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전의 들꽃
5302자
명일방주 테레시아 드림
야전의 들꽃
1098년, 빅토리아의 런디니움.
이제는 그 누구도 이름을 발음할 수 없을 문명의 영광이 결코 불멸할 수 없었던 것처럼 차갑게 반짝이던 은철과 증기 엔진의 화려함 역시 영원할 것이 못 되었다. 높은 첨탑은 빛을 잃었고 고풍스러운 종탑은 침묵했다. 한때 제지공과 제련공들로 북적거렸던 골목은 을씨년스럽게 변했고 찌그러진 깡통과 낡은 신문 조각이 나뒹구는 폐허로 전락했다. 런디니움의 도경을 엄준히 지키던 수성포 역시 눈먼 칼이 되어 스스로의 심장을 찌르는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재매김하였으니 과거의 휘황과 한 때의 번영이 모두 헛되고 헛되었다.
그 모든 폭력과 학살, 무도와 야만 앞에서, 런디니움은 침묵했다.
그것이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카즈델 군사위원회가 런디니움을 점령하고 도시를 봉쇄한 지 사 년이 지났다. 포화 소리, 밤하늘을 가르는 섬광. 불티와 잿더미로 얼룩진 전흔을 짓밟고 진군한 살카즈의 군세가 방벽을 무너트리고, 방어 시스템을 무력화하고, 중앙 의회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킨 후 런디니움의 심장에 검은 창날을 꽂아 넣기까지 고작 삼 개월 남짓이 걸렸다. 가장 먼저 용기 있는 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신념과 의무의 숭고함을 아는 이들이 죽었다. 한 장교는 영악한 판단으로 공의로움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의 목숨을 셈하여 저울에 달아본 다음 방위군 전체의 무장을 해제하고 침략자들에게 통수권을 넘겼다.
그 모든 일이 있고 난 뒤에야 런디니움은 완전한 침묵을 배웠다. 잔혹함과 공포, 불안과 비통의 이름으로, 그렇게 런디니움은 살카즈의 것이 되었다.
잿빛 방벽 위에 서서, 테레시아는 그의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의 것이 될 일 없을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골목과 대로의 사이에서, 텅 빈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부서진 회관 근처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때 미래의 산실이었을 학교가 불타고 있는 자리에 투명한 시선이 머물렀다. 자라날 미래는 필경 아름다웠겠지. 설령 그 끝에 고통과 허무 외에는 준비된 것이 없을지라도.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으나 길지는 않았다.
“제3대대는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반걸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레시아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가벼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잠잠한 수긍. 어떤 감상도 명령도 아닌. 약간의 틈을 두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곧 맨프레드가 스스로 거리를 좁혀왔다. 등 뒤로 두 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전하.”
“과거를.”
맨프레드는 테레시아의 시선을 따라 까마득한 어둠에 휩싸인 잿빛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다만 현재만이 간신히 숨 붙인 채 몸부림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뭍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어둠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맨프레드가 다시 한번 일렀다.
“3대대가 전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동서 방향의 출입문을 지키라고 명령할까요. 예상되는 진입 경로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글쎄, 로라셀이 이끄는 부대 이야기라면 나는 북문으로 보내고 싶은데.”
“북문이라고 하셨습니까?”
뜻밖의 대답에 맨프레드가 눈썹을 올렸다. 북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군사위원회가 보안시스템의 최고등급 권한을 장악한 이래로 런디니움의 출입로는 모두 철저하게 봉쇄되어 삼엄한 감시하에 놓였지만, 모든 도시가 그렇듯이 완벽하게 닫힌 것은 아니었다. 군사위원회의 입장에서도 물자와 병력이 오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경로는 확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문을 열고 닫을지 결정하기 위해 맨프레드 휘하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도시계획과 건축학을 전공했다던 장교 중 하나가 섬세한 계산을 거듭한 끝에 상시 출입로로 둘 동문과 서문을 제외하고 모두 틀어막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기획서를 제출했고, 그의 기획안대로 동문과 서문을 제외한 나머지 출입문들은 엄중히 폐쇄되었다.
테레시아가 언급한 북문 역시 그중 하나로, 특히나 측문의 개수가 많은 북문은 시스템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물리적으로도 단단히 용접되어 차단되었다. 모든 조치가 가해진 북문은 기실 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곳으로는 글룸핀서 한 마리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맨프레드가 테레시아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도 감히 불경이라 이르지는 못할 것이고.
“북문은…….”
“가장 어려운 길이지.”
“그럼에도 그곳으로 오리라고 이르시는 까닭은.”
“나는 박사를 알거든.”
한때 솔기와 귀퉁이를 잇고 여밈과 자락을 헤아렸을 손은 망설임 없이 도시를 향해 뻗어나간다.
“그는 남들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숙고하고, 남들이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무모하지.”
기이한 신뢰였다. 맨프레드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한때 그의 스승이었고, 주군이었으며, 모든 살카즈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불멸할, 한 명의 재봉사를.
이윽고 테레시아가 미소 짓는다. 한없이 영원에 가까운 형태로.
“그는 반드시 올 거야.”
테레시아가 도시를 향해 손을 뻗던 바로 그 순간, 박사도 지도 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오래전 어떤 연인들은 서로를 갈라놓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죽은 듯이 잠드는 약을 먹고 사신의 눈을 속였다고 한다. 호흡이 멈추고 피부가 차갑게 식은 그들의 육신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겠으나 살갗 아래 보이지 않는 혈관에서는 분명히 뜨거운 피가 흘렀을 것이다.
마치 이 도시처럼.
연소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보이는 이 대지의 살갗 아래에도 흐르는 철맥과 증기관이 있었다. 도시는 사람과 달라서 칼날로 심장을 꿰뚫는다고 해도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혈관 하나하나를 일일이 끊어놓지 않는 이상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역사상의 모든 독재자들이 몸소 증명하였듯이 정복과 지배 활동의 대부분은 미세한 살해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아주 지난하고 번거로운 작업인 축에 속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되죽인대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는 망령 같은 이악스러움은 지배를 업으로 삼은 이들이라면 모두 알았다.
카즈델 군사위원회가 런디니움을 장악한 지 4년. 런디니움의 동맥은 아직까지 건재했다. 의수처럼 달린 새로운 심장이 박동을 재촉했기에.
도시의 방벽 너머. 쉘터의 원탁에 모여 앉은 로도스 연합의 전투원들은 탁자 위에 투사된 홀로그램 맵에 시선을 모았다. 군대라고 부를 수도 없고 병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들에게 붙일 만한 이름은 집단이나 세력 정도였을 것이나, 그조차도 구성원의 유동성을 특이사항으로 삼는 로도스 아일랜드에게는 그다지 적합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용으로 쓰이는 지도를 펼쳐두고 있기는 하였으나 분위기는 군사 회의라기보다는 논의장에 더 가까웠는데, 이러한 집단을 통솔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소양은 통상적인 전략가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런디니움으로 진입하기 위한 경로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별다른 진척이 없자, 박사는 가볍게 탁자를 두드려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짚었다.
“이곳으로 돌파하자.”
북문이었다. 그간 제안된 후보군 중에는 전연 없었던 선택지였으므로 좌중에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박사님……. 북문은 완전히 막혔다고 들었어요. 클로저 씨가 아무리 뛰어난 보안 전문가라고 해도 용접된 철문을 뚫지는 못할 거예요.”
아미야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박사는 눈을 들었다.
“테레시아는 내가 이곳으로 올 거라고 믿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주는 편이 좋겠지.”
“그렇다는 건 전면전을 감행하시겠다는 건가요?”
“아니. 전면전이 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박사는 말을 맺지 않고 지도 위에 표시된 어떤 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습할 테니까.”
*
사흘 후, 런디니움 대방벽의 북문.
이른 새벽부터 내린 싸리눈이 조금씩 쌓여갈 무렵 느리게 동이 트기 시작했고, 도시의 윤곽이 희부옇게 드러날 때쯤 쓰이지 않은 지 백 년도 넘은 폐쇄된 지하 수로를 통해 로도스 아일랜드의 전투원 오퍼레이터들이 런디니움으로 진입했다. 군사위원회가 미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감히 그곳을 통해 진입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한 경로였으니 실로 기습이었다.
고요한 통로를 한참 걸어가는 동안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 수 없었던 것에 가까웠다. 오래 쓰이지 않은 통로의 공기 질은 썩 좋지 않았고, 유독 물질의 비율이 높으니 호흡 보조기를 착용하더라도 되도록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는 켈시의 권고를 흘려듣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두에서 걷고 있던 피스트의 발아래에서 첫눈이 밟히는 듯한, 혹은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어둡고 좁은 공동 전체에 유독 큰 소리로 울려 퍼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건…….”
그 모습을 보고, 중위에서 걷던 박사가 입엣말로 중얼거렸다. ‘하설초.’
무익(無益), 혹은 덧없음. 노지에서는 마치 그 꽃잎이 여름에 내린 눈처럼 보인다고 해서 하설(夏雪). 그러나 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버텨 마침내 봄을 맞이하고 마는 강인함을 지닌.
“꽃?”
“아니, 오리지늄이야.”
박사는 무릎을 굽혀 희고 반짝이는 꽃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박사, 나는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어.
언젠가 꽃밭이 카즈델의 절벽과 골짜기, 대지를 뒤덮는 날을 보고 싶어.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날의 화자 모를 어떤 말이 뇌리에 압인처럼 떠올랐다. 누가 한 말인지, 자신이 왜 이 꽃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섬광같이 내리꽂힌 직감에 그는 선두에서 걷고 있던 런디니움 시민 자경단 11소대 대장을 향해 외쳤다.
“피스트, 물러나!”
박사.
나는 침묵하는 도시에서 당신을 보았어.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고, 어떤 것은 기억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여겼는데 실은 그렇지도 않았나 봐. 비록 아이는 소녀가 되었고 황야는 도시가 되었으며 당신은 내가 알던 사람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도 말이야.
먼발치에서 본 당신은 그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구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때로는 도움을 받고, 목숨을 빚지며 살아온 것처럼 보였어. 나는 당신이 내가 남긴 유산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것 같아서 기뻐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겪은 당신이 다시 한번 절망의 회로를 따라 걷지 않을까 염려해. 고통스러운 미래를 사랑하는 법을 지금의 당신이라면 알까. 혹은 그 모든 곡절로부터 배운 바가 전혀 없을까. 양손에 각기 다른 모양의 결정을 쥐고 나는 오래 생각했어.
그러나 박사.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당신에게 저지른 짓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그리고 당신 역시 그렇게 할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어. 이 꽃을 본다면 더 이상 예언가일 수 없고 그저 답을 구하는 구도자일 뿐인 당신은 반드시 나를 만나러 오겠지.
그러니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반드시 무너질 탑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이윽고 런디니움 한복판에서 함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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