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교차로 4. 북쪽으로 가는 길목(로샤)
시간: 3년 전
이날 아침, 호텔에서 눈을 뜬 로샤는 오늘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올해로 25세가 된 그는 프레스톤 그룹의 산하 지사에서 인턴 업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가능한 한 빠르게 성장해 조금이라도 이르게 회사를 물려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로샤는 그 바램에 맞춰 쉬지 않고 일했다. 48시간 잠을 자지 않거나, 하루에 두 번씩 비행기를 타고 먼 도시로 이동하는 등.
그렇게 어제도 계약을 하나 끝냈고, 아버지는 드디어 로샤에게 귀국 티켓을 끊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이번 설 연휴에는 오랜만에 일에서 해방되어 쉴 기회였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비밀리에 자신만을 위한 특별한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완전한 무(無)의 상태가 되기.’
ㅡ즉, 오늘 하루의 모든 행동은 럭키 코인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동방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새해를 보냈을 적, 그곳에서 먹은 음식에서 나온 동전이었다. 언젠가 쓰임이 있을 거란 생각에 잘 간직해두었는데, 그것이 오늘에야말로 쓰일 때가 온 것이다.
동전은 그림이 그려진 면과 글자가 적혀있는 면으로 나뉘어있었다. 이제부터 선택의 시작이었다.
팅ㅡ, 탁!
나오는 것이 글자라면 바깥으로, 그림이라면 호캉스를 보내자. 그리고 나오는 것은ㅡㅡ 글자의 면이었다.
로샤는 카드키를 챙겨 들고 그대로 일어서서 호텔 방을 나섰다.
팅ㅡ, 탁!
글자면은 지하철, 그림면은 택시를 타자. ㅡㅡ나온 것은, 글자의 면이었다.
로샤는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팅ㅡ, 탁!
글자면은 한 정거장, 그림면은 종점까지 간다. ㅡㅡ나온 것은, 그림의 면이었다.
적당히 지하철 좌석을 잡아 낮잠을 자고 일어난 로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열차 안은 이미 만석이었다.
역을 나서자 그곳은 낯선 곳이었다. 조금 걷다보니 뜻밖의 시장이 나왔다.
입구에는 홍보 포스터가 여러장 붙어있었다. 로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에 적힌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로샤: …전도유망한 디자이너들의 신년 선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디어 마켓인가…….
이건 재미있을 것 같다.
로샤의 넘치는 호기심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늘어만 갔다.
로렌하이트가에서는 매년 새해가 시작될 때 온 가족이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전통이 있었다.
로샤를 무엇보다 설레게 하는 것은, 바로 선물을 열어보는 순간이었다. 비록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이 단순한 털실 양말일지라도.
그리고 지금, 그는 매우 흥분하고 있었다. 만약 이 휴가가 선물이라면, 그 안에는 도대체 어떤 물건이 들어있을까?
이 시장에 도착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로샤는 금세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는 마켓을 짧게 살펴본 것만으로 훌륭한 상품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멈추고 동전을 던졌다.
팅ㅡ, 탁!
살까, 말까. ㅡㅡ나온 것은, 글자의 면이었다. 좋아, 사자!
살까, 말까. ㅡㅡ글자. 사자!
살까, 말까. ㅡㅡ사…….
로샤는 더이상 동전에게 맡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미 가방이 꽉 찼을 뿐만 아니라 손에도 꽃등이 걸려있는 상태였다.
대신, 그는 동전으로 갈 길을 고르기로 마음 먹었다. 교차로가 나올 때마다 글자면은 왼쪽, 그림면은 오른쪽인 걸로.
그렇게 어느새 어느 길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의 앞에는 고독하게 서있는 회색 텐트가 하나 있었다. 그것도 몹시 수상해보이는.
안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되돌아갈지 ㅡㅡ글자의 면. 좋아, 들어가자.
바깥에서 보기만 해서는 텐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그는 이내 오늘의 초심을 고수하기로 마음 먹었다. 로샤는 입구의 천막을 걷어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텐트의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두운 색감의 천막 안. 곳곳에 매달린 램프에 반사된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텐트의 안쪽에는 반투명한 천이 커튼처럼 걸려있었는데, 그 너머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어른 비쳤다.
로샤: 저… 실례합니다.
그가 말을 걸자, 천 너머의 사람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천 너머의 사람: 흠흠. 운명의 오두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으, 지금 보는 점괘는 돈을 받지 않는데… 혹시 무엇을 점치시겠어요?
점괘는 처음인데.
무언가를 얻으려면 상대에게 주는 것이 있어야한다는 게 로샤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와서 뒤를 돌아 나가기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기에, 로샤는 그냥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로샤: 굳이 따지자면, 일 관련일까요…….
천 너머의 사람: 죄송하지만 지금은 연애운밖에 볼 수가 없어요.
상대의 목소리에서 어쩐지 긴장과 불안감이 느껴졌다.
점술사가 손님보다 불안해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이야기정도는 들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로샤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로샤: …그럼, 그걸로 하죠.
서투른 손놀림이 카드를 섞다말고 후두둑, 떨어트리는 것이 천 너머로 언뜻 비쳤다.
천 너머의 사람: 앗…… 어, 카드가 결정됐네요. 살펴볼게요…….
그 움직임의 실루엣을 지켜보고 있던 로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천 너머의 사람: 알겠네요. 정해진 인연이 지금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천 너머의 사람: 당신과 그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퍼즐 조각인 것처럼 아주 잘 어울려요. 하지만 얼마나 가까워지든, 두 사람 다 자신감이 확고한 사람들이에요.
천 너머의 사람: 둘의 만남이 곧 다가옵니다. 이 카드가 나왔다는 건 분명 곧 만날 거라는 뜻이에요.
천 너머의 사람: 어쩌면,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죠.
점술사의 말을 들은 로샤는 유감스럽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로샤: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연애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로샤: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정도로 바빠서 말이죠.
솔직한 그의 말에 천 너머의 이가 미소를 지었다.
천 너머의 사람: 지금을 놓치면 기회는 몇 년 뒤에나 와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그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로샤: 몇 년이라면…… 한 9년 정도 될까요?
천 너머의 사람: …아마 그정도로 길진, 않겠지만.
그 말에 로샤가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대답했다.
로샤: 그렇다면 그 여성 분께는 죄송하지만,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해야겠군요.
여기까지 말한 로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행복을 짊어질 정도로 성장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눈 앞의 점술사도 그의 고민을 알아챈 것 같았다.
천 너머의 사람: 하지만…… 꼭 모든 것이 준비된 이후에만 누군가와의 관계를 시작해야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천 너머의 사람: 준비하는 와중에 기회가 찾아와서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안되잖아요. 그건 정말 아까운 일이죠.
램프의 불빛이 아롱아롱 흔들리며 천막의 사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무언가가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로샤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며 미소 지었다.
로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천 너머의 사람: …그,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아직 초보라서요. 그러니까 좀 전의 카드 결과는 당신이 납득할 수 있을만한 부분만 믿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 너머의 사람: 마지막으로 이 축복의 카드를 선물로 드릴게요.
천 너머에서 한 장의 카드가 건네졌다. 평소의 로샤라면 아마 이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아니면, 동전에게 물어보거나.
하지만, 로샤는 결국 그 카드를 받아들였다.
카드에는 ‘운명은 오직 자신의 손으로만 만들어진다.’ 라고 적혀있었다.
로샤: 고마워요.
입구의 천막을 걷어 텐트 바깥으로 나오려던 그 때, 로샤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천 너머에 있던 ‘점술사’가 어느새 천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텐트의 안은 어두컴컴하고 단 몇 걸음만 걸어도 상대의 얼굴을 선명히 보기가 어려웠다.
로샤는 손에 걸고있던 꽃등을 들어올려 은은한 불빛으로 눈 앞을 비추었다.
로샤: 과연, 귀여운 아가씨였네.
그가 작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 소녀의 말에 긴장하고 있었던 자신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로샤: 만일 다른 카드를 뽑았다면, 운세 결과도 달라졌을까요?
소화가: 무슨 뜻이죠…….
로샤: 카드를 섞는 움직임이 가끔 텍사스 홀덤이나 한 번씩 플레이하는 나보다도 서툴러보였어서.
정곡을 찔린 소화가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로샤는 웃으며 텐트 바깥으로 떠나갔다.
그가 이 텐트에 온 것은 10분 전 쯤이었다. 스탬프와 축복 카드를 교환하러 왔으나, 급한 용무가 있다는 점술사에게 잠시만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들은 것이었다.
점술사는 손님이 오기 전에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 직후, 로샤가 들어왔다.
로샤를 떠올린 소화가는 억울해졌다. 나도 벌써 16살인데, 어린애 취급을 당하다니.
그렇게 몇 분 뒤, 점술사가 면구한 얼굴로 돌아왔다.
타로 점술사: 늦어서 미안해요. 그 사이 누구 오셨나요?
소화가: 네, 한 명…….
소화가는 대답하면서도 말할 수 없었다. 아마 그 사람에게, 가짜라는 것을 들켰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화가: 저…… 시키는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괜찮을까요?
소녀의 눈동자에 미약한 불안감이 서렸다. 테이블에 어질러진 카드를 확인한 점술사가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타로 점술사: 괜찮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타로 점술사: 그리고, 당신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닐테고.
타로 점술사: 왜냐하면 세상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소화가: 아하하, 점술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나요? 하지만…… 덕분에 안심은 되네요. 그럼 저는 이만 슬슬….
타로 점술사: 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타로 점술사: 그 축복의 카드를 얻을 수 있는 건 용기있는 사람 뿐이니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 카드가,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 들어가있는 것을 점술사는 알 길이 없었다.
미소 짓는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램프 불빛으로 잔잔하게 빛났다.
소화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해질녘, 로샤는 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주위에는 낯선 이들이 끊임없이 부스 앞에 발걸음을 멈추거나, 크고 작은 텐트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꽃등에 비춰진 소녀의 얼굴은 금세 머릿속에서 희미해져갔다. 이윽고 아무리 열심히 떠올려보려 해도,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물감이 물에 번져 흐려지듯.
주머니에 든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얀 구름은 해질녘의 잔광을 받아 선명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구름 너머에 있는 신이 운명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즐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현듯 가슴이 두근거려, 로샤는 손에 쥔 동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만약 이 세상에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가르쳐주었으면 했다. 아까의 예언을 믿어도 될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로맨틱하고 운명적인 만남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글자의 면이 나오면, 있다. 그림의 면이 나오면, 없다. ㅡㅡ
로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것이 오늘의 마지막 동전 던지기였다.
팅ㅡ,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던져진 동전이 한줄기의 은빛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왼손을 펼친 로샤가 본 것, 그것은ㅡㅡ
황혼의 빛 속에서 반짝이는,
글자, 의 면이었다.
5. 엇갈린 궤적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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