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共鳴

광한전 by 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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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다!"

호쾌한 외침이 채찍처럼 담장을 후려치고 그 너머 길가에까지 울렸다. 뒤이어 오곡과 가을 열매를 담은 비단 주머니들이 마구 바깥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는 즐거운 비명이 터져나왔고, 등롱을 든 채 걷던 행인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날아오는 곡낭에 얻어맞거나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챙겼다.

걸인 하나가 날아온 주머니를 낚아채 열었다가 눈이 동그래져선 열려있는 대문 안쪽을 흘끔거렸다. 문지기는 걸인이 기웃거리는 걸 말리는 대신 흔쾌히 그를 들여보냈다. 안쪽은 무슨 잔칫날이라도 되는 양 복닥거렸는데, 널찍한 마당 한쪽에 배월을 위한 제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객들은 그 앞에서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옆으로 비켜나 앉아 있는 청년에게서 무언가를 받아가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은 색칠한 투얼예를, 그런 장난감이 필요 없을 만큼 자란 이들은 곡식이 든 주머니를 받아 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 기분을 자네가 내면 안 된다니까?"

"안 돼?"

"여기가 누구 집이고 그 곡식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기억하나?"

아무래도 좀 전에 소리치며 담장 너머로 주머니를 마구 던져댄 것이 저 희게 번득이는 안광 예사롭지 않은 청년인 모양이다. 음…, 비록 이 집 주인은 아닌 것 같지만. 청년은 어이없어하는 진짜 집주인을 올려다보다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칠 척이 넘는 장신이 쭉 펴지니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그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씩 웃더니 집주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능청 떨었다.

"쩨쩨하게 굴지 마. 중추절이잖아."

청년… 아니 한 순간, 제존으로서 그가 벙싯 웃었다.

운 좋은 줄 알라. 내 덕으로 싸게 먹힌 거거든?

'언니야, 봤어? 나 오늘도 한탕 했다.'

거 너 재밌자고 껴든 일이잖니. 내가 명경이 너를 모를까!

에잉, 잔소리 선하다. 명경은 미리 만들어두었던 등을 낚아채며 다른 손으로 귀를 후볐다. 집주인이 그 꼴을 보더니 또 호령했다.

"어디 가? 벌인 일은 마무리 해야지."

"싫어잉. 만월 중천이잖어. 나는 이제 등놀이 하러 갈 것이야. 곳간 문 연 사람이 생색내며 마무리 잘 하도록 해."

것 봐라, 이 똥강아지야. 그저 놀 생각 만만이지.

'이잉, 언젠 별강아지라며. 언니. 이런 건 원래 남의 손 타면 소용 없는 법이라 내가 빠져 주는 것이다?'

명경은 낄낄 웃으며 잽싸게 일대에서 가장 큰 저택을 빠져나가 도시를 관통하는 강줄기의 지류로 향했다. 물가에 가까워질수록 등불 들고 나온 이들이 길거리에 늘어났다. 사각등, 팔각등, 조금 여유가 있다면 보탑이나 토끼처럼 복잡한 모양까지. 그러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정직하게 둥근 구형에 미색지를 바른 등을 들고 있었다. 중추절엔 당연히 만월등이지. 명경이 챙겨온 것 역시 만월등으로, 그는 불을 피우는 대신 별빛 털어 넣어 등을 밝혔다.

"자아, 잔월효성이다."

언니 있었으면 진짜 달빛 채워달라고 졸랐을 텐데 말이야. 그러지 못하므로 별빛이라도 넣어야지 별 수 없다. 등불 띄워 밀어내고 잠시 팔짱 낀 채로 흘러가는 모습 바라보고 있자니, 강물 위에 뜬 달만 수십이다. 명경은 한동안 그 모습 응시하다가 문득 하늘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 쫌 있다 가면극도 보러 갈 예정이구 포죽마도 타러 갈 작정인데 같이 하면 얼마나 좋았냐 말이야!'

뭇 사람들이 배월하는 중추절의 만월조차 명경이 알던 망월에는 못 미친다. 명경은 새삼 심통이 끓어 속으로 몹시 투덜거렸다.

'야속해, 언니. 내가 아주 속상하다. 이걸 다 마다하고 떠나야만 했냐구! 어!'

"어!"

마지막 외마디는 육성이었나, 주위에 모여 서 있던 어린 애들이 깜짝 놀라 명경을 올려다봤다. 단단히 끼고 있던 팔짱은 풀어졌고, 꼿꼿하게 치켜들었던 고개가 비뚤어졌으며 반듯하게 서 있던 허리도 힘이 풀려선 엉거주춤한 꼴이 몹시 우스웠다.

"어어!"

애들이 웃거나 말거나. 명경은 다시 한 번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가늘어진 눈이 하늘에 걸린 진짜 달에 꽂혔다. 저 달,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눈에 덜 찼었거든. 그러더니… 명경이 홀연하게 사라졌다. 강가에 남아있던 어린 애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

한편 광한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느냐 하면.

"다 울었느냐?"

"큼, 예에……."

묘정이 말갛게 웃는 낯으로 물었다. 못난 모습 보이지 말라 배려해 준 보람이 없었다. 여장선은 묘정의 예상보다 많이 또 오래 울었다. 볼품없는 목소리로 항아님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냐고 묻는데, 제자리에서 팔짝거리며 뛰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구르는 것도 아니라 묘정은 외려 당황해버렸다. 어찌저찌 겨우 달래긴 했는데… 아, 이런. 묘정은 도르르 눈을 한바퀴 굴리더니 생긋 웃고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얼른 내려가 보렴."

"예?"

저 이제야 방금 울음 그쳤는데요? 하는 얼굴로 여장선이 몹시 당혹스러워했다.

"안 그럼 후회할 걸."

"예?"

"에구, 우리 띨띨이……."

바보같이 반문만 하는 여장선을 두고 묘정이 까마득한 옛적 별칭을 부르자마자 바깥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들렸다.

"야 이 언니야!"

뒤늦게 묘정이 무엇을 예견했는지 알아챈 여장선의 얼굴에 짜작, 실금이 갔다. 이 목소리는 그 역시 익히 아는 목소리다.

명경이 고함과 함께 광한문을 박차고 폭풍 같은 기세로 뛰쳐들어왔다. 달려오던 청지기는 문짝에 치여 한 바퀴쯤 구른 모양이나 저 두꺼비가 저래보여도 법술 잘 닦아놓은 권속이니 어디 다치진 않았으리라 믿고 명경은 숫제 날듯이 전각 안쪽으로 몸을 디밀었다. 결국은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침입자 아닌 침입자가 심처에까지 들이닥쳤다. 그대로 밀고 들어오려나 싶었는데, 한 손으로 문설주 짚은 채 우뚝 서 버린다. 그러곤 내뱉는 첫 마디란, 궁주도 아닌 객에게로 향하는구나.

"너 예서 뭣해?"

명경의 형형한 눈빛과 선객의 시선이 허공에서 따악 마주쳤다. 아직 벌개진 눈가를 가라앉히지 못한 여장선이 친구(아마도)의 추궁에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원래가 매년 중추절이면 여기 올라왔노라고 말할 틈도 없이 명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울었구만?"

정곡을 찔린 여장선은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막혀버렸고, 명경은 큭켁거리며 스르르 허물어졌다. 꼴을 보아하니 이거 아주 뒹굴며 웃어댈 기세라, 묘정은 얼른 동생에게로 뛰어가 팔뚝을 붙잡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명경아아. 너 이 언니는 안 보이구 장선이만 보이니? 내가 괜히 돌아왔다 그지."

"어! 아! 그래! 언니야!"

그제야 명경은 저를 붙들고 당기는 묘정을 새삼스럽게 인지했다. 이는 존재감에 앞서 실재하는 실체의 감각이다.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는 간드러지는 목소리, 가까이 다가와 붙자 느껴지는 다소간 사늘한 체온, 팔뚝을 꼭 움켜쥔 손가락 하나하나의 악력, 조금 전까지 태웠던 모양인지 코끝을 간질이는 세상 유일할 월석 담배 향, 바투선 몸의 사이를 채우며 사락거리는 피백의 감촉….

…묘정이, 망월이 여기 있다.

묘정 또한 직접 가 닿는 감각의 반향으로써 오래도록 지켜봐온 동생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과 별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알았니?"

묘정이 물었다.

"언니는 모르는 모양이다. 언니 있는 달이랑 없는 달은 아주 다르거든? 보면 알지."

명경의 대답에 묘정은 그만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이번엔 제가 울 차례인 듯 했다. 아마 저 뒤에서 들려오는 삐쭉한 목소리만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명경이의 옷깃을 적시고 말았을 테다.

"저놈은 왜 안 울죠? 이거 항아님 안 반가운 모양인데."

"아, 여장선아!"

•͙✧⃝•͙

사람인 양 졸립다며 내리 하품하던 객신(저는 이미 진탕 마신 데다 울어서 진을 다 뺀 몸이란 말입니다, 항아님!)은 제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갔고, 월신과 성신 둘이 남게 되었을 때, 묘정은 오랜 세월 묵혀두었던 말을 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채 첫 마디를 뱉기도 전에 제지당했다.

"그것 하지 마, 누이."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구?"

"몰라. 근데 하지 말어. 안 해두 돼."

묘정이 듣기에 동생의 말은 거짓말 같았다. 모르긴 뭘 몰라.

동시에 참말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필요 없어?"

너 아직 내게 서운하잖니. 문득문득 치받잖느냐. 내가 그 모든 순간 함께했으므로 아는 걸. 묘정이 재차 묻고 가만히 응시하는 동안 명경 역시 달의 시선 온전히 감내했다. 그리고 대답 대신 몸 뉘여 구르더니 묘정의 곁에 착 달라붙었다.

"나는 필요한데."

묘정은 제 넓적다리에 고개를 괸 동생의 머리를 넘겨주며 말했다.

"명경아. 어떤 마음은 매듭짓기 위해 공허하더라도 절차가 필요한 법이다. 네가 그걸 모를 리는 없고."

명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무릎을 당겨와 몸을 말았다. 이러면 묘정은 꼭 작은 강아지 대하듯 명경일 쓸어주곤 했다.

"다만 알면서 마다하는 마음을 내가 모르지 않으므로…"

묘정은 연신 동생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천천히 이어 말했다.

"대신하여 듣자. 내가 하지 못하게 한다면 네가 해야 마땅하지. 어디, 우리 작은 별 나 없는 동안 무슨 재미 보았나?"

명경이 눈을 굴려 저를 내려다보는 묘정을 응시하다 말한다.

"…금번에는 지내는 곳 유지랑 친구 먹었네. 거, 그네 곳간 덕을 많이 보았다? 마침 또 중추절이라고 핑계가 좋았지 무어…."

물꼬 트기가 어려웠지, 명경은 일단 입이 열리자 미주알고주알 지내온 바 털어놓기 시작했다. 묘정이 내심으로 빙그레 웃었다.

이야기는 때때로 천 년 전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게서 다시 삼백년을 감아오기도 하고. 중천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하계로 내려가는 둥, 순 명경이 생각하기에 재미있었던 것부터 떠오르는 바 중구난방이었으나… 묘정에게는 부연이 필요치 않았다.

그의 모든 순간에 운명이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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