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라진 재

: 도헌영

: oc by 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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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숲. 높게 솟은 건물들은 도시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도시가 서서히 말라 죽어가도 시멘트와 철과 유리와 죽은 공룡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부산물과 자연의 유해를 짓뭉갠 혼합물은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다만 흔적 하나 없다. 화려하게 시선을 잡아끌던 거대한 전광판, 인간의 날되고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반증하듯 하늘을 대체하며 푸르게 빛나던 외벽, 서로 겹치고 겹쳐 선명하게 윤곽을 그리던 빌딩의 그림자, 미시적 시야를 비웃듯 개인의 존재를 압도하던 고고한 위용, 유기물처럼 움직이던 거대한 군중의 집합체. 자연을 감히 뭉개버리던 인위적 괴리는 더 이상 자리하지 않았다.

 눈이 부시게 찬란을 고하던 문명은 잠에 들었다. 자연의 자비는 끝을 다했다. 완벽과 영원을 추구하던 작위적 인공의 오만, 콧대를 세우고 꼿꼿이 치솟던 그 자만은 당위적 섭리 아래 자연보다 느리게 닳아갔다. 무뎌진다. 그러나 자연의 무한에 빗대자면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도색이 벗겨진 시멘트 덩어리들은 흉측하게 골자를 드러냈다. 푸른 외벽은 녹 슨 철골만 남았고 공사의 단면이 고스란하다. 삭막한 폐허를 울리는 소리라고는 빌딩숲 사이를 지나는 바람의 마찰음. 기묘한 공허가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들락거렸다. 시끄럽게 울려대던 클락슨 소리를 대체하듯 비어져 나온 철골 하나가 위태롭게 걸려 끼익, 끼익. 바람에 흔들렸다.

아스팔트는 쩍쩍 갈라지고 메마른 도시는 이곳 저곳이 가라앉았다. 깨진 유리 조각이 신발 밑창 아래서 일거에 부서지며 아스팔트 위를 굴렀다. 차체의 철골은 녹이 슬었다. 내구도가 약해진 나머지 작은 충격조차 버티지 못했다. 비웃듯 작은 종이가 깨진 유리에 걸려 차창에 깃발을 드리웠다. 어딘가의 중요한 서류였을 그 몇 장의 종이들도 결국 단말마와 함께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텅 빈 도시를 누비며 ■■은 기시감을 느꼈다. 허망한 기억, 색 바랜 추억, 이질감에 몸을 맡겨버리고픈 나른한 충동감, 속을 채운 공허한 상실감, 무기질적인 단편성, 덧없는 무상함,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만 같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가슴 속이 미미하게 울렁였다. 손을 펼치면 전시전이나 박물관의 입장표가 나오지 않을까. 이곳은 동력이 멈춘 기관과 닮았다. 오래도록 박제되고 유폐된 감옥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익숙하지만 낯설다. 

죽은 도시의 사체는 추락한 과거의 영광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유형의 유산을 곱씹을수록, 이질적 개체를 배제하려는 무형의 의지가 엿보였다. 잿빛 세상이다. 날카롭게 굳어버린 강인함만이 남은 도시에 희게 무른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 응당 옳은가. 첨예하게 벼린 바람이 살에 에일 듯 다시금 스친다. 불청객은 고개를 들었다. 직관으로 와 닿는 감각이 생경하다. 메마른 폐허. 잔해가 녹슬고, 부서지고, 끊어지고, 찢어지고, 상처 입고, 황량하고, 시리며, 닳고, 무뎌지고, 분해되고, 죽어간다. 거창한 장례식이다. 아무것도 싣지 못한 바람이 음울한 장송곡을 연주했다. 웅장한 공명이 부딪히고 튕겨나가고 틈새로 새어나가며 광대하게 울려 퍼졌다.

구석 구석, 발은 온갖 곳을 밟았다.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제가 가는 방향이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방향감각이 뒤틀리고 공간 지각이 왜곡된 나머지 표지판을 참고하려 눈을 돌려도 읽을 수가 없다. 글자의 의미를 흡수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글자의 모양과 형태를 인지할 수 없었다. 직선과 곡선이 표지판의 배경에 녹아 사그라든다. 급기야 손을 뻗어 잡아 쥐어도, 미간을 좁혀 집중력을 끌어올려도. 자석이 같은 극을 밀어내듯 무형의 반탄력이 작용했다. 하릴없이 무지가 꾸역꾸역 육체를 집어삼킨다.

그새 표지판 모서리가 뭉툭하게 찌그러졌다. 아, 작은 울림을 내뱉고 하나 하나 손가락을 떼어냈다. 철 모서리가 손을 파고들었는지 찐득한 덩어리가 으깨졌다. 창백하게 흰 살갗, 온통 극단적인 흑백으로 이루어진 옷, 혈기 없는 서늘함, 그 가운데 죽 죽 흘러내리는 액체 줄기가 유일하게 붉었다. 경종이 울리지 않는다. 비현실적으로 현실과 유리된 기분, 아득하고 몽롱했다.

의학 분야의 지식은 조금도 없으나 지혈 정도는 알았다. 미동하는 감정의 기복을 절제하고 천에 손을 묻었다. 큰길 옆으로 난 작은 골목들은 수없이 엉켜 있었다.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수록 건물의 상태가 양호해진다. 작은 점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비교적 멀쩡하지만, 전면 유리가 부옇게 반투명했다. 들이찬 고층 건물에 이미 빛이 들지 않는 골목이다. 반쯤 내려온 셔터에 가려 가게 내부에서는 어둠이 넘실거렸다. 간판은 한쪽이 떨어져 나가 바닥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땅에 끌렸다. 흰 원에 짙은 색의 십자 기호. 간판을 넘고 문에 힘을 주어 밀어보았다. 문에 손자국이 남으며 입구가 벌어진다. 텁텁한 먼지 냄새가 훅 호흡기를 조였다.

좁다. 발에 굴러다니는 먼지가 채였다. 등 뒤로 비치는 빛살에 공중을 부유하는 수많은 물질이 필름처럼 투영된다. 더불어 올라가는 조도에 윤곽이 드러났다. 가지런히 정리한 상품, 진열대 위 수없이 자리한 의약품, 사람들이 앉았을 의자, 불이 들어오지 않는 천장의 전등. 말끔하다. 계산대 근처에 자리한 매대에 상품이 촘촘하게 수납되어 있다. 그 중 손에 닿는 박스를 꺼냈다. 양심이 가시 넝쿨처럼 몸집을 부풀렸다. 서투르게 한 손으로 입구를 뜯는다. 포장이 반동으로 흔들리다 바닥으로 추락한다. 툭, 메마른 소음이 울렸다. 내용물이 바닥에 부채꼴로 흩어졌다. 

한 손으로 복합적인 손동작을 취하기란 어려웠다. ■■은 요령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테다. 다른 분야에서는 분명한 모범생이었으나 몸을 움직인다면 영락없이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그 범위는 건강부터 시작해서 손재주까지 넓게도 아울렀다. 결국은 변명이겠으나. 미숙한 실력으로 더듬이며 반창고를 깠다. 접착력 있는 부분이 꼬이고 달라붙었다. 귀찮을 법도 한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모든 상처 위를 반창고가 덮은 것은 한 상자를 모조리 비우고 나서였다. 손바닥 안쪽으로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었다. 푸르게 돋은 혈관과 창백한 살갗이 어울린다면 어울렸다. 그러나 반창고가 잔뜩 묻은 손은 생소했다. 외적인 상처는 이유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낯설음이 스스로 치료해 보았기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이 반창고가 붙어야 할 상처의 주인들은 따로..

시선이 물끄러미 하늘을 향했다. 눈이 부시다. 태양이 건물 옥상의 틈 사이로 손을 뻗었다. 사방으로 떨치는 볕살이 정통으로 눈의 정가운데를 찌르고 고스란히 뇌를 관통한다. 시야가 가에서부터 서서히 점멸한다. 흔적이 시각 위로 툭 툭 떨어져 기어다닌다. 화소를 집어삼키는 검정이 품은 광기 어린 초록, 분홍, 노랑, 갖가지의 원색의 강렬함이 가는 실로 띠를 둘러 뭉클대고 울렁인다. 이면의 상을 투영하는 각막 위로 이물이 번지는 환상통이 일었다. 

초점이 멀어지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그에 따라 한껏 축소된 동공이 작게 진동하며 시신경을 두드렸다. 따가운 눈의 흰자위가 예민하게 달아오르며 관성적인 물기가 고였다. 건물이 고공하여 무슨 색인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젖힌 그대로 손으로 차양을 두르고 눈을 감았다. 흰색 햇살에 소매가 젖어들었다. 눈물은 체온보다 높아서 쉬이 그치지 않았고 느릿하게 볼을 굴러 목을 타고 떨어졌다. 

여태껏 한 번 쉬지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걸음을 옮기는 속도에 변화가 없었다. 일정하게 입력된 마냥 발을 내딛는다. 예전이라면 이미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어디에서? 물이 번지듯 얼룩진 기억이 으스러졌다. 기억 속 붉은 상처가 벌어진다. 치솟았다. 시야가 붉고 검었다. 흑색의 진득함이 괴성을 질렀다. 그것은 뇌리 속에서 치직대는 흑백 TV 화면이었다. 중계기가 시원찮은지 몇 번이고 노이즈가 강하게 일었다. 쉬지 않고 화면이 점멸한다. 깜박. 깜박 깜박.

몸이 약했다. 병원에 자주 방문했으니 그런 잔인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 것이 당연했다. 환자들의 상처가 무의식적으로 충격적이었나 보다. 화상이라던지, 상처의 절단면 같은 것들을 평소 볼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학교? 집? 현실감 없는 괴담처럼 느껴졌다.

거센 바람에 셔츠 자락이 펄럭인다. 백색 셔츠의 온 모서리를 붙잡고 바람이 떼를 썼다. 이만 내놓으라는 거친 호성이다. 힘없이 나부끼는 갈대처럼 걸음은 갈 지를 그렸다. 인적을 찾을 수 없으니 바랄 도움도 없었다. 오롯한 고독이고 홀로의 외로움이다. 도시에는 사람의 손을 탄 자국이 남아있지 않았다. 마땅한 비현실의 현실이었다. 절대 명제처럼 기이하게 응당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로소. 

과연 저가 지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 세계가 맞는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주체가 맞나. 위기 의식 없어 제기하지 않았던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곡선이 되어 물음표의 방점을 찍는다. 의문은 느릿하게 의심으로 번진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하다. 한 번 튄 불꽃이 쏜살같이 현을 튕기며 길을 가른다. 과거 제 존재를 의심해 보기라도 했던가. 걸러진 인지의 괴리가 다시금 덮쳤다. 현실의 감각이 희미한 것도, 건강의 한계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뭉뚱그려진 기억, 읽히지 않는 글자, 모호하고 애매한, 인적 없는 기이한 곳, 처음 보는 낯선 장소, 그 모든 것이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저는 묻은 것 없고 깔끔하다. 그러나 아스팔트 도로에는 진득한 고체와 액체 사이 농도의 검은색 흔적이 길게 남아있었다. 본능적인 믿음과 인식의 오류, 괴리, 영원을 기할 찰나. 문득 숨이 막혔다.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척수에 두꺼운 마개가 틀어 막힌 것만 같았다. 거세게 뒤섞인 인지 감각에 몇 번이고 혼란이 일었다. 

느리게 깨닫는다. 이것은 내면적 관조이다. 주마등이구나. 그리고 죽음을 넘볼 특권으로 뒤늦게, 그러나 조금은 이르게 가역적이고 주관적인 진실을 짐작한다. 기다렸다는 듯 제 앞 뒤의 길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을 보면, 맞는 가설이겠지. 관조의 종결이 왜 하필 지워지는 도시인지, 삭막하고 황량한 폐허가 배경인지.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굳이 생각을 잇지 않고 눈을 내렸다. 눈이 부셨다.

道 길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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