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틴

vw by Nano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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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모양 구멍에 별모양 장난감 블럭을 집어 넣으려 애쓰는 것만 같은... 그런 날이 있다. 서유석에게는 그게 매일은 아니고 가끔씩 한 번. 어쩌면 꽤 자주.

특히 남의 결혼식에 나가야 하는 날이면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유석은 청담역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 방향은 쭉 웨딩홀이다. 그것을 인식하자 쌍쌍이 차에서 내리는 커플이며 어린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올라가는 부부마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차려입은 정장 재킷 아래에선 땀이 주륵 흘렀다.

'이렇게까지 흔들릴 건 아니야.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지...'

물론 유석도 알고 있지 않나? 그건 전부 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이었을 터. 마주칠 것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웨딩홀 입구에는 화려한 장식과 큰 거울이 있었다. 거울을 보고서 유석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고선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게 신랑 측. 신랑과는 안면이 없다. 눈이 마주쳤지만 애써 피한다. 신부 측 축의금은 남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받고 있었다.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하고선 축의금을 건넸다. 봉투엔 이렇게 적었다.

××대 서유석

아 참, 탐정이 것도 써달라 했지. 봉투 하나를 더 넘기고선 계단을 찾았다. 신부대기실은 한 층 위에 있었다.

"유석아, 왔어? 현수랑 기태도 아까 인사 하고 갔어."

이전에 유석과 함께 청첩장 모임을 했던 지인의 이름들이다. 전부 대학교 학회에서의 친구들이다. 물론 대학생 땐 친하긴 했다. 나이를 먹은 지금은 별로 교류하지 않지만 수영과의 공통 지인인 탓에 같이 묶여서 불렸다.

"수영아, 오늘 완전 예쁘네. 드레스 잘 골랐다."

"이거 입겠다고 내가 다이어트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

장난스레 웃는 수영의 얼굴은 조금 긴장한 것 같아 보여도 무척 즐거워 보였다.

"오늘 탐정이는 일 때문에 못 온다고 전해 달래."

적당히 인사를 하고선 계단을 내려 1층으로 돌아간다. 유탐정이 오지 않은 이유는 빤하다. 유탐정은 결혼식 자체를 자주 가지 않는 편이다. 아마 돌려받지 못할 축의금 내는 것도 아깝겠지.

'아까 분명 동아리 선후배들 이름을 댔었지. 그게 단가? 그럼 대림 선배는 안 왔단 건가?'

식장으로 들어가자 저멀리 아는 얼굴이 보였다. 아까 말했던 기태랑 현수. 그들의 테이블은 이미 자리가 다 차서 앉을 수 없게 됐다.

'하하, 나 빼고 연락해서 맞춰서 왔나보지? 다 알아...'

별 미련 없이 채워지기 시작한 새 테이블에 앉았다. 생수병을 따서 들이키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혹시 자리 있나?"

이대림이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의자를 빼고 있다. 항상 입고 있는 단정한 셔츠 차림 그대로였다. 소매가 약간 걷어져 있었다.

"아 선배, 오랜만에 뵙네요. 자리 없어요."

"그럼 여기 앉을게."

당연히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것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꿈속에서 한동안 매일 얼굴을 본 사이다. 죽어도 죽지않는 꿈속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서유석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절대자인 탐정을 바랬다. 대림은 그것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조금은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이대림은 탐정이 아니었다. 그 일로 유석은 대림에게 실망했다.

제발 아는 척 안 해줬으면. 다행히도 대림은 식이 진행되는 내내 유석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석은 그를 계속 힐끔힐끔 보았다.

이대림은 무슨 기분으로 수영의 결혼식에 참석했을까. 그가 진심으로 축하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결혼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뭔가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게 분명할 것이다. 정상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 결혼을 못 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걸 수도 있지. 예를 들어서 유흥업소를 좋아해서 발붙일 수 없다던가. 식이 진행되는 내내 누군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성스러운 자리에서 유석은 부정적인 생각만 했다. 결혼을 안 하면 하자가 있다고? 그렇게 단정지으면 나의 경우에는 어떤가. 유석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는 정말로 '못' 하고 있는 게 맞긴 했다. 상대의 동의만 구할 수 있다면 이런 행사 따위야 진즉 끝냈을 거다.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고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층 아래로 이동하는데 대림이 말을 걸어왔다.

"유석아, 혼자 왔어?"

"제가 좀 늦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기태랑 현수랑은 멀어졌네요. 탐정이는 오늘 안 왔고요."

"그렇구나. 그럼 식당에서는 나랑 같이 먹어도 되겠지? 우리 할 얘기가 남았잖아."

추리소설을 옮겨둔 것 같은 이상한 꿈에서. 눈밭을 걸으면서 화를 낸 적이 있었다. 탐정이 아니라 범인이었던 이대림에게 유석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얘기요? 전 그런 거 없어요."

대림이 유석에게 할 말이 남았단 말인가? 유석이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거라면 모를까. 그를 계속 의식하며 한 식사는 그리 맛있지 않았다. 접시에 샐러드와 크림새우 정도만 덜어 깨작대자 대림이 그걸로도 시비를 걸었다. "유석아, 속이 안 좋아? 그것만 먹어서 돼?" 사사껀껀 시비네. 내가 토마토만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유석아, 날도 더운데 신도림까지 데려다줄까? 타고 가."

도대체 무슨 얘기가 남았단 건지 대림은 밥을 먹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결국 유석은 호랑이 입에 제발로 걸어들어갔다. 첫째로는 그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에. 둘째로는 이미 대림의 페이스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셋째는 더워서 걷고 싶지 않았으니까.

대림의 차는 조수석이 왼쪽에 있는 외제차였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도시의 교통정체에 합류하며 대림이 물었다.

"<몽중관의 살인>을 쓸 거지?"

웨딩홀을 빠져나가는 차량 행렬은 다소 복잡했고 주말 오후의 청담동 일대는 교통으로 항상 말썽이었다. 유석은 답답해져서 창가를 보는 것을 포기했다.

"네."

"좋은 일이네. 그런데 나한테 상의는 해야 하지 않겠니?"

"제가 왜요?"

"<몽중관의 살인>의 원저작자는 따지자면 내가 아닌가 싶은데?"

"제 꿈에서 일어난 일인데 선배가 저작권을 주장하겠다고요?"

"그리고 유석아, 넌 베란다가 어쩌니 하는 황당한 이야기를 했잖아. 물론 그것도 재미로서는 성립하겠지만, 그걸 진지하게 소설에 쓸 생각은 아니겠지?"

유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설에 제가 그렇게 쓴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대림의 지적은 그리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대림이 도와준다면 분명 제대로 된 본격추리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럼 뭐.... 선배가 도와준다면 감사히 받을게요."

*

나는 다시 추리소설을 쓸 수 있다. 나를 기다려주는 독자에게 보답할 수 있다.

[은유야. 넌 내가 시시하다고 했지만 난 다시 추리소설을 쓸 거야. 유시인 시리즈는 아니지만 클로즈드 서클을 배경으로 하는 특수설정물이야. 완성되는대로 네가 읽어줬으면 좋겠다.] 읽음

*

지하철역 근처의 3층짜리 카페. 아마도 대림의 사무실 근방. 유석은 약속시간 몇시간 전에 도착해 노트북 화면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엔 집에서 키보드를 연결해서 쓰다가 오랜만에 만지는 노트북 키보드가 낯설었다.

대림은 서류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유석이 보낸 원고를 프린트해서 꺼냈다.

<몽중관의 살인> 시놉시스와 프롤로그.

"나름대로 읽고 코멘트를 해봤어."

유석에게 건넨 종이에는 딱 봐도 지적 사항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 분명 흰 종이에 검은 글씨 인쇄물인데 첨삭한 파란 펜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맞춤법도 잡았잖아. 미친 거 아니야? 이 성격이면 부하 직원들 다 도망가겠다.'

첫인상은 거부감이었지만 읽어내려갈수록 느낄 수 있었다. 이대림의 추리소설에 대한 관점과 집념을. 분명히 그건 유석보다 한 수 위다.

'그러고보니 대림 선배는 정통파였지.'

파우스트계로 입문해 '정통'과는 항상 거리가 멀었던 유석과는 달리 대림은 항상 고전 소설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 대림이 지도하는 대로라면 소설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는.

"<몽중관의 살인>은 젊은 감각의 추리소설로 가야하는 거 아니에요? 근본 자체가 특수설정인데."

"나도 너무 고전적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야. 걱정하지 마."

대림은 유석의 반론에도 침착하고 성실하게 답변해주었다. 그렇다고 자기 고집을 꺾는 건 아니었지만.

"이래서야 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형이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할 거면."

그런 말을 직접 들을 줄은 몰랐는지, 대림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석이가 쓰면 유석이의 소설이지."

"나중에 수익 관계가 복잡해질까봐 그렇죠."

"하하, 재미있는 얘기를 다 하네. 그럴 리가 없지. 유석이의 소설이라니까."

"나중가서 다른 말 하기 없기에요."

유석은 오늘의 원고를 책상에서 탁탁 쳐서 갈무리했다.

"그렇다니까.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혹시 저녁 먹지 않을래? 나 회사에서 잠깐 일을 봐야하는 게 있어서 그거만 끝나면 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

"저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오늘도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다음에 먹어요."

유석은 일부러 멋쩍게 웃어 보였다. 물론 약속 같은 건 없었지만.

*

숙제 검사 놀이가 익숙해질 때쯤 유석은 첨삭에 따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엇보다 유석은 간섭당하는 일 자체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상당히 과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 PT를 받는 것과 비슷하게... 누군가 나서서 페이스를 이끌어주고 잘못된 습관은 지적까지 해주고 있다.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곧잘 쓰는걸. 더이상 내 도움이 필요 없겠는데? 하하."

그야 내가 형이 쓸데없이 꼬투리 잡는 것도 전부 맞춰서 쓰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속으로 말대꾸는 하지만 처음의 거부감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오늘의 소설 첨삭을 마치고 식사는 양식으로 했다. 유석이 제안한 지중해식...무슨 식당이다. 약간 아는 척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후무스가 뭐냐면 병아리콩으로 만든 건데요. 대림은 처음 보는 요리인 듯 하다.

분명 돌아가기로 했는데 괜히 자리를 뜨기가 아쉬웠다. 알면 알수록 대림 형은 내가 처음 생각한 것만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솔직하진 못하지만 매너가 있고 친절하다. 식사를 마치고 냅킨을 찢고 있었는데 대림이 제안했다.

"우리집 근처에 내가 좋아하는 가게가 있는데 가지 않을래? 피곤하면 돌아가도 되고."

*

세련된 맛은 전혀 없는 가게였다. 중년 여성이 사장인 가게. 유행이 10년은 더 지난 인테리어.

대림은 형제자매는 없다고 했다. 부모님은 두분다 아직 계시고. 유석이 너는 어때? 전 좀 얘기가 복잡한데요... 유석은 자기 가족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물어보면 적당히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계시고, 형제자매는 없다고 답하곤 했다.

"전 나이차이 많이 나는 형이 있는데요."

유석은 술맛이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형이랑 저는 아빠만 같아요. 형 쪽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고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

형은 ××년생요. 유석에게는 열다섯살이나 차이나는 형. 대림과는 열살 차이가 좀 덜 될까. 표정을 보아하니 머릿속으로 산수는 이미 끝난 듯했다.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 같은 그런 계산된 얼굴.

"형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기만 아는 인간이에요."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면 친하기 어려울 것 같네."

"전 형이랑 같이 산 기억이 없으니까요. 제가 기억에 남았을땐 이미 집을 나가서 살았고요. 돌아와서는 친하지도 않은 동생인 저를 갈구기나 했죠."

"왜 그러셨을까..."

"저도 평범하게 싸울 수 있는 형이었으면 했어요. 밥도 사주고 한대 맞기도 하고."

"대신에 선배가 있잖아, 유석아."

"형이요?"

대림의 표정은 변함없이 평온해 보인다.

"전 대림 형이랑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요."

대림은 피식 웃었다. 그가 웃기에 유석 역시 따라웃었다.

"전 말 잘 듣는 동생이 될 거라서요."

이후에 화제는 다시 소설로 넘어갔다. 대림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하며 첫 챕터를 마무리한 유석을 칭찬했다. 유석이 생각하기에도 기본적인 스토리라인과 트릭의 세부사항은 거의 맞췄다. 이제는 계획해둔 단서를 뿌릴 타이밍을 정할 때다. 원래의 유석이라면 우선 흐름에 맡겨서 쓴 후 단서를 주는 타이밍을 가필하여 수정했다. 대림은 애초에 스토리라인에 포함하여 지정을 해놓고 써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쓰는 재미가 없는데요. 모든 내용을 전부 떠올린 채로 받아적기만 할 거라면."

"소설의 쓰는 재미라는 게 뭔지 생각해봐. 망상하는 재미라면 쓰기 전에도 할 수 있으니 결국 같고. 쓰는 과정 자체에 어떤 재미가 있었니?"

"달려나가는 재미요.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뛴다면 지쳤을 때 몸을 쉬게 할 곳도 사라지고 말지. 그런 방법으로는 건강하게 오래 지속할 수 없어."

"헤매는 것도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대림은 이 말에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유석아, 난 네가 최대한 안전하길 바래."

"형이 제 엄마도 아니잖아요."

"가족이 아니어도 진심으로 걱정할 수 있어."

고작 소설을 가지고. 하지만 명분이 확실한 말이었고... 유석이 오랫동안 들어본 적 없는 걱정이기도 했다. 유석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여 수용했다.

*

[요즘 재미있는 일 있냐?]

[ㅋㅋㅋ뭐가]

유석의 오래된 친구 유탐정. 대학시절 같은과 동기에서 출발해 십칠년정도 이어진 인연이다. 대학생 때는 연락하고 매일 얼굴 보고 술먹고 하던 관계가 훨씬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연히 정리가 되었다. 그 중에 남은 한 사람이다.

[별말이 없길래. 서영 결혼식 이후로]

오랫동안 유석을 봐온 탐정의 지적은 정확하다. 원래 같았으면 서유석은 서영의 결혼식에서 느낀 바를 측히 부정적인 얘기를 유탐정에게 조금 투덜거렸을 것이다. 탐정은 별다른 리액션을 해주진 않지만 듣기는 잘 들어준다.

[별일없어~ 일하느라 바빠서]

[뭐 하는데?]

[새 소설을 쓰려고.]

전화가 걸려왔다. 유탐정이다. 시간을 보아하니 아직 출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여보세요. 탐정아."

"별 일 없지?"

그렇게 두번이나 물어봐주는 상냥한 점을 무척 좋아한다. 유석은 수화기 너머로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짓고선 답했다.

"왜, 사고 칠까봐? 사고 치는 쪽은 내가 아니고 항상 너잖아."

"뭘. 하아... 또 어디가서 열살 어린 여자친구 사귀었다고 할까봐 무서워서 그랬다."

"그걸 사고라고 할 수 있나? 암튼 그런 거 아냐."

"걔는? 그 대학원생."

"걔랑은 요즘 좀..."

"알았다 만간에 함 보자."

자기 용건만 말하고 끊는 것이 유탐정다웠다.

연락이 안 와서 내 상태를

멋대로 짐작하고 있었다니. 그런가... 한동안 연락 안 하긴 했지. 바빴기 때문에. <몽중관의 살인> 을 쓰고 대림 형이랑 숙제 검사 놀이를 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유탐정이 짐작해낸 내 상태는 '뭔가 재미있어보이는 것에 열중할 때' 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어쩌면 정확할지도 모른다. 카톡으로 시작해서 카톡으로 끝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자면.

벗어날 생각이 없다.

생각보다 깊게 발을 담궜다.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고민해볼 필요도 없는 일인데...

유석은 늦은 아침을 차렸다. 물론 오늘의 밥사진을 찍어서 전송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여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아침저녁으로 날은 서늘하며, 낮에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마저도 가을의 변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9월의 어느날.

유석은 여전히 <몽중관의 살인> 의 1챕터를 쓰고 있었다. 진도가 영 미진한 이유는 단 하나 이대림의 변덕 때문이다. 분명 자신이 컨펌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반대쪽으로 향하자고 나침반을 들고 있기 때문에.

유석은 불만 없이 따르고 있었다. 유석은 이미 이 숙제 검사 놀이에 푹 빠져있었다. 대림은 상당히 까다로운 교습자였으며 동시에 피드백이 확실했다. 빈말로라도 칭찬하진 않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야만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그 과정 자체가 유석에게는 즐거웠던 것이다.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당하는 행위가. 당근과 채찍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기수의 솜씨가.

아마도 대림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유석은 멋대로 상상했다.

메신저 대화를 주고받다가 어느새 대림이 자기 점심 사진을 찍어서 보내는 일이 당연해진 시점에, 대림은 자기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유석을 불렀다.

"오늘 와도 되는데."

"형도 준비 해야하지 않아요? 하하."

"그러니까 오늘 와도 된단 거지, 유석아."

일거수일투족 계획을 세워 놓고 행동할 것 같은 대림이 하는 말이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유석은 그것을 떠올리고선 조금 찌릿한 긴장감을 느낀다.

"...알겠어요. 여기서 형 퇴근하는 거 기다릴게요."

이제는 배치가 너무도 익숙한 카페에서 나와 주차장에서 대림의 외제차에 올라타기까지 유석은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처음 탄 날부터 느끼는 거지만 대림의 차는 지나치게 깔끔하다. 아마도 취식 금지 룰이 적용되어 있을 것이다. 시트는 이미 몸에 맞게 조정되어 있다. 지난번 탔을때 이후로 변동이 없는 것 같았다.

유석은 먼지가 별로 없는 바닥에서 머리카락이며 과자 부스러기를 찾아내려고 한참 보고 있었다.

"우리집은 처음이지?"

"아, 네... 그래도 그 앞엔 몇번 갔잖아요."

"유석이 집도 궁금하네. 사진으로만 봤으니까."

"하하... 좁아서 볼 게 없어요."

"깔끔하게 해놓고 살던걸? 나 요즘은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설마 집에 몇백만원짜리 조명도 있는 건 아니겠지.

"형이 그런 말 하니까 좀 머쓱하네요... 저 그 사진 찍으려고 엄청 치웠어요."

"나한테 잘보이려고?"

"아, 네... 형 깔끔한 거 좋아하시니까. 다음에 저희 집도 기회가 된다면..."

퇴근시간을 약간 비껴난 덕인지 차가 걱정한 만큼 막히지는 않았다.

"밥은 내가 준비해놨어. 유석이가 좋아해줄지 모르겠네."

"형이 하셨다고요?"

"응. 저번에 파스타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잘은 못하지만 준비는 해봤어."

"요리 잘 하세요?"

"그래도 내 밥 내가 차려먹을 정도는 되지."

"전 전혀 못해서... 보통 재료를 조합해서 먹어요."

"하하, 사진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 항상 점심으론 샐러드에 무슨 치즈 같은 거나 먹고. 그런 것만 먹으면 너무 부실하지 않니?"

신호가 걸린 탓인지 대림의 시선이 느껴졌다.

"전 밖에 잘 돌아다니질 않으니까... 그리고 보통 저녁은 사먹으니까 점심이라도 가볍게 먹으려고요."

다행히도 대림의 아파트는 평범하게 지어진 지 십년 정도 되어 보였다. 설마 으리으리한 주상복합에 사는 건 아니겠지 하고 이상한 걱정을 했던 것에 비하면 다행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석이 대체로 계산 가능한 내의 가구와 소품들이 있었다. 인테리어는 잘 모른다는 대림의 말은 그리 틀리진 않았다.

'생각보단 소탈하게 하고 사네.'

차는 꽤 과시적인 bmw, 전형적으로 젊은 스타트업 사장님의 차고. 시계는 모르는 브랜드여서 검색해보니 무척이나 고가였고. 그런 겉모습 치고는 무난하단 거다. 남의 눈이 닿지 않을 곳은 그정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곳에 초대받았다. 문득 그런 자각이.

"다른 사람 집에 가는 건 오랜만이라 뭔가 쑥스럽네요."

"그렇지? 아무래도 집을 보여준단 건 각오가 필요한 일이니까."

거실 한켠에는 잠들어 있는 로봇청소기가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티비라도 보고 있을래? 금방 할 테니까."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음, 유석이는 손님인걸? 손님답게 편하게 있어."

"네."

대림이 만든 알리오올리오는 조금 매웠지만 맛있었다. 양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한 대림이 그나마 생각해낸 게 마늘이 잔뜩 들어간 알리오올리오라는 걸 생각하니 왠지 재밌었다. 유석은 파스타를 한입 먹고선 웃음을 지었다.

"뭐야? 그렇게 맛있어?"

"아뇨, 아, 맛있어요."

"다행이다. 입맛에 맞을지 몰라서 고민했거든."

"절 위해서 밥까지 해주시는데 뭐든 맛있게 먹어야죠."

"실은 나도 누군가를 손님으로 부르는 게 오랜만이야."

차에 탔을 때와 비슷한 긴장감.

"이렇게 잘 해놓고 사시는데 아깝네요."

유석은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고 샐러드를 먹었다.

"그 기념으로, 짠."

샴페인 내지는 화이트 와인으로 보이는 액체.

"짠."

화이트 와인은 입에 대자 예상보다 도수가 셌다.

기분이 유쾌해진 건 분명 취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형, 요즘 바쁘네요."

"일이 계속 있네."

추위가 옷 안으로 스며드는 12월의 초입 기철은 집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평소 패션과는 대조적인 칙칙한 착장. 몸이 가벼울수록 좋지만 날씨가 추운 탓에 외투를 여러장 껴입었다.

"아~ 겨울엔 일 안 하고 싶은데. 왜 이런 때에 있담."

"여름보단 낫지 않아요?"

기철의 일이란 흥신소의 일이다. 그가 20년 넘게 알고 지낸 남자 서유용에게 일감을 받아 조사할 것을 눈으로 보고 발로 뛰고 하는 종류의 잡무들.

탐정은 외출하는 기철을 현관까지 배웅한다. 그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준다.

"언제 와요?"

"내일."

"추운데 조심하고."

이렇게 무심한듯 던지는 말이 그의 애정표현이라는 걸 알기에 기철은 기분이 좋아졌다. 신발을 신다 말고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가락으로 제 볼을 콕 찍고선 물었다.

"탐정아. 뭐 빼먹지 않았어?"

"에휴. 얼른 가요."

말은 그렇게 해도 탐정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었다. 기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유탐정의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몇시간 남았다. 학원 강사인 탐정은 남들보다 출퇴근 시간이 늦다. 소파에 주저앉으니 약간 심심했다. 휴대폰으로 남들 카톡 프로필 사진 변화나 보고 있었는데 특이한 게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프로필 뮤직.

[ Now Playing ... 🎶거울의 숲 - 1901 ]

유탐정의 세대라기엔 약 10년 정도 앞서는 유행가였다. 탐정이 이걸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어렸을 적 중학생에 불과하던 우정이 형이 듣던 노래기 때문이다. 중학생이었던 우정의 취향도 성숙한 편이긴 했다. 어쨌든 이 나이까지만 해도 탐정은 형이 하는 건 모두 멋있어보였기 때문에... 곡 자체는 기억하지 못해도 가수 이름과 곡명은 알고 있다. 그 후에 유우정은 일본 노래에 흥미가 생겨서 탐정이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버렸다. 그러니 이 곡이 동경의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서유석이 좋아하기엔 다소 올드한 노래다. 평소 '힙'을 추구하는 유석의 성격에 옛날 가요를 굳이 프로필 뮤직으로 할 이유도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탐정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아마도 '요즘' 핫한 밴드의 발라드가 걸려 있던 자린데.

[노래 뭐야?] 읽음

빠르게 읽음 표시가 뜬 이후로 답장은 한참동안 오지 않았다. 보다못한 유탐정이 다시 물음표를 찍고 나서 십 분 후에야 답변이 돌아왔다.

[요즘 꽂힌 노래.]

[우리 세대 아니지 않냐?]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역주행 중ㅎㅎ]

탐정은 굳이 답장할 필요를 못 느껴 메신저 어플을 껐다.

*

학원에 나가서 강의를 하는 동안 탐정은 약간의 위화감 같은 건 잊고 있었다. 오늘 수업에서는 가계도 문제 복습을 했다. 이 단원에서는 매번 비슷한 농담을 하는데 재수생인 학생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스스로 하면서도 재치 있는 농담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반응이 있기에 할 수 있을 뿐. 항상 농담에 대한 반응이 있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그는 원래 농담을 자주 하는 성격이 아니다. 말을 해야하는 직업 특성 상 얻게 된 스킬일 뿐. 그래 이건 너무 유치하고 억지스러운 농담이다. 물론 진지한 유탐정이 억지 농담을 하기에 웃긴 거리라.

선생이란 건 항상 학생들만 보기에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 한다. 강사도 비슷할 지도 모른다. 아닌데? 내 친구도 수준 똑같던데. 친구 누구? 유석이. 친구가 유석이밖에 없냐. 맞는 말이라 반박 불가.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는 길. 스스로 인격을 나눠서 만담을 하고 있는데 복도에서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광섬유의 코어에 단색광 에이를 입사각 세타로 입사시킨 모습이다."

분필로 칠판을 탁탁 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물리의 정 선생님이다. 굴절이니 반사니 하는 단어가 귀에 맴돌았다.

거울인가... 휴대폰을 꺼내들고 유튜브에 들어간다.

[🔎 거울의 숲]

[🔎 1901]

노래는 듣지 않고 댓글창만 살핀다.

[진짜 지금들어도 세련된 노래.]

[03년생인데 이상하게 이 노래가 끌린다 이게 누군가의 청춘의 한페이지였을까]

[대학시절 넘 돌아가고싶다]

[입시 시절 질리도록 들은.~~~]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모여서 부르던 노래 혼자 다시 들으니까 외롭다]

대부분 나이 깨나 먹은 것 같은 댓글 뿐이다. 역주행이니 MZ니 하는 건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역시 이상하네.

교무실에 도착하니 화학의 임은도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강사들 중에서는 신세대인 편이다. 유탐정과 나이는 비슷했는데 분위기는 확 달랐다. 겉모습도 염색머리가 특이한 편이고 학생들이랑 어울리는 걸 보면 정신연령이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은도를 붙잡고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임 쌤. 요즘 릴스에서 나오는 노래 이거 알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이거 우리때 노래 아니에요?"

임 쌤도 모른다고 한다면... 결정났다. 유행은 아니다. 분명 서유석은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어째서? 옛날 노래를 좋아해서 카톡에 올려둘 수도 있지. 요즘 아이돌 보다야 훨씬 자연스럽지 않나? 서유석 이 자식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자기도 모르게 혀를 쯧 찼다. 은도가 놀란 눈으로 본다. "생각할 게 있었습니다. 조용히 할게요." 탐정은 조금 미안해졌다. 우선은 다음 수업 준비를 하자.

*

이대림의 집에서 살고 있다.

대림 형이 아침에 출근할 때 눈을 떠선,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해주고 보통 다시 잠든다. 아홉 시쯤 느즈막히 일어나서 아점을 대충 먹고 집을 청소한다. 빨래도 좀 돌리고 형이 먹고 나간 설거지도 하고. 오후엔 카페로 나간다. 매일매일 주문하는 메뉴가 달라진다. 가끔은 카페에서 늦게 점심을 먹기도 하고. 형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글을 쓴다. 자주 오는 탓에 이 시간대에 일하는 직원들 스케줄도 꿰게 됐다. 대림이 퇴근할 시간이 되면 이 건물로 찾아온다. 주차장에서 합류해서 같이 귀가.

"형,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유석이도."

그러고서 대림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매일 거의 같은 인사다. 완전히 귀속된 생활이다... 유석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유석은 항상 어딘가 비어 불안하게 굴러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유석에게는 형태를 잡아주고 지지해주고 견인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저를 개라고 생각하시면 어때요?

손에 쥐어진 사람 목줄에 당황할 법도 한데 대림은 별로 어색해하는 기색도 없이 적응했다. 완전 처음 접하는 것 같은데 이정도라면 정말 재능인데... 보통 개처럼 취급해달라고 하면 어색해하거나 성희롱을 당한 것처럼 불쾌해하는 반응이 많은데.

대림은 "그럼, '손'부터 해봐." 라고... 개를 키운 적이 있었던 걸까.

어린 시절의 기억. 예쁘게 리본까지 맨 강아지를 한참 바라보고 있자 어머니가 말을 건넸다. '유석아, 강아지 귀엽지? 우리도 키울까?' 틀렸다... 개를 좋아해서 보는 게 아니라 개가 부러워서 보고 있었던 것 뿐이다.

유석이 좋아하는 사람도 유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거기까지는 손을 뻗지 못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취향일 것이다. 털어놓는 것조차 걱정되는. 그것을 대림이 선뜻 잡아주었다. 대림은 전형적으로 '내 사람 챙기는' 부류였다. 재수없고 얄미워 보이기만 했는데,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니 얼마나 잘 해주는지.

한편으로는 아직 이정도로 모자라단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개가 사라지면 주인과 개 중에 누가 더 슬퍼할까. 결국 전단지를 붙이고 죽도록 돌아다니는 건 주인 아닌가. 그 정도의 유대는 되어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프로필 뮤직이 뭐냐니, 걔도 참 이상하게 촉이 좋단 말이지...'

당연히 유석이라면 그런 노래는 올려두지 않는다. 그 노래는 대림의 취향이다. 아저씨다운 취향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는 머릿속에 발라드를 새겼다.

유탐정은 번뜩임을 놓치지 않는 재능이 훌륭하다. 유석이 탐정으로서 평가했던 이유가 있다. 그러나 대림과의 관계는 그가 굳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유석과 마찬가지로 대림을 '재수 없다'고 평가했고... 그런 유석의 심경 변화의 과정을 설명해야하는 일이 무척 피곤했다. 아마 이해받을 수 없을 거다. 그건 유탐정이 남자를 좋아한단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 나는 유탐정을 잘 알고 있으니까.

*

"탐정아.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아."

이틀간의 조사를 마치고 들어온 기철은 뭐가 그리 고민인지 하루를 더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답지 않게 차분하고 말이 없는 모습. 탐정의 경험 상 기철이 그런 상태일 때에는 내버려두는 것이 좋았다. 먼저 텐션을 회복할 때까지 말이지.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고민까지 씻어내린 듯 기철이 대뜸 한 말이 이거다.

"뭐가요?"

"나 신도림에서 사람을 좀 찾고 있었거든. 근데 거기 유석이가 있었어."

"유석이가요?"

미묘한 위화감이 다시 떠올랐다. 유석이 딱히 발 닿을 일 없는 장소. 유석이 집적대는 그 대학원이 그근처던가? 아니다, 그 친구는 신림이었다. 애매하게 먼 거리다. 그 대학원생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면 아닌. 하지만 이전의 위화감이 있었기에 유탐정의 마음은 의심으로 기울어버리는 것이었다.

"응. 혼자 노트북 켜고 글 쓰고 있더라."

김기철이 본 서유석의 모습은 이러했다. 항상 볼 수 있는 뽀송한 모습으로 역 근처 큰 카페에 앉아서 헤드폰 끼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더랜다.

"걔도 형 알아본 거 아니에요?"

"왜 이래, 나 나름 전문가야. 그럴리가 없지."

기철은 지난주 수요일 그 카페에 두 번 방문했다. 오후 12시와 오후 4시에. 그 두 번 전부 유석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딱 그 시간동안만 있었다고 해도 꽤 길다. 집 근처도 아닌 카페에서 왜 그렇게 오래 앉아있었을까?

"작업실이라거나?"

"집에서 너무 멀잖아요."

"아님 만날 사람이 있었겠지."

"그런가. 형 앞으론 거기 안 가요?"

왜, 한번 더 봐달라 하려고? 감정 섞어 이런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가끔 보면 날 부려먹는다니까.

"일단 마무리가 된 거라... 괜히 거기 얼쩡거릴 생각은 없긴 하지."

"알았어요. 형 고생했네요."

유탐정은 기철의 젖은 머리카락을 쳐다보다가 침대에 벌렁 눕는다.

"그래서 말도 없었던 거예요?"

"뭐 그거랑 일 때문에도 조금..."

"형 조용하니까 좋던데."

"무슨 말이야! 난 시끄러운게 매력이야."

"조용히 있으니까 섹시하던데요."

"응? 오늘 무슨 날이야? 서비스 장난 아니네."

유탐정은 피식 웃었다. 됐고 감기 걸리니까 머리나 말려요. 춥다. 그는 이불속으로 꿈틀꿈틀 들어가 버렸다.

*

며칠후 유탐정은 하나의 가설을 들고 왔다. 서유석이 신도림의 카페에 앉아 있던 이유를. 그리고 기철에게 가설을 말하며 은근히 채근했다. 형이 좀 알아보라는 투로.

서유석은 신도림 근처에 직장이 있는 어떤 인물과 사귀고 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유석과 탐정의 생물학과 선배다.

“유석이가 남자도 좋아했어? 아, 그랬었지…”

김기철이 서유석의 뒷조사를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번에 확인한 바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유석이 취향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탐정이 보여준 사진의 남자는, 대략 40대 초반. 상당한 고가품의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기철이 알기로 유석은 꽤 일관적인 외모의 상대만 만났다. 부스스한 흑발 숏컷에 안경을 쓰고 공부 잘 하게 생긴 사람들만 골라서… 왠지 없는 자리에서 험담하는 것 같아 약간 미안하네.

“당연하죠. 성격도 완전 재수 없어요.”

“…그럼 아닌 거 아냐?"

유탐정이 말하는 바는 이러했다. 서유석의 프로필 뮤직에 있는 노래… 그걸 곱씹으며 몇번 들어봤더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그 선배의 노래방 애창곡이었다고.

별로 설득력 있는 근거는 아니었다. “‘1901’ 이라면 나도 좋아하는데.” 하지만 유탐정이 저렇게까지 확신에 차 있는 걸 보니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그의 직감은 기철도 어느정도 인정하는 바다. 아마도 기철에게 말하지 않는, 혹은 언어화되지 않은 증거가 더 있을 거다.

‘그리고… 이걸 단칼에 쳐내면 탐정이가 엄청 서운해할 거란 말이지.’

“카페에서 만날 거 같은데 살짝만 봐 주면 안 돼요?”

‘나 참, 말이 쉽지. 그럼 직접 하지 그래.’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걸 뒤로 하고 기철은 일단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서유석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은 없는데. 예전에 길에서 미행은 해 봤지만 카페 좌석에 앉아 있는 건 또 다르다. 서유석은 심지어 앉아서 글을 쓴다고 했는데… 분명 집중력을 잃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할 거다. 들키지 않기엔 너무 잘 아는 사이다.

이럴때 부탁할 사람의 얼굴이 바로 떠오르는 나는 참 약았다.

[바빠? 오랜만에 밥이나 먹을까?]

*

“웬일이야. 당신이 연락을 다 하고.”

양재역 어딘가의 횟집. 기철은 회사원들이 많은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나왔다. 운동복 브랜드의 캐주얼한 외투. 약속 상대인 김민석도 마찬가지였다.

회정식의 첫번째로 계란찜과 샐러드가 나오는 즈음에 그들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일부러 머쓱하게 말을 끌었다.

“뭔데?”

“미행.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어서 말이야.”

“아는 사람을 미행한다고?”

놀리기는.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하루만 붙어서 봐 줘. 그것도 하루 종일 카페에 있을 거야. 거기 가서 집에 갈 때까지만 감시하면 돼.”

“하루 종일 카페에 있다고? 백수야?”

“작가… 긴 한데, 거기서 글을 쓰는진 몰라. 노트북 들고 있었으니까 쓰는 거겠지?”

민석이 무척 미심쩍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기철은 인스타그램을 켜서 유석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굴과 체격이 잘 보이는 사진 여러장.

“귀엽게 생겼지?”

“뭐, 곱상하네.”

“얘가 만나는 상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군지… 제대로 된 상태인지, 봐줬으면 해.”

“카페에서 만난단 거지? 뭐야, 누군지 짐작가는 사람은 있나보네?”

기철은 고민하다가 다시 스마트폰 화면을 건네주었다. 뉴스 기사. 의료 스타트업의 성공 사례. 꽤 오래 전 기사. 무척 큰 의료 장비 앞에서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신뢰가 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을 보자 민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사람이야. …왜 그래?”

민석이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다른 조사를 하다가 얼굴을 봤다고.

“근데 이 사람이 왜? 곱상한 남자애 만나서 뭔 일 있었어?”

기철은 대답을 피했다.

“그게 말이야, 이 아저씨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거든… 사귀는 상대마다 괴롭힌단 소문이 있어.”

민석은 기철이 정보를 아끼는 게 약간 탐탁찮은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해 볼게.”

*

탐정아, 화 내지 말고 들어. 진짜 그 선배라는 분이랑 사귀는 거 같더라. 근데 전혀 문제 없어 보인다던데? 좋아 죽는 것 같다던데? 응? 아아, 아는 사람한테 반나절만 부탁했어. 그럴 리가 없다고? 글쎄… 그러니까 의심 그만 해. 뭐 어떤 사람이길래 그래. 아, 잠만! 화 내지 말고 들어달라니까. 응. 어, 같이 사는 것 같더라. 안 된다고? 그 둘이 좋다는데 뭘… 아 알겠어!

*

카페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깔리기 시작한 어느날 유석은 가로수길에 위치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탐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내일 점심에 시간 되냐면서 불러내기에 유석은 아침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더랬다. 묘하게 불길하네. 탐정이가 별 용건 없이 이렇게 날 애타게 부를리가.

푸퍼 패딩을 벗고 있는 유탐정을 보자마자 유석이 이렇게 말했다.

"나 요즘 차 사고 싶다."

"사."

유석은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차 사도 서울에선 못 끌고 다니지 않나?"

탐정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그러는 유탐정은 가로수길까지 기철의 차를 얻어타고 왔으면서.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돈 없어."

"뭐 마실 거냐?"

"따뜻한 아메리카노."

유탐정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는 한 입에 반절 정도 마시고 나선 단도직입적으로 유석을 향해 물었다.

"니 나한테 뭐 숨기는거 있지?"

"하하..."

"재밌는 일 뭐 있는데?"

도대체 어디서 뭘 주워듣고 온 걸까. 유석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짚이는 바가 없다. 인스타에 사진 올린 것도 아닌데?

"우리 탐정이가 뭘 기대하고 왔을까."

"기대하긴 뭘 해. 또 사고칠까봐 그러지!"

유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진정해, 탐정아. 막상 들으면 별 것도 아닌 이야긴데 뭘. 나 새로 만나는 사람 있어."

"그래 보이더라."

서유석은 끝끝내 상대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럴 수록 열받아서 캐내려 드는 유탐정의 태도를 보고 유석은 확신했다. 어디서 소문이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상대가 대림 선배라는 건 제대로 알고 있다고. 탐정이도 참 성격 많이 죽었어. 예전 같았으면 멱살이라도 붙잡고 말했을텐데.

집으로 돌아가며 탐정은 흔한 인삿말은 하지 않았다. '또 보자.' 라거나, '감기 조심해' 같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유탐정이다. 대신 유석은 자기 외투를 여몄다. 목티에 후드에 코트까지 꽁꽁 싸매서.

갈 길이 멀다.

유석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머금고 있다. 놀이공원에 인접한 백화점은 벼르고 벼르던 듯 외관부터 내장까지 전부 빨간 색채로 장식한 채다. 백화점 입장에서는 일년 중 최대 대목을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유탐정은 건물 인테리어를 위해 둘러진 빨간색 리본을 보고 있었다. 패딩 비슷하게 빵빵한 볼륨감이 느껴지는 모양새였다.

“저거 웃기게 생겼죠, 형.”

기철은 패딩과 같은 디자인이 최근의 유행이라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유탐정이 입고 있던 패딩 옷을 팡팡 소리가 나게 쳤을 뿐이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기철은 여행을 떠난다. 섬나라 일본을 한바퀴 감는 크루즈 여행. 서유용이 티켓이 생겼다며 기철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탐정은 그 말을 듣고 서유용이라는 남자는 친구가 김기철밖에 없는 거라고 짐작했다.

오늘의 쇼핑은 그 여행에 입고 갈 점퍼를 사겠단 목적이었다. 비교적 한적한 평일 낮의 남성복 코너를 거닐면서 유탐정은 옷이 아니라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형제가 성격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해...'

어차피 기철은 알아서 잘 고르는 스타일이다. 탐정이 어떻다 평가를 해줘도 결국엔 자기가 마음이 드는 걸 사곤 했다. 그래서 탐정은 적극적으로 딴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서유석을 생각하고 있었다.

유석은 연말 모임에 대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지 않고 있었다. 항상 이맘때면 스키장에서 찍은 사진이나 호텔 로비의 거대한 곰돌이 인형에 안기는 사진이나 와인잔을 들고 짠메랑을 올리곤 했던 유석이다. 사진을 올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 이대림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인스타그램 같은 경망스러운 행위를 좋아할 리가 없다.

서유석의 최근 이상행동은 이대림에 의해 조종당하기 때문이라는 가설.

근심에 빠져 있는데 변함없이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해? 어때? 이거 이쁘지."

"이쁘네요."

"보고 말해, 보고!"

기철은 그렇게 말해도 별로 기분이 상해보이진 않았다. 그는 알아서 옷을 골랐다.

"가스라이팅..."

탐정은 생각만 하던 걸 입으로 꺼내고 말았다.

어, 뭐라고 했어? 두발자국 멀리 계산대에서 지갑을 꺼내던 기철이 그를 바라본다.

"가스라이팅이라고요."

"나 참."

계산을 마치고 나오던 기철은 한참이나 탐정의 동태를 살피듯 가만히 서 있었다. 탐정은 몇초동안 미동 없이 있던 걸 간파당한 셈이다.

"탐정아. 넌 뭐 살 거 없어? 추운데 그 파카랑 코트만 갖고 되겠어?"

"파카도 세 개쯤 되는데요."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띠링, 하고 슬롯이 적중하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났다. 탐정이 이 녀석, 계속 서유석 걱정을… 이런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지. 기철은 한숨을 쉬었다. 유탐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밥이나 먹자.“

(여기서부터하편)

(너무쓰기힘들다 일단대충하고 언젠가고칠게요)

논의는 기철이 정말로 원하지 않던 결과까지 도달했다. 그건 유탐정이 직접 그 선배라는 남자에게 태클을 걸겠단 거다.

그때 목폴라를 입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상처가 있는 것 같아보여서. 턱에도 뭔가 쓸린 듯한 자국이 보여서. 서유석도 그 재수없는 선배를 욕했기 때문에. 서유석 그 자식이 소설 선생님을 구할 리가 없기 때문에.

그게 그렇게 걱정되면 유석이랑 직접 말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해도 유탐정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손 놓을 수밖에 없다. 기철은 유탐정이 도대체 누구랑 사귀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치한 질투였다.

“답장 왔어?”

“알았다네요.”

유탐정은 가산에 위치한 대림의 회사 근처까지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기철은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유탐정이 뭐라고 사고를 칠지 모른다. 대화를 듣는 것 자체가 두렵지만 그나마 내가 옆 테이블에서 감시라도 하는 게 낫다. 아냐, 별 일 없을 수도 있지.

무척이나 시끄러운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유탐정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왜 뵙자고 했는지 아시죠?”

아 젠장.

대조적으로 선배라는 남자, 이대림은 여유롭다. 기철이 봤던 사진은 7년 전의 것이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머리가 샜고 나이가 들어 보였다. 여전히 명품 안경테를 걸치고 있다.

“탐정이는 참 변함이 없네.”

대림은 음료조차 시키지 않았다. 그리 오랜 시간 할애하지 않겠단 태도가 보였다.

“선배가 유석이 괴롭히는 거잖아요.”

“괴롭히다니? 너도 알 거 아냐. 연애 관계일 뿐인데.”

“애가 얼굴에 상처가 있던데요.”

대림은 코웃음을 쳤다. “글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없던데. 혹시 상처가 언제 있었단 거니?”

“턱이랑 목에 있던데요.”

잠깐의 정적. 미소. “아아… 목걸이를 하고 싶어하더라고. 같이 가게에 가서 이것저것 시착해보다가, 그만.”

탐정은 제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 만큼이나 열받은 것 같았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무슨 30돈짜리 금목걸이를 찼어요? 제대로 된 대답을 해보세요.”

침묵.

“제대로 된 대답을 해보시라고요. 못 하잖아요.”

탐정아, 너무 흥분했잖아… 상대에겐 흠집도 안 나고 있다.

“탐정이 넌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 같구나.”

“유석이한테 그만 참견하세요, 선배. 무슨 수를 써서 구워삶은 거예요?”

“글쎄. 유석이는 지금도 나한테 참견 받고 싶어할텐데… 왜 그래? 탐정이 네가 그러고 싶었어?”

“뭐? 걔 그렇게 남의 말 듣는 놈 아니에요.”

대림은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그는 큭큭거리다가, 머리카락을 약간 매만지다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유석이 걔도 참 솔직하지 못했네. 아니면 탐정이 네가 그정도 친구는 아니었던가.”

기철은 유탐정이 소리를 지르진 않을지 조마조마해졌다. 다행히 탐정은 그를 이글이글 노려볼 뿐이었다. 매서운 삼백안으로.

대림은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의자에 걸어둔 겉옷을 매만졌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유석이한테 하고 싶은 말이 아니고?”

“유석이한테서 손 떼세요.”

“손을 떼? 하하… 하아…,”

느릿하게 이어지는 웃음. 느물느물한 미소. 손을 떼라? 지금 말이지… 이거 궁금하네. 하하. 많이 궁금해.

“… 알아들었어요?”

대림은 웃다가 웃다가 자기 얼굴을 손으로 한번 비볐다.

“네 말대로 해줄게, 탐정아. 잘 지켜봐야한다.”

예상외의 대답에 유탐정이 놀라 있기도 잠시, 대림은 겉옷을 들고선 자리를 떠나버렸다.

자리에는 아직 식지 않은 커피의 열기와, 얼굴이 벌개진 유탐정이 남았다.

*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수요일. 거리는 겨울 날씨에 맞지 않는 기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유석은 오늘은 글을 쓰지 않았다. 반나절은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고 나머지 시간엔 집을 청소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뭘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설거지를 하고 먼지를 털고 주방을 닦았다.

저녁은 유석이 끓인 밀키트 밀푀유나베. 부쩍 추워진 날씨에 어울리는 따뜻한 메뉴였다. 여느때와 같이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유석은 백화점에 화려하게 장식된 루돌프의 썰매 얘기를 했다. 반짝거리는 모형 썰매를 보던 대림이 맞장구라도 치듯 자연스레 다른 말을 꺼냈다.

“유석아, 우리가 이제 만난 지가 반년 정도 됐잖아.”

대학 동창 서영의 결혼식에서 이대림을 마주쳤던 어느 여름날. 그때 이후로 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여행이라도 가잔 뜻인가. 꽤 두근거리는 시작이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을 오랫동안 해 봤는데… 유석이랑 나는 안 맞는 것 같아.”

네?

일렁임과 소란. 적어도 저녁 식사 중에 꺼낼 말은 아닐텐데.

"형, 무슨 말 하시는 거예요... 하하."

처음에 유석은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짖궃은 장난을 치길 좋아하는 사람 아닌가. 하지만 고개를 들어 마주한 그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하고, 쓸쓸하고, 애상을 담은 눈을 하고 있어서.

"나도 이런 말 하기까지 정말 고민을..."

그 이후로는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기를 바랬다.

"이해해줬으면 해, 유석아."

이해라니? 도대체 무슨 이해를 해야한단 말인가. 유석은 한치의 미동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제가 싫다고요?"

"싫단 게 아니야. 너랑 함께하는 시간에 즐거운 점도 분명 있었어... 지금 이상으로 계속하기엔 어려울 것 같단 거지."

"싫다고요."

이제는 질문이 아니고 혼잣말이 되어 맴돌았다. 이대림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전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쉬운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래."

꼴에 배려하는 척 하기는.

대림은 어느샌가 식탁에서 일어나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꽤 시무룩해보이는 얼굴. 유석은 문득 제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자신만의 방으로. 이대림의 집에는 그런 공간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침대가 있는 큰 방으로 들어가 이불 속으로 파묻혔을 뿐이다.

삼십 분 후에 대림이 방문을 열었다. 그는 이불을 챙기고 있었다.

"...어디 가요?"

"혼자 생각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난 거실에서 자도 괜찮으니까."

왜 이렇게 배려하는 척을 하지?

"제가 싫다고요, 형?"

반복되는 질문에 대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유감이라는 듯 유석을 동정의 눈길로 볼 뿐이었다.

"제가 왜 싫은데요? 제가 뭘 잘못했어요?"

침묵.

"혹시 요즘 소설 안 쓰고 불성실하게 행동해서 그래요? 저도 연말 분위기니까 놀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걸로 제가 싫어졌어요?"

"유석아,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 어제 반찬투정해서 그래요? 말 잘 듣는다고 해놓고 하나하나 사사건건 애같이 시비 걸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담담하다 못해 배려하는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 유석이 마음의 위안을 곧잘 얻곤 했던 그 목소리도 이젠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저 집에 갈래요. 형이랑 더 못 있겠어요."

"지금은 시간이 늦었어. 내일 마저 얘기하자."

"못 있는다고요. 제가 짜증나서 한시도 같이 하고 싶지 않을 거 아니에요. 집까지 태워다주세요."

"유석아, 그렇게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나가라고 했잖아!"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날것의 비명. 유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선 대림의 창고로 향했다. 어디선가 대형 마트에서 줬을 법한 무척이나 큰 가방에 자신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옷가지가 대부분이었다. 스웨터 몇 벌과 겨울 바지. 외투 두 종류, 목도리, 장갑. 노트북과 부속품. 가만히 있으면 터져버릴 것 같이 오들오들 떨며 눈에 보이는 걸 챙겼다. 대림은 그저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대림은 평소 짐이 많은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뜻에 따라 유석이 옷장에 넣어둔 옷가지도 그리 많지 않다. 짐 싸는 건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났다. 유석이 몇달간 지내왔던 장소인데 자리를 비우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대림은 왜 동요하지 않는지. 어쩌면 이 집에서 누군가 들어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여러번 있었던 건 아닌가.

유석은 마지막으로 대림의 차에 올라 망원까지 향했다. 가산에서 망원까지 평일 밤 십오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끝인.

대림은 그저 말이 없었다. 유석이 짐을 싸는 대로 차키를 들고 나와 묵묵히 운전했을 뿐이다.

유석은 짐가방 두 개 정도에 들어가는 자신의 몇달치 생활을 들고... 환기한 지 오래되어 꿉꿉하고 보일러가 돌지 않아 싸늘한 온기가 없는 먼지 냄새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형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아니면 따귀라도 때리고 머리카락이라도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돌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림은 한마디 변명도 미안하단 말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어가 있나... 혼자가 된 유석은 작은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다른 사람의 생활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데에 적막을 느끼며.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길 바라며.

*

동거인이 사라진 집은 적막했다. 늦은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캡슐 커피를 뽑으며 유탐정은 카카오톡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이 메신저는 프로필이 변동된 친구를 모아서 보여준다.

거기에 서유석이 있었다.

프로필 사진도 배경에 있었던 뮤직도 멘트도 모든 것이 초기화된 채로.

커피 머신의 라이트가 점등하며 완성을 알렸다. 우선 전화를 걸었다.

착신음 5초 후.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하아... 유탐정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그 나이 먹고 하는 행동이 대학생도 아니고.

[야]
[뭐하냐?] 읽음

이대림의 흔적을 지운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내가 충고한대로 이루어졌단 말인가. 도대체 왜...? 분명 홧김에 그만하라느니 충동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보는 눈꺼풀이 불길함에 파르르 떨렸다.

[뭐하냐고] 읽음

회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건다. 연결이 되지 않아... 세수도 안한 채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차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서유석의 집은 망원시장 골목 어딘가에 있다. 거주자 주차 구역은 늘 만실이며 차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빌라다.

골목 주차 자리를 헤매이며 유탐정은 옛날 생각을 잠깐 했다. 서울에 올라온 지 20년이 됐어도 그는 이런 거주 형태에 아직 익숙치가 않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모여 살아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겨우겨우 차를 세우고 걸어오는 데에 추가로 십오분이 걸렸다.

겉면이 싸구려 돌 타일로 마감된, 10년 전에 우후죽순 생긴 모양의 빌라.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을 오르고 304호 앞에서 우선 벨을 눌렀다. 대답은 없다. 하는 수 없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유석의 집 비밀번호는 대학생 자취 시절부터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 뿐이다.

현관문을 열고 중문을 하나 지나 바로 보이는 침대 위에 유석이 있었다.

“야. 뭐하냐? 뭐하냐고.”

유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탐정은 성큼성큼 다가가 이불을 젖히고 유석을 끌어냈다.

“끈질기네, 탐정아…”

그게 서유석의 첫 마디였다. 유석은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않고 유탐정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꼭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는 듯이. 항상 깔끔한 모습을 고수하던 유석이 이정도까지 폐인이 됐을 줄은.

“니 뭐하냐고.”

“보다시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유석은 웃고 있지 않았다.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손님 맞을 기분이 아닌데…”

탐정은 유석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두었다. 유석은 원 상태로 복원되려는 듯 꾸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헤어진 건가?

짐작이야 물론 간다만 차마 입밖으로는 꺼낼 수 없는. 그러니 말보단 행동이 나을 듯 했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으며 계란 한 알도 없었다. 찬장에 누룽지라도 있나 했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파스타 소스 뿐이었다. 배고픈데.

유석이 실연당한 거라면 대학생 때부터 몇번이고 봤다. 유석은 옆에 기댈 사람이 있으면 더 난리를 피우곤 했다. 그래서 유탐정은 이번에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대림이 자신의 한 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게 더 충격이다. 내심 그는 서유석을 버릴 생각이 원래도 있었던 걸까. 그걸 그냥 내 핑계를 대고 딱 끊었다 이건가.

뒷쪽으로 흘깃 시선을 옮기자, 그가 찬장을 뒤지는 모습을 유석이 보고 있었다.

“먹을 거 없냐?”

대답이 없다.

“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침묵.

“뭐 됐다. 배고픈데 밥이나 먹자고.”

탐정은 짜증을 내는 대신 유석의 옷장을 열어 겉옷을 꺼냈다. 그는 서유석의 저항을 무시하고서는 그를 억지로 겉옷 안으로 꾸겨 넣었다. 부축할 각오로 체중을 전부 받자 유석은 의외로 자기 발로 서려는 노력을 했다. 유석이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려고?”

"우리 집. 밥먹으러.“

“…형은 어쩌고.”

“형 없어. 여행 갔어.”

유석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유탐정이 바짝 붙어서 미는 대로 걸었다. 탐정은 더이상 억지로 말을 꺼낼 필요가 없어 좋다고 생각했다. 잠실의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유석은 얌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반포대교를 건널 때 쯤에 울어버리고 말았다. 탐정은 위로하는 이런 상황에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못들은 척 무시하고 있었더니 유석은 알아서 울음을 그쳤다. 콧물 먹는 소리가 나기에 그는 휴지를 건네주었다. 돌아오는 길은 이게 다였다.

“나 좀이따 출근할 거야.”

유석은 집을 옮기고 나서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듯 보였다. 유탐정이 끓인 누룽지는 곧잘 먹는 것 같더니만 다시 누워서 고치처럼 되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엄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리광을 받아 주니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게 분명하다.

“너 대림 선배랑 헤어진 거 맞지?”

이불을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스한 앞머리 아래로 겨우 보이는 유석의 눈동자.

“한 마디도 하지 마.” 명백하게 화를 내고 있다.

“육개월도 안 됐잖아.”

“하지 말라고.”

“이래놓고 돌아갈 거 아니냐? 질린다.”

“니가 뭔데…”

“나이가 몇인데 이런 유치한 짓 좀 그만 해라, 유석아.”

“…”

“도대체 무슨 일이야? 20년 동안 비호감이었던 인간 아냐?”

“…제발 조용히 좀 해!” 난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 짜증 섞인 중얼거림. “니가 이유를 알면 뭐하게?”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그런다.”

“니가 날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뭐? 아침부터 달려온 사람한테 그게 할 말이야?”

“미안한 건 아니까 제발 닥치라고….”

이불에 얼굴을 묻은 유석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난 처음부터 그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마 했어. 왜 그런 인간이랑.”

유석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

“하, 무슨 사업? 스타트업? 말만 번지르르 하고. 사무실은 다 낡아빠진 건물에 있던데. 사기꾼 아냐?”

탐정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유석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거란 그 단정에. 지금까지 유석이 하는 행동의 전부를 지켜봐온 게 바로 난데.

“좋은 기회 아냐? 제발 정신 차리고 살아. 내가 정말 꼴보기 싫어서 대림 선배한테도 한마디 했어.”

“뭐?”

방금까지의 느릿한 행동에 맞지 않는 재빠른 리액션. 그제서야 유탐정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아… 음.”

“뭘 한마디 해?”

그러나 유탐정은 얼버무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정신 차리라고, 장난 치지 말라고 했어.”

"…회사로 찾아가서?“

“응.”

유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벽을 짚고 섰다.

“탐정아, 날 생각해 줘서… 정말 눈물나게 고맙다. 응? 아무리 그래도 너 나한테 너무 지나치게 친한척 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 니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엄마라도 되고 싶었어?”

유석은 문장 중간중간 기침을 했다. 갈라진 목소리로도 빈정대는 톤 만큼은 선명하게 전달된다.

“정신 차리라고 하는 게 그렇게 잘못이냐? 그 인간 성격 개차반인거 너랑 내가 몰라? 대학생 때부터 소문이 파다했던 거 알잖아. 사귀던 여자 친구들은 몇달 못 가 항상 버리고. 그 선배들이 하나 같이 이대림 쓰레기라고 하더라.”

“진짜 웃긴다, 너…”

“친구로서 한마디 했어. 너같은 애가 도대체 어쩌다 거기 끌려 들어갔는진 모르겠지만… 아닌 건 아니지.”

유석은 무어라 반박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침을 하기 시작한 통에 벽을 짚고 허리를 굽힐 수 있을 뿐이었다. 유탐정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 보았다. 지금 나가야 수업에 늦지 않을텐데.

“아무튼 내가 살려준 줄 알아.”

탐정은 안방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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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과 탐정의 대화 도중. 유탐정이 입조사를 떨어서 대림과 헤어졌단걸 알게된다
->
다음날 유탐정 집에서 탈주
->
대판싸우고 결국 수긍한것같은유석

-> 시간은 흘러 김기철이 돌아올 때가 됐다...  유석은 어쩔수없지 살아야지 라고 말한다

-> 그래서그냥 보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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