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IF

: 도을

: oc by 믐
3
0
0

그러니까, 낙원이란 것은 제게 있어 먼 세계의 일이었다.

아무리 사회가 몸부림을 쳐도. 고작 문양 하나에 일희일비가 갈린다 하여도. 낙원이 사람을 우습게 만들고 사람을 고귀하게 만든다. 우열이 나뉘고, 하릴없는 부러움과 열등감이 사회 전반을 잠식하고 뿌리내려 단단한 돌을 조각조각 부수어낸다. 그것은 조잡한 우연을 일컬었다.

저를 제외한 모든 가족에게는 낙인이 있었다. 무한한 행복, 영원한 이상향으로 향하는 편도행, 어쩌면 불확실한 왕복행 기차표. 많은 이들이 그 피부 조직에 드러난 작은 표식 앞에서 무참히 인간성을 꺾어댔다. 영원과 무한, 그 단어가 어쩌면 사람에게 닿기에는 한없이 이상적인 말이었기 때문일까. 무지가 곧 선망으로, 동경이 곧 질투로. 열등감으로. 변화가 삶을 비집어 틈을 벌리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것은 집단을 휩쓸은 광기였다. 어쩌면 저에게도 그것을 숨겼던 것은, 그를 두려워했던 것일까. 물들어 버리면 어떡해요. 마지못해 알려준, 심지어 그리 명료하지도 않았던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다지 초조해하지 않았던 것은 특유의 느릿함 탓일 것이다. 안일하게 일상을 누리고, 이상함을 느껴도 그저 넘겨 버리는 것. 천성이었다.

충분하다고 생각해도 가족들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더 쥐여 주었다. 그것은 음식이었고 때로는 칭찬이었으며 애정이었다. 자식이라고는 둘 밖에 없을 텐데, 확연하게 무언가가 티나는 것만 같아서. 도을은 언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힐끗였던 그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역광에 비쳐서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환하게 웃던 진한 보조개. 한계 없이 쏟아져내리던 다정다감한 칭찬, 머리를 쏙 감싸 쓸어넘겨주는 손길,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쳐주는 배려. 가끔 셋만의 기묘한 유대가 보여도 말없이 삼켰다. 아, 그럴 리가 없으니까. 

나를 사랑해 주시잖아. 그런 단단한 자기암시는 도을의 존재를 구성했다. 물질적인 증거를 찢고 생각을 흐리며 정신적인 기반을 조성한다. 한 번 느물게 녹아내렸다가 굳어진 정신은 안정되고 느리게 자가순환하며 견고한 성을 쌓아나갔다. 생각할 필요 없잖아, 머리를 비워. 가족이 굳이 음절로 내뱉지 않은 추상적인 벽이다. 평온을 위하여 사랑으로 짜맞춘 돌이다. 교류할 길 없애 한없이 폐쇄적이었고 그러함은 고스란히 외골수에 한 몫을 둔다. 생각은 말아. 후천적인 습관이 행동양식에 배어들었다. 가족들의 사랑은 필요조건이었으며, 명백한 자기회피였다. 한없이 느린 눈치로도 낌새를 느낄 만큼, 그러하니 더더욱이다. 

그저 도을의 가족은 거짓된 꿈과 허구에 가두어 편안한 평화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아, 떠났구나. 그들의 인기척이 사라지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집 안에서. 제대로 청소되지 않아 먼지가 쌓이고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아 육체가 영양분을 구걸하고, 시야가 협소하게 좁아졌다가 늘어나기를 반복하던 그 순간. 폐쇄된 집안을 어둠이 활보하고, 오랫동안 수그려 앉아있던 근육이 서서히 늘어지며 파열되어갈 때. 벽에 기대어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도을은 생각했다. 공허한 눈 뒤로 온갖 생각들이 스스로를 벼려 공격하기를 주저치 않는다. 굶주림과 허기가 정신을 무디게 하고 통증을 뽑아세워 저를 위협했다. 몇 번의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했는가, 손은 힘이 들어가지 않아 파리하게 떨렸으며 말라붙은 입술을 뜯자 창백한 피 한 방울이 스며들었다. 

해가 뜨면 절박하게 그들을 증오했다. 저를 남기고 떠난 사람들을, 인간의 뇌 조직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자가방어를 시전했다. 가족들이 잘못한 것이었다, 본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힘을 그러모아 강하게 손을 쥐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고, 그 선명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순간적인 분노 표출과 울분을 토해내기를 반복했다. 질투에 겨워 그들을 다시 이곳으로 떨어뜨리는 상상을 한다. 여기서 머물러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는가. 목이 갈라져라, 무뎌져라. 성대가 찢어지고 나가기를 반복한다. 주거지 변두리, 겨우 하나일 뿐인 원망 어린 비명은 5구역 주변의 공장들이 구동되는 소리에 묻어 사라진다.

그러나 해가 진다면, 어둠의 추위가 공허를 관통했고, 그 뼈 시린 외로움에 사무쳐 제발 돌아와 달라고 빌었다. 낮의 태도는 오로지 만용이었다고. 제가 잘못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낙원으로 향할 만큼 충분한 유대를 쌓지 못했던 제 잘못이었다. 그리하여 물그스름하게 피딱지 얹힌 상처들을 문지르며, 제발 그곳에 낙인이 생겨나기를 헐떡이며 빌었다. 아냐, 말하셨잖아. 나 역시 선택받을 수 있을 거라고. 밤이면 그 흉터들이 그들의 몸에 새겨져 있던 낙인과도 비슷해서, 그리워서. 그 이룰 수 없는 꿈에 겨워 무기력에 젖어 중얼거렸다. 그들은 돌아올 것이라.

시간은 지나간다. 일주일. 그것은 도을의 생에서 가장 길었을 인내였으며, 미래의 인내심까지 긁어다 쓴 나날이었다. 한껏 이 악물어 닳아버린 치아에, 훌쩍 관리하지 않아 엉켜버린 머리카락에, 처음으로 제가 구성해서 가족들의 몫까지 차려둔 밥상을 아무도 손대지 않아 쉬고 썩어갈 즈음에 도을은 결국 납득했다. 굴복했다. 알고 있어,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걸.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저는 갈 수 없음을. 그렇다고 그들의 예정되고 약속된 낙원을 감히 앗을 수는 없었다. 어디 있더라도, 도을은 그들을 사랑했다. 그렇게 키워졌다. 그렇게 사랑받았고, 돌려주어야만 했다. 어디에 있더라도, 도을은 영원히 그들을 사랑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받았던 사랑은 진실이었다. 세상 모두가 아니라 말하더라도, 적어도 도을은 그것이 맞다고, 진실한 명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제가 아니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제 바로 곁에 없더라도, 그동안 함께한 기억과 추억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탓하기를 그만두었다. 이제는 요원할 은혜를 갚아볼 작정이었다.. 어떻게.

오래도록 체납된 전기세에 곧 끊어질 마지막 전기가 TV를 달구었다. 어두운 방 안, 창백한 낯을 인위적인 화소가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찰나 인위적인 빛이 그 눈자위에 물들어 반사된다. 각막의 초점이 순간 빛난다. 거부 없이 고스란히 제 앞의 광경을, 침묵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잠시 조정에 시간이 걸리더니, 잠깐이나마 몇 문장을 뱉어낸다. 뉴스, 최근 소식의 사회란이었다.

...치직.. ...직.. ..요즘 0구역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자행하는 테러리스트, 즉 빌런의 증가세가... ..치직... 직...

재색과 흰색, 검은색 사각형들이 길게 뒤섞여 줄세워 화면을 가로지른다. 남은 색채의 화면 속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0구역자들. 폭력, 울음, 비명, 피, 상처.. 제 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마치 제 가족 하나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손을 움찔거리며 힘없이 말을 내뱉으나 그것은 공기와 맞닿아 떨림이 되지 못하고 색색 거친 숨소리로 흘러나올 뿐이다. 당장 제가 저곳에 있다면..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 무차별적인 끝은 결국 송출되는 전자를 넘어 다가오매, 픽. 결국에는 힘없이 꺼져버렸다. 더 이상 구동할 힘 없으니 그것은 고철에 불과했다. 다름없다. 분명히. 그것을 어두운 방 안에서 체감한다. 끼익, 아무도 손대지 않았을 문이 바깥을 향해 열렸다.

...정말로 갈 거냐?

착잡하게 무기상은 그 늙은 연륜을 담아 물어보았다. 작은 신장, 이곳에 들리던 이들은 모조리 가슴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복수심이든, 파괴든, 욕망이든, 정의든. 무기상은 수없이 그들의 내면을 관조하며 가리지 않고 두루 무기를 팔았다. 중요한 것은 이윤, 이런 하위 구역에서는 침묵이 곧 목숨줄이었으므로. 그리하여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은 몸체에 들린 것은 거대한 사명감이다. 대부분의 확률로 치기 어릴 테며, 높은 확률로 그 살아가기 전에 죽어버리거나, 영원히 감옥에 갇혀버릴. 아니면 꺾여 변질할 것이 분명한.

잔말 말고 물건이나 내놔.

차가운 손이 재게 총을 채어들고 이리 저리 살핀다. 그 능숙한 움직임에는 얼핏 두려움이 서려 있었으며, 그 반증으로 턱이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고,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새로운 총, 가방 몇 개를 가득 채운 탄창들. 여유가 하나도 없는 애송이잖아. 손톱은 마구 깨져있었으나 손에는 굳은살 하나 없다. 근육이라고는 그나마 붙었으나 여전히 앙상하기 그지없다. 한 번도 살인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든 과거를 숨기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렇다면 표정을 숨기는 법은 배우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감추기라도 하던지.

뭐. 그쪽이 무슨 상관.

그러면서도 퉁명스레 옷깃을 세우는 것은 제법 순순했다. 그 짓씹은 입술이 단단했거나, 악바리가 가득 찬 눈을 마주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전기처럼 잘게 튀어오르는 힘을 느껴서일지도.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 그동안의 준비를 읽어내서였을지도. 분명 정보상에게 받았을 가방과 탄환 상자들이 담긴 가방, 그리고 총기를 매만지며 도는 뒷모습은 여느 때와 같이 곧 잊힐 모습이었다. 작디, 작은.

..저 사람이다. 도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끈질기게 범죄자를 좇았다. 정보를 모으고, 그가 없어져야 할 이유를 찾았다. 오로지 즐거움 때문에 몇 명의 무차별적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저런 놈이 우연히 0구역자가 되어 낙원에 향한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난다. 가족들이 향한 이상, 낙원에 저런 불순물이 뒤섞이면 되겠는가. 그곳은 정말이지 낙원이여야만 했다. 성역이며 검은 악의와 온갖 범죄가 추악하게 손을 뻗치지 말아야 할 곳이었다. 낙원에는 결코 이물질이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 그래, 위험 인자를 배제해야 해. 차갑고 날선 총기의 감각이 손바닥을 훑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하얗게 질리며 눌리는 손가락 표피로 진동이 느껴졌다. 메마른 혓바닥이 거칠게 입천장을 쓸었다.

이 뒤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 누군가가 귀 뒤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결코 너를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 말에 도을은 답한다. 그들은 이미 저 지상낙원, 0구역의 하늘 너머로 사라졌으며 나는 감히 그들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아니라고. 내려오지 않을 것을 알아, 그저 가족들을 위한 거야.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이미 받아온 것들에 대한 의미로.

목표물은 아무것도 모른 채 거리를 나오고 있었다. 지금이야. 천천히 숨을 멈추고 눈에 힘을 주었다.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공기의 정전기가 허공에서 탁, 탁, 터져나왔다. 엉성하게 자른 단발이 귀 끝에서 흔들린다. 예민한 바람이 한껏 달아오른 이마를 식혔다. 식은땀이 송골 맺혀나오고 방아쇠 위에 올린 손 끝이 미끄럽다. 말을 몇 마디 내뱉고, 아주 쉽게 이것을 당기면 될 뿐인데, 그것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두려웠다. 겨우 총알 한 개가 아닌, 무려 하나의 삶을 빼앗는 짓이다. 진실로 나는 범죄자가 되는 거야.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어른어른 비웃듯 춤을 추었다. 평화로이 살아온 도을에게 근 몇 달은 너무나도 급변적이라서, 아무리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무덤덤하게 타협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아침인사, 싸늘하게 식은 침대, 순식간에 사람 머문 흔적조차 남지 않은 집. 고독과 외로움이 저주처럼 귀에 들러붙고, 고막을 잡아당기며 연신 비명을 지른다. 도을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습관처럼 생각을 비웠다. 가족을 위함이라면. 쏘고, 선고해서, 제거한다. 그 어긋난 이념을 굳게 삼키며 덜덜 떨리는 몸을 올곧게 바로잡고 눈꺼풀에 힘을 주어, 하나의 세계와 그 앎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방아쇠를 살짝 당기는 것이다. 철컥.

푸슉, 붉은 피가 허공을 곱게 수놓았다. 

순간 도을은 우습지만, 어깨를 움츠렸던 것도 같다. 

살의 없는 총탄이 채 나아가지 않은 총기를 연신 뒤로 제꼈다. 허공에서 찰나 녹색의 긴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긴 옷자락과, 이유 모르나 시선을 끄는 분명한 초커. 순한 낯에 오히려 민간인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제 목표물의 목을 향해 분명히 살의 어린 칼날을 내리꽂기 전까지는. 눈 앞에서의 첫 죽음. 뜨거웠을 피가 치덕대며 순간 제 낯에 붙어오는데도, 망연 바라본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지만 죽음은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허공으로 피가 솟아오르는데, 그것을 오연히 바라보는 상대는 마치 정말로 빌런 같아서. 그것에 겁을 먹은 자신이 바보같아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듣지 않는 총기와 함께 칼날을 집어들었다. 정신 차려. 죽기에는 아무것도 못했어, 빌어먹을. 그러나 상대는 도을까지 습격하지 않았다. 마치 눈을 크게 뜨며, 아는 사람을 보는 듯 익숙하게 입을 달싹였다가 이내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바람 구멍 나겠다니. 뭐야? 살아남았으니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무수한 습격을 실패하기 전까지는. 그 미친놈은 다른 건 감쪽같이 놓아두면서, 꼭 도을이 정보를 모아 목표물을 겨냥했을 때에만 나타나 모조리 망쳐두었다. 혹은 이미 죽여버렸거나. 그 쫓고 쫓기는 사냥꾼끼리의 추격전은 언제나 빈번히 도을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행을 따돌리는 기술도 훔쳐 배우고, 혹은 필요하지도 않은 전투술을 배워 행했으나. 마치 상대는 모든 수를 읽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쓰러눕혔다. 언제 한 번은 정말이지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으나,

..이렇게 보니 기분이 참 이상하네요. 

그런 알 수 없는 말만을 남긴 채 또다시 쓰러진 도을과 시체만을 남기고 훌쩍 사라져 버렸다. 그래, 그 모든 목표물들을 본인이 먼저 훔쳐가버리는 것이다. 도을은 이미 한계까지 다다른 뒤였다. 무수한 죽음을 정당한 선고로서가 아닌 방관했음을, 또한 살인에 무감각해지긴 했으나 다소 양심이 무뎌지지는 않은 상태라서. 무수한 죽음을 보았으나 한 번도 본인이 죽이지는 않아 민간인의 신분이었다.. 제가 모르는 새 무언가가 진행된다는 불쾌감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까득, 이가 강하게 악물린다. 이렇게 한다 이거지. 눈썹이 치켜올라가고 핏줄 돋은 흰자위가 사납게 그 자리의 잔재를 노려보았다. 익숙하게 쓰고 헐어버린, 그러나 본연의 목적으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총기를 다잡는다. 근육은 순식간에 긴장 태세로 들어가 전투를 준비하고, 뇌의 피가 빠르게 돌며 순간 결론 지었다.

저놈부터 제거해, 씨발. 

까짓것 빌런? 잡으면 된다.

도을의 학력은 전무였다.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고, 홈스쿨링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몸을 쓴 관계로 머리는 굳은 지 오래. 인내심은 이미 몇 년 전의 그날에 다 써버리고 손톱만큼도 남지 않았다. 거의 무너지고 닳아 부서진 집 안에서, 전깃불도 간신히 제 이능으로 붙여 놓고 연필밥을 이빨로 까득였다. 장례식에 반드시 독이 뚝뚝 떨어지는 꽃을 던지고 올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다시 문제를 넘기는 것이다. 뭔 소리야, 왜 1에서 -1을 빼면 2가 되는 건데. 순간 가족을 원망할 뻔 했으나.. 아, 아니다. 내가 무슨. 이게 다 그 미친놈 때문이야. 제가 왜 이렇게 부득불 공부하고 있는지 이유를 생각하면 일순 울분과 증오가 치솟는 것이다. 젠장, 아직도 법 파트는 외워야 할 게 한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망률이 높은 직업이었으며, 그 해는 유난히도 순직이 잦았다. 히어로를 추앙하는 것은 본인이 직접 행하지 못한다는 그런 두려움 때문이다. 인류를 수호한다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빚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토록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몰려 있던 해에, 도을은 시험을 쳤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선임들은 간혹 도을의 뒤통수를 쳐대며, 어떻게 이 텅 빈 깡통이 들어올 수 있었냐고 놀라곤 한다. 어쩌라고, 늙은 영감들이. 그렇게 대답하며 신입이 위협하며 성큼 성큼 회의실로 냅다 들어가버리는 게 5구역 형사 3팀의 일상이었다. 

..반장님, 우리 막내는 뭐가 그리 까칠할까요, 좀 여유를 가져도 좋을 텐데. 마냥 곧 떠날 사람처럼 굴어요.. 

쟤가 잡으려고 하는 게.. 그 빌런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질 나쁜 0구역자만 조진다는...

조심히 말해. 누가 들으면 옹호한다고 듣는다고. 아무튼 우리로서는 기껏해야 상부 압력을 막아주는 게 최선..

오지랖은. 문 너머로 그런 말들을 무심히 흘리며 도을은 지도를 펼쳐 몇 개를 꽂아놓고서는 머리를 싸맸다. 아무리 인과가 얽혀들고 상식이 박혀들어서 나아졌다고 해도 막걸리 깡, 돌머리의 위력은 어디 가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이 미친놈은 어떻게 제 살인을 알고 가로채는 것인가. 제가 죄를 지었던 건 맞긴 한데. 이 정도면 신이 내린 장애물이 아닌가 싶었다. 욱신거린다.

아무튼, 이 살인범의 목표물은 저와 흡사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0구역자. 제가 꼽아두었던 우선순위가 비슷한가 싶어 역으로도, 무작위로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브로커를 거치며 정보를 한 번 세탁까지 해 두었는데도. 물론 제 머리로는 사기 당하지 않는 선에서 그 정도가 최대였다고는 하나. 이 빌런은 놀랍도록 집요하게 제 목표물을 가로채고 있었다. 머리가 달아오른다. 복잡하게 엉킨 신경 타래가 합선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속도 없이 울렁거려서, 하는 수 없이 벽에 몸을 기대었다. 어두운 회의실 안에서 엉망진창으로 쌓인 종이 서류들만 나풀거린다.

쾅, 벽에 머리를 박자 따갑지만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질한 균형 때문에 탁자를 잡으며 상체를 숙이자 목에 걸고 있던 형사증이 탁자 위로 널부러진다. 만사 불만 있는 듯한 표정, 멀끔한 증명사진에 히어로 표식, 그리고 그 밑에 적혀 있는 이름. 무의식적으로 입에 붙은 호칭을 중얼거렸다. 형사 도을.. 합법적인, 공권력. 그리고 아직도 무수히 남은 리스트.

잊고 있었다. 처음부터 제가 가장 잘 하는 것은 머리보다 몸을 쓰는 일이었는데. 생각없이. 도을은 뇌를 비우고 범죄자를 좇아 하염없이 쏘아다녔다. 정보를 찾고, 소식이 닿으면 일단 달려간다. 단순하게 몸을 사용하고 달려나갔다. 그에게 닿을 때 즈음이면 미리 죽어있는 시체는 빈번했다. 그 흥건한 살인 현장에서 녹색 머리의 흔적을 쫓아 추격하는 것이다. 간혹 운이 좋아 마주할 때면 상대는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은 후련함 혹은 해사함과도 닮아서 도을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효율적으로 들쑤셨다. 즉, 도발했다는 말이 되겠다.

도와줘. 도을은 공권력의 특기를 활용했다. 원래 공격은 선빵필승, 그리고 다굴이 효율적이다. 뇌는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고 나갈 곳이라 하여, 얼굴도 잘 마주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한다. 도와줘, 요반장.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요청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동료들에게 있어 그 한 마디는, 드디어 신입이 마음을 여는 것이었다. 늘 벽을 치고 거부만 하던 신입이 기특하게 도움을 청해온 것이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하나, 그것에 도을은 흔쾌히 인력을 얻었다. 그 뒤로 온갖 쓰다듬에 헤드락, 등짝을 맞긴 했으나.. 이런 수모야 저 미친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감수할 수 있었다. 어느새 리스트는 제거된 사람들이 더 많아진 탓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그 전보다 리스트를 들추며 곰곰 생각하는 빈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간혹 이 서류 앞에서 물끄러미 서서 매만질 때도 있었다. 표지를 넘기려는 손에는 암묵적인 무게가 달아 무거웠고, 움찔거리던 손은 이내 주먹을 쥐며 돌아서 버리는 것이었다. 회의실에는 좀 더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고, 엉망이었던 서류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쌓였으며, 벽의 조명은 항상 환한 빛이 들어왔다. 

공무원에게 휴일이란 없었다. 도을의 사정이 무엇이던 임무는 내려와서, 해결하기 위해 겨우 발버둥치는 시간이었다. 범죄를 진압하기 위해 나가 이 악물고 싸워 체포한다. 다음 임무가 들어오기까지의 짬, 그 몇십 분 남짓한 시간동안 정보를 뒤진다. 패드를 열심히 누르며 새로운 정보를 다운받는다. 서류를 뒤지다 베인 손가락이 다시금 터져나왔다. 입술을 짓씹으며 밀려오는 잠을 간신히 버틴다. 분석하고, 결과를 확인하고, 서로 어깨를 맞대며 의견을 나눈다. 낯에는 눈그늘이 짙게 올라오고, 몇 번을 마셨던지. 셀 수 없이 마신 커피에 물려 위가 떨려왔다. 

하루는 결국 빌런 하나를 놓치고 대차게 깨진 날이었다. 최선을 다해 쫓았으나 어느새 본체와 인형이 뒤바뀌었음을, 뒤늦게 알아챈다. 평소보다 저하된 컨디션 탓이었다. 임무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정신이 이상한 데 팔리니 이런 것 아니냐고. 그 말을 들으며 도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익숙하게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달려들면 정확하게 저 새끼의 말을 멈출 수 있다. 코 하나만 부러져도 비명 지르는 게 사람인데. 등 뒤로 숨긴 팔을 움직일까, 고민하던 차에 손 하나가 그 팔을 살며시 잡았다. 옆에서 뻗어온 손이다. 바닥을 디디던 발에서 무심코 힘이 빠졌다. 

..이대로는 명분도 뭐도 안 된다. 저기 본부에, 아는 사람한테 듣기로는 히어로 하나 있거든? 머리가 좋아서 뭐든 잘 만든다나. 걔한테 뭐라도 하나 받아오자. 그걸 왜 이제 말해. 뭐해? 빨리 꺼져. 존댓말 어디갔냐. 존댓말. 어느새 동고동락한 사람들이다. 제멋대로긴 하나 분명 도을은 이곳에 제법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커피 스틱 세 개, 스틱 두 개. 이쪽은 설탕 추가. 도와주는 값으로 항상 커피 심부름은 막내의 몫이었다. 취향은 각자 왜 이리 까다로운지. 한 번은 주는 대로 먹으랍시고 멋대로 타자 그 커피들은 전부 제가 마셔 없애야만 했다. 그날 쓰린 속을 부여잡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분말과 뜨거울 물을 잔뜩 섞었다. 다시금 지새울 밤이다. 커피향에 젖은 방은 어두운 보름달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 많이 길었네, 이번에도 자를 거냐? 화면에 한껏 집중하고 있었는데. 의자가 삐걱이며 돌아간다. 선배 하나가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갔다. 저 인간이 정말. 짜증스레 뒷통수 즈음을 더듬거렸다. 실용적인 이유로 짧게 치던 머리카락이다. 피라도 묻으면, 시간이 없으니까. 생존에 쫓겨 습관처럼 자르던 길이가, 어느새 길어 목 뒤까지 내려온다. 언제부터 잊고 있었더라. 물끄러미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아는 미용사가 하나 있거든. 히어로랑 미용사랑 겸업한댔나? 이번에 자를 거면 한 번 가 볼래? 초반 간간히 스스로 머리를 자르던 걸 기억하는 모냥이다. 슬슬 거울을 볼 때마다 놀라지는 않을 것 같네. 손을 내리며 슬쩍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제 좀 길러 보려고.

무수한 날들이 지난다. 말을 섞고, 도움을 주고, 받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천천히 느리게. 차근히.

 

. . .

..그때 절 만난 걸 후회하진 않죠?

만신창이로 수갑을 채우고, 상대를 무릎 꿇렸을 때 들은 말이었다. 항상 생각했던 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던 손길이 멎는다. 찰나 힘이 풀린 것도 같아서, 마음을 다잡고 느리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공교롭게도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을 수습하는 선배 하나, 거대한 낫을 집어들은 초면의 히어로 하나. 나머지는 흩어져 이 말을 들을 수 있는 자 없었다. 이유 모르지만 성격 더러워 보이는 저 히어로만 조심한다면야.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상대를 관찰한다.

어느새 까마득했다. 총기를 잡았을 때 어떤 생각이었는지. 얼마나 절박했었는지. 위험 분자의 제거, 그 생각을 떠올리게 된 정교한 사고방식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희끄무레한 안개가 과거와 현재 사이를 갈라놓은 것만 같다. 그래, 그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유일하게 같은 것이라고는 가족들에 대한 사랑밖에 없었다. 변함없을 절대 명제.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베풀 요량이 있다. 이제는 의지할 이 있었고, 제가 잘못된 길로 빠지면 잡아줄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저를 생각해 줄 오지랖 많은 인간들이 있으니까. 정신력 하나는 좋았고, 언제나 도을은 뒤를 돌아보질 않아서. 후회라고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희미한 확신이 생긴다. 이 질문이야말로 제가 분명히 답할 수 있는 종지점이라고. 

응.

도을은 그렇게 단 한 음절로 과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만 돌아갈 시간이래요!

푸른 하늘 아래서 누군가 풋풋하게 소리쳤다. 소금 어린 바닷바람이 분다. 항구에 들어오는 배가 닻을 내렸다. 잔뜩 헝클어진 새까만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렸다. 낡은 총이 부서지고, 옷은 찢어져 넝마가 된 지 오래다. 언젠가 고해성사하러 성당에 가도 좋겠지. 삭신이 쑤시는데. 모래사장을 밟는 발걸음들이 늘어난다. 수고했다! 우리 막내, 대견하다! 하나 둘 달라붙는 동료들 사이에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워커 사이로 들어오는 모래가 까끌거렸다. 그만 와! 아, 모래. 야! 반쯤 비명 같은 짜증스런 외침이 망망 울려퍼졌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