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흘러갔던 나날

언젠가 있었을.

: oc by 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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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허공은 음울한 잿빛이었다. 장마가 하루를 고스란히 관통하고 지나간다. 강렬한 여름볕과 선명한 천체들은 온데간데 없으며 두터운 비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비가 땅으로 세차게 내리꽂힌다. 가랑비에 옷 젖듯, 만성적인 피로가 몸을 무기력하게 에워쌌다. 정신의 귀퉁이부터 서서히 갉아먹는다. 차분하게 긴장을 돋구며 몸을 움직이지만 점차 물 먹은 솜이 되어갈 뿐. 서서히 무거워지는 몸, 그제서야 도을은 걸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 순찰을 돌아보았자 소용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한갓 넘은 저녁이다. 눈에 닿는 곳마다 빼곡히 들이찬 안개, 몇 발자국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미지근한 물냄새가 났다. 흙탕물. 물웅덩이가 점점이 튀어 번진다. 그 요란스러운 소란에 말소리가 녹아들었다. 모든 것이 비에 씻겨 금방 사라진다. 각자가 쥔 색색의 우산으로 위치를 어렴풋이 구분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방은 무슨, 사후 조치도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하늘을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하루종일 내리는 비다. 이변 없는 회백색. 

젖힌 고개에 닿는 빗줄기가 우악스럽다. 물줄기가 턱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어느새 신발은 물에 젖은 넝마였다. 물이 스며든지 오래라 걸음걸이마다 찰박이며 발을 간지럽힌다. 누가 보면 히어로가 아닌 줄 알겠네. 온통 검은 것이 우산도 없이 빗속을 활보한다. 치안을 유지하려면 돌아다니지 않는 게 아무렴 낫지 않을까. 보이는 벤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신고 있던 워커를 벗자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돌아다녔으니까.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지만, 대략 두 시간은 넘었지 싶다. 이대로 실내에 들어가도 큰 폐가 되겠구나, 무심코 짐작한다. 돌아가자마자 씻고 옷을 돌려야지. 제습기부터 틀어야겠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 정도의 시간은 허용해 주지 않을까. 이런 저런 상념과 함께 벤치에 팔을 걸치고 주위에 귀를 기울이며 등을 기대었다. 눈을 감자 피부를 때리는 빗줄기조차 퍽 아늑한 것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았다. 어디 피가 튀지도 않고, 대신 공격을 받아치며 버텨야 하는 일도 없다. 상대의 이능이 무엇인지 긴장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으며, 나중에 덧날 상처가 늘어나지도 않는다. 아무리 즐기려고 노력해보았자 중첩되는 싸움은 지치기 마련이었다. 찰나의 휴식처럼 느껴졌다. 비가 좀 내리긴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면 그만, 이런 쉬운 임무에 차출되니 저야 좋다. 나중에 걸릴 감기라던가, 그건 추후 생각할 일이었다. 임무가 언제 스스로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내려오던가. 충실하게 현재를 사는 유형의 사람으로서 미래로 업보를 미루니 적어도 당장은 아주 좋았다. 그렇게 널부러져 있기를 한참이었다.

먁, 희미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귀 아픈 빗소리도 아니고,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아니며 대지를 밟는 인위적인 구두소리도 아니다. 그다지 신경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도 아니고, 하물며 미물이고 동물이다. 그냥 넘어가도 괜찮을 일이었을 텐데. 구차하게 몸을 일으킨 것은 그 끊어질 듯 희미한 소리가, 오랫동안 지른 듯 쉬어있던 탓일지도 모른다. 썩 오래 앉아있던 동안 처음 들었다는 것이 거슬렸을지도 모르겠다. 젖은 천들이 뚜렷한 물자국을 남겼으나 비에 금세 씻겨 사라졌다. 어디쯤이었더라. 기억에 의존해서 걸음을 옮겼다. 빗소리가 울리니 거슬렸다. 평소보다 거리를 재기가 어렵다. 비 속에서 푹 젖은 검은 것이 휘적이며 풀숲을 뒤졌다. 퍽 괴이한 꼴이었다. 

풀숲을 뒤지는 손가락이 물기어린 날카로운 잎의 단면에 베여 피를 맺었다. 정작 손가락의 주인은 눈썹을 들어올리며 찾는 데 열중할 뿐이다. 이 어디쯤인데. 아예 모른 척 했으면 모를까, 몸을 일으켰는데 찾지 못한다면 그것도 제법 면목이 없다. 바닥까지 긁어내서 존재하지도 않을 자존심이 비척 고개를 들어올렸다. 거듭하는 탐색에 짜증스레 미간이 구겨졌다. 그 얄팍한 인내심이 가닥 가닥 끊어져도 굽힌 허리를 들어올릴 생각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기였다. 반드시 찾고 만다는. 

"그놈의 얼굴 한 번 보기 개비싸네.."

악다문 잇새 너머 신경질적인 말을 내뱉는다. 진짜로 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혹시. 풀숲을 뒤지는 손짓이 점점 거칠어진다. 시도때도 없이 빗줄기가 등을 때렸다. 혼잣말에 헛손짓에 아주 누가 보면 비웃기 좋겠다. 누구 하나 듣지 않고 빗속으로 사라질 소리를 내뱉으며 귀를 기울였다. 제가 풀숲을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선명하다. 순간 비 사이 저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센 장막에 휩싸여 고립된 아득한 기분. 잠시 손이 멈춘다.

그러나 그 사이로 미세하게 섞인, 공기 빠지는 소리. 조금 더 왼쪽. 풀잎 그림자에 가리워 비를 피했나. 잠시 얼굴에 뿌듯함이 밀려올랐다가 썰물처럼 남김없이 가셨다. 남은 것은 미묘한 시선. 이게 뭐라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검은색 덩어리를 잡아올렸다. 온몸에 흙알갱이가 튀김옷처럼 묻어있다. 푹 젖어 달라붙은 털도 원래는 보송했겠지. 누가 봐도 부모와 떨어진 지 한참인 모양새다. 겨우 눈을 뜨고 색색 숨을 내쉬며 품을 파고드는 어린 것. 푹 젖은 미역같아, 무심코 도을은 생각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하지?

한바탕 자존심의 파편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대책 없이 중구난방이었다. 제대로 된 집도 없고, 돈도 없다. 이런 것을 주운 것은 또 처음인데다, 가진 것은 업보 많은 직장 뿐이니 애초에 키울 생각도 않았다. 천으로 감싼 채 안으니 품이 미지근했다. 평소 신경쓰지도 않던 차가운 손이 괜히 신경쓰인다. 비를 피할 작은 그늘 아래서 도을은 멀대처럼 벽에 기대어 쪼그렸다. 방법이 없어, 미역 덩어리야. 일단 동물 병원에 무작정 데리고 갈까. 전당포에 탄이라도.. 생각을 확장하던 순간, 귀에 꽂아둔 호출기가 치직거렸다. 돌아오라는 지시. 제 손에 담긴 어린 것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정말 이거 어떡하지?

. . .

"...손에 들린 거는 또 뭐냐?"

"...고양이?"

제 앞에 선 얼굴이 생각 외로 웃겼다. 단정한 얼굴이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물들었다. 제 손 안에 든 것과 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기색이 선연하다. 어울리지는 않겠지. 꼬우면 징계 먹이던가. 조용히 천 너머 빼뚤게 입을 올렸다. 눈은 그대로라지만 가린 하관이 움직이니 미묘하게 표정이 일변한다. 그 기색을 눈치채고도 상대는 아무 말 꺼내지 않았다. 

급하게 대타로 세우고 순찰하라고 밖에 보내두었더니 이상한 새끼 고양이 하나를 들고 왔다. 우리가 공무원이지, 여기가 동물 보호소냐. 한가하게 동물 구조할 시간이 있느냐. 그런 류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손을 꼼지락대며 몇 번이고 어린 것을 고쳐 안았다. 시선이 허공을 더듬는다. 어쩌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한 눈에 보였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숨길 생각 없는 저 표정, 대놓고 다리를 뻗대고 있다.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날이 갈수록 얼굴의 낯만 두꺼워진다. 상사는 제 머리를 짚으며 어느 순간 나타난 두통을 감내했다. 제 밑으로 범죄자가 온다고 했을 때부터 거절했어야 하는 건데. 

"아무튼 일 생겼으니 그대로 갔다 오면 되겠네. 그 고양이는 놓고."

상사가 손을 뻗었다. 주변 인원이 수건과, 이것 저것을 챙겨오는 것이 보인다. 한참을 상대의 손을 응시했던가. 손가락이 머뭇대며 한층 느리게, 검은 것을 내려두었다. 작은 울음이 손 사이로 새어나온다. 제 손을 떠나는 온기가 애석한 것은 착각일지도 몰랐다. 0.75배속으로 재생이라도 한 듯 손이 떨어졌다. 안 가? 상사의 눈빛이 제 얼굴 한쪽을 콕콕 찔렀다. 이제 정말로 나가야 했다, 강제로 쫓겨나기 전에. 말없이 입가의 천을 고쳐쓰며 손길을 받는 어린 것을 응시했다. 부산스럽던 주변이 말없이 고요해진다. 여럿 감정 어린 시선이 도을에게로 꽂혔다. 눈을 몇 번 깜박,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미동 하나 없었다. 그러나 등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 흙 묻은 물자국이 자욱하게 번졌다. 피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일지 몰라도 걸음이 유독 무거워서. 정말 끝나면 잠이라도 자야겠다. 애써 머리를 털어냈다. 할 일이 많아.

도을이 그 어린 것을 마주한 것은 몇 달이 지나서였다. 한동안 바깥에서 살다시피 한 탓이었다. 오랜만에 기어들어온 사무실은 여전히 지옥같은 서류들이 쌓여있었고, 피폐하고 텁텁한 히터의 열기가 감돌았다. 어느새 겨울, 뭔가 생각날 법도 한데. 애매하게 기억 구석을 건드리는 게 있었다. 여전히 피로한 눈을 반쯤 감았다. 나오지 않을 결론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잠깐의 잠이 더 소중하다. 익숙하게 수긍하며 머리를 문지르고서는 벽에 기대었다. 

그렇게 눈을 막 붙이려던 참이었다. 뭔가가 제 발밑에 닿는다. 긴장감에 정신이 말끔하게 가셨다. 정신이 풀렸어. 황급하게 몸을 굳히며 한두걸음을 뒤로 내빼고 살피자, 사람은 아니었고, 동물이었다. 날렵하게 생겨먹은 검은 고양이. 새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제 발에 머리를 부벼오는 것. 목에 달린 리본과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사무실의 터줏대감으로 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팔자 좋다. 누가 데려왔는지 덕분에 사랑 받고 살고 있나 본데. 무심코 목을 몇 번 긁어주었다. 세차게 골골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 하니, 정신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힘이 빠지고 느려지는 손가락, 와중 다시금 호출기가 울린다. 아, 나가야만 한다. 손가락은 쉽게 내어진 만큼 거두는 것 역시 쉬웠다. 잘 있어, 가벼이 토닥였다.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머릿속을 무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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