가 열린 채 내장을 보이고서 죽어 있는 개구리 한 마리였다. 개구리라니? 그 악마 같은 생명체는 아무리 정원을 꼼꼼히 관리해도 어느샌가 연못에 나타나서는 연잎에 한가롭게 앉아 신성한 노동을 하고 있는 아피아리우스의 자매를 향해 더러운 혀를 날름거리곤 했다. 그러니 아피아리우스의 서에서도 그것을 불길한 생물이라 말하는 것이겠지. 서머셋의 책상 위에는 그 끔찍한 것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때마침 방으로 돌아온 서머셋은 어머니가 자신의 책상 앞에 서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개구리가 어떻게 그렇게 잘 뛰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 말을 들은 다음 서머셋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서머셋의 종아리에서 흐르던 피가 바닥에 닿자 그 어린것이 울기는커녕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직접 개구리를 죽인 것은 아니라느니, 그저 책에서 본 내용이 궁금했다느니… 대체 무슨 책이 저 불경한 것의 배를 갈라 책상 위에 올려두라고 했다는 것인가? 그것도 신성한 위스테리아 저택 안에서? 셀레스틴은 서머셋의 말이 들리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방을 나갔고 서머셋은 셀레스틴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한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머셋의 악취미, 그래, 생물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춰내 그 구조와 작동 방식을 파헤치려는 행동은 계속해서 이어져만 갔다. 셀레스틴은 서머셋이 부엌의 하남에게 다가가 생선을 달라고 한 적은 없는지나 쥐덫에 있던 쥐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같은 것에 계속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런 셀레스틴을 본 공작부인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며 그를 위로했지만 그런다고 셀레스틴의 마음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자신을 이어 위스테리아를 이끌 사람이라면, 그런 짓은, 생각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아이를 더 낳게 되면 성기사 일은 완전히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질 것이니 결국 셀레스틴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셀레스틴은 서머셋이 아직 어려 주변에 과하게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러한 행동도 나이가 들며 하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셀레스틴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서머셋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가 싶으면 어느새 조그만 동물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와 기도를 멀리했고 심지어는 아피아리우스의 서의 내용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저택으로 돌아올 때면 셀레스틴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서머셋이 친 사고와 정원 한구석에 무언가 몰래 묻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셀레스틴은, 서머셋이 그토록 흥미롭다는 얼굴로 읽던 ‘책’의 정체에 대해 알아냈다. 식사 자리에까지 가져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을 정도로 열중하던 그 책을. 셀레스틴이 책에 대해 물으면 서머셋은 언제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이 자연의 아름다운 섭리에 대한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셀레스틴의 눈은 그것을 아름답게 바라보지 않았다. 여러 번을 읽은 듯 모서리가 닳은 그 책은 서문에서부터 아피아리우스를 부정하는 말로 가득했다. 자신이 지금껏 척결해 온 케페네우스인들의 논리와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지금껏 자신과 위스테리아의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했던 서머셋의 행동을, 자연과학이라는 하등 쓸모없는 학문의 발전을 위한 지극히 정상적이고 유식한 행위처럼 말하며 그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셀레스틴을 충격받게 만들었다. 어쩌면, 정말 만에 하나 서머셋은—

그 후로 셀레스틴은 서머셋이 사니아와 아피아리우스의 서의 내용에 관한 토론을 벌이려고 할 때마다 서머셋을 엄하게 꾸짖고 사니아와 떨어트려 놓았으며 필요할 때는 서머셋의 등이나 다리에 조금 더 직접적인 처벌을 가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저택을 떠나있는 동안에는 그 둘을 분리시킬 사람이 없었으므로. 셀레스틴에게는 좀 더 효과적으로, 사니아를 서머셋으로부터 격리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 악마 같은 녀석이 사니아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할 방법이.

서머셋의 방은 사니아의 옆방에서 손님방 중 제일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 정원과 가장 멀리 떨어진 방이었으며 당연하게도 공작가의 일원이 사용하는 방과는 다른 층이었다. 그 독한 것은 한마디 불평도 않고서 새 방으로 짐을 옮기는 시남들을 돕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사니아는 서머셋과 방이 멀어진 것을 아쉬워하며 셀레스틴이 저택에 머물고 있을 때에도 종종 서머셋을 자신의 방으로 부르곤 했으나 그럴 때마다 셀레스틴은 서머셋을 따로 불러내 엄격히 체벌한 다음 다시 사니아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서머셋은 언니를 걱정시키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서머셋은 한동안 셀레스틴 앞에서는 과학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고 전처럼 얌전히 지냈다. 셀레스틴은 흡족했다.

하지만 서머셋이 계속 그렇게 지냈다면 그의 균형 잡힌 얼굴에 그런 끔찍한 자국이 생길 리 없었을 터. 안심한 셀레스틴이 대략 1년간의 긴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서머셋은, 지난 일을 모두 잊기라도 한 것처럼 또 불경한 책을 읽고 정원의 미물들에게 칼을 댔으며 사니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지어 사니아마저 서머셋이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그놈의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 간악한 생각을 사니아에게까지 옮겨버린 것이다. 셀레스틴은, 이번에야말로 사니아와 서머셋을 완전히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셀레스틴은 자신의 서재로 조용히 사니아를 불러냈다.

“사랑하는 내 딸 사니아, 이제 너도 곧 있으면 성년을 맞는구나.”

“네, 어머니. 어머니께서 떠나 계신 동안 서머셋과 함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꾸나. 오늘 밤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 부른 것이니.”

셀레스틴은 책상 위에 날이 선 단검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 사니아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성년 의식에 쓸 동물의 피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네 생일까지는 아직 몇 달은 더 남았을 텐데.”

“……”

“사니아.”

“네, 어머니.”

“서머셋의 숨통을 끊어버리렴. 그 아이가 사이비에 빠져 헛된 것을 탐하더니 아피아리우스님까지 욕되게 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기가 힘들구나.”

사니아는 대답도 않고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필시 그것의 현혹에 넘어간 것이리라.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니아, 네가 서머셋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안다. 그렇지만 나 또한 이 알베아리움의 일개 성기사이기 이전에 서머셋의 어머니가 아니니. 나는 서머셋이 죄악을 일삼는 것을 하루빨리 끝내주어 그 아이를 고통에서 멀어지게 해주고 싶을 뿐이란다.”

사니아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약한 손은 단검으로 선뜻 향하지 못한 채 허공만을 배회했다.

“사니아, 서머셋의 구원을 바라지 않는 게냐?”

“…그럴 리가요, 어머니. 제, 제 손으로, 사랑하는 동생을 고통에서 꺼내줄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고르지 못했고 단검을 쥔 두 손은 마른 가지처럼 떨렸다. 셀레스틴은 사니아가 자신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역시 영리하구나, 사니아. 지금쯤 그 아이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거야. 그러니 오늘이어야만 한다.”

셀레스틴은 피 묻은 사니아의 옷을 그 누구도 모르게 태워버리며 서머셋의 얼굴에 났을 상흔에 대해 생각했다. 사니아의 말로는, 그래, 차마 제 손으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어 대신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왔다 했지.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전장에서 남은 조그만 상처로도 다리며 팔이 썩어들어가 절단하는 일이 흔했는데 하물며 얼굴을 그렇게 깊게 베였다면 아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 채 출혈로… 셀레스틴은 조만간 사니아를 위한 휴가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며 불을 끄고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서머셋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작열감과 날카로운 통증에 눈을 떴다. 눈물을 흘리며 피 묻은 단검을 들어 올리는 언니가 보였다. 또 그날의 꿈이었다. 꿈이니 가만히 있어도 죽지 않고 눈을 뜨면 오르토스의 별장에서 깨어나겠지만 서머셋은 유독 그 꿈을 꿀 때만큼은, 꿈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언니가 방에서 뛰쳐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상처를 지혈했고 손수건과 깨끗한 옷 수십 장을 피로 물들인 다음에는 서랍 속에 감춰둔 에탄올로 쓰라린 얼굴을 소독하고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대에 누웠다. 그래야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을 것 같아서. 벌써 저택을 떠난 지 며칠은 지났지만 오래전에 아문 상처라도 흉터는 남는 법이다.

셀레스틴은 시종장이 간밤에 서머셋이 습격을 받아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전해주길 기다렸으나 시종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사니아가 식사를 거부하고서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는 말뿐이었다. 서머셋은 얼굴에 길게 찢어진 자국과 검붉은 딱지를 얹은 채 아침 식사 자리에 얼굴을 비추었다. 서머셋을 마주한 공작부인이 기겁하며 물었다.

“서머셋, 얼굴이…!”

“간밤에 소란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제게 칼을 들이밀더군요.”

셀레스틴은 그 일이 마치 잠을 방해하는 성가신 일 정도였다는 양 말하는 서머셋을 태연히 바라보았다. 분명 저녁 식사에 수면제를 탔을 텐데 잠들어 있지 않았다고?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언제나 올곧았던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끼쳤다.

“아마 다시 오진 않을 겁니다. 계획이 실패해 겁먹은 상태니까요.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

그리 말하는 서머셋의 형형한 두 눈은 셀레스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 이것은 틀림없는 악마다. 내가 그토록 없애려던, 없애왔던 이단자들이, 그 어리석고 사악한 영혼들이, 사니아라는 훌륭한 아이에 만족하지 못한 나의 욕심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 버린 것이렷다. 셀레스틴은 두려웠다. 언젠가 저 아이가, 케페네우스 놈들과 손을 잡고서 이 나라를 파괴하려 한다면? 셀레스틴은 당장이라도 서머셋을 제 손으로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동생을 심히 아끼는 사니아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몰랐다. 고작 자신의 손으로 서머셋에게 상처를 낸 것만으로도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성년을 맞기도 전에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지도 몰랐다. 셀레스틴은 과거의 욕심스러웠던 선택을 후회했으나 달라진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셀레스틴은 서머셋을 건드리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될 수 있으면 서머셋을 피했고 저택을 오래 떠나면 사니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일에도 소홀해졌지만 위스테리아 가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장성한 사니아가 신관을 거쳐 주교가 되었을 때에도 서머셋은 여전히 사냥을 즐기고 책을 좋아했으며 아피아리우스는 입에도 담지 않았다. 성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했던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사이사이에 서머셋이 귀족 영식들의 치맛자락에 손을 스치고 갔다던가 휴게실에서 낯부끄러울 정도로 격정적인 대화를 나눴다던가 하는 소문이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불경한 짓은 전부 하려는 듯한 서머셋의 행동에 완전히 질려버린 셀레스틴은 차라리 사니아보다도 훌쩍 자라서는 자신을 따라 성기사단에 들어온 노엘이 자신의 딸이 되어주길 수도 없이 바랐으나 그런다고 해서 서머셋이 자신의 피붙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과학은 자주 심판대에 올랐다. 전능하신 아피아리우스님을 의심하고 자연의 섭리를 깨부수려 한다는 이유였다. 그럴수록 서머셋은 무슨 내용일지 모르는 연구며 반증을 해야 한다고 가문의 돈을 마음대로 가져다 썼으나 셀레스틴은 그런 것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혼인 초—사니아를 낳고 복직했던 바로 그때—가 떠올랐다. 그래, 그거라면 서머셋의 마음도 다시금 아피아리우스님을 향할지 몰랐다. 서머셋에 대한 문란한 소문도 사그라들 것이겠지. 자신 또한 한때 악마를 동정할 뻔했으나 가족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으므로, 셀레스틴은, 파티라곤 참석하지 않는 서머셋을 여러 번씩 귀족 영식들의 데뷔탕트에 참석시키고 구혼자들을 저택에 들였다. 그러나 서머셋의 반응은 냉랭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야 가문을 생각해 조용히 시간만 때우다 오는 것 같았지만 저택의 응접실에 갓 성년을 맞은 어린 영식과 그의 부친을 불러놓으면 서머셋은 열에 일곱은 응접실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으며 어쩌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러 가서도 그 불경한 이야기나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그 불쌍한 남자들의 안색을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하게 만들어놓고 나오는 것이었다. 상황을 수습하는 것은 늘 시종장 에이서의 몫이었다. 위스테리아의 차녀에 대한 소문은 소리 없이 퍼지기 시작했다. 성기사인 어머니께 부끄럽지도 않을까요, 그런 것을 하고 있으면… 아, 정말 망나니가 따로 없더라니까요! 어떻게 사람을 앞에 두고 잘도 그런 말을… 단장님은 우리에겐 엄격하시더니 자신의 아이에겐 한없이 나약하시군요… 장녀는 주교라지요? 세상에, 어떻게 동생이 그런 짓을 하는데도 지켜보기만 하는지… 위스테리아 가를 신뢰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얼마 안 가 서머셋을 향하던 구혼 행렬이 끊겼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셀레스틴은 너무나 잘 알았고 또다시 서머셋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분하기만 했다. 결국 셀레스틴은 서머셋의 동의도 없이 반은 몰락한 상태인 남작에게 막대한 돈을 쥐어주는 조건으로 남작의 어린 영식과 그를 혼인시켰다. 그러는 새에 사니아는 가주가 되었고 교회의 단상 앞에 선 서머셋은 혼인식 내내 아내 될 사람의 얼굴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서 있다가 그날 밤에도 홀로 좁은 손님방에서 잠에 들었다.

서머셋은 적어도 당시 하던 연구를 마무리 짓기 전까지 남자의 몸은 취하더라도 마음을 줄 생각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셀레스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가니 아내가 생겼을 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남작의 아들은, 서머셋에게 있어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보나 마나 남작은 서머셋과의 혼인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매년 막대한 돈을 받아 가겠지. 아들의 목적은 하나일 것이었다. 자신에게 파혼당하지 않는 것. 파혼당한 남자는 그 후로 평생을 그렇게 무쓸모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면서 말하지 않는 사실이었음에도 남작이 갓 성년이 된 아들을 팔아넘긴 것에는 그저 그런 탐욕이 있었을 것이다. 서머셋은 사람에게 환멸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자신에게 시집온 남작 영식이 불쌍했다. 그렇기에 처음엔 마주칠 때마다 인사 정도는 하고 지냈다. 서로가 원치 않았던 계약으로 묶인 사이라도 장단을 맞춰줄 생각 정도는 있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 숫총각이었으니 달마다 욕정을 참기 어려울 때쯤에는 그를 취할 생각도 있었고. 서머셋이 자신의 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된 것은 그 계약이 자신만 원하지 않았던 것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였다.

서머셋의 부인—서머셋은 그를 부인이라 칭하는 것도 달갑지 않게 여겨 여전히 그를 결혼 전의 성인 로베르로 부르곤 했다—은 서머셋이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그의 방으로 찾아가 서머셋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서머셋이 필요한 것이 있어 그러냐 물으면 로베르는 가녀린 목소리로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같은 입에 발린 말을 하고서 돌아갔다. 그러는 상황이 이어지자 어느 날은 그 남자에게 정말이지 큰 동정심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부인, 남작이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렵니까. 어차피 우린 꼭두각시 신세니, 그저 조용히—”

“공자님께서 오해하고 계신 것이 있군요. 저는 공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답니다.

거짓말이었다. 서머셋은 그 뻔뻔한 말이 우습지도 않았다.

“공자님과의 혼인은 어머니의 반대에도 제가 관철했던 일이에요.”

서머셋은 직감했다. 그 말만은 사실이었다고. 그러니까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자는, 고작 공작가 며느리라는 지위와 돈 같은 것을 이용만 하기 위해 자신에게 시집을 오기로 했던 것이라고.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자신이 서머셋의 마음을 휘어잡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런 얇은 나이트 드레스만 입고서 자신에게 찾아왔던 걸까. 서머셋은 눈앞의 남자를 당돌하다 해야 할지, 어리석다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부디… 제 마음을 헛되이 넘기지 말아주세요.”

서머셋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로베르는 걸핏하면 사치를 부리며 쓸모도 없는 물건에 돈을 쓰기 일쑤였고 식사 자리에선 셀레스틴과 아버지에게 아부만 했다. 그러면서 밤만 되면 서머셋의 방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가져달라 속삭였다. 서머셋은 그 소리에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으며 그자가 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괴롭힐지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해가 지고 나면 몰래 연구실로 쓰던 다락방에 기어들어가 잠을 청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니아는 가주가 된 후부터 서머셋을 향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의 말을 따라 서머셋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서머셋을 향한 여전한 동경 때문이었다. 사니아는 서머셋의 그 총명함이 알베아리움을 이롭게 하는 데에 쓰이길 바랐다. 서머셋이 사랑하는 학문은 의술과도 관련이 있었으니. 사니아는 서머셋이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여겼다. 가주가 된 첫해와 그다음 해에는 어머니께서 이를 반대해 눈에 띄는 것은 해줄 수 없었지만, 그가 서머셋 만큼이나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께서는, 가엾게도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성기사단장 위스테리아로서든 위스테리아 공작으로서든. 서머셋의 혼인 직전에 있던 추문과 낡아가는 육체는 더 이상 셀레스틴을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게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셀레스틴이 죽거나 사니아가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까지 셀레스틴은 엄연히 위스테리아 공작이었다. 사니아는 셀레스틴이 그전에 서머셋에 대한 간섭을 놓아버리길 바라며 아피아리우스께 기도를 올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아피아리우스이시여, 이 어린 꽃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서머셋의 앞날에 언제나 기쁜 일이 가득하게 해주시옵고…

그러나 사니아는 그것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이란 사실은 알지 못했다. 사니아는 물론 능력 있는 주교였고 신앙심도 깊었지만 서머셋을 제지하지 않는 탓에 교단 내에서는 사니아 또한 서머셋과 다를 바 없이 더러운 속내를 감추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꽤 있었다. 대주교 또한 그중 하나였다. 대주교는 자신의 딸이 차기 대주교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의 딸보다 먼저 주교가 된 사니아를 제외하면 차기 대주교가 될 수 있는 자가 없었고 자신도 무사 은퇴를 목전에 둔 나이라 괜한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 그를 묵인하고 있었다.

서머셋이 자신의 이름으로 ‘영혼의 비합리성’이란 제목의 원고를 출판사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셀레스틴에게 전해진 것은 이미 그 책이 출판되어 교황청에서 금서로 지정된 이후였다. 이런, 이런 일이 언젠가 벌어지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이렇게 큰 파문을 불러올 정도로 서머셋이 체계적인 동시에 불손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체에게 영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에 들어 있는가? 어째서 우리는 영혼을 목격할 수 없는가? 이 책에서는 우선 현재 지배적인 아르테리아설—나는 이것이 학설이라 불린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울 뿐이다—에 대한 반증과 이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 그리고 영혼이라는 개념의 심각한 비합리성에 대해 설명한다.

그토록 불경한 것을 서문이라고 달아놓은 꼴이란! 셀레스틴은 그것이 사니아의 위치를 얼마나 위협하는 것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현 대주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런 이단적인 것들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자였으니. 이런 불경한 도서를 집필하는 데 가문의 돈을 탕진하는 것도 모자라 사니아를 꼬여내 얻어낸 도움으로 하여금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하려 하다니, 셀레스틴은 서머셋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사니아를, 위스테리아 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조치든 취해야 했다. 그러나 셀레스틴이 나서기도 전에 지킬 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사니아가 독살당한 것이 서머셋 때문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셀레스틴은 그것이 차마 대주교의 지시였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 대주교에게 있어 서머셋의 책은 사니아 대신 자신의 딸을 대주교 자리에 앉힐 시간을 벌어다 줄 기회였다. 아니, 사니아 직후에 주교가 된 사람은 근 몇 년간 자신의 딸 뿐이었으니 기회보다도 당연한 미래였을 것이다. 서머셋은 사니아의 독살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그것이 대주교의 짓임을 직감했다. 단지 자신에 대한 추문이 돌고 있을 때에도 사니아의 입지가 여전히 강했으므로 서문에 언니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않으면 책 한 권 정도 출판하는 것으로는 사니아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뿐이다. 안일하게도.

셀레스틴은 분노했으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기회였다. 언제나 자신을 불만족시키는 서머셋과 가주로서는 부족한 면이 있었던 사니아 대신 다른 누군가를 가주로 만들 기회, 혹은, 서머셋을 합법적으로 저택에서 내보낼 기회. 셀레스틴은 노엘을 떠올렸다. 사니아의 올곧은 성품과 서머셋의 신체 능력을 갖춘 듯 완벽한 그 아이. 자신 탓에 어미를 잃었음에도 자신을 따라 성기사단에 입단한 충성스러운 그 아이. 노엘은 여태껏 자신이 보살펴 온 아이기도 했으니 양자로 들인다 한들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일도 없었다. 이제 셀레스틴에게 남은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망나니 같은 차녀 대신 노엘에게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아, 자비로우신 아피아리우스이시여! 비록 사니아는 제 품을 떠나 아피아리우스님에게로 돌아갔지만 이는 모두 어머니의 은총 아래서 자라난 노엘을 저의 자식으로서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군요. 이 어린 꽃이 감히 어머니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나이다…

어리석고 불손한 공작가의 차녀. 아내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파렴치하고 문란한 색정광. 내쫓지 않은 은혜도 모르고 불경한 서적을 써내 제 언니를 죽인 배은망덕한 놈. 오르토스로 향하는 서머셋에게 따라붙는 말은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