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교차로 3. 서쪽으로 가는 길목(카이로스)
시간: 3년 전
17살의 겨울, 카이로스는 심한 감기에 걸렸다.
어느덧 새해를 코 앞에 둔 시점. 드디어 열이 가라앉았지만, 기침과 코막힘은 여전했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그런 상태에서도 시내의 모의고사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려다 어머니와 누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최근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머니는 어느 작은 마을에서 한 달 넘게 통조림으로 연명하며 신작 소설의 초고를 막 끝낸 상태였다.
누나는 새해 축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며칠 후에 새로운 촬영을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그 전까지의 짧은 휴식기를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고 했다.
클레어: 감기가 심한 상황에서 모의고사를 치르고 1등을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카이로스 어머니: 어머, 뭐가?
클레어: 카이로스가 몸이 약한 건 매일 방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해서 그래요. 바깥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으니까 병에 걸리는 게 당연하다구요.
카이로스 어머니: 하지만 카이로스와 너는 성격도 다르고…… 게다가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바깥에 나가기 힘들잖니.
카이로스는 문가에 서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클레어: 아니, 나처럼 되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처럼 공부만 하는 건, 난 반대.
클레어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로스 어머니: 그래…… 확실히 그 아이는 좀 심할지도 모르겠어. 조금 자제하라고 해야겠네…….
카이로스 어머니: 대배우와 유명 작가 모녀만으로 충분히 눈에 띄는데, 천재 아들까지 있다니 안그래도 주변에서 말이 많아.
세상에는 그런 걸로 말을 얹는 사람도 있구나, 카이로스는 이때 처음 알았다.
클레어: 그래서, 좋은 생각이 있는데…….
클레어가 가방에서 꺼내든 것은 한 장의 초대장이었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가 능청스럽게 미소 지었다.
클레어: 이거 어때요~? 오늘 개최되는 아이디어 마켓!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니까, 친구도 사귈 수 있을지 몰라요.
클레어: 특히 여자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어요. 그 아이에게 여자애 이름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니까요. 이대로 가면, 대학 졸업할 쯤에도 혼자일 걸.
그것은 카이로스에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클레어는 옛날부터 그랬다. 보고싶은 TV프로가 있을 때, 먹고 싶은 과자가 있을 때, 누나는 언제나 무언가 이유를 붙여서 카이로스를 따돌렸다. 이번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간 카이로스는 들고 있던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요즈음 그는 따뜻한 물을 더 많이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카이로스: 내가 집에 있으면 곤란할 일이라도 있나 봐.
클레어: 다음 촬영은 키스신이란 말이야.
클레어: 상대방에게 감기를 옮기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그는 누나가 자신을 쫓아내고 싶어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카이로스 어머니: 직장 동료에게 폐를 끼치는 건 좋지 않지. 카이로스, 이 마켓 보러 갈래?
그리고 바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말에 카이로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아들이 상처받을 걱정은 하지 않는건가.
카이로스 어머니: ..그런데, 키스신이 있다면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게 맞지 않니? 뭔가 제작상의 실수라도 있었던 걸까?
클레어: 저기 엄마, 나 이제 성인이라서 그런 거 안알려줘요.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클레어가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으로 카이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초대장을 집어들고 작게 손을 내저었다.
카이로스: 그럼 나는 친구를 사귀러 가야겠네.
집을 나서기 전,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한 카이로스는 이내 마스크에 손을 뻗었다.
클레어: 이 시기에는 캐스팅 디렉터들도 휴가니까,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전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고있던 클레어가 그것을 보고 말을 얹었으나, 얼굴을 절반 이상 덮는 마스크를 쓰며 카이로스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카이로스: 이건 타인에게 감기를 옮기지 않기 위한 자발적인 격리 조치야.
카이로스: 더불어, 내 연애에 관한 건 걱정할 필요가 없고. 나보다는 관람차에서 키스신을 촬영하는 누나 자신을 걱정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겠어?
툭 던지는 짓궂은 말과 함께 카이로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순간 클레어의 눈이 동그래졌으나, 그들의 어머니는 이미 그의 말을 전부 들어버린 이후였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클레어에게 달려들었다.
카이로스 어머니: 클레어, 관람차라니? 그런 밀폐된 공간에서 키스신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클레어: 자, 잠깐만, 엄마. 이건 일종의 예술적인 낭만이에요. 일주해서 돌아오는 관람차는 연인들의 일생을 나타내는 거라고요. 생각해봐요, 아무리 먼 길을 돌아서도 초심을 잊지 않는 것이 연인 아니겠어요?
클레어: 이런 표현은 엄마가 쓰는 소설에도 나오니까, 이해하죠?
카이로스 어머니: 내 소설은 전통극나 서스펜스가 주류인 걸. 표현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지.
어머니는 클레어의 손을 뿌리치고 침실로 향했다.
카이로스 어머니: 어서 나갈 준비 하렴.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의 호신용품을 사야겠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시끌벅적한 대화를 지켜보며, 카이로스는 언뜻 보면 모를 법한 은근한 미소를 띄웠다.
활기찬 집안의 분위기가 새해가 다가옴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카이로스는 사실 매년 이 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는 했다.
대대적인 명절 앞에서는 평소에 귀찮게 여기는 인간관계, 그리고 과다한 연말연시의 준비도 별로 번거롭지 않게 느껴졌다.
아이디어 마켓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카이로스는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하며 초대장에 동봉된 팜플렛으로 몇군데 재미있어보이는 부스를 체크했다.
손에는 모의고사에서 받아낸 장학금의 일부가 들려있었다. 이 돈으로 어머니와 누나에게 줄 새해 선물이라도 사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나를 위한 선물’도 잊지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이번 마켓에는 그가 사랑하는 디자이너의 몬스터 피규어가 전시된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정판 추첨 판매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다.
본래 카이로스는, 이런 ‘상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지.
카이로스: ..콜록, 콜록.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난 카이로스는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전부 구매했다. 빛나는 나침반, 신비로운 가향차, 그리고 이상한 노트…….
클레어를 위한 선물을 고르는 것은 조금 까다로웠다. 그는 원하는 것의 대부분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로스는 나름대로 선물을 생각해냈다. 어린 시절, 설이면 자주 함께 가지고 놀던 막대형 불꽃놀이였다.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에, 그는 10상자 정도를 구매했다. 이거면 누나도 만족하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긴장한 얼굴로 피규어 부스로 향했다. 추첨 판매 결과는 이미 발표되어 있었다. 카이로스는 가지고있는 번호와 화면의 번호를 비교했다.
그리고 결과는…… 실패.
만약을 위해 다시 한 번 확인해 봤으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잔혹한 현실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갑자기 기침이 터져나왔다. 제법 격렬했다.
카이로스: 콜록! 콜록!
유감스럽지만, 운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좌절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순간, 뒤돌아선 카이로스는 아이와 부딪히고 말았다. 키가 그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어린 남자아이였다.
소년의 손에는 추첨권이 들려있었다. 그것도 당첨번호였다. 카이로스의 입장에선 정말 부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아마 이 소년도 나만큼이나 피규어를 좋아하겠지. ‘같은 취미를 가진 어린 소년’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카이로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년: 형아, 왜 울고 있어? 혹시 이거 못사서?
그는 방금 전까지 기침을 하느라 눈가가 살짝 젖어있었다. 확실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추첨에서 떨어져서 울고있는 걸로 보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울고싶을 정도로 슬픈 게 맞긴 하지만, 카이로스는 그 감정을 내리눌렀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카이로스: 이건…… 감기에 걸려서.
소년: 울어도 괜찮아. 나도 가지고싶은 걸 놓치면 매번 우는 걸.
카이로스: 아니, 정말로 나는…….
카이로스를 위로하려던 소년은 그의 말에 손을 뻗다 말고 멈칫 했다.
소년: 다른거야? 형이 슬프다면, 이거, 가지라고 하려고 했는데.
소년의 손에는 종이 조각이 들려있었다. 그것은 노트 같은 것을 찢은 것으로 보였다.
그 종이에는 몬스터 모양의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그가 잘못 볼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사랑하는 디자이너가 나눠주는 특별 교환권이었다.
ㅡ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자신 안에 생긴 얄팍한 감정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이 순간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카이로스: …네 말이 맞아. 사실은 정말 슬퍼.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역시.’ 하고 웃으며 들고 있던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소년: 이거, 엄청 예쁘게 생긴 누나가 줬어.
소년: 하지만 나는 당첨된 추첨권이 있으니까, 형 줄게.
소년: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소년: 엄마가 그랬어. 이런 축하하는 날에는 우는 거 아니라고.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이로스: ……그래, 고마워. 이제 울지 않을게.
슬펐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속이는 상황에 마음이 불편했으나,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카이로스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했다.
카이로스: 맞다, 만약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되면 이걸 대신 전해줄래? 그리고…… 네게도 하나 줄게.
카이로스는 가지고 있던 봉투에서 불꽃놀이 막대를 두 상자 꺼내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클레어에게는 8상자를 사왔다고 할 생각이었다.
소년: 응, 좋아! 나 그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감사 인사를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감사의 불꽃놀이 정도라면 받을만하지 않을까. 새해를 축하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 여성 덕분에 지금의 카이로스는 무척이나 행복하니까.
부스의 스탭이 마지막 몬스터 피규어를 선물 상자에 포장해 전해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카이로스는 시험지를 제출한 직후와 비슷한 기분으로 후련한 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불꽃놀이가 시작하기까지 앞으로 30분정도 남아있었다. 딱히 자리싸움에 참여할 생각이 없던 카이로스는 근처의 카페에서 카페라떼를 테이크아웃했다.
카페를 나와서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클레어에게 전해줄 봉투에서 상자를 하나 더 꺼내 불꽃놀이 막대에 불을 붙였다.
육교로 올라가는 길목, 카이로스는 여지껏 갑갑하게 얼굴을 덮고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차가운 공기가 불어오자, 뺨은 얼음에 닿은 듯 금세 차게 식어버렸다.
육교 위에서 경치를 바라보자, 낮과 밤의 경계에 시장 곳곳에서 램프 등불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건 마치, 전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몬스터처럼 보였다.
육교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까지 명료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행복한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 때, 카이로스가 기대있던 육교 난간 아래의 가로등이 깜박, 켜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소화가가 있었다. 물론, 카이로스는 상대를 알지 못했다. 밤의 장막이 내려옴과 동시에 서늘하게 낮아지는 온도 때문인지, 그는 머플러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카이로스의 발 밑에 불이 켜지고, 소녀는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육교 위에 기대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카이로스의 손에는 불꽃놀이 막대가 작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도 절반정도 타버린 같은 불꽃놀이 막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어린 소년에게서 건네받은 낯선 이의 선물이었다.
작은 불꽃들이 마치 공명하듯 어두운 밤 사이를 가르고 극채색으로 빛났다.
카이로스는 소녀를 보고 잠시 놀랐다. 무언가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녀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이 한마디만 건넸다.
카이로스: …새해 복 많이 받아.
흔들리는 불빛 아래, 소녀는 조용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육교 위에 있는, 그곳에서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소년에게 불꽃놀이 막대를 조금 들어올려 보였다. 마치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장엄한 반딧불이처럼.
소화가: 당신도요.
카이로스는 새삼스럽게 손에 들고있던 카페라떼의 온기를 느꼈다. 어쩐지 한겨울의 추위가 한결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감기에 걸리고부터 내내 막혀있던 코로 어느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단 것을.
서늘한 겨울의 향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호흡 사이로 빠져나간 새하얀 숨결이 안경을 부옇게 만들었다.
어쩌면 누나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바깥에 나가야 감기가 나을 수 있을 거라는, 그 허무맹랑한 말이. 그는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솔직히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생각이었다. 민간 요법도 아니고. 하지만 자신의 몸은 그것을 증명해버렸다. 그렇다면 믿지 않을 수도 없지 않은가.
오늘 얻은 몬스터 피규어 교환권만 해도 그렇다. 낯선 누군가의 호의나, 그 소년과의 만남은 논리적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우연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그는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물에게는, 행복으로 인한 공명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었다.
어릴 적, 몬스터 도감을 손에서 놓지 않는 카이로스를 보며 클레어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카이로스, 너는 정말 이 세상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해?’
누나를 올려다본 카이로스는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 왜냐면.. 그쪽이 더 재밌잖아?’
카이로스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에 능했다. 시험을 보면 항상 만점을 받을 정도로.
4. 북쪽으로 가는 길목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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