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드림] Offertorium
커미션 작업물
체르니의 방에는 오로지 적막 뿐이었다. 오선지 위에 악상을 그려내느라 사각거리는 만년필 소리와 악곡이 올바르게 새겨졌는지 가늠하기 위해 울리는 피아노 소리를 제외하고는. 체르니에게 그것들은 응당 존재해야 하는 소리였으니 적막의 범주에 끼지도 않았다. 심지어 오늘은 그에게 성화를 부릴 메딕 오퍼레이터들도 없었다. 이번 작곡을 위해 향후 2주간 방 안에 틀어박혀 어떤 생활패턴으로 하루하루를 보낼지에 대한 내용을 3주 전부터 의료부에 소상히 보고한 탓이었다. 그의 보고서 겸 요청서를 본 메딕들은 여기가 개인 병실인 줄 아냐며 불같이 화를 냈지만, 작곡이 끝나는대로 반 년은 의료부의 지시를 철저하게 따르는 등의 조건 하에 대화는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으며, 일부 메딕들은 그가 이렇게라도 협조적으로 나오는 게 어디냐며 체념 섞인 감탄을 뱉었다.
그렇게 할 정도로 이번 곡은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혈관 하나하나를 타들이는 혼신을 쏟아야만 완성이 될 곡이었고, 그의 피를 혈구 단위로 쪼개 구상해야만 그가 납득할 수 있는 완성도가 나올 곡이었으니까.
그저 난이도적인 측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완성될 곡을 헌정받을 존재 때문이 더 컸다.
피아노 위에서 자신의 손을 가로로 벌린 체르니는 건반과 건반간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고 곧 다섯 손가락의 전체적인 너비를 천천히 줄여 가며 최초에 구상했던 곡조의 구성을 손보기 시작했다.
원하는 멜로디를 필요한 구성 그대로 적어내는 일도 작곡에서는 중요한 일이었으나, 헌정곡이라면 무릇 연주자의 기량에 맞춰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기량에는 곡을 연주할 이의 기술적 현황뿐 아니라 신체적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작곡시 이를 반영하는 건 당연했다. 음들은 체르니 본인의 손이 아니라 곡을 받을 박사의 손너비에 맞게 설계되어야만 했다.
오랫동안 악기를 만져오고 근래에 들어선 아츠 도구와 전투 현장까지 손에 담아 온 엘라피아의 손가락이 박사의 손 크기에 맞춰 건반과 건반 사이를 오갔다. 펜을 쥔 나머지 손이 그 움직임에 맞춰 수정된 화음을 오선지 위로 적어내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양 감탄, 혹은 대견하다는 듯한 뉘앙스를 띤 목소리가 그의 반 뼘 너머에서 울렸다.
“내 손 크기를 잘 알고 있네, 체르니.”
자신을 위해 수많은 검진과 빡빡한 스케줄조차 감안하며 작곡에 매진하는 이에게 건네는 말은 응당 부드럽거나 상냥해야 했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은 그런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축축한 빗줄기가 쏟아내릴 때 들릴 법한 음성. 온 초원을 늪지로 변하게 하고, 그 사이로 번쩍이는 벼락과 기이한 천둥이 울려 퍼지는 듯한 음산한 여성의 저음이 이해할 수 없는 화음처럼 체르니의 귓가로 와 닿았다.
그는 펜을 쥔 자신의 손목 위로 가지런한 소름이 돋았음을 깨달았으나, 건반과 악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게 음악 선생이니까요.”
“좋은 선생을 뒀지, 내가. 당신의 가르침에 늘 감사하고 있어.”
박사의, 헤리티지의 답은 진심 어린 감사를 담고 있다는 듯 매끄러웠으며 정말로 그렇다는 걸 표현하듯 방금까지 체르니의 손이 지나친 건반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벌려진 박사의 손가락 너비는 체르니가 계산한 것과 꼭 맞았고, 그래서 그가 의도한 변형된 곡조를 충분히 수월하게 담아냈다.
그 모습을, 자신의 머릿속이 만들어낸 환영과 헤리티지의 깨진 눈 너머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체르니는 온 힘을 다해 만년필을 쥐었다. 헛웃음을 뱉는 대신 과찬이시군요, 라고 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나오진 않았다. 체르니라는 인간은 어떻게 해도 빈말은 뱉지 못하는 성품이었고 그건 박사에 대해서도 매한가지였으니까.
가르침, 가르침이라. 그는 박사가 택한 단어를 웃기지도 않는단 듯 중얼거렸다.
그의 부탁으로 체르니가 그에게 피아노 연주법을 알려줘 온 건 사실이었다. 지금의 작곡도 박사의 기량에 완벽하게 맞는 연습곡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체르니는 이게 가르침이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투쟁이었다. 헤리티지라는 인물에게 집어 삼켜지지 않기 위해 그가 발버둥칠 수 있는 수단은 음악 뿐이었으므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감겨오는 것처럼만 보이는 손가락에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부릅뜬 눈에 피로가 얽혀감을 깨달았으나, 그렇기 때문에 체르니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다음번 악장으로 넘어갔다. 건반을 가늠하고 때로 두드리는 손과 사각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 모습을 피아노 뒤켠에서 턱을 괴며 헤리티지가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폭풍. 벼락이 번쩍거리고 천둥이 아우성치며 빗줄기가 질척하게 땅을 침범해 내리는 폭풍 속에 서 있는 감각이 체르니를 세차게 내리쳤다. 메딕들에게 양해를 구해가면서까지 밀폐한 방 안임에도, 지고한 개념인 음악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었음에도 그랬다.
로도스 아일랜드에 도착한 이래로 체르니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폭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때로는 눈앞의 전투에 집중했고, 때로는 그가 오래간 밀어두었던 연구에 집중해 보기도 했다. 다른 오퍼레이터들과 박사에 대해 토론해 보기도 했고, 몇 차례나 박사와 직접 대담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깨달았다. 왜, 어떻게 해서, 어떤 사유로 인해, 그것들을 그가 알 날은 오지 않으리란 걸. 이 이동식 함선의 누가 박사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며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 닥터 켈시조차 고개를 저었는데. 이해는 무의미하며 그에게 허락된 개념조차 아닐 터였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재해와도 같은 존재에게 자아를 뿌리뽑히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으며 그를 그라는 객체로 존재하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붓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작곡이란 비정형을 형상으로 구현해내는 행위.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의 영혼의 일부를 떼어내는 대가가 수반되는 것. 자신의 영혼을 떼어내던 체르니는 문득 이 작곡이 ‘작곡’이 아니라 다른 어떤 오래된 개념과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곡은 어떤 곡인가. 한 인간이 압도적인 재앙 앞에서 무력하게 발버둥치기 위해 스스로를 깎아 바치는 이 곡은 무엇인가?
답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고 체르니는 써내리던 모든 소절을 멈추고 백랍 같은 낯으로 오선지의 가장 위에 곡의 이름을 써붙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헤리티지의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그는 체르니의 이번 곡을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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