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로回路

광한전 by 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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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대강 다 가셨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사늘한 바람이 불었다. 바야흐로 가을이라, 곧 중추절이다. 연중 가장 크게 뜨는 달이 차오르고 있으므로 사람 모여 사는 곳에서는 제법 들뜬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양주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골목마다 장명등 내걸리고 상가에는 둥글게 생긴 과자와 과일이 들어찼다. 그리고 그 사이로, 사람을 본 게 맞나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희끗한 행색의 청년이 인파를 가로질렀다.

길다란 손가락이 둥그런 월병 사이를 노녔다. 그리 된지 제법 시간이 지난 것일까? 새치가 나기 시작한 상점 주인이 시큰둥하게 객을 재촉했다.

"적당히 고르시오, 거기 진열된 것들은 다 비슷비슷해."

"아하하. 선물할 요량이라서요."

퉁명스런 응대에 마음이 상할 법도 한데, 객은 넉살좋게 웃음으로 무마하고는 월병 한 꾸러미를 골라 값을 치렀다. 휘적휘적 걷는 걸음 어디로 향하는가? 풍류객신의 발걸음 짐작할 수 있는 이 누가 있겠는가.

인파를 거슬러 야트막한 언덕 올라선 객신은 시야에 담기는 양주 땅을 굽어보았다. 사람이 피워 올린 불빛이 땅을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쏟아지는 달빛이 충만하다. 매끄러운 미소가 흰 얼굴 위에 번졌다.

"명절이니… 웃어른 뵈러 가야지요. 빼먹었다가는 또 얼마나 섭섭해 하실지 소생 감도 오질 않습니다."

풍류객신, 칠현랑이 중얼거리며 손에 쥐고 온 월병을 꺼내 살랐다. 이것은 달까지 올라가는 길 열어주기 위해 내려와 주는 섬토를 위한 선물이다. 광한전 상량에 이름자 새긴 신위의 부름답게 지체 없는 응답이 이루어졌다.

길잡이 노릇 하러 내려온 토끼 동자는 어엿하게 수행 마친 녀석이라 달빛으로 저와 객신 걸음 디딜 곳 만들면서 동시에 입을 놀리는 데도 무리가 없었다.

"금년에는 양주에서 올라오시네요?"

"왜? 뭐 잘못되었어?"

"그것이… 매년 저희 부르시는 장소가 다르다보니. 칠현랑께서 어디서 올라올지 예측하는 게 저희 사이에서 소소한 놀이랍니다."

"…너희 내기 하는구나."

에두른 실토만으로 대번에 섬토들 사이에서 오갈 사행성 오락의 실체를 짐작한 칠현랑이 웃어버렸다. 그래, 뭐. 달의 주인도 이제 없는 마당에 누구에게 고해다 바치겠냐 말이다.

하계가 아스라하게 멀어지고 중천마저 지나쳐 위로, 위로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달이 가까워져있다. 토끼 동자가 풍류객신을 뒤에 단 채로 광한문을 두들겨 청지기를 불렀다. 두꺼비 김씨가 나와서 공손히 읍하고 객을 인계받았다.

"달에는 변고 없고?"

"아무렴요. 전번 단오절에 영해신룡께서 납시어 바다 한 번 휘저어 주고 가셨을 뿐입니다. 자그마한 용선도 띄워주셔서 어린 섬토들이 재미를 좀 봤지요. 제존께서도, 비사비령께서도 다녀가셨고요."

"아~ 그래. 항아님께서 퍽 다감하셨으니 빈객의 방문이 아주 예사다. 그렇지?"

두꺼비가 주인 치사 받아주는 객신에게 벌쭉 웃어보였다.

"늘 내드리던 방에 자리 보아두었습니다."

섬토들은 칠현랑을 객실로 안내한 뒤 물러났다. 비로소 사위가 적막하다. 사실 안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낭랑 떠나신 뒤로 매년 꼬박 중추절이면 올라온 역사가 길었으므로.

아마 월선께서 풍류객신이 예에까지 올라온 번거로운 절차를 다 보고 계셨더라면 필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구조도, 어느 방 내줄지도 빤히 다 알면서.

"하지만 기특하잖아요, 낭랑."

칠현랑이 좌탁에 자리 잡고 챙겨온 청주를 제 앞에 놓인 잔과 그 건너편에 놓인 잔에 채웠다.

너 섬토들 치하하는 척 하면서 자기 얘기를 하는구나?

"아이, 참. 눈치도 빠르시지. 하지만 반박하지 않으실 거지요? 소생 금년에도 때맞추어 문안드리러 왔지 않습니까."

허, 종적 감춘 나날 만회한다고 퍽 애쓰는도다.

"아시면 좀 예쁘게 봐 주십시오. 제가 올해에는 또 양주 땅 노닐다가 올라왔거든요. 종세에 친람하시고 또 손수 마지막 연 베풀어주셨던 것 기억 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하도 옛일이라."

얘. 누굴 고만고만한 신령 취급이니. 그걸 벌써 잊었을까봐?

"아, 물론 그렇지요. 존체 이치로 화하시어 온전한 기억 만고불멸하시겠지요!"

주는 이도 칠현랑이고 받는 이도 칠현랑이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으나, 주거니 받거니는 자연스럽다. 삼경이 깊어가매 둥근 창 밖으로 별이 정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묘정이라 이름 붙은 별 또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퍼뜩 눈을 뜬 칠현랑이 침침한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술병도 잔도 모조리 텅 비어있고, 무릎 위에 대금이 놓여있었다. 항아님이 한 곡 청하셨나. 무아지경에 연주한 모양이지. 손 가볍게 내젓는 것으로 간단히 치우고 침상으로 어기적 넘어가려는데….

딸랑. 하고 맑은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칠현랑이 걸음을 멈추었다. 풍경 소리다. 환청인가? 그럴 리가. 감히 악사신의 귀를 현혹시킬만한 물건이 여기에 있을 리 없다. 허면, 광한궁 어디어디에 풍경이 걸려있더라. 가장 높은 누각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궁주 부재로 봉인된 심처에.

다시 한 번 딸랑, 하고 맑은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칠현랑은 아주 오랜 세월 잊고 있던 향을 감지했다. 세상에 오직 한 명만이 이런 향을 내는 것을 태운다.

월석 담배.

설마.

그럴 리가.

이치로서 더 높은 하늘로 떠나셨는데.

부정하면서도 칠현랑은 홱 몸을 돌렸다. 객실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고, 너른 보폭의 불안정한 걸음이 내회랑을 질렀다. 지금 쿵쿵거리는 소리가 가슴에서 나는지 발 밑에서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광한궁 가장 깊은 곳, 오직 궁주를 위한 후원과 맞닿은 심처의 장지문 앞에 이르러 칠현랑이 멈춰 섰다. 예까지 오는 내내 풍경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으며, 담배 향이 짙어졌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황당한 말을 내뱉어도 놀리거나 타박하시기 없기입니다?'

"…… 항아님?"

그야말로 영겁 같은 찰나가 지나갔다.

"장선아."

문 너머에서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답한다. 여장선은 명료한 호명 앞에서 손을 떨었다. 탁기는 거두어진지 오래인데 어찌 이리 손끝이 떨리나. 아무래도 꿈을 꾸는 모양이다. 이대로 섬토들이 내준 객실로 돌아가 다시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날이 밝거든 하계로 내려가는 거야.

한데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무엇하니, 들어오지 않구?"

벽력이라도 맞은 듯, 여장선이 장지문 위에 손을 올렸다. 긴 세월 봉해져 있었으므로 밀리는 느낌이 거칠었다.

문이 열리고 심처의 휘황한 내부가 드러난다. 광채 어디서 비롯하는가? 마루 끝에 앉아 계신 달의 주인이시다. 청금석 비녀 꽂아 구름처럼 틀어 올리고 폭포수처럼 드리운 머리채가 익숙하다. 야속하게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망월이 다정하게 이른다.

"저런, 너 우는구나?"

몹시도 여상하게, 마치 없어졌던 일일랑 없는 것처럼.

•͙✧⃝•͙

묘정은 승천하기 전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곱씹었다. 바로 어제의 일 같기도 하고, 기천년 전의 일 같기도 하다.

나, 이치로 화하여 섭리로서 작용하니…

자기 자신이 곧 운명이요 흐름이고 사랑이며 마음이었다. 어느 누군가에게 오롯이 쏟기에는 압도적이고 난폭한 격류였으므로 방향을 바꾸었다.

장구세월 다시 지켜보는 세상이란 흡족했다. 어떤 방식으로건 흔적 남긴 지천명 덕으로 바뀐 부분을 더듬는 것도 기꺼웠다. 분신 삼아 만든 망연이 거듭해서 나고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묘정은 비로소 모든 것들에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애정을 쏟을 수 있었다.

…너희는 마음으로써 관계맺고 인연으로써 사랑하라.

왜 거기에 제가 포함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묘정은 마루에 걸터앉아 습관대로 장죽 꺼내들고 유성못에 비추인 하계를 굽어보았다. 중추절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우러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기원이 올라온다….

새로 열린 하늘에서 수백 수천 수만 번 뜨고 지는 동안 밤하늘에 걸린 것 중 사람에게 가장 가깝게 밝은 것으로서 다시 사랑받았다. 달을 향한 기원이 쌓이고 쌓여 작금에 이른 것일까….

묘리는 저조차도 헤아릴 수 없다.

"…아, 음…."

실재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어색해, 묘정은 손으로 목울대를 더듬어가며 알맞은 음역대를 되찾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장지문 너머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항아님?"

듣자마자 알았다.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너로구나?

"장선아."

매년마다 찾아오는 줄은 알고 있었다. 고작 한 갑자 홀연히 사라진 일에 섭섭하다 떼를 써 놓은 보람이 있었다. 그래놓고 왜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아.

"무엇하니, 들어오지 않구?"

재촉하고 나서야 장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언가 억누르는 소리도. 아이고, 이런. 겪은 세월이 얼마인데 고작 이런 일로 눈물을 보이니. 월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내심으로 웃었다. 고개를 돌려 낯을 확인하는 건 아주 잠시 미루어야겠다. 저 미련한 녀석이 안색 다듬을 시간은 주어야지 않겠느냐 말이야.

"저런, 너 우는구나?"

다만 배려가 무색하게 등 돌린 채로 한 마디를 덧대고 만 것은 실수가 아니라 귀여워하던 백구 놀리던 버릇이다.

정말이지 반가운 것은 이쪽도 매한가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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