𝑳𝒖𝒏𝒂𝒕𝒊𝒒𝒖𝒆

“주교님? 주교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의사를…!”

“대주교님, 주교님께서 숨을…”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서머셋. 언제나 빛나는 너의 그 열정, 그것이 나는 참 보기 좋단다. 열중한 표정이나 신중한 움직임 전부. 그래서 말인데 서머셋. 이번에는 어머니의 의견에 완강히 반대했단다. 이제 너도 어엿한 한 명의 학자로서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니. 어머니께서 아무리 너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셔도 너는 그것을 개의치 않아 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언제까지나 지금의 열정을 간직해주렴. 오직 그것만이 너의 길인 것처럼 말이야. 실제로도 그렇지 않니? 이제는 내가 가주로서 자리를 잡았으니, 어머니께서 너를 못살게 굴 일도 없을 거란다. 곧 있을 대주교 임명식이 끝난 후에는 더더욱. 그럼 네 앞으로 도착할 소포를 기다리고 있으렴.

—사랑하는 언니, 사니아.

“주교님은 아마도, 공자님께 편지를 쓰시던 도중…”

“말 똑바로 해야 할 거야, 에이서. 사니아의 찻잔에 누군가 독이라도 탔다는 겐가?”

“보이는 상황으로는 그렇게밖에… 짐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공작님.”

“…서머셋을 별장으로 보내도록. 당분간 가주 자리는 공석이다.”

“네? 하지만…”

“그 애를 양자로 들이는 게 좋겠군. 이름이… 노엘이었던가? 고귀하신 아피아리우스께서도 그 아이가 위스테리아의 가주가 되는 것을 바라실 테지.”

“공작님, 아무리 공자님이 미덥지 못하셔도 이런 일은…”

“에이서.”

“……”

”자네, 마지막 휴가가 언제였었지?“

“……”

“일을 좀 쉴 때가 된 것 같은데, 서머셋과 함께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 일이 있은 후 서머셋이 오르토스의 버려진 별장으로 쫓겨나기까지는 한 주도 걸리지 않았다. 급히 치러진 언니의 장례식에 얼굴도 비추지 못한 채로. 시종들이 서머셋의 방에서 짐을 꾸리는 동안 서머셋이 챙길 수 있었던 언니의 물건은 아마도 일곱 살 성탄절 선물이었던 조그만 오르골이 전부였다. 그것이 후회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분명 거짓말일 테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서머셋은 어린 시절 별장에서 있었던 추억을 떠올렸다. 목조 건물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과 너른 복도, 조용하고 한적한 별장 뒤편의 숲, 그리고 등꽃이 만발한—

“공자님, 부인과 함께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순진한 남자가 여기까지 와서 뭘 하겠나. 얼굴도 몇 번 안 본 사인데 이런 곳에서 날 보살피게 하다니 너무 가혹하지.”

“부인께서는 저택에 혼자 남겨지는 쪽을 더 두려워하고 계실 텐데요.”

“하지만 에이서. 반은 몰락하다시피 한 남작의 아들이라면 자신을 만나주지도 않는 공자보다는 오히려 노엘의 부인이 되는 쪽을 바라지 않겠어?”

“…공자님께서는 부인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

“별말씀을.”

그러나 별장으로 들어가는 예산이 끊긴 지도 벌써 1년은 되었다. 서머셋은 과학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 휴가를 즐기지 않았으며 사니아까지 유력한 차기 대주교 후보가 되면서 별장을 찾는 사람은 사라졌으므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여름, 큰 폭풍이 별장과 그 근방을 휩쓸며 위스테리아 가에서는 이를 빌미로 별장을 완전히 방치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났으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나 휴가철의 평온한 분위기 같은 것이 남아있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했지만 서머셋은 일말의 기대를 붙잡고 싶었다. 유난히 오래 피어 있다 지는 아름다운 오르토스의 등꽃과 여름밤이면 숲속에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와 눈이 쌓인 고요한 그 정경을.

“…생각보다도 상태가 더 나쁘군요.”

그러나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위스테리아의 별장은 폐가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외벽은 이끼로 덮이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으며 바닥은 빗물을 머금었는지 심하게 뒤틀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곰팡이가 핀 복도 끝에는 서머셋의 작은 방이 있었고 그 위층에는 공작과 공작부인이 쓰던 방이 있었다. 어렸을 적 서머셋은 별장에 묵는 밤이면 1층의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위층으로 올라가 사니아의 방문을 두드렸었다.

“방 안은 나름 깨끗해서 다행입니다. 습한 것만 빼면요. 저택에 연락해 시남들을 보내달라고 할까요?”

“아니, 그 노친네가 보내줄 리가 없지. 짐가방만 내려두고 청소를 시작하는 게 좋겠어.”

“예? 공자님께서 직접요?”

“그럼 이 넓은 건물을 자네 혼자서 청소할 생각인가? 뭐, 그래 준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알겠습니다. 청소 도구를 가져올 테니 공자님께서는 사용하실 방을 돌아보고 계십시오.”

사니아는 겁이 많았다. 그러니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이면 어머니 몰래 서머셋에게 자신의 방으로 와 달라고 부탁했겠지, 시남들이 해준 옛날이야기나 문틈으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두려워서. 서머셋은 언니의 그런 점을 귀엽게 여겼으므로 별 말 않고 그의 지시를 따랐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계단을 올라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면 언제나 사니아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잠든 숨소리를 음악 삼아 밤새 서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거 아니, 서머셋? 이 별장 호수 안에 인어가 살고 있대. 하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가까이 가는 순간 홀려서 잡아먹힌대… 어니스트가 말해줬어. 호수에 혼자 살면 뭘 먹어? 그 안에 물고기가 얼마나 있다고. 있었어도 아마 굶어 죽어서 뼈만 남아 있을걸. 네 말이 맞네, 서머셋. 역시 넌 참 똑똑하다니까. 그런데 왜 어머니는 내가 너와 같이 있는 걸 싫어하실까? 너의 총명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져. 너야말로 아피아리우스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같아… 물론 서머셋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를 아피아리우스—서머셋은 그를 존칭으로 부르는 것조차 이상하다 여겼다—에게 사랑받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함께 동화책을 읽다가 네 번째 책의 열세 번째 문장을 읽다 보면 사니아는 어김없이 잠에 들었고 서머셋은 다음날 눈을 뜬 어머니에게 언니가 혼나지 않도록 그에게 이불을 덮어준 다음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었다.

열어줄 사람이 없어 직접 문을 연 사니아의 방은 고요했다. 당연하게도. 변한 것 없는 방 안에서는 습기 찬 유리창 너머로 해가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의 동화책 같은 것들은 먼지와 거미줄이 쌓인 채 탁자 위에 올라가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달빛에 의지해 동화책을 읽던 그 시간은 이제 와 붙잡으려 해도 바스러지기만 하는 것이었으므로 서머셋은 언니가 그리워질 때 다시 문을 열어야겠다 생각하고서 옆방으로 향했다. 공작과 공작부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방이었다.

마찬가지로 고요한 공작 부부의 방은 무척이나 넓었다. 호화스러운 침대 하며 벽에 걸린 그들의 초상화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머셋은 침대에 깔린 두툼한 이불을 전부 걷어 1층의 자기 방에 옮겨두고 초상화도 떼어버렸다. 마침 침실과 분리된 연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저택에서부터 소중히 가져온 연구 자료들과 각종 책들의 자리가 생겨 서머셋은 기분이 좋았다. 이 별장의 서재에 든 것이라곤 그 고귀하신 아피아리우스를 칭송하느라 낭비된 종이 뿐이었으므로 그것들을 전부 태우고 책장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보다는 빈 침대 틀에 자신의 책을 쌓아두는 편이 훨씬 낫다. 서머셋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에이서가 가져온 청소 도구로 공작 부부의 방을 깨끗이 정리한 서머셋은 마침내 짐가방 세 개에 들어 있던 책과 문서와 각종 실험 도구를 모두 꺼내둘 수 있었다. 두꺼운 커튼을 닫아 버리고 등에 불을 붙이자 방은 전보다 더 마음에 드는 분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위스테리아 저택에서처럼 좁디좁은 다락방에 숨는 대신 두 팔을 뻗고도 남을 넓은 방 곳곳에 동료 학자들의 이론을 펼쳐두고서 어머니가 그토록 끔찍이 여기시는 신성모독을 실컷 저지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어 오는 듯했다. 서머셋이 공작 부부의 방을 연구실로 탈바꿈시키는 동안 에이서는 서머셋의 침실과 복도를 쓸고 닦았고 서머셋이 공작 부부의 방에서 나왔을 때는 부엌도 나름 정리가 마무리되어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에이서 자네와 동행해서 다행이야. 혼자 왔다면 별장 정리에만 몇 주가 걸렸겠어.”

“그건 그렇지만… 역시 시남 한 명 정도는 보내달라고 하는 편이 좋겠는걸요. 식사 준비까지 하려니, 영…”

“아, 자네 요리엔 소질이 없던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자님.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다시 멀쩡한 상태로 만드는 데에 드는 노력이… 혹 스튜가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조금.”

“그렇다면 주방 일을 할 사람 정도는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리하셨을 텐데 오늘은 일찍 주무시지요.”

“방을 정리하다 나온 쓰레기가 조금 있어서 말이야, 그것만 태우고 들어가도록 하지.”

“그런 건 제게 맡기셔도…”

“오르토스는 어제 비가 왔었다지? 응접실의 벽난로에 불을 켜 주게.”

“…알겠습니다, 공자님.”

먼지 쌓인 초상화를 불태운 서머셋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내일은 응접실을 마저 정리하고, 저녁으로 닭고기 소테를 먹은 다음에는 잠들기 전까지 생물의 내부 구조에 관한 책을 읽어야지. 공작의 눈을 피해 공수하느라 애를 먹었던 물건이다. 공작저에서처럼 자신에게 간섭할 늙은이도 불쌍한 목소리로 밤마다 자신을 만나 달라고 할 아내도 없으니 서머셋은 비로소 자유를 찾은 듯했다. 몸을 많이 움직인 탓인지 그날은 깊게 잠에 들어 한 번도 깨지 않았다.

✽✽✽

“인간을 탐구하고 싶어.”

위대하신 아피아리우스의 사랑을 받는 땅 알베아리움에서 가장 큰—육지에 사는 것들은 그게 바다라고 생각할 만큼 광활한—멜레우스 호안에서도 에드먼드는 별종이었다.

“언제까지 그 소리만 할 생각이니, 에디. 그 야만적인 것들에게 잡히면 지느러미 하나도—”

“하지만 형, 나는 인간의 그런 점을 사랑하는걸.”

형제들이 고통스러워 마지않는 태양의 열기를 사랑했으며 모든 인어의 기피 대상인 물 밖의 것들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서?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니, 에디? 인간은 이제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네가 잡고 싶다거나, 먹고 싶다고 해서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것들이 칼이며 대포 같은 것을 들고 설친 지가 벌써 몇 년이나 된 줄 아니? 보나 마나 물 밖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걸.”

“형은 언제나 똑같은 말만 하네…”

그러니 작년에 심한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수면 가까이에 있다가 휘말리고 말았겠지. 폭풍에 휘말린 에드먼드는 수십 번을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다가 오르토스 외곽의 숲에 떨어졌다. 에드먼드가 눈을 떴을 때는, 운 좋게도, 크게 상처를 입지는 않은 상태였고 눈앞에는 멜레우스만큼은 아니지만 큰 호수가 있었다. 그러나 폭풍은 이틀 전 이미 오르토스를 벗어난 상태였고 하늘에서는, 푸르고 키 큰 식물들 사이로 해가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나뭇잎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가엾게도 에드먼드는 물기 하나 없는 땅 위에서 낙엽과 함께 말라가고 있었다. 아, 인간의 폭약에 맞는다면 필시 이러한 기분이리라. 에드먼드는 인간을 향하던 마음을 후회했다. 일광욕을 즐기던 과거의 안일한 자신을, 야만적인 것들을 이해하길 원했던 어리석은 자신을 반성하고 참회했다. 숨이 막혀왔고 얼마 남지 않은 피부의 수분과 따사로운 햇살에 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에드먼드는 곧 바스러질 것만 같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눈앞의 호수를 향해 기었다. 물 밖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하반신이 그를 붙잡았다. 비늘이 떨어져 나간 틈에서 피가 흐르거나 육지의 풀 따위가 피부를 베는 것에는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조금만, 여기서 조금만 더 앞으로 간다면… 눈앞이 흐려지며 맑은 호수가 하늘과 자리를 바꾸려던 찰나 에드먼드는 겨우 몸을 호수에 담글 수 있었다. 얼굴을 감싸는 포근함과 물 속임을 알아차리자마자 힘차게 호흡하는 다섯 쌍의 아가미만이 그가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멜레우스 안에 남겨진 에드먼드의 가족은 그가 폭풍 탓에 죽었거나 멜레우스의 반대편 끝으로 도망쳐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정신이 드니 배가 고파왔다. 이틀을 내리 쓰러져 잠만 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낯선 호수 안에는 다행히 멜레우스와 다름없는 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고 에드먼드는 그 속에서 이유 모를 해방감을 느끼며 유유히 헤엄쳤다. 다친 곳과 기력을 회복하려면 며칠은 꼼짝도 않고 있어야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수면에 다가가도, 물 밖에 고개를 내밀고 축축한 피부로 숨을 쉬어도 자신을 호수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형제들이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그 호수는, 근처에 인간의 집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다. 아주 호화로운 목조 건물이.

그러나 에드먼드는 곧 그곳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는 피부의 습기를 말려버릴 해가 저물고 난 다음이면 호수 가장자리의 바위에 올라가 해가 모습을 다시 드러낼 때까지 그 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드먼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처럼 투명한 창 안에서는 그 어떤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집에 풀이 자라는 것을 못 견뎌 해서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전부 뽑아 없애버린다던데. 그런 형들의 말이 무색하게 나무로 된 벽은 이끼와 덩굴식물로 뒤덮여만 갔고 여전히 인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왔던 에드먼드에게 있어 고요하고 정적인 호수와 빈 저택은 공포인 동시에 외로움이었다. 호수에 발걸음하는 인간조차 없었으니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다. 적막한 호수 안에 홀로 남겨진 에드먼드는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