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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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기담
1894년 10월의 어느 날 밤. 도쿄 센다가야에서 출발한 인력거는 빈터를 크게 돌아 요요기 근처를 향해 내달렸다. 늦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가 점점 거세어기 시작한 참이었으므로 거리의 인적이라곤 이따금 지나치는 야경꾼 외에는 없었다.
한참을 달린 인력거가 어두운 골목을 돌아 거의 다 쓰러져 가는 반찬가게 옆, 낡은 서책방 앞에 멈춰 섰다. 인력거꾼이 도착을 알리자, 자리에 푹 기대어 있던 손님이 몸을 일으킨다. 정말 여기가 목적지가 맞느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한 인력거꾼에게 본디 주어야 했던 삯보다 웃돈을 얹어준 손님이 우산을 펼치고 도로변에 내려섰다. 우의 아래로 고급스러운 양장 소매가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마지막 일거리를 잘 골랐다고 여기면서, 인력거꾼이 연거푸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빗속으로 달려 나갔다. 인력거 바퀴 구르는 소리가 금세 멀어져 갔다.
혼자 남은 손님은 서책방의 낡은 분합문을 열고 층계참을 올랐다. 걸음마다 낡은 목계가 삐걱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훗날 불야도시가 될 신주쿠도 이때에는 아직 일몰 후에는 인적 드문 변두리에 불과했다. 어차피 듣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곧 그가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기 전의 눅눅하고 초라한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건조하고 정돈된 공기가 풍겨왔다. 측백나무에 사향을 가미한 향료. 모로코산 양탄자를 밟자마자 쨍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아달베르타? 삼 주 전에 이미 당신 차례가 지나갔어.”
“미안. 옛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이바라키에 다녀왔거든.”
“당신의 옛 친구?”
“그렇군. 그에 대해서는 내가 말한 적이 없나 보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어. 다들 앉을까.”
회장이 티스푼으로 잔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삼삼오오 모여 있던 회원들이 저마다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낮은 등잔불 아래로 붉은 잔이 일렁였다. 시나브로 야회의 시작이었다.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뭉툭한 침묵이 비로드 원단처럼 좌중에 내려앉으면 이윽고 이야기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다들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즐기느라고 나 같은 건 잊어버렸을 줄 알았더니, 기다린 이들이 있는 모양이더군. 고맙게도.”
으레 서설은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된다. 회장에 한 차례 웃음소리가 흘렀다.
“오늘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들어주길 바라네.”
이윽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십칠 년 전 대정봉환이 있었던 직후 소바요닌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난부 아키후사를 기억하는 자들도 있겠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지만 그의 아내는 여기 있는 대부분의 이들과 같은 귀종이었어. 평범한 필부와 귀종이 어찌 가약을 맺고 서로를 배필로 여길 수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일이지만, 부부의 금실은 이야기 속 요시츠네와 시즈카 고젠 못지 않게 좋았다고 전해진다네.
하지만 그들의 운명마저 가마쿠라의 비극적인 연인들을 답습하였는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난부 아키후사는 폐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그의 아내만이 홀로 남았지. 사람의 생은 짧고 덧없어 스쳐 지나가는 계절 같은 것에 빗댈 만하지 않나. 눈 감았다 뜨면 어제 피었던 목련이 오늘 지고 조금 전 밟았던 첫눈이 녹아 개울을 이루는 것을 여기 모인 모두가 익히 겪어 아는 바일 테야. 성자필쇠와 생자필멸의 흐름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이치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벗은 그러한 이치를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어.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첫 구절*을 자다 깨서도 틀림없이 외는 자가 말이야. 나는 그가 남편의 죽음 후에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가 비석 된 모양으로 묘 옆을 지키고 있다는 말에 이바라키로 향했어. 오랜 친구인 내가 좋은 말로 설득하면 마음을 돌이킬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이바라키에 도착한 내게 그는 뜬금없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시를 맞춰보라고 하더군. 그렇게 하면 내 말을 듣겠다면서 말이야.
그곳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났지만 나는 맞추지 못했어. 그가 일부러 정답을 듣고도 고개를 젓는 게 아닌가 의심마저 들던 참이었지. 닷새째가 되었을 때 나는 그의 방식에 맞춰주는 것을 포기하고 도쿄로 돌아가거나, 혹은 그를 억지로 그곳에서 끌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날 새벽의 대면이 끝나면 둘 중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한 참이었지.
왕안석에서부터 백인일수에 나오는 단가들까지 빠짐없이 대보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어. 곧 동이 틀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단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네.
그때 등 뒤에서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나는 떠나고
그대는 남으니
두 번의 가을이 찾아오네 **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어. 이윽고 목소리가 한 번 더 낭송하더군.”
가을바람에
살아서 서로 보는
그대와 나 ***
“마주 앉아있던 벗의 표정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네. 이바라키에 도착한 이래로, 아니. 알게 된 이래로 그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어.
목소리는 내 등 뒤에서, 그러니까 막 새벽 볕이 들어오고 있는 차양 너머에서 들려왔고, 곧 그는 그 볕을 향해 달려 나갔다네.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말이야.”
아달베르타가 이야기를 끝내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는 구태여 결말을 서술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이후 그의 벗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모인 이들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름답지만 어리석은 이야기지.”
침묵 속에서 아달베르타가 미소 지으며 손끝을 모았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손을 들고 물었다.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 같으냐'고. 질문에 아달베르타가 웃었다.
“글쎄, 그 누구도 미래의 일을 쉽게 단언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하나라네. 필멸할 것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대가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
* 기원정사의 종소리, 제행무상의 울림이 있나니. 사라쌍수의 꽃 빛깔은 성자필쇠의 이치라. 교만한 자 오래가지 않으니, 다만 봄밤의 꿈만 같고 용맹한 자도 마침내 사라지니, 한 줄기 바람 앞의 티끌과 같다.
** 요사 부손
*** 마사오카 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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