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세세 월조천지연
生生世世 月照天之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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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명랑하게 인사한 작달막한 여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정도로 힘을 주자, 흐릿한 상이 조금 명료해졌다.
연두색 치마를 입고 금빛 머리칼로 쌍환을 말아 올린 탓에 여아는 꼭 노란색 꽃처럼 보였다. 아이는 노인이 분별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방싯거리는 웃음이 전염성이 짙었다. 노인이 비로소 누구인지 알고 껄껄거리며 물었다.
“오야. 요요. 어디 가니?”
올해로 열세 살, 아직은 어린 나이라 모두가 두요杜曜를 요요, 소요, 아요 등으로 부르곤 했다.
“헤헤.”
두요가 금빛 눈을 반짝이며 가던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척 뻗었다. 굽이진 외길은 현을 빠져나가는 고갯길로 이어지고, 거기 있는 것이라곤 하나뿐이다. 노인이 놀리듯이 물었다.
“너 또 사연재 가는구나?”
“네!”
두요는 발뺌하기는커녕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발을 재게 놀렸다. 이렇듯 뭘 감추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기에 이제 두요가 소 현승縣丞댁 장남을 보기 위해 틈이 나면 사연재에 얼굴도장을 찍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사연재는 시가지를 벗어나 외진 곳에 지어진 서원이었다. 뒤편에는 녹음 우거진 숲이 자리해 여름엔 매미 우는 소리가, 가을엔 산새며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덕분일까, 드나드는 학생이며 상주하는 일꾼이며 사람의 기척이 적잖대도 차분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대체로는 그랬다.
“왜 이리 소란하지?”
강학을 마쳐 놓고 비로소 여유가 생긴 사연재의 주인, 여旅 선생이 붓을 움직이다 말고 들창 너머로 시선을 옮긴 채 학생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학생들이 제출한 발제문을 쌓아 두고 첨삭하는 선생의 모습은 백발에 백면에 백의요, 심지어는 그 눈까지도 온통 희끗한 터로 얼핏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말갛게 웃는 매끄러운 낯은 속을 짐작하기 힘들게 만들곤 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선생은 그저 순전히 바깥 동향이 궁금할 뿐이었다.
사연재는 하루 중 바로 지금, 한낮이 가장 번잡한 시간대였다. 오전 강론을 듣고 귀가하는 문하생들과 오후에 강습받기 위해 오는 학생들이 엇갈려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를 감안해도 평소와 조금 다른 기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느꼈다.
“선생님. 두씨 댁 막내가 왔나 봅니다.”
학생 중 하나가 장난기를 숨기지 못한 말투로 답했다.
“……?”
선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제자들을 응시했다. 누군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두씨 일가는 양주 일대를 중심 삼아 대대로 부를 축적해 온 상인 집안이었다. 다만 그 댁 장녀는 일찍이 용케 무과에 급제했다 들었고, 상재를 타고난 차남은 수완이 좋아 가업을 잇는다니 사연재에서 수학할 만한 연이 없었을 뿐이다. 하면 막내딸을 여기서 공부시키려고? 그런 것이라면 양친이 함께 오셨을 텐데.
“잠시… 제가 나갔다 들어오겠습니다.”
그때 제자 한 명이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읍하고 밖으로 나갔다. 단정하게 올려 묶은 검은 머리가 허리 끝에서 좌우로 흔들렸다. 평소보다 걸음이 빠르다는 뜻이다.
“…위경이가 왜?”
성은 소, 이름은 위경. 나이 열일곱에 동시와 과시를 일찌감치 통과한 수재였고, 말직이긴 하나 그 부친이 현승으로서 녹봉 받는 자였으므로 가능성 역시 충분해 보여 선생이 눈여겨보던 녀석이었다. 학생들이 저마다 짓궂은 웃음을 흘리자 선생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사합원의 네모진 내원을 질러 중문을 통과하고 전원前院에까지 나아가자, 대문으로 나가지 않고 웅성웅성 도좌방倒座房 앞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조금씩 몸을 물려 선생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거기엔 조금 전 나갔던 제자 위경이 등을 보이고 있었고, 두씨 집안 삼녀가 그 앞에서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생글거리는 낯으로 소년을 마주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아요. 오늘은 혼자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으응, 반 시진이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늦어질 줄 몰랐… 뭐라고? 더위 먹는다. 목도 마를 것이고. 혼자서 서성거리면 어떡해. 위험하게. 미련하게 굴래?”
“괜찮아! 물도 얻어 마셨구, 앵두도 얻어먹었지. 밖에 서 있지 말고 예 들어와 앉아 있으라고도 해 주셨는걸.”
“대체 누가…?”
황망한 얼굴로 묻는 소년에게 줄줄줄 사연재를 드나드는 하인이며 학생들의 이름을 대던 여아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위경의 뒤로 가까이 다가온 백의서생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응시하다가, 곧 그가 바로 서원의 주인임을 알아차리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두가장사 총수의 셋째 딸 두요라 합니다. 학습이 끝나지 않은 줄 모르고 위경 오라버니와 함께 돌아가려고 왔어요.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
선생은 또박또박 자신이 누구이며 용건이 무엇인지 밝히는 여아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어르신?’
벼슬이며 작위며 다 내던지고 재야에 묻혀 살아왔다지만 그래도 아직 여씨 가문 위세를 기억하는 이가 많아 공석에서는 난림 선생이라 불리던 참이다. 제자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도 선생이라 불러 그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는데, 새로운 호칭이 몹시 참신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거라.”
다만 아직 그렇게 불릴 연배는 아니란 말이지. 지금에야 한낱 사람일지언정 그 내력이 범상치 아니한 바, 선생은 이립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묘하게 제 나이대로 보이지 않는 편이었다. 보다 청청해 보이는가 하면 다소간 병약한 기색이 있어 피로감이 느껴지는 터로 그것은 또 아니고, 다만 세월과의 동행에 있어 발걸음을 맞추지 못해 조금쯤 유리되어 보인달까. 어떻든 어르신이란 호칭을 듣기엔 위화감이 있었다.
“예, 선생님.”
두요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냉큼 고쳐 불렀다. 한편 곁으로 잠시 물러나 두요의 옆에 서 있던 위경은 침착한 낯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이 돌발 사태를 어찌할까 고민하는 티가 역력했다. 선생은 내심으로 폭소했다. 다른 제자들이 소란의 원인을 능히 짚을 정도라면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평소보다 첨삭하는 데 걸린 시간이 길어져 붙들고 있던 것이 괜스레 미안해졌다. 선생이 위경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 게구나?”
그리고 위경이 말을 고르는 사이에 두요가 재빠르게 답했다.
“오라버니 탓이 아니에요. 제가 위경 오라버니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함께하고 싶어서.”
선생은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다. 꾸밈이라곤 하나도 없는 목소리에 정직하게 들뜬 표정이 두요의 감정을 낱낱이 보여 주고 있었다. 누구든 그 모습을 보면 눈치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구나.
찰나간 선생의 시야에 몹시 희미한 잔상이 스쳤다. 두요에게서 위경을 향해 흐르는 무언가가 보인 듯했다.
그 순간 여 선생은, 아니 여장선은 꼭 이렇게 감정을 오롯하게 쏟을 줄 알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 거친 급류 유유하게 즐기고 삼라만상의 흐름 손아귀에 틀어쥔 채 세상 모든 이들의 사모지정 이어주셨던 누군가를.
‘…맙소사, 항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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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요는 여 선생에게 눈도장을 찍힌 뒤로 아주 대놓고 사연재를 기웃거렸다.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명분으로 쫓아내자니 아슬아슬 선을 넘지 않는 처세가 요령이 좋았고, 묘하게 여 선생 또한 두요에게 너그러워서 계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두요는 어영부영 사연재의 깍두기가 되었다.
“소요, 오늘은 허탕이네.”
공부를 마치고 우르르 빠져나가던 학생들 중 몇몇이 중문 밖에서 서성거리던 두요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앗, 왜?”
“오늘은 진무가 오지 않았다.”
“진무?”
낯선 이름에 두요가 되물었다.
“아, 위경의 자인데. 몰랐구나? 받은 지 얼마 안 되기는 하였다.”
“아아… 에이.”
두요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입술을 앙다물자 턱에 주름이 잡혔다.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며 가며 낯을 익히다 말까지 튼 학생들은 두요를 퍽 귀여워했다.
“왜 안 왔어?”
그리고 두요는 그 사실을 십분 이용할 줄 알았다. 두요가 떠나려던 학생들의 소맷부리를 붙들고 놔주질 않자 학생들 사이에서 말해 줘도 되나, 본인이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안 되지 않나,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건 내가 알려 줄 수 있겠다.”
그때 안쪽에서 들려오는 온자한 목소리가 논란을 종식시켰다. 두요는 붙들고 있던 학생들의 옷자락을 놓고 얼른 여 선생에게 인사했다. 선생은 가벼운 웃음으로써 제자들을 배웅했고, 부드러운 손짓으로 두요를 사연재 안쪽으로 이끌었다.
서원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텅 빈 교실이 된 좌우 상방廂房은 두요의 눈에 아주 넓어 보였다. 두요가 중문 너머 안쪽에까지 들어왔던 적은 몇 번 없는 탓으로 낯설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선생은 상방을 지나 조금 더 안쪽에 있는 이방耳房으로 두요를 데려갔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상방보다 조금 더 안락하게 꾸며진 이방에는 신기한 집기들이 많았다. 바둑판이며 분재며 한쪽에 세워진 금갑이며 벽에 걸린 먹화며…. 두요는 귀물을 숱하게 보고 자라 온 덕으로 안목이 낮지 않았다. 여 선생님, 소장품이 범상치 않구나! 두리번거리는 두요를 다탁 앞에 앉히고, 선생이 은근슬쩍 떠보았다.
“아요, 너 이러느니 차라리 여기 들어와서 공부하지 않을래?”
“싫어요.”
무안할 정도의 즉답이 돌아왔다.
“…왜?”
순간적으로 선생의 마음속에 열네 살짜리를 상대로 떠올리기엔 몹시 치졸한 생각이 스쳤다. 너 내가 아무나 제자로 받는 줄 아니? 사연재가 어떤 곳인 줄 알아? 내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고? 대과 전시에서 장원, 방안, 탐화를 모두 휩쓸었던…
…자괴감이 들기 전에 생각을 멈추는 것이 좋겠다. 마침 아이가 맑은 목소리로 사심을 밝혔다.
“그러면 여기 와서 위경 오라버니를 볼 수 없잖아요.”
“아아니, 공부도 하고 위경일 볼 수도 있지?”
두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선생을 요렇게 올려다보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희 언니가 그러는데,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사냥꾼도 사실은 한 마리씩 잡는 거랬어요.”
“훌륭한 궁사는 시위에 화살을 두 개, 세 개씩 메긴 채 쏘기도 한다는 거 아느냐?”
“목표물이 우글우글 모여 있을 때겠지요? 전장 같은 곳에서요. 여긴 아닌 것 같은데요.”
“…….”
선생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시감에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역시 닮았어….’
한편 두요는 지난날 불세출의 천재로 이름을 날렸고, 병조 정랑이니 양주 자사이니 하는 관직에 제수되었던 난림 선생이 얼마나 대단하신 인사인지는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채로 그저 선생님이 내주신 과자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고 있었다. 세간에서 뭐라 불리든, 명성이 얼마나 드높든. 두요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치 않았다! 심지어 두요는 부친이 막내딸에게 학업의 뜻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사연재는 어떠냐, 여 선생님 좋으냐 물었을 때 ‘과자가 맛있고 위경 오라버니 얘기하기에 여 선생님만 한 상대가 없어요.’라는 대답을 함으로써 그가 목뒤를 잡게 만든 전적이 있었다.
“그래서 위경 오라버니는 오늘 왜 안 왔대요?”
두요가 과자를 꿀꺽 삼키고 본론을 꺼냈다.
“관館에 갔거든. 다음 향시에 응시해야 하니 이것저것 준비할 요량으로.”
선생이 때맞춰 두요에게 찻잔을 밀어주며 답했다.
“아아. 새로운 이름도 그래서 받은 거예요?”
두요는 자연스럽게 받아 홀짝이며 좀 전에 들었던 위경의 새로운 이름에 대해서도 캐묻기 시작했다.
“자를 받을 때가 되었지? 소 현승께서 지어 주셨다더라.”
“그렇구나아.”
탁. 찻잔의 뚜껑이 덮이고 두요가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여 선생은 대번에 아이의 입버릇을 눈치챘다.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오라버니가 얘기 안 해 줬어요.”
“저런. 왜일까?”
여 선생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제가 어찌 알겠어요? 저도 궁금하네요!”
두요가 톡 쏘아붙이고 애꿎은 과자를 집어다 뚝 분질렀다. 그러더니 양손에 쥔 각각 반쪽의 크기를 눈대중으로 재고, 작은 쪽을 선생에게 건네며 덧붙였다.
“저도 갖고 싶어요.”
“뭘, 자를?”
선생은 두요의 버르장머리를 지적하는 대신 작은 과자 조각을 받아 들고 되물었다.
“예. 생기면 위경 오라버니한테 알려 줄 거야. 그러면 오라버니도 저를 그것으로 부르고, 저도 오라버니를 진무 오라버니라 부를 수 있겠죠. 공평해요!”
의외로 두요의 지적이 정확했다. 선생이 생각하기에도 위경이 두요에게 굳이 진무라는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까닭은 그 성격상 단순히 두요를 어린애로 취급해 무시한 처사라기보다는 아직 서로 부르지 못할 이름이기 때문이 맞았다.
“어른이 되고 싶은 모양이구나?”
“당연하지요!”
“그럼 내가 지어 주랴? 조금 이르긴 한 것 같지마는.”
“선생님이요?”
또 두요가 미심쩍거나, 선생의 말이 전혀 와닿지 않을 때 짓곤 하는 특유의 표정으로 요렇게 선생을 올려다봤다. 선생은 그 얼굴과 마주하게 될 때마다 도통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곤란했다.
“너는 나를 부르기만 선생님이라 부르지. 내가 문장가인 줄은 아주 당연지사로 까먹고 사는구나.”
해서 짐짓 기분 상한 척, 팔짱을 슬쩍 끼고 고개를 돌리면…
“아이이. 그럴 리가요, 난림 선생님! 지어 주세요!”
옳거니, 바로 이 반응이다. 야단났다. 두요가 쥐고 있던 과자도 내던지고 양손을 맞잡은 채 아양을 떨어 댔다.
“그래도 춘부장께서 섭섭해하지 않으실 것 같으니?”
“아버진 좋다고 선물 보내실걸요.”
두요가 키득거리며 반박하자 여 선생은 잠시 고뇌하는 척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실 주고자 하는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기다렸다는 듯 제시하면 두요가 대충 지은 것 아니냐며 쪼아댈 것이 뻔했으므로 반 각쯤을 흘려보낸 뒤에야 선생이 입을 열었다.
“…그럼 묘정妙情이 어떠냐.”
“그거 달님 이름이잖아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심지어 세간에서 떠받드는 천궁 상량 이십수의 이름 중 하나이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고한 신의 이름이 분명할 텐데, 그런 것을 냅다 붙여 주시나요.
“뭐 어때서. 괜찮을 거다.”
‘특히 너는.’
여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핑계도 댈 수 있었다. 이미 숱한 시인들이 온갖 아름다운 것에 빗대 시구에 넣고 있는데? 하물며 그 이름 주인이셨던 분의 흔적이라면야 자격은 차고 넘치지.
“…위경 오라버니가 들으면 웃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요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저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빤했다. 이미 위경에게 묘정이라 불리고, 진무라 화답하는 상상 하느라 바쁜 것이 분명하도다! 여 선생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이지 아요 너는 걔 어디가 그리 좋으니?”
“흥. 선생님이 뭘 아십니까?”
“걔는 내 제자야. 너에게는 무엇이냐?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
“어린애 옹졸하게 이겨 드시면 좋으십니까?”
두요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꽉 주먹 쥔 양손이 옹골차다.
“또 이럴 때는 어린애라지. 발끈하기는. 거 끝까지 들어 보아라. 알아도 내가 더 알지 않겠느냐 말야. 이를테면 녀석이 좋아하는 곡 같은 거. 가르쳐 줄까?”
여 선생이 은근하게 제안하자, 두요가 약이 오른 채로 두어 번 심호흡했다.
“…아잇, 그런 건 좀 일찌감치 알려 주세요!”
“혹하지? 하하, 저기 대금 하나 들고 오너라.”
“네에, 근데 선생님, 저것 제 몸 반절만 한데요?”
“맹랑한 녀석아. 어르신 부려 먹는 데 거침이 없구나.”
결국 여 선생이 일어나 금갑을 늘어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제가 들고 오다 놓치기라도 하면 누구 손해일까요?”
“그거는 내 손해가 맞지….”
“헤헤.”
그렇게 선생과 두요가 아옹다옹하는 동안 해가 차츰차츰 서산 가까이 내려앉았다. 담장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내원 절반이 어둠에 묻혔고, 하인들이 등에 불을 켜러 다녔다. 그제서야 두요가 화들짝 놀랐다.
“선생님, 어두워졌어요.”
“그렇구나. 잠깐만….”
선생은 태연자약하게 내원을 내다보더니 느긋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뚱땅거리던 대금도 잘 닦아 직접 넣으시고. 한쪽에 밀어 치워 뒀던 다기도 정리하시고. 일련의 모습 바라보던 두요는 선생께서 어찌 이리 늑장을 부리시나 하다가 직접 데려다 주시려나 보다 하고 스스로 납득해 동동거리기를 멈췄다. 선생이 두요를 데리고 방을 나설 때쯤에는 전천이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너무 오래 있었어요, 선생님. 죄송해요.”
두요가 하늘을 살피며 사과했다.
“응? 아니아니.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선생은 후후 웃으며 반박하고 중문에 손을 올려 밀어젖혔다. 그때, 바깥에서도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전원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위경 오라버니?”
두요의 얼굴이 말 그대로 달이 뜬 것처럼 환해졌다. 위경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스승과 두요를 번갈아 쳐다봤다.
“선생님. 아요가 어찌 여기에 여태….”
“생각보다 늦었구나? 서원에 또 고양이가 들어서 밥 좀 주고 귀여워하니 이 시간이더라. 자, 위경이 네가 데려다 놓아라.”
여 선생이 슬쩍 두요의 등을 밀어 보냈다. 두요가 뒤돌아보자, 선생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보통은 돌아가는 길 어둑해질까 일찌감치 방생하곤 하시더니, 이런 안배가 있을 줄이야! 두요가 함박웃음으로 화답했다. 척하면 착이다. 그 눈치만 보아도 앞날이 훤했다. 여 선생은 장담할 수 있었다. 위경은 두요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럴 수가 없었다.
두 아이가 돌아간 사연재는 이제 정말로 고요했고, 선생은 내원을 거닐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만월이므로 일찌감치 떠올라 궤도를 따르던 달이 그를 굽어보고 웃는 것 같았다.
“항아님. 이젠 이 사람한테 이런 일까지 시키십니까?”
얘 장선아. 언제 내가 시켰니? 네가 자발적으로 말려든 게지!
아니, 웃은 게 분명하다. 선생은 확신하고서 고개를 내저었다. 저로서는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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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드리운 소년이 꽃밭 사이를 거닐다가 문득 허리를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그의 손에 잡초 서너 포기가 잡혀 있었다. 소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쯧 혀를 차더니 허리춤에 매어 뒀던 담뱃대를 꺼내 물고 다시 꽃밭 사이를 걸었다. 뒷짐 진 손에는 잡초가 쥐여 가는 길 따라서 뿌리에 묻은 흙을 톡톡 떨어뜨리고, 반대 손에는 담뱃대가 들려 어느새 연기를 피워 내고 있었다. 분명 부시를 친 적이 없는데 언제 불이 붙은 걸까.
문득, 소년이 걸음을 걷다 말고 멈춰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가에 달맞이꽃 한 송이가 피어나 있다. 퍼뜩 고개를 쳐들면, 좀 전까지 하늘을 칠하고 있었던 노을이 밀려나는 중이었다.
“…허?”
안 그래도 떫은 낯이던 소년의 미간이 내 천 자로 파였다. 이곳은 언제나 붉은 노을로 가득 찬 곳,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다면 이는 이변이다. 그리고 이 공간, 몽중간심夢中懇尋의 주인인 선우도령은 그런 변화를 몹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어찌 된 조화냐….”
도령이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꽃밭 깊숙이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맨발에 와 닿는 땅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양분을 머금어 기름진 흙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조르르 달맞이꽃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시선을 올리면 끝없는 꽃밭이 이어졌으며, 지평선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은 잠시 오도카니 서서 압도적인 풍경을 감상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들어갔던 황궁의 후원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선경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 그렇다면 당연하게 뒤따르는 걱정이 있다.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꿈결에 당도한 모양인지, 연은 자던 모습 그대로 침의 차림이었고 변변한 장신구조차 없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이런 몰골이라면 이곳의 주인이 자신을 삿된 것으로 오인하고 그 자리에서 처분할지도 모른다는 파격적인 상상과, 누군갈 만나더라도 돌아갈 길 안내해 달라며 쥐여 줄 패물 하나 없는 처지로구나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지가 교차했다.
“으음, 나갈 수는 있는 건가?”
연이 자박자박 흙길을 밟아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지금 그녀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혼자 된 막막함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명랑함을 가장할 필요가 있었다.
“자는 사이 죽어서 왔을지도 모르지! 저 멀리 지평선에 당도하면 망천이 흐르고 있을지도.”
명랑한 생각이란 게 마음대로 안 되기는 했지만.
“거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상상 한번 살벌하네. 여길 대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게야? 망천도, 북망산도 없으니 헛소리 말고 게 멈추어라.”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연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돌아보니, 녹색 머리칼을 단정히 땋아 내린 소년이 진홍색 쾌자를 펄럭이며 한 손에 담뱃대를 쥔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이 지시를 따라 멈추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걷던 걸음 계속해 걷지도 못해 어정쩡한 자세로 멈칫 굳었다. 소년의 시선이 적잖이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당혹스러웠다. 집안 권세 등등하여 상서복야의 딸로서 고개 숙일 일이 많지 않았고, 타고난 심성이 낙천적이고 대범해 누구 앞에 서건 졸아든 적이 없었던 연에게 이런 기분은 몹시 낯설었다.
“그래, 똑바로 못 서느냐? 뭘 귀신 본 것처럼 그러고 있어. 도망할 생각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뒤 좀 돌아보아라.”
그새 지척으로 다가온 소년이 잔소리와 함께 연의 한쪽 어깨를 짚어 살짝 밀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맥없이 밀려나, 연은 소년에게 등을 보이게 되었다. 시선이 스친 것은 아주 찰나간. 그러나 연은 소년의 붉은 눈동자에 둘러쳐진 셀 수 없이 많은 테를 마주하고 그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의 눈이 아니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한편 도령은 제 앞에 선 소녀의 머리칼에 손끝을 대고 미끄러뜨렸다. 마치 금사처럼 반짝이고 또 매끄럽다. 이로써 그는 확신을 얻는다. 언젠가 자신이 직접 만든 색이었으니 사실은 눈에 닿았을 때부터 알았다.
‘우라질… 설마설마했는데.’
거짓말!
도령의 속내에 답하기라도 하듯 소슬한 바람에 길가에 피어났던 달맞이꽃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 모양이 꼭 까르르 웃는 것만 같이 보여 도령은 눈을 뾰족하게 뜬 채로 홱 하늘을 올려다봤다. 노을이 물러난 만큼 밤하늘이 밀고 들어와 휘영청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냉큼 항아님이겠구나 하겠습니까, 그럼?’
어쩐지… 바락바락 대들고 싶은 마음에 담뱃대를 꽉 움켜쥐었으나, 도령은 용케 유혹을 참아 냈다. 눈앞에 세워 둔 어린 것을 잊지 않은 덕분이다.
“너, 이름은 어찌 되느냐?”
연이 질문에 다시 몸을 돌려 도령과 시선을 마주했다. 역시 어딘지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이며 목소리라, 연은 대답하기 위해 심호흡으로 자신을 다잡아야 했다. 저답지 않게 자꾸만 작아지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연이요. 유연이라 합니다.”
“혹 인연 연 자 쓰냐?”
“어찌 아셨습니까?”
도령의 미간에 팬 주름이 더 깊어졌다. 아주 빼도 박도 못하겠군….
“…돌아가라. 사라져.”
그가 휘적휘적 연을 지나쳐 앞서 나가며 말했다.
“예?”
“보아하니 가진 신분 낮지 않아 호의호식하고 무탈히 살아온 것 같거늘. 너는 뭐가 그리 간절해서 예에까지 왔느냐?”
이쯤 되자 연의 마음에도 억하심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조가 상당히 날카로워 졸창간 호통을 들은 기분이었다. 난데없이 어딘지 모를 공간에 뚝 떨어진 것도 자신, 돌아갈 일이 걱정인 것도 자신이다. 그런데 저 소년은 꼭 자신이 이곳에 오고 싶어서 들이닥친 것처럼 여기는 데다가 제 사정을 어림짐작해 철부지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유연은 오해를 결코 그냥 두고 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도령께서 몹시 예리하십니다. 고관대작의 여식으로 나서 귀한 대접을 받아 온 것도, 이렇다 할 곡절 없이 살아온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처지라 해서 간절한 원이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유연은 저만치 앞서가는 도령을 따라잡기 위해 보폭을 크게 했다. 그러면서 말을 쏟아 내려니 다소간 숨이 찼으나, 아직 용건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저도 질문을 드려 볼까요? 이곳은 대관절 어디랍니까? 도령께서는 아시지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제가 압니다. 초장부터 하대가 자연스러우셨고, 이곳의 지리를 익히 아는 듯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 몰골에 당황하지도 않으셨어요. 저와 같은 객을 수차례 맞이해 본 적 있으시다는 얘기겠지요!”
요것 봐라? 도령의 걸음걸이가 살짝 느려졌다. 경황없을 터인데, 따지고 드는 항목마다 예리하여 아주 총민하다. 곁에까지 다가와 진상을 요구하느라 홉뜬 금빛 눈이 집요하게 반짝였다. 도령은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꼭 저렇게 들이대 오던 눈빛을 알고 있다.
“네 바람은 무엇인데?”
“예?”
“간절한 희원 말이다. 있다며. 이곳이 바로 그 바람 모여드는 곳이다.”
어느새 노을이 완전히 지고 보름이 밝게 빛나는 광활한 꽃밭 아래, 달맞이꽃 피어난 길을 걷는 소년이 곁을 따르는 소녀에게 계속해서 일렀다.
“그 어떤 터무니없는 소망이어도 여기 닿아 꽃을 틔우므로, 이곳은 바람의 요람…. 즉 몽중간심이라 불린다. 하늘도 아니므로 더는 서천화원이 아니고, 땅도 아니기에 인세와 동떨어져 삶과 죽음을 가르는 틈새이지. 이 틈에서 자라난 꽃이라면 품은 소망이 무엇이건 이룰 수 있거든? 허니 다시 묻겠다. 너는 뭐가 그리 간절해서 예에까지 왔느냐?”
뒤늦게 연이 입을 헤 벌렸다. 그 호통이 정말 순전한 물음이었다니. 아니, 어떻게 들어도 타박이었다고요!
“…근래 가장 간절했던 바람은 역시 무탈히 혼약자와 혼사 치르는 것인 듯한데요.”
그리곤 조금 누그러진 마음으로 솔직하게 답했다.
“혼약자가 있어? 인간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쪼끄만 것을 혼인시킨다고.”
핀잔이 날아들었으나 아무래도 유연과 동년배쯤으로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라, 웃음이 먼저 나왔다. 연은 고개를 돌리고 키득거리다가 저와는 반대로 툴툴거리는 도령에게 굉장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것처럼 목소릴 한껏 낮추고 속삭였다.
“제가 이래 보여도 방년 열일곱인데요! 혼기가 꽉 찼지요.”
도령은 바로 조금 전까지 따따부따하던 것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뺨을 상기시킨 채 웃는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씨구, 좋단다.
“…상대는 어떤 이인데?”
그러다 대뜸 던지는 질문이 몹시 사사롭다. 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국경 지대에 나가 있는 이라 만나 본 적은 없구요. 초상과 서신만 받아 보았거든요….”
안 그래도 기가 차다는 얼굴이던 도령의 낯이 점점 우거지상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연은 이 까칠하고 뭐가 불만인지 모를 도령이 제 말을 막지 않는다는 데 만족해서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목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사용하는 어휘의 다정함은 알 수 있지요. 손버릇을 알 수 없으나 필체의 단정함을 알 수 있고요. 서신에 동봉해 주신 자정향 꽃잎에 밴 향이 달콤하니, 혼인한 후에도 그러길 바라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연은 고작 편린에 불과한 상대의 정보로도 용케 사랑에 빠지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도령은 담뱃대를 물고 몽중간심에 뜬 달을 올려다봤다. 항아님. 이게 맞아요? 얘 이러고 있는 것도 연애로 쳐 주십니까? 아니, 신경 좀 써 주시지, 명색이 연정지신이셨으면서….
물론, 달은 묵묵부답이므로 도령은 결국 다시 제가 입을 열고 만다.
“그럼 너는 그가 무탈히 귀환하길 바라는 것이냐, 아니면 그와 혼인한 후의 나날이 무탈하길 바라는 것이냐?”
묻노라니, 도령은 새삼 연의 바람이란 게 소탈하다 싶었다. 아무렴. 그는 죽은 이를 살려 내 달라는 절절한 바람이라거나 반대로 누군갈 죽게 해 달라는 독한 바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달라거나 만인지상의 위에 오르게 해 달라는 부푼 바람을 안고 온 사람을 숱하게 보아 왔다. 그에 비하면 연의 소망은 인지상정에 불과하지 않은가. 누군가의 운명을 꼬아 버릴 것 같지도 않았고. 해서 도령은 간만에 너그러운 베풂을 행하기로 결심했다.
“어, 그걸 어찌 고릅니까? 둘 다 바라고 있지요.”
“어허, 하나만 골라 하나만.”
항아님. 제가 이렇게 자진해서 꽃 내주겠다고 한 역사가 없거든요?
그러나 대군의 결심을 단박에 무색하게 만드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요?”
또다시 솨아아 하는 바람이 일었고 달맞이꽃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이번에도 역시 까르륵 하고 웃는 것만 같아 도령은 생색 장하던 마음을 바꿔먹었다. 에이, 됐습니다. 저거 빨리 여기서 쫓아내려고 그럽니다. 아무튼 그런 겁니다!
“왜요는 무슨 왜요, 어른이 물어보면 재깍 대답을 해야지 요놈이. 네 바람이 뭔질 알아야 네 꽃이 어디 피어 있는지 찾아 얼른 꺾어 주고 널 여기서 쫓아낼 것 아니냐.”
“어머.”
뒤늦게 연이 눈을 크게 뜨고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도령의 떽떽거리는 말에 숨겨진 호의를 눈치챈 것이다. 그녀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조금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 꽃을 찾아야만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그건 아닌데,”
“아이, 그럼 됐어요. 저 그냥 보내 주셔도 돼요.”
도령의 말문이 막혔다. 서천화원 감관 노릇 할 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다 살다 제 꽃이 필요 없다는 사람을 그는 처음 보았다.
“…신령들조차 탐내는 꽃인데?”
“에이, 제가 뭐 얼마나 대단한 희원 가졌다고요. 도령께서 키워 내는 꽃이 예사 물건일 리야 없겠지만 제 바람이 예사로우니 저는 그것 없어도 될 듯합니다. 그 꽃 없다고 무탈하지 못할 혼인이라면 안 하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구요.”
살래살래 손사래 치는 연의 표정이 아주 가벼웠기에, 마지막 말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판별키 어려웠다. 자신의 일생을 두고도 이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아니 외려 무거운 태도인가.
그제야 도령은 기시감을 느낀다. 항아님. 어찌 이런 점까지 닮은 걸 만드셨습니까? 도령의 의식이 잠시 아주 오랜 옛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물었다.
“하면은 꽃 말고, 복숭아나 좀 가져갈 테냐?”
“저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도요.”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는 연의 맥 빠지는 대답이 도령의 의식을 다시 현재로 데려다 놓았다.
“…꿈이 크다 이 녀석아. 설마하니 반도겠느냐? 그렇게 뭐든 쉽게 주어질 거라 생각하면 안 돼. 그냥 평범한 복숭아다. 어른이 줄 때 감사합니다 하고 냉큼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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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소년의 손이 황급히 뻗쳐 나갔다.
사람으로 가득한 한낮의 시장 삼거리였다. 행인들이 저마다 단지를 이고 품에 바구니를 끌어안고 바삐 걸음을 옮기거나,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고 흥정하느라 바쁜 가운데 녹색 머리의 소년과 반투명한 멱리를 쓴 여인 둘만이 격리된 것처럼 멈춰서 서로를 응시했다. 깜빡깜빡, 금빛 눈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여인은 이 붉은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색도, 키도, 얼굴의 생김새도 십 년 전 본 모습과 꼭 같되 다만 붉은 눈의 나이테만이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여자가 말갛게 웃으며 붙들린 소맷자락을 부드럽게 떨쳤다. 그러더니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인파 사이로 섞여 드는 것 아닌가! 잡은 연어를 놓친 곰이 되어 버린 것처럼 선우도령이 잠시 멍청한 얼굴로 빈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튀었어?”
도령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어른이 잠깐 와 보라는데 요 깜찍한 것이 쪼금 자랐다고 도망을 쳐! 성큼성큼 인파를 헤치는 도령의 발걸음이 목적지를 아는 것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못 찾을 것 같으냐, 니 애비보다도 내가 너를 더 잘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도령과 연의 때아닌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해 질 녘, 슬슬 장사치들이 좌판을 접으며 사람이 빠지자 시장 거리가 비교적 한산해졌다. 그 뒷골목에서 여인과 소년이 세 걸음 떨어진 채로 대치 중이었다.
“도령… 집요하십니다.”
연이 멱리를 들추고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항의했다. 저 도령이 범인 아닌 거야 십 년 전 보았을 적부터 뻔한 일이었다. 마주친 순간 일별한 것만으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외양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자신 가는 길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나, 그 신통한 재주는 대체 무슨 묘리인지! 연은 시장 거리를 누비며 드디어 따돌렸다고 생각할 때마다 제 앞길을 선점하는 도령 때문에 골이 난 상태였다.
“그러게 어른이 불렀을 때 네 하고 쪼르르 왔어야지.”
반면에 도령은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담뱃대를 꺼내 물었다. 잘 살고 있나 궁금했을 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피하냔 말이야, 신령 무안하게.
“왜 여기 있냐? 변방으로 시집갈 거라더니.”
“못 갔어요.”
연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답했다. 예상치 못한 고생 탓에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왜?”
이번에도 사사로운 질문이다. 그러나 십 년 전과 달리 연은 냉큼 종알거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 그게. 그때 주셨던 복숭아… 때문에?”
도령이 당최 이게 뭔 소린가 하는 얼굴로 연을 응시했다.
“…그게 왜? 반도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복숭아였는데?”
“예. 그러나 향이 아주 좋았지요.”
“당연한 소릴. 누가 어디서 키웠는데.”
“해서, 소문이 좀 났지 뭐예요.”
그렇게 연이 풀어놓는 이야기란 것이 참 인간들의 오두방정 그 자체였다. 자고 일어난 승상 댁 아가씨 품에 복숭아가 가득했는데, 그 향이 천 리를 가더라는 소문이 좍 퍼졌단다. 상서로운 신령의 가호를 받았다는 추어올림이 장했고, 이에 원래 오가던 혼담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혼서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퍽 쟁쟁한 집안이 많았기에 화가 될까 우려한 변방에서 먼저 혼담을 깼다고 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도령은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연이 왜 자신을 알아봤음에도 모르는 척했는지 감이 잡혔다.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나, 이런 우라질!
“그 향… 천 리까지 갔을 리가 없는데….”
그냥 소망 꽃 꺾어 쥐여 보낼 걸 그랬나. 당혹스러워진 도령이 더듬더듬 과장을 바로잡았다.
“당연하죠. 해 봐야 이웃한 몇몇 집에 가 닿은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장안의 화제라는 게 으레 그렇게 불어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연의 표정이 담담하다 못해 웃음기가 어린 듯했다.
“아무렇지도 않으냐?”
“음, 솔직히 재밌었어요. 서시가 된 기분?”
유연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도령의 말문이 막혔다.
“복숭아 맛있었어요.”
“…….”
“그것 때문일 리 없다고도 생각하고요. 인연이란 게 그렇죠 뭐. 제가 그때 그랬잖아요, 꽃 없이 성사되지 않을 혼인이라면 안 하는 게 나을 것도 같다고요.”
도령은 연이 자신을 면피시켜 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았다. 진심일 것이다.
“너는 한낱 인간이 되어서 뭐 잘났다고 그렇게 초연하냐….”
“스쳐 지나가는 연 있고, 악연도 있고. 한낱 인간이 그 흐름 앞에 별수 있나요? 이만하길 다행이죠. 저는 경국지색도 아닌걸요.”
옳은 소리다. 한낱 인간이 아니었던 분조차 자기 연만큼은 어쩌지 못했음을 그는 알고 있다. 그것만큼은 안 닮게 할 거라셨으면서. 남긴 존재는 아주 뒤따라오는 너스레까지 꼭 닮았다.
반달이 조각배처럼 떠오를 때 즈음. 연은 다시 멱리를 쓴 채로, 도령은 장죽을 허리에 매달고 엇갈려 작별했다. 우연한 조우가 벌써 두 번이다.
‘세 번은 없어요, 항아님. 꽃도 피우기만 해 봐라. 꺾어 버려야지.’
세 번째부터는 필연이다. 신의 총애에 짓눌린 인간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항아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당신께서 영영 떠나신 이유도 그거잖습니까. 밤하늘을 가르는 조각배가 풍랑에 흔들리듯 어룽졌다.
왜? 난 그것도 괜찮다고 봐. 재밌겠다.
‘…철 좀 드십쇼, 철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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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무궁의 지고천. 하늘 위의 하늘에는 계절이 순환하듯 세계가 영零으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그 흐름에 편입되는 순리를 넘어선 스무 신령이 있었다. 저마다 가진 바 희원이 깊었으므로 새로운 세상에서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창세의 권능 부릴 적에 기원을 가득 담았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엔 열매가 영글며, 가을엔 곡물이 익고, 겨울엔 생명이 진다. 순환은 이치이므로 세계가 돌아 절기를 되풀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이치이다. 구태여 손대지 않는다면 세상은 비슷한 모양으로 피어나 영글고 익어서 질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내내 바라 마지않던 것을 위해서라면 가지치기쯤이야.
“응당 빚을 거 모두 빚고 나면, 나는 아마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또다시 불러올 것이다. 나는 나를 알아.”
그러나 월선 낭랑께서는 가위를 들지 않았다.
격랑이 이는 멸세滅世를 거쳤음에도 쾌활함을 잃지 않은 낭랑은 창세의 권능 손에 쥐고 떠들어 대는 포부가 원대했다. 내 근원이던 달을 빚어야겠다, 내 본질이던 사랑 주고받을 사람을 빚어야겠다. 망설임도 없어서 대번에 군사지신軍師之神 난림후 여장선을 불러다 너 역산할 줄 알지 않느냐 하며 나랑 새 하늘 설계도 좀 그려 보자꾸나 시키기까지 했다.
고분고분 수족 자처하여 명 받들던 여장선이 문득 미련을 고백한 월녀를 응시했다. 두 신령이 들어선 곳은 전세前世에 위풍당당하던 광한전을 본 따 지은 누각이었다. 낭랑의 기억이 온전했고 신력이 충만했으므로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으로 지고천 끝자락에 월궁 한 조각을 불러낼 수 있었다.
사방 아래에 늘어선 전각도, 발밑에 펼쳐진 계수도, 머리 위에 별 박힌 하늘도, 시중드는 섬토도 아직은 없다. 그러니 전세에 누리던 것과는 사뭇 다르겠지만… 대신 저 아래에 이제 마악 새로 빚어지느라 꿈틀거리는 하계가 펼쳐져 있다. 토지신과 용왕들의 신력이 느껴졌다. 낭랑은 그 충만한 새 세상 잣는 기운을 더듬듯 느끼다가 이어 말했다.
“그네들과 못다 한 사랑 하겠다고, 이번엔 달리해 보겠다고 기껏 새로 연 세상 또다시 뒤집고 들쑤실 수는 없겠다 싶지 뭐니.”
여장선이 눈가 한 번 삼박였다. 낭랑은 감정을 숨기기는커녕 외려 과히 표현하는 성격이었으나 때때로 도통 읽어 낼 수 없는 표정을 만들 때가 있었다. 신성일까, 혹은 연륜일까. 아니면 그저 사람으로서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가.
“해서, 이제 다른 것이 되어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시려고요.”
누각의 층계를 밟아 오르며 여장선이 물었다.
“그래. 네가 그랬는데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내가 만물 사랑하여 다감하고 미련이 넘친다고. 어느 누군가를 사랑한 탓으로 세상을 사랑했으니 그 꼴 난 것 아니겠니?”
낭랑이 호호 웃었다. 그토록 괴로워 광한전 심처에 틀어박혀 마음을 깁던 나날조차 영으로 돌아간 덕분인지, 죄 천겁이 되어 버린 숱한 실연 거론함에 거리낌이 없으며 웃음 짓는 얼굴도 파르르 떨지 않을 수 있었다.
“허니 이제는 반대로 해 보아야겠다.”
낭랑이 누각 꼭대기에 올라 먼저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내 뒤따르는 이에게 손짓으로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기억하고 말고요.”
여장선이 헛헛하게 웃으며 답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낭랑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도 남는다. 가지 마십시오 조르고 떼쓴대도 별수 없는 것을 안다. 월녀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디밀어도 소용없으리라. 그가 게정 섞인 투로 덧붙였다.
“허면 영영 외롭지 않으시겠군요. 치사하십니다. 그간 항아님 채근에 실컷 곁 비워 두었던 사람들은 다 어떡하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이번에는 달에 내 이름 붙여 두었으니 그것 보며 달래라고 해.”
낭랑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키득거리며 허공을 갈라 애용하던 장죽을 꺼내 들었다. 시중드는 동령 없이도 까짓 담뱃불쯤 선술로써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래도 세상이며 그 위에서 사랑할 사람들이며 원 없이 빚고, 내가 사랑했던 가엾은 것들 금번 세상에 다시 불러내고 나서도 내게 힘이 남는다면 말이다….”
후욱, 월녀의 장죽 끝에서 예의 별 무리 같은 연기가 퍼졌다.
“나를 아주 닮은 인간 하나쯤은 더 빚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 걔는 어떤 인과도 업도 과히 두르지 않고 멀쩡히…. 평범한 인간처럼 사랑하다 갔음 좋겠다.”
낭랑이 말을 마치도록 여장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돌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차라리 존체 흔적도 안 남기고 이치 되어 흘러오신다면 또 몰라, 신체神體 닮은 인간을 빚어 놓고는 그와 달리 살아가게 하신다니.
“하여튼 항아님, 한 번도 사람이었던 적 없으신 분답습니다.”
낭랑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비난? 아니, 아니다. 그녀는 타고난 본질과 신비의 감각으로써 대면한 이의 감정을 기민하게 읽어 낸다. 감탄, 경탄, 또는 약간의 시샘. 비승하여 떠나기로 마음먹은 자신과는 반대로 신위 내려놓고 사람으로 돌아갈 결심 한 자에게 자신의 처사란 그 각오를 무색게 만들어버리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왜, 새삼?”
낭랑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반문했다. 네 말이 맞지. 나는 단 한순간도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한낱 인간을 사랑할 때조차 오직 신이었지.
“…아닙니다.”
애써 아연한 마음 갈무리하는 사람의 웃음이 한숨과 같다.
“그렇게나마 다시 뵐 수 있다니 이 사람 마음이 흡족하다가도 재차 섭섭합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낭랑의 웃는 낯이 더없이 홀가분한 것과는 몹시 대조적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람의 기준으로 신의 사랑을 재단하고 감당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흐름은 여기까지 당도할 수 없었다. 낭랑은 상반하는 감정과 예견된 엇갈림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장선을 기꺼운 낯으로 바라보았다. 하여튼 귀여운 녀석이로고. 무얼 아쉬워해.
“그것이 바로 연의 흐름 정으로 맺히는 묘리란다.”
이전 날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면서. 낭랑은 스스로 아끼던 제 신명 불리던 기억이 생생해 몹시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숱한 이들이 자신을 그리 불렀었다. 묘정妙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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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어떠냐. 닮았니?”
어지간한 세상 만물이 창조되고 만사 이치마저도 바로 섰다. 영의 절기가 끝나고 첫째 절기가 시작되면, 창세의 유예도 끝날 것이다. 머지않은 분기점을 기다리는 신령들을 끝까지 귀찮게 구는 이가 하나 있었다. 월선 낭랑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조몰락거리던 것을 눈에 띈 누구에게든 내보이고 품평하라 윽박질렀다.
가감 없이 말하자면 낭랑은 이미 천간天間을 열고 사람의 시조를 한 쌍씩 빚고 저가 사사로이 사랑했던 존재들을 그대로 불러내느라 거진 대부분의 힘을 써 버린 탓에, 그것은 빚다 만 것의 형상에 불과했다. 때문에 지고천 위에서 같이 세상 빚던 스무 신령 중 태반은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뭡니까, 이게?”
개중 전세에 서천 꽃밭 감관 노릇 하셨던 정현 대군께서 외면을 못 하고 슬쩍 손을 써 주셨다. 딱! 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 되다 만 사람의 형상에 달맞이꽃이 화악 피어나더니, 일시에 저물어 들며 눈과 귀와 코와 입을 섬세히 만들어 냈다. 누가 보아도 월녀의 얼굴이되, 다만 고운 아미 사이에 있던 눈썹달 모양 선골仙骨은 빚어내지 못했다.
기껏 선심 써 놓고 모르쇠 할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짐짓 팔짱 끼고 아무것도 안 한 척하는 대군을 붙들고 낭랑이 대신 호들갑을 떨어 댔다.
“대군. 너 꽃밭지기가 맞기는 했구나? 요거 신기하도다. 호오, 피어난 것은 분명 달맞이꽃이었는데!”
“…저도 신령이니 이 정도는 합니다. 아직 남겨 둔 힘도 있고.”
겪어 온 바, 대군이 퉁명스레 구는 경우는 대개 겸연쩍어 그러는 것임을 안다. 낭랑은 배시시 웃으며 이제 저와 똑같게 생겨난 사람의 뺨을 살살 쓰다듬어 보았다.
“이걸 다음 그릇으로 쓰실 생각은 아닌 듯하고. 그냥 만들어 보신 겁니까?”
대군은 낭랑의 심중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것 같았다. 새로이 열린 세상에서 본분 도리 다 하고 나면, 깨달은 바를 따라 비승할 작정이란 사실을. 그래도 너는 섭섭한 마음 드러내거나 해서 나를 막막하게 만들지는 않을 테지? 낭랑은 이 퉁명스러운 꽃밭지기가 겉으로는 바락바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이 많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해서 신경 써서 여상한 어조를 꾸며내 답했다.
“얘는 내가 아닌걸. 나도 내게 안배된 세상의 섭리 있다는 걸 깨달은 한 얘가 될 수는 없지.”
하지만 피조물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어 놓고 새침을 떨기엔 요사이 낭랑의 호들갑이 장했다. 신령들 중 월녀가 마지막까지 공들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뒤늦게 조금쯤 머쓱했던 모양인지, 낭랑은 부끄러워하며 실토했다.
“그냥… 사사롭고 헛된 짓이다. 미련이니라. 대리 만족이지. 누군가는 나를 똑 닮았으나 오직 하나 사랑하는 족족 실패했던 점만은 닮지 않고 살다 가길 바라서.”
이지를 가진 존재들 사이에 감정이 있어 온 한 언제나 달과 함께 존재해 온 사랑신의 장구한 역사에 해로한 짝이 하나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버텨 내는 이가 없었다지. 애석한 일이다.
“…역시 기분이 이상합니다. 조금 다르게 만져 보죠.”
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낭랑이 새로 빚은 사람을 바라보던 대군이 다시 손을 들었다.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나중에 항아님께서 놀러 나오신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의 후손인지 구분하지 못하면 어쩝니까?”
투덜거리는 대군의 손끝이 월녀가 빚어낸 분신의 이마에 닿았다. 그러자 삽시간에 그 머리카락이 교교한 오광 백색에서 땅 위에서 우러렀을 때 보이는 만월의 노란빛으로 변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갸륵해 낭랑은 아무 말 덧대지 않고 완성된 형상에 영과 혼과 백 이루는 근간을 짜 넣어 세상으로 흘려보냈다. 대군은 곁에서 월녀가 하는 모습 잠자코 지켜볼 따름이었다. 어쩐지 아쉬움이 남았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자, 드디어 빈손이 되어 여느 때와 같이 말갛게 웃는 월녀의 낯이 지근거리에 있었다.
“달맞이꽃에서 나서 달빛 색채를 갖게 되었으니 저것, 어쩌면 나보다도 더 만월 자체겠다. 대군. 고맙다.”
“고마우면 다음에도 제게 잘하십시오.”
낭랑은 ‘다음에도’라는 말에 멈칫했으나, 얼른 방긋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 여느 때와 같이 느닷없이 대군을 답삭 끌어안았다.
“또, 또. 뚝뚝하게 군다. 애늙은이 노릇 할래?”
“거참! 저는 늙은이가 맞습니다!”
“어허. 내 앞에서 연배를 따지시겠다?”
왈칵 성질내면서도 또 근원이며 연원을 따지자면 저보다 오래 묵은 것은 맞아서, 대군은 있는 대로 표정을 꾸기고 낭랑의 장난질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꼴 보는 것도 얼마 안 남았잖아. 봐주어, 대군. 필시 그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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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이 일은 금번 세상 열릴 적의 일이며 기천 년 전의 일이므로 장구 세월 살아가는 고매한 신령들이나 알 만한 내력이고, 또한 설법으로 전파된 창세의 역사에 포함되지 않은 사사로운 일이므로 개중에도 아는 이를 손에 꼽을 만한 비화이다.
월신 낭랑께서 비승하시기 전 가진 바 모든 힘을 끌어다 새로이 열릴 세상의 천간天間을 열고, 사람의 시조를 빚고, 전세前世 평생에 사랑했던 존재들을 다시 불러와 이번 세상에서는 신의 총애 같은 것 받지 말고 평탄한 사랑 하며 살아가렴 하고 축복한 뒤에… 한 줌도 채 남지 않은 마지막 힘으로 빚은 작은 것이 있었다.
나와 닮은 인간에게 이르니, 너는 달빛이 비치는 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환생하며 사랑하라. 네 인연은 내 인연과 다를 테니…. 인과에 매몰되지 말고 업보에 짓눌릴 일 없이, 종세에 이르기까지 또 언제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울더라도 하늘에 찢길 일은 없는 한낱 인간의 사랑을 하다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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