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하의 용은 계곡에 잠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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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의 용은 계곡에 잠들고
흙먼지 이는 군영에 사절이 찾아들었다. 모래구름이 두터웠다.
모래바람 지독한 서쪽에서는 야외에 반 시진 가량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품속으로 모래 알갱이가 알알이 스며들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혹독한 모래폭풍이 몰아쳤으니 병영과 여염 가릴 것 없이 옷의 여밈을 단단히 하고 행전과 손목띠를 졸라매는 풍습이 생겨난 것도 자연스러웠다. 제도 사람들은 얇게 덧입은 옷자락이 느슨하게 펄럭이는 모양새를 아름답다고 여긴다지만 서쪽에서는 바람이 불어와도 나부끼는 것이 가장 바깥에 걸쳐 입은 표의 정도였다. 그것은 공가 출신의 지휘관과 이름 없는 소년 병사가 다르지 않았다. 언제 사막을 건너 외적이 달려들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누구나 호각 소리가 들려오는 즉시 말에 올라탈 수 있어야 했다. 모래가 스민 몸으로는 날쌔게 달리기 어려운 법이다. 옷차림은 곧 마음가짐의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니 제도의 사절단이 군영에 채 발을 다 디디기도 전에 병사들의 미움을 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시사철 모래바람이 지독한 서녘에서 목깃이 낮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넓은 소매에 부드러운 견포, 무른 홍옥으로 빚어 만든 장신구를 가리지도 않고 보란 듯이 내보인 사절단은 천 리 밖에서 본대도 제도 사람이었다. 변방의 법칙을 일말 존중할 의지가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으니 일개 병사들 보기에조차 아니꼬왔을 것이다. 그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성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게토는 생각했다.
행렬이 군영 안으로 모두 들어오고 나서도 사위는 더없이 황량했다. 환대의 기미라고는 조금만치도 없는 좌중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행인의 등을 밟고 말에서 내린 사절은 황금으로 박을 입히고 흑요석으로 무늬를 낸 면주 두루마리를 자랑스레 펼쳤다. 모래바람이 한차례 몰아쳤다.
“소하장군 패란총사는 황명을 받들라.”
경멸스러울지언정, 그는 만인지상을 대리했다. 모두가 수그렸다.
사절단이 머물 막사를 예비하고 처소를 안배하는 것은 총사 부관의 일이었다. 게토는 한 차례 지나간 법석을 정돈하고 천천히 군영을 가로질렀다. 부사령관의 모습을 본 병졸들이 허둥지둥 예를 갖췄다. 평소라면 한번 웃어주기라도 했겠지만 아무튼간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사절단을 군영 한구석에 처박아 갈무리해 두었으니 이제는 제 상관의 막사를 들추어야 했다.
성지의 내용은 관습적이었다. 군율의 강기퇴이를 준엄히 질책하고 패란총사의 노고를 위로한다는 틀에 박힌 수사와 함께 내달 말에 부임할 어린 교위들의 인사에 대한 정식 통보가 적혀있었다. 굳이 사절을 보내 이를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본론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되어 먹지 못한 사절이 대담 자리에서 부관마저 물릴 것을 요청하는 바람에 게토는 어쩔 수 없이 지휘부 밖으로 물러나야만 했고, 결코 품성이 곱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관을 곁에서 달랠 기회를 놓쳤으니 그의 속이 조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둘만 남은 막사 안에서 상소리와 고성이 오갔대도 놀랍지 않았을 것 같은데, 대담을 마치고 지휘부 밖으로 걸어나온 사절의 낯이 의외로 평온했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본래 태풍 전의 고요함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게토는 크게 걸어 지휘부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고 목을 가다듬은 다음, 입을 열면 반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총사.”
“들어와.”
이름을 대기도 전에 허락이 떨어졌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그는 놀라지도 않고 장막을 들추었다.
지휘부 막사 안에서, 고죠는 태연하게 검을 다듬고 있었다. 그새 누굴 찌르고 묻었나? 시덥지 않은 생각이 먼저 떠올랐으나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니 막사 안은 단정했다.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크게 한 바퀴를 돌아보던 시선이 도중 어느 한 곳에 가서 멈추었다. 탁자 위에 못 보던 서찰이 한 장 놓여있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사절이 전하고 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
“와서 꿇으라네.”
성의 없는 요약에, 게토는 한숨을 쉬며 서찰을 손끝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고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읽어도 된다는 허락의 표시였다. 게토는 서찰을 펼쳤다. 빠르게 읽어내리는 시선이 가지런했다.
“…….”
내용이 길지 않았으므로 읽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 후에 종이가 얇게 접히는 소리가 났다. 게토는 한숨을 가만히 삼키며 서찰을 내려두었다.
요컨대, 이런 이야기였다.
소하장군이자 패란총사인 고죠 사토루는 태어날 적부터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가 세상에 나온 날 황성의 뒷산에서는 흰 사슴이 발견되었고, 남해의 앞바다에서는 오색 고래가 울부짖었으며, 형주의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붉은 구름이 관측되었다. 사람들은 기린아의 탄생을 기대했다.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인걸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신중하게 일지에 적혔다.
징조는 정확했다. 고죠 사토루의 기량은 어렸을 적부터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위협적으로 두드러졌다. 약관도 전에 최고무과에 급제했고, 어전의 마상시합에서 일위를 쟁취했고, 어삼가의 연례행사인 편사(便射) 또한 제패하였다. 어엿한 장수조차 이뤄내기 힘든 업적을 홍안의 소년이 성취하였으니 온 나라에 위명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준재의 쾌거는 온 나라의 기쁨이라며 즐거워하던 것도 하루 이틀이요, 아이가 자라날수록 황성의 지존은 그를 껄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젠인의 필두가 재상 자리에 오른 것과도 시기적으로 맞물렸으니 일종의 이간질이 아니냐는 뒷소문도 돌았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복잡한 정치와 공작이 맞물린 끝에 고조는 관례를 치르자마자 쫓겨나듯이 서녘 변방의 외진 도호부로 떠나야만 했다. 소하장군 패란총사라는 화려한 직함은 허울뿐일 것이라고. 그를 시새움 하는 자들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리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몇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첫 번째는 고죠 사토루가 고작 서쪽 변방에 처박히는 것 정도로 기가 죽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새파란 약관의 총사가 모래바람 속에서 잔뼈가 굵은 변방 장교들의 기강을 휘어잡을 수 있겠냐는 조롱은 부임 첫날 일소되었다. 그가 해묵은 텃세를 작살내기 위해 무슨 수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센머리가 희끗희끗한 노(老)백부장 마저 창창히 젊은 총사에게 깍듯이 예를 차리는 것을 보아하니 보통 수완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훗날 전출되어 온 신참 교위들 사이에서만 간혹 오르내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하도호부의 중랑장으로 이미 게토 스구루가 부임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남 지역 토호의 사생아인 그는 십 년도 전, 소하의 전황이 지금보다 훨씬 격렬했을 때에 홀연히 군영으로 흘러들어왔다고 한다. 무던한 낯색의 소년은 물려받은 듯한 낡은 칼자루 하나만 쥐고서 패색이 역력한 전황을 차근차근 뒤집었다. 눈앞에 있는 적을 차례대로 베었을 뿐인데도 어느새 우위가 뒤바뀌어 있었다. 소년과 함께 싸우던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물러나는 적의 무리를 황망하게 바라만 보았다. 모래바람이 불어오자 소년은 늘어진 머리칼 아래로 피에 젖은 이마를 느리게 닦아냈다. 사람들은 소년을 귀병(鬼兵)이라고 불렀다.
소년은 윗머리가 죽어서 생긴 공석을 메워가며 점차 높은 곳에 올랐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싸우고, 죽고, 싸우고, 죽기를 반복했으므로 살아남은 이들 사이에는 질긴 유대가 생겨났다. 하여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 즈음, 그는 어느새 유대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를 따돌리던 이들과도 어느새 어엿한 전우의 애를 나누게 되었을 즈음, 그가 왔다.
‘패란의 총사를 뵙습니다.’
‘네가 소문의 귀병인가?’
두 사람의 만남은 짧게도 길게도 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과거의 멸칭을 입에 올리는 총사 앞에서, 청년이 된 소년병은 대답 대신 저무는 듯이 애매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이후에 오간 것은 다양했다. 미묘한 알력 다툼, 모호한 기 싸움, 약간의 장난질, 선동, 비스듬한 눈짓, 그리고…….
은빛 사막, 비스듬한 검광, 삼경의 질주, 어떤 승패.
그 간격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나. 정확한 곡절에 대해서는 오직 두 사람만 알았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무언가가 오갔고, 그것이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다. 주고, 또 받았으므로 교환은 확실하게 성립되었다. 우정의 이름으로. 혹은 그것보다 불분명한 무언가로.
반년이 지나자, 두 사람은 소하쌍준(所夏㕠俊)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곧 그 이름은 아주 유명해져서, 소하 사람들은 물론이요 경계 너머 사막을 사이에 두고 칼끝을 맞대고 있는 위면성의 오랑캐들조차 두려워하게 되었다. 두 명의 검재. 새삼스레 위용의 격을 잴 필요도 없었다. 연전연승의 승보가 달마다 제도로 날아들자 황성의 누군가가 뒤늦게 탄식했다. 물고기를 물에 풀어준 격이요, 범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구나.
그리하여 해를 넘기자 의심 많은 이들이 묻기 시작했다.
날개를 단 범이 어느 성으로 날아들겠는가?
게토는 느리게 서찰을 탁자 위에 내려두고 군사 지도를 집어 들었다. 서찰에는 부관과 수행대를 모두 떼어놓고 고삐 잡을 종자 두어 명만 대동하여 제도로 오라는 명령이 외교적으로 적혀있었다. 그러니 고죠의 요약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와서 꿇어라. 네 충심을 증명하여라.
“거봐, 맞지?”
“개략이 간단한 것은 좋지만 좀 더 공손할 수는 없을까. 명색이 황상 친서인데.”
“말만 공손하면 되는 거야?”
게토는 집어든 지도를 습관적으로 단정하게 말아 끈으로 묶었다. 생각할 의제가 있을 때 곧잘 나오는 버릇이었다. 차근히 가지런해지는 탁자 위를 바라보면서, 고죠가 비스듬하게 턱을 괴었다. 게토는 뻔뻔한 낯의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제 상관치고는 정치적으로 수준 높은 비아냥이었다. 그는 대꾸하는 대신 들고 있던 군지를 말아 정수리를 가볍게 내려쳤다. 아야, 하는 엄살이 들려왔다. 기실 군영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 행동임에도, 그들은 둘만 있을 적에는 곧잘 허물없는 언행을 주고받았다.
“너는 말이라도 공손해야지.”
게토는 죽간 뭉치의 오와 열을 맞추면서 시선을 내렸다. 서찰의 행간에서는 고죠 사토루를 제도에 잡아두고 발목을 묶거나 날개깃을 자르겠다는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상대가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존의 거만이었으니 쓴웃음만 나왔다.
그는 제도의 황상이 고죠 사토루를 지나치게 견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죠 사토루가 천년 만에 한 번씩 나는 영웅지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의 기량이 소문에 뒤떨어진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에게 어떤 사심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도의 고관대작들은 아무래도 패란군의 사병화를 의심하는 듯했으나 게토 스구루도, 패란의 병사들도 그가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고죠 사토루가 충성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런 것에 어떠한 관심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제도에서 견제의 손길이 끼쳐올 때마다, 게토는 제 상관이 차라리 새파란 이력에 전공이나 보탤 셈으로 부임해온 섬섬옥수 도련님이었거나, 혹은 사욕과 야심으로 가득한 정치 군벌이었더라면 나았을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랬었더라면 차라리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것이다. 황상은 헤집을 곳을 잘못 골랐다. 사심이라면 제게 있었다.
게토는 마지막으로 나무말의 앞코를 맞춰두고서 손을 거두었다. 스구루.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파란 눈동자가 호수처럼 밝았다.
“가면 다시 못 오겠지?”
“아마도. 제도의 얼간이들이 작정을 한 모양인데. 어지간히 네가 두려운가 봐.”
“야, 나 조금 서운하려고 그런다. 내가 영영 다시 못 와도 좋아?”
“그럼 늙으신네들이 새 머리 뽑아다 앉히기 전까지는 내가 총사 대리네.”
“감투가 그렇게 탐나?!”
“탐나지, 그럼.”
농담조로 대답하는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벗 따위 두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며 드러눕는 시늉을 하는 고죠를 보면서 게토는 느릿히 탁상에 몸을 기댔다. 시선이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손끝이 장난스레 맞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농담이야. 가지 마.”
“그럼?”
눈이 마주쳤다. 게토는 수도로 끌려간 그가 간교한 수작 등에 모획되어 말 아래로 굴러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지에 대해 계산해보았다. 눈부신 칼솜씨도, 날랜 몸가짐도 진흙탕 같은 암투의 장 속에서는 아주 무용했다. 가문의 뒷배만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오래 비어있었던 재상 자리를 단번에 꿰찬 젠인의 필두는 결코 예사롭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사적인 인편으로 주고받았던 몇 통의 편지를 생각해본다.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목이 잘릴 것이다. 잘리는 것이 반드시 어깨 위에 붙어있는 머리통이 아니더라도. 그렇다면 차라리.
“나랑 같이 가.”
말은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왔다. 고죠가 고개를 들었다. 오월의 하늘보다도 푸른 눈동자가 여지없이 맞부딪혀왔다. 총사는 영민했으므로 짧은 문장 속에 얽힌 함의를 알았을 것이다. 쟁쟁한 시선이 진심을 가늠하는 듯했다. 말을 물릴 기회를 주려는 것도 같았다.
게토는 가끔은 그의 틈 없는 청청함이 두려웠다. 그러나 삼켜내는 것은 언제나 익숙한 일이어서, 나지막이 미소짓고선 낯을 맞대는 것이다. 뱉은 말이다. 주워 담을 수 없다. 기실 다른 방도도 없었다. 오래 준비했지 않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도 알았다. 어쩌면 적기일지도 모른다.
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야. 나랑 같이 가.”
그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총사가 미소지었다.
“좋아.”
*
소하의 패란군이 거병하여 제도로 진군해오고 있다는 소식은 오래지 않아 파다하게 퍼졌다. 제도로 가는 길목의 민초들은 전란을 피해 성안으로 몰려들었고 양강도의 십이성주는 일제히 성문을 닫아걸기로 뜻을 모았다. 성 앞에 몰려든 피난민들의 대열이 끔찍하게도 길었다.
성주들의 무정함을 비난하기에는 이미 이삼곽에 들어찬 머릿수가 차고 넘치게 많았다. 관헌과 그 식솔들이 머무는 일곽만큼은 평안한 채로 사수되었지만, 외성곽의 인구 밀도는 과포화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사람이 머리를 뉠 자리가 없어 외양간, 축사, 헛간, 하물며 지붕 위와 대로변에까지 구저분한 행색으로 주저앉아 있을 정도니 이상 말할 나위가 없었다. 삼곽에조차 들지 못한 난민들은 국경을 넘거나 야산으로 숨어들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었으니 패란군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요, 요원지화였다. 민초지심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있노라는 초야재인들의 탄식이 떠돌았으나, 가장 선두에 선 푸른 눈의 총사는 탄식의 끄트머리조차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비껴든 장창이 날카로웠다.
소하의 거병은 누군가에게는 천만뜻밖의 일이었을 것이나, 중앙의 제도와 서쪽의 소하를 오가던 사절단들 사이에서는 이미 두 뭉치의 칼날이 언제 갈라설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히 거론되던 참이었다. 그러나 춘제를 넘겨 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총사가 전군을 이끌고 패란성을 나선 것은 한겨울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으로, 제도에 소식이 가 닿은 것은 정초 무렵이었으니 결행 자체가 기습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그해의 추위는 예사롭지가 않아서, 소하와 제도 사이에 놓인 여섯 개의 강이 모조리 얼어붙어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하에서 제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양강도의 열두 성문을 모두 지나야만 했으므로 열두 성주가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기만 한다면 패란군이 제도에 도착할 때 즈음 겨울이 다 지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봄이 오면 강이 녹는다. 배수진을 친 형국이 되리라. 게다가 연일 계속되는 폭설과 강풍은 분명 하늘의 도우심이라, 맹추위를 뚫고 오는 반군은 필시 행군 도중 수의 반절을 잃고 사기가 꺾일 것이었다. 반군의 위세가 누그러져 있을 때 제도로부터 출병한 원군이 양강도에 다다르면 충분히 요격하고도 남을 것이니 심려치 마옵소서. 대신들이 안일한 심산으로 삼가 아뢰니, 황제의 심중이 흔흔하였다.
그러나 제도의 대신들은 패란군을 몰랐다. 그들은 고죠 사토루도, 게토 스구루도 알지 못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일진대 군을 통솔하는 총사의 기량에도 보조하는 부관의 자질에도 무지했으니 패전이 당연했다.
낙성에는 평균으로 가늠해도 닷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썩어도 생치요, 물어도 쌍준이었다.
*
짚불 타는 냄새가 아직도 선명한 성곽 위로 오르자 선객이 있었다. 게토는 헛웃음을 흘렸다. 중앙에서 총사 계신 곳을 애타게 찾는 하이바라가 안타까웠다. 그의 용건이 굳이 총사 선에까지 오를 무게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긴요한 일이었다면 한숨부터 쉬었을 것이다. 하이바라는 내버려 두면 나나미가 알아서 잠재울 것이었으니 아무튼간에 그편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지만. 그런 문맥은 건너뛰고, 게토는 짐짓 물었다.
“너 찾던데, 못 들었어?”
“누가?”
“못 들었나 보군.”
고죠는 지대가 높은 부분을 골라 옥개석에 걸터앉아 있었다. 거센 바람에 아래로 추락할 것이 염려되었지만 어련히 알아서 중심을 잡으려는가 싶었으므로 내버려 두었다. 아무리 고죠 사토루라도 천하의 소하쌍준 중 하나가 한순간의 부주의로 실족사했다는 소문은 사양이겠지. 그러므로 게토는 말리는 대신 곁에 가서 섰다. 기대어 선 곳이 불을 괴어둔 곳에서 멀었기에 금세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총사가 왜 여기 있어. 보초라도 설 거야?”
“그럴 리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보려고.”
게토는 고죠의 시선이 가닿는 곳을 나란히 보았다. 까마득한 어둠 속, 황성까지의 남은 길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렇단들 남은 성을 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글쎄. 그가 보는 풍경은 섣불리 짐작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게토는 토를 다는 대신 선선히 남은 길을 읊었다. 그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양강도가 수중에 떨어졌으니 기령, 조온, 원평 정도가 남은 셈이지. 조온의 문칙은 유약하고 아둔한 자이니 무혈입성도 기대해 볼 만 하고, 나머지도 공성에 적합한 관문은 아니니 제도까진 금방일 거야.”
“음.”
“제도에 다다르고 나서는 일전에 논의한 대로 북문부터 공략하게 될 거야. 여기까지 와서는 계산이 바뀔 수도 있으리라 여겼는데 방어 태세에 번복이 없더군.”
“그랬지.”
“황상께선 지키는 장수가 백전용장이라고 덜떨어진 편제로도 버틸 수 있으리라 믿나 본데, 감히 패란총사 앞에서 개인의 기량을 내세우다니 우스운 일이지.”
“뭐야, 놀리는 거야?”
“그럴 리가요, 장군.”
상관의 헛주먹질 쯤이야 가볍게 피하고서, 게토는 말을 이었다.
“입성 후에는 사문(四門)부터 장악해. 그러면 포위될 일은 없을 테고. 좌우와 중앙으로 쪼개져서 각개격파 후 어전에서 만나면 일단락.”
“청산유수네.”
“과찬의 말씀을.”
“그러면.”
게토가 먼 황성 방향으로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이 마주쳤다. 이어질 말을 묻는 듯한 낯에, 고죠는 곧바로 질문을 돌려주지 않았다. 먼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성곽의 모서리마다 괴어둔 숯불을 두어 번 들쑤시고 나서야 고죠는 입을 열었다.
“그다음은?”
“뭐?”
“스구루. 그다음은?”
푸른 눈이 쟁쟁했다.
기이하게도, 그 물음에 곧바로 사절이 소하 군영에 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 때에도 손바닥 뒤집듯 하늘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제도의 눈길을 피해 사막의 그림자로 도망치는 것과 거병을 기획하는 것은 달랐고, 제도의 관백들을 얼간이라고 부르며 비웃는 것과 역심을 품는 것은 또 달랐다. 오늘과 내일이, 지금과 십 년 후가 완전히 달라지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손에 쥔 것이 그만한 무게를 지닌 패라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는데, 그랬는데도 말은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능직물처럼 흘러내렸고. 나랑 같이 가. 진심이야. 고작 두 마디뿐인 제안을,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의 청년은 쾌청하게 웃었다.
그리하여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성을 부수고 길을 태우고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일직선으로 짓밟으면서.
단정한 책략과 정제된 전술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게토 스구루의 병법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가 쌓고 지어서 단단하게 만드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의 행로였다. 대신 높고 거대한 것들을 정교하게 허물었고 공들여 세워진 것들을 시간을 안배해 무너뜨렸다. 그런 다음에 그는 부러진 창대, 무너진 성곽, 거뭇한 핏자국, 폐허와 잿더미 그 모든 것들을 내버려 두고 앞서 걸어갔다. 그것들이 무엇이 되어도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아닌 편이 좋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된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드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번영도 화려도 무력 앞에서는 한순간이라는 사실을 산 사람 모두가 알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그러니 고죠 사토루를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은.
“만인지상이 되어야 해?”
……꿈에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금과 옥과 진주와 산호 모든 귀한 것으로 깎아 만든 보좌와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에 앉도록 예비된 사람처럼 올라앉은 그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네가 원한다면 되어줄 수도 있어.”
그러나 그 곁에 난 제 자리는 좀처럼 그려지지를 않아서 언제나 상상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좌우 도열한 문무백관들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눈앞에 그린 듯이 선명했는데 어째서인지 늘 자신만큼은 그 자리에 없었다. 따라서 그 광경이 정말 자신이 바랐던 것인지에 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었다.
고죠 사토루가 만인지상의 지존이 되어도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발원이었다. 타고난 기량이 지나치게 걸출한 그가 평탄히 살아날 길이 초야에 묻히거나 모두의 머리 위에 서는 것 둘 중 하나뿐이라고 한다면, 기왕이면 높다랗게 난 길을 걷도록 돕고 싶었다. 속에 품은 열망이 그리 단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충성처럼 간명한 열의도 없기에.
그러나 게토 스구루의 길은 그 반대편에 놓여있었다.
그는 생각한다. 까마귀 맴도는 하늘, 시체 무덤, 살이 썩는 사취의 지독함을.
“그런데 네가 바라는 게 정말 그거야?”
물음에 자연스레 시선이 휘었다. 시선이 마주칠 듯하다가 게토의 모면으로 어긋났다. 꼭 속이 꿰뚫린 듯이 선득했다. 그의 시야를 속단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가끔씩 이렇게 틈을 찔릴 때마다 그의 앞에 나신으로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똑바르게 찔러 들어오는 시선이 심장을 꿰뚫었다.
속에 품은 불꽃이 창풍에 휘청였다.
게토는 패배를 인정한다. 수 없는 승전 이력이 한 사람 앞에서 백지로 돌아갔다. 속으로 끌어안은 연옥을 전부 꺼내어 둘 수는 없어도 구천에 피는 꽃을 꺾어다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비스듬한 은유와 해묵은 암시가 제대로 가닿지 않는대도 아무튼간에 꽃은 남을 테고, 훗날 자신이 떠난 후에도 향기는 맴돌아 머물 테니, 그가 높게 난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곁이 빈 까닭을 알고자 한다면 뒤돌아 꽃이 놓였던 자리를 더듬겠지.
그리하여 군사(軍師)는 그의 장군에게 속삭인다.
“……내가 바라는 건,”
바람결에 낱말들이 나부꼈다. 이제는 까마득히 멀어진 서쪽의 은빛 사막에서, 창과 검을 맞대고 말 위에서 나누었던 맹세와 약속이 양강도의 무너진 십이성문을 훌쩍 넘어 내려앉았다. 약속 위에 고백이 덧쓰이고 청운의 꿈 위에 불결로 된 원(怨)이 각인되었다.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는데도 그는 되묻거나 부정하는 일 없이 끈질기게 들었다. 그 대신,
“좋아.”
총사는 웃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
열흘이 넘도록 쉬지 않고 계속된 공세에 뭇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훗날 사관과 병법서에 불침십야라고 기록되는 이 전투는 고죠 사토루가 이끄는 패란군이 황성의 북문을 공략하기 위해 들이닥친 날부터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약 한나절의 틈을 둔 날까지를 헤아려 이른다. 밤낮없이 불과 철을 쏟아부어 기어코 성문의 틈을 벌린 이 전투는, 후세의 전술가들에 의해 가장 몰상식한 공성법이라는 영예로운 지칭 또한 획득한다.
북문이 뚫리고도 황성은 제법 버텼다. 길목을 틀어막고 본대를 에워싸는 바람에 사문부터 장악하자는 계획은 어중간하게 틀어졌으나 갈라진 좌우익을 각각 맡은 하이바라와 나나미가 선봉에서 분투한 덕에 가까스로 시간에 맞추었다. 불길이 치솟았다. 대전의 근처에서 상국과 군기대신의 목이 날아갔다. 철과 불이 지난 자리에서는 거무스름한 비린내만 맴돌았다. 패란의 내부를 어느 정도 아는 황성의 장교들은 패란의 부사령관이 이따위 무식한 전법을 용인했을 리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불침십야의 발안자는 바로 게토 스구루였다.
천자는 수성 사십 팔 일 만에 성을 버렸다.
황성 장대에 새 깃발이 걸렸다.
*
황성 곳곳에 불냄새가 가득했다. 새것이 들어서는 냄새다. 새로 난 것이 온전히 서려면 옛것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편이 좋았으니 일련의 소각행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사람의 머리칼과 소맷동이 잘린 관복, 끊어진 죽간이 한 양동이 속에서 타올랐다. 분류 표찰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사람도 기록도, 불타고 난 후에는 모두 같아졌기 때문이다. 평온한 균등이었다.
타는 불을 지나쳐, 고죠는 황성의 어로御路를 거닐었다. 뭇 사람들이 조아려 예를 표했다. 즉위식을 치르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총사의 신분이었으나, 모두가 그가 곧 칭제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으므로 숙이는 이마는 마땅히 땅에 닿아야만 했다.
그러나 얻은 권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는 직선으로 걸었다. 군인의 보폭이었다. 사막의 전선에서부터 동고동락한 패란의 노병들은 황성의 강화 박석 위를 군영의 황무지와 다를 바 없이 거침없이 밟아 걷는 저희의 총사가 지존이 된다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치 못하는 듯했다. 하기야 당연지사였다. 누가 봐도 그는 여전히 소하의 제패자이자 사막의 제일인자인 고죠 사토루였지, 어전에 들어앉을 지존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좌보다 말 위가 더 어울렸으니 그릇의 크기나 됨됨이와는 별개로 그저 나기를 그런 모양새로 난 사람일지도 몰랐다.
입성 후에 변한 것은 되려 부사령관 게토 스구루였다. 그는 애초에 떠도는 귀병 출신이었으니 서쪽 소하에 있을 적에는 장교직에 오른 후에도 안면몰수 하지 않고 곧잘 사병들과 어울리거나 술잔을 기울이며 옛 유대를 다지고는 하였는데, 어쩐 곡절인지 입성 후에는 기세가 자못 달라졌다는 것이 공통의 세평이었다. 성년이 되기 전부터 어울리던 동년배 장교들조차 의아한 기색이었으니 지나가는 계절풍의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동쪽 전각에 처박혀 군무에 매진했다. 새 하늘이라는 것이 창검으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누군가는 죽간칠서 사이에서 옻냄새 풍기며 뒹굴어야만 했을 것이나, 그것을 고려해보아도 그의 불출은 과했다. 어쩐지 만사가 제 두 어깨 위에만 지워진 것처럼 구는 듯했다. 혹은 곧 떠날 것처럼 굴었거나.
그것을 고죠 사토루가 모를 리 없었다.
총사는 정전正殿의 낮은 계단 위로 훌쩍 뛰어올라 단숨에 문을 박찼다. 앞을 지키는 시위들이 고개를 조아렸으나 본체만체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옻냄새가 물씬 풍겼다. 빛이 들자, 어전의 비스듬한 그림자가 어렴풋이 움직였다.
“여기 있었네.”
낮이고 밤이고 동편의 습양전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가 보니 텅 비어있었던 까닭에 궁내를 한참 헤집고 다니다가 정전에까지 이른 참이었다. 고죠는 정전을 가로질러 곧바르게 걸었다. 어좌의 근처. 내력과 망령들 사이에서 게토가 고개를 들었다. 입매가 단정하게 움직였다.
흑색 장의를 간소히 걸친 차림이었다. 열린 문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반 틈밖에 닿지 않아서 낯빛이나 거동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그림자의 경계가 부드러웠으므로 아직은 내가 알던 그대로구나 싶어 마음을 놓았을 따름이다.
그가 배읍했다.
“폐하.”
고죠는 혀를 찼다.
“아서라, 집어치워.”
“왜, 곧 익숙해져야 할 텐데.”
“총사 소리가 그리워질지도 모르는데 미리서부터 들어 무엇하게.”
“그런가.”
그리워지려나. 게토가 사사로운 앞날을 가늠하는 사이에 고죠는 그를 지나쳐 거침없이 단을 올랐다. 옥좌에 주저앉았다. 평단과 좌 사이에 경사가 있었으니 자연스레 마주치는 시선이 비스듬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면서, 게토는 어렴풋이 웃었다. 상상 속에서 그려본 바와 과히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내려다보면서, 고죠가 고개를 기울였다.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그래 보여?”
“기분 탓인가.”
“사실 보전하는 게 이상한 거지.”
“알면 적당히 좀 해. 누가 쫓아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한 번쯤은 면박이 더 돌아올 만도 했는데, 옥좌 위는 어쩐지 고요했다. 게토는 너른 소매 끝을 매만지면서 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토루?”
그제서야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응. 목 울리는 듯한 대답이 돌아온 것도 같았다. 말을 시켜놓고서 다른 무언가에 골몰했던 모양이지. 고죠는 평소에도 종종 그런 식으로 대화 도중에 딴생각에 빠지고는 했으므로 게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시선을 돌렸다. 온 김에 사열식 순번이나 검토해달라고 할까.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한 긴장이 막 풀리던 참이었다. 그러므로 대뜸 던져진 질문은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떠나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
대번에 낯이 들렸다. 푸른 눈과 마주치자마자 생각보다 앞서서 문장이 뇌리에 떨어졌다. 네 번째다. 한 번은 사막의 병영에서, 한 번은 재 냄새 가득한 성곽 위에서, 이번에는 주인 잃은 어좌의 앞에서. 그리고…….
“그렇잖아. 분기에 걸쳐 해도 될 일을 고작 보름에 걸쳐 해치우려 하질 않나. 오월은 되어야 쓸만한 후보군이 추려질 신편제에까지 벌써 손을 대지 않나. 나나미한테는 벌써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지? 나도 다 안다. ……야, 갑자기 왜 말이 없어?”
게토는 말을 골랐다. 시선이 모서리에 괸 어둠 속으로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는데, 불시에 강습을 당하니 전모를 침착하게 전하기가 어려웠다. 입안에서 말들을 줄 세우면서, 게토는 낯을 들었다. 발끝을 돌려 마주 보았다.
“나는 여기 없는 편이 좋을 거야.”
“대뜸 그런 말을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내려다보니, 게토는 어느새 군복 차림이 아니었다. 팔목과 발목을 굳세게 조이던 검은 행전도 보이지 않았다. 빈출한 차림이었으나 너른 소매와 느슨한 목깃이 잘 어울렸다. 꼭 날 때부터 제도 사람이었던 것처럼.
“…….”
그 그림자에 문득 누군가 겹쳐 보였다. 어린 시절. 열 살도 채 되기 전의 이른 봄날. 쫓기던 소년. 흰 낯에 묻은 잿가루와 핏자국. 잡고 끌었던 마른 손목. 좁은 사인교四人轎 안으로 끼쳐오던 죽음의 냄새.
시선이 맞물렸다.
“폐하.”
그가 꿇었다. 너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말이 튀어나올 법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입술이 굳게 닫혀 움직이질 않았다. 반듯하게 예를 갖추어 배읍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신, 소하위 패란지군 서번중랑장. 황람 어전에서 사직을 청합니다.”
고죠는 그제서야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상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18년 전, 문원 6년.
담장 너머로 형장刑杖 치는 소리가 선뜩했다.
그해 제도에서는 들풀보다도 쉽게 사람이 죽어 나갔다. 능왕부의 역적모의가 조기에 발각되어 썩은 뿌리를 솎아내는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젠인의 다음 주인 나오비토의 고발로 의함이었으니 죄질은 더욱 엄하게 다스려졌다. 능왕비는 자결했고 솔정들은 옥사로 끌려갔다. 왕부의 식솔들 중 모반 의사를 시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부정하면 부정하는 대로 목숨은 으깨져 장작더미 곁에 버려졌다. 왕부의 담벼락에 까마귀 떼가 내려와 앉았다.
어사대의 수사망은 촘촘했으나, 원의 옥사에 끌고 들어온 이와 죽어 실려 나간 이의 수를 맞추어보니 딱 하나가 모자랐다. 명부와 사람을 예닐곱 번씩이나 대조한 끝에 도주자의 이름이 밝혀졌다. 능왕의 적장자, 아홉 살 짜리 소년인 게토 스구루였다.
어린 후계랍시고 왕부에서 작정하고 빼돌린 것이 아닌 이상 어린애 발품으로 일곽 이상을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어사대부는 각 출입문을 틀어막고 저자를 샅샅이 뒤질 것을 명령했다. 조력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공가의 도련님이 부릴 수 있는 잔재주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니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그러나 어쩐 곡절인지 사흘이 다 지나도록 소년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이는 사라졌다. 황성의 저자는 날마다 삼엄했다.
그 해는 명문세가 고죠 가의 적통, 고죠 사토루가 딱 열 살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예로부터 고죠 가에서는 적자의 열 번째 생일을 순탄히 지나 보내야 성년이 되기까지의 운수가 트인다고 믿어 생일이 돌아오는 해가 되면 변고가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말썽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생일날이 지나기 전까지 당사자를 섣불리 대문 바깥으로 나서지도 못하게 했으니 어린 공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공자의 생일이 까마득한 겨울이었던 탓에 생일을 지나 보내려거든 그해 내내를 면벽 수련하는 행자처럼 보내야만 했다. 차분한 문사의 자질을 타고났으면 모르되 천생 무인으로 난 기질과 성미로 폐관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담을 넘고 개구멍을 파고 기왓장을 깨 먹고…….
법석에 못 이겨, 결국 가문에서는 적어도 황성 저자를 지날 동안은 가마 바깥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약속을 붙여 소년의 짧은 외출을 허락했다.
능왕부의 참변이 나흘 차에 접어들던 날의 일이었다.
“째째한 노인네들. 고작 한나절을 뉘 코에 붙여?”
“공자님, 좀. 이것도 크게 선심 쓰신 거예요. 공자님이 하도 지…….”
“하도?”
“……답답해하시니까.”
“너 같으면 안 배기겠냐? 종일 방안에 처넣고 육도삼략만 달달달.”
“하여튼 뉘 집 공자님인지 배가 부르셔서는…….”
“뭐라고?”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아무튼간에 금방 움직일 테니 얌전히 계세요. 아시겠죠?”
어린 고죠는 대답 대신 길게 하품을 씹었다. 시중드는 측근이 한숨을 쉬며 발을 내렸다. 외성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 따르는 호위 중 하나가 등자를 끊어먹는 바람에 잠시 멈춰선 참이었다. 마구를 흥정하는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외출 준비를 한답시고 신새벽부터 수선을 떤 탓에 졸음이 쏟아졌다.
봄날 따스함에 취해 깜빡 잠이 들었나 싶었을 때 큰 소란이 일었다. 저자를 헤집고 달려온 말발굽 소리에 땅이 크게 울렸다. 저자 사람들의 숨 삼키는 소리, 가판이 흔들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고죠가 손을 뻗어 창에 드리운 발을 헤집으려는 순간,
죽음의 냄새가 끼쳐 들었다.
발을 걷으려던 손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목에 비스듬히 칼이 들어왔다. 이내 입이 틀어막혔다.
“……가만히 있어.”
어깨가 눌려 뒤척이자 갈라진 목소리가 윽박질렀다. 계집애? 아니다. 굶어서 품이 한참이나 박해진 사내애였다. 뼈대로 가늠해보자면 많이 쳐줘봤자 제 또래. 백주능라로 지은 옷자락에 검댕이 묻었다는 생각보다 숨소리가 한참 가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곧 눈이 마주쳤다.
사냥감의 눈이었다. 고죠는 그 눈을 알았다. 한참을 쫓기다가 마침내 막다른 길목에 몰린 육식동물들이 보통 그런 눈으로 노려보곤 했다. 공포와 죽음을 깨우친 자의 눈이었다. 칼을 들이댄 소년은 저를 경계하면서 바깥의 기색을 한참이나 신경 썼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르내리는 가슴팍, 흙먼지와 잿가루, 오래 지나지 않은 상처, 희미하게 맴도는 피냄새 같은 것이 다른 세상의 일만 같았다. 곧 추격자들의 기척이 느슨하게 멀어지자 고죠는 소년의 손목을 가볍게 건드렸다.
“뭐야?”
‘알겠으니까 이것 좀 놔. 잘못해서 그어버릴까 무섭다.’
“……놓아도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
눈짓으로도 대강 뜻은 통한 듯싶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자 곧 입을 틀어막은 손이 물러났다. 겨눈 칼날만큼은 그대로였다. 고죠는 웃는 낯으로 대뜸 입을 열었다.
“너, 능왕부에서 도망쳐 나왔지?”
“나를 알아?”
“그럴 리가. 하지만 제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짐작할걸. 왕부의 세자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며? 세자는 아마 진작에 어느 뒷골목에선가 급사했을 테고, 너는 그 동관이라던가 시종이라던가 하는 것이겠지?”
“…….”
“안심해, 일러바치진 않을 테니까. 네게 무슨 죄가 있겠어? 있다면 상전 잘못 만난 죄 정도일까. 나랑 같이 성 밖으로 가자. 태융관 근처에서 몰래 빠져나가면 아무도 모를 거야. 그다음에는 네가 알아서 해야겠지만.”
“…….”
“그러니까 이것 좀 치워.”
고죠는 겁도 없이 제 핏줄을 누르고 있는 날붙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발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황성을 빠져나가 살 길을 열어주겠다는 말이었으니 소년이 감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기라도 하면 제법 곤란하겠구나,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떠올리는 중에도 소년은 잠잠했다.
“왜 조용해? 설마 궁비병이 마차 안을 들여다볼까 봐?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이 몸은─”
“어떻게 장담해?”
“뭐?”
“세자가 죽었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냐고.”
“뭐야, 보기보다 충성스럽네. 상전이 업신여겨지는 것 같아서 화났어?”
“대답이나 해.”
“그러지 뭐. 능왕이 정말 역심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 평소에 아무리 인덕이 좋았대도 함께 도모한 이들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왕부가 풍비박산이 났는데 도와줄 이들이 있을 리가 만무하잖아. 세자가 어디에든 함부로 찾아갔더라면 이미 잡혀 저자에 효시 되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으니 여태껏 저자를 들쑤시는 것일 텐데, 곱게 자란 왕부의 세자가 민간의 길바닥에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가 있겠어?
“도와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누가?”
“…….”
“그럴 만한 작자가 있었으면 그런 추론도 않았지. 너 바보야?”
“잊고 있나 본데, 지금 칼을 쥔 건 나거든. 소리 지르기도 전에 숨통을 끊어놓는 수가 있어.”
“그래봤자 공멸이지, 뭐.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그런데 넌 살고 싶으니까 여기까지 뛰쳐 들어온 거 아니야? 혹은 죽어선 안 될 이유가 있었거나.”
소년의 낯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거 치우고 옆에 앉아. 옷이 더러워지잖아.”
날붙이를 든 손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거리가 조금 벌어져서 단정한 낯이 보다 눈에 잘 들어왔다.
그새 바깥의 소란은 가라앉아, 창밖에서 등자를 갈아 끼웠으니 곧 출발하겠노라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돌려주면서, 고죠는 곁으로 시선을 돌려 소년을 관찰했다. 충분히 어리석다면 분에 못 이겨 뛰쳐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소년은 의외로 잠잠했다. 맥이 풀린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포기한 것 같기도 했고,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넌…….”
가마가 들리면서 휘청였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결백을 믿는 거지?”
물음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칼날을 잡아내면서, 고죠는 빙그레 웃었다.
그 나이 또래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믿어.”
*
능왕부의 세자는 어느 날 내성곽의 골목길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썩은 목이라도 내걸어 욕보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적에 싸인 시체는 그대로 불길 속에 던져졌다. 누군가는 어사대가 아무 거렁뱅이의 시신이나 주워와 죽음을 위조할 방편으로 불태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공공연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능왕부의 적손들은 모두 ‘죽었다’. 그렇게 된 것이다. 훗날 있을 칭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죽음은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으니 역사에도 동일하게 적힐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 가득한 들판, 태융관 근처의 갈대밭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던 두 소년의 문답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비문祕文의 역사로 여기 이 자리에 존재한다. 기억하는 이가 존재하는 한, 있었던 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기억하는 이가 힘을 얻은 한…….
*
군하 원년. 연호가 갈리고 내각이 재편되는 내내 나라 안은 소란스러웠다. 기억하는 날마다 사람이 죽었다. 칼날과 짚불 사이에 목숨이 버려졌고 쓰이는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문자들이 불타올랐다. 흑단 소매들이 수없이 잘려나갔다. 정교한 금사 자수 표의도, 대화공의 관경변상도도, 고명문인의 유학 경전도 손짓 한번에 모두 쓸려나갔다. 불 속으로 떨어졌다.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상속할 것은 상속하고, 모호한 것은 뜯어고쳐 다시 쓰는 편이 효율적일 것이라는 진언은 그 제안의 정합성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묵살당했다. 예비된 천제天帝는 태초부터 만들고 쌓고 지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트리고 멸하고 태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듯했으니 그조차 당연했다. 아무튼간에 효율의 측면에서만 가늠한다면 소각의 정치를 최상의 책이라고만은 평할 수 없었을 것이나, 고죠가 아랫사람들을 솜씨 좋게 닦아세워 최종적인 결과 만큼은 유사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니 아주 대놓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무것도 없는 평지벌판에서 세워 올린 나라가 아닌 가로채어 탈취한 역성易姓의 나라였으니, 있는 힘껏 옛것들을 불태우는 편이 좋았다. 그렇다는 사실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나미 켄토도 그 모두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 새벽, 그는 자막대기로 잰 듯이 반듯한 걸음으로 박석 위를 따라 걸었다. 율령의 초안을 올리느라고 사흘 밤낮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견고한 걸음걸이였으므로 마주치는 사람들은 공손히 조아리고 나서 뒤 돌면 소맷자락 아래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 제명에 못 죽지.
그러한 탄식에도 나나미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제가 떠맡은 공무는 게토 스구루가 감당하던 양의 반절밖에 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따라서 부당함에 대한 분노보다 전임자에 대한 어처구니없음이 더욱 뚜렷하게 남았다. 그러면서도 그 반듯한 낯 위로 어떤 피로도 내비치지 않았다는 데에는 기겁을 넘어 존경심마저 들었다.
체계를 잘 다잡아 제가 감당하던 군공무를 자신과 하이바라, 그리고 소하 패란에서부터 함께 해온 노련한 장교들 몇에게 나누어 맡긴 게토 스구루는, 연호가 바뀐 해의 첫 등청일을 기하여 정식으로 사직했다. 개국공신 중에서도 급을 나누어 따진다면 단연 일등공신이었을 것이며 굳이 애쓰지 않아도 평탄히 왕작 정도는, 못해도 개국후(開國侯)의 위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었는데 돌연 낙향을 결심한 것이 어떤 까닭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직의 사유로 든 것은 몸의 지병으로 인한 고충이었으나…….
나나미는 미간을 매만졌다. 그 누구도 그의 박약한 핑계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고죠는 그의 사직원을 별말 없이 수리했다. 두 사람이 군신이기 이전에 각별한 벗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체신도 잊고 입을 딱 벌린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혹시 다툼이라도 있었나? 그렇다기엔 조하례 자리에서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밋밋했다. 읽기 어려운 낯이었다. 하지만 나나미는 관직을 거두는 지존황상의 낯에 알기 어려운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고 생각했다. 정작 게토 스구루는 이마를 반듯하게 땅에 대고 있었기에 보지 못한 것이었으나.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 끝내 알 수는 없었다. 예로부터 두 사람 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금지역(禁止域)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간직될 것이다.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 좋았다.
‘이제 가십니까.’
‘배웅 나온 거야? 상냥하네, 나나미.’
‘원망하러 왔다는 생각은 안 하시고요.’
‘하하.’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응.’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래?’
‘예. 충분합니다.’
갑옷도 관복도 모두 벗고 초야 재인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게토 스구루의 낯은 홀가분해 보였다. 무엇을 찾으러 가냐든가, 왜 떠나야만 하냐든가. 그런 것들을 묻고 싶었는데 그 얼굴을 보자마자 물음들은 새벽녘 등잔불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가끔 놀러와도 괜찮은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가세요, 해가 지겠습니다.’
‘응. 잘 지내.’
나나미는 목면 옷을 나부끼며 떠나가는 선진先進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한 나라를 폐하고 한 나라를 새로이 일으킨 남자가 이제 막 노을녘과 산자락 사이에 파묻히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은거를 안타까워할 것임이 분명했으나, 그들의 개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곡조는 잊혀야만 했다. 그 또한 대개의 초야 재인들이 그렇듯이 서서히 잊혀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모를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는 편이 좋았다.
그러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가 도성을 떠나 어느 산골짝엔 가로 모습을 감춘 지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때 즈음, 문제가 생겼다. 제도 공성전 당시 북문이 뚫리자마자 나라의 패배를 예감하고 도망쳤던 옛 황실의 장공주가 황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름을 바꾸고 얼굴을 지져 가까스로 살아남은 장공주가 돌아오자마자 한 것은 칭제도, 거병도, 탄원도 아니요, 도리어 고발이었다. 능왕부의 세자가 살아 있다! 고작 한 마디로, 제법 번듯한 기틀이 잡혀가던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 투서가 날아들고, 왈패들이 지껄이고, 장공주가 풀어둔 잡배들이 한낮 저자에서 살아 있는 세자의 적법한 계승권을 주장했다. 난장을 놓는 무명의 잡배들은 금군들이 몰려가면 금세 모습을 감추었으니 잡아들여 뿌리를 뽑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밤중에는 살수들이 활개를 쳤다. 세자의 초상화가 기백 장씩 나부꼈다.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화공의 필치가 확연했으니 모두가 알아보고 입을 모았다. 누가 봐도 그 얼굴은 소하위 패란지군 서번중랑장 게토 스구루였다.
정전 앞뜰이 소란했다. 날마다 그를 불러들여 목을 치라는 상소가 백여 건씩 날아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실관계 따위가 중요치 않았다.
*
“대……폐하도 참 답답하시다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인 것을.”
“좌장군께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여기시는 겁니다. 그리고 황상을 대장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부르기 직전이었는데, 눈치챘어? 그보다 예전처럼 부르라니까, 나나미.”
“예…….”
나나미는 다시 미간을 짚었다. 부름을 받고 편전에 들어보니 해맑은 표정의 좌장군-소싯적 동기인 하이바라 유우-이 들어앉아 반가운 낯색으로 웃고 있었던 탓이다. 정작 부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나란히 꿇어앉아 아무 수다나 떨면서 황제를 기다렸다. 물론 대개 떠드는 것은 하이바라 쪽이었지만.
“그래서 나나미는 왜 왔어? 뭐 잘못했나?”
“그럴 리가 있겠어. 용건이야 뻔하지.”
“뭔데? 부사령관님?”
동기의 속 편한 수다를 한참이나 듣고 있자니 제게도 말투가 옮아 자연스레 옛 버릇이 나왔다. 나나미는 이 자리에서 격을 차리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어깨에 힘을 뺐다.
“아마도.”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세자는 오래전에 죽었잖아. 장공주가 거짓말 하는 거 아냐?”
“뭐…….”
굳이 얼버무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입을 열자마자 황제의 입실을 알리는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나나미는 대답을 마저 잇지 못하고 기우뚱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렸다. 그러나 이럴 때만큼은 하이바라가 동작이 더 빨랐다.
“황상.”
“응. 편히 있어.”
조아린 머리 위로 지존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어쩐지 예상한 것보다 평탄한 목소리였기에 의아하다고 여기는 중이었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나나미는 숙인 고개를 미미하게 틀어 하이바라를 곁눈질 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는 와중이었는지 눈이 마주쳤다. 절을 물리고 옷자락을 가다듬으면서 두 사람은 고죠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기둥과 벽 너머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들이 여러 번 멀어져가는 것을 보니, 주위를 지키는 궁인과 시위들이 물러가고 있는 듯했다. 어느새 가늠해보니 주위가 고요했다. 바로 곁에 두는 측근들마저 모두 물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나미는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물리셨습니까?”
“눈치가 빨라서 좋다니까. 그래, 편히 얘기하려고 전부 물렸다.”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장공주에게 직접 손을 쓸 수는 없습니다. 덜미 잡아 끌어내는 것이야 폐문하고 들쑤시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민초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은 중도 세가들마저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니까요. ”
“걔가 그렇게 인기가 좋아?”
나나미가 대답하려는 순간 하이바라가 끼어들었다.
“멋있잖습니까!”
“하하.”
나나미는 한숨을 삼켰다. 어전만 아니었으면 발을 밟았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고죠가 말을 받았다.
“장공주는 계획적으로 노리고 들어왔어. 이야기만 전해 들었는데도 첫 고발 당시의 비장함이 마치 군웅할거 시대의 영웅같더군. 가면을 쓰고 붉은 띠를 매고 검은 상복을 입었다지? 어린 공주가 형틀 위로 뛰어올라 절절한 목소리로 황위찬탈의 역적놈들을 비난했으니 그 누가 가슴 설레지 않겠어. 게다가 스스로 칭제하는 대신 적손 중의 적손, 능왕부 세자를 거론하였으니 그 또한 영리했지. 능왕부는 사멸했대도 그를 남몰래 공경했던 이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이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복권파의 구심이 되었을걸.”
“그걸 아시면서─”
“그걸 아니까.”
고죠가 말을 자르고 웃었다. 나나미는 그 웃음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스구루 말야.”
이 이름이 나와야만 하는 자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되,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너희들은 어디 있는지 알지?”
“……폐하.”
“거짓으로 대답하면 기군망상의 죄로 다스리겠다. 똑바로 말해.”
돌연 편전이 얼어붙었다. 하이바라의 낯에서도 웃음기가 가라앉았다.
“정말 그분을 불러들일 작정입니까?”
“네게 말해줄 의무는 없지.”
“그 분의 거처를 말씀드리는 것에는 문제가 없사오나.”
“문제가 없으면 말해.”
“어쩌실 예정인지 일러 주십시오. 신들이 돕겠나이다.”
“그 누구도 돕지 못한다. 내가 매듭지어야 하는 일이야.”
사람의 속은 열 길 물 속보다도 깊다는데 그 짧은 몇 마디로 지존의 심중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그러나 서로 칼을 맞댄 세월이 길고 등을 맡긴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니 군신의 격과는 별개로 전우된 자로서 황제가 무언가를 결단 내리고 저희를 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대로 두면 위험하겠다고 여긴 나나미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폐하. 외침이 혀끝까지 굴러 나왔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하이바라가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공수했다.
“폐하.”
물을 맑게 하는 숯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폐하께서 뭇 사람들의 이간하는 말만을 듣고 섣불리 결단하실 것이 신들은 두렵습니다. 그분을 욕보이지 않고서도 장공주의 허언을 짓누를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자고로 진정한 벗의 사귐은 끊어진 현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꽃을 꺾고 뒤돌아 눈물지었던 미인의 고사를 떠올리시고 재삼 숙고하소서.”
사람이 모두 떠난 편전은 춥고 황량했다. 하이바라와 나나미는 섬돌을 밟아 내리면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결국, 금상이 명하는 대로 아는 바를 전부 실토하고 나온 셈이니, 허탈한 웃음이 샜다.
“밑천 다 털렸네.”
“그러게 누가 누굴 상대로 버티냐, 버티길.”
“부사령관님이었으면 어땠을까.”
“비교할 걸 비교해. 그보다 아까 그런 소리는 왜 했어?”
“응?”
“단금지교가 어쩌고 하는 거 말이야.”
“글쎄. 내가 만약 같은 입장이었더라면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길 바랄 것 같아서.”
“…….”
“가자, 나나미. 이후의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야. 폐하께서 현명히 결단을 내리시겠지.”
하이바라가 한가롭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어전에서 즉시 처결을 무릅쓰고 직언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겹쳐졌다가 곧 사라졌다. 저런 등을 지닌 이들은 왜 언제나 꼭.
나나미는 그 뒷모습을 잠깐 동안 바라보다가 곧 따라 걸음을 옮겼다.
*
늦겨울 계곡물이 녹아 물소리가 맑았다. 이틀 밤낮을 달려온 준마가 바싹 마른 목을 축이는 동안, 고죠는 행전을 다시 동여맸다. 직접 말을 달려 질주한 지 오래되었으나 실력이나 속도는 예전과 다름없었으니 스스로가 제법 뿌듯했다.
그는 고삐를 쥐고 천천히 계곡을 건넜다. 머지않아 평지에서 연기가 오른다 싶더라니만, 한참 위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올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건 또 뜻밖인걸.”
“영광으로 알아. 빈자리 틀어막고 오느라 고생깨나 했으니까.”
“그러게, 어떻게 자리 비워두고 왔네. 나나미는?”
“다 수가 있다, 수가.”
“사토루, 너 이제 천방지축 패란총사가 아니잖아. 이래도 돼?”
“시끄러워. 자리나 좀 마련해 봐.”
게토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바위 위에 피워두었던 모닥불 곁을 내어주는 시늉을 했다. 고죠는 바위 아래에서 팔을 뻗은 채 힘껏 도약했다. 암석의 튀어나온 부분을 잡고 그 위로 기어오르는 동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뭔가를 굽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숨에 그 위로 올라선 고죠가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른 낙엽이 두어 장 나풀거렸다. 게토가 보고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낯이 더욱 편해진 것 같기도 했다. 까마득한 소하 전장에서나 피비린내 나는 황성 안에서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이었기에 가슴이 아렸으나, 곧이곧대로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으니 소년 시절 처럼 볼멘소리를 주워 삼는 것으로 갈음했다.
“팔자 좋구만?”
“그렇지, 뭐.”
“뭐 굽는 거야? 나 줄 것도 있어?”
“없어도 어쩌겠어, 폐하께서 친히 납셨는데.”
“까불지 말고.”
“어디 보자.”
게토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뻗어 불 근처에서 뒹굴고 있던 고구마 하나를 굴려 왔다. 소매를 끌어 맨손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서 요령 좋게 탄 부분을 덜어내고 껍질만 남겨 반을 가르는 솜씨가 노련했다. 패란 군영에서 질리도록 구워봤으니 어련하겠는가. 옛 실력이 죽지 않은 것은 너도 마찬가지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그가 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더 큰 부분을 내밀었다.
“자.”
“……여전하네.”
“아무래도.”
고죠는 고구마를 받아 껍질을 까내리는 대신 건네준 사람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나뭇가지로 불티를 정돈하는 옆얼굴이 가지런했다. 양강도를 따라 진격할 적에 서려 있던 냉랭한 살기가 사라져 소탈하고 밋밋한 낯색이었다. 그 얼굴이 한참이나 그리워져서, 그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죠가 말이 없자, 게토가 모닥불을 들쑤시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처음부터 못 알아봐서 미안해.”
“어라.”
“네가 너무 많이 변했어. 그 땐 비쩍 마른 시궁쥐 꼬맹이였잖아.”
“대놓고 욕을 하네.”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네가 그때 걔라고.”
“어떻게 그래. 당연히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지.”
“한 번도 잊어버린 적 없는데. 되려 언젠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태융관 앞에서 약속했잖아. 궁금했거든. 어떻게 날 세 번이나 살려 주겠다는 건지. 세 번이나 살려주려면 세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보통 사람이 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그래서 부러 날 찾아와서 고비를 만들어주려나 싶었지.”
“사토루,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란히 웃음이 터졌다.
“그런 건 아니고. 해명을 좀 해야겠네. 일단 그땐 나도 치기 어렸고.”
“오호.”
“조용히 해. 그리고 넌 보통 사람이 어디 그러기가 쉽냐고 말했지만 살다 보면 사람은 반드시 죽을 위기를 최소 세 번은 겪게 되기 마련이야. 부지불식간이라도 말이지. 너 같은 사람은 더더욱.”
“나 같은 사람?”
“남의 위에 서지 않으면 고꾸라져 짓밟힐 사람 말이야.”
게토가 고요히 웃고서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고작 아홉 살 어린아이였지만 마차에 실려 태융관 까지 가는 동안 너희 집안 표식을 내내 못 알아 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 집안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내애가 총민하기로 유명했으니 네가 누군지 아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고.”
불가에서 조용하게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고죠는 어쩐지 그의 말투나 어조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옛스러운 운율이 묻어나왔다. 어쩌면 그가 평생토록 이것을 숨겨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황상은 의심이 많으시고……. 또 모반의 씨앗이 될 만한 것들은 조기에 눈 밖으로 치워버리는 분이시니까. 네가 자라면 언젠가 변방으로 쫓겨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우리 왕부 처럼 되기 전에 말이야.”
“고작 몇 시진 본 것만으로도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당시 반쯤 멀어있던 내 눈에도 너는 이역만리 파사국에서 고르고 골라 바쳐 올린 취옥 같아 보였는데, 남의 눈에는 또 어지간했겠나. 귀한 보석은 되려 가장 먼저 팔려가는 법이지.”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극상의 칭찬인지 가차 없는 세평인지 가늠하느라 고죠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서쪽 변방일지 북쪽 변방일지 고르는 것은 반쯤 도박이었는데, 반쪽짜리 확률의 도박에서 실패한다면 운명이 아니겠거니 하고 여겼어.”
“그런데 성공했네.”
“그랬지.”
“나라면 네 염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건가?”
“글쎄, 그보다는 네가 살 길이 내가 바라는 길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고 믿었어. 나는, 정말이지……. 이 왕조의 유산이라고는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았거든.”
그는 어느 겨울날 성곽의 옥개석 위에서 지새웠던 밤을 떠올렸다. 바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저 올바르게 짓밟아 나아가는 것. 불사르고 베어넘겨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 계승하거나 이어받지 아니하고 절단하고 으스러트려 기원도 조상도 찾지 못하도록 하는 것. 군사가 그의 장군에게 속삭였던 염원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모든 율법을 폐하고 거듭나게 하라. 본디 부수는 것보다 짓는 것이 더욱 지난하고 어려운 일이라고는 하지만, 궁극의 경지를 요구하는 결벽적인 파괴에 이르러서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것을 복수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잣대로 가늠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나, 그것은 과연 어느 황폐한 나라의 잣대이겠는가. 게토 스구루는 정의를 바로 세우고 억울한 원을 풀어 한 많은 혼을 구제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사실을 바로잡아 죽은 이들의 명예를 되돌리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한 번 죽은 이는 다시 죽지 못하니, 원수들의 목을 잘라 제단 위에 바친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와 영광을 지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왕조를 배반하는 대신 저 자신을 위해 앞도 뒤도 전부 불살라 평평하게 다지고자 하였다. 그가 겪은 삶과, 또 그가 겪은 죽음을 같은 높이로 깎아내리고 있었던 일들을 전부 무의미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어린 목숨이 가까스로 견딜 만한 것이 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려거든 어느 까마득한 지옥을 견뎌야만 했을까?
고죠는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너 자신조차?”
그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를 살게 두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었어? 그저 이런 식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초야 재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허락할 수 없는 거야?”
직접 자신의 초상을 그리고, 사람을 사서 장공주를 찾아내고, 자금까지 지원했지. 너를 고발하라고 말이야. 그래서 이 세상에 네가 있을 자리를 한 구석도 남기지 않으려고 말이야. 가지고 떠났던 보물패화는 다 어디로 갔어? 내가 준 반지가 왜 저자 보석상에 아무렇게나 떠돌아다니지? 그걸 되사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 네가 너 스스로 숨통을 조이다 못해 기어코 남의 손을 빌려 목을 매고 있다는 걸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내 기분이 어떠리라고 짐작은 해봤어? 그 잘난 머리로 말이야.
누름돌로 눌러둘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말들이 열린 창 너머로 불어 드는 바람에 나부끼는 습자지들처럼 속 안에서 어지럽게 떠돌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어 둘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미안해.”
“…….”
침묵 속에서,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손끝이 와 닿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능왕부의 적손 세자는 시끄럽게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새 왕조는 옛것을 수호하는 자들의 고집으로 한바탕 몸살을 앓아야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것을. 그의 충실한 벗이자 가장 뛰어난 우군, 둘도 없을 지기 게토 스구루가 그 필연적인 몸살을 가장 완만한 모양새로 준비해다가 그의 칼날 앞에 바쳐 올렸다는 것을. 하나밖에 없는 지음지기의 목숨은 완전한 마침표가 되어줄 것이다. 그가 죽으면 장공주의 외침은 금세 힘을 잃을 것이고 어린 공주의 비장함에 조금이라도 걸음이 흔들렸던 비겁자들마저 일소할 수 있을 테니 그의 핏자국을 딛고 일어선 새 왕조의 뼈대가 얼마나 견고하겠는가.
그가 느린 자살에 자신을 다정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 이전에 스스로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파멸의 역사를 고죠 사토루라는 남자를 위해 부분적으로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놓여있다는 것 또한…….
돌이킬 수 없이 알았다.
“……이거 돌려줄게.”
고죠는 장터에서 되사온 은지환을 내밀었다. 게토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다소 민망한 듯한 웃음기가 번졌다.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를 걸었으나 그 표정을 보니 정말로 팔아치운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어디서 찾았어?”
“삼패마을 도자전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되사왔지.”
“팔아서 미안해. 사정이 좀 있었거든.”
게토는 은지환을 받아들면서 그것을 판 값으로 기적(妓籍)에서 빼낸 어린 여자애 둘을 떠올렸다. 모질게 태우고 부수어 검은 평야로 만들겠노라고 다짐하면서도 어린 풀씨들을 지나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렇게 한 구석이 무른 마음으로 뿌리내린 곳이 하필 네 곁이어서 이렇게 맺음이 기구하다.
“너 이 반지가 뭔지 정말 몰랐구나?”
“……무슨 반지인데?”
“아냐, 모르면 됐다.”
“알려줘, 마지막이잖아.”
마지막이라는 말에 손 끝이 일순 멎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대답 대신 고죠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모닥불이 다 식어 있었다. 게토는 그를 따라 일어서는 대신 평탄한 낯으로 먼 산하 풍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포기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고죠는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벗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이지, 사토루─.”
황제는 계곡에서 꼬박 나절을 더 머물렀다. 손수 세운 묘소에는 비석도 봉분도 없어 무덤가를 구별하기는 힘들었지만, 벗이 그것을 바랐으므로 더 손을 대지 않았다. 늦겨울 야산은 황량하고 고요해 묘소가 빈한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굽다 만 고구마를 두어 개 앞에 두고 앉아 길고 긴 작별인사를 건네고 보니 어느덧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내려와서 보니 유순한 준마가 주인을 기다리면서 빈둥이고 있었다. 황제는 고삐를 잡고 말을 이끌어 달랬다. 말이 몇 번 투레질 끝에 주인을 따라나섰다. 그가 떠나자 계곡은 완전한 적막에 휩싸였다. 곧 내리던 눈이 눈보라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이 멎으면 그 위로 모든 것이 새로 쓰일 것이니,
눈이 그치기 전까지는 울어도 좋았다.
소하의 용은 계곡에 잠들고,
삼계의 신은 그의 눈을 감긴다.
한 번 죽은 이는 다시 죽지 않기에,
사랑은 영원히 침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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