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의 여름은 끔찍했다
아줄 아셴그로토
그해의 여름은 끔찍했다. 높은 습도, 내리쬐는 볕, 변덕스러운 날씨까지. 쏟아지는 비도 불어오는 바람도 죄다 미적지근하고, 밤이 되어도 열기가 가시지 않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솥 안에 갇힌 것만 같은 나날들.
얼른 학기가 끝나고 홀리데이가 오면 좋겠다. 이 계절이라도 자신들의 고향은 서늘하겠지. 그런 기대를 품은 채 기숙사 안에만 박혀있기 일쑤였던 인어들은 해가 지기 전에는 바깥으로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법이기도 했다.
‘오후 4시인데도 이런 날씨라니.’
아줄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 해를 보며 혀를 찼다. 한창 더울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열기가 넘실거리는 땅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얼른 기숙사에 들어가 쉬고 싶다. 홀리데이까진 며칠이나 남았더라. 오늘부터 판매되는 여름 한정 메뉴는 잘 팔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최대한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갈림길 즈음에서 뜻밖의 메시지를 받았다.
“음?”
수신한 메시지에는 현자의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담겨있었다.
유리를 부숴놓은 듯 반짝이는 해변의 모래들, 잔잔한 파도와 푸른 하늘. 그리고 얼핏 보이는 익숙한 그림자까지.
직접 찍은 듯 보이는 사진 아래에 적혀있는 건 짧은 메시지였다.
[예쁘죠?]
확실히, 잘 찍은 사진이다. 찍은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면 어딘가에서 가져온 사진인 줄 알았을 거다.
스마트폰 위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내용을 확인하던 그는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멈칫했다.
‘여긴, 분명…….’
이 특이한 형태의 바위를 보아하니 사진을 찍은 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다. 자신도 아이렌과 함께 몇 번 가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다. 눈이 부셔서 가늘게 뜬 눈으로 사진을 관찰하던 그는 답장을 보내는 대신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라면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더위에 걷는 건 싫지만, 그는 어쩐지 아이렌이 양산도 하나 없이 해변을 누비고 있을 거 같아 기숙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더위에 강하다 해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제가 갔을 땐 이미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없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비효율적인 일이나 득도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이 끔찍한 더위 때문일 거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이런 여름날엔 이성이 흐릿해지기 마련이니까.
‘역시나.’
땀이 뚝뚝 흘러내리는 더위를 뚫고 얼마나 걸었을까. 사진 속에서 보였던 풍경과 함께 찾고 있던 이가 보인다. 아줄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친 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멈춰서서 아이렌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스마트폰만 들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아이렌은 파도가 부서지는 젖은 모래 부근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내리쬐는 볕이 덥지도 않은 건지, 신발은 어딘가에 벗어둔 채 맨발로 바닷물을 밟고 있는 아이렌은 꽤 즐거워 보였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고, 멈춰서서 사진을 찍고, 가끔은 좀 더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이란 얼마나 경쾌한가.
‘혼자만 다른 세상에 계신 것 같군.’
아이렌이 더위에 강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스카라비아의 사막에서도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맑은 눈빛으로 광활한 모래 언덕을 바라보고 있던 건 그뿐이었으니까. 대신 추위에는 끔찍할 정도로 취약하긴 하지만, 원래 사람이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는 법이지 않던가.
‘……저러다 더위라도 먹으면 안 되는데.’
사람의 몸이라는 건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얼마나 아픈지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해 치료 시기를 놓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더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견딜만하다 생각했는데, 몸에 무리가 가서 쓰러지는 학생도 봤으니까.
“아이렌 씨.”
파도 소리가 잔잔해서일까. 아니면 제가 좋아하는 것에는 늘 귀를 기울이고 있어서일까. 아줄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아이렌은 금방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배,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보내주신 사진을 보니, 어디인지 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실 거였다면 말씀해 주시지……. 길이 엇갈릴 수도 있었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제가 갈 동안 아이렌이 해변을 떠나지 않을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이렌은 인간임에도 기묘할 정도로 바다를 좋아했고, 한번 해변에 가면 1시간 정도는 거뜬히 머물렀으니까. 사진을 찍거나, 발을 적시거나, 가져온 책을 읽거나 하면서 말이다.
아줄은 제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아이렌을 가볍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금기 어린 미네랄 향을 휘감은 상대의 피부는 오후의 볕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 둘러보실 겁니까?”
“아뇨. 오늘은 놀 만큼 다 놀았어요.”
“그렇군요. 그럼 같이 돌아갈까요?”
신사적으로 손을 내민 아줄은 단정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더워서 고생했다는 생각은 도무지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잘 꾸며진 미소였다.
파도를 매만진 손을 손수건으로 닦은 아이렌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상대와 손을 겹치며 물었다.
“선배, 시간 있어요?”
“예?”
“제가 한잔 살게요, 같이 시원한 거 마시고 갈래요?”
그러니까, 이건 데이트 신청인가.
이런 행운까지 생각하고 상대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찰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때로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건가.’
언제나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는 작은 결정도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를 생각하며 행동했다. 그렇기에 단순히 상대가 어디 있는지 알겠다는 이유만으로 발길을 옮긴 지금은 아이렌과 만나서 단둘이 있을 시간을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는데, 이렇게까지 좋은 기회가 올 줄이야.
아이렌의 손을 꼭 맞잡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사겠습니다. 가죠.”
오늘의 더위 또한 여느 때처럼 끔찍하니, 음료수가 더 달고 시원하게 느껴지겠지.
아줄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며, 모래밭을 앞장서 나갔다.
교류해시 추천으로 #트친이_주는_첫문장으로_글쓰기 <-이거 받아서 쓴 글 1호.
남은 두 개도 열심히 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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